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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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江戸時代(えどじだい


1603년~1868년
분열 이전
종결 이후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메이지 시대
1. 개요
2. 역사
4. 경제
4.1. 생활 수준
4.2. 화폐제도
5. 문화
5.1. 식문화
5.2. 교육
5.3. 기타
6. 매체
6.1. 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



1. 개요[편집]


江戸時代(えどじだい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현 도쿄)를 본거지로 창설한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집권하던 시대.


2. 역사[편집]


1603년에 정이대장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천하패권을 확립한 1615년부터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 때까지 약 252년 간 지속되었다. 전란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 전국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큰 혼란이나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된 안정기였다. 또한 일본 역사 전체 기준으로 볼 때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1] 사실상 반(半)중앙집권 시대이라는 것.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됐고, 홋카이도류큐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2] 특히 일본의 정치/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 중심의 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 중심의 간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3]

에도 시대 중기인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경제 호황기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4]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으나, 18세기 중후반 이후 개혁의 실패, 자연재해의 빈발 등이 거듭되면서 문제점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막번(幕藩) 체제는 임시 방편만 남발할 뿐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지방의 강력한 번들이 개혁을 주장하고 지방민의 반란이 거듭되면서 붕괴에 직면하였다.

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 문 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듣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쓰마, 조슈 등의 토막(討幕)파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도.


3. 통치체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에도 막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경제[편집]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화를 이룩하여 일본 내수 경제의 기틀을 잡은 시기로, 이 2세기 반의 기간이 20세기, 21세기까지 일본 내수 경제의 규모가 성장하고 유지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시기는 전국시대의 자유로운 교역보다는 쇠퇴했지만[5], 도자기우키요에 등을 수출하고 , 을 대대적으로 채굴[6]하면서 국부를 쌓은 시기이기도 하다. 덕분에 금, 은 화폐 사용이 일반화 되었으며, 한편으로 전국시대 난립했던 관소[7]들이 철폐되고 해상 교통이 대통합하는 등 상업 발달이 두드러진 시기. 다만 후기에는 근처 은 먹는 하마 중국이 일본 금, 은, 동을 죄다 흡수해버려서 고생하기는 했다.[8]

실제로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일본의 최대 수출품이 에도막부 극초기에는 이었고 이후 구리였다. 네덜란드와 중국의 상인들은 데지마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은, 구리를 구입했다. 초창기에는 은이 주된 수출품이었지만 문제는 은을 지나치게 많이 캐다보니 은의 생산량이 매년 기복이 심하고 점차 고갈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막부가 보유하고 있던 금을 수출하기도 했는데[9] 때마침 일본 각지에서 대규모 구리광산들이 개발되면서 구리가 일본의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사타케 가문이 지배하던 쿠보타(아키타) 번의 인나이 광산이 오랬동안 일본 최대의 구리광산이었는데 막부와 쿠보타 번은 수출용 구리 물량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을 했다.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수출하기 위한 구리는 일본 각지의 구리 산지에서 일차 가공을 한 뒤에 모두 오사카로 운반하여 오사카의 구리 제련업자들이 독점적으로 제련을 했는데 막부는 수출용 구리의 가공 및 유통을 오사카로 집중시킴으로써 구리의 생산을 통제하고 세수를 확보하려고 했다.

참고로 일본 3대 일제시대 이후 일본 3대 재벌이던 스미토모 재벌이 바로 에도시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 가문에서 비롯했다. 스미토모 가문은 오사카 구리 제련업자 조합의 주식 8주 중 3주를 보유한 일본 최대의 구리제련업자였다. 오사카 제련업자들의 구리제련기술 독점은 무려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쿠보타 번을 비롯해서 구리광산을 보유하고 있던 여러 번들이 점차 구리제련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하고 구리제련업자들 또한 직접 구리 광산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매해 수백만 관의 구리를 해외로 수출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구리 생산지역이었기 때문에 에도시대 일본은 상업과 화폐경제 발달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였다. 윗 문단에서 언급한 스미토모와 함께 일본 3대 재벌인 미쓰이 그룹, 역시 1673년 교토의 포목상에서 유래되었다.


