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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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전.
파시즘, 공산주의, 민주주의, 아나키즘, 반동주의, 군국주의, 반군국주의, 군주주의 등 당대 주류 이념들의 격전장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예고편이었다.
2. 전쟁 이전[편집]
스페인 왕정복고 시대인 1920년대의 정세는 리프 전쟁에서의 고전과 보르본 왕조의 무능, 경제 불황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스페인 제1공화국부터 스페인 내전까지의 시기에 무려 40여 차례의 쿠데타와 60여 차례의 정치 위기가 있었다.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알폰소 13세는 리베라 정권을 승인했다.
하지만 리베라 정권은 스페인 독감과 대공황에 리베라의 갖가지 실책까지 겹치면서 붕괴되었다. 군부마저 등을 돌린 리베라는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알폰소 13세는 분노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총선 실시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1931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공화파가 압승을 거두었고 이에 알폰소 13세가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 좌파 정권이 출범했고 지주들과 가톨릭 교회, 군부가 중심이 된 보수파 기득권층과 대립했다.
교회는 보수파의 중심이 되긴 했지만 당시 스페인 영토의 무려 3분의 1이 교회 소유였다는 낭설과는 다르게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회는 '1837년 개혁'으로 인해 토지를 대거 매각했고 그 과정에서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그 토지들을 전부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36년 기준으로 가톨릭 교회라는 조직 자체는 몰라도 개별 성직자는 부유하지 않았으며 그랬기에 성직자들은 양 진영에 소속되거나 중립을 지키는 등 가톨릭 교단 자체의 의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다.
1932년까지 2,400만 인구 중 0.97%의 지주가 농지의 42%, 2%가 65%를 소유했다. 1932년에 공화파에 의한 일부 농지개혁이 행해졌으나 단 90,000 헥타르, 그것도 비경작지만 분배되었을 뿐이었으며 보수 세력과 중도세력의 급격한 반발만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스페인 군부[23][24] 또 공화국 정권의 군부 개혁 노력에 반발해 극우화의 길을 걸었으며 1932년에는 호세 산후르호 장군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25]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공화파는 위기를 맞았고 결정적으로 노선의 차이로 인해 1933년 총선에서 공화파, 급진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연대가 해체되자 중도(급진공화당)와 우파들은 좌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교체했다.[26] 급진당과 CEDA의 연합정권은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아사냐 정권의 각종 개혁정책들을 후퇴시켰지만 군대를 동원해 무리하게 노조운동을 탄압하면서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아스투리아스 혁명). 설상가상으로 정치 스캔들이 겹치면서 지지가 바닥으로 치달았다. 레룩스를 중심으로 한 급진공화당 및 CEDA의 연립정권이 부정부패로 몰락하자 중도우파 성향이었던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는 더이상 전망이 없는 중도우파-우파 연정을 내치고 반공산당, 반 CEDA 중도세력을 결집시키고자 아직 의회 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우파 내각을 대통령 권한으로 강제 붕괴시킨 다음 중도파 바야다레스를 총리로 내세우면서 '코르테스'(스페인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총선 패배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좌파는 1936년 총선에서 우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동단결하기로 결정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 좌파 및 디에고 바리오가 이끄는 공화주의 중도파와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과격한 사회주의 좌파가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결성했으며 이에 맞서 우파 역시 반혁명 국민전선(Frente Nacional Contrarrevolucionario)을 결성했다.
1936년 총선의 선거 연합은 다음과 같았다.
- 인민전선(Frente Popular: 좌파 연합)
- 반혁명 국민전선(Frente Nacional Contrarrevolucionario: 우파)
- 호세 마리아 힐로블레스가 이끈 가톨릭 보수주의 성향의 스페인 자치 우익 연합(CEDA)[32]
- 이하의 정당들은 일부가 CEDA와 협력했다.
- 민주중도당(PCD/PCNR)의 일부 협력 분파(CEDA-PCNR)
- 급진공화당(PRR)의 일부 협력 분파(CEDA-PRR)
- 진보공화당(PRP)의 일부 협력 분파(CEDA-PRP)
- 보수공화당(PRC)의 일부 협력 분파(CEDA-PRC)
- 자유민주공화당(CEDA-PRLD)
- 스페인 농업당(PAE)
- 비동맹(중도 및 내셔널리스트)
- 중도주의 성향의 민주중도당(PCD)
- 바스크 지역주의 성향의 바스크 국민당(EAJ-PNV): 바스크 지역주의가 주요 당론인 지역주의 정당이었으나 굳이 따지면 보수주의 성향에 더 가까웠다.
- 카탈루냐 지역주의 성향의 카탈루냐 연맹(LR): 좌파 성향의 다른 카탈루냐 지역주의 정당들과는 다르게 보수우익 성향이었다.
- 알레한드로 레룩스가 이끈 보수자유주의 성향의 급진공화당(PRR)[33]
-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이끈 보수자유주의 성향의 진보공화당(PRP)[34]
- 미겔 마우라가 이끈 보수자유주의 성향의 보수공화당(PRC)[35]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끈 팔랑헤주의(파시즘) 성향의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스페인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Sindicalista: FE de las JONS):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은 파시즘 정당이어서 CEDA와의 협력을 거부한 끝에 1936년 선거에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았다. 애초에 산업화도 안되있지만 전통 영농 사회 구조도 소규모 자영농 중심이었던 본거지 구카스티야에서나(그것도 기성 보수 우익을 딱히 압도하지도 못한 채) 존재감을 발휘했고 안달루시아에선 지주 세력의 기성 보수, 나바라/바스크/카탈루냐에선 카를리스타들에게 현저하게 밀리는 등 전국적인 세력 규모는 우익 내에서 최약에 가까웠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스페인 내전 발발 이후 CEDA의 몰락에 힘입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나(사실 국민진영 점령지 주민들이 반쯤은 살기 위해 몰려든 덕이 크다.) CEDA, 왕당파, 카를리스타, 군부와 통합되어서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스페인 전통주의자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Sindicalista: FET y de las JONS이 되었다. 약칭으로 '통합 팔랑헤당'이라고도 하며 통합 이후에는 국민생디칼리슴적, 혁명적 노선을 폐기하고 전통주의, 교권주의, 반동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전국 노동 연맹(CNT) 등의 아나키스트: 스페인은 유럽, 아니 전세계 노동 좌익 운동사상 거의 유일하게 아나키즘 세력이 한때나마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세력보다 더 강성했던 곳으로 꼽힌다. 19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도 산업화가 진행된 바르셀로나와 여전히 앙시엥 레짐의 라티푼디움 소작농 경제에 놓여있던 안달루시아를 양축으로 성장했던 스페인 아나키스트 운동은 보르본 왕정 말기 리베라 정권의 가열찬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2공화국 시절쯤 되면 선거에 참여하냐 마냐 하나만으로 스페인 정국 전체를 기울게 만들 수 있는 거대 집단이 되어 있었다. 처음 공화국이 들어선 1931년에 미적지근하게 공화파, 제도권 좌익 정당과 협력했던 아나키스트들은 곧 신생 공화국의 미적지근한 사회 개혁에 실망하며 다시 독자 행동에 들어갔다. 1933년 좌파의 총선 패배를 초래했고 이후 2년간의 우파 정권 기간동안 심지어 다른 온건 좌익 정파도 조지는데 합류할 만큼 좌익 세력 전반의 시범타로서 집중적으로 두들겨맞았다. 1934년의 아스투리아스 봉기와 그 실패 이후, 독자 행동의 한계를 절감한 CNT 지도부는 선거에는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인민 전선을 지지했고 1936년 총선 결과 세워진 신정부에서 아나키스트 출신 정부 장관 배출이란 기묘한 역사적 기록을 세웠다.
인민전선과 국민전선은 총선 직전까지 치열한 선거전을 펼쳤고 그 결과...
양측의 표차는 불과 10만 표도 채 되지 않았으나 인민전선이 소선거구제의 이점을 받아 경합 지역에서 대승을 거둬 과반이 넘는 285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이 박빙의 승부는 1933년에는 다른 좌파 정파들과 협조를 거부하며 단독행동에 나선 아나키스트 CNT가 우파 정권 2년 남짓한 기간동안 시끗하게 두들겨 맞고 안 되겠다 싶어서 좌파 대연정에 합류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우익과 치열하게 국정 장악을 두고 경쟁하는 좌익 중 막상 노동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과 지분을 가지고 있던게 다른 나라 같이 강력한 국가 통제를 주장하는 공산당이 아니라 아예 민족 국가란 개념 자체를 배격하는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이었다는 스페인 근대사의 특수성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발휘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공화국은 아나키스트들과 끝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공조가 가능한 관계를 만들지 못한 채 스페인 좌익의 역설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종국엔 사이좋게 둘 다 망하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0만 표도 안 되는 표차로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좌파 정권이 등장하자 우파들은 선거 불복을 외쳤고 공공연히 스페인에서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외치면서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군사행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바예로의 사회주의노동당 역시 총선 패배 시 공공연하게 '인민전쟁을 통한 정권 탈환'을 해야 한다고 우파를 협박할 정도였으므로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았어도 내전 발발 가능성은 높았다.
이 점을 잘 알았던 좌파 정권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우파 성향의 장군들을 스페인 본토에서 멀리 추방했는데 이 중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추방된 곳은 카나리아 제도였다. 그러나 프랑코파 군인들이 이미 영국을 통해 프랑코를 귀환시킬 비행기편을 구해 놓고 독일을 통해 병사들을 운송할 수송기와 함선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쿠데타 발발 직후 프랑코와 당시 스페인군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정예병들이었던 아프리카 군단 47,000명은 신속하게 스페인 본토로 건너올 수 있었다.
선거 후에 무력 쿠데타를 통한 정권 장악을 권고받은 CEDA의 힐로블레스가 이를 거부한 후[36] 군부는 팔랑헤당과 단독으로 쿠데타를 준비했으며 이미 인민전선 정부에는 PSOE의 프리에토와 공산당의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아사냐와 총리 키로가를 비록한 정부 인사들은 이 정보를 무시했다. 한편 1936년 7월 12일 밤 팔랑헤가 공화정부가 창설한 경찰조직인 돌격경찰대(Guardia de Asalto) 장교 호세 카스티요(José Castillo)를 암살하자 분노한 돌격경찰대원들은 보복으로 스페인 혁신의 안토니오 고이코에체아와 힐로블레스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두 사람 다 마드리드에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대신 우파의 거두였던 호세 칼보 소텔로를 몇 시간 후인 7월 13일 새벽에 납치, 암살했다.
소텔로의 암살 이후 정부는 이를 규탄하였지만 정작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체포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소텔로 암살을 실행했던 사람들 중 체포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팔랑헤주의자와 소텔로 지지자들이 체포되었다. 당시 이 사건의 책임을 맡고 있던 고메스 카르바호(Ursicino Gómez Carbajo) 판사는 돌격경찰대의 암살 사건 무마에 협조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정직한 판사라는 이유로 돌격경찰대원에게 린치를 당해 해당 사건에서 손을 떼게 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소텔로의 암살과 이후 벌어진 일들로 인해 소텔로 암살 사건으로 인한 갈등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텔로 암살 다음날인 14일에 소텔로의 공개 장례식이 열렸다. 이때 수천 명의 우파가 시가를 행진하며 정부의 사건처리를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정부가 우익 인사에 대한 공공연한 암살 분위기를 조장하고 사건의 진상 조사 및 책임자 처벌을 고의로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가두 행진을 했는데[37] 시위대가 시내 중심부에 다다르자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나 스페인 사회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 갔다. 소텔로 암살 사건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역사학자 브라이언 로크지어(Brian Crozier)는 사건의 중대함을 "미국에서 케네디 상원의원이 FBI에 의해 납치, 살해당하는 것과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당시 스페인에서는 현실이었다"고 지적했다. 결국 소텔로의 암살로 인해 사회 혼란 증가와 우파 결집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2월 총선 이후부터 계획해 왔던 쿠데타를 7월 17일에 감행하였다.
3. 내전의 발발[편집]
¡Obreros! ¡Campesinos! ¡Antifascistas! ¡Españoles patriotas!... Frente a la sublevación militar fascista ¡todos en pie, a defender la República, a defender las libertades populares y las conquistas democráticas del pueblo!...
A través de las notas del gobierno y del Frente Popular, el pueblo conoce la gravedad del momento actual. En Marruecos y en Canarias luchan los trabajadores, unidos a las fuerzas leales a la República, contra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Al grito de ¡el fascismo no pasará, no pasarán los verdugos de octubre!... los obreros y campesinos de distintas provincias de España se incorporan a la lucha contr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alzados en armas. Los comunistas, los socialistas y anarquistas, los republicanos demócratas, los soldados y las fuerzas fieles a la República han infligido las primeras derrotas a los facciosos, que arrastran por el fango de la traición el honor militar de que tantas veces han alardeado.
Todo el país vibra de indignación ante esos desalmados que quieren hundir la España democrática y popular en un infierno de terror y de muerte.
Pero ¡NO PASARÁN!
España entera se dispone al combate. En Madrid el pueblo está en la calle, apoyando al gobierno y estimulándole con su decisión y espíritu de lucha para que llegue hasta el fin en el aplastamiento de los militares y fascistas sublevados.
¡Jóvenes, preparaos para la pelea!
¡Mujeres, heroicas mujeres del pueblo! ¡Acordaos del heroísmo de las mujeres asturianas en 1934; luchad también vosotras al lado de los hombres para defender la vida y la libertad de vuestros hijos, que el fascismo amenaza!
¡Soldados, hijos del pueblo! ¡Manteneos fieles al gobierno de la República, luchad al lado de los trabajadores, al lado de las fuerzas del Frente Popular, junto a vuestros padres, vuestros hermanos y compañeros! ¡Luchad por la España del 16 de febrero, luchad por la República, ayudadlos a triunfar!
