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미노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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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등장배경
3. 활약상(?)
4. 트롤링의 나비효과: 낙동강 라인의 붕괴
5. 관련항목


近江毛野 (おうみのけな: ??? - 530년)


1. 개요[편집]


고훈 시대 일본의 지방 호족이다. 일본서기 케이타이 24년조 기사를 근거로 이름의 독음을 케나라고 유추하지만, 케노라고도 읽는다. 출신 가문은 오우미노오미(近江臣)씨로 카바네를 오미(臣)로 쓰는 오우미국(近江國)의 호족이며, 타케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의 후예 하타씨(波多氏)의 지파라고 한다.


2. 등장배경[편집]


6세기 들어서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 신라가야 일대로 확장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황산강(낙동강) 중류의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큰 세력을 갖고 있었던[1] 대가야(경북 고령) 이뇌왕과의 결혼동맹 (522년)이었는데, 신라가 대가야를 교두보로 삼아 황산강 서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경계한 탁순(경남 창원)과 안라(경남 함안) 등 황산강 하류의 가야 세력권이 신라-대가야의 결혼동맹에 반대했다.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던 건지, 신라와 대가라의 결혼동맹이 525년, 527년 등 여러차례 결렬의 위기를 맞게 되자[2] 신라의 법흥왕은 결혼동맹을 통한 평화적(?) 확장노선을 포기하고 경남 동부 일대로 대대적 공세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이미 탁기탄[3]남가라 등이 신라의 부용국 수준으로 전락한 듯 하다.[4]

케이타이 21년 (527년) 기사에 따르면, 이러한 신라의 대공세에 위기를 느낀 안라국이 왜국(야마토 정권)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신라로부터 경남 동부 일대의 세력권을 되찾아오도록 임라 혹은 안라에 파견되었다는 인물이 이 문서의 주인공인 오우미노케나다.


3. 활약상(?)[편집]


하지만 오우미노케나가 이끄는 원정임무는 순탄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백제-가야-야마토의 동맹에 맞서서 신라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츠쿠시노키미 이와이(筑紫君磐井)가 원정대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이와이의 난, 527년-528년).[5] 이와이가 세력을 가지고 있던 츠쿠시노쿠니(筑紫國)는 치쿠젠(筑前)/치쿠고(筑後) 지방의 원형으로 오늘날의 큐슈 동북부 후쿠오카현 일대를 의미하는데, 츠쿠시쪽에서 자신의 세력권나오바리인 하카타 항구 일대를 막아버리자 가야 캠페인 자체가 출구도 없이 올스톱 됐다고 볼 수 있다.[6]

오우미노케나가 데려온 원정군으로는 해협을 뚫지 못했고, 전쟁의 규모도 길막 헤프닝을 넘어서서 츠쿠시 정권(친신라 큐슈 세력권)과 야마토 정권(친백제 칸사이 세력권)이 일본 열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벌인 사생결단 수준으로 번져나가게 된다.[7] 가야로 향하는 뱃길은 이듬해 528년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8]에 의해 츠쿠시노쿠니가 완전히 평정되고 나서야 열렸고, 다시 이듬해인 529년[9]이 되어서야 오우미노케나는 안라국으로 상륙하는데 성공, 신라와 교섭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우미노케나가 안라(혹은 안라의 친구(?)였던 탁순국)에 머물던 시절, 츠쿠시를 뚫고 오느라 사병과 군량의 손실이 너무 커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건지 오만방자한 짓거리를 자행해 현지 가야인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예를 들면 왜인과 가야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친자확인 소송(認知訴訟)의 판관을 맡았을 때, 일본서기 초반부에 종종 나오는 끓는물 테스트[10]로 가야인 키비노카라코나타리(吉備韓子那多利)[11]와 시후리(斯布利)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오우미노케나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가야인들은 왜국에다가 얘 좀 데려가라고 요청하고, 야마토 정권 측에서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귀국을 명하지만 오우미노케나는 슬기로운 갑질생활가야 생활이 달달했던건지 소환명령을 뭉개고 가야 땅에 눌러 앉아 계속 횡포를 부렸다고 한다. 오우미노케나가 자기네 나라 소환장도 못본채 하자, 탁순국의 왕 아리사등은 백제[12]와 신라[13]에 각각 사신을 보내 스틸웨루노오미 조지프오우미노케나를 쫓아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백제의 성왕은 탁순국의 요청을 좋은 핑계로 본 건지 출병해서 오우미노케나를 공격해 내쫓은 뒤, 그가 머물던 거성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칠원 일대로 추정)을 쌓아 탁순국을 반쯤 부용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개선길에 가야의 성 다섯개를 더 빼앗은 것은 덤이다.

