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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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İstanbul (튀르키예어) | استانبول‎ (오스만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 (그리스어)





시청 소재지
케말 파샤동 7월 15일 순교자 거리 5번, 5층 파티흐구, 이스탄불도(İl)
면적
5,199㎢
하위 행정구역
39 자치구
시간대
UTC+3
인구
15,907,951명2022년 12월 31일
인구 밀도
10,216명/㎢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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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에크렘 이마모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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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인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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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회
[[정의개발당|

정의개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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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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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인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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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석
[[민족주의행동당|

민족주의행동당
]]
1석
국회의원
[[정의개발당|

정의개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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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석
[[공화인민당|

공화인민당
]]
27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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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민주당
]]
12석
[[좋은 당|

좋은 당
]]
8석
[[민족주의행동당|

민족주의행동당
]]
8석
상징
시조

시화

시목

ISO 3166-2
TR-34

1. 개요
2. 명칭
2.1. 언어별 명칭
2.2. 어원
3. 역사
3.1. 고대 그리스폴리스 비잔티온
3.2. 로마 제국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3.3.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3.4.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4. 정치
5. 경제
6. 인구
7. 기후
8. 행정구역
9. 관광
9.1. 구경거리
9.2. 쇼핑
9.3. 이스탄불에서 주의해야 할 일
10. 문화
10.1. 낚시
10.2. 이스탄불의 맛
11. 교통 지옥
11.1. 효율적으로 돌아다니는 법
12. 스포츠
13. 창작물에서
14. 관련 문서


파일:이스탄불.19.jpg
파일:bls0450156001367944907(1).jpg
이스탄불 북동부 전경[1]
동서양을 잇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와 오르타쾨이 모스크(자미)[2]

1. 개요[편집]


이스탄불(İstanbul)은 튀르키예 마르마라주의 도(道, İl)이자 그에 속한 동명의 시로, 수도앙카라보다 거대하고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튀르키예의 최대도시이다.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선 위,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 해, 금각만 사이에 위치한다. 이스탄불은 고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치하에서 ‘새로운 로마’라는 별칭의[3] 콘스탄티노폴리스로서 개발된 이래, 약 1,600여년간 동로마 제국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번창하였던 역사적인 도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도시로 알려져 왔다.[4]


2. 명칭[편집]



2.1. 언어별 명칭[편집]


워낙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이 도시에는 여러 명칭들이 있다. 두 개 이상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 오늘날 널리 쓰이는 이름을 굵은 글씨로 표기한다.
  • 튀르키예어: İstanbul(이스탄불), Kostantiniyye(코스탄티니예), Bizantion(비잔티온)
  • 오스만어: استانبول
  •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콘스탄디누폴리) / Η πολή(이 폴리),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콘스탄티누폴리스: 코이네 그리스어), Βασιλέως Πόλις(바실레오스 폴리스)[5], Ιστάνμπουλ(이스탄불), Βυζάντιον(비잔티온: 고대 그리스어), Βυζάντιο(비잔디오: 현대 그리스어)
  • 쿠르드어: Stenbol(스텐볼)
  • 아랍어: إسطنبول(이스탄불), قسطنطينية(쿠스탄티니야)
  • 페르시아어: استانبول(이스탄불), پایتخت(파이타흐트), قسطنطنیه(고스탄타니예)
  • 세르보크로아트어: Истанбул / Istanbul(이스탄불), Цариград / Carigrad(차리그라드), Константинопољ / Konstantinopolj(콘스탄티노폴), Византион / Vizantion(비잔티온)
  • 불가리아어: Истанбул(이스탄불), Цариград(차리그라드), Константинопол(콘스탄티노폴), Византион(비잔티온)
  •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Стамбул(스탐불), Царьград(차리그라드), Константинополь(콘스탄티노폴), Византий[러] / Візантій[우] / Візантый[벨](비잔티)
  • 아이슬란드어: Istanbúl(이스탄불), Mikligarður(미클리가르뒤르), Konstantínópel(콘스탄티노펠)
  • 스웨덴어: Istanbul(이스탄불), Miklagård(미클라고르드), Konstantinopel(콘스탄티노펠)
  • 프랑스어: Istanbul / Istamboul(이스탕불), Stamboul(스탕불), Constantinople(콩스탕티노플), Byzance(비장스)
  • 영어: Istanbul(이스탄불), Constantinople(콘스탄티노플)
  • 루마니아어: Istanbul(이스탄불), Țarigrad(차리그라드), Constantinopol(콘스탄티노폴), Bizanţ(비잔츠)
  • 알바니아어: Stambolli(스탐볼리), Kostandinopoja(코스탄디노포야)
  • 이탈리아어: Istanbul(이스탄불), Costantinopoli(코스탄티노폴리), Bisanzio(비잔치오)
  • 독일어: Istanbul(이스탄불), Konstantinopel(콘스탄티노펠), Byzantion(뷔찬치온), Byzanz(뷔찬츠)
  • 스페인어: Estambul(에스탐불), Constantinopla(콘스탄티노플라), Bizancio(비산시오)
  • 포르투갈어: Istambul(이스탐불), Constantinopla(콘스탄티노플라), Bizâncio(비잔시우)
  • 라틴어: Constantinopolis(콘스탄티노폴리스), Byzantium(비잔티움·비잔치움), Istanbul(이스탄불), Nova Roma(노바 로마)
  • 고대 노르드어: Miklagarðr(미클라가르드르)[6]

도시의 주인이 '그리스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튀르키예' 순으로 바뀌었다. 도시 이름도 '비잔티온(비잔티움)→ 콘스탄티누폴리스(콘스탄티노폴리스,[7] 코스탄티니예[8])→ 이스탄불' 순으로 바뀌었다.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이름은 그저 '도시(The City)'를 뜻하는 터키어이다.[9] 그리스어권에서 이 도시를 그저 '이 폴리'(η Πόλη / The City)라고 부르던 것에서 터키어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본다. 행정구역으로서는 İstanbul büyük şehir belediyesi[10]라고 한다.


2.2. 어원[편집]


이스탄불은 그 역사적 지위에 따라 도시의 어원학(etymology)에 관해서 가장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스인들은 이스탄불을 '이 폴리(Η πολή)'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그 도시'라는 뜻이다. 오스만 베이국에게 함락당하기 이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시기에 쓰이던 별칭이다. 이는 동로마 제국 시기에 '도시' 라고 하면 당연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의미하던 것에서 기인한 호칭이다. 실제로 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드」를 보더라도 '도시(The city, Η πολή)'라면 당연히 콘스탄티누폴리스를 가리켰다.

동로마 제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애착이 무척 강했다. 이는 문학 작품들에서도 나타나는데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아기를 축복하는 동네 아낙들이 "딸들은 저마다 길쌈에 익숙하게 하시고 아들들은 저마다 용감한 병사가 되어 왕들의 도시 콘스탄디누폴리(콘스탄티누폴리스의 현대 그리스어 표기)를 되찾게 하옵소서."라고 노래하고,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탈환'하지 못한 것을 아직도 통한스럽게 여기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콘스탄티누스 11세를 추모하는 노래 당신은 번개처럼 오시리라의 가사에도 도시가 언젠가 다시 성모의 품으로 돌아가리라는 내용이 있다.[11]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현대의 그리스 공화국에서도 민족정서상의 이유로 터키어식 이름인 '이스탄불(Ιστάνμπουλ)'보다는 현대 그리스어식 표기인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와 '이 폴리'를 선호한다.

정교회에서도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른다. 기독교 5대 총대주교좌의 하나이자 정교회 세계 총대주교좌가 여기에 있어서 그 주인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라고 부르지만, 튀르키예 정부에서는 싹 무시하고, '이스탄불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라고만 부른다.

한번은 이러한 그리스와 터키 간의 언어표현이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2021-22 UEFA 유로파 리그 조별 리그 2차전에서 올림피아코스페네르바흐체 원정 경기에서 3 대 0으로 대승한 후 올림피아코스의 구단주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12]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우리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둬서 매우 행복하다. 이 승리를 전 세계 모든 그리스인에게 바친다.", "나는 우리 선수들에게 전날 밤 여기(콘스탄티노폴리스)는 튀르키예 내에 있는 그리스의 위대한 옛 영토이니 반드시 승리를 통해 그리스인과 올림피아코스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했고 선수들은 착실하게 이를 해냈다. 또한 우리 구단은 이 도시와 좋은 기억이 많다. 201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농구 결승전에서 우승한 위대한 역사가 있고 오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위대한 역사를 다시 써준 선수들에게 매우 감사하다."라고 발언하여 튀르키예 전역이 망언이라고 발칵 뒤집혔다. 그러자 그리스에서는 그런 것 따질 시간에 축구연습이나 더 하고 오라고 응수했다.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후 새로운 수도가 되면서 명칭에 혼선이 생겼는데, 사실 오스만의 정복 이전부터 튀르크인들은 이 도시를 '이스탄불'이라 불렀다. 이것은 10세기 무렵부터 아랍에서 쓰던 명칭이었다. 뜻은 '도시에서', '도시로' 정도로, 서쪽에서 번영하던 대도시라는 이미지를 통해 좀 막연하게 붙인 명칭이었다. 이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이 있다.

처음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방문한 튀르크인 사절단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어느 그리스인 어부에게 해협 건너의 콘스탄티누폴리스를 가리키며 도시의 이름을 물었는데, 튀르크인 통역자의 그리스어 발음이 영 좋지 않았는지 그리스인 어부는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가리키며 "Εις τὴν Πόλιν;(저 도시요?)" 라고 되물었고, 튀르크인 사절단은 이걸 도시 이름으로 알아듣고 그대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해당 그리스어의 발음은 [is tim ˈbolin\]인데, 이 지방에서 쓰던 그리스어 방언으로는 '이스탄불'과 어느 정도 유사한 "Εις ταν Πόλιν[is tam ˈbolin]"으로 발음한다.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묘한 전설이다. 이 전설은 그리스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아는 이야기로 오늘날 그리스인들은 이 전설을 가지고 튀르키예인을 비웃기도 하는데, "우리의 위대한 도시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튀르키예 촌놈들에겐 어울리지 않지! (고로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우리 그리스인들의 품으로 돌아와야 마땅해)"라는 식.

그 외에도 튀르크인들은 이 도시를 '스탐불(ستامبول, Stambul)', '이슬람불(اسلامبول, İslambul, 이슬람을 찾으라[13])', '파이타흐트(پایتخت, Pay-i taht, 옥좌[14])', '아시타네(آستانه, Asitane, 술탄의 문지방), 다르사아데트(در سعادت, Dâr-ı saâdet, 행복의 집)', '바브알리(باب العالی, Bâb-ı âli, 웅장한 문)', '데르알리예(در عاليه, Der-ı âliyye, 위대한 집)'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가 친히 '이슬람볼(اسلامبول, İslambol)'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고도 하는데, 확증은 없다. 몇몇 역사가들의 기록에만 등장하는 내용인데,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직후부터 이슬람볼이라는 이름이 보이므로, 개연성은 충분하다.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같은 슬라브어권 지역과 루마니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황제의 도시란 의미로 '차리그라드(불가리아어·세르보크로아트어: Цариград / Carigrad, 루마니아어: Țarigrad)'라고 불렀다. 중세 불가리아 제국이 잘 나갈 때는 자신들의 수도인 벨리코 타르노보도 '차르그라드'라 불렀는데 이후에는 그냥 '이스탄불'에만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중세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발칸 반도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콘스탄티누폴리스-소피아-베오그라드 간 도로도 '차리그라드 도로(불가리아어: Цариградски път)'라고 부른다. 중세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과 활발한 교류를 가져왔고, 정교회 문화권의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황제의 도시' 라고 불렀던 데서 기인한다.

그 외에도 북부 게르만어군에서는 이 도시를 '미클라고르드(스웨덴어: Miklagård)', '미클리가르뒤르(아이슬란드어: Mikligarður)' 등으로 부르는데 '대도시'라는 의미인 고대 노르드어 '미클라가르드르(Miklagarðr)'에서 유래한다. 이 명칭은 중세 초기, 온 유럽으로 진출했던 바이킹인들이 자신들이 본 중에서 가장 큰 도시를 '큰 도시'라고 불렀던 데서 기인한다.

페르시아어권에서는 '수도'라는 의미의 '파이타흐트(پایتخت, Pâytaxt)이라고 불렸으며, 이외에도 '고스탄타니예(قسطنطنیه, Qostantaniye)'[15]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로도 제국의 공문서에서는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 Kostantiniyye)'를 더 선호했다. 이는 아랍어로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라는 뜻의 '쿠스탄티니야(قسطنطنية, Qusṭanṭinīyya)'라고 쓴 것을 다시 오스만 튀르크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미 현지에서는 '콘스탄티누폴리스'라는 명칭이 워낙 뿌리 깊게 박혔던 탓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파디샤들 또한 무슬림이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후계국가를 자처했기 때문에 동로마와의 직접적인 연결성을 부여하는 해당 명칭을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민족의식이 강해진 19세기에는 그리스식 명칭인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버리고 '이스탄불'로 굳어졌고, 구어적으로 사용되던 명칭은 완전히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자 '이스탄불'을 제외한 기타 명칭들은 폐지하고 '이스탄불'로 완전히 공식화했다. 아예 튀르키예 우편에서 '이스탄불' 이외의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누폴리스', '코스탄티니예', '차리그라드', '쿠스탄티니야' 따위 이름으로 적힌 우편은 무조건 취급하지 않겠다고 강경 엄포를 때릴 정도였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리스어권을 제외한 대부분 언어권에서는 이스탄불 혹은 이스탄불에서 유래한 표기를 사용한다. 다만 이와 별개로 현대 튀르키예에서는 그리스어의 콘스탄티노스와 같은 어원(라틴어의 콘스탄티누스)을 가진 이름인 코스탄틴이 남성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3. 역사[편집]


도시의 이름이 총 세 번 바뀌었는데,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이란 도시국가로 최초 건립되었고, 로마 치하에서 라틴어 명칭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렸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며 콘스탄티누폴리스(코이네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라틴어: Constantinopoli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의 도시가 되어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란 의미의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가 되었으며,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이 되며 이스탄불(İstanbul)이 되었다.


3.1. 고대 그리스폴리스 비잔티온[편집]


신화에 따르면 '메가라'라고 불리는 도시에 비자스(Βύζας)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고자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그녀는 "눈 먼 자의 도시의 반대편에 도시를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 눈 먼 자의 도시의 정체는 칼케돈(Χαλκηδών)[16]이며 이 도시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여사제의 조언을 들은 비자스는 메가라의 개척자들과 함께 그 땅을 찾아 항해하였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비자스 왕자 일행은 한 땅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는 금각만이 있고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어서 항구도시의 입지 조건으로 매우 좋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가야 하므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BC 667년 여기에 도시를 세웠고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왕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으로 불렀다.

칼케돈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칼케돈 또한 메가라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비잔티움 개척 이전인 BC 68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금각만을 끼고 있어서 입지 조건이 더 좋은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을 개척하지 않고 해협 동쪽에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칼케돈을 세운 집단들이 도시를 해협 서쪽에 건립하는 것의 이점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판단하여서 개척자를 장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

그 후 이 도시는 바다와 바다를 낀 항구도시로 발전한다. 그리스 상인을 위한 지역 거점의 역할을 하던 이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한테는 그 방탕함과 해이함으로 악명이 높아 어느 여행자는 비잔티움 사람들을 두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깠다고. 죄악의 도시(Sin City)라는 별명으로 금욕적인 사람들에게는 거의 소돔고모라 취급을 받는 라스베가스 같은 이미지였던 듯하다.

비잔티온은 BC 491년 다리우스 1세 치세의 페르시아가 점령하였으나 BC 477년 아테네를 위시로 한 델로스 동맹에 다시 탈환되어 그리스계 도시로 쭉 남았다. 기원전 340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의 포위공격을 격퇴해내기도 했다. 이후 기원전 150년에 로마에 공납을 바치는 대신 자치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로마의 질서에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독립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원후 193년 다섯 황제의 해 당시 경쟁구도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중 지중해 동부 세계의 지지를 받고 있던 후자의 편을 들어버리는 악수를 두고 만다. 이때 비잔티온은 여느 동방 도시들과 달리 니게르를 적극 지지한 터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진영에 반역향으로 크게 찍혀버렸다. 이미 이 때에도 특유의 촘촘한 방어력은 발휘되고 있었던 것인지, 포위공격은 3년을 끌었고 세베루스의 분노를 돋우게 된다. 결국 196년에 비잔티온은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반역자 취급을 당하고 지역 유지들은 처형됐으며[17] 도시는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 하지만 워낙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18] 세베루스 황제 치세 때 다시 재건되었다.

