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군 (r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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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사 용어
3. 해악
4. 형성
5. 부류
6. 역사 속의 암군
6.1. 한국사
6.2. 동양사
6.3. 서·남아시아사
6.4. 서양사
6.5. 아프리카사
7. 가상의 암군
7.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暗君.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일컫는 단어다.


2. 유사 용어[편집]


혼군(昏君), 암주(暗主)와 동의어고, 사전에선 암군과 암주의 뜻을 「=혼군」이라고만 적기도 한다. '혼군'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폭군과 암군은 교집합 관계로 보는 게 합당하다. 폭군은 국가 정비 및 왕권 강화 등을 이유로 신하와 백성들을 폭압적으로 대한 경우지만, 그러면서도 정치 자체는 잘 하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이반 4세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암군은 절망적일만큼 정치에 대해 무능해서 국가 막장 테크를 초래하는 행동 자체가 필수 요건이다.

때로는 암군이 폭군보다 나을 수도 있는데, 아랫사람이 유능한 경우 그럭저럭 나라를 유지할 수는 있어서이다. 예를 들어 제갈량 시절의 유선이 있다.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군주 본인은 어리석지만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온화하고 인자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솝 우화의 '왕을 원한 개구리들'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여기서 '암군'은 통나무, '폭군'은 천적인 두루미다.


3. 해악[편집]


보통 무능하거나 어리석거나 삽질을 저질러 막장을 초래한다. 군주의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암군의 치세에는 나라가 망하거나, 망하기 직전이 된다. 반대로 능력은 부족하면서 쓸데없이 부지런해서 사단을 벌이는 왕도 암군에 속한다. 왕조가 쇠퇴기에 접어드는 시기의 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전임자가 잘나거나 나라가 튼튼하면 대충 버티므로 여기에 포함시키지는 않는 편. 중국의 사서나 역사소설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야이 혼군아!"라고 욕하기 시작하면 갈 데까지 간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정시대에 왕에게 욕을 한 신하는 보통 끔살당한다.

"명군 같은 암군이 더 위험하다."[1]란 말도 있다. 암군 재위 기간동안 국가적 모순이나 위기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누적된 문제가 재위 말년이나, 사후가 되어서야 거대한 위협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막상 눈에 띄어 해결하려고 해도 어지간한 능력자도 걷잡을 수 없게 된다.


4. 형성[편집]


세습제의 군주가 유능할지 무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투표로 가려 뽑은 대통령, 총리, 국회의원들도 무능한 자들이 있는 마당에, 가만히 있어도 핏줄 잘 타고난 대가로 거저 먹는 왕이란 게 한 나라의 역사에서 항상 유능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당연히 당대에도 이런 점을 감안해서 어린 시절부터 각종 정치, 역사, 인문학에 인성 교육까지 빡세게 시키면서 능력을 키웠다. 조선 왕조에선 '경연'이라고 해서 왕이 신하한테 꾸준히 재교육을 받았을 정도이다. 경연에서 오히려 신하들한테 재교육을 시킨 먼치킨들[2]도 있긴 하지만 그런 분들은 이 항목과는 거리가 머니 넘어가자. 이렇게 교육시켜서 최대한 왕의 능력을 키워서 능력에 책임감까지 갖추게 하려고 왕실과 신하들까지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해도 왕의 자질이란 것은 어떻게 보면 로또인 데다가 교육으로 능력은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어도 인성이나 책임감은 어떻게 안 된다.[3] 궁전에서 차기 후계자로 태어나 곱게 자라난 왕조의 첫 번째 군주인 콤모두스연산군이 교과서적인 폭군이 되었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4]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오냐오냐 해주면서 컸는데, 제아무리 세뇌에 가깝게 인성 교육을 시켜도 기본적으로 그냥 눈앞에 떡하니 있는 엄청난 권력을 자제시키면서 그에 따라오는 책임을 그냥 순순히 따르게 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현대에서도 재벌 2세나 3세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조그마한 완장만 차도 거들먹거리고 일은 대충 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하물며 국가 지존의 자리인 왕이 되면 어떻겠는가?

