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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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식스·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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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6세
Henry VI


파일:1280px-King_Henry_VI_from_NPG_(2).jpg

왕호
헨리 6세
(Henry VI)
출생
1421년 12월 6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성
사망
1471년 5월 21일 (향년 49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런던탑
장례식
1484년 8월 12일
세인트 조지 예배당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차
1422년 8월 31일 ~ 1461년 3월 4일
2차
1470년 10월 3일 ~ 1471년 4월 11일
프랑스 왕국의 왕 (논란)
1422년 10월 21일 ~ 1453년 10월 19일
배우자
앙주의 마르그리트 (1445년 결혼)
자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아버지
헨리 5세
어머니
발루아의 카트린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헨리 6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왕위에 오르다
2.2. 잔 다르크와의 악연
2.3. 패배한 백년전쟁
2.4. 유배 그리고 암살
3. 가족관계
4. 사생활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백년전쟁 말기의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다.


2. 생애[편집]



2.1.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왕위에 오르다[편집]


잉글랜드 왕 헨리 5세프랑스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 5세 사망 직후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때가 1422년이었다. 그러니까 한 살도 되기 전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는데 정확하게는 생후 9개월이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지 2개월이 지나고 나서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정신병으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이때 헨리 6세의 나이는 고작 생후 11개월이었다.

파일:잉글랜드 국장(1422-1471).svg.png
헨리 6세의 문장. 왼쪽에 프랑스의 상징인 백합 문장, 오른쪽에 잉글랜드의 상징인 사자와 백합을 섞은 문장을 넣었다. 백년전쟁 때부터 잉글랜드는 자국 문장에 프랑스 백합 문장을 섞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자보다 백합이 더 많아 보인다(...). 옆의 동물들은 영양이다.

옹알이도 못 하는 나이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왕이 된지라, 성년이 될 때까지 숙부인 베드퍼드 공작 존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사실상 왕권을 휘어잡고 놀았다.

급기야 외숙부인 샤를 7세가 트루아 조약의 비적법성을 주장하며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자[1], 자기 자신도 1431년에 파리로 가서 프랑스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렸는데 이때의 나이가 10살이었다. 이때 잔 다르크의 활약 없이 백년전쟁이 당시의 전황대로 종결되었다면 그는 앙리 2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4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카페 왕조는 프랑스의 귀족과 인민에게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이는 원시적인 내셔널리즘(민족주의)과 맞물리며 잉글랜드인이 아닌, 랭스 대성당에서 도유식(塗油式)을 거쳐 즉위한 프랑스인만이 진정한 프랑스 국왕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 나아갔다.[2] 결국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의 통치권조차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로렌 동레미 지역의 소녀가 이 '신성한 왕권' 이데올로기에 감화되어 전장에 나서 전황을 뒤집었으니 가히 백년전쟁이 양국의 국가 체계 발전에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2.2. 잔 다르크와의 악연[편집]


이런 화려한 스펙과는 다르게 헨리 6세의 어린 시절은 9살 연상인 잔 다르크와의 안 좋은 추억으로 얼룩져있다(…). 1429년에 오를레앙만 함락시키면 사실상 샤를 7세를 굴복시키고 프랑스 전체의 패권을 쥐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상황에서, 갑자기 17세의 소녀 잔 다르크가 나타나더니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면서 잉글랜드군은 연속으로 패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급기야 잔 다르크가 정식으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할 수 있는 장소인 랭스까지 차지하자 샤를 7세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왕으로서 대관식까지 치룬다. 이로 인해 헨리 6세는 제대로 된 프랑스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리지도 못하고, 트루아 조약까지 하늘나라로 날아가버리면서 프랑스의 지배조차 주장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아무리 어린 나이일지라도 헨리 6세는 극심한 충격을 받았고, 당시 왕권을 휘어잡고 있던 베드퍼드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도 충격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이 두 사람과 윈체스터 추기경이 작당해서 프랑스에게 배신당하고 부르고뉴군에게 붙잡혔던 잔 다르크를 종교재판을 통해 마녀, 이단자로 몰아서 화형대로 보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6세》 1부에서는 아무리 셰익스피어가 잉글랜드인이고, 헨리 6세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잔 다르크를 철저히 악마와 결탁한 마녀 내지 악녀로 묘사한다(...).[3] 그런데 정작 헨리 6세는 비중이 별로 없고 잔 다르크가 더 비중이 많아 사실상 진히로인이 되어버렸다(...). 이 항목도 어째 잔 다르크 이야기가 더 많아 보인다

