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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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3. 멸망 후
4. 가족 관계
5. 관련 연구
6.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阿利斯等 (생몰년 미상, 재위 : ? ~ 538)

탁순국의 마지막 왕. 아리사등은 왕명이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는 대개 아리사등이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그와 동일인으로 본다. 단 기능말다는 구형왕설, 이뇌왕설도 있다. 한국 사서의 가야 관련 기록이 부실한 관계로 이 인물도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한편 아리사등의 이름 중 아리사-는 "거대한"을 뜻하는 신라어 알(閼), -등은 "신하"를 뜻하는 신라어 타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이름이 아닌 대신(大臣)라는 뜻일 가능성이 있다. 일단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같은 인명도 있고, 일본서기에서도 아리사등이 기능말다간기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등장하므로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본다.


2. 생애[편집]


가라왕(加羅王)이 신라왕의 딸[1]

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후략)

일본서기게이타이 덴노 23년 3월조.

당시 가야 연맹의 수장이었던 반파국(대가야)이 신라와 손을 잡았지만 반파국의 친 신라 행보에 거부감을 느끼고 강경한 대응을 했던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타난다. 이를 결례로 본 신라는 결국 파혼을 결정했고 가야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된다. 신라는 파혼의 보복으로 몇몇 가야 지역을 공격하고 돌아갔고, 탁순국도 이 때 피해를 입었을 수 있다.

기능말다간기와 아리사등을 동일인으로 보는 설을 따를 경우,[2] 신라의 본격적인 침입이 두려워 529년 일본까지 직접 넘어가 지원군을 요청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에서 가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앞서 527년 오우미노 케나노오미(近江 毛野臣)에게 6만의 군사를 맡겨 보냈었는데, 이를 중재인으로 삼아 신라와 백제 왕에게 탁순과 남가라(구야국)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인정해주길 바랬으나 신라백제 양쪽 모두 고위관료를 보내지 않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무시했다. 일본 측 중재인으로 왔던 케나노오미는 신라군 3천을 이끄는 이사부의 무력 시위에 꼬리를 내렸고 뒤로 빠져 구사모라(久斯牟羅)[3]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만 치중하고 탁순국을 도와주지 않았으며, 구사모라의 가야 사람들에게 끓는 물에 손을 넣어 진실된 자는 손이 멀쩡하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손이 문드러질 것이라는 괴상한 횡포를 부리며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아리사등은 케나노오미가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 왜국에다가 쓸모없는 얘 좀 다시 데려가라고 했는데 케나노오미는 왜왕의 명령에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횡포를 부렸다. 아리사등은 앞마당에 떨어진 폭탄을 치우기 위해 별 수 없이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를 신라에,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백제에 보내 지원군을 요청한다. 백제 성왕은 백제군으로 케나노오미를 격퇴해 줬지만, 당연히 공짜로 그래줄 리는 없고 탁순국의 영역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아 탁순국을 백제의 부용국으로 만들어버렸다. 백제로 돌아가면서 5개 성을 추가로 털고 간 건 덤.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낀 가야의 미래에 대해 531년 안라회의가 열렸지만 아무 소득을 얻지 못했고 이어 백제가 군대를 전진 시켜 지금의 함안군 칠원읍 땅에 구례모라성[4]을 쌓는 등의 압박을 가해오자 탁순국 내부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자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백제파와 신라에 투항하자는 신라파의 의견이 많았으나 탁순국의 위치가 백제보단 신라 쪽에 가깝다보니 아리사등은 결국 신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구야국이 멸망한지 6년후인 538년에 신라에 투항하며 탁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작 가야와 신라 관계가 악화된 원인이 아리사등에게 있었고 그가 당시 반신라를 주도했던 것을 보면 그 스노우볼이 계속 굴러가면서 탁순국이 계속 더 큰 위기에 빠지고 말년에 결국 신라에 항복해버린 것이 아이러니하다. 일본서기 여러 부분에서 등장하는 아리사등이라는 인물의 행동은 일관성이 없다. 반신라를 하다가도 자기가 위기에 빠지자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는가 하면, 일본에 요청해서 오우미노 케나노오미를 불러온 것이 그 자신인데 정작 불러온 케나노오미를 쫓아내려고 하는 것도 아리사등이다. 정세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그때 그때 닥친 위험만 겨우 돌려막기 하고, 결국 그걸 감당하지 못해 신라에 빠른 GG를 치고 남은 가야 세력들이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가야의 그나마 구심점이던 대가야를 몰락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가야의 완전 멸망까지 이어지는 6세기 전반 가야사의 X맨 같은 인물이 아리사등이었던 것이다.


