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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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 제4대 국왕
움베르토 2세
Umberto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mberto_II%2C_1944.jpg

출생
1904년 9월 15일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 라코니지 궁전
(現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쿠네오도 라코니지시 라코니지 궁전)
사망
1983년 3월 18일 (향년 78세)
스위스 제네바
재위기간
이탈리아 국왕
1946년 5월 9일 ~ 1946년 6월 12일
서명
파일:움베르토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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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사보이아 가문
이름
움베르토 니콜라 톰마소 조반니 마리아 디 사보이아
(Umberto Nicola Tommaso Giovanni Maria di Savoia)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어머니
몬테네그로의 옐레나
형제자매
욜란다, 마팔다, 조반나, 마리아 프란체스카
배우자
벨기에의 마리조제 공주 (1930년 결혼)
자녀
마리아 피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마리아 가브리엘라, 마리아 베아트리체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왕태자(피에몬테 공) 시절
2.2. 정체 논쟁과 즉위
2.3. 국민투표와 왕정 폐지
2.4. 망명 이후
3. 가계도
4. 기타



1. 개요[편집]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5월 초에 즉위해서 한 달 만에 폐위당하는 바람에 '5월 국왕'(Re di Maggio)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 생애[편집]



2.1. 왕태자(피에몬테 공) 시절[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Umberto_II_of_Italy_as_a_child.jpg

어린 시절의 움베르토 2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몬테네그로의 옐레나의 외아들[1]이며, 출생 2주 만에 왕태자 지위인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2]이 되었다. 왕태자 시절엔 왕실 인사 자격으로 남미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를 방문했다.

1929년 벨기에마리조제 공주[3]와 결혼했는데 혼사에 관련해서 벨기에를 방문했을 당시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움베르토 2세는 동성애자였고, 사랑이 싹틀 여지가 없던 부부 관계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혼식 당일 밤에도 두 부부는 합숙하지 않았고, 움베르토 2세는 난음 파티에 참석했었다고 한다.[4] 마리조제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염문설이 돌기도 하였다.[5] 움베르토 2세는 젊은 군 장교나 운동선수, 영화계 인물들과 사귀었고 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라이터, 보석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기에는 부왕과 다른 왕족처럼 무솔리니에 협조적이었는데, 1920년대부터 왕실 관련 자료들을 모은 무솔리니가 동성애자였던 움베르토 2세를 아웃팅하겠다고 협박했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이탈리아 남프랑스 침공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움베르토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히고 만다.

이탈리아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협조 아래 무솔리니 정부 추진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하지만 졸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1943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했으나, 동시에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여 연합군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이탈리아 북부는 큰 전쟁 피해를 겪었다.

무솔리니 정부의 실책으로 파시즘 세력만이 아닌 왕실까지 많은 반감을 사게 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움베르토 2세를 섭정으로 임명해 국왕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이양했다. 그는 새로 재편된 정부와 함께 연합군에 적극 협조하여 대(對)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전쟁을 수행했다.


2.2. 정체 논쟁과 즉위[편집]


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베니토 무솔리니파시즘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을 용인했기 때문에 종전 후 사보이아 왕가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었다.

이에 좌파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존재했던 공화정 수립 여론이 다시 크게 고개를 들었다. 이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개인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주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 정권에 협조했으며 물질적 안락을 누리며 생활한 왕실 전체에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나온 주장이기도 했다. 사보이아 왕가는 전쟁 말기 연합군 본토 진공 작전 시기에 이르러서야 무솔리니를 버렸으며, 이는 사회정의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왕실과 구(舊) 체제의 보전을 위해서였다. 특히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법화되어 탄압받았던 이탈리아 사회당[6]이탈리아 공산당 및 그 지지자들은 파시즘뿐만 아니라 왕정에 대한 반감도 극심했다.

사회당, 공산당, 노동민주당, 행동당좌파가 주도하는 공화정 추진 세력은 공화정 수립을 실현하고자 왕가를 파시스트 협력자로 비판하고 이 기회에 왕정을 폐지하자며 개헌 국민투표를 추진했다.

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파의 공화정 여론은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라 그리 놀랄 것은 없었지만, 전쟁 후에는 전통적으로 왕당파였던 우파 안에서도 공화정에 호의적인 여론이 늘어났다. 기독교민주당자유주의자들은 좌파만큼 국민투표 추진에 적극적이진 않았으나 반대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1946년 4월에 기독교민주당 당원의 상당수가 공화정을 선호한다고 답해[7] 왕가와 왕당파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기독교민주당 소속 총리 알치데 데 가스페리도 자신이 수장을 맡고 있는 거국내각[8] 내 개헌 국민투표 제안에 동의했다. 개헌 국민투표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것이냐 아니면 왕정을 유지하느냐는 것이냐였다.