많은 사람이 영화 잔 다르크 덕분에 헨리 6세가 잔 다르크를 화형대로 보내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잔 다르크가 죽은 년도가 1431년, 그러니까 헨리 6세가 성년이 되어 왕권을 잡기도 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잔 다르크의 이단심문과 화형에 관한 것은 당시 국왕 대리였던 베드퍼드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의 역할이 가장 컸다.

다만 헨리 6세가 잔 다르크의 화형 이후 남장을 하며 성 역할을 어기고, 계시를 받았다고 허풍을 떨며 백성들을 속이는 못된 여자의 죽음이라고 발표한 것을 볼 때 아주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기껏해야 주변 어른들에게 휘둘리며 그들에게서 잔 다르크는 최악의 적이자 마녀라고 세뇌받아서 그렇게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잔 다르크가 루앙 탑에 갇혀있을 당시 헨리 6세가 루앙에 들렀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두 사람이 직접 만났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설령 만났다고 한들 당연히 잔 다르크에게 좋은 말을 했을 리가 없을 듯.

잔 다르크가 화형당해 순교한 뒤에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렸지만, 정식으로 대관식을 하는 장소인 랭스가 잔 다르크에게 빼앗겨버린 탓에 제대로 된 권위가 없는 대관식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파리 주민들[4]에게 반발을 사버렸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실패한 대관식 25년 후에 같은 장소, 그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려 헨리 6세의 측근이 열었던 재판은 엉터리였음이 증명되었고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5]


2.3. 패배한 백년전쟁[편집]


이후 성년이 되어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으로서 자리를 잡았지만, 전장에서 능력있는 지휘관이었던 베드퍼드 공은 헨리 6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했고, 글로스터 공은 윈체스터 추기경과의 권력 투쟁 끝에 쫓겨나기에 이르렀으며 인물다운 인물로 새롭게 떠오른 요크 공 리처드는 결국 전황을 뒤집지 못하였다. 거기에다가 잔 다르크가 경건한 자세로 화형에 임하면서 그녀를 이단자, 마녀로 몰아넣은 효과가 무색해지며[6] 오히려 프랑스인들의 반잉글랜드 감정과 단결심만 더 키웠으며, 심지어 여태까지 동맹을 맺고 잔 다르크까지 잡아다가 바쳤던 부르고뉴파는 아라스 조약으로 프랑스 편에 붙어버리고 샤를 7세에게 파리를 들어바치는 바람에[7] 차곡차곡 전투에서 지며 영토를 빼앗기더니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의 잉글랜드령을 잃으며, 망했어요.

백년전쟁 뒤에는 사자후버프받은 프랑스가 칼레마저 뺏어갈까 두려워서 앙주 등의 비옥하고 부유한 영토를 그냥 거저 돌려주는 등 친프랑스 수준을 넘어 비상식적인 정책을 고수하였는데[8] 문제는 이게 잉글랜드 귀족들의 불만을 사서 장미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여담으로 칼레는 1558년 메리 1세 때 잃음으로써 결국 잉글랜드는 프랑스 본토 내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만다.


2.4. 유배 그리고 암살[편집]


장미전쟁 중에는 먼 친척이었던 요크의 리처드의 아들이자 본인에게는 8촌 동생이 되는 에드워드 4세[9]에게 밀려 잠시 런던 탑에 유폐되기도 했는데, 이때 정신착란 증세를 심하게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잠시 세력을 키우는 한편 에드워드 4세의 심복이었던 워릭(Warwick) 백작을 끌여들여 에드워드 4세를 밀어내고 도로 왕좌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정신착란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된 판단과 통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이 정신착란은 외할아버지 샤를 6세에게 물려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해서 프랑스 내 영토를 거의 모조리 빼앗기고, 한때 자기를 괴롭혔던 마녀라고 생각했던 잔 다르크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명예회복이 선포된 꼴[10]도 보고,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등, 충격을 연속으로 받는 환경적 요인도 있었을 듯.