그렇기에 어느 국가라도 왕정을 거쳤다면 거의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암군이 나타난다. 이는 후계자의 능력을 담보할 수 없는 왕정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근친상간이 성행한 유럽 왕실의 경우에는 왕으로서의 능력 정도가 아니라 카를로스 2세처럼 아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장애를 가진 국왕도 가끔 즉위했다.

암군의 원인에는 노쇠도 있다. 보통 명군이었던 이도 말년이 되면서 매너리즘레임덕 등으로 암군의 진가를 드러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로 루이 14세양귀비에게 빠져 그간의 업적을 다 말아먹은 당현종, 청나라의 건륭제 등이 있다. 물론 시대적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명군에서 출발해 암군으로 끝을 맺은 대표적 사례들.

제대로 된 왕이 당대에는 암군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암군 또한 의외로 자질 자체는 명군 못지않은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비정상적인 왕권 강화로 일시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되나, 제도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 않고 본인의 권력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점이다. 결국 그런 암군이 죽고 나면 구속력을 잃은 권력이 대체로 귀족이나 주변 왕족, 제후들에게로 넘어가버린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후반의 천황들은 조오코(상황, 上皇)와 인세이 같은 비정상적 제도[5]로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권한만 후지와라 가문을 거쳐 무사들에게 넘어가 버려 명목상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은 무리한 왕권강화가 나중에 거대한 후폭풍으로 돌아와 나라를 뒤흔드는 사례는 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이 문제는 심지어 세도정치의 전횡에 부분적인 책임이 있는 조선 정조 등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다. 보통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는 왕권의 강화가 개혁으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이전보다 강화시켜놓은 왕권을 물려받은 후계자가 혼군이어서 총신들, 친인척들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대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예상보다는 빨리 죽은 경우가 다수인지라 "암군"이라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느정도는 후계자의 능력에 의해서도 선왕의 암군 여부가 결정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는, 암군이 사후적 평가에 의해서만 좌우된다는 뜻은 아니다. 후계자 교육 또한 중요한 정치가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권력을 소유하고, 선정을 펼 기회가 주어졌는가도 중요한 전제요소이다. 암군이라고 평가되는 인물들은 충분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으면서도 그 권력을 국가 발전을 위해 쓰지 않은 자들인데, 그래서 강한 신권이나 대리청정으로 인해 사실상 장식이나 꼭두각시에 가까운 인물[6]들은 보통 암군으로 여기진 않는다.

암군의 옆엔 항상 간신들이 붙어다니기 마련이다. 당 현종 말년의 이림보, 양국충, 안록산, 인조김자점 등이 있다. 다만 고려의 암군들은 간신보다는 자신의 이상이 좌절되는 스트레스로 인한 경우가 많았는데 거듭되는 반란으로 지친 인종, 문벌귀족에게 좌절한 이후 술독에 빠진 의종과 무너져가는 나라를 되살려보려 노력했지만 평생의 반려 이자 강력한 후원자인 노국공주가 사망하면서 실의에 빠져 결국 신돈에게 정국을 맡긴 공민왕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체로 이러한 암군들의 경우는 초기에는 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사를 멀리해 변해버린 왕들이 다수. 대체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암군들은 생각보다 흔했으며, 결국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암군이 되지 않는 방법 중 하나였다.

