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아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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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2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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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2제국 초대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
Maximiliano I


파일:Emperador_Maximiliano_I_de_Mexico.jpg

이름
독일어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요제프 마리아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Ferdinand Maximilian Joseph Maria von Habsburg-Lothringen)
스페인어
페르난도 막시밀리아노 호세 마리아 데 압스부르고로레나
(Fernando Maximiliano José María de Habsburgo-Lorena)
출생
1832년 7월 6일
오스트리아 제국 쇤브룬
사망
1867년 6월 19일 (향년 34세)
멕시코 제국 산티아고 데 케레타로
재위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
1864년 6월 10일 ~ 1867년 6월 19일
신장
187cm
배우자
벨기에의 샤를로트 (1857년 결혼)
아버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어머니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형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아나, 루트비히 빅토어
서명
파일:막시밀리아노 1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의 삶
2.2. 멕시코 제국의 황제
2.3. 최후
2.4. 사후
3. 기타



1. 개요[편집]


프랑스괴뢰국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이자 멕시코 역사상 마지막 군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이며,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외사촌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먼 후손이기도 하다.[1]

2. 생애[편집]



2.1. 황제 즉위 이전의 삶[편집]


1832년 7월 6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조피 대공비[2]가 가장 아낀 아들이기도 했다. 조피 대공비가 나폴레옹 2세와 염문이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2세의 아들이라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막시밀리안이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과 외모가 판박이라 이 소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만 나폴레옹 2세가 병중에 있을 때 조피 대공비가 막시밀리안을 임신 중인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병간호를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이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다.

1848년 혁명이 끝난 이후 해군에 가담하였으며, 1853년까지 각지를 항해하며 경험을 쌓았다. 1854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 사령관으로서 그는 군항 등의 인프라를 개발함과 동시에 각종 신기술을 도입하며 제국 해군의 근대화를 밀어붙혔으며 SMS 노바라 함을 필두로 한 탐사대를 보내어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를 식민화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근현대 오스트리아 해군의 기틀은 막시밀리안이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57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딸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1859년까지 오스트리아의 북이탈리아 영토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마지막 부왕을 지냈다.[3] 그대로 살았다면 평범한 황족이자 유능한 군인으로서 편안하게 살았을 테지만 나폴레옹 3세의 욕심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만다.


2.2. 멕시코 제국의 황제[편집]


그 당시 멕시코에서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원주민의 권리를 확보[4]하고 성직자와 군인의 특권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반대파들은 후아레스를 몰아내기 위해 내전을 벌여 수도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후아레스 대통령이 무기한 영토 종단 통과권까지 약속해가며 미국의 힘을 빌린 덕분에 패퇴당하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반대파가 와해되고 후아레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수도의 주인이 두번씩 바뀌는 등 국토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멕시코 경제는 마비되는 상황에서 빚 갚을 날은 다가오자 후아레스 대통령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를 주고 말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이것을 기회로 멕시코를 보호국으로 만들 속셈으로 1862년 멕시코에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보통 같았으면 프랑스를 막으려고 수작을 부렸을 영국은 자기도 멕시코에 돈을 떼먹힌 채권국이었으므로 오히려 프랑스를 도왔고, 미국남북전쟁으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프랑스의 간섭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를 상대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던 1864년에 프랑스는 막시밀리안을 멕시코로 데리고 와서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세웠다. 이 때, 막시밀리안의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멕시코로 가려면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가라고 하였고 이에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멕시코로 떠나 1864년 6월 10일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로 즉위한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5] 막시밀리아노는 자신보다 먼저 멕시코의 황제로 즉위했던 아구스틴 1세의 손자인 아구스틴,[6] 살바도르[7]를 입양했다.[8]