당시에도 비잔티움(비잔티온)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거점, 그리고 난공불락의 요충지로 잘 알려진 무역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의 찬란한 명성과는 달리, 당시의 비잔티움은 인구 100만의 수도 로마나 인구 50만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다 못해 아테네나 테베처럼 영향력 있는 폴리스가 된 적도 없으며, 오히려 지금의 튀르키예 수도앙카라가 더 큰 도시였다. 평범한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3.2. 로마 제국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편집]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사두정치 시절 서방 부제의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150여 년간의 위기로 쇠락할 대로 쇠락하였으며 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공화주의적 정치 관례가 남아 있던 로마를 대체할 제2의 수도의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조건은 이집트소아시아 등의 경제적 중심지와 문화적 중심지인 그리스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방과 가까운 곳이며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다뉴브 강 이북의 이민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경과 가까워 이들의 침입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곳이었다. 본디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자리로 모이시아 속주의 세르디카(Serdica)[19]를 생각하고 있었고 "세르디카는 짐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말 또한 여러 번 언급했으나[20] 사두정치를 끝내기 위한 리키니우스와의 내전 도중 벌인 비잔티움 공성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는 곳을 깨닫게 되었다.

324년 내전을 종결짓고 제국 유일의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고 곧바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바꾸는 대공사에 착수했다. 이후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일단 이름은 이렇게 붙었지만, 도시가 동로마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한 도시가 되면서 점차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스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이걸 넘어서 더 흔하게는 그냥 그 도시(이 폴리/ η Πόλη / The City)라고 불렀다.[21]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일단 도시가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의 한 변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게다가 당대 어떠한 공성 병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의 위엄은 대단했다. 도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수많은 이민족들은 이 성벽을 넘지 못했다. 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에게 함락당한 적이 있지만, 십자군은 성벽을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금각만(골든 혼)을 건너 들어왔다.

게다가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단순히 외딴 곳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그리고 에게해를 위시한 지중해 본해와 흑해를 잇는(폭이 좁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봉쇄할 수도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 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로마가 수도이던 그 이전 시절의 흑해는 그저 제국의 동북쪽 구석에 있는 내해 정도였던데 반해(다만 아테네 시절에도 우크라이나의 곡물은 지중해의 주 상품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수도가 된 이후에는 흑해의 중요성이 훨씬 높아졌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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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자식들 및 조카들에 의해 나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국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맡게 되었다. 중세 서양 세계의 강대국 중 하나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만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22] 특히 제국이 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했던 콤니노스 왕조 마누일 1세의 치세에는 총 인구 40만여 명 중 외국인 인구가 6만에서 8만에 달했을 정도로[23]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로서 번영했다.

이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하면 옛 수도인 로마는 너무나 몰락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로부터 보잘 것 없고 다 망해버린 촌구석 동네 쯤으로 여겨져 멸시를 받았다. 한 예로 968년 동로마에 파견된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신인 리우트프란트와 만난 동로마의 환관인 크리스토포루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이탈리아의 로마에는 온통 사악한 노예나 빵장수들만 남았소."라고 말했다. 고대 서양에서는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을 파는 빵장수를 가리켜 도둑이나 사기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있었다. 고대 서양에서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가져오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구워서 빵으로 만들어 파는 빵집이 하나씩 있었는데, 빵집 주인들 중에서는 주민들로부터 받은 밀가루 중 일부를 몰래 빼돌려서 숨겨놓고 밀가루 상인들한테 팔아넘기는 식으로 돈을 버는 악덕 업자들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고대 서양에서 상대방을 비난할 때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장수라는 말을 썼다.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는데, 그 이후로 로마는 쭉 쇠락하여 빵장수 같은 사기꾼들만 남는 범죄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 크리스토포루스가 했던 조롱이었다.#

그러나 1204년 도시를 침략해 온 4차 십자군에 의해 3일 동안 도시 전역이 약탈당하고 그들이 세운 괴뢰국, 라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1261년, 니케아 제국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 그 뒤로 제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에 도시 인구는 겨우 4만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453년,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제국을 꿈꾼 오스만 술탄국메흐메트 2세에 의해 끝내 함락된다.

자세한 내용은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서로.


3.3.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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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타 다리(Galata Köprüsü).
화재로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가 지금은 석재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시절에도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터키어로 음차한 코스탄티니예[24](قسطنطينية)라고 부르며 제국의 수도로서 크게 번영했다. 코스탄티니예를 정복하고 오스만 술탄들은 카이세리 룸(Kayser-i-Rûm)[25]을 자칭하며 종교적 관용, 각종 면세 혜택, 급여 보장 등 다양한 당근과 유혹을 휘두르며 동로마 제국 말기 많이 인구가 빠져나가고 초췌해졌던 도시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며, 그 결과 덕분에 오스만의 정복 이후 한두 세대 만에 코스탄티니예는 동로마의 전성기 시절 같은 번영과 중요성을 다시 누리게 됐다. 당시 이스탄불은 지금처럼 튀르키예 끄트머리에 위치한 변경이 아니라 3을 지배하는 제국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심지였다. 파디샤는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제국 각지로 군사를 출병시켜 지배를 공고히 했고, 심지어 유럽 내륙의 오스트리아까지도 원정했다. 자세한 것은 빈 포위 문서로. 전성기에는 헝가리,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명백한 중유럽인 빈까지 공격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이스탄불의 모습은 대부분 이 시기의 것이다. 19세기 중후반의 갈라타 다리를 묘사한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스카이라인은 현재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구 성벽 이내로 한정되던 이스탄불 행정구역이 점차 갈라타부터 시작해 카드쾨이, 위스퀴다르, 메지디예쾨이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도 19세기의 일로 원래 인구가 많았지만 특히 19세기 후반 불가리아의 독립과 20세기 초 발칸 전쟁으로 인해 약탈과 학살을 피해 이주해온 무슬림 인구가 폭증하면서 시가지 확대가 불가피했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이 차탈자(Çatalca)까지 내려와서 코스탄티니예를 위협한 적이 있었다. 이 지역은 오늘날 이스탄불 광역시에 포함되어 있을 만큼 이스탄불과 지척에 있는 거리다. 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코앞인 보스포루스 해협영국 함대가 몰려와 위협을 가한 바 있으며, 1918년 오스만 제국이 협상국항복하자 영국군이 승전국 자격으로 무혈 입성하여 점령했다.

1919년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왕국1차 대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동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를 공격했지만, 이미 영국군이 점령한 상태였던 코스탄티니예까지 노릴 수는 없었다. 이후 그리스군은 무리하게 아나톨리아 내륙까지 진공했다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패퇴당했고, 아타튀르크가 아나톨리아 수복을 마무리하자 영국이 개입했다. 영국은 에게해의 섬들과 코스탄티니예를 포함한 동트라키아 지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제안을 했고 아타튀르크는 후자를 선택하여 코스탄티니예는 튀르키예인의 품에 돌아왔다.


3.4. 튀르키예의 이스탄불[편집]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야경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의 지위는 상실하고, 아타튀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신생 튀르키예 정부는 오스만 왕가와 귀족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모두 추방했고 오스만 시절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땅의 튀르크계 발원지와 같은 척박한 땅 앙카라로 천도하였다. 이때 도시의 정식 명칭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시기 튀르키예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시민들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행해져 1960년대를 기준으로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1955년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에서 키프로스는 그리스라며 그리스와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력 행위가 극에 달해 있을 시절이다. 아테네에서도 반 튀르키예 시위가 있었고, 특히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로잔 조약을 통해 추방에서 제외된 트라키아 서부 지방의 튀르크계 주민들에게도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자 튀르키예에서도 반 그리스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게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튀르키예와 그리스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동구권의 공산화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양측 정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또 오스만 제국이 소멸되고 나서 오스만 제국 국적이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신청하지 않은 그리스계 무국적자들이 이스탄불에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들은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인도 아닌 상태로 거주 허가증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때의 키프로스의 반 튀르크 시위 이후 법적 이유를 들어 하나 둘 추방했다.[26][27] 백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거주민의 겨우 0.01%만이 그리스계이다. 이들은 정교회를 믿는 인구만 한정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 혈통이지만 19세기 말과 튀르키예 독립전쟁 시기 그리스에서 추방된 무슬림인 기리틀리(Giritli)의 수는 훨씬 더 많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 튀르크화된 그리스계 인구는 여전히 이스탄불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튀르키예에서 종교가 아닌 혈통으로 '그리스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튀르키예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 그중에서도 인구가 밀집된 해안의 평야 지대에는 고대부터 많은 그리스계 도시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제국 내에서도 인구수로 상당히 두드러지는 속주였다. 이후 동로마의 쇠락으로 튀르크인들이 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기는 하였으나 당연히 기존의 주민들(대체로 그리스계로 여겨지던 그리스어 사용자들)에 비하면 소수였기에 문화적 동화와 통혼을 통해 융합되면서 현재의 '튀르키예인'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혈통적인 그리스계를 따지자면 현재 튀르키예인의 상당수가 튀르크인 도래 이전부터 현지에 터 잡고 살던 그리스인들로 혈통이 이어진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는 튀르키예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스탄불의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남아 있던 인프라는 어디 안 가고 남아 있었고, 비록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지만 정작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엘리트 계급으로 군림하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유력 가문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고, 지리적으로 유럽과 인접하여 이스탄불 위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스탄불 하면 오늘날 관광 중심지인 구 성벽 내와 갈라타, 위스퀴다르, 카드쾨이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전까진 논밭이나 임야지였던 곳에 시골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난개발이 시작되었다. 물론 정부도 가만히 있진 않아서 단속도 했지만, 이들은 공무원들이 죄다 퇴근한 밤중에 건물을 지었고, '밤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의 게제콘두(Gecekondu)가 여기저기 들어서자 정부도 하는 수 없이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우리나라 개발독재 시절에야 그냥 국유지 무단 점유로 다 구속하고 불도저로 죄다 밀어버렸겠지만 이슬람 관념상 집없는 사람을 내쫓긴 좀 그래서 일단 지어진 집들은 인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밤중에 몰래몰래 날림으로 지은 달동네가 멀쩡할 리는 없었고, 지진이나 각종 사고로 피해를 많이 겪었다. 한때 이스탄불 내 주택의 무려 65%가 무허가 게제콘두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제대로 된 주택이나 아파트로 개선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미 개발된 부지에 대한 전면 재개발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게제콘두 시절 형성된 비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도 개선되지 못하고 남아 있어 이스탄불의 악명 높은 교통 정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4. 정치[편집]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정치 생명을 시작한 장소이다. 그야말로 정의개발당(AKP)의 정치적 고향. 그래서 1995년 에르도안이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된 이후로, 2015년까지 이스탄불 시장은 그야말로 복지당→ 정의개발당(AKP)의 표 밭이었다. 에르도안은 이전부터 ''이스탄불에서 패배하면 내 정치 생명은 끝"이라고 수십 년 동안 공언할 정도로, AKP 입장에서 이스탄불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요지이다.

원래 대도시일수록 투표율이 낮음은 전 세계적으로 적용되는 상식이다. 농촌지역이 고령자 비중이 높고, 이들은 인구가 적으므로 선거 투표 때 결집하여 도시의 분산된 표심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탄불은 몇 안되는 예외 사례로, 튀르키예에서 제일 선거 투표율이 높은 광역자치단체이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 최대도시로 튀르키예 인구의 1/5을 단독으로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선거 때마다 투표율이 가장 높다. 이스탄불 투표율이 70% 밑으로 떨어지는 사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2019년 지방 선거 때도 이스탄불의 투표율은 83%였고 6월 재선거 때 투표율은 84.7%로 오히려 더 올랐다. 2019년 6월 재선거 때는 선거 투표하려고 결혼식과 영화 관람을 취소하고 휴가를 연기하는 사례가 한국 언론에까지 보도될 정도였다. 이스탄불 투표율이 워낙 높으니까 매번 선거 때마다 튀르키예에서는 이스탄불만 쳐다보게 된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지역이 좀 복잡하다. 이스탄불은 유럽권역인 구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역과 해협 너머 소아시아 지역이 합쳐져 있다. 구 콘스탄티노폴리스 지역 중에서 그리스와 접한 외곽 지역과 보스포러스 해협에 인접한 도심권 자치구들은[28] 세속주의 성향인 공화인민당이 앞섰다. 그러나 유럽 권역 내부에서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외곽 지역 사이에 있는 인구밀도가 높은 중간지역 자치구들은 이전부터 정의개발당이 지켜온 지역이다.

반면 해협 건너편 소아시아 지역의 이스탄불시는 그야말로 AKP가 몰표를 쓸어담는 구역. 소아시아 지역은 유럽권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기도 하고, 튀르키예 민족주의이슬람주의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에르도안이 이스탄불시를 소아시아 지역과 중간지역 자치구를 통해 번번이 CHP의 도전을 물먹였다. 201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가장 표 차가 적게 났을 때가 AKP-CHP 후보 간 8% 차이가 났는데, 그때 구별 승리 현황은 AKP 26개, CHP 14개였다. 따라서 선거 때마다 공화인민당 지지율이 매우 높은 부유한 구들과 그렇지 않은 구들의 투표 결과가 극명히 갈리는데도 불구하고, CHP 우세 자치구보다 AKP 우세 자치구 숫자와, AKP 자치구의 인구가 CHP 권역보다 많기 때문에 합계를 내 보면 AKP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에르도안 대통령의 경제 실정으로 2019년 3월 튀르키예 지방 선거에서 공화인민당에크렘 이마모을루 후보가 에르도안 대통령 밑에서 일하던 비날리 이을드름 튀르키예 총리를 0.28%, 1만 1천 표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승리 구 자체는 CHP 17개, AKP 22개로 AKP가 많았다. AKP가 소아시아 지역을 쓸어담고 유럽지역에서도 중간 지대에서 앞섰으니까.

3월 1차 선거에서 패배하자 에르도안은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며 정신승리를 해대가지고 아예 튀르키예 선관위를 압박하여 선거 무효를 결정하고 재선거를 한다. 그러나 2019년 6월 23일 실시된 재선거에서는 이마모을루 후보가 54.2%를 얻어서 비날리 이을드름 총리의 45.0%를 9.2%차, 표 차로는 81만 표차까지 벌리면서 압승했다. 단 한 번도 CHP한테 승리를 허락하지 않던 소아시아 지역까지 이마모을루 후보한테 몰표를 던졌다. 원래 AKP만 찍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이마모을루 CHP 후보를 찍었다는 유권자가 영국 BBC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원래라면 당연히 AKP를 찍었겠지만 에르도안이, 국민들이 투표한 선거 결과를 마음에 안 든다고 무효화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CHP를 찍었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CHP 이마모을루가 28개 구에서 승리하고 AKP 이을드름 총리는 고작 11개 구 승리에 그쳤다.

2019년 지방 선거에서 그 이전까지 지리멸렬했던 공화인민당 지지세가 결집하면서 이즈미르는 물론 여당 세력이 강한 내륙 지역의 앙카라 시장까지 공화인민당이 가져갔다. 거기에 에르도안이 선거 무효까지 결정하는 도박을 벌인 최대도시 이스탄불 시장 자리를 공화인민당에 빼앗기면서, AKP는 위기에 몰렸다.


5. 경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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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튀르키예의 경제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스탄불은 오랫동안 개발된 도시라서, 시 중심부는 주로 상업지로 개발되어 있고 기업들이 몰려 있는 곳은 주로 도시의 외곽 지역이다.

6. 인구[편집]


인구는 1572만 명 정도로, 러시아모스크바(인구 약 1,301만)보다 더 많아 유럽 최대의 도시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1572만 전체 인구의 1/3은 보스포루스 해협 동안의 아시아 부분에 살고 있어서 '유럽 대륙' 최대의 도시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면도 있다. 위키백과유럽 최대의 도시 항목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을 달아 놓았다.

인터넷에서는 모스크바가 유럽 최대의 도시라고 주장하는 자료도 많이 있다. 러시아-튀르키예 관계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러시아튀르키예는 역사적으로도 앙숙이었기 때문에 서로 사소한 것에서 지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측면도 있다. 만약 '유럽 부분' 인구만 따진다면 약 1천만 명으로, 1천 3백만명의 모스크바에 이어 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인 셈이다. 참고로 3위는 880만명의 영국 런던이다.

공식 인구에 집계되진 않고 있지만 튀르키예 경찰에 따르면 이스탄불 거주 인구 중에 거주 신고가 되지 않은 이들(불법으로 만든 집에서 살아가는 빈민가 거주민)과 외국인을 합치면 거의 600만에 달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시리아 내전 이후 튀르키예가 국경을 개방하면서 몰려온 시리아 난민들이 이곳까지 몰려온 마당에 가뜩이나 복잡한 이스탄불에 헬게이트가 열렸다.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난민들도 몰려들고 있다. 오죽하면 이스탄불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튀르키예어로 말을 걸었더니 자기는 튀르키예인이 아니라 난민이라서 "튀르키예어 할 줄 모릅니다."라는 대답이 빈번해지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합산하면 경찰 추산으론 적어도 2000만. 다만 서울시(605.25km²) 3배가 넘고 제주특별자치도(1,848km²)와 비슷한 1,830km²로 넓고,[29] 이스탄불 내에서도 생활권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복잡하지는 않다.