움베르토 2세는 사보이아 왕가 일원 중에서 그나마 전쟁 뒷수습을 위해 노력한 편이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달리 왕당파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왕실과 왕당파는 우파 내에서도 왕정에 냉담한 여론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퇴위를 종용했다. 결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왕정 유지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이집트로 망명했다.

움베르토 2세는 물론 왕정 유지를 주장했지만 개헌 국민투표 자체는 수용했고 이탈리아인의 민의에 따르겠다고 공언했다. 움베르토 2세는 왕정 지지 성향이 강한 가톨릭 교회와 남부 지역 지지를 등에 업으면 개헌 국민투표에서 약간의 표차로 승리해 왕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움베르토 2세는 즉위 즉시 대규모 사면을 단행하고 이집트를 국빈 방문하는 등 개헌 국민투표 및 총선 선거운동 동안에도 왕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 노동민주당, 행동당좌파는 당연히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적극 찬성했고, 중도 성향 기독교민주당은 당내 왕당파가 적지 않아서 당 차원에서는 중립을 지켰으나 당 내 자유주의자들[9]을 중심으로 공화정 수립 찬성 여론이 일었다. 왕정 유지 측에서는 자유국민블록(Blocco Nazionale della Libertà)[10] 등 노골적 우익 왕당파 정당·가톨릭 교권 세력·일부 파시스트 잔당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했고, 구체적인 지지 정당을 떠나 남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움베르토 2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왕정 지지를 호소했다. 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왕정 지지를 호소할 때 남부에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북부에서는 면박·야유를 보내거나 심하면 살해 협박을 하는 등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개헌 국민투표 유세 중 공화파와 왕당파 둘 다 네거티브 전술을 사용하였다. 공화파 일각에서는 움베르토 2세를 동성애자라고 인신공격해서 보수적인 왕당파 표심에 영향을 주고자 했고, 왕당파 일원이었던 가톨릭 교회에서는 '가톨릭 VS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워 표심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투표 전날 직접 성 베드로 광장에 나가 왕정 지지를 호소했다.

2.3. 국민투표와 왕정 폐지[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Italian_referendum_1946_support_for_republic.svg.png

귀하는 공화정 전환에 찬성하십니까, 혹은 왕정 유지에 찬성하십니까?
Repubblica o monarchia?

파일:1946년 이탈리아 국민투표 결과.png
투표일
1946년 6월 2일
투표율
89.08%(28,005,449표)
입장

공화정 전환


왕정 유지

결과


12,718,641표
10,718,502표
54.27%
45.73%

움베르토 2세의 바람과는 달리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에서 54% 대 46%로 왕정 폐지가 확정되었다. 전체 투표자 54%가 공화정 수립에 투표했으며, 동시에 진행된 총선에서는 친(親) 공화정 후보[11]들이 대거 당선되어 전체 당선자 중 압도 다수를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공업 발달이 미진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상대적으로 일찍 해방돼 레시스텐자 활동이 미약했던 이탈리아 남부는 왕정 지지도가 북부에 비해 높았지만 투표율이 낮았다. 하지만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의 지하 활동이 활발했고, 일찍이 공업이 발전하여 노동운동이 활발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활동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이탈리아 북부는 다수가 왕정 폐지에 투표했다.[12] 특히 전쟁 말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붕괴와 무솔리니 죽음의 직접적 기폭제가 된 대규모 시위·봉기가 일어났던 토리노, 밀라노, 베네치아 등 북부 주요 도시는 압도적으로 왕정 폐지에 투표했다. 이는 무솔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파시즘 정권과 그 실책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용인하고 후원했던 사보이아 왕가에 대한 반감이 저항 운동에 적극 참여한 북부를 중심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움베르토 2세는 투표 결과를 두고 장관들의 쿠데타(?)라고 비난했으며, 국민투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쥐트티롤 지역, 트리에스테 지역, 이탈리아 왕국군 출신 포로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고 당시 법무장관이자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13]가 중립 의무를 위반했으며 투표 결과가 일부 조작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제시했다. 그러나 투표 조작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그의 이의제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각의 수장인 총리 데 가스페리는 움베르토 2세의 반발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들은 국가적인 재앙의 실패를 물려받아 피해를 복구하려는 누군가의 노력을 이해해야 하며 천 년을 넘게 이어온 사보이아 왕조의 몰락은 우리 모두에게 강요된 속죄다.'라는 말을 남기며 움베르토 2세에게 군말없이 패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고,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공화정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 선언했다.

6월 12일에 이탈리아 정치권은 공식적으로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고, 6월 18일에는 이탈리아 대법원이 움베르토 2세의 소송을 기각하여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은 왕가를 추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보이아 왕가의 모든 남자 구성원과 왕비 마리 조제의 이탈리아 입국을 금지했다.