신라혜공왕 같이 단순히 실권이 없었던 군주를 암군이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이런 논리대로면 고구려보장왕, 고려 후기의 임금들, 조선정종, 단종, 순조, 헌종, 철종, 순종 등도 죄다 암군이다. 물론 통념을 따르자면 그들에게서도 모든 책임이 없다라고 말할 순 없다. 어쨌든 그들은 왕정국가에서 국가의 톱인 왕이었지 않은가? 실권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게 면책되지는 않는다는 견해다. 단지, 여기서 정의한 타입의 '암군'이 아닐 뿐이다. 아비뇽 유수 시절의 교황들도 실권 없기로는 다 마찬가지다. 다만, 정종과 나이 어렸던 단종 이외의 조선 국왕들은 결코 실권이 없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애당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부터가 철저히 왕권에 기생한 것이었고 왕위의 향배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것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정권 교체라든지 고종 즉위 이후 안동 김씨가 별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권력을 내놓은 것이 그 반증. 사실 그 시기 국왕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면 세도정치고 뭐고 바로 청산할 수도 있었을 만큼 조선의 왕권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것이었다.

의외로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암군이 아닌 경우도 꽤 된다. 오히려 왕조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자들도 있으며,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마지막 군주가 명군, 더 나아가 성군으로 평가받는 극단적인 케이스도 있다.[7] 예를 들어 후한헌제는 아예 실권이 없어 나라를 망치건 뭐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실권을 되찾기 위해 조조 암살을 계획하는 등 최후의 발악이나마 했다. 명나라숭정제원숭환 처형 같은 실책도 있으나 쇠퇴해가는 명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황제였다. 그가 마지막 황제가 된 것도 후계 가운데 총명했기 때문이다. 신라경순왕 역시 주적 후백제에는 있는대로 저항했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고려에 항복해 신라 국민 및 귀족을 지켰다는 평을 받으며, 고려공양왕도 고려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분석이 많다. 심지어 선정을 펼친 성군이었던 페드루 2세는 노예 해방에 대한 대지주의 불만으로 퇴위당했고 이후 왕정이 폐지되었는데, 쿠데타를 벌인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좀 더 포괄적으로 보자면 정상적인 계승이 힘들어 구원투수 형식으로 방계의 비교적 유능한 인물들이 왕위에 올랐고, 가능한 한 최후의 발악이라도 했지만 이미 대세를 뒤엎을 수 없던 상태였다. 왕은 아니지만[8]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재능은 있는데 실권이 없어 막부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고생했다. 심지어 브라질의 마지막 황제인 페드루 2세는 퇴위하는 날까지 국민들 사이에서 성군으로 칭송받았고,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군주인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아프간에서는 국부로 칭송 받는다. 다만 이러한 경우 거의 무조건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높은 확률로 전대나 전전대 임금이 암군이다.[9]

통념은 암군이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재평가 시도가 나타나는 암군들도 적지 않다. "실은 유능했는데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이 가해졌다."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식 평가나 "결과는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다."는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평가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루이 16세, 일본도쿠가와 츠나요시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역사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키배가 벌어지는 현상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마저도 쉴드가 안 된다면 '그래도 성격은 좋다.'라는 동정론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능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심지어 송양공, 건문제처럼 도를 넘은 선함으로 적에게까지 자비를 베풀다가 망해버린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에는 그 착한 인성도 무능함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이는 현대의 재해석만이 아니라 전근대에도 제왕학을 연구하면서 지적하던 부분이며, 송양공의 행적을 가리켜 송양지인이란 말이 나오는게 그 때문이다. 해당 군주 입장에선 그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이 사치를 즐긴 군주'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던[10] 과거에 비하면 '성격은 착했지만 무능한 게 문제였던 군주'라는 평가가 차라리 덜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5. 부류[편집]


크게 보자면 두가지 부류가 있다. 아예 나라를 운영하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은 충분하고 의욕적인데 능력이 못 따라오는 경우. 전자의 암군들은 주로 노는 일이나 취미생활에 전념하면서 국정은 신하들에 떠넘기는 등 아예 국정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추구하려던 일이나 업적이랄 게 아예 없다. 반면 후자의 암군들은 무언가 의욕적으로 국정을 하려고는 하는데 군주 자신의 능력 부족, 혹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삽질이 되거나 망하는 결과가 나와 암군이라고 불리게 된다.