한편 신라는 오우미노케나와 경남 동부를 둘러싼 외교 협상이 꼬여가던 중이었다. 신라 쪽에서 사신으로 거칠부를 보냈지만, 오우미노케나 쪽에서 거칠부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등 생떼를 부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참고로 이때 오우미노케나가 급이 낮다고 불평하던 거칠부는, 왕비와 각간[14]을 배출하던 근본집안 미사흔-박제상 연합가문의 (차기)수장이었고 신라 왕가의 기준으로 봐도 내물왕의 5세손이었다.트롤도 이런 트롤이 없어요 상대측 어거지에 협상 의욕을 잃고 교섭의 결과물도 지지부진하던 차에, 마침 탁순국에서 구원병 요청이 오자 좋은 핑계로 본 건지 신라는 비둘기파에서 매파로 태도를 돌변, 거칠부의 신분이 불만이시라니 대신해서 감투 낭낭하게 올려서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슬라 군주 이사부를 파견해서 탁순국 웅천(熊川)[15]에서 케나의 군대를 격퇴해 일본 열도로 쫓아버리고[16], 개선길에 황산강 하구에서 가야 4개국을 추가로 점령했다.[17] 패퇴 후 왜국으로 돌아가던 오우미노케나는 쓰시마(對馬國)에서 병사하고, 사후에 고향으로 운구되어 묻혔다고 한다.


4. 트롤링의 나비효과: 낙동강 라인의 붕괴[편집]


6세기 들어서 신라는 비화가야를 완전히 신라화시키고 진작부터 소맥산맥 라인에 성을 쌓는 등[18] 낙동강 동안(東岸)과 상류지대의 패권을 차지한다. 이제 전성기에 막 들어가기 시작한 신라의 다음 타겟은 낙동강 서부의 가야 지방이었고, 신라가 공을 들인 첫 상대는 옛 친구에게 뺨을 두대 얻어 맞은 대가야[19]였지만, 신라의 도하(渡河) 전략을 경계한 탁순안라가 반신라-강경외교로 신라의 서진정책을 좌초시킨다. 게다가 이와이의 난에서 (친신라 계통이라 추측되는) 츠쿠시 정권이 (분류를 굳이 하자면, 명백히 친백제 파벌로 분류되는) 야마토 정권에게 패배하면서 바다 건너의 친신라 동맹국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우미노케나가 벌인 트롤링은 창원 탁순국(및 해당 지역의 맹주였던 안라국의 안전보장)에 치명상을 입혔고,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을 건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주게 된다. 백제와 신라로부터 공격을 연달아 받으며 만신창이가 된 탁순국은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하면서 겨우 살아남지만, 가야와 신라의 사이에서 방파제 역할을 하던 소국 탁기탄은 버티지 못하고 신라에 완전히 복속되고, 신라는 탁기탄을 발판으로 드디어! 강을 건너 낙동강 서안(西岸) 가야 일대로 진입한다.[20] 가야멸망의 진정한 시작점은 일반적으로 백제대가야의 섬진강 유역을 공격하면서 가야-백제 간 신뢰가 깨진 시기(512-513)를 기점으로 보지만, 오우미노케나의 도해(渡海), 이어지는 신라의 탁기탄 진출을 기점으로 굵직한 가야 제국(諸國)들이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안라회의로부터[21] 3년이 지나지 않아 왕년의 보스였던 금관 가야(532년)는 안보적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22] 신라에 귀부한다. 다시 6년 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던 탁순국(538년)[23]이 차례로 신라에 항복하면서 신라는 순식간에 경남 동부를 손에 넣게 된다. 신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대단히 놀라운 속도였는데, 공들였던 대가야와의 결혼외교도 파탄나고, 바다 건너의 친구였던 츠쿠시마저 잃어버렸으며, 겨우 부용국 수준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경남 동부의 소국들에 대해서도 더 깊은 개입을 저지당하고 웬 무례한 상대측 대표로부터 의전이 안맞는다는 둥 생트집까지 들어가며 (휴전)협상 테이블에 강제로 붙잡혀 있던게 불과 10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에도 안라국은 낙동강의 패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로 기회가 2년만에 찾아왔다. 탁순국이 신라로 넘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540년 7월, 악몽같던 법흥왕이 사망하고 7세의 삼맥종이 소년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왕위 계승권이 없었던 지소태후가 섭정으로 정권을 잡자 선덕여왕 시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신라 정계가 일시적인 혼란에 빠졌고, 당연하게도 신라의 대(對)가야 공세도 한풀 꺾일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가야의 동맹은 유능한 군주 명왕이었기 때문에, (아라)가야 입장에서는 신라로부터의 안보 불안을 해소할 골든 타임이라고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가야-백제-왜 동맹은 가야의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지만[24], 가야의 기대와는 달리 신라와 마찬가지로 호시탐탐 가야를 노리고 있던 백제가 주도하는 두 차례의 사비회의(541.4; 544.11)를 기점으로 가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패권 전략은 산산조각이 나고, 서로를 향한 불신과 동맹의 균열만 더 깊어지게 되었다.[25] 불신 속에서 백제를 중심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가야-백제-왜의 동맹은, 가야 잡는 귀신 이사부의 실각과 철부지 소년왕의 친정(정권 교체)을 기회로 보고[26] 554년,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신라를 공격하지만, 백제에게 이용 당한 보람도 없이 오히려 동맹이 치명상을 입으며 백제 쪽에 줄 섰던 가야 제국(諸國)들은 외교적 버팀목마저 잃어버리게 된다.[27] 관산성 전투 직후 소가야[28]를 시작으로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사이기국, 산반하국, 임례국[29], 자타국[30], 걸손국[31], 졸마국[32], 거열국[33], 아라가야[34], 다라국[35] 등이 차례차례 잡혀먹히고, 낙동강 중류의 대가라(경북 고령)도 진흥왕 그리고 돌아온 저승사자 이사부의 562년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면서 신라가 영남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5. 관련항목[편집]