¡Trabajadores de todas las tendencias! El gobierno pone en nuestras manos las armas para que salvemos a España y al pueblo del horror y de la vergüenza que significaría el triunfo de los sangrientos verdugos de octubre.
¡Que nadie vacile! Todos dispuestos para la acción. Cada obrero, cada antifascista debe considerarse un soldado en armas.
¡Pueblos de Cataluña, Vasconia y Galicia! ¡Españoles todos! A defender la República democrática, a consolidar la victoria lograda por el pueblo el 16 de febrero.
El Partido Comunista os llama a la lucha. Os llama especialmente a vosotros, obreros, campesinos, intelectuales, a ocupar un puesto en el combate para aplastar definitivamente a los enemigos de la República y de las libertades populares. ¡Viva el Frente Popular! ¡Viva la unión de todos los antifascistas! ¡Viva la República del pueblo! ¡Los fascistas no pasarán!
¡No pasarán!
노동자! 농민!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애국자들이여! 파시스트의 군사 반란에 직면하여, 모두 스스로 일어서 공화국과 인민의 자유 그리고 민중이 이루어낸 민주적 위업을 수호해야 합니다! 정부와 인민전선의 성명을 통해 인민 여러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아직 공화국에 충성하는 세력과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지나가지 못한다! 10월의 교수 집행자는 통과하지 못한다!'는 기치 아래 스페인 모든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공화국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공화국의 민주주의자, 군인들 그리고 아직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남아있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합쳐, 군이 오랜 시간 자랑스레 지켜온 고결한 전통을 더럽혀 버린 파시스트 적들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전국토가 스페인을 공포의 심연과 죽음으로 처박아 버리려는 잔혹한 야만인들에게 분노하여 치를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페인은 지금 전쟁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민중이 거리로 나와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의 결정에 대한 격려를 보내며 파시스트의 반란과 반군을 쳐부수기 위한 투지에 불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여, 전투를 준비합시다! 여성들이여, 인민의 용맹한 여성들이여! 1934년 아스투리아스 여성들의 영웅심을 다시 불러내어 파시스트의 위협에 그늘진 당신의 아이의 삶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투쟁합시다!
국민의 아들인 병사들이여! 진정한 공화국에 머물러 노동자들 인민전선의 군인들 그대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대의 동지의 옆에 서서 함께 투쟁합시다! 2월 16일의 스페인을 위해, 공화국을 도와 승리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모든 정파의 노동자들이여! 정부가 우리에게 쥐여준 무기는 10월의 피비린내 나는 교수 집행자가 승리하여 도래하게 될 수치와 공포로부터 스페인과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주저해선 안됩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합시다. 모든 노동자들, 모든 안티파시스트 여러분은 이제부터 서로를 전우로 보아야 합니다.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의 인민들이여! 모든 스페인인들이여! 우리의 민주 공화국을 수호하고, 우리가 2월 16일에 이룩한 승리를 확고히 합시다.[38]
공산당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특히 노동자들, 농부들, 지식인 여러분이 공화국과 민중의 자유의 적들을 타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루어 낼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워주길 원합니다.
인민전선이여 영원하라! 안티 파시스트 연합이여 영원하라! 민중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파시스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NO PASARÁN!)[39]
돌로레스 이바루리(Isidora Dolores Ibárruri Gómez)[40]
, 일명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 1936년 7월 19일 라디오 방송에서.
1936년 7월 18일 국민파 군대는 몰라 장군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령 모로코 및 스페인 전역에서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들 국민파를 통칭해서 팔랑헤당 또는 내셔널리스트(Nacionalista) 혹은 반란파(Bando sublevado)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자유민주주의가 연합한 공화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단일 정파는 아니었고 왕당파, 파시스트, 카를리스타 등 여러 세력이 연합해 있었다. 물론 국민파 내 대표적인 정당은 팔랑헤당이었다.
반란 첫 단계는 수도 마드리드나 당시 스페인 최대도시였던 바르셀로나 장악에 완전히 실패하는 등 성공적이지 않았으나 이걸 막을 공화군도 반란에 참여한 것을 속인 국민파 지휘관에 의해 도시 밖으로 물러난 후 도시를 빼앗기는 등 마찬가지로 어수룩하게 행동했다. 여기에는 한국과 다른 당시 스페인 군사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한국처럼 특정 경계선에 병력이 모여 있는 게 아니고 전국에 흩뿌려져서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수비대 병영이 있고 수비대 병력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에게는 딱히 대치하는 적성국이 없었기 때문이고 현대 한국사에서 굳이 비교할 상대를 찾으라면 일제강점기에 동네마다 일본 제국 육군의 헌병 주재소가 있고 헌병이 주둔했던 모습이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 때문에 주둔군 지휘관의 성향 및 병사와 주민들의 대응 방향에 따라 각 지역에서의 초기 성패가 갈린 것이다.
스페인군은 1898년에 치른 미서전쟁 이후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중립국으로 남았다. 예외적으로 실전 경험을 보유한 부대는 에밀리오 몰라, 프랑코 등이 배속되었던 아프리카 군단뿐인데, 이 부대는 스페인령 모로코와 스페인령 사하라 식민지의 치안 유지를 위해 편성한 부대로 현지인 반란 진압[41] 때문에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인 실전 경험이 있던 집단이다. 그래서 국민파의 초기 진공과 최종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하여간 양측의 허튼 짓으로 속전속결로 스페인 전국의 장악을 계획한 반란의 애당초 목표는 거의 실패에 가깝게 진행되었지만 공화정부 역시 단기간 내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 수 있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적어도 본토의 35%, 당시 스페인 인구 2500만 명 중 1100만 명 정도가 국민파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내전은 이제 서로 장악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장기전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혼란의 극치라고 할 정도로 국민파 지배지역과 공화국 지배지역이 섞여 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서 이후에 벌어질 결과를 생각해 볼 때 공화파의 패배는 이 쿠데타 과정에서 이미 상당히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라고사, 세비야, 바다호스 등 내전 초기 국민파의 핵심 전략적 거점이었던 상당수 도시들에는 쿠데타 세력과 결사항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 계열 전투 노조원들 수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공화파 수상이었던 카사레스 키로가가 쿠데타 음모를 쿠데타 발발 이후 4일째까지 부인하고 또한 이에 대비하여 노조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라는 조언들을 듣지 않았고 결국 국민군에게 (무기만 있었으면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한 것처럼 소수인 쿠데타군을 밟아버릴 수 있었던) 좌익 전투 노조원 수만 명의 목숨과 대도시 여럿만 내 주고 말았다. 이는 스페인 내전에서 좌우파가 모두 참고한 러시아 혁명에 근거한 것이다.[42]
특히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하더라도 '붉은 세비야'라 불릴 만큼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전국적으로도 제3의 도시였던 세비야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국민파의 케이포 데 야노(Queipo de Llano)에게 상실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단 세비야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가난한 소작농들이 인구의 대부분이라 좌경화가 강한 지방이었고[43][44][45][46] 해군을 여전히 공화파가 잡고 있으며 이 당시 항공 기술은 대규모의 병력 수송에 부적합했으니 이 세비야의 쿠데타만 잘 막았으면 스페인 내전의 남부 전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안달루시아에서 깨적깨적 진군하는 국민군을 막느라 똑같이 낭비했던 전력을 파시스트 세력의 중심이었던 북부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비야를 먹지 못하면 세비야에서 차타고 한 시간 거리 정도밖에 안 되는 당대 스페인 최대의 군항이었던 카디스를 먹을 수 없고[47] 카디스가 없었다면 쿠데타 세력은 무슨 마법을 부려도 국민파의 핵심이었던 모로코 출신 아프리카 군단을 꾸역꾸역 스페인 본토로 실어나르지 못해 야전에서 공화파에 대해 우위를 점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화파 정부가 세비야를 뺏김과 동시에 카디스를 빼앗겨 버리는 바람에 군항에 남아있던 해군마저도 국민파에 강제 편입되어 버린다. 결국 공화국 정부의 귀중한 해군들도 날아가게 되어 버린다. 안 그래도 해군이 부족한 마당에 결국 육지에선 국민파에게 아프리카 군단의 상륙교두보를 뺏기고 공중에선 독일, 이탈리아 항공기가 판치는 바람에 공화파 해군은 남은 전력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상황이 공화파 정부가 세비야, 카디스 일대를 장악한 채 흘러갔으면 국민파는 뭔 짓을 해도 1939년 여름 이전에 전쟁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며 이때까지 내전이 이어졌으면 우리가 잘 아는 나머지 유럽사의 흐름 때문에 더이상 내전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고 스페인이 프랑코 통치 아래 40년간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군대의 질과 외부의 지원, 장비, 내적 통합 면에서 국민파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있었던 공화파 정부는 이렇게 초반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자 전쟁 내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의 초반 비협조적인 태도도 내전 발발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경우 심지어 카나리아 제도의 프랑코에게 비밀리에 항공기를 제공했으며[48] 프랑스의 레옹 블룸 내각 역시 중립조약을 근거로 소극적 태도를 취했고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한 3만 5천에 달하는 스페인 아프리카 군단이 별 견제 없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본토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나치 독일의 해협 견제 덕이었다.[49]
물론 공화파 측도 당하기만 하지는 않아서 이들 폭격기들을 격추시킬 수 있는 소련제 단엽기 I-16을 400대 넘게 주문했지만 첫 실전 투입은 1936년 11월에야 이루어졌기에 초기에는 제공권 장악에 어려움을 겪었다. 심지어 영국령 지브롤터는 공화파 해군에 연료를 판매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독일 수송기가 스페인령 모로코로 식품과 물자, 연료를 수송하도록 승인했다. 당시 영국은 파시즘보다는 공산주의의 팽창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그 시작을 군부가 주도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단순 쿠데타 차원을 넘어서 내전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제2공화국 자체를 비토하는 감정이 우파 내부에서 팽배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전 이전 총선 당시 우파들은 선거에서 대부분 CEDA에 표를 던졌는데 이 CEDA에서는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제2공화국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폐지하자'는 주장을 했다.[50] 우파 중 가장 공화국에 온정적이었던 파벌은 공화 우파 파벌인데 물론 이들 중에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유지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제2공화국에서 보여준 혼란과 정치적 테러에 염증을 느꼈고 결정적으로 공화국 경찰의 호세 칼보 소텔로 살해 사건을 계기로 반란을 지지하게 된 사람도 많았다. 당시 참여를 두고 협상 중이었던 카를로스파[51] 도 그랬고 바지사장이지만 프랑코 이전 국민진영의 수장 역할을 한 미겔 카바네야스와 프랑코 본인이 이런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프랑코는 쿠데타를 본격적으로 설계한 몰라 장군과 지속적으로 계획에 관해 의견을 주고 받았지만 6월 하반기에 이르기까지 본인은 쿠데타 참여를 크게 꺼렸다.[52] 심지어 6월 하반기에 쿠데타에 참여하겠다고 했음에도 쿠데타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어서 발을 뺄 태세를 보였고[53] 몰라는 이에 경악해 프랑코 대신 산후르호에게 모로코 주둔군을 맡기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호세 칼보 소텔로 살해 사건이 터진 다음날에는 협상에 미적대던 카를로스파도 그렇고 프랑코도 그렇고 다들 본격적으로 적극 가담하기로 입장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 내전의 전개[편집]
반란 이후 단 며칠 만에 국민파가 갈리시아, 카스티야이레온, 라 리오하, 나바라 등 북부 지역과 카나리아 제도와 발레아레스 제도, 스페인령 모로코를 장악한 가운데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이자 스페인군의 최정예 병력이던 프랑코 휘하의 아프리카 군단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송 지원을 얻어 본토에 상륙하면서 급속 진격하여 엑스트레마두라와 안달루시아를 장악하자 국민파가 통제하는 영토가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공화파 군대는 혼란에 빠져서 한때 수도인 마드리드의 일부 지역까지 국민파에게 내 주었지만 소련에서 들여온 T-26, BT 전차, I-15, I-16 등의 무기와 해외에서 몰려온 국제여단의 분투로 간신히 프랑코의 진격을 막았다.
이로 인해 내전은 고착화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민파의 프랑코가 점차 내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코는 평소 상당히 굼뜨게 움직였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파의 공세가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공화파의 자폭이었다. 점점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공화파는 선전의 목적으로 공세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지면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비스탈린주의자 장병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비난하고 숙청했으며 덕분에 알아서 병력과 장비를 까먹게 되었다.
4.1. 공화파의 상황[편집]
앞서 언급했듯이 공화파는 사기는 높았으나[55] 단결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 내전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국공내전 당시 마오쩌둥에 비견할 만한 냉혹하고 카리스마적이면서 좌익 세력의 구심점이 될 만한 정치적 역량을 갖춘 지도자가 끝까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문제는 민주주의 정부가 이런 민주주의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지도자상이 필요했다는 점이었다.