인구밀도는 7,691명/km²으로 서울의 17,289명/km²(2009)과 비교해도 널널하다. 다만 이스탄불의 체감적 인구밀도는 서울보다 높다는 느낌을 주는데, 여행객들이 주로 가는 지역들이 이스탄불의 도심 정중앙에 위치해 있기도 하거니와, 외국인도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 더욱이 이스탄불의 인구 구조는 몇몇 중심구에만 치중해 있기 때문에, 중심 구 단위들로 보면 서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2009년 기준으로 베이오을루구의 인구밀도는 28,235.1명/km²이고,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인 파티흐구는 26,794명/km²으로 서울 평균보다 훨씬 더 혼잡하다. 전형적인 베드타운인 귄괴렌구의 경우 32,366명/km².


7. 기후[편집]


이스탄불은 쾨펜의 기후 구분지중해성 기후(Csa)에 온난 습윤 기후(Cfa)와 겹친 점이지대이다.

지중해성 기후일 것 같은 생각과 달리 비도 많이 온다.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오히려 음습한 기후[30]다. 영국인들이 그러하듯이 현지인들은 우산을 쓰는 대신 레인코트나 모자를 쓰는 편. 이러다 보니 우산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인이나 관광객 들이다.

이즈미트 지진을 일으킨 북아나톨리아 단층이 근처에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 대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튀르키예의 지진 권위자가 경고한 바 있다.


8. 행정구역[편집]


본래 '이스탄불'은 테오도시우스 성벽 내에 위치한 구역(오늘날의 파티흐구)만을 의미했으나[31] 튤립 시대에 베이오을루구가 추가된 것을 시작으로 동서로 영역을 확대에 1923년 공화국 수립 당시에는 아나돌루 지역의 위스퀴다르구와 에윕, 바이람파샤, 제이틴부르누구가 편입된 상태였다. 여기에 또 면적확대가 이루어져 오늘날에는 서쪽의 차탈자구와 동쪽의 실레구, 남쪽의 아달라르 구가 포함된 어마어마한 영역이 되었다. 한때는 마르마라 해 남쪽 건너편의 항구도시인 얄로바까지 이스탄불 시역에 들어갔으나, 1995년 떨어져 나갔다.

이스탄불의 생활권은 크게 4곳으로 구분되며, 베드타운이 밀집한 바으즐라르구와 인접한 아브즐라르, 바흐첼리에빌레르구를 포함한 유럽 쪽 서부 도심(이 세 구만 합쳐도 인구가 250만이다), 전통적인 이스탄불이었던 파티흐, 베이오을루구와 그 주변부에 위치한 제이틴부르누, 바이람파샤, 에윕, 시슐리, 베식타쉬(Beşiktaş)구를 포함한 주도심, 아나돌루 지구의 중심지였던 위스퀴다르, 카드쾨이와 주변부에 위치한 위므라니예, 체크메쾨이를 포함한 아나돌루 해변 쪽 도심, 나머지 카르탈, 아타셰히르, 말테페, 펜딕구를 포함한 아나돌루 쪽 동부 도심으로 구분된다. 이 외에 변두리에 위치한 차탈자나 실레 같은 면적 큰 구들은 아직 한산해서 농사도 짓고 있고, 심지어 마차도 볼 수 있는 동네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0px-Istanbul_location_districts.svg.png

오늘날 이스탄불도의 행정구역도 모습. 관광객들이 몰리는 구시가지 지역은 중앙에 한정되어 있으며, 교외 지역은 대단위 신도시가 들어서 있다. 보스포러스에 가까운 구들이 대부분 부자들이 살고 있는 구. 서울로 치면 강남 지역에 해당한다.

이름
터키어
면적(km²)[32]
인구(2017)[33]
이름
터키어
면적(km²)
인구(2017)
가지오스만파샤구
Gaziosmanpaşa
12
497,959
말테페구
Maltepe
53
497,586
귄괴렌구
Güngören
7
296,967
베이코즈구
Beykoz
310
251,087
바샥셰히르구
Başakşehir
107
396,729
산작테페구
Sancaktepe
63
402,391
바으즐라르구
Bağcılar
23
748,483
술탄베일리구
Sultanbeyli
29
329,985
바이람파샤구
Bayrampaşa
9
274,197
실레구
Şile
800
35,131
바크르쾨이구
Bakırköy
29
222,370
아달라르구
Adalar
11
14,907
바흐첼리에블레르구
Bahçelievler
17
598,454
아타셰히르구
Ataşehir
25
423,372
베식타쉬구
Beşiktaş
18
185,447
위스퀴다르구
Üsküdar
35
533,570
베이오을루구
Beyoğlu
9
236,606
위므라니예구
Ümraniye
46
699,901
베일릭뒤쥐구
Beylikdüzü
39
314,670
체크메쾨이구
Çekmeköy
152
248,859
뷔윅체크메제구
Büyükçekmece
173
243,474
카드쾨이구
Kadıköy
25
451,453
사르예르구
Sarıyer
153
344,876
카르탈구
Kartal
38
463,433
술탄가지구
Sultangazi
37
528,514
투즐라구
Tuzla
138
252,923
시슐리구
Şişli
35
274,196
펜딕구
Pendik
190
698,260
실리브리구
Silivri
858
180,524
아시아 지역 합계
1,915
5,302,858
아르나붓쾨이구
Arnavutköy
453
261,655
아브즐라르구
Avcılar
50
435,682
에센레르구
Esenler
19
454,569
에센유르트구
Esenyurt
43
846,492
에윕구
Eyüp
228
381,114
제이틴부르누구
Zeytinburnu
12
287,378
차탈자구
Çatalca
1,142
69,057
캬으트하네구
Kâğıthane
15
442,694
퀴췩체크메제구
Küçükçekmece
44
770,393
파티흐구[34]
Fatih
15
433,873
유럽 지역 합계
3,517
9,726,373
이스탄불
İstanbul
5,461
15,029,231

  • 원래 파티흐구 동부는 에미뇌뉘구(Eminönü İlçesi) 소속이었으나,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에미뇌뉘구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2008년 에미뇌뉘구를 파티흐구에 합병했다. 합병 직전인 2007년 에미뇌뉘구의 인구는 32,557명에 불과했다.


파일:attachment/이스탄불/Example.jpg

▲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조사한 이스탄불 대도시권의 경제 규모. GDP(국내총생산)가 3,011억 달러로 총 29위를 차지하였으며 이슬람권 대도시권들 중 가장 큰 경제권이다.


9. 관광[편집]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튀르키예의 세계유산

[ 펼치기 · 접기 ]
문화유산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
İstanbul'un Tarihi Alanları

1985년

디브리이의 대 모스크와 병원
Divriği Ulu Camii ve Darüşşifası

1986년

하투샤
: 히타이트의 수도

Hattuşa: Hitit Başkenti

1987년

넴루트 산
Nemrut Dağı

1988년

크산토스 ・ 레툰
Xanthos - Letoon

1994년

사프란볼루
Safranbolu Şehri

1998년

트로이의 고고 유적
Truva Arkeolojik Alanı

2011년

셀리미예 사원 복합 유적
Edirne Selimiye Camii ve Külliyesi

2012년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지
Çatalhöyük Neolitik Alanı

2014년

부르사와 주말르크즈크
: 오스만 제국의 탄생

Bursa ve Cumalıkızık
: Osmanlı İmparatorluğunun Doğuşu


2014년

페르가몬과 다층적 문화경관
Bergama Çok Katmanlı
Kültürel Peyzaj Alanı


2015년

디야르바크르 요새 및 헤브셀 정원 문화경관
Diyarbakır Kalesi ve Hevsel Bahçeleri Kültürel Peyzajı

2015년

에페수스
Efes

2016년

아니 고고학 유적지
Ani Arkeolojik Alanı

2017년

아프로디시아스
Aphrodisias

2018년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

2021년

아르슬란테페
Arslantepe Höyüğü

2023년

고르디온
Gordion
복합유산

1985년

괴레메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 바위 유적
Göreme Millî Parkı ve Kapadokya

1988년

히에라폴리스 ・ 파묵칼레
Hieropolis - Pamukkale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이스탄불 역사지구
영어
Historic Areas of Istanbul
프랑스어
Zones historiques d'Istanbul
국가·위치
튀르키예 이스탄불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5년[35]
등재기준
(i)[36], (ii)[37], (iii)[38], (iv)[39]
지정번호
356

유럽 문화 수도 2010
2009년
린츠
빌뉴스

에센
이스탄불
페치

2011년
탈린
투르쿠

유네스코 세계유산 건축물인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 대모스크)외에도 엄청난 역사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유적 리스트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 대모스크)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그랜드바자르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셰흐자데 모스크
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예레바탄 사라이
갈라타 탑
발렌스 수도교

요즘은 세계적인 패션 중심지로 부상했다지만, 확실히 서유럽의 도시보다 낙후되어 보이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도로 체계가 근대화가 안 되어 벌어지는 엄청난 교통 체증, 그리고 그 지역의 대기 오염 등.

유럽식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버스 정류장에 들어오는 낡고 더러운 버스도 참 깨는 볼거리다. 요즘은 버스들이 리모델링을 해서 깨끗하다. 서울시 버스와 색깔 톤과 구조가 비슷한데, 아무래도 한국 버스를 수입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기아 마크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2023년 현재 한국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서유럽 수입산이거나 터키 자국 브랜드이다) 과거에는 민영 버스(Halk otobüsü)라는 게 있어서 이 버스에서는 악빌을 사용할 수 없고,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차장에게 직접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는데, 2015년 기준으로 악빌은 사용이 중단되었지만, 모든 버스에서 이스탄불카르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앙카라를 포함한 지방에서는 여전히 차장을 태운 민영 버스가 돌아다닌다. 그 대신 직접 돈을 주고 차를 타는 게 금지되어 있으니, 만약 교통카드에 돈이 없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그 사람에게 돈을 주자. 현지인들도 그렇게 한다.

해협 양쪽으론 유럽과 전 세계의 부호들이 지어놓은 호화 별장들과 개인 선착장, 요트들이 즐비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고 여기를 구경하며 찬탄한다.


9.1. 구경거리[편집]



파일:이스탄불.약도.jpg

관광 지도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도시 1위에 선정된 만큼 볼거리가 참 많다. 이스탄불은 크게 유럽 지구의 구시가지(남쪽)와 신시가지(북쪽), 그리고 아시아 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경거리는 주로 구시가지에 몰려 있다. 신시가지에도 몇 개 구경거리는 있으니 낫지만, 아시아 쪽 이스탄불은 위스퀴다르(Üsküdar) 지역을 제외하면 새롭다고 할 한 것이 없는 데다 아시아-유럽 이동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므로 여러모로 주의할 것. 튀르키예의 화폐 단위인 튀르키예 리라는 환율이 불안정하다. 2021년 2월 한국 돈으로 약 150원이었는데, 2023년 8월 현재 대략 50원으로 3배 싸졌다. 본문에 적힌 입장료 등은 변동되었을 수 있으니 유의 바람. 또한 튀르키예의 경기가 어려워진 탓인지 하루가 다르게 입장료 등이 올라가고 있어 기존의 정보들보다 실제 가격은 비쌀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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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엄 패스
이스탄불의 박물관들을 맘대로 딱 한 번씩만 드나들 수 있는 패스. 2022년 4월 현재, 개시부터 5일 동안 쓸 수 있으며 가격은 360리라[40] 술탄 아흐메트 지역의 매표소에서 구매가 가능하며, 아야 소피아 자미(성 소피아 성당), 고고학 박물관[41], 튀르키예 이슬람 예술/미술 박물관[42], 톱카프 궁전(하렘 포함)을 통과할 수 있다. 튀르키예 대학에 유학하는 학생이라면 Müzekart를 만들 수 있는데 이건 30리라(학생이 아닐 경우 700리라)로 튀르키예 전국의 거의 웬만한 유적을 다 뚫을 수 있는 특별권이다.[43] 40리라를 더 주면 Müzekart+라며 북키프로스의 박물관까지 뚫을 수 있는 데다가 오페라, 극장 공연 같은 입장료를 깎아주는 괴물을 준다. 심지어 유효 기간은 발행일로부터 1년. 원래 내국인용이기 때문에 만들려면 튀르키예 주민등록증이나 튀르키예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학생증이 필요하다. 뮈제카르트와 뮤지엄 패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사이트를 방문할 것. http://www.muzekart.com/tr/muzekart
2019년에는 이스탄불 이외에 지역에도 다양한 뮤지엄 패스가 도입되었다. 7일동안 유효한 에게해 지방(이즈미르, 아이든, 무을라도) 박물관에 유효한 패스(75리라), 7일 동안 유효한 지중해 지방(안탈리아, 메르신, 아다나도) 박물관에 유효한 패스(60리라), 3일간 유효한 카파도키아 패스(75리라), 그리고 튀르키예 전국에 15일 동안 유효한 패스(210리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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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하기아 소피아/gkrldkthvldk.jpg}}} ||

이스탄불의 변치 않을 랜드마크. 하기아 소피아라고도 하며, 전차 정거장 술탄 아흐메트 역(Sultanahmet istasyonu)에서 내려 시르케지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바로 보인다(국철은 2021년 현재 폐지 상태). 술탄 아흐메트 자미 건너편에 있다. 동로마 시절에 건축되어 오스만 제국이 개조해서 모스크로 써오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가 다시 모스크가 되었다. 물론 상당히 비쌌던 입장료도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이 모스크로 개조할 때도 일부 기독교(정교회) 미술 벽화를 부숴버리는 대신 덮어 칠하기를 한 덕분에, 로마 제국 시절의 벽화들이 살아남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웅장한 미(美)로 오늘날 매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큼지막한 원판에 아랍어로 쓰여 있는 것은 알라와 무함마드, 정통 칼리파 네 명의 이름으로,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지는 못해도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서예 작품이라고 하니 눈여겨볼 것. 2021년 현재는 복원 작업 때문에 주요 모자이크가 있는 2층에 올라갈 수 없다. 장차 1층은 기도실, 2층은 예전처럼 박물관 형태로 쓰일 예정이다. 미흐랍 쪽 천장에 있는 테오토코스 모자이크는 이슬람 예배 시간이 아닐 때는 개방하고, 예배 시간에는 커튼을 내려서 가리는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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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의 건너편에 자리한 모스크. 참고로 술탄 아흐메트와 아야 소피아 사이에 히포드롬 광장(Hippodrom, 마차경주가 열린 로마시대 경기장 유적터, 터키어로는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At maydanı라고 부른다)이 있다. 술탄 아흐메트는 오스만 시절에 만들어졌는지라 아야 소피아보다 좀 더 오스만풍이 강하며 성원 내부의 푸른 빛의 타일은 특히 아침이나 저녁에 가면 햇빛에 빛나서 경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다만 생각보다 푸르진 않은데, 이집트 바자르에 있는 뤼스템파샤 자미에 가면 성원 전체가 푸른 타일로 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여기는 지금도 예배가 이뤄지는 공공시설이라 입장료가 없지만, 나올 때 기부금을 넣는 곳이 있어 내고 싶은 만큼 내면 된다. 남쪽에 모자이크 박물관이 있는데, 모자이크 박물관은 입장료 8리라 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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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구시가지 높은 언덕에 자리한 모스크. 오스만의 유명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44]의 작품이며, 건물의 크기는 술탄 아흐메드보다 쉴레이마니예가 더 크다. 다만 화려하다기보다는 깔끔한 편. 접근성이나 유명세는 술탄 아흐메드가 높지만, 건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쪽도 보는 것을 추천. 쉴레이만 대제휴렘 술탄의 영묘가 있으며 근처에 미마르 시난의 묘도 있다. 언덕 위에 있어 신시가지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점도 좋다. 근처에는 셰흐자데 모스크가 있는데, 이는 미마르 시난의 초기작이다.
-
  • 파티흐 모스크 단지(Fatih camii külliyesi)
구도심 서쪽에 위치한 모스크 단지로 본래 메흐메트 2세가 이스탄불 정복 기념으로 그리스인 건축가 흐리스토둘로스에게 명령하여 동로마 양식으로 세웠지만 18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지고 오늘날 건물은 지진 후 새로 새워진 건물이다. 이곳은 본래 역대 동로마 황제들의 무덤이 있던 성 사도 성당 자리였으나 무덤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털려버려 속 빈 강정이 되어버렸고, 이스탄불 정복 직후에는 그간의 관리소홀로 붕괴 직전까지 간 상태였다. 메흐메트 2세는 직접 건물을 돌아보고 이 자리에 자기 이름을 단 모스크를 세우게 했는데 이전 황제들에 대한 존중과 기반 공사에 드는 예산 절감을 위해 지하 무덤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때문에 아직도 도시전설들이 남아 있는데 18세기 지진 당시 지하 묘소에서 동로마 유물들이 쏟아졌다는 등의 풍문이 돌았고 1993년 수리 때도 지하 묘지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이 돌았었다. 1993년의 수리 당시에 튀르키예 정부는 지하 묘지에 대한 발굴 조사도 하려 했지만 예산 문제와 과거 메흐메트 2세의 뜻을 존중해서 결국 묻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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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바실리카 시스턴)
아야 소피아 남서쪽 가까이에 있는 궁전(저수지). 터키어로 '사르느즈'도 단순한 저수지라는 뜻이다. 평범한 저수지 주제에 온갖 장식을 해놔서 궁전처럼 보여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입장료는 20리라이며, 박물관이 아니기 때문에 뮤지엄 패스나 뮈제카르트는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명한 눈물 기둥이나 메두사 기둥을 빼면 생각보다 볼 것은 없다. 튀르키예 학생증이 있다면 3리라에 뚫을 수 있다. 근처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시스턴이 또 있는데 여기는 2021년 기준 100리라. 볼거리보다는 그냥 접견 장소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은 많이 모여서, 정오(특히 여름)가 가까우면 사람의 줄이 쫙 늘어선다. 안이 시원해서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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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osque_istanbul_turkey_minaret_islam_travel_muslim_islamic-1324464.jpg}}} ||

