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즈데게르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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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44대 샤한샤
𐭩𐭦𐭣𐭪𐭥𐭲𐭩|야즈데게르드 3세
파일:야즈데게르드 3세.jpg.webp
제호
한국어
야즈데게르드 3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𐭩𐭦𐭣𐭪𐭥𐭲𐭩
영어
Yazdegerd II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624년 ~ 651년
재위 기간
632년 ~ 651년

1. 개요
2. 생애
3. 후손과 망명자들




1. 개요[편집]


사산 왕조의 제44대이자 마지막 샤한샤. 내우외환으로 제국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고자 최선을 다했으나, 끝내 시대의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편집]


호스로 2세의 손자이며, 샤흐리야르(Shahriyar) 왕자의 아들이다. 전설에 따르면, 호스로 2세는 제국이 어떤 종류의 결함을 안고 태어난 손자와 함께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그의 아들들을 가두고 여자들과 성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애첩 시린이 아들 샤흐리아르를 도왔고, 그는 결국 어느 소녀와 성관계를 맺어 야즈데게르드 3세를 낳았다. 호스로 2세는 어느 날 야즈데게르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의 허벅지에 흠집이 있는 걸 보고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시린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심각한 혼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628년 호스로 2세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시해된 이래,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호스로를 시해하고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죽인 뒤 샤한샤가 된 카바드 2세는 재위 2개월여 만에 메소포타미아 인구의 1/4 ~ 1/2를 죽음으로 내몬 쉬라와이흐 역병(Plague of Shirawayh)에 걸려 사망했다. 뒤를 이어 7살의 어린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즉위했지만, 630년 샤흐르바라즈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630년부터 632년까지 2년간 12명의 샤한샤가 등극하고 폐위된 사산 공위시대가 벌어졌고, 각지의 통치자들은 중앙 정부를 우습게 여기고 사실상 독립했다. 특히 마준과 예멘의 총독은 아예 독립을 선포하며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632년, 푸란도흐트를 살해한 피루즈 호스로의 파르시그 가문과 푸란도흐르의 섭정을 맡았던 로스탐 파로흐자드의 이스파부단 가문간의 내전이 한창 진행되던 중, 귀족들이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라며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이를 샤한샤로 추대하자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교전을 중단한 뒤 협의 끝에 내전을 피해 숨어지내던 8살의 소년 야즈데게르드 3세를 샤한샤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는 허수아비일 뿐이었고, 그를 옹립한 피루즈와 로스탐이 권력을 양분하였다. 한편 파르시그 가문의 본거지인 남서부와 남동부에 해당하는 파르스, 사카스탄, 쿠제스탄에서만 그의 동전이 주조되었고, 제국의 북부를 근거지로 삼은 이스파부단 가문은 동전을 주조하는 걸 거부했다. 이란의 서부와 중부 일부 지역에서는 파루카자드 호스로 5세를 추종하는 무리가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639년까지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했다. 심지어 크테시폰에서도 호스로 4세가 힘의 공백을 틈타 샤한샤를 자칭했다가 야즈데게르드 3세를 옹립한 귀족들에게 곧 토벌되었다.

한편 킵카스 일대에서는 하자르족이 제국의 쇠락을 틈타 수시로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튀르크족은 제국의 동방 영토를 갉아먹었다. 그러나 최악의 외적은 따로 있었다. 633년 5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사산 왕조의 중요한 요충지인 히라 근처에서 아자드베 휘하의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히라를 함락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이 시리아 속주를 지키기 위해 대군을 집결하자, 시리아를 공략하려던 칼리파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를 시리아로 소환했다.

634년 아부 바크르의 뒤를 이어 칼리파가 된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드를 파견하여 메소포타미아 정복전을 재개하도록 했다. 로스탐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바흐만 야두이와 아르메니아 장군 할리누스를 파견해 이들을 치게 했고, 두 사람은 634년 11월 26일 다리 전투에서 많은 무슬림을 유프라테스 강에 몰아넣어 익사시켰다. 하지만 사산 왕조군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려던 중, 피루즈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로스탐의 소환 명령을 받고 돌아가야 했다. 이후 무슬림군을 수습한 무탄나 이븐 하리타는 메소포타미아 공격을 재개하여 몇 차례의 승전을 거두며 분위기를 다시 바꾸었다.

635년, 무슬림군이 재차 이라크 일대를 침공했고, 사산 왕조군은 연패를 거듭하다가 그해 가을 오볼라를 상실하였다. 이후 무슬림은 수시로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와 많은 도시를 공략하였고, 주민들을 이슬람 신도로 삼았다. 636년 8월, 동로마군은 야르무크 전투에서 무슬림군에게 궤멸되었다. 이리하여 시리아를 정복한 무슬림군은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를 지휘관으로 삼아 메소포타미아 정복전에 착수했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적군이 까디시야 평원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야즈데게르드 3세는 로스탐에게 아랍인이 어떤 종족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방심한 양치기들에게 덤벼들어 전멸시키는 늑대 무리입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고개를 저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소.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은 새가 밤에 산기슭에 은신하며 둥지를 틀고 있는 산을 바라보는 독수리 같소. 아침이 되었을 때, 새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독수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볼 것이오. 새 한 마리가 다른 새들로부터 분리될 때마다, 독수리는 그 새를 낚아채오.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탈출하는 것이오."