4.1. 생활 수준[편집]


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았고, 괄목할 만한 경제적 발전이 있었으나 그 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했고 농민들이 착취당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평민들의 생활수준은 국가 전체의 경제력에 비해 열악했다는 증거들이 매우 많다. 이하의 연구들은 주로 학술적 논문으로,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 가능한 정도지만, 요약하면 일본은 농민들이 높은 세율로 착취당해서 조선과 중국의 일반적인 농민들보다 삶의 수준이 높았다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마비키 풍습은 뭘 어떻게 해석해도 일본 농민들의 삶이 고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심한 착취를 당했다는것이 피하기 어려울 수준. 마비키 말고도 일본 농민들이 극심한 세금 착취와 가난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 더 있었는데, 바로 여자를 매춘부로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조선 시기에 양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는 사실과 유사한 면이 있는 사례라 하겠다. 특히 일본 동부의 에치고 출신 여성들이 다른 지방의 여성들보다 20% 정도 더 많이 매춘부로 팔렸는데, 피부가 부드럽고 인내심이 강한 점 때문에 선호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가난 때문에 농촌의 여자들을 매춘부로 파는 일본의 풍습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이들을 가라유키상이라고 부른다. 1920년까지 약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각지에 매춘부로 팔려나갔는데, 이런 매춘부의 해외 진출을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들도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해야 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만큼 가라유키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

나카무라 사토루,박섭의 저서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본문에서 에도 막부의 공식적 수취율은 21%였다고 서술한다.[10] 또한 런던정경대 경제사학과 교수인 스티븐 브로드웨이는 1990년의 미국 달러로 환산한 1800년의 일본과 청,인도의 구매력 지수는 일본 876 달러, 청 639 달러, 인도 569 달러 이후 1850년 일본 933 달러, 청 600 달러, 인도 556 달러로 추산한다. 더하여 근세 일본의 일인당 소득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으며[11] 자료 일본의 평균 수명 또한 중국과 인도보다 10년 이상 높았다. 자료 [12] 다만 18세기 이후로는 평균수명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만큼 인구가 더 늘지는 않았는데 이는 고율의 세금으로 인해 일본 농노들의 삶이 발전된 상업수준에 비해서 팍팍했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한 마비키의 영향 때문이었다. 링크

역사학자 이헌창은 <조선 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에서 논문에서 일본의 일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 부담률은 조선보다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취의 정황 만을 놓고 당시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는 보기에는 엄청난 무리가 있다. 첫 문단에서 언급된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있다.

1870년의 일본은 일인당 연간 1.76석(이중 실제 쌀은 1.14석)을 생산하고 있었다. 조선의 경우 1910년의 농업생산량은 개항기 동안 도입된 일본의 다수확 품종 벼, 일본이라는 대규모 쌀 수출 시장의 등장과 미가 상승으로 인한 동기부여에 의해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당량 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전 수치는 잘 알 수 없으므로 일단 이 수치를 통하여 비교해보기로 한다. 1910년의 조선 인구는 164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2682만석이므로 인구 1명당 생산량은 1.63석으로 이는 kg 단위로 환산하여 234kg이며 이 중 실제 쌀은 96kg이다.[13]


오히려 일본인의 곡물 소비량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박섭 교수는 해당 저서에서는 1910년 조선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이 96kg(0.64석) 수준이라 서술하였지만 정작 박섭 교수의 다른 연구저서를 보면 1911년 일인당 미곡생산량은 0.72석이라 서술하였다. 즉, 이는 본인의 연구 결과에도 어긋나는 서술로 보인다.

물론 "일본의 공식적 공조율은 21%"라 논하였던 나카무라 교수가 조선의 공식적 공조율에 관해서는 "3.7%"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그리고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하였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사실상 농노화가 된 일본 농민들의 심각한 빈곤상태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14] [15][16]등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마비키를 포함한 실제로 존재했던 풍속들을 보면, 적어도 극심한 빈부격차, 혹은 생활격차가 존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거기다 당대 일본은 육식금지령으로 인해 육류섭취 또한 불가능했다.