우선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스페인 제1의 공업지대인 바스크 지역은 일단 공화국 정부 편에 서서 국민파와 싸우기는 했으나 공화국 정부와도 별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데[56][57] 내전 발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파한테 포위당해 고립당하자 남쪽의 공화국 정부의 지원 없이 국민파와 전쟁을 치르다가 그대로 박살났다. 그리고 이렇게 국민파가 꿀꺽한 바스크의 산업시설은 국민파가 전쟁 수행에 요긴하게 써먹으면서 국민파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에서는 국민군과 싸우는 와중에 아나키스트들과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의 혁명 여부에 대한 견해 충돌로[58] 같은 편끼리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내전에서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했는데[59] 이 사건은 공화군 내 결속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바르셀로나 내전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ㅡ영화 <랜드 앤 프리덤> 등을 참고하면 좋다. 또 국민파 소속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의 '제5열' 드립 이후[60] 전쟁이 진행될수록 공화국 내 분파들 간에 '우리들 가운데 제5열이 있는 것 같아'란 의심이 갈수록 강해진 데다 제5열에 대한 두려움이 공화국 내의 소수파들을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공화군의 결속력은 더욱 막장의 바닥까지 떨어져 갔다. 위에서 서술한 바르셀로나 내전 같은 경우에도 양측이 서로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저놈들이 바로 제5열이다!!' 였다.[61]
또 군부의 지도력이 부재했으며 결정적으로 국민군보다 전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군대를 지휘한 덕분에 가지고 있던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앞서 언급한 온갖 뻘짓을 하면서 말아먹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내전 발발 당시 정규군 영관급 이상 고위 장교 60%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62][63][64][65] 했고 지금까지 스페인의 헌병군 노릇을 하는 순찰 경찰대(Guardia Civil)[66] 70% 이상이 반군 측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전쟁 발발 이전 스페인군이 비교적 약군이었다 한들 당장 군사경험자와 무경험자의 차이가 이리 확실하게 나니 공화국 측은 처음부터 심각한 군재 부족에 시달렸고, 의미 있는 시도는 여러 번 했지만 끝까지 본질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프랑코 한 사람 밑에서 굳게 단결한 국민파에게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공화파 정부는 당시 국제 관계의 역학 자체가 아무리 공화파가 동정을 많이 사도 소위 말하는 '외교적 승리'라는게 불가능하다는 게 뻔히 보이는 와중에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한 삽질성 과시용 공세를 한 두 번도 아니고 1937년 중반부터 브루네테, 테루엘, 에브로에서 세 번이나 벌인 끝에 독일과 이탈리아제 무기로 중무장한 국민파가 쉽게 야전에서 공화군을 격파할 수 있도록 소중한 병력과 물자를 갖다 바쳤다. 공화파가 선전하거나 이겼던 쿠데타 당시 바르셀로나 사수, 마드리드 방어전, 하라마 고속도로 회전, 과달라하라 전투 같은 경우는 거의 대부분 내전 초기 공화국의 실제 군사력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군사적으로 공화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전투 노조 민병대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도시, 마을에서 벌인 수비전이거나, 국민파의 의표나 혹은 이탈리아군과의 연계 과정에서 생긴 실수를 어찌 잘 노려 거둔[67] 경우였지, 일반적인 대규모 야전에서 공화파는 끝까지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차라리 스페인 특유의 험한 산지를 이용해서 게릴라 농성전으로 갔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68] , 실제로 1938년 중순 발렌시아의 험난한 산지에 XYZ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설치해 국민파의 공세를 돈좌시킨 적도 있었던 만큼 그 실효성은 더 높았다.[69] 게다가 공화국의 수뇌부가 이렇게 바보같은 공세를 남발하기 시작한 시점 자체가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이후로 원래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정파간 다양함이 사라지고 대중적 기반은 적었던 주제에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설친 공산당과 이와 손을 잡은 후안 네그린 총리가 스페인의 인민전선 내 다양성을 강제로 제거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통일전선을 세우려고 한 후였다.[70] 이전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전혀 없이 공산당 쪽 지도부만 자기들끼리 짜고 전쟁을 해먹으려고 하니 이런 삽질을 태연히 저지른 것.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 건 공화국이 막상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니 제대로 망조가 났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이런 스페인 내전의 공화진영 내 파벌 갈등은 막장 그 자체였는데 바르셀로나에서 아나키스트와 정부 측 간의 내전이 발생한 것은 물론이고, 바르셀로나가 함락된 이후 패전 직전 마드리드에서 반소련적인 카사도 대령과 미아하 장군[71] 같은 군인들과 정치인들이 역시 들고 일어나 프랑스로 피난 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사건이 있었다. 프랑코는 이런 호재가 터지자 카사도 대령과 항복 조건을 두고 대화를 하는 척 했다가 결국 그냥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게 되었다. 즉, 공화진영은 남베트남마냥 망하기 직전까지도 자기들끼리 싸웠다는 거다. 애초에 인민전선 정권 자체가 서로 이념적 지향성이나, 기반이나 달랐던 정파들이 서로 내부에서 권력 분배 관련 합의를 하기도 전에 쿠데타가 터지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CNT, 지역 민족주의자들 같이 애초에 민족국가, 기본적인 헌정 질서 인정 여부 자체가 사회노동당, 그리고 내전 중엔 공산당이 장악한 공화 정부와 달리 하던 정파들이 바르셀로나, 바스크 같은 실제 '국토' 같은 독자적 물리력까지 얻으면서 이런 분열은 더욱 더 심해졌다. 전쟁 와중 급부상한 공산당은 이런 분열상을 타계하고 안정적인 전시 정부 체제를 꾸리려고 하였으나 당장 따라오는 소련의 지원이 막강하긴 했어도 애초에 전쟁 이전 스페인 내부에서 독자적 기반이 너무도 약했고, 오히려 갈수록 스탈린주의적 패악질로 인해 정파 간 불신은 더 조장하면서 결국 공화파의 내부 분열은 시작부터 끝까지 치명적인 패인 중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공화파를 지원했던 소련의 태도도 문제였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에 따르면 후술할 추축국의 태도와는 달리 소련은 물론 공화군이 이기면 좋겠지만 애초에 개입할 당시만 해도 당장 서방 세계를 자극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스페인 공화파 정부 편을 안 들어주면 세계적으로 좌파들에 대한 지도력에 문제가 생기니 지원해 주되 최소한만 지원하자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리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지원과 달리 그 지원도 결국에는 스페인 공화정부가 가진 금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거기다 환율도 소련에 유리하게 정하여 환차익을 상당히 챙기기도 했다.[72][73] 거기에 더해 1937년부터는 중일전쟁도 터졌기 때문에 주요 관심사가 그쪽으로 가버렸고 그 지원 역시 스페인이 애걸복걸해서 겨우겨우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상황이 이랬다 보니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은 장비와 물자의 부족으로 큰 문제를 겪었다.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서 구한 규격이 제각각인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 권총들을 쓰다 보니 총에 맞는 탄환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74]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안 맞는 탄환을 장전했다가 총기가 고장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거기에 소련이 제공한 무기들은 전쟁 초반만 해도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당시 노획한 다국적의 구식 무기들이나 러시아 제국 시절에 생산/운용하던 무기들이 다수였는지라 안 그래도 복잡한 보급체계를 몇 배는 더 꼬아 놓았다. 게다가 소련은 이런 재고 무기를 전부 소진하고 나서야 DP28 경기관총이나 PPD 기관단총 등 자국산 최신 무기를 원조하지만 이마저도 전부 무상지원이 아닌 유상지원이었던 데다가 국민파를 지원하던 파시스트 국가들의 견제에 최신 무기들이 제대로 하역되지도 못하면서 무기 부족 현상은 거의 항상 공화파를 괴롭혔다. 잡다한 구식 무기를 최신 무기로 대체하고 보급을 일원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75]
무기뿐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다른 물자에서도 공화군의 보급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국민파 편에 선 이탈리아 왕국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공화파 항구를 해상봉쇄했고, 귀중한 소련산 군수 물자들이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오지도 못한 상태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잠수함과 군함들 사이에 껴서 지중해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일도 잦았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타 유럽국가들이 군 보급용으로 잘 썼던 철도교통은 노조들이 초반에 장악하는데 성공하고도 분기점들이 다 박살난 상태라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해군은 내전 초기부터 거의 전부가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처럼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병들이 장교를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선에 사병만 있고 장교가 없다면 전투는커녕 항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당연할뿐더러 무엇보다 지휘체계가 전무하므로 이 시점에서 스페인 해군은 그냥 무늬만 해군이 되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국민파가 공화국 해군을 제압하여 도리어 공화정부를 봉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의 부족으로 완전 봉쇄까지는 하지 못해서 소련이 보낸 무기들을 실은 선박들이 간간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이 해상 수송작전을 지휘한 이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러시아 항공모함에 붙은 그 이름이 맞다.
1936년 스페인은 에스파냐급 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 2척을 비롯하여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9척, 수상기모함 1척, 잠수함 14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국민파 측에 합류한 함선은 전함 1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척에 불과했다.[76] 해군 항공대도 거의 공화파로 남았다. 국민파에 합류한 함선들은 개전 직후 페롤 해군 공창이 국민진영에게 점령되면서 도크에 있던 중순양함 카나리아스와 발레아레스같이 통째로 국민진영에 속하게 된 케이스이다. 전함 알폰소 13세는 국민파, 하이메 1세는 공화파의 기함이 되어 서로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장교진의 공백, 독일과 이탈리아의 빠른 개입과 제공권 장악으로 전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일부 함선은 물자를 싣고 오는 선박 호송을 위해, 일부는 바스크를 비롯한 북부지역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차출되어야 했다.
공군도 거의 공화파 측에 남았다. 주로 뉴폴 NiD 52나 브레게 19 같은 항공기가 주력이었고 전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제대로 된 공중전은 독일, 이탈리아의 He 51, Ar 68, CR.32와 소련제 I-15, I-16, 투폴레프 SB 폭격기가 맞붙는 1936년 11월 경부터 시작되었다. 여하간 공화파는 모을 수 있는 항공기는 다 모으려 했는데 소련제 항공기 외에도 미국으로부터 그루먼 FF,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S-31, 프랑스로부터 D.371, D.500 등을 구입했다.
4.2. 국민파의 상황[편집]
공화파의 혼란한 상황만 본다면 상대적으로 일치단결된 국민군을 운 좋게 지휘한 행운아 프랑코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국민파 역시 내부 단결이 그리 잘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되려 국민파를 형성하는 왕당파, 카를리스타, 자본가, 팔랑헤, 공화주의[77] 우파는 모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위치에 있어서 공화파보다 일찍 내분이 터질 뻔했으나 프랑코의 수완에 의해 다 찍어눌린 것이다. 물론 프랑코의 경쟁자 대부분이 비행기 사고로 죽어버리는 등 운도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구체적으로 팔랑헤당은 에른스트 룀과 아돌프 히틀러가 서로 대립했던 것처럼[78] 이념적으로 부유층을 적대하는 파[79][80] 그렇지 않은 파가 병존했고 또한 가톨릭 색채가 짙고 지방자치를 선호했던 카를리스타[81] 와 반목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당파도 부르봉 직계를 지지하는 만큼 부르봉 방계를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 공존이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국민파의 지도부도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82] , 후안 야구에[83]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라몬 프랑코[84] , 미겔 카바네야스[85]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헌정체제 자체는 공화정을 선호했던 반면 카를리스타와 알폰소 13세파 왕당파들은 왕정 복귀를 원하는 등 내부적 반목의 씨앗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코가 국민파의 내부적 반목 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힐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운이 굉장히 컸다. 팔랑헤의 경우 개전과 동시에 감옥에 있었던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86] 가 공화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고 기존의 자본가 정당인 CEDA의 당수이자 자본가 세력 자체를 대표했던 힐로블레스는 내전 발발 이전 정치 투쟁에서 이미 지도력이 큰 타격을 입은 후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87] 퇴위한 알폰소 13세를 포함한 직계 왕족들과 카를로스파 왕위 사칭자였던 하비에르[88] 는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군부에 의해 귀국이 차단되었고[89] 범 보수 왕당파의 정치적 당수이며 우익 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은 내전 발발 직전 좌익 테러로 인해 암살당했다. 군부 내에서는 원래 국민파의 지도자였던 호세 산후르호[90] 는 내전 발발 3일만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고[91] 프랑코의 경쟁자들인 마누엘 고데드는 바르셀로나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화파 민병대에게 체포된 후 총살, 장군인 주제에 엄청난 뻘짓을 벌여 전쟁 수행 능력이 엉망이라고 낙인찍힌 지 오래였던 에밀리오 몰라 또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전쟁 끝날 때까지 동네 왕초 노릇하며 프랑코의 눈에 자주 거슬렸지만 카우디요[92] 의 권좌를 위협할 그릇은 못 되었고 결국 전쟁 후 실권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 외에 프랑코의 소싯적 상관인 호세 미얀아스트라이[93] 나 형 니콜라스 프랑코, 동서인 라몬 세라노 수녜르[94] 같은 이들의 도움도 컸다.
왠지 굉장히 절묘한 타이밍에 비행기들이 많이 추락한 것 같긴 한데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군사기술 발달사의 관점에선 저런 우익 진영의 수장들이 직접 몸으로 숭고한 시범을 보이며 대규모 병력의 항공 수송이란 분야에서 초기 발판을 닦은 역사적 경험이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당연하게 프랑코가 수작질 부린 거란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당시 항공 수송 기술 자체가 이만큼 초기적이고 불안정했던 만큼 타이밍과 대상이 굉장히 미묘하긴 해도 새로 발견되는 증거가 없는 한 딱히 근거는 없는 소리다. 때문에 당시 거의 독점적인 여객 수단은 열차였고 비행기는 이런 내전 상황만큼 정말 어지간히 시급하고 기밀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에나 활용되었다.[95] 사실 국민파 지도자들이 대규모 군사적 공중수송이란 새로운 군사 기술 분야의 의도하지 않은 선구자(...)가 된 것도 정부 몰래 최대한 빨리, 은밀하게, 식민지에서 본토로 병력 수송을 해야 했던 쿠데타 상황이란 특수성 때문에 내린 불가피한 결정에 가까웠다.
힐로블레스, 케이포 데 야노[96] 등의 인물들은 능력이나 카리스마 면에서 애초에 프랑코의 상대가 안 되었고, 각종 왕당파의 수장인 왕족들이야 외국에 망명해 있었지만 우익 군부의 수장이었던 호세 산후르호, 스페인의 자생적 파시스트 팔랑헤의 지도자였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범보수파의 정치적 수뇌였던 칼보 소텔로 등은 짬이나 연륜이나 카리스마나 능력이나 프랑코에 의해 하등 밀릴 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렇게 정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국민파 내부 균열 또한 대패질이 되자 프랑코는 팔랑헤식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도 아니고, 왕당파나 카를리스타식의 봉건적 신정 정치도 아닌 자신만의 권위주의 독재를 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데 리베라의 후계자 마누엘 에디야 등이 팔랑헤의 혁명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자 마누엘 에디야도 숙청해 버렸다. 하지만 팔랑헤는 배신당했다고 보기에 애매한 게 호세 안토니오 사후 팔랑헤당 후계자가 된 마누엘 에디야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같은 팔랑헤당 당원들까지 공격하고[97] 프랑코에게 위협을 가하자 프랑코가 숙청한 것이고[98] 우익들을 통합할 때도 팔랑헤당[99] 중심으로 통합한데다 프랑코 정권 안정화 이후에도 한동안은 완전히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 성향을 버리지는 않았다. 44년부터 연합군이 이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연합군에게 잘 보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100] 경제도 번영하고 외국물도 먹게되면서 슬슬 파시스트 물이 빠지게 되었다.