3. 멸망 후[편집]


백제 성왕은 탁순국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지만 않았어도 탁기탄과 탁순국이 멸망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즉 신라가 낙동강 서쪽 그 지역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일본서기 544년의 기록에서 성왕이 520년대 정세를 회고하며 아쉬워하는 부분에서 등장.

한편 탁순국이 멸망한 후 아리사등은 일본 측 기록에서 히노아시키타노 아리사등(火葦北 阿利斯登) 혹은 오사카베노유게이 아리사등(刑部靫部 阿利斯登)으로 일본식 우지(氏)를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어쩌면 왜국에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국 귀순이 사실이라면 신라에 항복해 나라를 바쳐놓고 자신은 왜국에 또 귀순했다는 건데 안 그래도 갈팡질팡 혼란스러운 이 인간의 일생이 더욱 복잡해진다.

다만 아리사등은 일본서기 기록상 결국 나라를 신라에 바쳐서 백제와 왜국에게 비난을 받았고 그것이 일본 측 역사서에 남았다. 즉 최종적으로 왜국에서 용서를 받지 못했다. 즉 왜국에 귀순까지 하진 않았고 그 전에 왜국에 지원군 좀 보내달라고 빌던 시절에 명목상 받아둔 우지일 수도 있다.

탁순국 땅은 신라에 편입되어 굴자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고쳤는데 이때 범위가 칠제현[5], 합포현[6], 웅신현[7]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근거로 탁순국이 단순한 소국이 아닌 넓은 영토를 가졌다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탁순국이 협조적으로 신라에 투항했기에 탁순국 당시 영토보다 넓은 지역을 배정 받았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기에 아직 확실한 영토는 아직 알수가 없다.


4. 가족 관계[편집]


일본서기》에는 아들 "일라(日羅)"의 존재도 기록하고 있다.

아리사등을 마지막으로 탁순국이 멸망했기에 일라는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고, 탁순국 멸망 후 백제에서 벼슬을 받아서 달솔(達率)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정작 아버지 아리사등은 일본서기 기록상 결국 나라를 신라에 바쳐서 백제와 왜국의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모순적인데, 훗날 마의태자처럼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았던 듯 하다.


5. 관련 연구[편집]


백승옥, 『日本書紀』에 보이는 阿羅斯等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2014[8]
장인성, 가야 阿利斯等의 외교와 행적, 백제학보, 2015
정재윤, 阿利斯等 日羅를 통해본 6세기 한일 관계, 백제학보, 2015
백승충, ‘阿利斯等’ 사료의 기초적 검토, 지역과 역사, 2018
위가야,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의 정세와 ‘안라국제회의’, 역사와 현실, 2020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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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기록에서는 왕(법흥왕)이 아니라 고위 귀족이찬 비조부(혹은 비지배)의 딸(혹은 여동생)으로 나온다. 물론 이찬이라는 직책은 왕족인 성골, 진골만이 오를수 있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골품 상으로 비조부는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 기능말다간기의 정체에 대해서는 대가야 이뇌왕설, 금관국 구형왕설도 있다.[3]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지역으로 추정.[4]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포덕산성(飽德山城).[5]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6]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7]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8] 해당 연구에선 아리사등을 안라국의 국왕으로 비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