즉, 요약해보자면 대도시 지역 주민들은 상업활동의 활성화로 유채기름을 일찍부터 식용과 조명에 쓰는것이 보편화되었고, 컬러인쇄도 일찍부터 보편화되는 등 당대를 기준으로 봐도 비교적 번화한 삶을 살았지만 대다수의 농노들은[17] 이런 번화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서 일본 농업의 생산성이 기후의 영향으로 조선보다 비교적 높았음에도[18] 조선의 농민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특별히 나았다고 결론내리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것이다. 즉, 전체적인 경제력은 조선에 비해서 앞서나가기는 했지만 세율 문제 때문에 서민들의 삶이 조선보다 더 좋았다고 결론내리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간혹 에도 시대의 평균 일본인의 삶이 저하되었다는 근거로 신장의 변화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자료 우선 인골로 확인하는 신장은 그 편차가 큼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더하여 위 자료에서는 금육령이 시행되어 일본 식문화에 고기를 꺼리게 되었던 나라-헤이안-가마쿠라 시대를 건너뜀이 확인된다. 에도 시대와 그 이전 시기의 신장 차이는 큰 폭으로 줄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농업 기술 및 상공업 기술은 에도 시대에 뒤떨어지고 세율은 훨씬 높았던 전국시대보다 에도 시대의 신장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던 이유를 들자면 17세기 폭증한[19] 인구가 어업으로 인한 1인당 육류소비를 급감시켰다는 것이있다. 무로마치 시대 일본인은 1일 3식을 시작하게 되는데 에도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으며 1인당 곡물 소비량과 쌀 값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18세기 이후로는 에도 시대 일본의 인구가 계속해서 비정상적으로 일정하게 2700만명 선으로만 유지(정체)되었고 실제로는 자료에서 보듯이 일본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노들에 대한 식사량 제한과 이 부족한 식사량 그리고 과중한 세금 부담 때문에 마비키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 등을 보면 에도 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의 질이 전혀 저하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든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같은 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신장을 통하여 주장을 하는 측도 있다. 조선시대 평균키, 일본인보다 6cm ↑ '왜구라고 부른 근거 있다' 그렇다면 1937년 일본과 조선의 징병 검사 자료를 확인해보자. 자료 교육, 의료, 소득 등 모든 지표에서 일본인이 훨씬 좋았음에도 신장의 차이는 3~4CM 으로 오히려 조선인이 더 높다.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신장 또한 3~4CM 차이가 있다. 게다가 기사의 자료는 근대 이전 일본인 신장의 추정 자료 중 가장 낮은 것을 채택한 것에 기인하였다. 다른 추정 자료에서 드러난 근대 일본인의 신장은 약 158 CM으로 계급 차이에 따른 신장 차이도 보이지 않는다. 쌀 농사가 중심이었던 일본에 비해 조선은 밭 농사의 비중도 컸으며 조,수수 등이 주식이었던 지역도 많았다. 앞서 서술한 바 있듯이 생물학적으로 조선인의 신장이 일본인의 신장보다 크다는 점과 밭농사의 비중이 높아 조선이 잡곡의 섭취량이 많으므로 영양학적으로 우월한 식단을 가졌음이 일본인의 일인당 곡물 소비량이 조선인 보다 많았음에도 불구한 동시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신장 차이를 설명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역사학자 이헌창은 <조선 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에서 논문에서 일본의 일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 부담률은 조선보다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수취 정황만으로 당시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사실 수취 정황에서도 조선의 수취 상황이 일본의 그것보다 나은 형편이었다고 판단하기도 어렵다. 조선 후기의 농민의 구성은 8할 이상이 소작농으로 추정되며 병작반수제, 지주의 전정을 소작농에게 부담시키는 행위, 변질되어버린 잡세, 환곡, 군정 등으로 그 부담이 매우 커진 까닭이다. 배향섭 교수의 저서 임술 민란과 19세기 동아시아 민중 운동에서는 조선 후기 농민들이 일년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물로는 소작료와 환곡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으며 기타 각종 잡세의 부담은 직포를 짜서 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직포업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나 가장 기본적인 생산물인 곡물은 지주와 국가에 수취 되어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가내 수공업에 의지하였는데 이마저도 군역으로 수취 되었던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정약용 또한 생활고에 못 이겨 소작농들이 자신의 처자를 노비로 매매하는 행위와 군역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거세를 하는 행위를 보고 개탄 하기도 하였다. 한길사 한국사에서는 조선 후기 일반적인 지대와 세금은 수확량의 70~80% 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결국 수취의 정황(일본의 높은 세율) 만을 놓고 조선의 생활이 일본이 그것보다 나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수취 정황조차도 조선이 딱히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하여 조선은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자 18세기 중반까지 인구의 3할을 차지했던 노비가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마비키 풍습이나 여아 인신매매에 비교해 딱히 나을것 없는 열악함을 암시하며, 이를 제외한 소작농들의 경우 최초의 주장대로 반작법을 적용해 소작을 한다 해도 소작에 적용되는 반작법은 국가에 원천징수되는 세금이 아니며 지주가 전세를 대신 내주거나 반작법임에도 수확물의 1/3을 받는 등의 계약조건의 사전 합의가 있었으며, 링크 그렇기에 조세와 상관없이 추가 수확을 위한 땅을 임대하는 조건으로 보아야하며 추가 수확량에 따라 소작인들이 자영농으로 변환되거나 하는 경제논리적 사항일 뿐이었다. 즉, 강제적으로 원천 징수되는 당대 일본의 세금과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다 조선에서는 순수하게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만 부담하는 순수 자영농과 다수의 외거노비로 경작하는 지주계층이 일제의 수탈이 시작되던 시기의 자료로 비교해도 링크 이미 20%를 넘겼지만 당대 일본농민들은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줘서 징세권을 나눠가진 '기생지주'들에게 내야하는 몫이 기본 세금 부담에 추가로 더해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 세금 부담은 훨씬 더 컸을 수도 있다.

