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군 (문단 편집) ===== [[삼국시대]] ===== * [[고구려]] * [[모본왕]](48 ~ 53)★▲◎ : [[역사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 [[차대왕]](146 ~ 165)★▲ : [[태조대왕]]의 아들들을 살해하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된다. * [[봉상왕]](292 ~ 300)★△ * [[고국원왕]](331 ~ 371)▲ : 고구려의 '''잃어버린 40년'''으로, 훌륭한 군주인 아버지 [[미천왕]]이 한사군을 정복하며 고구려를 만주, 한반도 내 최강의 고대 국가로 완성해 놓은 이점을 [[호부견자|이 무능한 아들이 다 날려먹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 3세]]나 [[시황제]]와 같이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한 조상의 업적을 잘 이어받은 훌륭한 후손 군주들도 존재하는데, 고국원왕은 이와 대비된다.] 고국원왕 치세 동안 고구려는 별의별 난리들을 다 겪었으며, 심지어 고국원왕 본인은 친정 중 전사했다. 물론 그 당시 적국이었던 백제는 [[근초고왕]]이 통치하는 최전성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고국원왕의 치세는 연달아 고구려에 부담을 안겼다. 특히 고대국가로서의 정비가 신라, 백제보다는 훨씬 빨랐다는 이점을 가진 고구려가 이 무능력한 왕 치하에서 헤매는 틈을 타 백제는 빠른 체제 정비와 마한의 반복속을 완료했고, 신라 역시 진한 지역을 거의 통합하여 내실을 다졌기에 고구려로서는 한반도 남부의 권력 공백 지역을 비교적 적은 수고로 복속할 골든 찬스를 통으로 날린 꼴이 된다. 이후 [[소수림왕]],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대왕]]때 돼서야 고구려의 전성기가 도래하기 된다.[* 40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면,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왕의 재위 기간을 전부 합친 정도이다. 그만큼 큰 시간을 날려먹었단 것.] * [[문자명왕]](491 ~ 519)◎: 선대의 전성기는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모순점을 많이 남겼다. 사실상 '''고구려 중후반기 침체기의 근원'''. 그러나 나라가 대놓고 기울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도 문자명왕 다음왕인 장남 [[안장왕]]은 문자명왕 시기의 침체를 극복하고 전성기를 유지했다. [[안원왕|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지만] ◎ 표시를 추가. * [[영류왕]](618~642)▲◎ : 지나친 친당정책으로 내부의 불만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그 대가로 본인도 죽임을 당한다. 이후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 체제가 되고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이 곧바로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명장이었던 만큼 능력은 있었고[* 다만 장군으로써의 능력과 국왕로써의 능력은 별개이다.] 마냥 폭군, 암군은 아니었기에 ◎ 표를 추가한다. * [[백제]] * [[진사왕]](385 ~ 392)▲ * [[아신왕]](392 ~ 405) : 적어도 보통 수준 그 이상 되는 임금이었지만, 너무나도 아집과 독선이 심했고, 더군다나 상대는 그 [[광개토대왕]]이었으니 더 큰 문제였다. 결국 고구려에게 매번 패배하였으며, 최후조차 전쟁에 휘말려 시해되었다고 추정될 정도이다. * [[개로왕]](455 ~ 475)◎ : [[도림]]과의 [[바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와 [[도미 부부 설화]]로 암군이란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고, 그의 치세에 백제가 한성을 잃고 남쪽으로 패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 치세라 상술한 아신왕처럼 상대가 너무 강했다는 [[쉴드]]도 한 몫 했다. * [[동성왕]](479 ~ 501)▲ : 집권 중후반까지만 해도 나라를 잘 이끌어갔지만 꾸준히 벌여온 왕권 강화 정책으로 인해 웅진 토착세력의 반발을 샀으며, 말년에는 신하들의 구휼 요청도 무시하고 궁에 틀어박혀 향락만 즐기는 등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위사좌평에까지 임명하며 신임하던 신하 [[백가#s-1]]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시해된다. * [[의자왕]](641 ~ 660)△◎ : 이에 대해서는 최종 승자인 신라 측의 조작이 아니냐는 의견도 꽤 있는 편. 하지만 부친 [[무왕(백제)|무왕]] 때까지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것을 끊어낸 말년의 외교 판단으로 대당관계를 파탄내서 당과 신라의 양면 협공을 초래했다는 점은 명백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앉히는 등의 무리한 왕권 강화 노력 때문에 백제 귀족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결국 [[예식진]] 같은 [[매국노]]에게 붙잡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강요당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 [[신라]] * [[진지왕]](576 ~ 579)△◎ : 방탕한 짓을 일삼다가 폐위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는 귀족과의 갈등 끝에 폐위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선덕여왕]](632~647) : 그녀의 치세때 신라는 최악의 내우외환의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란을 마주한 상황에서 그 위기를 해소할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불사에 치중하여 국력 탕진을 가속화하는 등 여러 실책들로 인해 대중적 인식과 달리 학계에선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이다. * [[가야]] * [[탁순국]] * [[아리사등]](? ~ 538) : [[자존심]] 세우기와 [[돌려막기]]식 막장외교로 가야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자기 자신은 신속하게 신라에 항복해버린 후기 가야의 [[X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