[1] 과거형인 이유는, 한때 대가야의 동맹(?)이었던 백제의 512년, 513년 침공으로, 섬진강 유역을 상실한 상태였다.[2] 가야 일대가 망하는 과정말 그대로혼돈, 파괴, 망각으로 점철되어 있어 기년이 들쭉날쭉하다. 아래의 기년들도 왔다갔다 하는 점을 주의.[3] 가야와 신라 사이에 있던 소국. 창녕설, 김해 북부설, 창원설 등이 있다.[4] 창녕의 비화가야를 포함해서, 법흥왕 이전(?) 시절부터 이미 신라와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들은, 공교롭게도 훗날 9주 5소경에서 가야 지방을 나눌 때, 강주(전통적인 가야 지역)가 아닌 양주(전통적인 신라 지역)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이 시기까지는 금관가야가 독립세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혼돈 그 자체[5] 그 시대의 지방 호족들을 모두 야마토 정권에서 파견한 관료(…) 비슷한 걸로 보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큐슈 북부에서 세력권을 갖고 있던 호족 이와이는 오우미의케나가 당도하자 "한 때 한솥밥을 먹던 입사입궐 동기가 이제와서 나에게 갑질을 하는가?"라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 처럼 적혀있다. 물론 그 시대에 야마토 정권의 행정력이 큐슈까지 뻗었을 개연성은 부족하고, 이와이는 큐슈 북부 일대에서 야마토 정권과는 별개로 세력을 갖던 독자정권으로 추측된다.[6] 이 시기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해 연안항해가 중심이었고, 이키 섬, 대마도를 찍고 가야로 건너가려면 츠쿠시 소유의 항구를 반드시 이용해야 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7] 당시 한반도와 대륙으로 나가는 가장 중요한 항로/항구의 지배권(=일본의 해상무역권)을 둔 전투였기 때문.[8] 일본계 백제인인 물부순(勿部珣)이 이 모노노베씨(物部氏) 일족인 것으로 추정된다.[9] 일본 위키피디아 기준 기년[10] 정식 명칭 중 하나는 盟神探湯(くかたち)라고 한다. 신에게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한 뒤, 끓는 물에 손을 넣었다 빼서 화상을 입으면 유죄, 화상을 입지 않으면 무죄라는 식의 종교재판이다. 무죄인 사람은 신들의 은총을 받아 화상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이거 완전 마녀사냥 아닌가 인교 천황 4년 (441년?) 9월조 기사에 따르면, 나라 분지의 숱한 호족들이 항복해오면서 야마토 정권의 관료로 편입될 때, 모두가 입을 모아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손을 자청하자, 족보로 사기를 친 거짓말쟁이를 찾기 위해 끓는물 테스트를 한 전례가 있다.[11] 키비지방의 호족 가문(吉備)과, 가야인 사이에서 태어난 한일혼혈(韓子). 나타리는 이름으로 추정된다.[12] 사신의 이름은 노수구리.[13] 사신의 이름은 구례사기모.[14] 신라 17관제상 1위다.[15] 경남 진해로 추정[16] 혹은, 타타라에서 이사부가 3천의 병력으로 무력시위를 벌이자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다고도 한다.