다만 일인당 미곡 생산량/소비량의 격차발생은 근세의 것이라기 보다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양국 모두 아직 농업이 비교적 전근대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1880년대 초기의 일본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과 한일강제병탄 직후 조선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을 비교하면 그다지 큰 차이가 존재한다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20]

최종 정리하자면, 에도 시대의 경제적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들의 삶은 꽤나 팍팍한 편이었으며, 따라서 조선의 생활 수준보다 뚜렷하게 양호했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많으며[21] 반대로 거꾸로 조선이 낮은 세율하에서 일본보다 양호한 생활 수준을 영위했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2018년 1월 발간된 매디슨 프로젝트를 출처 확인해보자. 16세기 이후 일본의 1인당 경제력은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남한과 북한의 데이터는 1820년부터 제시되어 있다.[22] 지역별 성장 비교에 알맞은 소득으로 1800년의 일본은 1009 달러, 1820년의 남한과 북한은 465달러와 245달러, 남북한을 포함한 조선은 411달러로 나타나 있으나, 이것이 빈부 격차를 감안한 수치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2010년에 발간되었던 매디슨 프로젝트에선 1820년 일본의 소득은 669달러, 조선은 600달러로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 추정했었다.

2007년에 이헌창 교수와 쿄지 후카오 교수가 공동저술한 논문 When and how did Japan catch up with korea에 따르면 1800년의 조선 1인당 gdp는 600달러, 일본의 1인당 gdp는 700달러였다. 이 논문에서는 16~18세기에 일본이 조선의 1인당 gdp를 따라잡았고 19세기에 양국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졌다고 추정했다.


4.2. 화폐제도[편집]


에도 시대 이전에는 일본의 각지마다 다양한 지역 화폐가 쓰였지만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화폐발행권을 독점하고 금은동 3종 동전을 기반으로한 통화양식으로 전국적으로 통일한다.

금화(金貨)로는 코반 (小判, Koban) 금화가 1냥(両)으로 가장 널리 쓰인 대표적인 금화였고 다른 화폐의 기준이 되었다. 약간 길고 둥근 타원 형태로 일본 사극 등 시대물 에 흔히 등장한다. 무게는 금 15그램 가량. 에도시대 당시 1냥의 가치는 쌀 3~4 고쿠(石, 1석 = 한 사람의 1년분 식량, 약 150 kg )으로 4석을 기준으로 무게로 약 600 kg 분량, 20 kg 쌀 포대로는 30포대 분량이었다. 1,000달러 가치 이상의 매우 고액권인 셈이다.