왕당파의 경우 프랑코의 후계자는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되었기 때문에 왕당파는 배신당하지는 않았다고 보지만[101] 반대로 왕당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배격한 채 프랑스 혁명 이전 신정적 봉건 자치사회로의 회귀라는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비전이 있었던 카를리스타[102] 는 배신당한 게 맞다. 공화파와 국민파의 내부적 단결에서 핵심적인 차이는 그냥 프랑코가 군부와 아프리카 군단 내에 독자적인 세력기반이 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정치적 라이벌들을 상대로 간을 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협상할 줄도 알고 경우에 따라선 통수질을 치는 센스가 훌륭했기 때문이다.[103]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 부각이 덜 돼서 그렇지 내전기 동안이나 프랑코 정권 초기나, 후기에나, 프랑코 사후에나 이런 저런 우파 진영 내부 폭력 사태도 꽤 있었다.[104]
사실 우파도 내전이란 비상 응급상태에 일시적으로 뭉쳤던 게 하나의 정권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 시작은 팔랑헤, 카를리스타, 알폰소파 왕당파, 부르주아 민간 정치인, 군부, 헌병군 전부 다 반공주의, 가톨릭을 제외하면 구심점이 딱히 없고, 독자적인 기반과 내부 풀이 있는 소집단들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건 좌파 공화진영하고 큰 구조적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코의 외국 후원 세력들도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뭐 사실상 후원 세력인 영국과 독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바티칸도 사실 독일하고는 척지는 사이였다.[105] 그 영향을 받아 카를리스타는 당시 스페인에서 청색사단에 대해 참여를 거부했다.[106]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오직 '프랑코 개인'에게만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했으며 가톨릭 교회 역시 도움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국민진영의 각 정파 중 반공 외에 통일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주제 중 하나가 친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이념적 통일성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실 가톨릭 교회는 명분, 도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국민진영이 그나마 해외에 명분적인 면에서 어필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요소이기도 했다. 본질적인 폭력성이나 학살의 빈도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가톨릭 교회 사제들은 애초에 구체적인 직업적 네트워크로 연계가 탄탄한 직종인 만큼 내전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을 통한 전 세계 가톨릭계를 향한 언론전으로 특히 가톨릭 노동자 계층이 막 중요한 유권자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영미권 나라들의 외교적 영향력을 통해 공화파를 고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4.3. 국제적인 연대를 통한 지원[편집]
요약하자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잘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1930년대 파시즘의 세계적 연승을 두려워하던 전 세계의 좌파와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1936년 7월 쿠데타를 막음으로써 만주에서 독일, 에티오피아에서 루마니아까지 국제 파시즘 세력의 연승 행렬을 막은 것처럼 보였던 민주 스페인에 열광적인 심적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는 전쟁에서 이기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정신적, 문화적 연대 정도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개인, 잘해봐야 정당 차원에서 직접 가서 싸우다가 죽는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대로 이때까지만 해도 열강 정부들은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는 사태보다는 남유럽 지중해의 소련이 탄생하고 언어, 문화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중남미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였다. 결국 열강 정부들은 쿠데타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거나 국내 다른 세력들이 이들을 지지하는 걸 방조함으로써 프랑코와 파시스트들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07]
상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 공화군과 국민군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공화군은 수적 우위와 혁명에 대한 열기라는 점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가는 전투 부대였던 아프리카 군단이 국가주의파 측에 있어 군사적으로는 박빙 상태에 있었다. 쌍방에 제공된 무기들의 경우 다른 건 제쳐두고 대충만 따지면 항공기나 조종사들 질은 국민진영이 훨씬 나았고[108] 전차는 공화진영이 훨씬 나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1936년 가을, 국민군의 진격이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막혀 버리고 원래는 일시적 '쿠데타'였어야 할 충돌이 장기적인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후안 야구에는 지금 상황에서 공화군이 역습을 가하면 바로 털려버린다고 심각한 걱정을 표했고 공화파 대통령 아사냐는 반대로 "주요 공업 지대, 대도시는 다 우리 편에 있는데 저들(국민파)이 어찌 전쟁을 지속한단 말인가?"하며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국민파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이웃나라인 포르투갈 제2공화국의 노골적 지원을 받고 있던 데 반해 공화파는 외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분명 공화파가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합법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주국가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은커녕 방해만 받았다. 결국, 스페인 내전의 운명은 결국 스페인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외교전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4.3.1. 공화파에 대한 지원[편집]
공화파 정부는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중립정책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심지어 돈 주고 사겠다는 무기조차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판매를 거부해 버렸다.[109] 주요 열강 중에서 소련을 제외한다면 일본 제국(?)이 주퇴복좌기도 없는 구형 야포인 31년식 속사포를 내 준 적이 있긴 하다. 중견국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폴란드가 자국에서 노후화되어가고 있던 르노 FT-17 전차 중고품 등을 판매해 줬으며[110] 폴란드의 이웃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북유럽 국가 핀란드 역시 Vz.26 경기관총과 KP/-31 기관단총 등 자국산 총기들을 프랑코의 국민파와 내전 중이던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군에게 판매했다.[111]
레옹 블룸 총재 아래 같은 연립 좌파 정권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는 내전 초기까지만 해도 공화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물자도 보내 줬으나 영국 보수당 내각의 적극적인 반대와 자국 내의 극심한 좌우 갈등 때문에[112] '스페인 내전이 프랑스 내전으로 이어진다'는 불안으로 결국 지원을 끊고 중립 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레옹 블룸 내각은 적어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국민파를 지원하는 것만이라도 막으려고 영-불-독-이-미국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태 비간섭 위원회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다.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딴 거 무시하고 계속 지원을 해 줬고 영국의 보수당 정권이 이를 암묵적으로 방관하여 결국 국제적 비간섭 정책은 국민파에게 유리했다.
영국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탠리 볼드윈 총리의 집권 보수당이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으므로 공화국을 돕기는커녕 프랑코를 유배지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태워간 비행기를 제공해 주는 등 되려 은근히 국민파를 도왔다.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은 국민군이 이탈리아나 독일과 교신할 수 있도록 통신기까지 빌려주었다.[113]
미국도 이때만 해도 고립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여론 자체는 공화정부에게 호의적이었지만[114] 미국 가톨릭계가 국민파를 지지함에 따라 가톨릭 표를 잃을까 봐 우려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금수조치를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결론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결국 1937년에는 교전 중인 어떤 국가에게도 무기를 판매하지 못한다는 중립법을 통과시켰다. 이 와중에도 헨리 포드 등의 기업가들은 프랑코에게 거리낌 없이 헌금을 보냈고 텍스코 같은 석유 재벌들은 돈을 받지 않고 석유를 외상으로 보내 줬다.[115] 하지만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여단에 투신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이들은 전후 매카시즘 시절이 되자 반미국적행위 위원회에 한 번씩 붙들려 갔다.[116] 단 루스벨트와 일부 집권 민주당 인사들은 공화국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적으로 일부 지원을 해주기는 했다. 특히 나치 독일을 경계한 루스벨트는 프랑코의 승리가 라틴아메리카에 친독 파시즘이 퍼지는 것을 초래할까봐 두려워했다.[117]
대부분의 군사원조는 소련이 제공했다. 대량의 소련산 군장비, 석유를 포함한 물자 및 전투요원, 군사 고문단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는 무상지원이 아니어서 이들을 보내주는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시 세계 4위의 금 보유국이었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700톤, 당시 가치로 약 3억 5,000만 달러)[118] 를 그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지고 공화파가 가진 금괴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지원을 끊었다. 그나마 한 지원이 있다면 스페인 공화파들의 부모 잃은 자식들을 소련에 데려가서 먹여주고 재워준 정도.[119] 게다가 위에 서술한 지원을 대가로 한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농간질도 심각하게 부려서 도와준 만큼 해악도 심각하게 끼쳤다.
당시 소련은 스페인 내전을 국제 파시즘 세력의 소련을 겨냥한 세계대전의 전조로 해석했고, 소련 내부에서 스페인 내전을 재현하기 위한 반혁명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소련의 국가안정성을 제고하는데 급급했지 후하게 스페인에게 퍼 줄 처지가 아니었다. 니콜라이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장으로 대숙청을 지휘하여 모스크바 재판이라는 처형쑈를 연출하던 것이 이 시점이었고 적어도 1938년 겨울에 라브렌티 베리야로 내무인민위원장이 교체되기 전까지 스탈린은 내부청소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면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먹고 폴란드를 회치기 직전이었으므로 역시나 스페인 따위를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미 1937년에 발생한 중일전쟁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소련 침공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고 소련 침공할 일이 없는 프랑코 따위보다야 일본 견제를 위해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더 해 줘야 했다.[120] 낙후되었던 소련이 전간기 시점에는 이미 스탈린의 급진적인 공업화 노력으로 군수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수출할 수 있는 국가로 거듭난 건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 둘 다 관여한다면 자연스럽게 역량이 분산될 수밖엔 없었다. 중일전쟁의 폭발은 공화파 측에는 추가로 더 나쁜 영향력을 끼쳤는데 구미 사회 언론의 관심이 스페인 내전보다는 새로 터진 중일전쟁 취재에 더 쏠리면서[121] 이전까지 받던 온정적 관심조차 점차 희미해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외부적, 도의적 관점은 일단 재껴 놓고 보면 소련 입장에서 스페인은 어쨋든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조국으로서 대놓고 방관할순 없는데, 막상 현지 정치판엔 비코민테른 계열 독립 공산주의자,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공산당을 통해 '사회적 파시스트'라 실컷 욕하던 '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러시아 혁명 초기부터 서로 사이좋게 폭탄 주고받던 아나키스트들이 득실거리던 막상 급한 불만 꺼지면 돌아설 게 뻔한 (코민테른의 관점에선) '이단'들이 장악할 가능성이 높은 전형적인 계륵이었다. 심지어 지리적으로도 어디 대충 소련 자체에서 낡은 물자, 예비 부대 몇개 파견하기 쉬운 가까운 나라도 아니다.
물론 이 시점에도 반혁명 5열이 산재해있다는 편집증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은 별개의 얘기다. 거기에 더해 소련은 사실 러시아 혁명 때도 우크라이나에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들과도 교전했던 적이 있었다.[122] 내전 초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본거지인 바르셀로나로 파견된 어느 코민테른 요원은 눈치없이 아나키스트들을 상찬했다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숙청되기도 했다. 공화진영에 파견된 소련 고문, 요원들은 대외적으로는 공화파 내 제5열 숙청에 열을 올렸고 온화한 스페인 땅[123] 에서 편히 지내면서 나름 꿀을 빨았지만 사실 이들조차도 대숙청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니, 뭐 사실 자유롭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당시 주스페인 소련 대사이자 소련의 군사 지원 밑 국제여단 모집, 인민전선 내 비공산당 좌파 숙청을 주도한 볼셰비키 원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부터 시작해서 많은 NKVD, 붉은 군대 간부들이 스페인에선 다른 비공산주의 좌파를 숙청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본국 송환되더니 본인들도 영문도 모르게 사형 or 굴라크행이 되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기구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은 비단 소련인 참전용사 본인들뿐만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간 공산당계 국제여단원, 스페인 망명객들도 상당수는 마찬가지로 해당됐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몇 달 되지도 않아 갑작스럽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어제만 해도 아주 열심히 외쳐대던 반파시스트 선전도 한동안 안 하게 되고 소련이 지금까지 스페인 공화국에게 퍼주었던 지원도 갑작스럽게 정치적 부담요소로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124] 그나마 이런 우여곡절에서 무탈하게 소련으로 복귀한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은 훗날 할힌골 전투와 대조국전쟁에서 남들보다 일찍 경험한 현대 총력전의 경험을 보여주면서 전차, 전투기 에이스로 활약했다.[125] 이 외에도 이런 스페인계 고급인력들은 냉전 시대에 소련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외교전략에 요긴하게 쓰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짜 '순수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적 동지들을 돕자는 의도로 원조를 보낸 나라는 멕시코 혁명을 겪고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필두로 한 전직 혁명가들이 집권했던 멕시코밖에 없었다. 반란 발발 직후에 멕시코가 보내준 소총 2만 정과 탄약은 정말 모든 게 부족하던 시기에 도착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중립주의를 강경하게 밀어붙인 미국의 압력과 방해 공작, 그리고 멕시코 자체의 거리와 열강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지원 능력 때문에 판을 엎을 만큼의 힘은 못 되었다. 그래도 멕시코는 소련처럼 장사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내란이 끝난 뒤에 피난처도 제공해 주었다. 공화파 출신 난민들을 대거 받아 주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정착할 길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망명 세대로 대표되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이 나머지 서방세계로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결국 1939년에 득의양양해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리기 직전에야 루스벨트와 처칠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공화국을 도왔어야 했다고 이전에 보였던 두 국가의 행적을 후회하는 발언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며 결국 이 두 국가는 그 파시스트 세력들을 직접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으로 이전에 공화국을 돕지 않은 대가를 치뤘다.[126]
하지만 나머지 유럽과 미국이 스페인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의 참가는 없었지만 개인 차원의 의용병은 다수였고 이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하여 국민군에 맞서 싸웠다. 국제여단군의 구성은 대부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좌파나 유대인, 미국의 경우 흑인 등이 포함된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이나 단순히 스릴을 찾는 모험주의적인 동기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자국이 이미 파시스트들이나 우익 독재정에 넘어간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국에서 싸우던 파시즘과의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스페인마저 넘어가면 진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치열한 투지와 사기를 보여주었다.