술탄 아흐메트 지구에서도 해안가 끝자락에 있다. 아야소피아에서 이동하려면 걸어서 5분 정도만 가면 된다. 15세기~19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정의 역할을 한 곳이다. 오랜 기간 동안 술탄들이 자기 취향대로 증축을 하다 보니 조잡스러워 보인다는 얘기도 있다. 입장료는 2021년 8월 기준 100리라이며, 하렘 구역은 별도로 40리라 더 내야 한다. 서쪽 역 근방에 귈하네 공원과 국립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건물 내부 전시관 대부분은 사진촬영 금지이다. 궁전 입구에는 성 이리니 성당(Aya İrini)이라는 조그만 동로마식 성당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소피아 성당 건립 이전에 동로마 제국 기독교의 총본산이었던 나름 유서깊은 건물이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무기고로 쓰였으며, 현재는 버려진 건물이다. 톱카프 궁전 내에서도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보물관과 도자기관(궁전 내 부엌 건물을 개조해서 꾸몄다), 그리고 바닷가 쪽에 있는 바으다트 쾨슈크(Bağdat Köşk)이다. 종교 유물을 전시한 관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모세의 지팡이, 요셉의 팔 뼈 같은 이슬람 종교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며 칼리파 직을 넘겨받으면서 함께 얻어온 것들로, 오늘날에야 그냥 유물이지만, 황제가 칼리파를 겸했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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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İstanbul Arkeoloji Müzesi)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박물관. 19세기 말 오스만 함디 에펜디(Osman Hamdi Efendi)가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으로 위험을 겪고 있던 이라크, 시리아메소포타미아, 헬레니즘 문명 유물들을 수집해 톱카프 궁전의 일부 건물을 빌려 전시한 것이 시초로 복도에다가도 유물을 쌓아놓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 전시물을 자랑하며 부속 건물로 딸려 있는 치닐리 쾨슈크(Çinili köşk, 도자기가 있는 정자)에는 완숙기의 이즈닉 도자기와 튀르키예 도자기가 어떻게 중국에서 넘어왔고 제작 기술이 발달해왔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풍부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입장료는 15리라.[45] 귈하네(Gülhane) 역에서 가까우며, 근처의 귈하네 공원은 봄에 가면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 때문에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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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노라마 1453(Panorama 1453 museum)
2009년에 문을 연 박물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는 트램 톱카프 역 바로 앞에 있다. 1층에 이것저것 시각 자료가 있으나 전부 터키어로 되어 있다. 포인트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볼 수 있는 360도 파노라마로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재현도 인데, 실제 쓰였을 법한 물건들과 메흐테르, 대포 소리 등도 재현해 현장감이 상당하다. 현지에서 초등학생들 견학 필수 코스라고 하며 이 때문에 평일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갈 경우 헬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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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르케지 역(Sirkeci İstasyonu)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의 배경이 되는 오리엔탈 특급의 유럽 방면 종착역. 지금은 그냥 한가한 기차역 수준이며, 공사중. 2021년 현재 YHT(튀르키예 고속철)이 연장되어 있으며 할칼르역까지 연장된 고속철은 그리스 테살로니키와 불가리아 소피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톱카프 사라이 북쪽과 갈라타 다리 사이(그러니까 트램 1호선 시르케지 역 건녀편)에 있다. 배낭여행객이라면 이 주변과 술탄 아흐메트에 저렴한 숙소가 많아서 자주 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르케지 역 바로 앞에는 맥도날드버거킹과 튀르키예 전통 과자들을 파는 상점이 많이 있다. 참고로 튀르키예 대표 과자 중 하나인 로쿰을 처음 발명한 가게가 이 역 근처에 있다. Ali Muhiddin Hacı Bekir라는 가게로 가게는 조그맣지만 1777년 개점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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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쳄베를리타쉬 하맘(Cemberlitaş Hamamı, 튀르키예탕)
구시가지(베야즈트) 카팔르 차르시(그랜드 바자르) 동쪽, 쳄베를리타시 역에 있다. 쳄베를리타쉬(Cemberlitaş)는 '고리가 있는 돌'이라는 뜻인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곳에 수도를 건설하고 나서 세운 구조물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 구조물은 아직 남아 있으며 이스탄불 행정당국에서 말끔하게 수리해서 공개하고 있다. 전차정거장 Çemberlitaş역에서 바로 볼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인데 450여 년 전 미마르 시난이 건축했다. 하맘(목욕탕) 중에선 가장 대표적인 장소라 그런지 가격이 상당히 센 편인데 입장료(셀프목욕)만 40리라, 튀르키예식 때밀이를 체험하려면 20리라를 더 던져줘야 한다. 이곳 말고도 유명 하맘이 2군데(자이오을루 하맘, 슐레이마니예 하맘) 더 있긴 하나, 관광용이라 현지인은 그다지 잘 안 간다 카더라. 하맘을 좀 더 싸게 이용하고자 한다면 관광지가 아닌 지방 도시나 아시아 구역으로 가야 한다. 이스탄불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하맘들도 곳곳에 숨어 있는데, 이런 곳도 저렴하다. 대표적으로 카라쾨이에서 갈라타 탑 올라가는 언덕을 등지고 우측 토프하네 쪽으로 가면 보이는 동네인 추쿠르주마(Çukurcuma)에 위치한 하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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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팔르 차르시(Kapalı Çarşısı, 그랜드 바자르)
튀르키예 재래시장의 대표이며 서울로 치면 남대문 시장 같은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라는 말도 있다. 여기는 베야즈트에 있으며, 예레바탄 사라이의 서쪽에서 시내로 좀 들어간 곳에 있다. 전차를 이용할 경우 쳄베를리타쉬 역을 지나서 베야즈트-카팔르 차르시(Beyazıt-Kapalı çarşısı)에서 내리면 된다. 일요일은 쉰다. 들어가면 구경거리가 많고 흥정도 잘 통한다고는 하나, 그래도 물가가 굉장히 비싸서 가볍게 시장 볼 만한 곳은 못된다.[46] 다만 터키어를 할 줄 안다면 모든 상황이 다 바뀐다. 앞선 손님에게는 120리라에 팔던 카페트가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디자인인데도 흥정만 잘하면 70리라 정도로 깎는 건 일도 아니다. 예산 문제와 실속적인 것을 원한다면 그냥 기계로 짠 카페트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디자인은 튀르키예에서만 사용되는 것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손으로 짠 카페트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오를론(orlon)이라는 화학 섬유로 짠 것이나, 화학 염료를 사용해서 염색한 실을 쓰는 카페트의 경우 천연 염색 카페트의 2/3 수준밖에 안 될 정도로 가격이 떨어진다. 가령 작은 방에 깔 수 있는 킬림(여름철에 흔히 쓰는 얇은 카페트)의 경우 천연 염색 제품 가격은 최저 150리라인데 화학 염색 제품(둘다 수공예품)은 100리라 정도에도 구할 수 있다. 다른 물건들도 처음 부르는 값의 60% 수준까지는 깎아볼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상인들도 손님들이 가격 투쟁을 할 것을 알기 때문에 비싸게 부른다. 여하튼 여기서 정말 제대로 된 전통 튀르키예 카페트를 사려면 수표 다발이나 카드를 할부금으로 그을 생각을 해야 한다. 돈 없어 보이는 사람이 수제 카페트 가게를 기웃거리면 저 가게 가면 기계제 판다고 쫓아내기까지 한다.
동양인 관광객이 엄청 많이 찾다 보니 돌아다니다 보면 "니하오", "어서 오세요", "곤니찌와"를 엄청 들을 수 있다. 호객꾼들이 여성들 같은 경우엔 무시하고 가면 아줌마 아줌마 거리다가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할머니라고 한다. 발끈해서 돌아볼 때 주의를 끌 수 있다나… 위에 적혀 있듯이 세계적인 관광지다 보니 기본적으로 흥정을 하더라도 물건들이 싼 편이 아니고, 중국산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혹시 촛대나 집안 장식용품을 살 생각이 있으면 Paşabahçe(파샤바흐체)라는 인테리어 소품 체인점에서 동일한 물건을 거의 반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니 가 보는 것울 추천한다.
출입구가 몇십 개도 넘기 때문에 길 잃어버리기 딱 좋으니 여기를 약속장소로 삼지는 말 것. 길을 찾기 위해 힌트를 주자면, 트램이나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베야즈트문(Beyazıt Kapısı)가 어딘지를 물어서 가면 쉬울 것이다. 일요일은 쉬며 평일에도 19시면 닫는다. 또한 카팔르차르시와 이어서 서술할 이집션 바자르 사이에도 시장들이 잔뜩 형성되어 있는데, 터키어밖에 안 통하고 현지인들을 위한 시장이지만 발품만 열심히 팔면 카팔르차르쉬 가격의 50% 정도 가격에 물건을 구할 수도 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지만 유학생들을 위해 조언을 주자면, 중고서적 혹은 터키어 사전을 구하고 싶다면 이곳 카팔르차르시 근처에 있는 'sahaflar çarşısı'에 가보기 바란다. 베야즈트문 바로 왼쪽에 빠지는 골목에서 왼쪽으로 가면 보이는 좁은 뜰같은 곳인데, 웬만한 책은 이곳에서 다 구할 수 있다. 다만 가격 흥정 필수. 찾고 싶은 책이 있으면 책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면 바로바로 찾아준다. 책 외에 골동품, 오스만 제국 시절 화폐 같은 것도 취급하는 가게들이 있다.
사실 현지인들에게 카팔르 차르시(그랜드 바자르)는 다른건 다 그렇다 치고 금 거래의 메카로 유명하다.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이 시장 남쪽에 위치한 랄렐리, 니샨자, 카드르가 동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거주지였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총대주교좌 성당도 근처에 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금은 세공에 능한 걸로 유명했기 때문에 보석, 장신구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베야즈트 문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많은 금은방을 볼 수 있는데 이게 그 시절의 흔적이다. 자세히 보면 금은방 주인들 중 의외로 자주 금반지를 끼거나 금 목걸이를 한 남성을 볼 수 있는데, 무슬림남성은 금 장신구 착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아르메니아계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또한 카팔르 차르시에서 거래되는 금, 은 시세가 튀르키예 전국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신문, 방송에서도 카팔르차르시의 금, 은 시세를 매일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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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집션 바자르(Mısır Çarşısı, 스파이스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에서 북쪽으로 갈라타 다리 가는 길에 있다. 튀르키예 재래시장 중 하나로, 오스만 제국 시기에 카팔르차르쉬의 공간이 부족해지자 확장된 시장이다. 왜 이집트 시장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1517년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진상되는 공물들을 이곳에서 늘어놓고 팔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터키어로 옥수수를 의미하는 '므스르'[47]에서 비롯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식료품과 향신료 위주의 장이 열린다. 그랜드 바자르와는 달리 가격대가 낮기 때문에 음식 만들기를 좋아한다면 눈이 마구 돌아가는 장소. 그래도 다른 시장보다는 약간 비싼 편이다. 그랜드 바자르와는 달리 영어가 별로 통하지 않으므로 흥정 시 유념할 것. 일요일 휴무. 주변에 슐레이마니에 자미(모스크)가 있다. 이곳에서도 관광 기념품들을 구할 수 있는데 가게가 몇개 없다. 하지만 카팔르차르시보단 더 싼 가격을 부른다. 이집션 바자르 바로 근처에 위치한 뤼스템파샤 자미 인근에는 게임 제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 있는데, 이쪽에서는 진주자개 장식을 한 전통 체스판 같은 것들을 시내 값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싸게 구할 수 있다. 카팔르차르시나 므스르차르시 상인들도 이곳에서 물건을 떼와서 판다. 다만 도매상 위주이며 perakende(소매)라고 쓰여 있지 않는 가게는 오직 도매상만 취급하기 때문에 소량 구입이 안 된다.
튀르키예 전통 악기에 관심이 있다면, 이집션 바자르 앞에 있는 에미뇌뉘에서 15분 정도 할리치를 따라 걸으면 나타나는 운카파느(Unkapanı)에 가면 된다. 이곳에 악기 도매상들이 널려 있다. 터키어가 안 된다면 갈라타 탑 주변에도 악기상들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된다. 다만 소매상인만큼 운카파느 가격보단 비싸다. 다르부카, 탬버린 같은 악기는 연주하는 방법도 간단하므로 기념품으로 사가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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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발렌스 황제 때 지어진 수도교. 오스만 시대까지 시내에 물을 공급했으나 현재는 차도가 그대로 관통하며 터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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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라타 다리(Galata Köprüsü)
에미뇌뉘역 근방에 있으며, 유럽 측 이스탄불의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할 일 없는 실직자와 니트와 소매치기가 모여 잔뜩 낚시질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니 멀쩡히 트램도 다니고 있는데 굳이 어두울 때 걷는 일은 자제토록 하자. 주로 이곳을 걸어다니는 목적은 고등어 케밥이라 불리는 발륵 에크멕을 먹어보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삐끼들이 너무 달라붙어서 짜증날 지경이다. 차라리 아시아 쪽인 카드쾨이 쪽이 발륵 에크멕 먹기에는 더 좋다. 값도 싸다. 사족인데, 가끔 갈라라고 잘못 알고 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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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라타 탑(Galata Kul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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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타 다리에서 탁심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있다. 동로마 시대에는 Ο μεγάλος πύργος(메갈로스 피르고스)라고 불렸다. '큰 탑'이란 뜻. 동로마 시절에는 감시탑 및 등대 역할이었고,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이곳에 소방 본부가 있었다. 탑에 올라간 감시병들이 시내를 감시하다가 연기나 불길같이 수상한 게 보이면 오함마와 삽, 물통 등으로 무장한 소방대가 출동했다.[48] 2021년 현재는 운영주체가 개인에서 이스탄불 시로 넘어간 상태라 입장료도 저렴해졌고 무엇보다도 뮈제카르트로 뚫을 수 있게 되었다. 대신 탑 내부의 카페와 주점이 사라졌다. 하지만 날씨 맑은날 일몰 때 간다면 정말 환상적인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겨울철엔 안개 낀 날 가도 굉장히 분위기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튀르키예인들은 갈라타 탑에 갈 때 동행자를 잘 골라서 데리고 가는데, 속설에 의하면 갈라타 탑에 처음으로 같이 간 동반자와 결혼하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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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심 광장(Taksim Meydanı)
이스탄불판 명동. 튀넬역(카라쾨이역 북쪽)에서 이스티클랄 거리를 통해 탁심역까지 트램이 다닌다. 이 주변에 술집이나 클럽이 산재해 있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하지만 뒷골목이 많아 치안이 좋지는 않으니 어두울 때 뒷골목으로 가는 것만큼은 자제하자. 참고로 대중교통을 타고 탁심역으로 가거나 빠져나가려면 무조건 초단거리 전철(Füniküler)을 타야 해서 제톤 1개(3리라)를 더 쓰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인근 역에서 걸어가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길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언덕 경사가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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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문화를 좋아했던 술탄 압뒬메지트가 친유럽 정책을 표방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세운 서양식 초호화 궁전으로 '정원으로 가득찬 궁전'이라는 뜻, 이걸 짓느라 돈을 다 탕진해버리는 바람에 당대 이름난 은행가 집안인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융자를 받은 적이 있다. 모티프는 프랑스베르사유 궁전이다. 여기에 들어간 대부분의 소품은 유럽에서 직수입해다 썼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탈 샹들리에도 여기에 있다.[49] 접근하기는 좀 어려운데, 일단 일일 입장객이 3천 명 선착순 한정이고, 단독 행동은 안 되고 일정 인원이 모여 가이드를 따라야만 입장이 가능하며, 가는 방법도 유럽 지역의 트램 종착역(신시가지)인 카바타쉬에서 해안가를 따라 계속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입장료가 만만찮은데, 기본 요금 160리라에 하렘 40리라 추가. 문화부 관할이 아니고, 튀르키예 국회 관할이라 뮤지엄 패스도 통하지 않는다. 국제학생증이 있다면 40리라로 대폭 깎인다.[50] 그리고 월요일 휴무. 공화국 시기에는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에 왔을 때 궁전의 일부를 관저로 사용했는데, 이곳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운명한 방도 보존되어 있다. 때문에 아타튀르크의 기일이 가까워지면 수많은 참배객(?)들로 분주해진다. 또한 궁전 내 모든 시계는 아타튀르크의 임종 시간인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으로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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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르타쾨이(Ortaköy)
이스탄불 시민들의 주말 휴양처로 유명하다. 바로 위에 보아지치 대교가 지나가며, 전망 좋은 카페에서 수다를 나누는 게 현지인식 노는 법. 주말마다 장도 서기 때문에 이런저런 빈티지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르타쾨이는 쿰피르(Kumpir)라는 구운 감자에 여러 가지 토핑을 얹어 먹는 요리와 과일을 얹은 와플이 유명한데, 거의 모든 카페에서 이것들을 취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버스타고 갈 수 있는 거리로, 돌마바흐체 궁전 본 김에 여기도 보고 가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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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드즈 궁전(Yıldız Sarayı)
베식타쉬의 바르바로스 거리에 맞닿아 있는 궁전으로, 돌마바흐체 궁전에 질렸는지 압뒬하미트 2세가 세워서 주로 거주한 궁전이다. 크기도 작고 돌마바흐체에 밀려서 그런지 한산하지만 내부 장식은 돌마바흐체보다도 더 화려하고 으리으리하다. 그 주변은 공원으로 이스탄불 시민들의 주말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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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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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베이국이 동로마의 콘스타티노폴리스를 공략할 때 4개월 만에 급조한 석조 성채. 당시 술탄인 메흐메트 2세는 최대한 빨리 지으라고 명령을 내리며 여러 장군들에게 각자 성채를 나눠 짓게하며 가장 먼저 짓는 쪽은 담당한 장군에게 후한 보상을 내리겠다고 한다.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대교 앞에 있으며, 돌마바흐체 사라이에서 22번 버스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별도로 철도가 다니지 않고, 유럽-아시아를 잇는 대교 바로 앞에 버젓이 있기 때문에 주말에 이곳을 들르려면 엄청난 교통 체증을 감수해야 한다. 중심지에서 비교적 멀어서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인데,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대교를 구경하기엔 가장 좋은 곳이다. 요금은 15리라로 튀르키예의 사적지 중에선 나름대로 저렴한 축에 속한다. 박물관 같은 개념보다는 공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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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덴 타워(크즈 쿨레시, Kız Kulesi))
처녀(Kız)의 탑이라는 뜻인데, 옛날에 이 지역을 다스린 태수가 자신의 공주가 뱀에 물려 죽는다는 예언을 듣고 보호하기 위해 가둬놨으나 하필이면 공주에게 위로로 보낸 과일 바구니 속에 뱀이 있어서 결국 결혼도 못 해보고 물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래는 동로마 제국 시대인 11세기경에 세관 및 감시 초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오늘날까지 당시의 건축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5세기경 이스탄불을 묘사한 그림 지도에서도 갈라타 탑과 함께 반드시 묘사되는 건물이다. 아시아 쪽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 항구에 가까우며, 왕복 페리 비용으로 20리라 정도, 낮에는 찻집, 저녁에는 식당으로 개조되어 있다. 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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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
동로마 시절에는 '시골'(Η Χώρα)이라 불렸던 곳에 위치했던 작은 성당으로 오스만 시기에 모스크로 개조되었지만, 이곳은 성화들을 가려놓았던 회칠을 완전히 제거해서 옛 동로마 성당의 면모를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크기는 아야소피아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후기 콤니노스 왕조와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의 동로마 이콘 화풍을 감상할 수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스탄불 중심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으며 에미뇌뉘에서 버스를 타고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에서 내리면 쉽게 갈 수 있다. 근처에 오스만 제국 술탄이 즉위할 때 의식을 행하던 에윕 술탄 사원도 있으니 함께 가보자. 입장료는 15리라. 2018년 12월에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이제 모든 부분이 개방되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의 이콘과 더불어 보존 상태가 나빴던 이콘, 모자이크도 그리스 학자들과 함께 열심히 복원해서 깔끔해졌다. 2020년에 아야 소피아와 더불어 모스크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이슬람 예배 시간 이외에는 이전처럼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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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크푸르 궁전 박물관(Tekfur Sarayı Müzesi)
본래 동로마 후기의 정궁이었던 블라헤르네 궁전의 일부였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술탄의 별장, 도자기 공방 등으로 사용되었다가 20세기 초엽 방치된 이후 최근까지 버려졌다가 2006년 외관 복원을 시작으로 이스탄불도 당국에서 복원 공사를 완료해 도립박물관으로 개장했다. 아직 새 박물관이라 그런지 어수선하고 전시물도 적지만 비잔틴 양식의 건물 안에 들어가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람 가치는 충분하다. 카리예 박물관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함께 둘러봐도 좋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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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윕 술탄 사원(Eyüp Sultan Camii)
역대 오스만 제국 파디샤들이 즉위 의식을 하던 곳으로, 이스탄불 성벽을 나가서 조금 더 가야 나오는 곳이다. 성자 에윕(아랍어로는 '아이윱')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친우(Ensari)로 이슬람 교도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을 때 그곳에서 전사한 인물인데, 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곳에 세운 사원이 바로 에윕 술탄 사원이다. 과거에는 메카로 향하던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메카로 떠나기 전에 우선 칼리파가 거주하는 이스탄불을 순례했는데, 당시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오늘날에도 튀르키예인들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로 여기고 있다. 근처에는 종교 물품을 파는 시장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에윕 술탄 사원에서 가까운 언덕에는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가 즐겨찾던 카페가 있다. 이곳에 서면 할리치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의 경관이 아름답게 펼쳐지기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로 꼽힌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에미뇌뉘나 탁심에서 가는 버스가 있다. 피에르로티 카페를 가기 위해서는 에윕 술탄 사원 뒤편의 무덤들이 드글드글한 언덕을 올라가거나, 해변으로 나와서 거기서 케이블카(Telefelik)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케이블카는 악빌로 탈 수 있지만 환승은 안 된다. 참고로 유명세 탓인지 판매하고 있는 음료 값은 아무리 이스탄불이 물가가 비싸다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수준이니 유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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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니아튀르크(Miniatü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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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miniaturk.com.tr/18.jpg}}} ||