오오반(大判, Ōban) 금화[23]는 그 10배인 10냥(両)으로 주로 재산축적이나 고액 거래에만 한정적으로 쓰였다.

1냥의 1/4 인 1 분(分) 화폐는 금 또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1냥의 1/16 인 1주(朱)라는 단위도 있었다.

소액 거래에 쓰이는 일반 동전은 전(錢) 또는 몬(文) 이라고 불렸고 1,000 전이 1 칸몬(貫文), 금 1냥과의 교환비율 대체로 전4칸몬, 4000 전이 금화 1냥이었다. 즉 에도시대 초기에는 금(金)1냥(両) =은(銀)60 몸 (匁 , 돈 = 3.75 그램)=전4칸몬 (4,000文). 고정 비율은 아니고 시세에 따른 변동제여서 시대에 따라 점차 인플레가 심해져 동전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다.

에도시대 금화 1냥의 가치는 오늘날에는 약 12-17만 엔 정도로 본다. 1700년 당시 음식 소바 250 그릇 값. 일급 은화 5문 4분인 목수가 금화 1냥을 벌려면 12일간 일을 해야 했다. 1전은 현대의 4엔 가량이니 한화로 40원 정도.


5. 문화[편집]



5.1. 식문화[편집]


에도 시대에는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들은 빠른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들 도시에는 대규모 공사가 매일같이 진행되는 등 한밑천 잡아낼 건덕지가 많았기 때문에 전국에서 청년들이 꿈을 가지고 상경하였고 한편으로는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하급 사무라이들도 대도시에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에도 시대 대도시에는 독신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현대의 패스트푸드와 비슷한 요식업이 전례없이 발전하였는데, 17세기 에도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전문점이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대도시들은 노점 음식의 천국이기도 하였다. 노점에서는 텐푸라, 장어꼬치, 스시, 오뎅, 우동, 소바, 모치, 단고, 오징어구이 등을 취급하였다. 이 중 텐푸라는 노점에서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에도 막부가 화재 예방책의 일환으로 텐푸라를 실내에서 튀기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노점의 음식은 대개 정규 음식점의 음식에 비해 질적 수준이 낮았지만 이러한 특권(?)도 있었다는 것.

현재 일식의 얼굴마담인 스시도 에도 시대에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에도 시대 일본에서 즐겨먹던 스시는 오늘날의 스시와는 모양새나 만드는 방식이 다른 육면체의 하코즈시(箱寿司)였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스시'는 니기리즈시인데, 니기리즈시는 에도 시대 막부실세 저택 앞에 한 스시 명인이 점포를 차려 가장 맛있는 생선부위를 활용해 만든 고급 스시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시가 대중들의 식탁에 올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업과 어패류 교역업도 활기를 띄었는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츠키지 시장은 이 시기에 에도에서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이다.

다도 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 더 발전하였고, 류큐를 통해 설탕이 대규모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도의 필수요소인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도 오늘날의 그것과 가까운 형태로 진보하였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특히 유럽과의 교역으로 새로운 요리기법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포르투갈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빵 문화가 들어왔으며, 오늘날 동아시아권에 잘 알려진 빵인 카스테라(カステラ)는 이 때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빵이다. 상기에 언급한 텐푸라도 유럽식 튀김법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이다.

단, 이 자료에서 보듯이 에도시대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노들은 거의 대부분 일즙일채(一汁一菜)의 식사만 하는 등(한국식으로 말하면 밥,국,김치가 전부 였던 셈이다) 식사량과 음식 반찬에까지 상당한 제한을 당해서 다양한 요리들을 맛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5.2. 교육[편집]


에도 시대의 초등 서민교육은 테라코야(寺子屋)에 의해 수행되었다. 중세 사원의 교육원에 유래를 두고 있는 테라코야는 입학생들에게 문자의 해독과 쓰기, 계산 등 간단한 산수, 도덕, 그리고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 등을 가르쳤다. 테라코야의 교사는 주로 학식있는 평민들이었고, 전체교사의 10% 가량이 여성이다. 테라코야는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는데 10명 가량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부터 100명 이상의 학생이 수학하는 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테라코야는 남녀공학이었다.