[17] 일본서기에서는 그 4국의 호칭이 두 종류로 나오는데, 나열하자면 1) 소나라(金官:そなら)/수나라(須那羅:すなら); 2) 헤호츠(背伐:へほつ)/호치(費智:ほち); 3) 와다(委陀:わだ)/와타(和多:わた); 4) 아타(安多: あた)/타타라(多多羅:たたら)의 4국이라고 한다. 4국 중 소나라/수나라는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탁기탄이 이때 멸망해 신라로 편입되었다고도 한다.[18] 이건 심지어 5세기 후반의 일이다.[19] 6세기 초 섬진강 지대의 상실[20] 낙동강 한번 건너보겠다고 대가야랑 결혼을 하네마네 이혼을 하네마네 하면서 신라가 벌인 생쑈를 생각해보자.[21] 혹은 이사부의 금관국 공격과 탁기탄 멸망으로부터[22] 탁기탄을 김해시 진영 일대라고 가정하면, 김해의 금관 가야의 대문앞까지 신라군이 들어온 셈이다.[23] 북쪽에는 탁기탄, 동쪽에는 금관국이 신라로부터 탁순국을 지켜주고 있었는데, 둘 다 신라로 넘어가버리면서 북문과 동문 방어선이 뻥 뚫려버리는 안보적 위기가 찾아온 셈이다. 백제 형님들은 멀고, 신라의 주먹은 가까워서 백제와의 부용국 계약이고 나발이고 신라 쪽에 붙을 수 밖에 없었다.[24] 실제로 1차 사비회의에서 가야측 주장의 핵심은 신라의 경남 동부 점령 및 여기에서 이어지는 안보불안이었다. 그만큼 경남 동부의 상실이 뼈아팠던 것.[25] 가야-백제-왜 동맹이 골든 타임을 놓치고 있던 사이에, 예상보다 훨씬 유능했던 지소태후는 541년 당해에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국방을 안정화시키고, 545년 거칠부에게 역사서 편찬을 지시하는 등 차근차근히 정권을 안정화시키고 국가의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26] 사실 한강 16군의 전투(551-553) 때 이미 낌새가 보이긴 했지만, 554년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 청년이 신라 역사상 가장 패도(覇道)에 가까운 길을 걷게 될 왕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27] 반대로 이른 시기에 신라 쪽에 줄 섰던 금관 가야의 김해 김씨 가문은 신라라고 하는 든든한 외교적 버팀목을 얻게 된다. 그리고 금관 가야 왕실 출신의 김무력관산성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다는 점도 가야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러니한 점이다. 단, 가야 소국들은 다들 따로 노는 경향이 있어서, 가야의 입장이라는 일원적 의견은 존재하지 않을지도.[28] 남해 진주만 일대부터 고성 일대까지. 554년 12월 멸망으로 추정.[29] 경남 의령으로 추정. 아라가야의 세력권이었다.[30] 경남 진주시로 추정.[31] 경남 산청으로 추정.[32] 산청, 함양 등 지리산 일대로 추정[33] 거창으로 추정. 대가야의 세력권이자 우륵의 고향이었다고 한다.[34] 낙동강 서안 경남 함안 일대[35] 경남 합천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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