결국 다시 에드워드 4세에게 밀려 런던 탑에 유폐되었고 1471년 5월 23일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추종세력에 의하여 암살당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우울증이었으나, 1911년 발견된 헨리 6세의 유골에서 두개골은 머리카락이 피로 엉겨붙어 있어 머리를 강한 도구로 찍혀 죽어서 암살되었음이 드러났다. 여담이지만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형제도 그들의 숙부 리처드 3세에 의해 폐위되어 런던 탑에 갇혔다가 죽음을 당했다. 참고로 부인 앙주의 마거릿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프랑스로 망명, 1470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딸 앤 네빌과 혼인하였다. 이후 1471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 에드워드 4세와 맞서 싸웠으나,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헨리 6세가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왕조의 후계는 단절되었으며 그의 아내인 마거릿은 이때 포로가 되었지만 사촌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 11세에 의해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가 살다 1482년에 죽었다.

3. 가족관계[편집]


참고로 모후인 발루아의 카트린은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는데,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는 바로 이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다. 즉, 헨리 7세는 헨리 6세의 이부조카. 에드먼드 튜더는 랭커스터, 나아가 플랜태저넷 왕조의 부계 후손은 아니였지만 그의 이부형이었던 헨리 6세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았다.[11]

위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헨리 7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혈통과 거리가 상당히 먼 사람이다.[12] 그러나 헨리 7세는 자신이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헨리 6세의 조카란 사실을 계승권 주장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따온 헨리 7세를 즉위명으로 삼았고 자신의 둘째아들의 이름도 다시 헨리라고 지었다.


4. 사생활[편집]


플레잉 카드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그래서 플레잉 카드 K에 자신의 얼굴을 박고 플레잉 카드 Q에 자기 왕비의 얼굴을 박은 뒤 플레잉 카드 J에는 자신이 총애하는 대신 4명의 얼굴을 박아서 널리 배포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영주들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 플레잉 카드에 그 영주의 얼굴을 박아서 선물하는 게 유행했다.

자기 외할아버지 샤를 6세의 정신병과 광기를 물려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생전 외할아버지처럼 무능하고 무기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아들에게 축복을 내리기를 청하는 버킹엄 공작이나 왕비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거나, 심지어 아들의 대부였던 켐프 대주교가 사망한 뒤 자신이 직접 새 대부를 선택했음에도 켐프 대주교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하는 등 꽤 심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년전쟁 질만했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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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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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 왕조 · 프랑스군
가족
다르크 가문
관련 인물
미카엘 · 성녀 마르가리타 · 성녀 카타리나

프랑스 원정군 동료 (질 드 레 · 라 이르 · 리슈몽)

적대적 인물 (헨리 6세 · 선량공 필리프 · 이자보 드 바비에르 · 피에르 코숑)

주군 (샤를 7세)
관련 장소
잔의 생가 동레미라퓌셀

오를레앙 공방전이 벌어진 곳 오를레앙 · 파테 전투가 벌어진 곳 파테

루아르 원정이 벌어진 곳 루아르 · 랭스 행진을 통해 주군 샤를이 즉위한 곳 랭스

파리 공방전이 벌어진 곳 파리 · 잔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가 벌어진 곳 생피에르르무티에