상위 학교로는 번교(藩校)와 사숙(私塾)이 있었다. 학교는 서민용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숙은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 번교는 각 번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일반적인 번교는 재지 사무라이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나, 개중에는 서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도 있으며 일반적인 사족학교들 중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수가 일반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생도들은 번교에 대개 7~8세에 입학하여 교육적 성취도에 따라 13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번교는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의 교육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으나 소수의 일부는 국학이나 난학, 의학 등을 메인으로 삼기도 하였다. 번교는 사무라이 학교인만큼 검술과 궁술 등의 무예도 중시하였으며, 번교생들은 각종 기예에 대한 수행도 겸하였다.

유교 이외의 학문을 중히 여기는 학교의 비중은 번교보다 사숙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사숙으로는 일본 개화기를 주도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들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숙에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고, 유교 위주의 번교 교육에 염증을 느낀 학구열이 높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번교에서 이탈하여 사숙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5.3. 기타[편집]


문학 등에서 판타지 문화가 번성하였다.

6. 매체[편집]


일본의 매체에서 한국의 조선시대처럼 단골로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막말(막부 말기)은 일본 사극 3대[24] 인기 시대 중 하나.

일부 작품은 일제 시대를 아예 없애고 에도 막부가 계속 존속했다는 대체역사를 배경에 깔기도 한다. 역으로 에도 막부가 존재치 않거나 일찍 멸망하고 에도 막부를 모티브로 한 다른 막부나 혹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공전기 대체역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6.1. 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NHK 대하드라마[편집]


주로 막부 말기의 작품이 많다.