하지만 말이 멕시코 제국의 황제지, 막시밀리아노 1세는 나폴레옹 3세가 세운 괴뢰 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막시밀리아노의 황제 자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반 후아레스 세력의 추대로(물론 나폴레옹 3세의 입김이 강했지만) 황제에 오르긴 했지만 멕시코 국민들은 외국 사람인데다가 낙하산으로 들어온 막시밀리아노를 크게 지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막시밀리아노 본인은 후아레스의 개혁을 일부 지지하는 입장을 내보였기 때문에 그를 추대한 세력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더욱이 남북전쟁으로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미국이 남북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멕시코 침략을 맹비난했고, 정작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점점 강대해지자 멕시코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가 반격을 시작하자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에게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막시밀리아노 1세는 지지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황제로 있던 오스트리아 역시 머나먼 타 대륙이었던 멕시코에 어떻게 관여할 처지도 못되고,[9] 그나마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전한 처지라 오스트리아로 귀환하라고 권고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막시밀리아노 1세를 지원할 수 없었다.


2.3.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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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1세, 미겔 미라몬, 토마스 메히아 카마초

결국 황제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군의 멕시코 철병이 시작되었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막시밀리아노 1세는 결국 후아레스군에게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측근인 두 장군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둘은 마지막까지 충신으로 남았던 미겔 미라몬 장군[10]과 토마스 메히아 카마초 장군[11]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레 미제라블의 작가이자 당시 프랑스 정계 진보파의 거두였던 빅토르 위고 등 많은 유럽의 명사들, 그리고 교황, 오스트리아와 적대적이었던 프로이센오토 폰 비스마르크마저도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막시밀리아노 1세의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부탁했다.

내전 당시 막시밀리아노 1세는 자신의 제국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후아레스에게 "항복하면 모든 죄를 사면함은 물론 대법원장에 임명하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물론 후아레스는 그 제의를 거절했고, 후에 막시밀리아노 1세에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자기 편이 유리한 상황에서 저런 통 큰 제의를 해 온 막시밀리아노 1세가 나쁘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12]

하지만 후아레스는 "이 기회에 함부로 내정간섭하면 어떻게 되는지 유럽 국가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영국과 프랑스, 프로이센, 이탈리아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처형을 명했다. 처형되기 전 막시밀리아노 1세는 총살형을 집행할 병사에게 금화를 주면서 얼굴이 아닌 다른 곳에 총을 쏘아달라고 부탁했지만[13] 정작 병사들이 얼굴을 정조준해 쏘는 바람에 비참한 죽음이 되어버렸다(…). 그의 유언은 "멕시코인들이여, 나는 멕시코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정당한 대의 아래 죽는다! 지금 흐를 내 피가 이 땅의 마지막이 되기를! 멕시코 만세!"였다.

그의 수염은 매우 독특해서 생전에 많은 신망을 얻었는데, 그가 죽자 그의 시체에서 그의 '아름다운 수염'을 수집가들이 잘라갔다고 한다.


2.4. 사후[편집]


형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남동생의 죽음을 통보받자 큰 충격을 받으며 슬퍼했다고 한다.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 역시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칩거하다가 5년 후인 1872년 사망했다.

막시밀리아노의 시신은 처형 이듬해에 오스트리아로 운구되어 카푸친 교회에 안장되었다.

파일:800px-Maximilian_and_Charlotte.jpg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유럽에서 동분서주하던 아내 벨기에의 샤를로트는 막시밀리아노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결국 정신병에 걸려 친정인 벨기에로 돌아가 강제로 유폐 생활을 하다가 1927년에 사망한다. 사망 당시 샤를로트의 나이는 86살이었으니, 60년 가까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참하게 지내야 했던 셈.

샤를로트는 남편을 구해달라고 나폴레옹 3세에게 애원했으나, 정작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는 "그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아노를 사지로 내몰고 나몰라라 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는 프랑스 국내에서도 비판이 일 정도였다.

파일:Manet,_Edouard_-_The_Execution_of_Emperor_Maximilian,_1867.jpg

1867년작 막시밀리아노의 처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ouard_Manet_022.jpg

1869년작 막시밀리아노의 처형

에두아르 마네는 이를 비판하는 "막시밀리아노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의 복장을 프랑스군의 복장과 비슷하게 그려 막시밀리아노를 버린 자신의 조국을 비꼬았다. 마네는 이 처형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그렸는데, 첫 버전에는 멕시코 병사들을 멕시코의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를 쓴 모습으로 그렸으나 이후 프랑스군 스타일로 바꾸었다. 사실 이 당시 멕시코군의 실제로 군복이 프랑스군과 유사하긴 했지만, 마네는 자신이 그린 멕시코군이 프랑스군과 비슷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또한 맨 오른쪽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군인은 나폴레옹 3세와 상당히 닮았다. 반면에 처형당하는 막시밀리아노의 모자는 성인의 헤일로와 유사하게 그렸다.

