샤흐르바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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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33대 샤한샤
شهربراز |샤흐르바라즈
제호
한국어
샤흐르바라즈
페르시아어
شهربراز
영어
Shahrbaraz
존호
샤한샤
본명
파루칸(Farrukhān)
생몰 년도
? ~ 630년 6월 9일
재위 기간
630년 4월 29일 ~ 630년 6월 9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사산 왕조의 제33대 샤한샤. 호스로 2세의 부하로서 한때 로마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실패 후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꾸리다가 630년 아르다시르 3세를 살해하고 샤한샤로 등극하지만 곧 살해되었다.


2. 생애[편집]


샤흐르바라즈(Shahrbaraz)는 '제국의 멧돼지'를 의미하는 칭호로, 멧돼지조로아스터교에서 승리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이자드 바흐람과 관련된 동물이다. 그의 탁월한 지휘력과 호전성이 멧돼지와 같다 하여 이와 같은 별명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본명은 파루칸(Farrukhān)이라고 한다. 그는 파르티아의 7개 귀족 가문중 하나인 미흐란 가문의 일원으로, 호스로 2세의 여동생 미흐란과 결혼하여 샤푸르 샤흐르바라즈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또한 니키타스라는 이름의 또다른 아들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미흐란인지, 아니면 다른 여자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성년이 되었을 때 사산 왕조군에 입대하여 에란의 스파흐베드(Spahbod: 군대장)가 되었다. 602년 11월 동로마 제국에서 포카스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고 새 황제에 즉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호스로 2세는 자신을 복위시켜준 은인 마우리키우스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쟁을 단행했다. 그는 호스로 2세의 지휘하에 604년 다라와 에데사를 정복했고, 뒤이어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탈환했다. 동로마 제국에게 넘겼던 영토를 전부 되찾은 후, 호스로 2세는 최고 지휘관들에게 군사 작전을 넘긴 뒤 자신은 크테시폰으로 돌아갔다. 샤흐르바라즈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607년 다른 장수들과 함께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여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갈라티아 등지를 모조리 휩쓸었다.

610년 포카스를 죽이고 새 황제가 된 이라클리오스는 612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지중해 연안에 도달한 사산 왕조군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13년 안티오키아 인근에서 샤힌 바르마자데간에게 패배하면서 시리아 마저 상실했다. 이후 사산 왕조군은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의 최고 성유물성십자가크테시폰으로 입송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너편의 칼케돈에 도달하여 격울 숙영지를 건설했다. 618년, 호스로는 샤흐르바라즈에게 여세를 몰아 이집트를 공략하라고 명했다. 그는 곧장 이집트로 진격하여 니키타스의 격렬한 저항을 격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했고, 621년경엔 나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를 대부분 장악했다.

그러나 622년, 이라클리오스가 전열을 재정비한 뒤 카파도키아에 공세를 가하는 걸 막으려 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시리아의 많은 영토를 도로 내줘야 했다. 이라클리오스는 623년 초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다시 한 번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이라클리오스는 사산 왕조군의 추격을 회피해 타프수스 산맥을 돌파하여 메소포티마아로 진격했다. 그는 간자크에서 페르시아 궁전을 파괴하였고, 주변의 도시들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이후 크테시폰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샤흐르바라즈가 보급로를 차단하자 카스피 해의 서쪽 해안으로 철수했다. 그는 624년 반 호수를 돌아서 아르사니아스 강을 따라 약 320km를 내려가 마티로폴리스와 아미다를 점령했다.