- 공화파 정부에 대한 국가별 지원병 수(약간 오차는 있을 듯)
위 수치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정식적으로 집계된 공화파 정부 휘하에서 싸운 국제 여단원들만 친 것이고 공화파 측에서 싸우되 공화파 정부 휘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지휘 체계를 형성하여 싸운 POUM, CNT 등의 무장 노조 소속으로 싸운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비 소련 계열 사회주의 의용군 또한 대략 5,000명 전후 쯤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독립 노동당 소속 의용군으로 POUM 소속으로 싸웠던 조지 오웰과 아나키스트 CNT 산하 국제 의용병 부대였던 세바스티엥 퓌레 부대에 속했던 시몬 베이유.
안그래도 격렬했던 20세기 초중반의 복판에 자원해서 뛰어들어간 사람들이니 국제 여단은 종전 이후에도 전 세계 좌익 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적 성역으로 찬양받았는데 뒷 배경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니 그 운명도 기구했고 이런저런 의미 있는 일화도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하라마 전투에서 전사한 뉴욕 출신의 흑인이었던 올리버 로였는데 이 사람은 정식 미군의 역사는 아니지만 독립 국가 형성 이후 미국의 전쟁사상 최초로 유색인종이 백인 부대를 지휘한 경우로 역사에 남았다.
훗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가 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빨치산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이쪽은 사실 악명에 가까운 경우지만 슈타지의 수장이었던 에리히 밀케를 포함한 2차 대전 이후 동독의 국가 지도자 다수 등 냉전 초기 동구권의 지도자들이 본격 국제 좌파의 간판들로 명성을 쌓은 무대도 국제 여단이었다. 특히 독일 출신의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른스트 텔만 대대는 훗날 나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종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되어 대접받았다. 폴란드에서도 국제 여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의 폴란드 점령기에 대독 투쟁에 나섰고[129] 이들은 이후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영웅시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에서 보여주듯이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에 대한 대접과 처우는 대전기 이후 냉전 시대의 지정학적 논리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단 포츠담, 얄타 회담 이후 스탈린의 나와바리로 떨어져서 막상 현지 인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공산 정권이 소련군과 함께 '설립 당한' 동구권 국가에선 그나마 같은 공산주의자들끼리 때려죽이는게 허다했던 스탈린 시대 이후에는 정권 원로이자 혁명의 선구자로 존경받았으나 동구권 몰락 이후에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지에선 소련과 관련된 과거사 전반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도 '적폐'로 분류당해 공산정권 시절 세워진 이들과 관련된 기념비 등이 철거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후 반공주의가 강하게 자리잡은 영미권 출신 스페인 내전 참전자들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막상 2차대전 중에는 OSS, MI5 같은 정보기관원들도 이들의 경험과 연줄을 높게 사 한동안 특수 작전에 중용하기도 했지만 장교 진급은 일괄적으로 막으려고 했고 특히 미국의 경우 전후 매카시즘으로 인하여 취업, 주택, 여권 발급 등 각종 공민권에서 제약을 받는 등 적잖은 핍박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인 국제여단원들은 전후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혁명 이후 쿠바 정권에 대한 봉쇄 반대, 로널드 레이건 정권 시기 산디니스타에 대한 지원 등 미국 사회 내 굵직한 반체제 시민운동 등에 뛰어들면서 그나마 냉전 시기 반공주의도 한풀 누그러진 시절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은 사회운동계 원로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나마 전후 냉전 시기에 진영 자체로는 서방권으로 들어갔지만 국내 정치에선 항상 좌익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무엇보다 스페인 내전 자체와 대전기 레지스탕스 활동 와중 스페인 공화파에게 빚을 지게 된 프랑스, 이탈리아에선 스페인 참전장병들에 대한 공식적, 준공식적 대우나 사회적 입지나 성공적으로 정착한 편에 속한다.
아일랜드인 참가자가 300명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지리적+언어적 편의성 때문에 영어 화자들이 중심인 제11국제여단 영국인 대대에 편성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십몇 년 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 소속으로 싸웠던 베테랑 혁명가들이 당시 반대편 영국군의 대민 공포 전략으로 악명 높았던 Blacks and Tans 특수부대 출신자들을 만나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저런 천하의 원수들과 손잡으라고!?" 라며 노발대발했던[130] 부대원들의 반발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중 하나이자 아일랜드 사회주의의 시조부쯤 되는 인물인 제임스 코놀리의 이름을 딴 코놀리 전열(Connolly Column)이란 미국계 링컨 대대 소속 독립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4.3.2. 국민파에 대한 지원[편집]
- 국민파에 대한 지원병 수
이 외에도 필리핀, 헝가리나 미국, 호주 국적자들이 국민파 진영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터키 국적자들이나 나라 없는 난민 신세였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국민파 가담도 확인된다. 루마니아의 철위대도 군단을 보내어 국민파를 지원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꽤 있다. 일단 국민파에 자원한 600명은 극우파/파시즘적인 아일랜드 의용대였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정치집회당시 푸른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청색 셔츠단"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같은 방식의 복장을 입고 참전했다. 그런데 전선이 꼬여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한번 받더니 놀라서 그냥 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탈리아 왕국군의 경우 이탈리아 지원병 군단[136] 이라는 이름으로 완편 군단 수준의 지상군을 전개하고 75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배치했다. 거기에다가 해군함들까지 적극적으로 투입해 국민파의 해상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적어도 양적으로는 단순한 간섭 전쟁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장의 일각을 당담해도 될 만큼의 파격적인 투자를 한 셈. 규모만 놓고 보면 또 다른 중요 지원국이었던 나치 독일은 그냥 단순히 발만 걸친 수준이다. 기갑차량 140대와 270문의 야포, 62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군 35,000명과 모로코 레굴라레 15,000명이 45문의 야포와 7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있었고 80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던 공화파 군대 20,000명과 격돌한 1937년 과달라하라 전역의 전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전투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건 증명되긴 했다.[137] 대신 이탈리아는 자기네 앞마당인 지중해에서 잠수함으로 공화국으로 향하는 선박들을 격침하거나 아니면 발레아레스 제도를 기지로 삼아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스페인 동쪽 핵심지역을 공중폭격하여 공화파의 물자난을 유발하고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사기를 꺾게 하는 점에서 군사적인 기여를 했다.
이와 같은 쌍방의 개입으로 인해 이 전쟁은 각국에게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이 되어 버렸고 서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연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일본은 국민파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방공협정을 그 지렛대로 삼고자 하는 중이면서도 지원을 꺼렸다. 심지어 1938년 3월 5일에 순양함 발레아레스 호를 상실[138] 한 국민파 측에서 해군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에서 군함을 사고 싶다[139] 고 요청했을 때도 "새로 배를 건조해 달라면 해 줄 수 있지만 현재 보유한 현역 함선[140] 을 양도하기는 어렵다"는 등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끝내 팔지 않았다. 러일전쟁 시기에도 이미 구식이었던 31년식 속사포[141] 긴 하지만 오히려 공화파에 소량의 무기나마 수출하던 입장이었던 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일본은 확실히 국민파 편이었고 국민파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계속 보였다.
4.4. 게르니카 폭격[편집]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도시로, 독일군 파견대인 콘도르 군단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폐허가 되었다. 바스크 공식통계에 따르면 민간인 1,654명이 사망했다. 이 폭격을 게르니카 폭격이라고 하는데 폭격의 책임자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었다.
4.4.1.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편집]
게르니카 지역은 공화군이 후퇴하는 길목에 있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상당수의 공화군이 방어를 위해 포진하고 있었고 폭격 목표는 민간인이 아니라 퇴각로에 있는 다리였다. 문제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던 독일 공군 선도기들이 다리를 못 맞히고 주변에만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점과 그 때문에 발생한 흙먼지 때문에 후속 폭격기들이 목표를 제대로 못 잡고 '교량이 있을 예상 위치'에 마구 폭격을 해 댔다는 점이다. 즉 의도적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한 게 아니라 오폭이었다는 것이다.
정황을 보더라도 당시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만큼 후퇴로의 다리를 놓아 두고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물론 민간인 공격 자체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피해가 발생할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폭격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참고
4.4.2.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보는 주장[편집]
위와 같은 주장은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서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의 해당 사건 서술을 보면
으로 언급되어 있다. 물론 해당 서적에서 인용한 리히트호펜의 당시 기록에는 공화군의 후퇴 저지, 교란이 주 목적으로 언급되어 있다.1. 다리가 목표였는데 오폭한 것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콘도르 군단 전역자들이며 기상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도 틀린데다가[142]
최초의 폭탄은 도시 중심가에 투하.2. 다양한 종류의 폭탄 사용.(소이탄과 대인탄이 돌다리 부수는 데 필요한가?)
3. 국민파의 분리주의자들(카탈루냐, 바스크 등)에 대한 당시의 행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시범케이스로 찍었을 가능성 농후.
4. 인구 7천의 소도시에서 나오기엔 많은 사상자 수치라고 했으나 비버의 저술에 따르면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 있었던 상황
폭격으로 인한 피해나 영향 자체는 게르니카 폭격보다는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이탈리아 공군의 바르셀로나 폭격 쪽이 더 심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서방세계의 인종차별적인 경향 때문에 관심을 못 받은 감이 있다.[143]
4.5. 내전의 종결[편집]
공화파가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고 그나마 받은 지원도 뻘짓으로 날려 간혹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것에 반해서 프랑코는 앞서 언급했듯이 느리기는 했지만 목표지점을 결정하고 공세를 시작하면 성공했기 때문에 공화군이 장악한 지역을 하나씩 박살냈으며 1938년 2월 공화군의 결정적인 뻘짓인 테루엘 공세에 힘입어 아라곤을 점령하고 지중해까지 도달하면서 카탈루냐가 고립되어 버렸다. 공화국은 고립된 카탈루냐를 구원하기 위해 동년 7월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낸 에브로 공세로 최후의 도박을 벌였으나 이것 역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1939년 2월 버티다 못한 카탈루냐마저 함락되면서 프랑코는 마드리드와 발렌시아를 중심으로 한 남동부를 제외한 스페인 전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결국 공화정부 지도부는 프랑스로 도망갔고 이 시점을 기해 공화파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당장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들이 동료들을 숙청하는 꼴을 보다 못한 공화정부 내 중도파들과 숙청으로 가장 피해를 본 아나키스트 등이 손을 잡고 프랑스에 있던 공화정부에 맞서 국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144] 새 쿠데타 세력은 프랑코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승리가 확실했던 프랑코가 협상 따위에 제대로 응할 리는 없었고 결국 두 세력 다 똑같이 갈려나갔다. 따라서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했던 공화파는 프랑코에게 항복하였고 1939년 3월 28일 국민군은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프랑코가 대국민 라디오 연설로 내전 종결을 선언하면서 내전은 국민파의 승리와 제2공화국의 패망으로 끝을 맺었다.
내전 자체는 이렇게 프랑코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일부 공화군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계속해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들 망명 공화군을 가리켜 '마키(Maquis)'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자 마키는 대거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고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 이들은 다시 스페인 해방을 목표로 프랑코 정부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러나 냉전이 고착화되고 이들 게릴라를 지원해 주던 소련과 스페인 공산당이 이들을 팽하면서 고립된 이들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프랑코 정부군의 진압에 의해 거의 와해되었다. 일부는 60년대까지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5. 결과[편집]
5.1. 내전의 여파[편집]
5.1.1. 국내[편집]
전쟁 자체가 스페인의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우익 보수 세력의 반동으로 시작된 만큼 쿠데타 직후부터 국민파는 끔찍하게 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강 소개하자면 내전에서의 공화파 전사자가 11만, 국민파 전사자가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 지역에서 암살이나 처형당한 상대 진영 지지자 18만 이상.
내전 이후의 처형은 확실한 수가 남아 있지 않으나 확실한 건 1975년에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이유의 사형 선고는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내전 내내 국민파는 자신들이 한 지역을 장악하면 그 지방의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싸그리 처형부터 하고 보았으며,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축복을 받아 자행되었다. 당장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내전 종결 직후인 1939년에 스페인을 방문해 "세비야에서 80명가량, 바르셀로나에서 150명가량, 마드리드에서 200명 이상이 매일 총살 당하고 있다"고 충격을 표했으며 1940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한 고위 관료도 그 잔인함에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그 고위 관료가 다름 아닌 슈츠슈타펠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다.[145]
시대가 시대인 만큼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2차 대전이 터져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도 파란만장했다. 내전 이후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그 수는 약 50만으로 추산되며 절반만이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많은 수는 프랑스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혀 수배범 신세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검거되어 강제수용소[146] 에 끌려갔고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서 프랑코와 히틀러의 협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반송되어 총살당하거나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강제수용소의 이슬로 사라졌다.[147] 그러나 프랑스 정부에게 검거되지 않은 채 나치의 침공 속에서도 붙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망명자들은 이후 10여 년 이상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중에서 1만 3천명 가량이 비시 프랑스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으며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 군단에도 3천명 가량이 입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자유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 산하의 9중대(La Nueve)는 대부분 망명한 스페인 공화파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는데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당시 해방군을 맞이하러 나온 파리 시민들은 해방군이 "에보로", "테루엘", "게르니카", "바르셀로나 1936년 7월" 등의 이름이 도장된 전차들 위에서 공화파식 주먹 쥔 경례를 한 채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파리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Los españoles antifascistas saludan a las fuerzas libertadoras 반파시스트 스페인인들이 해방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1945년 여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해방 당시 수감된 공화파 스페인인들이 내건 현수막.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 3공 시절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및 자유 프랑스군과 연대하여 피 흘리며 싸워 준 은혜를 잊지 않았는지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는 서방에서도 프랑코 혐오증을 상당히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샤를 드골도 개인적으로는 프랑코와 더 가까운 우익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잔류한 망명객들을 후하게 대했고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도망 나오는 난민들을 적극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서 활동하는 반프랑코 레지스탕스와 후일 부상한 ETA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등 스페인 공화파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현재까지도 매년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여 치루어지는 파리 해방 기념 행사에서는 꼬박꼬박 프랑스 삼색기와 더불어 스페인 공화파의 공헌을 기리는 공화국 삼색기가 같이 진열된다.