이스탄불의 테마파크로 튀르키예 전국에 분포한 주요 유적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주요 관광지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1453번 버스가 에미뇌뉘와 (여름 한정) 술탄아흐메트를 지난다. 애초에 관광객용 노선이라 이 노선은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를 거의 다 지난다. 혹은 에윕 술탄 사원이 위치한 곳에서 버스나 돌무쉬를 타도 간다. 입장료는 외국인은 10리라, 튀르키예인은 5리라, (튀르키예 내에서 유학 중인) 학생은 3리라이다. 혹은 베식타쉬나 카바타쉬 항구에서 12, 14, 16시에 미니아튀르크를 종점으로 하는 배가 있으니 배를 타고 유유히 할리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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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나돌루 지역(Anadolu Yakası)
이스탄불의 아나돌루 지역[52]은 편입된 지 오래되지 않은 곳이라 이렇다 할 사적지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관광객이 적어서 사실 그대로의 튀르키예 일상을 구경하고자 한다면 가장 적절한 지역이다. 구시가지에서 이동한다면 에미뇌뉘에서 하이다르파샤나 쿠즈군주크까지 페리로 이동하는데 하이다르파샤는 남쪽으로 가는 단거리 이동이고, 쿠즈군주크가 보스포러스 다리(Boğaziçi Köprüsü)의 바로 앞이다. 여기서 한 정거장 더 가면 다리 밑을 통과해 베이레르베이[53]로 간다. 신시가지에서 이동하는 경우는 카바타쉬에서 카드쾨이로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톤 1개로 해결 가능한 대중교통용 페리(단거리)가 있고 별도 요금이 있는(10~30리라) 유람선 페리(장거리)가 있다. 또한 위스퀴다르(Üsküdar) 뒷골목은 100년 이상된 오래된 집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데 사진 찍기엔 매우 좋은 그림이 나온다. 찍덕들이라면 한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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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다(Moda)
유행이라는 뜻의 동네로 외국인들은 잘 모르는 현지인들의 유흥지이다. 카드쾨이 부두나 카드쾨이 지하철역을 나오면 나타나는 광장에서 길을 건너 언덕으로 오르면 왼편에는 학원가, 오른편에는 수산물 시장과 식당, 주점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림이 꽤 좋아서 해안가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도 좋고 건물들도 분위기 있게 잘 지어져 있다. 물가가 싼건 덤. 특히 근처에 골동품 시장이 들어서 있는데 여기서 기념품 사기에도 좋다. 다만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영어는 잘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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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나돌루 카와으(Anadolu Kavağı)
이스탄불 아나돌루지역 북쪽 끝에 위치한 작은 어촌으로, 굉장히 소박한 이스탄불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카바타쉬 항구에서 배를 타고 1시간 반쯤 가면 갈 수 있고, 혹은 카드쾨이에서도 가는 버스가 있다. 어떤 식으로 가든 상당히 멀다. 아나돌루 카바으에는 요로스 성(Yoros Kalesi)라는 동로마 시절 성채가 있으며, 그곳 위에 올라가면 마르마라해와 흑해가 만나는 경치를 볼 수 있다. 2016년에 그 위치에 제3대교(야우즈 셀림 대교)가 건설되는 바람에 예전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다만 다리를 꽤 멋지게 지어놔서 예전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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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 근교의 섬(Adalar)
이스탄불 앞바다에 떠있는 섬도 고즈넉한 관광지로 유명하다. 에미뇌뉘 부두에서 출발하는 배 기준으로 크날르섬(Kınalıada), 헤이벨리섬(Heybeliada), 뷔윅섬(Büyükada) 순서로 들르게 되며 크날르섬과 헤이벨리섬 사이에 야쓰섬(Yassıada)이 있다. 이곳에는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계 튀르키예인인 인과 무슬림 그리스계 튀르키예인인 기리틀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정교회 문화가 살아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근처 바다에서 잡힌 생선 요리도 유명하고, 바닷가 풍경과 곳곳이 있는 정교회성당과 수도원들을 보노라면 마치 그리스에 온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특히 뷔윅섬의 아야 요르기 수도원과, 헤이벨리섬의 할키 신학교와 아요스 니콜라오스 성당, 아요스 스피리돈 수도원 등이 가볼 만하다. 정교회나 가톨릭 신자라면 예배에도 참례할 수 있으니 유의하자. 물론 정교회 전례이므로 그리스어로 예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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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지닌 명소는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뷰세권 스타벅스라고 알려져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늘어선 고급 주택가(이스탄불의 최고 부촌)들과 산책로, 해협 위에 떠다니는 보트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 자리를 추천. 인기 많아 자리 선점이 치열하지만 간접 흡연을 각오하고 갈매기들을 주의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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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의 천국으로 유명한 튀르키예지만 그 중에서도 이스탄불은 유독 많은 편이다. 항구 도시이기 때문인지 옛날부터 고양이가 많았고, 지금도 많다. 이들 고양이들은 집에서 기르는 애완 고양이가 아니라 그냥 길에서 사는데,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길고양이들처럼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탄불 시민들이 모두 공동으로 돌봐주는 고양이들이라고 보면 된다. 시에서 대부분 고양이들에게 예방접종중성화를 해 주기 때문에 건강도 크게 지장이 없다. 때문에 이스탄불 고양이들은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기도 하며 사람을 보고 도망치는 일도 없다. 이스탄불을 구경하다 지치면 길거리 카페에 앉아서 고양이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을지도. 심지어 하기아 소피아 안에서도 돌아다니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볼 수 있을 정도다. 이는 오랜 역사와 같이 해왔기에 역사적 기록에서도 많이 언급된다. 19세기에 이스탄불을 여행한 한스 안데르센이나 마크 트웨인이 남긴 기록에서도 고양이가 가득하며 길고양이만 돌보는 공무원까지도 있다고 신기해하는 글이 있을 정도이다.
이런 오랜 역사와 함께하다보니 이스탄불 사람들은 이스탄불 고양이들을 매우 사랑한다. 이에 대부분 고양이들은 경계심이 없어 사람의 손길을 허락하지만 위생 상태는 좋지 않으므로 조심하도록 하고 주변에 캣맘들이 있다면 말을 건네거나 사료를 주는 모습을 계속 응시하는 것은 피하도록 한다. 관광객에게 적대적이진 않으나 낯선 사람이 있으면 고양이들의 배식에 차질이 있어 가던 길 가라고 야단을 맞을 수도 있다. 혹시라도 우리나라에서처럼 길고양이를 으르렁거리며 쫓아내다가는 이스탄불 사람에게 욕먹거나 얻어맞을 수도 있음을 알아두자. 여담으로 페트병 재활용품 자동판매기도 있는데 다 쓴 페트병을 넣으면 고양이 사료가 나와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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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 많다. 이들도 주인 없는 개들로 거리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선 입마개가 필수일 정도로 덩치가 큰 개들이지만, 이스탄불 시민들이 잘 돌봐주기 때문에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 안전하다. 얼마나 잘 돌봐주냐면, 지하철 자리를 양보 해준다거나 겨울철 밤중에 얼어 죽지 말라고 자영업자들이 가게 문을 열고 잠자리를 마련해줄 정도다. 시청에서 유기견들을 위한 사료 자판기를 관리한다는 건 매우 유명한 이야기. 코로나19 때도 이들의 동물 사랑은 변치 않았다.
참고로, 귀에 파란색 칩이 달려 있다면 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들개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많은 개들이 길바닥에 맘대로 누워 자고 있기 때문에 걸어다닐 때 조금 불편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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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의 볼거리로 강남역의 선글라스 여성처럼 붕대를 한 남성들이 있다. 튀르키예에서는 젊은 남성들의 탈모 비율이 높아서 모발이식이 성행하며, 의료 수준도 높은 편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최근 이스탄불을 여행한 사람들이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현지인이 많아 흥미로웠다는 경험담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지인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일단 튀르키예에서는 탈모인이 너무 많다 보니 대머리인 게 딱히 흠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수술 비용이 튀르키예인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무절개 4000올 이식 비용이 대략 9000리라 정도인데, 튀르키예 서민층 수입 기준으로 거의 4-5달치 월급이다) 거의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튀르키예의 인건비가 유럽 국가치고 매우 저렴하기도 하거니와, 의료 기술 수준도 높은 편이라 관광도 할 겸 의료 목적으로 오는 외국인들이 매우 많다. 한국에서도 모발이식도 할 겸 관광도 할 겸 튀르키예를 찾는 수요가 늘고 있다. 특히 붕대 두른 관광객들은 겨울철에 자주 볼 수 있다.


9.2. 쇼핑[편집]


2022년 기준 1리라가 70~80원으로 리라 가치가 떨어져서 관광지를 벗어나면 의외로 쇼핑을 괜찮게 할 수도 있다. 대도시답게 쇼핑몰이 많이 있는데 튀르키예 최대 Apple Store가 있는 조를루 센터(Zorlu center)와 현지에서 제일 유명한 이스티니예 파크(İstinyePark), 그리고 폭 넓게 많이 찾는 제와히르 몰(Cevahir) 등이 유럽 쪽 신시가지인 시슬리(Şişli), 레벤트(Levent)에 밀집되어 있다. 이쪽 지역은 사무실 등이 많아 고층 빌딩이 밀집해 있어서 그런지 구시가지 쪽만 보다가 시슬리 지역에 와 보면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단, 신시가지 쪽 몰들은 현지 상류층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 많아 한국과 생각보다 가격 차이가 별로 안 나니 유의할 것. 가격이 한국이랑 비교해 뒤죽박죽이라 반스 스니커가 한화로 8만 원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짧게 여행하는 와중에 잠깐 가볼 만한 곳으론 구시가지 근처의 올리비움 아울렛 센터(Olivium Outlet Center)가 있다. 파노라마1453 박물관이 있는 톱카프 트램 역(톱카프 궁전이랑 전혀 다른 곳이다)에서 돌무쉬로 5분 거리에 있는데 1,2층은 현지 브랜드가 대부분이라 볼 게 없지만 3층에 나이키, 아디다스, 폴로, 디젤 등 익히 아는 브랜드가 밀집해 있다. 관광객들에겐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아 꽤 한적하고, 아울렛이라 물건을 잘 찾아야 하지만 아무래도 한국보다 사람들이 대체로 체격이 조금 더 크다 보니 작은 사이즈 옷의 경우 계속 재고로 남아 있던 거여서 그런지 상당히 괜찮은 가격에 구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가격대가 상당한 디젤의 경우 남자 허리 29사이즈의 청바지를 한화로 5만 원 정도에 구하는 횡재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슬림 국가기 때문에 일주일 중 금요일에 몇 상점들은 현지시간으로 13시 정도에 문을 닫기도 한다. 무슬림 신자들은 하루에 다섯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모스크에서 기도문이 나와도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하지만[54] 금요일은 모스크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날은 문을 일찍 닫거나 아예 열지 않는다. 기독교의 주일과 비슷한 개념. 하지만 금요일에 모스크에 가서 기도하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그냥 집에서 기도를 드린다.