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왕정 지지 여론이 더 높았던 남부 나폴리 등에서는 공화국을 부정하고 왕정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일부 과격 왕당파는 무력으로 공화국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움베르토 2세는 국가 분열과 내전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14] 왕정 유지에 투표한 유권자도 대부분 내전을 감수할만큼 왕정 유지에 사활적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해방의 한 축인 연합국 측에서도 왕정 폐지로 인한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6월 13일에 움베르토 2세는 망명을 떠났다.

2.4. 망명 이후[편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이집트로 망명한 것과 달리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을 떠났으며, 망명지에서 포르투갈의 구(舊) 귀족[15]파시스트들과 교제하며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16]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마리조제와는 별거에 들어갔고 곧 혼자서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별거했음에도 두 사람은 정치적·종교적[17] 이유로 이혼하지 않았다. 별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타인과의 염문설이 도는 등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두 사람 사이가 전쟁 패전과 왕정 폐지를 계기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18]

1974년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붕괴하자 마리 조제가 먼저 떠났던 제네바로 이주해[19] 그곳에서 1983년에 사망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사망 때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일체 조문하지 않았다.[20] 사망 직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움베르토 2세의 귀국 금지를 철회해줄 것을 부탁하였기 때문에 교황과의 관계를 고려한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공화국 수립 이후에 내려졌던 구 왕족들의 입국 금지를 폐지하고 이탈리아 방문을 허용할 것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움직임이 있기 전에 움베르토 2세가 사망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몇몇 정치인들은 움베르토 2세의 유해를 국내로 운구하자고 제안했지만 좌파에서 크게 반발했고 다수 여론 또한 부정적이었기에 무산됐다. 결국 움베르토 2세의 유해는 사보이아 가문의 조상들이 매장되어 온 프랑스 사부아의 오트콩브 수도원(Abbaye Royale d'Hautecombe/Abbazia Reale di Altacomba)[21]에 안장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마리 조제 왕비가 죽은 다음 해인 2002년 11월에야 의회 표결을 통해 사보이아 왕가 남자 구성원의 이탈리아 입국을 허가했다. 물론 입국만 허가한 것이지 일반 국민으로 대우하고 있고,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에서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22]

3. 가계도[편집]


  • 왕비 벨기에의 마리 조제: 1906년 8월 4일 ~ 2001년 1월 27일 1946년 망명 초부터 남편과 별거.
    • 마리아 피아: 1934년 9월 24일 ~ 생존 -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23]와 결혼, 3남 1녀/부르봉파르마의 공자 미셸[24]과 결혼, 자녀 없음
    • 나폴리 공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937년 2월 12일 ~ 생존 - 마리나 도리아[25]와 결혼, 1남[26]
    • 마리아 가브리엘라: 1940년 2월 24일 ~ 생존 - 로베르 젤링거 드 발카니와 결혼, 1녀
    • 마리아 베아트리체: 1943년 2월 2일 ~ 생존 - 루이스 라파엘 레이나코르발란 이 딜론과 결혼, 2남 1녀

움베르토 2세는 동성애자였지만 왕실의 대를 이어야 했기에 인공수정을 통해 자녀를 가졌고, 이는 왕실이 직접 인정한 사실이기도 하다. 움베르토 2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이 다른 남자의 소생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왕실 입장에서는 이러한 소문을 덮기보다는 인공수정을 통해 낳았다고 해명하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4. 기타[편집]