파리 해방 기념일 행사에서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 군기들과 나란히 걸린 스페인 공화국 삼색기를 사열하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사실 프랑스-이탈리아 좌파 정치권에선 당장 파리 시장 안 이달고부터 스페인 공화파 망명 정치인의 손녀일 만큼 스페인 내전과 역사적 연고가 이리저리 깊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파나마, 페루, 에콰도르 등 다른 중남미의 스페인어권 국가로 망명한 공화파 인사들은 망명정부와 망명단체를 수립하여 1975년에 프랑코가 죽고 왕정이 복고되어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민주화 개혁을 시행할 때까지 저항했으며 중남미 각지의 현지 좌파들에게 정치적, 전술적 교육을 해 주어 훗날 냉전 시기 중남미 좌파 운동의 부상에 숨겨진 공로자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체 게바라가 유년기 정치적 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아버지가 매일같이 집에 불러 같이 놀던 공화파 망명객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원래는 군인도 아니고 각각 의사, 변호사였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을 군인으로 훈련시켜 준 것도 스페인 내전 당시 실패한 공화국의 발레아레스 제도 탈환작전을 지휘했으며, 원래 본인 출신지도 독립 이전 쿠바 도독부 시절 카마궤이가 고향이었던 군인 알베르토 바요였다.
거기에다가 공화파 고위 인사 1,000명 가량은 전쟁 말기 소련으로 탈출하여 그 중에서 수백 명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서 독소전쟁에서까지 싸운 경력도 있다. 내전 당시 공화파의 가장 유명하고 명망 높았던 장군 중 하나인 엔리케 리스테르가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가하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도 협력하여 결국 스페인, 소련, 유고슬라비아라는 3개국의 군대에서 장군 계급을 딴 진귀한 기록을 새우게 되는 등 공화파 잔당의 운명은 시대의 격조와 함께 이리저리 파란만장했다. 사실 공화진영에서 고생은 비공산당계나 비네그린계가 주로 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종전 시점에서 정부 요직을 차지했던 공산당원들은 주로 타이밍 맞게 배 타고 소련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중도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소련만큼 노골적인 빽은 없지만[148] 전쟁 이전부터 쌓아 온 커넥션도 많고 무엇보다 전후 서방의 냉전기 반공주의에서 그나마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서방으로 많이 망명 가 적지 않은 수가 특히 학계, 문화계 중심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가장 독박을 심하게 쓴 건 비스탈린계, 특히 아예 러시아 혁명 시절부터 공산당과 이를 갈아 오던 아나키스트와 독립공산주의 계열은 대부분 국내에서 죽든가, 프랑스로 육로로 망명했다 2차대전 발발 후 노르웨이에서 외인부대 소속으로 죽거나, 프랑스 점령 후 마우트하우젠에 끌려가거나, 비시 프랑스 정권 아래 북아프리카 수용소에서 강제노역 중 죽거나, 돌봐 주는 열강 빽 없이 사지로 몰렸다. 내전 이전엔 아나키즘과 사회노동당 좌파, 즉 비코민테른 계열 독립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스페인의 진보 좌파 정치지형은 이런 프랑코 정권기의 탄압과 정파별 상황에 따라 이후 나머지 프랑스, 이탈리아와 비슷하게 망명 중 처음엔 스탈린의 지령을 따르다가 유럽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공산당과 서방에 망명 가 있었던 사민주의 정치인, 그리고 인근 카톨릭 교회의 문화적 영향력 아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주의자들이 대신 주류가 되었다.
프랑코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군부와 정치권을 점점 장악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어 1975년에 늙어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 또한 냉전 당시 현지 좌파와 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중남미 현지의 우익 군사 독재자들에게 군사 밑 안보 고문을 파견하여 협력했으니 어찌 보면 스페인 내전은 본토에서 끝나니 냉전 시기에 옛날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당시 국민군 주력부대 중 하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스페인령 모로코 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는데 이들 식민지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 강간, 약탈 등은 공화파와 관련된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테러였다. 내전 내내 국민파와 프랑코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중세기의 레콩키스타를 본딴 '국제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 세력으로부터 스페인을 정화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북아프리카 아랍인 병사들을 데리고 와 스페인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쳐죽인 건 본인들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일례로 국민군에서는 붙잡은 공화정부 진영 여자들을 무어인 병사들에게 노리개로 던져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행위를 외국 기자들에게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149][150]
하지만 공화파 측의 잔혹 행위도 그 규모 면에서 국민진영에 미치지는 않아도 역시 심각했다. 가장 피해를 본 집단은 가톨릭 교회였다. 근본적으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 교회는 우익 지주들과 뿌리깊게 결합한 반동적 세력으로 인식 되어 좌익의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었고 내전 이전부터 과격 혁명 세력에 의한 교회 방화 사건 등은 심심찮게 터지곤 하였다. 쿠데타가 터지자 자연히 가톨릭 교회는 국민파 편으로 서서 국민파 점령지에서 자행되는 동지들의 학살을 한치의 꺼리낌 없이 축성했고 이에 분개한 CNT, UGT, POUM 등의 혁명 세력은 눈에 보이는 교회란 교회는 속을 발랑 까 뒤집어 태워 먹고 신부들을 학살하며 감옥으로 쳐들어가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회답했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마드리드에서 파괴되지 않은 교회를 겨우 2개 봤으며 그나마도 모두 개신교 교회였다면서 공화파를 빤답시고 공화파가 교회를 박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pitiful lie라고 경멸을 표했다.
특히 카를리스타 세력의 민병대였던 '레케테' 는 "한손에는 수류탄, 한손에는 묵주"라 불릴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다만 레케테는 그런 가톨릭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민진영에서는 가장 포로에 대한 대우를 제대로 한 군사집단이었다. 그리고 내전 발발 이전에는 카를리스타들의 전통적인 지방자치적 전통을 스페인 군부의 중앙 민족주의에 대치되는 우익 내의 맞불로 쓰기 위해 공화정부에서 이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킨 전적이 있어 모로코 용병대 다음으로 국민진영에서 정예로 꼽히기도 했었다. 스페인 현지의 미디어 묘사나 당대의 평가에 따르면 레케테는 군사적으로는 정예인데 인간은 대체로 나바라 지역의 농촌 출신자가 많아서 그런지 그나마 좀 순수한 집단, 팔랑헤는 군사적으로는 그닥 유능하지 않은데 후방에서 사상정화랍시고 약자나 괴롭히는 못된 집단 기믹을 보였다. 정작 사상적 스펙트럼이나 행동하는 코드(가령, 서로를 동무라고 지칭하거나 노동자의 상징인 푸른색을 자기 제복 색깔로 하거나, 인민전선의 인사법인 팔뚝질을 활용하거나) 팔랑헤가 가장 공화 진영과 유사하다는 것, 내전 이전에 CNT와 연대를 모색했던 점은 잊고서. 실제로 모 영화에서는 (13송이 장미) 레케테 출신 장교와 내전 이전 공화진영 쪽에서 일한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연애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는 사실 카를리스타들 자체가 뭐 인성이 좋았다기보단 이들의 주된 활동 지역이 이념적, 사회적 갈등은 나머지 전국보다 덜한 반면 '그래도 같은 바스크족'이란 지역적 유대감이 강했던 북부 전선이었다는 점과 상관이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가 아니라 원래 카를로스파는 사상 자체가 지극히 20세기 후발 산업국답게 무신론자 빨갱이들도 싫지만 지역 사회 작살내는 자본주의도 싫고 우리 고향인 동부 카탈루냐, 바스크 일대의 봉건적 자치권을 적극 수호하겠다는 좌파, 특히 중앙 국가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과도 통하는 코드가 있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 시절 자본주의적 경제 개발과 강력한 중앙 집권국가 설립을 추구한 스페인의 우익 진영 내분 중 쩌리가 되고, 프랑코가 죽은 후 1976년 몬테후라 살인 사건에서 꼴통 극우 경찰들에게 테러당해 빡칠 대로 빡친 카를리스타들은 공개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후 공산당과 합작으로 현대 스페인의 통합 좌파당을 만들었다. 현대 카를리스타들은 친가톨릭, 친왕정이면서도 자본주의와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오묘한 좌파 중에서도 이단아로 분류된다. 사실 가톨릭은 반자본주의, 전통 왕정은 봉건정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만 오늘날 카를리스타라는 정파는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력이 소멸한 것과 별개로 카를리스타는 그 태생부터가 19세기 이래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이념의 한계에 기원한 집단으로 스페인 근현대사에서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과 별개의 역사적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151]
역시 학살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완전한 천사는 아니었지만 팔랑헤나 군부에 비하면 카를로스파는 상대적으로는 착한 것이 맞다. 이념적 코드의 유사성으로 말하자면 팔랑헤(국민생디칼리스트)도 내전 이전 당수였던 호세 안토니오 생전에는 한때 같은 생디칼리스트인 무정부주의자(무정부생디칼리스트)들과 같이 연대하는 것 역시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카를리스타는 바스크, 카탈루냐 지역이 물론 주된 활동지역이기는 해도 거기서만 활동한 것도 아닌 점[152]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레케테는 조직 면에서는 옛날 조선시대 의병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부군 소속으로 편입된다. 스페인 내전 승리 이후 카를로스파는 유럽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반자유주의 세력 중 하나라는 기록을 보유했으면서 의외로 이후 스페인 민주화에도 이름을 남겼다. 2차대전 때는 그들 기준으로 정당한 국왕인 하비에르 공이 2차대전이 터지자 잠시 스페인 활동을 접고 벨기에 군에 종군하거나 프랑스 레지스탕스에도 관여했다가 나치 손에 다하우 수용소에서 체중이 36kg까지 줄어들 정도로 고생했다. 이 외에도 스페인 국내에서 청색사단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을 시작으로 독재정권 당시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도 관여하기도 했다. 하비에르 공의 아들이자 하비에르 생전에도 실질적으로 카를로스파의 실권자 노릇을 한 큰아들인 카를로스 우고는 프랑코를 만난 자리에서 사회주의 같은 것도 허용을 해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을 하기도 했고, 역시 여동생이자 실권자였던 마리아 테레사는 모스크바에서 부친의 정적이었던 돌로레스 이바루리와 접견하거나 카를로스 우고와 함께 카를로스파를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자료
스페인 내전 종결까지 8,000명가량의 가톨릭 사제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에서 12명은 현역 주교들이었을 만큼 타격이 컸으니 가톨릭 교회는 살기 위해서라도 쿠데타군에 가담했다. 물론 개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쿠데타와 맞불 혁명 발발 동시에 아나키스트 민병대한테 잡혀 총살당할 뻔했으나 카탈루냐 제네랄리타트(자치정부) 인사들과의 친분을 통해 살아 나온 뒤 이탈리아로 간 후 스페인 주교회의 프랑코 지지 선언문에 사인도 하지 않고 프랑코 정권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냥 스페인인 모두에게 처참한 비극이라며 정치 중립적으로 애도만 열심히 한 당시 타라고나 대주교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스페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계가 스페인 내전을 세계적 반공 십자군으로 인식하고 지원했던 와중 바스크 사제들은 종교적, 직업적 소속감과 동향 사람들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카탈루냐 가톨릭계는 내전 당시에는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쿠데타 세력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내전이 끝나고 성립된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카스티야중심주의, 지역 언어, 문화 탄압 정책에 반발하며 민주 반체제 인사들을 보호해 주고 교회의 힘을 통해 카탈루냐어와 전통 문화를 정권에서부터 보호하려는 프랑코 정권 내 야권세력 1기라 할 만큼 정권과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주로 반란 초기에 집중된 이 성직자 학살은 안 그래도 좌익 공화파를 탐탁치 않게 보았던 영국 정부가 확실하게 공화파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효과를 불러 왔다. 정부가 무분별한 학살을 중단시켰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고착된 인상을 뒤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종교 탄압 문제는 오늘날에 일어난다고 해도 가벼운 문제는 아니지만 광신적인 인간들의 도덕성 문제 정도로 치부되겠지만 이때는 정말로 중세적인 신성모독 행위로 다가왔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세속정치에 공개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교황청의 권위가 드높던 이 시절에는 가톨릭 유권자들의 이런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매우 높았으며 교황 비오 11세가 스탈린의 정교회 탄압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전 세계 기독교도들이 투쟁해야 한다고 포고를 내리자 유럽과 미국의 지도자들의 대소 외교가 올스톱될 정도였다. 이는 막상 자신들도 바스크족 사제들을 실컷 죽이고 있었던 국민파가[153] 열심히 씹어 먹을 선전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래 스페인 내전에서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순교자로 인정받아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때 459위, 베네딕토 16세 때 527위, 프란치스코 때는 2019년 1월 기준 889위가 복자품에 오를 정도로 복자가 된 순교자의 숫자가 다른 나라보다 많다.