2022년 7월 기준 1리라가 75원으로 지속적으로 환율이 나락으로 가고 있다. 이에 현지 물가도 인플레이션 영향까지 있어 꽤 넓은 스펙트럼 범위의 물가를 보이고 있는 상황.

쉽게 몇 가지 대략적인 가격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싸다고 생각하고 많이 사다간 의외로 경비가 더 나올 수도 있다.

  • 5리라(375원): 생수 1병, 현지인 아침 빵 1개.
  • 8~15리라(600~1125원): 교통수단 1회 이용(트램, 지하철, 페리 등).
  • 15리라(1125원): 튀르키예 아이스크림 콘 1개짜리. 위에 한 덩어리 얹을수록 30리라, 45리라 등으로 늘어난다.
  • 20~30리라(1500~2250원): 콜라나 음료수, 길거리 수제 생과일 오렌지 음료.
  • 25리라(1875원): 이스탄불 교통카드 구매. 구매할 때 잔액은 자동으로 충전 금액이 된다.
  • 30~40리라(2250~3000원): 유명한 되네르 케밥.
  • 50리라(3750원): 공항버스(하바버스) 1회 이용.
  • 40~70리라(3000~5250원): 일반적인 관광지 식사, 디저트 단일 메뉴 가격.
  • 100리라(7500원): 보통 기념품 가격. 이보다 비싸게 160, 180리라를 불렀다면 바가지이다.
  • 150리라(11250원): 택시 20분 요금.
  • 300리라(22500원): 보통 관광지 입장료.
  • 1000리라(74250원): 누스레트 스테이크 하우스 본점 2인분 단일 메뉴.


9.3. 이스탄불에서 주의해야 할 일[편집]


  • 한국인이냐며 친근한 척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면서[55] 술 살 테니 클럽이나 술집, 식당에 같이 가자는 자가 있다면 무조건 못 들은 척 하거나 뿌리쳐 버리자. 다름 아닌 유흥업소로 유도하는 범죄자이다.[56] 흔한 수법으로는 자신도 여행객이라며[57] 함께하자거나 담뱃불 좀 빌려달라며 말을 걸어와 계속 쉴 새 없이 말을 꺼내며 은근슬쩍 밥이나 함께 먹자고 하는 식이다. 한번 걸리면 일단 접대부가 나오는 유흥업소로 안내한다. 이때 위치를 모르게 하기 위해 일부러 골목길을 돌거나 택시를 타는 등 피해자가 차후에 신고를 못하도록 막는다. 그리고 유흥업소 내에서는 술과 안주를 마구마구 시키고 어느샌가 접대부도 불러서 술판을 벌이는데, 이후에 주인이 험악한 어조로 결제를 요구한다. 잘못 걸리면 100만 원쯤은 우습게 날아갈 수 있다. ATM 기계에서 돈을 뽑게 하는데, 100만 원에서 15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요구한다! 만일 거부할 경우 술집 내로 끌고가 총이나 칼로 협박해서 도저히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드물게 36계 줄행랑을 치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있으나 피해자들은 상당히 많아 이미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특히 위의 수법은 너무 흔해서 한국 외교부에서 주의를 하라고 친히 공문을 띄웠을 만큼 유명한 사기 행각이다. 이스탄불 여행 전에 반드시 인터넷 등을 통해 이스탄불의 사기 종류들을 파악해 가자. 또한 모든 가게주변에는 삐끼들이 상당히 많다. 차이티나 애플티를 권하며 호객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 튀르키예에서 물가가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이스탄불인 만큼 튀르키예의 다른 도시로 갈 계획이 있다면 최대한 잡비를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 예를 들면 물이나 돈두르마 같은 것. 특히 물은 필히 관광지로 이동하기 전에 준비할 것. 관광지 내 물값은 비관광지의 최대 2배까지 먹는다. 2019년 4월 기준 1.5리터에 0.75리라이지만, 관광지에선 2리라 받아먹는다. 게다가 앙카라의 대형마트에선 0.4리라밖에 안 한다! 유럽 기준으로 봐도 이스탄불 물가는 식비 빼곤 비싼 편에 속한다.
  • 관광지에서 평일에도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남성들은 외국인 여성과의 성관계를 노리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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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중에는 튀르키예인들도 있지만 전부 튀르키예인인 것은 아니다. 그 시각에 대부분의 튀르키예 남자들은 직장에서 일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관광지에서 영어로 먼저 말 거는 남자들은 상인 아니면 시리아 난민일 가능성이 높다. 한 한국인 여성 여행자가 쓴 수기에 따르면 한 10대 고딩이 계속 따라오기에 꺼지라고 했더니 갑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서 얼마면 되겠냐고 제안을 했다고.
  • 사람 많은 데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말자. 지난 PKK가 저지른 테러도 그렇고, 2015년 들어 주변국 정세의 불안에 따라 테러 조직이 가장 열심히 노리는 곳 중 하나가 프랑스 파리와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이다. 물론 아야 소피아 같은 문화유적지나 박물관에는 경찰,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지만 시장 같은 곳은 위험할 수 있다. 1999년 당시 PKK 조직원이 쓰레기통에 설치한 폭탄이 폭발해 100명이 넘는 외국 관광객들이 죽거나 부상당한 사건도 므스르 차르쉬(이집트 시장) 입구에서 벌어진 일이다. 2016년에는 튀르키예 한인이 운영하는 레코드 숍에서 폭행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자세한 건 튀르키예 한인 레코드숍 피습사건 문서로.
  • 테러 위협 때문에 앞서 언급한 시장이나 대형 쇼핑몰, 문화유적지, 박물관 입구에서 항상 금속탐지기와 엑스레이탐지기를 동반한 검문검색이 이루어지고 있다. 군인이나 경찰, 경비 요원의 지시에 따라 가방은 엑스레이 탐지기 입구에 놓고, 금속탐지기 게이트를 통과할 땐 핸드폰과 지갑을 놓고 통과하면 된다. 귀찮긴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이니 협조하자. 애초에 여행을 다니면서 검문검색에 용이하게 짐을 꾸려 들고 다니는 것도 팁이다. 특히 동전은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말자.
  • 음식점에 들어가면 반드시 주문하지 않은 음식이 나올 경우 그게 음식 값에 포함되어 있는지 확실하게 묻자. 본래 튀르키예에서는 케밥을 주문하면 샐러드와 밑반찬 몇 가지가 무료로 나오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지역에서는 딱 봤을 때 관광객처럼 보인다 싶으면 원래 무료로 주는 밑반찬도 유료라고 영수증에 적어서 추가 비용을 뜯어내는 수법을 쓰는 곳이 간혹 가다 있다. 음식에 손대기 전에 반드시 확인할 것.
  • 구두닦이 사기꾼은 유튜브도 그렇고 워낙 유명해서 이젠 없을 것 같지만 아직도 있다. 길 가다가 구두닦이 가방을 든 사람이 슬며시 구두솔이나 다른 도구들을 길에 흘리고 가는걸 주워서 주거나 구두솔 떨어졌다고 말하면 사기꾼은 고맙다며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고 말한 뒤 정작 닦아주고 난 다음에 말도 안 되는 돈을 요구하는 수법을 쓴다. 그냥 쿨하게 지나가면 걸릴 일은 없는 사기 수법이다.


10. 문화[편집]





이슬람 국가의 대도시라지만 이스탄불만은 별로 그런 느낌이 없이 서방 세계의 도시들처럼 자유로운 분위기가 돈다. 여성들은 히잡(이슬람 여성들이 머리를 감싸는 스카프)을 쓰지 않고 서방 세계 여성들처럼 긴 금발에 티셔츠, 청바지 차림으로 다니기도 하며, 특급 호텔 2층의 유리창으로 배꼽이 드러나는 타이즈 헬스복 차림으로 러닝 머신에서 뛰는 여성들도 볼 수 있고, 나이트 클럽도 많고 술도 잘 마신다. 이스탄불 나이트 클럽에서는 바람잡이로 가슴이 수박만 한 금발 여성이 춤추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낮에 공개된 시가지 대로에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음주나 여성들에게 찝쩍거리는 짓을 하는 건 여전히 위험하다. 또한 모스크 근처에 위치한 식당이나 레스토랑에선 술을 취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맥주점(Birahane)이나 와인점(Meyhane)이나 나이트 클럽에 가야 한다.


10.1. 낚시[편집]


이곳에서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른바 도시 한복판에서의 낚시 할리치로 갈라진 유럽 이스탄불을 하나로 잇는 '갈라타 다리(Galata köprü)는 설계상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1층은 식당가로 쓰인다) 다리 중앙에는 배가 지나다닌다. 그리고 이곳 일대의 유일한 다리라 자동차도 다니고 전차도 다니고 사람들도 다닌다. 이 와중에 다리 2층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다라서 그런지 의외로 고기가 잘 잡힌다. 한 시간만 잡아도 10마리는 거뜬히 잡는다고. 주로 고등어나 '함시'[58]라고 불리는 일종의 정어리가 잡히며, 가끔 꽃게 같은 게 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튀르키예 사람들은 꽃게를 잡으면 재수없다고 던져버린다. 우스갯소리로 갈라타 다리의 낚시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튀르키예 경제가 나쁜 것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이곳에서 평일 오전부터 죽치고 앉아 낚시하는 사람들은 연금 타서 생활하는 노인들이나 일자리 없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와중에 케밥이나 샌드위치를 거리에서 파는 장사꾼들도 있어 다리 위는 늘 혼잡하다. 다리 아래층에는 발륵 에크멕(Balık ekmek, 바게트처럼 생긴 빵을 갈라서 그 사이에 고등어(uskumlu)를 끼운 샌드위치)을 판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데 교통 체증이 발생하는 것도 아마 이스탄불이 유일할지도.


10.2. 이스탄불의 맛[편집]


이 지역에서 통하는 속담으로 "바다에서 내 아버지가 나온대도 먹는다(Denizden babam çıksa yerim)."라는 패드립말이 있을 만큼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

해산물 요리는 이스탄불 요리의 특징인데, 본래 튀르키예의 주 민족인 오우즈 튀르크인들은 유목민족이어서 해산물을 잘 먹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서 널리 알려진 해산물 요리들은 전부 그리스 요리에서 유래했거나 그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이스탄불이나 이즈미르, 이스켄데룬, 안탈리아, 트라브존, 페티예, 차나칼레 등 해안가 지역들이 아니면 내륙 지역의 튀르키예인들은 과거 유목민족이었던 식문화의 영향으로 생선이나 조개 등 해산물 요리를 많이 먹지도 않는다.

이곳은 두 제국의 수도로 있으면서 화려한 요리법들이 발전했으며, 특히 옛 오스만 제국의 궁중 요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식당들도 있어서 인기 있다. 또한 튀르키예 전국에서 요리사들이 몰려와서 장사하고 있기 때문에 튀르키예 전국의 토속요리들을 맛볼 기회도 얼마든지 있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지역이다. 다른 유럽 나라나 한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싼 편이지만 트라브존이나 다른 지역에서 사 먹고 이스탄불에서 사 먹으면 확실히 물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술탄아흐메트, 갈라타 다리 등 관광지 식당들은 꽤 비싼 편이나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면 싼 가격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들이 있다. 특히 몰 같은 곳에서 현지인들을 상대하는 케밥 체인점들의 경우 가성비가 상당히 좋으니 기회가 되면 한번 가보는 것을 추천. 몰 안의 괜찮은 식당은 15~20리라에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 16/02/28 기준 24리라 정도가 약 만 원. 물론 더 내면 더 좋은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이스탄불 토속 요리는 다음과 같다.

  • 홍합 밥(Midye Dolması, 미드예 돌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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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홍합(midye)에 후추, 올스파이스, , 쿠민, 건포도, 양파 등으로 양념한 쌀밥을 채워 넣고 다시 한번 찐 요리로, 먹기 전에 레몬 즙을 듬뿍 넣어서 먹는다. 원래 이 지역에 살던 그리스인들이 먹던 요리이며 역사도 상당히 길다고 한다. 식당에서 먹기도 하지만 길거리에서 이것을 파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는데, 6개 정도 먹으면 가볍게 한 끼 때우기에도 좋다. 길거리에서 파는 건 비싸봐야 2개에 1리라(630원) 정도이니 가격도 부담 없다.

창자를 불에 구운 다음에 매콤하게 양념한 것으로 보통은 빵에다가 끼워서 판다. 케밥과 각종 양고기 요리들로 양 냄새에 적응했다면 그 다음에 도전해볼 만한 음식으로 매콤하고 양 창자 특유의 쫄깃쫄깃한 식감도 좋다. 다만 양 창자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튀르키예인들 중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다.

  • 베이코즈 케밥(Beykoz Kebab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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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베이코즈동의 토속 음식으로 양념한 양고기와 함께 각종 야채들을 꼬챙이를 이용해 고정시킨 다음에 삶거나 오븐에 구워내는 요리다.

고등어오레가노와 후추,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한 다음에 잘 굽고 각종 야채를 함께 넣고 싸먹는 샌드위치이다. 한국에선 고등어 케밥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케밥은 고기가 들어 있는 음식만을 가리키며 튀르키예인들도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원래 그리스 어부들이 배 위에서 간단하게 한 끼 때우려고 도시락으로 싸가던 게 기원이라고 하며[59] 전형적인 그리스 요리의 기법으로 요리한다. 고등어 살만을 구워서 팔기도 하는데, 이때도 그리스식으로 올리브유와 레몬 즙을 듬뿍 끼얹어준다.

  • 휜캬르 베엔디(Hünkâr Beğe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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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서 만족하셨다!"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요리로 원래 오스만 제국의 궁중 요리였다. 만드는데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데, 우선 가지를 불에 잘 구웠다가 우유 같은 것과 섞고 뭉게서 곤죽을 만들어놓고, 양고기와 각종 야채를 푹 끓여서 스튜처럼 만든 것을 밥 위에 미리 올려놓은 가지로 만든 곤죽 위에 부어서 내는데, 보다시피 어마어마하다. 가지 퓌레 준비하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하지만 일단 맛을 보면 왜 황제가 만족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맛을 선보인다.


11. 교통 지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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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교통 노선도. 배, 지하철, 전차 노선을 총망라하고 있으며, 지도에 표시된 노선들은 악빌(Akbil)이라는 교통카드로 상호 환승이 가능하다. 검은색으로 새로 개통된 마르마라이선(Marmaray hatı)도 볼 수 있다. 더 크게 보기

  • 붉은색 - 지하철 1호선(M1)
  • 녹색 - 지하철 2호선(M2)
  • 하늘색 - 지하철 3호선(M3)
  • 보라색 - 지하철 4호선(M4)
  • 남색 - 전차 1호선(T1)
  • 고동색 - 전차 3호선(T3)
  • 주황색 - 전차 4호선(T4)
  • 황토색 - 퓌니퀼레르(F1)
  • 옥색 - 케이블선(TF1, 2)
  • 검은색 - 마르마라이 선(Marmaray Hatı)
  • 금색 - 메트로부스(Metrobüs)[60]
  • 회색 - 튀넬(Tünel)
  • 풀색 - 추억의 전차(Nostaljik Tramvay), 전차 2호선(T2)

지하철은 이스탄불 지하철 문서로.