잔이 생포된 곳 콩피에뉴 · 잔이 화형당한 곳 루앙 · 잔의 묘소 윈체스터
관련 사건
백년전쟁
관련 물건
잔 다르크의 깃발 · 생트 카트린의 검
기록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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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어록 및 편지 · 특징 · 생애 ·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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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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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랭스도 잉글랜드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때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이 랭스를 탈환했다. 랭스는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올리던 도시였다.[2] 백년전쟁의 단초가 된 발루아 백작 필리프의 왕위 계승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왕위 계승에 있어 여성 승계가 아닌 모계 계승(외손)이 금지된다는 법칙은 없었고, 에드워드 3세샤를 4세와 가장 가까운 친족이면서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 그러나 대제후 회의는 프랑스의 왕권은 프랑스 출생으로 프랑스적 본성을 갖춘 이가 행사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왕위는 모계 직계이지만 외국 왕이기도 한 에드워드가 아닌, 부계 방계이지만 완전한 네이티브 프랑스인인 발루아 왕조에게 넘어간다.[3] 다만 이때까지는 잉글랜드에서도 잔 다르크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4] 불과 2년 전에 파리에 접근하던 잔 다르크에게 마녀, 탕녀,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이라고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며 공격하던 사람들이다.[5] 물론 샤를 7세와 교황청이 재판을 열기는 했지만 잔 다르크를 적으로 만났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파리 시민들도 이에 동의했기에 그곳에서 열릴 수 있었을 것이다.[6] 화형대에서 심장이 타지 않고 남았다던가 비둘기가 날아갔다던가하는 신화적인 소문은 배제하더라도, 친(親) 잉글랜드 도시인 루앙의 시민들마저 잔 다르크의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잉글랜드 병사들과 헨리 6세의 비서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성녀를 죽였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실제로 잔 다르크의 재판에 관여했던 모든 이들은 평생을 손가락질당했으며,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거나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에 더해 공교롭게도 당시 재판정에 있었던 재판관 중 편히 죽은 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성녀를 모함한 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더욱 크게 퍼졌다.[7] 잔 다르크가 재판 당시에 7년 안에 오를레앙에서의 패배보다 무서운 재앙이 잉글랜드에 닥칠 거라고 경고성으로 예언했는데 과연 7년 안에 베드퍼드 공의 사망과 파리의 프랑스 귀속으로 그 예언이 실현이 되어버렸다.[8] 다만 칼레는 관세수입만으로 왕실 수입의 3분의 1이나 차지하는 노른자위 땅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잉글랜드는 노르망디와 앙주, 가스코뉴와 아키텐을 완전하지 못하게 부분부분 보존하고 있었는데(앙주는 메인만 간신히, 아키텐은 보르도 이외에 거의 상실했으며 가스코뉴는 그나마 잘 보존했지만 노르망디도 해안과 일부 도시들만 불완전하게 지킨 상태였다), 언제 또 이게 전쟁의 구실이 되어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칼레라도 보존하는게 낫다고 판단한 것. 근데 문제는 귀족들 입장에선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 입장에선 잃어버린 영토와 처참하게 패배한 전쟁은 다시 싸워서 이기면 되는 문제였다. 실제로 거의 다 진 전쟁을 아버지 헨리 5세가 화려하게 역전한 바 있는데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약탈로 돈이 되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9] 동양에서만 족보를 따진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유럽 왕족들의 혈통과 촌수 구별도 그에 못지 않다. 심지어 팔촌은커녕 왕가와의 혈연이 몇 백 년 지나도 적법한 자손들이라면 프린스 칭호를 쓸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다만, 동양은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평민들조차도 사돈의 팔촌까지 다 따지는 경향이 있던 데 반해, 서구권은 명문가나 작위 계승 문제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그런 거랑 아무 상관없는 평민들은 6촌을 넘어가기만 해도 친족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10] 사실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상황이어서 잔 다르크의 명예가 회복될 재판이 다시 열리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잉글랜드가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 침입을 막는 데에 지원해줬기 때문에 교황청이 잉글랜드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그래도 설마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끝내 그나마 믿었던 교황청이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을 열어버려서 헨리 6세와 잉글랜드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11] 사실 부계로는 왕족이 아니었어도 당시 기준으로 어머니가 잉글랜드보다 더 강대국이었던 프랑스 공주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유럽 왕가는 외국 출신이어도 신분이 높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인정받았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인 로트링겐(로렌) 가문과 로트링겐 가문의 분가인 기즈 가문, 이탈리아 사보이아 가문의 프랑스계 방계인 사부아느무르 가문 등은 프랑스 궁정에서도 준왕족 취급을 해주었다.[12] 사실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다. 마거릿의 친정인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의 사생아인 존 보퍼트가 랭커스터 가문에서 분가한 가문이기 때문에, 사실 모계혈통으로 보자면 헨리 7세도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자 랭커스터 왕조의 혈통인 건 맞으니 그렇게까지 먼 방계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