무엇보다도 공화파의 유명한 큰 실수는 톨레도 공방전에서 알카사르 (요새) 인질 협박 사건이었다. 내전이 터지자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도시인 톨레도는 주변은 모두 공화파에 붙은 반면 현지 사령관이었던 호세 모스카르도 대령이 우익이어서 혼자서 국민파 편에 붙었다. 이를 진압하려고 마드리드에서 공화군과 아나키스트 무장 노조원들이 톨레도로 쳐들어 와 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만 빼고 다 점령했다.[154] 톨레도 알카사르에 고립되어 치안대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농성하던 수비대장 모스카르도 대령에게 공화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모스카르도 대령은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나이라면 주님께 영혼을 맡기고 "그리스도 왕 만세, 스페인 만세!"를 외치며 애국자로서 당당히 죽거라 라고 작별인사를 한 것이다. 아들 루이스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루이스는 바로 처형됐다는 설도 있고, 국민파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사건은 톨레도 구원 후 숭고한 미담으로서 국민군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톨레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카스티야 왕국이 무슬림들을 몰아 내고 점령한 후 마드리드가 수도가 될 때까지 수도로 삼았던 도시인지라 안그래도 우익 쪽이 침흘릴 상징성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 이벤트는 결국 40년이 지나 프랑코 사후에도 어떠한 민주화나 체제 변화도 거부하는 언론에서는 '벙커'파라고 불린 정권 내 극우꼴통들이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알카사르'라는 잡지 중심으로 결집할 만큼 당시 우파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했다.[155]
안 그래도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에는 주로 공화파의 만행들[156] 을 고발하는 기사가 특히 많았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어서 공화진영을 일시적이나마 악당으로 만든 셈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공화진영의 선전전+게르니카를 시작으로 나중에 서서히 알려진 국민진영의 전쟁범죄+내전 막판에 벌어진 안슐루스, 뮌헨 협정 등으로 순식간에 상쇄된다. 이미지 효과가 공화정부에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못 되어서 그런 거지... 당시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언론이 타임스지인데 여기에서는 각 진영을 부르는 호칭이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백군/적군(1936년 정도)-우파/좌파(1937년 정도)-국민파/충성파(1938년 이후)
일단 국민진영이고 공화진영이고 처음에는 개판 5분전인 상황에서 체계도 없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질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전선과 행정체제가 잡히면서 체계를 갖추게 된 점은 공통적이다. 다만, 스페인 내전 당시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의 확실한 차이점은 (일단 숫자는 둘째 치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국민파 점령지에서는 케이포 데 야노와 같은 수뇌부들이 나서서 매일 라디오에서 "오늘은 빨갱이 1,000명을 죽였다. 내일은 빨갱이년 1,000명을 겁탈할테다!"라는 식의 발언으로 학살과 강간을 조장하고[157]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지거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청소'를 지속하여 폭력을 하나의 체제로 만들었다. 내전 초기에는 어떤 의미로는 백색테러는 자기는 소수, 적은 다수인 상황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 면이 있다.[158] 후기로 갈수록 슬슬 국민진영도 여유도 생기고 특히 물자[159] 에도 여유가 생기면서 슬슬 전쟁이 아니라 통치의 필요가 커지면서 그 양태도 어느 정도 재판의 외형을 갖추고 한 편으로는 빵도 뿌리고 치안 유지활동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사형수들을 처형대에 보내는 식으로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국민파에서도 팔랑헤 좌파[160] 는 노동자, 농민들이 좌파들에게 표 좀 던졌다고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 외에도 후안 야구에[161] 장군 같은 거물급 인사 역시 공화파 지역 내의 민간인 폭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다만 팔랑헤 좌파는 이것 때문에 사망 플래그를 찍었고[162] 후안 야구에는 몇 주 뒤 복귀했지만 한동안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옥에 갇혀야 했다. 이런 일에서도 알 수 있듯 팔랑헤 좌파는 아이러니하게도 내전 초반에는 열심히 국민진영에서의 학살작업에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가 제시된 사건 외에도 국민진영에서는 경원시된 노동자, 농민들에게 정치적으로 구애하는 소위 코인질(?)을 하다 다른 우파 세력이 호소하여 프랑코에 제제당한다.
반면 공화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은 대부분이 혁명적 광분[163] 과 피난민 등을 통해 들은 국민파의 만행에 대한 보복적 성격으로,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통제가 닫지 않은 혁명적 민병대 집단에 의해 산발적으로 자행되었다. 전쟁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제적 동정적 여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공화파 수뇌부들은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 돌로레스 이바루리, 호세 디아스,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등의 지도부 인사들이 나서서 잘 통제되지 않던 지지자들에게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였고 실제로 해당 지역이 확실하게 공화파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면 혁명적 민병대들이 해체되면서 막무가내식의 인민재판은 공화국 주도세력이 카바예로의 PSOE 좌파에서 네그린의 PSOE 우파로 바뀌면서 소련 NKVD의 기술지원을 받은 보다 정교한 형태의 탄압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실제로 내전 중 총리가 되며 내전 초기 정권의 2인자였던 후안 네그린[164][165][166] 만 하더라도 밤만 되면 경호원 없이 사복 차림으로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 인사들을 끌고 가던 민병대들을 직접 만류하고 다녔다. 하지만 반대로 위에서 나온 제5열 드립으로 인한 공포+대숙청 시기의 소련으로부터 직수입한 비밀경찰[167] +고문+공산당의 정권 탈취 기도로 인한 각종 팀킬행위[168] 로 인한 만행들이 더 기승을 부렸다. 어찌 보면 산발적이고 야수적일 뿐이었던 만행이 비교적 위계적, 체계적인 탄압으로 바뀐 셈이다. 가톨릭 성직자, 수녀들은 주요 타겟이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국민진영 지지자들이나 기타 시민들의 피해규모가 더 크다.[169] 이 외에도 공화진영 역시 보복 폭격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진영의 폭격 등의 소식을 듣게 되면 감옥에서 국민진영 지지자들이나 성직자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 외에도 공화진영 특유의 파벌 간 갈등으로 인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전례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당시의 희생자를 들 수 있다.[170] 이외에도 공화진영은 농장 등을 집단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집단화한 농장을 중앙 정부나 공산당이 관할할지,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가 관할할지, 아나키스트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할지를 두고서도 갈등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도 민간인 희생자가 애꿎게 발생했다.
공화진영이 소련에 금을 주고 무기를 받은 것은 스페인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는데, 당시 화폐 발행 시스템상 금 보유고가 없으면[171] 아무리 화폐를 발행해 봐야 신용도가 없어서 휴지조각과 동일하게 되어버렸다. 실제로 내전 말기로 가면 공화진영의 화폐가치는 군표급으로 추락했다. 국민진영은 애시당초 반란자금 상당수를 외부에서 받았기 때문에 이런게 없었다. 이 문제는 내전 종결후 주로 북부지역의 광물을 팔거나[172] 간단한 수준의 공산품을 수출하는 것이 대표적이었다.[173][174]
그래도 괜히 윈스턴 처칠 같은 우익 인사들마저도 나중에나마 뒷북치며 "공화파를 도와야 했다."고 후회하며[175] 파시즘의 태생지였던 이탈리아는 2차대전 직후 국제 사회에서 복권되었지만 2차대전 당시 참전하지도 않았던 스페인은 1950년대 초반까지 국제사회의 왕따로 남았던 게 괜한 게 아니다. 2차대전 이후 30년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려고 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프랑코의 스페인은 당장 역사적 기억 속에서 보여준 야만적인 잔인함의 스케일이 쉽게 용서해 주고 새로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 주기에는 너무 컸으며 그게 현재진행형이었다.[176]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77] 은 이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페인 내전에 대한 나머지 세계의 기억과 이에 따른 프랑코 치하 스페인의 고립을 "민주 스페인에 대한 자유 세계의 철저한 방기와 무시는 전후 자유주의의 양심에 남아 있었던 마주하기 걸끄러운 오점으로 남았다"고 기록하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2차 세계 대전 후 세계 패권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맞서 한 명의 아군도 아쉬웠던 트루먼 행정부는 프랑코의 스페인이 철저한 반소련, 반공주의 정권이라는 점에 주목해 관계 개선에 나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프랑코 정권은 마셜 플랜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별개로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와 군사적인 원조[178] 를 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코 치하 스페인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고 6.25 전쟁에 참전 의사를 밝히는 등의 유화적인 조치로 응수했다.[179]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피의 독재자였을지언정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지킨 것만큼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더 큰 비극을 가져다주지 않은 셈이다.
스페인이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 보기 드문 현상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 문제다. 당시 스페인은 물론 친독 성향의 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독일 대사관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 선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스페인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 대사관도 활동했을 것이고 특히 미국 대사관의 경우 프랑코에게도 호소하는 식으로도 유대인 구호활동에 관여했다. 스페인의 대외적 입장은 '우리는 여권을 들고 합법적으로 국경을 통과하는 이들을 막지 않는다'[180] 정도였다. 반대로 특히 앙헬 산스브리즈를 포함해[181] 을 포함해 특히 외교관들은 일선에서 혹은 외무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유대인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에는 심지어 니콜라스 프랑코[182] 도 관여했다. 프랑코[183] 는 측근인 후안 블랑코[184] 를 통해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방치했다. 이런 스페인 정부 차원[185] 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구호 활동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로 추축국 준회원 취급받던 스페인에 대한 알리바이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4~5만 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의 손을 거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이는 스웨덴, 바티칸, 스위스 등 다른 중립 성향의 유럽 국가들보다도 더 많은 수치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좌파건 우파건 각자 자기가 지지하는 쪽은 선, 반대하는 쪽은 악으로 모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더 좋고 나쁘냐보다 내전 자체를 스페인 역사의 비극으로 여기는 경향이 점차 세를 얻게 되었다. 이 점이 스페인 내 좌우파를 막론하고 널리 합의되었고 이는 스페인이 프랑코 사후에 평화적으로 민주화가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침묵 협약도 그렇고 23-F 당시 보여준 극우를 제외한 좌우파의 반응 역시 이런 평가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느 한 쪽이 자기들이 절대선이고 남은 절대악이라고 우기면서 싸우기보다는 서로가 정치적으로나마 서로를 인정하게 된 것은 피비린내 나는 그 시절을 반복하기 싫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5.1.2. 국외[편집]
그리스 독립전쟁처럼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비센테 우이도브로 등)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게르니카, 카탈로니아 찬가 등 스페인 내전을 다룬 여러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문화인"들의 참전이 전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정말로 열심히 싸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저 낭만적인 환상과 작품의 소재를 찾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왔을 뿐 실제 전투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작가 앙드레 말로는 한 무리의 폭격기를 동반하고 스페인에 갔는데, 공화파 지휘관에 의하면 말로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작가, 화가, 사진사, 여자, 어린이 등으로 다양했는데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앙드레 말로는 이런 작자들을 데려와서 각종 비용을 청구하고 사기나 쳐서 한 재산을 모았다고 하니... 이런 전쟁터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의 사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둘이나 등장한다.[186]
그래도 군사적 인프라가 막장이었으며 그나마 아프리카 식민지 군단 같이 믿음직한 제대로 된 전투 부대 자체가 없었던 공화파 입장에서 국제 여단의 개입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았다. 실제로 마드리드 또한 1936년 후반기에 들어 마드리드 꼼플루텐세 국립 대학교[187] 캠퍼스에서 건물 하나, 방 하나 두고 치열하게 싸울 만큼 함락 위기에 몰려 있었는데 이때 국민파의 총공세를 막아 내고 결국 마드리드 포위를 풀어낸 게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국제 여단 병사들이었다. 국제 여단원들 중에서는 1차 대전이나 전간기의 자잘한 분쟁에 참가하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많았고, 전시 경험이 없더라도 사기와 투지 하나는 엄청나게 치열했기 때문에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만 하더라도 제11 국제 여단은 무려 하루만에 30%의 전력을 상실하면서도 결국 국립 대학교를 비롯한 마드리드 시내를 사수할 수 있었다.
나중에 1938년 하순쯤 되자 누가 봐도 공화파의 패전이 확실시되어 국제 여단원들은 이탈리아, 독일 같이 돌아갈 고향이 아예 사라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이 중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출신 여단원들은 자국 내 여론이 공화파에 대해 동정적이라 국제 파시즘에 대항한 최초의 투사들로 환영받았던 반면[188] 미국이나 스위스, 아일랜드 대원들은 자국의 중립 노선을 위반했다고 당국에게 체포당하는 등의 수모를 당했다. 아예 돌아가자마자 감방에 끌려가거나 총살당하지 않을 조국 자체가 없었던 이탈리아나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병사들 같은 경우 전사하거나 프랑코 정권에게 잡혀 '조국'의 철저한 방기 속에 옥사하지 않고 프랑스로 탈출했던 경우 스페인 현지인 출신 망명객들과 똑같이 난민 수용 캠프에 억류당하거나 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곳에서 투쟁을 지속하다가 노르웨이 전역 같은 사지에서 총알받이로 굴려지며 대부분 생을 마감했다.