도시 자체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아시아와 유럽 두 구간으로 갈라져 있으며, 성 소피아 성당과 여러 유적들이 남은 구시가는 유럽 쪽에 있고 현대화된 신시가는 아시아 쪽에 지어지고 있다. 그래서 구시가 쪽에 사는 많은 튀르키예 샐러리맨들이 아침에 다리를 건너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가 일하고 저녁에는 유럽으로 돌아온다. 사실상 위스퀴다르 너머 아시아 지역에 산업 시설들이 밀집해 있고, 베이오을루 북쪽으로 상업 시설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두 지역은 오래 전부터 동일 생활권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교통은 상당히 불편하다. 바다를 사이로 도로가 네 개밖에 없기 때문에[61][62] 출퇴근시간마다 극심한 정체가 이어지며, 항구들을 잇는 터키어로 바푸르(Vapur)라고 불리는 배가 여전히 주된 교통수단 노릇을 하지만 느리다. 에미뇌뉘 항구에서 하렘, 위스퀴다르 등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할 경우 항해에만 15~20분 가까이가 걸리며, 거기서 버스로 연결되는 교통수단도 빈약한 편이다. 에미뇌뉘 항 바로 앞에는 서울역 환승 센터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버스 정거장이 있지만 평상시에도 혼잡하다. 가뜩이나 혼잡한 거리에 튀르키예 국가대표팀이나 갈라타사라이(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가 원정 경기를 나가 우승하기라도 한다면…

도시 이름을 딴 국제공항이 두 개나 있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이스탄불도 아르나붓쾨이구에 위치한 이스탄불 공항(İstanbul Havalimanı)과 동쪽의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Sabiha Gökçen Uluslararası Havaalanı)이 있는데, 두 공항 사이의 교통은 정말 정말 불편하다.[63] 사비하 괵첸 공항은 국내선 노선도 함께 취급하기 때문에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지역으로 가는 사람이라면 그때마다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보통 한국에서 출발하면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게 되는데[64], 이곳에서 도심(관광지가 많은 술탄아흐메트, 파티흐, 베이오을루 등등)에 가려면 하바쉬(Havaş)라고 부르는 공항버스(탁심으로 가는 경우 136TL, 신공항에서는 목적지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대략 136TL 내외)나 택시를 타야 한다. 허허벌판에 공항을 지어놔서 아래 내용은 전부 무용지물이니 다른 방법을 알아볼 것. 참고로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타고 내리던 시절엔 경전철(Hafif metro, 3TL)이 있었는데 아타튀르크 공항 지역에서 경전철을 타려면 제이틴부르누(Zeytinburnu)역에서 내려 전차로 갈아타야 하고, 위스퀴다르 등등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가려면 에미뇌뉘(Eminönü)에서 내려 또 배로 갈아타야 한다.[65] 물론 그때마다 요금 2리라가 추가된다. 악빌(Akbil)이라는 교통카드 시스템이 있기는 한데, 우리나라와 달리 고작 환승 시 일부 할인이라는 메리트밖에 없다.[66] 이스탄불에 1주일 이상 머물지 않는 이상 쓸 일은 없을 듯싶다. 악빌을 살 때 보증금 명목으로 6리라를 추가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주지만, 원래 내국인용이라 악빌 창구 직원은 99.9% 영어를 못 한다. 그러나 이스탄불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3~4일 이상을 머무를 땐(패키지의 코스의 기본이 3일부터 시작) 만드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무엇보다 편하다. 이스탄불 교통 시스템 특성상 여러 종류의 탈것들을 번갈아 타야 되는데 그때마다 티켓을 끊으려면 여간 귀찮고 힘든 것이 아니다.

과거 철도 여행에 상당한 애로사항이 꽃폈는데, 유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가 앙카라, 트라브존, 메르신 등지로 철도여행을 하려 할 경우 먼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간 다음 하이다르파샤 역(Haydarpaşa İstasyonu)에서 기차를 타야 했다. 앙카라행 고속열차인 YHT는 거기서 더 동쪽인 펜딕(Pendik)역에 가서 타야 했다. 유럽 지역에 있는 시르케지 역에서는 아시아로 가는 기차를 취급하지 않는다. 튀르키예인들이 애용하는 고속버스(Otobüs)를 이용할 경우 서쪽의 에센레르 오토가르(Esenler otogar)에서도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는 있으나, 중간에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하렘 터미널에서 타는 게 훨씬 낫다.[67] 유럽의 시르케지 역에서는 그리스 테살로니키까지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데, 17시간 걸리는 데다가 무지막지하게 비싸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에 국경 통과세가 거의 기차표 값과 맞먹기 때문이다(2010년부터 그리스 발 거의 모든 국제 기차 노선이 잠정 중단되었다). 2019년 마르마라이선 철도가 완전개통되어 유럽 지역에서도 앙카라행 YHT 고속열차와 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3개의 대교와 1개의 해저 터널 모두 자동차 전용 도로라 유럽과 아시아를 자전거로 건너갈 수 없다. 입구마다 자전거 및 오토바이 통행 금지 표지판이 있다. 자전거 운전자의 경우, 유럽에서 아시아로, 혹은 그 반대로 넘어가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점프해야 한다.

튀르키예 페네르바흐체에서 뛰며 2008년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진출에 활약한 호베르투 카를로스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먹을 것도 좋고 축구 인프라도 좋고 튀르키예 생활은 만족하는데 딱 하나 이스탄불의 교통 체증은 악몽이라고 치를 떨었다.

이스탄불 당국에서도 교통 체증의 심각성을 알고, 교통 환경을 개선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당장 구시가지만 해도 수백 년 묵은 도로와 주택들을 뜯어낼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가[68] 지하철 공사를 하려 해도 파는 족족 유적, 유물들이 발굴되기 때문에 시 당국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스탄불 구역을 가르는 할리치 만과 보스포로스해는 폭은 뭐해도 엄연히 바다인지라 해저터널을 뚫는 것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뚫는다 해도 나름 고지대에 위치한 Şişhane역의 심도가 어마어마하게 내려가므로 공사비 상승은 덤이다. 최근에 지하철 공사 도중 잔쿠르타란(Cankurtaran) 일대에서 동로마 시대의 군항 유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적 유물만을 탓할 것도 없는 것이, 구시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최근 개발된 신시가지나 유물이 없는 곳에서도 교통 체증은 똑같이 나타난다. 이것은 유적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탄불시 당국과 정부가 기본적으로 도시계획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신도시를 개발할 때 구획 정리를 하고 도로망을 정비한 후 건물을 짓지만, 이스탄불은 지주들이 건물을 먼저 짓고 그 사이 남는 땅에, 그것도 땅값이 비싸기 때문에 한국처럼 6차선, 8차선 도로는 꿈도 못 꾸고 기껏해야 2, 4차선 도로가 나는 식이기 때문에 교통 소통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개발되는 것이다. 용인 수지구를 생각하면 된다.

의외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하철이자 세계에서 가장 짧은 지하철이 이스탄불에 있다. 1875년에 건설된 튀넬(Tünel)과 카라쾨이(Karaköy)를 잇는 지하철로 길이가 573m밖에 안된다. 프랑스의 건설 회사가 파리 메트로를 놓기 전에 시험 삼아 만들어봤다는 설과, 베이오을루 지역에 있는 고급 호텔과 항구를 연결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데 튀넬과 카라쾨이 사이의 길이 상당히 가파른 언덕길이라 오늘날까지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여러 가지로 철덕들이 좋아할 만한 도시.

2013년 10월 29일에 보스포로스 해협 관통 해저 철도 터널[69]이 개통하면서 드디어 양쪽을 잇는 철도인 마르마라이선도 완전 개통되었다. 기존에 교량 고작 2개만이 전담하고 있었던 도로 교통을 어느 정도 분산시킬 수 있을 듯. 2016년에는 자동차 전용 해저 터널인 아브라시아(유라시아) 해저 터널이 개통했다. 그리고 시내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보스포러스 해협 북쪽 입구 측에 한국의 현대건설과 SK건설에 의해 야부즈 술탄 셀림 대교(Yavuz Sultan Selim Köprüsü)가 2016년 새로 개통되었다.


11.1. 효율적으로 돌아다니는 법[편집]


1. 아나돌루 지역에서 이스탄불로 들어올 경우, 굳이 에센레르 오토가르까지 갈 필요가 없다. 여행자들이 흔히 이용하는 Metro Turizm이나 Pamukkale Turizm, Ulusoy & Varan Turizm, Kâmil Koç 같은 버스 회사들은 에센레르 오토가르에 들어가기 전에 알리베이쾨이(Alibeyköy) 터미널과 옥메이다느(Okmeydanı)를 거친 다음 에센레르로 들어가는데, 알리베이쾨이나 옥메이다느에서 내리면 바로 버스 타고 2~30분 거리에 구시가지(파티흐구)가 나온다. 알리베이쾨이에서 탁심은 20분 내로도 끊을 수 있을 만큼 가깝다. 만약 아나돌루 지역에서 이스탄불 구시가지나 베이오을루구, 베식타쉬구 일대를 가고자 한다면 굳이 에센레르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재수없으면 알리베이쾨이에서 에센레르까지 교통 정체로 1시간 넘게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쪽이 더 이득.

2. 아침 7~9시, 오후 4~7시에는 절대, 절대, 절대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말 것! 특히 이스탄불에서 가장 교통 정체가 심한 시간대는 아침 8시와 오후 5~6시 무렵으로 러시 아워와 정확히 겹친다. 지하철도 이 시간대는 콩나물시루라 차가 들어왔는데도 타지 못하는 상황도 왕왕 벌어지는 데다가, 전차(T1)를 이용하면 전차 선로와 차선을 공유하는 부분에선 전차도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간에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3. 이스탄불의 대중교통은 대략 밤 12시쯤 되면 완전히 끊긴다고 보면 된다. 만약 밤드리 노니다가 12시가 지나 집이나 숙소로 돌아갈 수가 없다면 돌무쉬를 타면 된다. 탁심의 돌무쉬는 새벽 2시까지도 쌩쌩하며, 행선지랑 돌아오는 길, 그리고 약간의 터키어 소통 능력만 있으면 집이나 숙소 바로 앞에까지 돌무쉬가 세워주기도 한다. 다만 돌무쉬 요금은 버스보단 약간 더 비싸다.

4. 아나돌루 지구와 유럽 지구를 잇는 배는 대개 오후 8시부터 10시면 끝난다. 가끔씩 (특히 겨울에) 바다 상황이 더럽게 안 좋아서 배가 끊길때도 있는데, 마르마라이 노선으로 23시까지 위스퀴다르에서 유럽지구의 시르케지로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고, 만약 현 위치에서 위스퀴다르나 시르케지가 너무 멀리 있다면 메트로부스를 이용하면 된다. 혹은 베이코즈나 베벡, 베식타쉬 일대에서 보스포로스를 건너서 운행하는 버스, 돌무쉬도 있으니 이쪽을 알아보기 바란다. 다만 서너번 환승할 각오는 해야 한다. 만약 아타셰히르에서 23시에 탁심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정할 경우, 아타셰히르에서 우선 지하철을 타고 1) 카드쾨이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위스퀴다르까지 걸어가든가 버스를 탄 다음, 마르마라이를 타고 시르케지로 간 다음에 돌무쉬를 타고 탁심으로 가든가. 2) 위날란까지 간 다음에 메트로부스로 환승한 다음에 메지디예쾨이에서 지하철이나 돌무쉬를 타고 탁심으로 간다. 3) 택시를 타도 되는데, 아타셰히르에서 탁심까지 택시비는 야간 할증과 다리 이용료가 적용되어 못 줘도 70리라는 줘야 한다. 4) 하렘 터미널까지 간 다음에 거기를 경유하고 에센레르로 가는 버스를 수소문한 다음에 이런저런 사정 좀 해서 알리베이쾨이까지 버스를 얻어 타고, 거기서 탁심까지 가는 방법도 있긴 하다. 카드쾨이 페리보트 터미널 역 근처의 돌무쉬 종점에서 베식타시, 탁심행 돌무쉬 타면 된다. 야간에는 탁심까지 20~25분 내외로 쏴주는 속도를 자랑한다. 요금은 8.75TL로 다소 비싼 감이 있지만 M4 메트로, 마르마라이, M2 메트로를 합한 비용을 생각하면 비등비등하다. 20분 간격이라고 나와 있지만 그냥 다 차면 출발한다. 새벽 내내 운행하는 건 덤이다.

5. 택시는 가급적이면 타지 말자. 가격도 엄청 비싼데다가, 외국인이고 터키어 모르고 이스탄불 지리에 낯설다는 티 풀풀 내고 다니면 바가지 엄청 씌운다. 요즘은 미터기 조작질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일부러 골목골목 돌면서 추가 비용을 뜯어내는 수법은 흔하다.[70] 특히 관광지에서 "탁시?" 하면서 호객하는 택시 기사들은 더더욱 질이 나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타선 안 된다. 이스탄불의 택시 요금제는 기본 요금제가 아니라, 우선 자릿세로 2리라 깔고 50미터 단위로 요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시스템이다.[71] 굳이 택시를 타야 한다면 숙소에 문의해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하고 대략적인 요금을 알아내거나 우버를 타자. 단 튀르키예에서도 우버는 불법이라 단속 대상이고, 우버 기사들이 영어를 거의 못하기 때문에 구글 번역기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우버를 이용할 경우 기사들이 목적지가 좀 혼잡하거나 버스, 택시 정거장 근처에 있을 경우 일부러 한산한 곳에 내려주려 할 것이다. 택시 기사들한테 걸리면 맞아죽는다나.


12. 스포츠[편집]


3대 명문 스포츠 클럽인 갈라타사라이, 페네르바흐체, 베식타스 JK의 연고지다. 이 세 팀의 인기는 터키 전역을 통틀어서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이 팀들이 서로 맞붙는 이스탄불 더비가 열리는 날에는 도시 전체가 들썩인다. 축구를 좋아하는 관광객 입장에서 이들의 경기장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좋은 도시 관광 코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또한 이스탄불의 기적이 있었던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도 있다.

2000 시드니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 유치에 도전하였으나, 유치 신청서를 낸 2004, 2008, 2012, 2020 모두 유치 실패하여 올림픽 유치전의 콩라인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가능성이 제일 높았던 2020 하계 올림픽을 일본 도쿄에게 내주고 만다.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가 올림픽을 개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무슬림이 많은 도시인 사라예보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적이 있으나, 사라예보보스니아계 무슬림 말고도 정교회 신자인 세르비아계과 가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아계 사람들도 상당수라 애매하다. 이 동계올림픽도 종교와 상극인 사회주의의 구유고 연방 시절에 유치한 것이다.


13. 창작물에서[편집]



13.1. 영화[편집]



13.1.1. 007 시리즈[편집]


세 번에 걸쳐 이야기의 무대가 된 적이 있다. #1 #2 #3


13.1.2. 블랙사이트[편집]


테러를 당한 도시로 나온다.


13.2. 게임[편집]



13.2.1. 대항해시대 온라인[편집]


오스만 투르크의 본거지로 등장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대항해의길도 마찬가지이다.


13.2.2. 크루세이더 킹즈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편집]


패러독스사의 크루세이더 킹즈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에서는 DLC와 공식 위키에서의 비잔티움으로 살아남기 공략등 은근히 비잔티움과 함께 제작사의 푸시를 받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도시를 노리는 비로마 플레이어의 맨탈을 고려해서 삼중 성벽은 형식적으로만 구현되어 있다. 물론 일반 성벽보다 튼튼하긴 하다만 전용 성벽에서 주는 요새화 수치가 글쎄올시다에 주둔병에는 버프를 안 준다. 그래서 잘 뚫린다. 더군다나 크킹에는 해전이 없다!, 결국 나중에 성벽 레벨이 일정 레벨 이상이면 돌진을 못 하게 바뀌었는데, 콘스탄티노플에만 존재하는&지을수 있는 3중 성벽이 딱 그렙이다. 그래서 병력을 잔뜩 끌고 와서 돌진으로 날로 먹어버리는 상황은 없어졌다. 유로파 유니버살리스에는 별다른 특수 조치가 되어 있지 않아 그냥 날먹할 수 있는 도시. 거기다가 비잔티움이 오스만 상대로 해상 봉쇄조차도 못 하게 패치해버렸다. 단, 이름은 무슬림 국가가 점령하지 않는 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고정되며, 러시아만 예외적으로 짜르그라드로 이름이 변경된다. 그리고 절대로 이스탄불로는 안 바뀐다.[72]


13.2.3. 하츠 오브 아이언 4[편집]


패러독스사의 2차 세계대전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터키 영토로 등장한다. 초반에는 군대 배치 및 군함 이동 등이 불가하나 터키가 '몽트뢰 협정' 국가 중점을 완료하면 제한이 풀린다. 비역사적 진행시 소련이 이걸 빌미로 터키를 공격하기도 한다. 뚫기 더럽게 빡세기에 터키가 망하기 직전에 최후의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리스가 비잔틴 재건 루트를 타서 이스탄불 정복 후 재건에 성공하면 이름이 '콘스탄티노플'로, 터키가 오스만 황실 복고를 성공시키면 '코스탄티니예'로 변경된다. 소련이 2차 적백 내전 루르 이후 제3의 로마를 선포하면 이스탄불에 영유권 주장이 생긴다.