636년 11월 16일 ~ 19일, 무슬림군과 사산 왕조군은 까디시야 평원에서 맞붙었다.(까디시야 전투) 이 전투에서 무슬림 군의 사상자는 8,500명이었으나 사산 왕조군은 22,000명에 달했고, 지휘관 로스탐 파로흐자드를 포함한 여러 장수가 전사했다. 잔여 병력은 바빌론 근처에 모여 다시 맞서려 했지만, 무슬림군이 다시 공세를 가해 또다시 격파하였다. 이후 무슬림군이 샤바트 시를 공략한 뒤 크테시폰 맞은편에 있는 티그리스까지 이르자, 야즈데게르드 3세와 신하들은 크테시폰을 떠나 동쪽으로 도주했다. 무슬림군은 티그리스를 공략한 뒤 크테시폰에 무혈 입성하였고, 호스로 2세의 왕관을 메카의 이슬람 사원인 카바로 보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동맹을 찾았다. 동로마 제국에 더 기대할 수 없는 게 분명해지자, 638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당태종은 이란 난민을 받아들일 의향은 있었지만 군대를 보내는 건 거부했다. 사산 왕조군은 크테시폰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찰룰라 시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몇 달만에 함락되었고 지휘부는 붕괴되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방의 여러 도시를 돌며 병력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 애썼다. 후지스탄의 총독 쿠르무잔이 샤한샤의 호소에 응해 반격을 가했지만, 무슬림은 치열한 전투 끝에 후지스탄을 정복했고, 쿠르무잔은 항복한 뒤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무슬림군은 여세를 몰아 640년 페르시아에 귀속된 아르메니아의 수도 드빈을 파괴하였다.

642년, 피루즈 호스로가 이끄는 사산 왕조군이 무슬림군을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을 벌였으나, 니하완드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그 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스파한으로 이동한 뒤 일찍이 아랍인에게 재산을 빼앗긴 바 있었던 시야(Siyah)라는 이름의 군 장교 휘하의 소규모 부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곧 마음을 바꿔 무슬림을 돕는 대가로 살 곳을 제공받기로 하였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에스타크르로 이동한 뒤 파르스 주에 새 정부를 조직하여 저항을 지속하려 했다. 그러나 650년 바스라 총독 압둘라 이븐 아미르가 파르스를 침공하여 에스타크르를 파괴했고, 페르시아 귀족들을 포함한 40,000명의 수비 병력을 몰살시켰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랍군의 추격을 회피하며 키르만으로 이동했다. 그는 비만드에서 사로잡힐 뻔했으나, 눈보라를 무릅쓰고 질주한 덕분에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파일:이란 사산 성.jpg
야즈데게르드 3세가 피살된 호라산의 지바드 성채. 고나바드 인근 지바드 시가지 서쪽 언덕에 위치한다.

키르만에 도착한 뒤 재차 군대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곳 총독과 사이가 나빠지자 다시 사카스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세금을 내라는 요구가 거절당하자 튀르크 족 지도자와 합류하기 위해 메르브로 향했다.그러면서 아랍에 대항하여 그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낸 차가니얀 공국의 지원을 받았다. 얼마 후 메르브에 도착한 그는 그곳 총독 마흐리 수리에게도 세금을 요구했지만, 총독은 바드기스의 에프탈 통치자 네자크 타르간과 연합하여 야즈데게르드 3세와 추종자들을 물리쳤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메르브 인근의 어느 방앗간에 숨었지만, 651년 방앗간 주인에게 살해되었다. 당대 기록에는 방앗간 주인이 야즈데게르드 3세의 보석을 얻기 위해 죽였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메르브 총독 마흐리 수리의 압력을 못이겨 살해했을 거라고 본다. 이리하여 사산 왕조 최후의 샤한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후손과 망명자들[편집]


그의 아들이였던 페로즈 3세바흐람 7세당나라로 도망쳐서 당나라의 보호 아래 망명 정부를 열었다.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들과 손자들은 백 여년 간 당나라에서 활동하며 권토중래를 노리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1] 이때 이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사산 왕조 사람들은 당나라 귀족층으로 받아들여졌다가 점차 한족에 동화되었다. 이들은 중국 문화에 페르시아적 요소를 여럿 남겼다. 딸들은 이슬람 세력 유력자들의 첩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야즈데게르드 3세의 딸 샤르바누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아들 후세인 이븐 알리와 결혼했고 시아파 이맘의 혈통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황실의 혈통이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앙아시아로 도망쳐 정착한 귀족들은 이 지역에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전파했다. 또한 이들은 차후 아랍에서 독립하는 사만 왕조에 기여하였으며, 이슬람의 영향 아래서도 사산 왕조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인도로 도망가 후에 무굴 왕조와 대립하게 되는 조로아스터 교도들도 존재하는데 인도의 타타가 유명하다. 또한 처용 설화에 나오는 처용이 이 망명자들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사용하는 종교력 중에서 야즈데게르드 3세의 즉위년인 632년을 0년으로 한 종교력이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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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행적에 착안해 신라가 등장하는 서사시 《쿠시나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