후일담으로 내전 당시 소련과 달리 깽판치지 않으면서 그나마 스페인을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했던 멕시코는 스페인 공화국이 망한 이후 수많은 공화파 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189] 반-프랑코주의자/공화주의자였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뉘엘도 스페인 내전 이후 멕시코로 넘어가 커리어를 이어간 케이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 같이 공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컸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자신의 초기 필모그래피에 스페인 내전 관련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190]
5.2. 참전국에 미친 영향[편집]
내전 기간 동안 전쟁 양상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스페인은 상술하였듯이 근대전 경험이 부족했다. 내전 초기에는 한 쪽 진영의 군대가 개활지로 뛰쳐나오면 반대측이 이를 맞아 나오면서 교전이 벌어졌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는 커녕 18세기의 전투양상 보다도 별로 나을게 없는 것이었다. 스페인은 1차 대전 때 중립을 지켜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참호의 중요성이 많이 간과 되었고 심지어 몇몇 장교들의 경우에는 참호를 파고 쳐박혀 싸우는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참호 구축을 소홀히 하기도 했다.[191][192]
하지만 내전 후기 즈음에는 인민전선과 국민전선 양측 모두 화력과 항공기 엄호 아래 기갑부대로 전선을 돌파하여 포위섬멸하는-소위 말해 전격전 비스무리한 전술을 구사할 만큼 성장했다. 물론 소련과 독일에서 파견한 고문단과 파일럿, 물자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불과 3년만에 급격하게 변화한 전투양상과 스페인인들이 이에 빠르게 적응한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한 경험 축적 덕분에 스페인군이 동부전선에 파견한 청색사단은 당시 히틀러도 괜찮게 평가한 정예로 취급받았다. 반대 방향으로 공화파 망명객도 독일 점령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초기 활동과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자유 프랑스 군에서도 바로 그 파리 입성을 한 정예 기갑사단에 배치되는 등 동기 부여가 확실하고 숙련된 베테랑 취급을 받았다.[193]
국제여단 의용병으로 참전했던 외국인들도 본국 귀환 이후 자연스럽게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2차대전 당시 각국 연합군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적으로 의심받아 장교 직위는 꿈도 못꾸고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지속적인 시찰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군부대에서는 감투정신이 투철하고 전쟁 초기 소중한 현대 총력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훈련교관, 고참 부사관으로 쓰거나 아예 그 정치성과 영향력을 무기화해서 추축군 점령지 레지스탕스들과의 연계작전에도 중용되었다. 벌지 전투 당시 기계화부대 분대장으로 타고 가던 탱크가 판처슈렉에 맞고 분대원들이 몰상당한 상황에서 기습가한 독일군을 역관광시켜 명예 훈장을 받은 에드워드 카터 중사, 종군 경험을 살려 현대 대전기 당시 영국 홈가드 교관으로서 게릴라전, 유격전 관련 이론적 체계를 쌓은 버트 레비, 헤밍웨이 소설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의 모델 중 하나로 추정되며 2차대전 때는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에서 배후 침투, 사보타주, 레지스탕스와의 연계 임무를 수행한 어빙 고프 대위 등이 유명한 사례. 알버트 바움러라는 미국인 공화파 항공의용대 파일럿은 내전 후에도 계속 미군에 남아 2차대전 당시 플라잉 타이거즈에도 파견되었고 훗날 6.25 전쟁 때도 미군 소속 항공 관제사로 파견됐는데 어느날 소련군 미그기 통신 감청 임무 중에 소련 파일럿 콜사인을 알아내니 그게 스페인 내전 시절 자기 편대 전우의 콜사인이라 주기적으로 감청하던 소련군 미그기 편대를 "내 전우들"이라고 웃으면서 불렀다는 후덜덜한 일화도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도출된 전훈은 이후 스페인뿐 아니라 2차 대전에서 여러 국가들, 특히 독일과 소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이 전쟁에서 Ju 87, Hs 123 급강하 폭격기, He 111, Do 17, Bf 109, 1호 전차와 PaK 36, 88mm 대공포 등 신병기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각 병기의 장단점을 파악하고[194] 여기서 얻은 실전경험을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데 참고하여 이후 2차 대전에서 보여준 기동전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소련은 자국의 병기가 그럭저럭 활약하자 자만하여 이 전쟁의 교훈을 군대 개량에 제대로 써먹지 않았다. 그래도 전차전은 그럭저럭 교훈을 얻었는데 이 시절 전차들은 전차 자체의 성능도 그저 그렇고, 통신 기술이나 운용 교리도 미숙해 집단 운용은 개판이었고 소규모로 보병대에게 붙어 지원해 주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전차 자체도 무장이 대전차전이 아닌 대보병전이나 지원에 좋았다. 이때 소련군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교리에 따라 전차들을 집중편제하고 있었는데 이걸 보고 '이게 아니구나' 싶어 전차사단을 해체하고 보병사단에 부속부대로 붙여준다. 그러다 독일군이 전차를 대규모로 집중 운용하며 연합군을 발라 버리자[195] '아 그때 그렇게 한게 맞구나' 하며 다시 전차들을 집중시켰지만 제대로 되기도 전에 독일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물론 초반부에는 발렸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벌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여기 참가했던 인력을 모조리 날려먹어 그 경험을 잘 활용하지도 못했다.
이 전쟁의 결과에 자만했던 점은 이탈리아도 비슷하다. 일단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문화적으로 유대깊은 형제국가나 진배 없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 어떤 식으로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다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원래부터 스페인 우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 결정 자체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독일은 스페인에서 원료나 확보하고 프랑스를 견제하는 정도 이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은 없었지만 스페인은 만약 이탈리아의 힘이 좀 더 컸다면 이탈리아의 세력권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이탈리아는 독일과 비교하더라도 스페인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196] 문제는 독일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국력에 비추어 스페인에 지나치게 많이 퍼주고 그에 비해 얻은 것은 결과적으로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름 알뜰하게 스페인에서 챙길 거 다 챙기면서 지원해 줬던 독일과 소련과는 달리[197] 무솔리니는 프랑코에 그냥 마구 퍼줬고 의용군이라는 명목하에 사단 단위로 부대를 스페인에 파견했다. 소련과 독일도 이러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미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데다가 덤으로 국제연맹의 제재를 받아 경제사정이 영 좋지 않았다.[198]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 내전 개입은 치명적이었다.[199] 군의 현대화 작업도 자금난으로 차일피일 미뤄져가는 상황에서 무솔리니가 영국과 프랑스에
그런데 이때 독일측에서 좀 이상한 짓을 하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이 남몰래 무기를 공화군에게 팔아먹은 것. 더 막장인 것은 나치 독일과 스페인 공화파 간 무기 밀거래 사이에 소련도 개입했다는 것이었다.[200] 사족으로 이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1차 대전 독일 제국군 에이스 중 하나로 당시 무기상인이었던 요제프 벨첸스(Josef Veltjens). 이런 무기 밀거래는 한두 번 하다 걸린 게 아니라 1937년 1월부터 내전 내내 계속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거의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었으나 독일은 스페인 광산의 채굴권을 착실하게 뜯어간 것도 나중에 스페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공식적인 중립과는 별개로 18,000명 규모의 지상군인 '청색사단'과 수백명(실전 참가는 수십명)의 조종사를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부전선에 파견하고 여러 항구들을 유보트 보급기지로 제공했다. 그나마 이들 의용군 병력은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1944년 초에 스페인 본국으로 귀환했다. 아이러니한게, 이 때 동부전선에 파견된 의용군의 상당수는 구 공화파 인사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이었다. 연좌제를 피하고 수감된 공화파 인사들의 처우와 형기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참전한 것. 물론 이런 점을 악용해서 프랑코 정권이 반강제적으로 자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랑코의 2차대전기의 중립에 대해서는 프랑코의 현명한 줄타기라는 의견이 주류지만 비버는 이에 대해 프랑코의 무리한 요구[201] 에 히틀러가 질려서 성사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섭이 프랑코의 중립을 위한 의도적인 어깃장이 아니라는 근거로 비버는 프랑코측의 당시 행적에 대해 기술했다. 물론 스페인의 국내적, 국외적 환경도 그 원인 중 하나다. 프랑코의 이러한 꼬장 덕에 그의 정권은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수십년간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엄연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미국과의 협력관계도 구축할 정도로 국제적인 고립도 타파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동시기에 무솔리니의 과욕이 세계 5대 강국의 일원이며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자 1차대전 승전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까지 누리던 이탈리아 왕국을 완전히 파멸시킨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조적이다.[202]
6. 말말말[편집]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 (¡NO PASARÁN!)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의 상징적인 슬로건으로 이후 안티파시즘 운동의 대표적인 구호가 되었다.
우리는 통과했다! (HEMOS PASADO!)
위 슬로건에 대항하는 국민파의 슬로건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는 게 낫다.[203]
공화파 정치가, 돌로레스 이바루리
정작 본인은 죽는게 낫다는 말 어기고 소련으로 도망갔다무릎은 꿇지 않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서서 살았다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7. 주요 인물[편집]
- 국민진영 주요 인물
- 프란시스코 프랑코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 호세 마리아 힐로블레스
- 에밀리오 몰라
- 호세 산후르호
- 후안 야구에
- 무함마드 메지안
- 호세 칼보 소텔로
- 마누엘 팔 콘데[204]
-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 미겔 카바네야스
-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 마누엘 에디야
- 호세 미얀아스트라이
- 세라노 수녜르
- 호세 모스카르도 이투아르테
- 공화진영 주요 인물
- 마누엘 아사냐
- 호세 디아스
-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
-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 후안 네그린
- 인달레시오 프레이토
- 호세 미아하
- 비센테 로호 유치
- 안드레우 닌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시프리아노 메라
- 유이스 콤파니스
- 훌리안 고르킨[205]
8. 대중문화[편집]
8.1. 문학[편집]
- 마누엘 마틴 - 38년 죽음의 밤 - 죽은 자들의 골짜기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 어니스트 헤밍웨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 영화화도 되었다.
- 조지 오웰 -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
- 하비에르 세르카스 - 살라미나의 병사들(Soldados de Salamina) - 영화화도 되었다.
8.2. 회화[편집]
8.3. 영화[편집]
- 켄 로치 - 랜드 앤 프리덤
- 기예르모 델 토로 - 판의 미로, 악마의 등뼈[206]
- 빅토르 에리세 - 벌집의 정령, 남쪽[207]
- 카를로스 사우라 - 갈가마귀 키우기[208]
- 후앙 카를로스 메디나 - 페인리스[209]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210]
- 호세 마리아 신부의 길(There Be Dragons, 2011)[211]
- 호세 루이스 쿠에르다 - 마리포사
-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 -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 비우티풀[212]
- 이마뇰 유리베 - 마이 러브
- 안제이 바이다 - 재와 다이아몬드[213]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주인공 알란 엠마누엘 칼손이 공화파 참전용사다.
- 비센테 아란다 - Libertarias(한국에선 프론트 라인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 페드로 알모도바르 - 패러렐 마더스[214]
- 하비에르 루이스 칼데라, 알베르토 데 토로 감독 공동 연출작 - 죽은 자들의 골짜기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8.4. 음악[편집]
이하 공화국군:
- 리에고 찬가 - 공화국의 국가.
- Ay Carmela - 인민전선 병사들이 즐겨부르던 노래를 통칭하는 말로, 추임새로 넣이는 '룸바 라 룸바 라 룸바 라'와 '아이 카르멜라(때로 마누엘라라고 바뀌기도 한다)'의 후렴구를 특징으로 하며,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대표적으로 'Viva la Quince Brigada', 'El Paso del Ebro'가 있고 수많은 변종이 있다. 이 중 피트 시거, 크리스티 무어 등의 포크 가수들이 리메이크했고 문명 5 스페인 테마로 쓰이기도 한 'Viva la Quince Brigada'[215] 가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바리케이드를 향해 - CNT/FAI의 조합가.
- 더 클래시 - Spanish Bombs[216]
-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 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
이하 쿠데타군:
- 콘도르 군단의 분열행진곡
- 오리아멘디 - 카를리스타들의 찬가. 원곡은 바스크 민요로, 바스크 지방이 공화파 편에 가담한 전황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만 이는 카를리스타들의 본거지 역시 바스크 일대였기 때문으로, 우연의 일치가 겹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이러니한 게 아니라 해방 이전엔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평양은 공산당 소굴이 되었고 반대로 좌익 사회주의 세가 강했던 경북, 대구 일대는 극렬 반공 우익 정권 쪽으로 넘어간 아시아 어느 나라의 20년 뒤 비극처럼 스페인도 지역적 성향과 이념적 분열이 딱 맞아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쿠데타군 세력이 처음으로 장악해서 전쟁의 교두보가 된 세비야는 '붉은 세비야'라 불렸을 만큼 좌파적인 지방이었고, 반대로 공화국이 사수한 카탈루냐, 신 카스티야 지방은 대도시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자영농 중심 농촌 경제가 유지되어 계급 투쟁이 덜하고 가톨릭 문화가 매우 중요했던 시골들이 많았다.[217] 이러니 쿠데타군 쪽에서 국가적으로 사상 '정화' 한답시고 안달루시아, 아스투리아스 일대에서 노조원들을 잡아서 학살하면 좌익 공화진영에선 보복으로 감옥에 처넣었던 동네 신부 끄집어 내 쏴 죽이던게 스페인 내전기의 비극적이고도 전형적인 테러의 패턴이었다.
이 와중에 바스크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지역 자본가들이 장사로 벌어 온 돈을 노동자들과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전통이 강한지라 군부와 왕실이 상징하는 스페인 중앙 국민는 싫지만 공화주의 세력을 혁명적 좌파가 장악한 다른 지방의 극렬 계급 투쟁과는 볼 일 없수다 하고 따로 돌아갔던 것. 애초에 이 동네는 21세기에도 몬드라곤 같은 각종 지방 협동조합, 개발 프로젝트에도 대기업, 노동자들이 골고루 참여하는지라 경제위기 이후에도 실업률이나 노사갈등 문제가 가장 덜한 지방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지역 내 사회적 유대감이 강한 곳이었으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근대 자체가 싫다는 카를리스타 운동의 역사적 안마당이기도 한지라 지방 정부는 공화파에 남았어도 개인 단위로 국민파에 투신한 골수 가톨릭, 우익 인사들도 많았다. 정치적으로 바스크 자치 정부는 1937년 중순에 아예 군사적으로 쿠데타군을 물리칠 희망이 사라지자 다른 인민전선 정파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항복했다. 다른 정파들에겐 배신이다 뭐다 욕을 굉장히 많이 먹었지만 애초에 스페인 북부 지방 일대에서 국민파의 주축을 이루었던 카를리스타들 입장에선 연고가 가까운 사람들이었던지라 테러와 정치적 보복도 다른 지방에 비해 좀 온건했다.
스페인 내전 극초반에는 공화정부의 행정부를 차지하다시피 했던 공화좌파 진영의 총리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당시 반군 수장으로 간주되었던[218] 에밀리오 몰라와 협상하고자 했다.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이때 몰라의 반응이 뜻밖이다.
8.5. 스페인 내전 관련 서적[편집]
- 앤터니 베버 - 스페인 내전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카탈로니아 찬가
8.6. 관련 게임[편집]
- Hearts of Iron 시리즈[223]
- 인민전선[225]
- 인민전선-단계적확장[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