625년, 이라클리오스는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다가, 아다나 북쪽에서 샤흐르바라즈의 사산군과 맞붙었다. 처음에는 사산 왕조군이 동로마군의 선봉대를 격파하면서, 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자 이라클리오스가 직접 날아오는 화살을 무릅쓰고 말을 몰아 유프라테스강을 도하한 후 적군을 도륙했고, 이에 사기가 오른 동로마 장병들의 맹돌격으로 페르시아군이 무너졌다. 샤흐르바라즈는 이 광경을 보고 이라클리오스를 일전에 배신하고 사산 왕조군의 향도 노릇을 하던 그리스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황제를 봐라! 그는 화살과 창을 모루처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결국 이라클리오스는 사산 왕조군을 물리친 뒤 트레비존드로 후퇴했다. 이렇듯 이라클리오스가 메소포타미아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자, 호스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끝장을 내기로 작정했다. 626년, 샤흐르바라즈는 샤한샤의 명령을 받들어 아바르족과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했다(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대와 시민들은 맹공을 퍼붓는 아바르족을 상대로 결연한 각오로 끝까지 싸웠고, 동로마 함대는 사산 함대를 섬멸해서 사산군이 바다를 건너 수도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아바르족은 거듭된 패전에 지쳐 돌아갔다. 샤흐르바라즈의 군대는 칼케돈에 여전히 진을 치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627년, 이라클리오스가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자, 호스로 2세는 샤흐르바라즈에게 당장 복귀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서신을 가지고 가던 전령은 도중에 이라클리오스에게 붙잡혔다. 그는 "거기서 계속 머물고 있어라"라는 명령서로 위조한 뒤 다른 전령을 샤흐르바라즈에게 보냈고, 샤흐르바라즈는 이를 믿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샤흐르바라즈의 구원군이 오지 않았고, 메소포타미아는 속절없이 로마군에게 파괴되었다. 호스로는 다시 전령을 보내 크테시폰으로 오라고 했지만, 샤흐르바라즈는 일이 틀렸다는 걸 눈치채고 아수리스탄으로 간 뒤 거기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호스로는 파루크자드를 보내 크테시폰에 구원하러 와주면 크게 보상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파루크자드는 호스로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샤흐르바라즈에게 독립할 걸 권했다. 샤흐르바라즈는 그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여 크테시폰으로 가지 않았다.

628년 6월 28일, 호스로 2세는 궁정 쿠데타로 피살되었고 카바드 2세가 샤한샤에 올랐다. 카바드 2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사산 왕조가 점령한 영토를 모두 반환하고, 성십자가를 반환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고, 이라클리오스는 만족한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카바드 2새는 재위 2개월 만인 628년 9월 6일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7살의 어린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즉위했다. 아랍의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유력한 대신 마아드후르 구슈나프가 섭정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사산 왕조는 동로마 제국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른 여파로 매우 피폐해졌고, 군대는 전장에서 모조리 소모되었다. 그나마 건재한 군대는 샤흐르바라즈 휘하 부대밖에 없었다. 아랍인과 튀르크인은 이 기회를 틈타 사산 왕조의 남부와 북부를 수시로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629년엔 하자르족이 캅카스로 쳐들어왔다. 샤흐르바라즈는 직접 캅카스로 진군해 하자르족을 격파했다.

이에 민심은 샤흐르바라즈에게 쏠렸고, 님루지 가문은 그를 샤한샤로 추대하기로 했다. 630년, 샤흐르바라즈는 이라클리오스와 협약을 체결하고 성집자가를 정식으로 동로마 제국에 넘겼다. 이후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크테시폰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4월 29일 크테시폰은 함락되었고, 이제 9살이 된 아르다시르 3세, 마아드후르 구슈나프,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처형되었다. 또한 자신의 충직한 부관이었던 카르다리간이 샤한샤를 칭하는 것을 반대하자 죽여버렸다.

이후 그는 샤한샤를 자칭했고, 기독교 신자인 아들 니키타스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40일 후인 630년 6월 9일, 이스파부단 가문의 수장 파루크 호르미즈드가 호스로 2세의 딸이자 아르다시르 3세의 이모인 푸란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크테시폰에서 격전이 벌어지던 중, 그는 파루크 호르미즈드가 던진 창살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들 샤푸르 샤흐르바라즈는 재차 군대를 일으켜 푸란도흐트를 축출하고 샤한샤가 되었지만, 얼마 안가 귀족들에게 폐위되었다. 한편 니키타스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한 뒤 동방 전선 사령관이 되었고, 이슬람의 폭풍이 시리아에 닥쳤을 때 맞서 싸웠으나 야르무크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뒤 기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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