나폴레옹 3세는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하고 강제로 퇴위당한 뒤 영국으로 망명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게다가 그 적자인 루이 외젠 나폴레옹도 줄루 전쟁에 참전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나폴레옹 3세의 큰아버지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이던 1820년에 멕시코 황제 자리를 제안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제프는 이미 스페인의 허수아비 국왕 호세 1세로 있던 적이 있어서, 허수아비 군주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안다며 거절했기에 막시밀리아노와 달리 천수를 누렸다.

자신이 '벼락부자'라 불렀던 나폴레옹 3세에게 이용당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에게는 '쓸모 있는 바보'로 불리는 등, 왕족이 지나치게 순수하면 비극이 된다는 사례를 몸소 보여준 사례였다.

3. 기타[편집]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만 바닷가에 있는 미라마레 성은 그를 위해 지어진 성이었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독립한 남부연합의 지원으로 황제 자리를 유지하며 남부연합과 함께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얻기 위해서 북부를 침공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 사건 이후 멕시코는 전제군주제인 세습정권으로 2차 대전때도 존속한다. 대신 혁명세력을 지원하는 북부와 황제를 지원하는 남부연합 간의 대리전으로 끝없는 내전 상태 중으로 묘사된다.

멕시코 출병 당시를 다룬 1954년의 서부영화 베라 크루즈에서 잠시 등장한다.

막시밀리아노 1세 본인은 187cm의 장신이었으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두 사람은 모두 막시밀리아노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키가 작았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137cm, 나폴레옹 3세는 160cm이다.

[1] 족보상으로 보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고조모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8대조이다.[2] 조피의 남편 프란츠 카를 대공은 황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조피 역시 황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사실상 황태후로 대접받았다.[3]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부왕직은 롬바르디아를 상실한 1859년에 롬바르디아 총독직과 함께 폐지되었고, 잔존한 베네토 지방의 행정은 베네치아 총독이 관할하게 되었다.[4] 후아레스 자신도 원주민 출신. 실제로 후아레스는 역대 멕시코 대통령 중 유일하게 백인이 아니었다.[5] 결혼 전에 매독에 걸려 불임이 되었다.[6] 아구스틴 1세의 차남 앙헬 왕자의 아들이다.[7] 아구스틴 1세의 삼남 살바도르 왕자의 아들이다. 현재는 살바도르의 후손들을 통해 가계가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멕시코의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다.[8] 물론 합스부르크 왕조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제위 계승권은 없었다. 제위는 막시밀리아노의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즉 조카가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카를 루트비히에겐 여러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맏이가 바로 프란츠 페르디난트다. 현재 이쪽 계통의 멕시코 제위 요구자도 대대로 이어지고 있으나, 앞서 말한 아구스틴 1세의 후손들과는 달리 멕시코 제위에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귀천상혼을 하면서 자손들의 오스트리아 제위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그의 자손이 멕시코의 제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자손인 호엔베르크 공가 쪽으로 제위요구권이 돌아가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9] 당시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현대와 같은 내륙국이 아니라 해군력과 해운업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나 그 수준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해양 강국에 비해 빈약했다.[10] 막시밀리아노 추대 전 반후아레스파가 인정한 대통령 중 1명이기도 하다.[11] 이 사람은 원주민 혈통으로, 마네의 그림에서 황제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이다.[12] 막시밀리아노 1세는 후아레스한테 "나는 멕시코를 자유롭게 만들려 왔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후아레스는 "그러면 당신 나라인 오스트리아부터 먼저 자유롭게 만들라."고 비아냥거렸다.[13] 자신이 죽은 후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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