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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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4대 샤한샤
𐭥𐭫𐭧𐭫𐭠𐭭 | 바흐람 1세
파일:바흐람 1세.jpg.webp
제호
한국어
바흐람 1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𐭥𐭫𐭧𐭫𐭠𐭭
영어
Bahram 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274년
재위 기간
271년~274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사산 왕조의 제4대 샤한샤.

2. 생애[편집]


바흐람(Bahram)은 고대 페르시아의 승리의 신 베레트라냐(Vṛθragna)의 중세 페르시아어 명칭이다. 그리스어로는 바라네스(Baranes)이며, 조지아어로는 바람(Baram), 라틴어로는 바라네스(Vararanes)로 쓰인다. 바흐람의 모습이 처음으로 조각된 부조는 나그쉐 라쟈브의 아르다시르 1세의 대관식 기념비에 있다. 여기에서는 아르다시르나 아후라 마즈다보다 작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베레스라그나 신의 앞에서 인사를 하여 경의를 표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멧돼지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인장이나 왕관에 붙이고 있다. 이것은 승리의 야자타의 연결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샤푸르 1세의 아들로, 호르미즈드 1세의 동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샤푸르의 고관 목록>에 따르면, 그는 호르미즈드보다 앞에 적혀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바흐람이 호르미즈드의 형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설은 아니다. 그는 형제들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샤푸르의 통치 동안, 그는 카스피 해의 남서쪽 해안가인 기란 지역의 총독이 되었다. 기란 지역은 제국의 필두로 위치해 있는 아르메니아,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의 남방에 펼쳐진 비옥한 카라케네, 제국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카 등에 비해 전략적 중요성이 낮은 지역이었다. 또한 샤푸르 1세의 비문에 그의 이름은 성화(聖火)에 의해 공표되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홀대받은 이유는 어머니가 정실 왕비가 아니라 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270년 5월 샤푸르 1세가 사망한 뒤,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호르미즈드 1세가 샤한샤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불과 1년만인 271년 6월 사망했다. 이후 조로아스터교의 수석사제 카르티르(Kerdīr)의 추대를 받고 샤한샤에 등극했다. 당시엔 카라카네의 왕인 샤푸르와 사카의 왕인 나르세스 1세가 유력했지만,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후원 덕분에 황관을 꿰찰 수 있었다. 그는 반발을 모면하고자 나르세스를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왕"에 앉혔다. 이후 자신을 후원해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권고에 따라 274년 마니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을 선고했다. 마니는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옥사했다. 그 후 마니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고, 많은 신자들이 로마 제국 등 이웃나라로 도피했다. 조로아스터교 측 기록은 그를 "싸움, 사냥, 잔치를 좋아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왕"이라고 칭송했다.

272년, 사산 왕조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던 팔미라 제국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침공으로 멸망 위기에 처했다. 제노비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바흐람 1세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아우렐리아누스가 급파한 기병대에게 패퇴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를 지킬 수 없게 되자 사산 왕조에 망명하려고 도주했지만, 유프라테스강 인근에서 로마군에게 붙잡혔다. 샤한샤는 사절을 보내 휴전 협정을 제의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수락했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가 274년 개선식을 벌일 때 축하 사절을 보내고 선물을 바쳤다. 그해 9월 사망하였고, 아들 바흐람 2세가 뒤를 이어 샤한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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