[1] 단, 권력 구조에서는 중기 이후로는 쇼군들의 능력치가 떨어지다 보니 그 휘하의 로쥬(老衆)에게 실권이 쏠리고 쇼군은 다소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게 된다. 다만 이는 일본 정치 특유의 모습이지, 딱히 에도 시대에만 두드러진 현상은 아니다. 덴노에게 실권이 있던 시절부터 이미 상황 정치라든지 섭정 정치가 흔했고, 이전 막부 시대도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호죠씨라든지, 무로마치 막부의 칸레이라든지 쇼군의 권력을 대리하는 세력들은 항상 존재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각 다이묘 가문 내부에서도 노중들에 의해 실질적인 정치가 돌아가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현대 일본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창업주라든지 중흥주급 인물이 아닌 이상 오너 일가라고 하더라도 전문 경영인들보다 목소리가 강하기가 어렵고, 심지어 정계에서도 총리대신이 상대적으로 정치적 기반이 약할 경우, 관방장관이 사실상의 총리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노중 위주로 막부 정치가 돌아갔다고 해서, 막부 중심의 중앙집권이 이전 어느 시대보다 강력해졌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2] 현재는 러시아령인 가라후토(남사할린)치시마 열도(쿠릴 열도) 역시 막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왔다.[3] 단 에도시대까지는 여전히 긴키의 위세 역시 무시할 수 없었으며 실제 막부 말기의 정국은 에도가 아닌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간토가 일본의 유일한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가 제국의 수도가 된 1869년 이후의 일이다.[4]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린 메이지 유신 초의 일본 인구가 3,200만에 달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초는 중앙집권이 다시 확립되어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기에 인구 증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인구가 2,600만~2,700만을 계속 유지했다.[5] 물론 다이묘들의 독자적인 교역을 막았기 때문이다.[6] 현재는 천연자원이 없어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며 사람이 자원 운운의 원조인 일본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의 일본에서는 광물 자원이 매우 풍부했으며 특히 은과 구리 생산량은 한 때 세계적 기준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게다가 전근대 기준에서 필요한 희소광물의 대부분이 일본 국내에서 나왔고, 금과 마찬가지로 귀중했던 설탕도 재배되었다. 다만 이건 류큐를 사실상 식민지배하면서...[7] 다이묘들이 통행세를 비싸게 뜯어내다보니 상업발전의 걸림돌이었다.[8] 명은 일조편법, 청은 지정은제로 은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은을 수입해다 썼는데 상당수가 일본산 은이다. 대항해시대2에도 일본의 특산물 중 하나가 은으로 매우 싸다. 일례로 오늘날 "일본명동"으로 불리는 긴자 지역의 이름은 과거에 이곳에 은 주조소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9] 당시 나가사키를 통한 국제무역은 일본의 상류층들에게 각종 사치품을 공급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리고 막부의 중요한 세입원이었다.[10] 일본의 에도시대는 총생산량으로 볼 대, 중앙정부인 막부가 전국의 약 4분의 1(700~750만 석)을 영유햇고, 게다가 그중 대부분을 직속가신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막부 직할령은 약 420만석이었다. (중략) 1871년의 전국 공조액은 1,225만석이었으며, 정부가 파악한 공식적인 수확량이 3,220만 석이었으므로 공식적인 공조율은 39%였다. 실제 수확고가 4,681만석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이 역시 과소평가된 것으로 판단되어 대략적인 수확고는 6천만석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면 공조율은 약 21%가 된다. 1870년의 일본 인구는 3,440만 명이니, 1인당 공조액은 0.365석이다.[11] In particular, Japan had very low levels of per capita GDP at the start of the second millennium, then experienced modest but steady growth at 0.06% per annum through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Japan’s more dynamic growth after the Meiji Restoration of 1868 thus built on this earlier progress. China’s per capita GDP, by contrast, was on a downward trajectory from its high-point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On these estimates, Japan overtook China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India. shared in the Chinese pattern of declining per capita GDP from 1600, at the height of the Mughal Empire under Akbar. However, Japan was already slightly ahead of India by the time the Indian series starts in 1600.-<Asia's little divergence>[12] 위 논문의 30p 참고[13] 조선의 생산량은 박섭의 연구가 출처이다. 다시 말해 같은 시기 조선과 일본의 곡물 생산량은 이것보다 더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4] "일본 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에 일에 불구하다." 원중거, 승사록 [15] "일본 시골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아로 들어가고 풍년이 들어도 콩 반쪽도 잇기 어려워 스스로 처자를 팔아먹기 까지 한다. 빈부가 균등치 않음은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신유한, 해유록[16] 이러한 신유한의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링크에 적힌 것처럼 가난 때문에 농촌의 여자들을 매춘부로 팔아넘긴다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시대에서도 시골에서는 인신 매매를 맡은 노파가 12세 전후의 아이들을 샀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5~6엔으로 팔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링크[17] 특히 에도시대 일본 인구의 80% 이상이 농노 즉, 농민들이었다. 자료[18] 한반도의 기후는 비슷한 위도의 중국 화북 지역과 비슷하고 삼남 정도가 화중 지역까지 비슷하지만 일본은 구로시오 난류와 비교적 낮은 위도의 영향으로 한참 남쪽의 강남지역(단 아열대지역인 광동성 광서성은 제외)과 기후가 비슷하다.[19] 1600년 일본의 추정 인구는 1,700만 명이다. 이 숫자는 1700년 2,700만 명으로 급등한다.[20] 1911년 박섭의 미곡생산량 추계를 바탕으로 구한 1911년 조선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72석, 총 곡물 생산량은 약 1.65석. 허수열 교수의 추계를 인용하면 1910년 조선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84석에 이른다. 또한 1881년 일본 통계연보중 미곡생산량 값을 바탕으로 구한 1881년 일본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81석이다.[21] 전근대에는 지배자들이 세금을 '복지 정책'으로 백성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이 지금보다 미약했다. 현대 기준으로 볼 때 에도시대 일본은 고세율 저복지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22] 물론 조선시대에는 현대의 남북한 구분이 없었으니 현대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나눈 것이다.[23] 오방이라고도 하는데, 오방떡할 때의 그 오방이다. 참고로 포켓몬스터에서 나옹의 이마에 붙어있는 것도 오방이다.[24] 헤이안 시대(겐페이 전쟁), 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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