13.2.4.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편집]




13.2.5. 징기스칸 4[편집]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등장한다.


13.2.6. 도미네이션즈[편집]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플(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관련 문서[편집]


그러나 사실 이것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자행된 오스만 시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이란 명칭이 통용되던 시기라 '조선총독부는 경성에 위치해 있었다'라는 표현에서 서울을 경성으로 표기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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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의 육지가 파티흐(Fatih)구, 즉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의 옛 콘스탄티노폴리스이다. 왼쪽 위에 강처럼 보이는 게 금각만(Haliç), 가운데 육지는 갈라타 및 탁심. 오른쪽 강처럼 보이는 게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의 육지는 아시아(위스퀴다르)이다.[2] 제1대교는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당시 쿠데타군이 점령했다가 마지막에 항복한 곳으로 그 후 정부에 의해 '7월 15일 순교자 대교(15 temmuz şehitler köprüsü)'로 이름을 바꿨다. 오르타쾨이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 후기 바로크 양식의 모스크로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답다.[3] 공식 명칭이 '새로운 로마'(Nova Roma)라는 낭설이 있으나, 이건 도시에 대한 수식어이지 정치적 공식 명칭은 아니다. 공식 명칭상 이 도시가 '새로운 로마'라 불린 증거는 없다. 2005년 안톤 히어제만 출판사(Anton Hiersemann Verlag)가 출판한 Reallexikon für Antike und Christentum( 고대와 그리스도교에 관한 백과사전)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식적으로 Nova Roma라 불리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Reallexikon für Antike und Christentum, vol. 164
[
Stuttgart 2005
]
, column 442)

1968년 Michael Grant가 쓴 The Climax of Rome에서는 330년대부터 이미 주화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겨졌음을 말하고 있다.(Michael Grant, The climax of Rome
[
London 1968
]
, p. 133)

이후에 주로 교계에서 '새로운 로마'란 말을 쓰긴 했으나, 이는 '영원의 도시'(로마), '위대한 도시'(알렉산드리아), '거룩한 도시'(예루살렘) 같은 수식어이다.
[4] 오늘날에도 튀르키예의 수도가 이스탄불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 정도이다.[5] '임금의 도시'라는 뜻이다.[러] [우] [벨] [6] 고대 노르드어로 '거대한 도시'라는 뜻. 동로마 제국에 정착한 바랑인 친위대가 주로 이렇게 불렀다.[7]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는 그리스어 표기를 받아들인 라틴어 발음이다. 어원이 되는 코이네 그리스어로는 '콘스탄티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 Kōnstantīnoúpolis)'이다.[8] 터키어 명칭이다.[9] 터키어에서는 I와 i가 다른 글자이다. /i/ 음소를 나타내는 İ, i 그리고 /ɯ/ 음소를 나타내는 I, ı로 짝짓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를 비롯한 기타 언어권의 표기인 Istanbul과 대문자 표기상에서 차이가 있다.[10] 이스탄불 뷔위크 셰히르 벨레디예시: 이스탄불 광역시[11] "Σώπασε, Κυρά Δέσποινα και μην πολυδακρύζεις, πάλι με χρόνια με καιρούς, πάλι δικά Σου θά ναι." 해석하면 "성모시여, 진정하시고 울지 마소서. 세월이 흘러 시간이 지나면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겠습니다.'[12] 미국 국적도 보유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대형 유통 기업 CEO로 노팅엄 포레스트의 구단주이기도 하다.[13] 특히 셀림 3세 시기의 화폐들에는 일괄적으로 이슬람불 주조 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시대에 한정되어 쓰였다.[14] 2017년에 방영된 튀르키예 사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압뒬하미트 2세 시기를 다루었다.[15] [ɢostæntænije\][16] 오늘날 이스탄불의 카드쾨이구[17] 이때 비슷한 혐의로 지역 유지들이 처형되고, 주민이 약탈, 강간, 폭력 등 피해를 입고 엄청난 세금을 강탈하듯 빼앗기며 고생한 동네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터를 잡고 근거지로 삼은 루그두눔(프랑스 리옹)이다.[18] 특히 세베루스의 장남인 카라칼라가 비잔티온의 재건을 적극 주장했다.[19] 지금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20] 세르디카 외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키워놓은 동방 정제의 수도 니코메디아, 사두정치 시절 동방 부제의 수도 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의 스렘스카 미트로비차(Sremska Mitrovica)), 훗날 제국 제2의 도시가 되는 테살로니카 또한 고려 대상이었다.[21]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 명칭은 제국에 도시는 오직 콘스탄티노폴리스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다른 지방을 시골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특정 도시를 The City라고 칭하는 건 구약성경에서도 현대 영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가령 영국 영어에서 The City라고 하면 런던 일부 지역을 일컫는다. 유일한 도시가 아니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The) 도시(City)"라는 의미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명칭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본 의미에 가깝다.[22] 이와 비견할 만한 도시는 후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 아바스 왕조바그다드, 장안, 북송카이펑 등이 있었다.[23] J. Phillips, The Fourth Crusade and the Sack of Constantinople, 144.[24] 정확하겐 아랍어로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라는 뜻의 알 쿠스탄티니야(Al Qusṭanṭīniyya/قسطنطينية)를 음차했다.[25] 로마 황제라는 뜻의 터키어.[26]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의 주인공 가족들도 엄마와 외할아버지는 튀르키예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스탄불에서 계속 살아도 되지만, 주인공의 아버지인 사바스 야코비디스가 무국적자라 합법적으로 추방되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튀르키예 정보기관 요원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추방하지 않겠다고 꼬시지만, 아버지는 5초 동안 망설이다 결국 거부하고 그리스행을 택한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고, "세상에서 가장 긴 5초였다."라고 말한다.[27] 일본의 조선적과 비슷한 경우다.[28] 대표적으로 CHP 지지율이 매우 높은 지역은 도심 북쪽의 베식타시구와 해협 건너편의 카드쾨이구.[29] 5,343km²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이스탄불도의 면적이다. 도 전체에서 유난히 크고 아름다운 차탈자, 실리브리, 실레구를 제외하면 대강 이스탄불시 면적이 나온다.[30] 겨울철 평균 기온이 의외로 훨씬 북쪽인 런던이나 아일랜드 등지와 비슷하다. 연간 강수량도 800mm 정도로 오히려 런던보다 많다. 흔히 생각하는 덥고 건조한 날씨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최난월 8월이 23.1도, 최한월 1월은 5.7도이며, 연 평균 기온은 14.5℃. 연평균 기온은 대구, 포항, 울산, 부산 등 영남 지역 주요 도시와 비슷하고 최한월 평균 기온은 항저우, 상하이, 제주시, 도쿄, 애틀랜타와 비슷하고 최난월 평균기온은 함흥시, 인제군, 철원군, 강계시와 비슷하다. 연평균 기온의 경우 북위 41도라는 걸 생각하면 따뜻한 편이다.[31] 즉, 위 문단에서 봤던 중세 조감도와 동영상은 아래 지도의 K 구역.[32] http://www.hgk.msb.gov.tr/urunler/diger/il_ilce_alanlari.pdf[33] https://biruni.tuik.gov.tr/medas/?kn=95&locale=en[34] 지도 보면 알겠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역과 거의 비슷하며, 현재도 시청이 소재해 있는 명실상부한 도심이다.[35] 2017년 부분수정[36]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7]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8]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9]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0] 한국 돈으로 약 2만 8천 원 정도. 4개 이상 박물관을 순회해야 본전을 뽑으므로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41] 붙어 있는 위치(톱카프 궁전 바로 아래다)에 비해 의외로 관광객이 잘 가지 않는 곳인데, 튀르키예의 3대 박물관 중 하나다. 볼거리도 정말 많으니 패스를 샀다면 꼭 가보자.[42] 블루 모스크 근처에 있다.[43] 뮤지엄 패스와는 다르게 이스탄불 아닌 곳도 뚫린다.[44]튀르키예 1만 리라 뒷면의 그 인물이다.[45] 2015년 3월 기준. 전년보다 5리라 올랐다.[46] 이곳은 이름값과 항상 출입하는 관광객들 때문에 이스탄불 상가 건물 중에서도 가장 임대료가 비싸다. 물건 값이 비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비싼 튀르키예의 기름 값 덕분에 물류 운송비도 장난 아니게 비싸다. 기념품을 사고 싶다면, 그 생산지에서 사는 것이 가장 저렴하다.[47] 사실 이것도 이집트에서 튀르키예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붙어진 것으로 결국은 이집트와 연관되어 있다 할 수 있겠다.[48] 목조 건축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스탄불에는 대화재가 잦았다. 소방대는 최대한 화재를 초기진압하는데 힘썼지만 진화가 어려운 경우 가지고 온 연장으로 주변 집들을 때려부수고 잔해를 치워서 화재가 번지는 걸 막았다.[49]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해준 것으로 알려저 있는데… 사실은 할부로 구입한 물건으로 3번에 걸처셔 분할 납부할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납부 후 오스만 제국이 망해서 땡처리되었다는 후문이 존재한다.[50] 그런데 그냥 일반 학생증으로도 깎은 사람이 있다 카더라. 사실 그냥 학생이라고 터키어로 말하기만 해도 할인되는 경우도 있다.[51] 사실 압뒬하미트 2세는 삼촌인 압뒬아지즈가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암살당했고, 그의 형인 무라트 5세도 정신이상을 이유로 3달 만에 퇴위되고 즉위했는데 돌마바흐체 궁전은 너무 커서 경호가 어렵다는 점, 삼촌과 형에게 벌어진 사건들 때문에 돌마바흐체 궁전을 싫어했다. 그래서 일부러 이을드즈 궁전으로 이궁했던 것이다.[52] 과거에는 아시아 지역이라고도 하고, 영어권 여행객들은 그렇게 하는데, 튀르키예 정부와 이스탄불시에서 밀고 있는 단어는 Anadolu yakası, 즉 아나톨리아 지역이다.[53] 이곳에 여름별궁인 베일레르베이 궁전(Beylerbeyi Sarayı)이 있다. 현재는 국빈을 위한 호텔로 개조되었고, 관광하고자 한다면 별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 대략 돌마바흐체 궁전의 축소판 정도고, 학생할인 가능. 마찬가지로 돌마바흐체 궁전 옆에 위치한 츠라안 궁전(Çırağan Sarayı)도 호텔로 개조되어 있다.[54] 이스탄불이 관광 도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사하다가 모스크에 갈 수 없는 일이다.[55] 특히 탁심지구 쪽에 많다.[56] 이스탄불 클럽은 수질 관리를 위해 연예인이 아닌 이상 남자들끼리는 들어갈 수 없다.[57] 스페인이탈리아 같은, 튀르키예인과 생김새가 유사한 라틴계 국가를 주로 사칭한다. 그리스인을 사칭하는 경우도 발견되고 있다.[58] 정어리과의 작은 물고기인데 튀르키예 사람들은 주로 이걸 향신료와 함께 볶아서 먹거나 튀겨 먹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보면 멸치볶음이 떠오른다고 한다… 실제로 멸치 사촌이라 할 만큼 가깝지만, 함시는 멸치보다 좀 더 크다.[59] 한국으로 치면 충무김밥 먹은 격이다.[60] BRT. 특이한 점은 섬식 승강장인데 버스는 양문형이 아니라서, 출입문 위치를 맞추기 위해 좌측통행한다. 물론 도로가 분리되어 있어서 상관없지만.[61] 참고로 바다 서쪽의 인구는 950만여 명이고 동쪽의 인구는 500만여 명인데 그 사이를 잇는 도로는 대교 3개, 해저 터널 1개뿐이다. 거기에 넷 다 자동차전용도로라서 걸어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혹은 그 반대로 못 다닌다. 그나마 2019년 무정차 전자식 요금소가 설치돼 지정체가 상당히 완화되었고, 2020년에는 외곽 지역의 제3교가 개통하면서 양측을 통과하는 교통량을 우회하게 되면서 지정체가 많이 줄어들긴 했다. 2021년에는 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해저 터널이 개통되어 도심 지역을 관통하는 1, 2교의 교통량 상당량이 분산되었다. 정체가 여전히 심한 편이지만, 딱 2개의 다리만 있을 때보다는 훨씬 쾌적해졌다는 의견이 많다.[62] 참고로 해협을 건너는 교각과 터널을 통과할 땐 통행료가 부과되나, 외국에 등록된 차량(예를 들어 한국에서 한국 번호판 및 등록 국적을 유지한 채 일시 수출입 방식으로 자차 여행하는 경우)은 통행료 징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징수하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정확히는 관련 규정이 아예 없어 징수 당국에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63] 교통 체증이라도 만나면 3시간 그 이상은 걸릴 각오를 해야 한다. 기존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 여객 취급을 중단하고 저 멀리 허허벌판에 지은 이스탄불 공항으로 여객 업무가 승계되었기 때문에 더욱 불편해졌다. 최단 거리로 가도 84킬로미터 가량 이동해야 한다. 거리로 따지면 양주시에서 오산시를 그냥 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64] 인천국제공항과 이곳을 연결하는 직항 노선을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이 각각 주 4회, 터키항공은 주 11회 운항하고 있다.[65] 항구가 꽤 복잡해서 잘못하면 엉뚱한 배를 탈 수도 있으니 주의[66] 과거에는 카드 내 충전되어 있는 금액이 많을수록 할인률이 커지는 특이한 시스템이었는데 2006년에 폐지되었고, 2014년 현재 2시간 이내에(!) 기본 요금은 1.95TL, 1회 환승 시에는 1.25TL, 2회 환승 시에는 1TL, 3회 이상 환승 시 0.75TL이 빠져나간다. 예를 들어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에서 바으다트 거리(아나돌루지구 최고의 번화가)로 가야 한다고 가정하면, 우선 에디르네카프에서 톱카프까지 전차를 이용하거나, 에디르네카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미뇌뉘까지 가야 한다. 만약에 전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톱카프에서 에미뇌뉘로 가는 전차로 환승하고, 에미뇌뉘에서 배를 타고 카드쾨이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또 버스를 타고 바으다트 거리(Bağdat Caddesi)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전차를 이용할 경우 전차(1.95TL)-1호선(1.25TL)-배(1TL)-버스(0.75TL) 3회 환승을 했고, 버스로만 갈 경우 버스(1.95TL)-배(1.25TL)-버스(1TL) 2회 환승을 했으므로 각각 4.95TL, 4.20TL이 적용된다. 만약에 저걸 전부 제 톤으로 탔다면 12TL, 9TL이 나온다. 만약에 재수가 없어서, 교통 정체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에디르네카프에서 에미뇌뉘까지 막혀서 두시간 이상이 걸려버린다면, 중간에 환승 요금이 무효가 되어 다시 처음부터 계산된다![67] 살인적인 정체때문에 아타튀르크 대교의 경우 거의 2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다리 위에 묶여 있는 경우도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68] 가령 귈하네(Gülhane)역과 술탄아흐메트(Sultanahmet)역 사이의 전차 선로는 2차선도로 위에 있기 때문에 자동차와 선로를 공유한다! 그 말인즉, 자동차 정체가 시작되면 전차도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는 소리. Cevizlibağ~Eminönü 구간만을 왕복하는 계통이 존재하여 노선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진 않지만 차도와의 선로 공유 구간에서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헬게이트 오픈이다.[69] 2009년에 일본 미쓰비시 건설에서 완공하였으며 마르마라이선 개통식에는 일본 총리도 참석하였다. 한편 SK건설의 컨소시엄이 현재 비슷한 위치에 도로 터널을 공사 중이며 2015년 완공되었다.[70] 특히 성벽 내 구시가지와 갈라타 지구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도시 구조와 언덕 때문에 일방통행로와 차량 출입 통제 구간이 매우 많은데, 걸어서 5분이면 갈 거리를 차로 가면 10분 15분 걸리는 곳들도 있다. 이런 곳은 애초에 택시 기사가 요금이 많이 나올 거라고 경고할 것이다. 단적인 예로 탁심 광장에서 갈라타 다리리 쪽 에미뇌뉘로 택시로 갈 경우 일방통행로 때문에 거의 500미터 가까이 돌아서 쉬쉬하네, 페라 쪽으로 빠진 다음 아타튀르크 다리를 건너 운카파느로 들어가 에미뇌뉘로 가는 방법밖에 없다. 택시 요금도 거의 40-50리라 가까이 나온다.[71] 튀르키예 내 다른 지역들은 이스탄불보단 택시비가 저렴한 편이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비싸다. 석유 값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나라가 튀르키예다.[72] 오스만이 점령 시 이스탄불이 아닌 코스탄티니예로 바뀐다. 애초에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스탄불이란 명칭은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으로 인해 바뀌게 된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