Hearts of Iron IV에서는 By Blood Alone DLC 이후 이탈리아의 레벨 1 장군으로 등장했으며, 비동맹주의 루트에서 부왕이 퇴위하는 디시전을 선택하면 왕으로 즉위한다. 움베르토 2세가 즉위한 상태에서 로마를 재건하면 아우구스투스 움베르토로 이름이 바뀌며 초상화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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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아래로 누이 4명이 있었지만 남자는 움베르토 2세 혼자라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다.[2] 원래는 로마 공(Principe di Roma)이 될 예정이었으나 당시는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기 전이라 교황청사보이아 왕조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손자의 탄생 소식을 들은 할머니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괜히 교황청을 자극하지 말라고 해서 사보이아 왕조의 전통에 따라 피에몬테 공을 받았다.[3] 이탈리아어: Maria Jose del Belgio(마리아 요세 델 벨조), 프랑스어: Marie-José de Belgique(마리조제 드 벨지크), 알베르 1세의 딸이자 레오폴드 3세의 여동생.[4] 참고로 결혼식에 마리조제 공주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움베르토 2세가 직접 디자인했던 것이라고 한다.[5] 이에 대해 클라라 페타치는 자신의 일기에 마리조제가 먼저 무솔리니를 유혹했다가 실패했다고 적었고, 무솔리니의 아들은 그녀와 자신의 아버지가 짧은 기간 로맨틱한 사이가 되었지만 문제가 되자 아버지 쪽에서 먼저 정리했다고 주장했다.[6] 파시즘 정권 시기 이탈리아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불법화되어 탄압받았다. 전쟁 전에는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반(反) 파시즘·반(反) 정부 활동을 조직하는데 주력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공산당과 함께 레시스텐자 활동 조직에 앞장섰다. 무솔리니 집권 전에도 국가 파시스트당 당원의 백색테러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무솔리니 집권 중 전쟁 전에도 수 천 명 당원들이 수감당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에는 많은 당원이 파시스트독일 국방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전후 사회에 대한 구상에 있어 공산당과 차이가 있었지만, 파시즘에 대한 증오와 왕가에 대한 반감에 있어서는 공산당과 별 차이가 없었다.[7] 당시 당원의 60%가 공화정을 선호했고 17%는 왕정을 선호했으며, 23%는 입장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8] 사회당과 공산당이 거국내각에 입각해 있었다.[9] 후에 '기독교민주당 좌파'로 지칭되는 세력이 된다.[10] 개헌 국민투표와 같은 날 치러진 1946년 총선에서 2.77%를 득표하고 16석을 획득했다.[11] 공식적으로 공화정을 지지하는 정당들의 후보자 및 당 차원에서는 공화정 지지를 택하지 않은 정당에 속해있지만 본인은 공화정에 호의적인 후보자들.[12] 아이러니하게도 사보이아 왕조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이전에 기반으로 삼고 있던 지역북부 지방이었다.[13] 일찍이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반(反)파시즘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했다. 1964년 톨리아티가 죽자 소련사마라주 '스타브로폴나볼게'시 이름를 그의 이름을 따 톨리야티로 개칭하였다.[14] 당시 남부가 전반적으로 왕정 지지 여론이 우세했다고 하지만, 남부의 공화정 지지 여론이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준으로 낮은 것은 아니었다. 왕정 지지세가 가장 강했던 나폴리조차도 공화정 득표율이 20%는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 대다수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파시즘을 용인했던 이탈리아 재계도 분열과 내전을 원치 않고 있었다. 만약 일부 왕당파가 실제로 국가 분열을 시도한다면 얼마나 물적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상황이었다. 움베르토 2세는 '이탈리아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으며, 사보이아 왕조가 이탈리아를 통일했는데 어떻게 내 손으로 다시 분열시키겠느냐.'는 말로 내전 시도를 일축하였다.[15] 당시 포르투갈을 철권통치 중이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이탈리아 구(舊) 체제에 호의적이었지만, 망명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왕정신분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으로 개헌한 지 한참이었다.[16] 이때 루마니아 국왕 카롤 2세와, 헝가리 섭정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도 움베르토 2세가 망명한 포르투갈의 이스토릴로 건너왔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맞서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도 살라자르 정권의 도움을 받아 이스토릴에 머물고 있었다.[17] 두 사람 다 종교가 가톨릭이었다. 가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한다.[18] 그래도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한 것을 보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동행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2세도 얼마 안 가 똑같이 망명자 신세로 전락한다... 그래도 외국에서 객사한 움베르토 2세와 달리 콘스탄티노스 2세는 어찌저찌 그리스로 귀국해서 노년을 보냈다.[19] 나중에 포르투갈로 망명 온 여동생 조반나(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의 왕비)는 카네이션 혁명 후에도 포르투갈에 남았다.[20] 단, 이탈리아어 위키에 의하면 당시 리옹 주재 총영사였던 마우리치오 모레노(Maurizio Moreno, 1940~2016)가 이탈리아 정부 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21] 주로 백작 시절의 사보이아 가문 사람들이 매장되었던 수도원인데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 이후로는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펠리체만 매장되었다.[22] 이건 외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전 왕태자의 비행 및 망언으로 인해 사보이아 본가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크게 약화되었고, 움베르토 2세의 사후에 분가인 아오스타 공작가와의 계승권 논쟁이 발생하면서 복벽파 내에서 사보이아 본가에 비해 비교적 평판이 좋은 아오스타 공작가를 지지하는 파벌이 늘어나 그나마 있는 왕당파 세력마저도 분열된 탓도 있다.[23] 페타르 2세의 6촌 동생, 페타르 2세 재위기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섭정이었던 파블레 왕자와 그리스의 올가 공주(1903~1997 : 요르요스 1세의 손녀이자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왕자비의 큰언니)의 2남 1녀 중 장남이다.[24]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손자, 룩셈부르크 장 대공의 친사촌이자, 미하이 1세의 처남이다.[25] 스위스 국적의 수상스키 선수 출신.[26]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Emanuele Filiberto di Savoia, 1972~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장녀 비토리아 디 사보이아(Vittoria di Savoia 2003~ )가 사보이아 가문의 차기 당주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