가끔 이 두가지 경우가 합쳐진 최악(...)이 역사에 나타나기도 한다. 단순히 놀고먹는걸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황음무도하여 매우 열심히(?) 노느라 국력이 크게 소모되는데, 정작 통치 자체도 열심히 하기만 하지 실정의 연속인지라 국력이 더욱 소모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수양제를 들 수 있다.


6. 역사 속의 암군[편집]


  • 검증된 사람만 추가한다.
  • 실권이 없는 바지사장이거나 입헌군주제 하의 군주인 경우는 제외한다. 단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태국, 모로코, 리히텐슈타인 등의 군주는 예외로 간주한다.
  • 공화정 체제의 지도자들도 당연히 제외한다. 단 쇼군 등 일본 무사정권 지도자들이나 북한의 독재자들, 왕은 없지만 섭정 신분으로 독재를 저지른 인물은 특별히 예외로 간주한다.
  • ★: 폭군으로도 평가를 받는 경우
  • ◆: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A]
  • ◇: 육체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A]
  • ▲: 시해당한 경우
  • △: 폐위된 경우
  • ◎: 역사 왜곡, 관점 차이 등의 논란이 있어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암군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 논란이 있는 경우 관점에 따라 충분히 명군이라고 볼 수가 있다.
  • 볼드체: 해당 국가의 멸망 혹은 뢰복 불가능한 쇠락에 결정적인 영향이 있는 경우


6.1. 한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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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삼국시대[편집]


  • 고구려
    • 모본왕(48 ~ 53)★▲◎ : 역사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 차대왕(146 ~ 165)★▲
    • 봉상왕(292 ~ 300)★△
    • 고국원왕(331 ~ 371)▲ : 고국원왕 치세동안 고구려는 별의별 난리를 다 겪었으며 심지어 고국원왕 본인은 친정 중 전사했다. 물론 그 당시 적국이었던 백제는 근초고왕이 통치하는 최전성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고국원왕의 치세는 연달아 고구려에 부담을 안겼다.
    • 문자명왕(491 ~ 519)◎ : 선대의 전성기는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모순점을 많이 남겼다. 일단은 나라가 대놓고 기울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 표시를 추가.
    • 안원왕(531 ~ 545)◎ : 사실 기록상으로 실정을 벌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도량이 넓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평가가 있을 정도. 그런 것처럼 재위 중반까진 그냥 평범히 보냈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직접 친정했다가 백제에게 역관광을 허용, 말 그대로 개발살나기도 했고 말년에는 추군과 세군 측의 왕위 계승 다툼에 휘말려 결국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막을 힘도 없었는지 궁궐 문을 잠군 채 방관하기만 했다고... 물론, 상술했듯이 문자명왕 때에도 고구려는 쇠퇴할 기미가 보였는지라 안원왕 한 명만의 실책은 아니다.
    • 양원왕(545 ~ 559)◎ : 이 쪽도 선대의 실책을 떠안은 것에 가깝다.
    • 영류왕(618~642)◎▲ : 지나친 친당정책으로 내부의 불만을 초래하였으며 본인도 죽임을 당한다. 이후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체제가 되고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이 곧바로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명장이었고 마냥 폭군은 아니었기에 ◎표를 추가한다.
  • 백제
    • 진사왕(385 ~ 392)▲
    • 아신왕(392 ~ 405) : 적어도 보통 수준 그 이상 되는 임금이었지만, 너무나도 아집과 독선이 심했고, 더군다나 상대는 그 광개토대왕이었으니 더 큰 문제였다. 결국 고구려에게 매번 발렸으며, 최후조차 전쟁에 휘말려 시해되었다고 추정될 정도로 안습하다.
    • 개로왕(455 ~ 475)◎ : 도림과의 바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와 도미 부부 설화로 암군이란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고, 그의 치세에 백제가 한성을 잃고 남쪽으로 패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 치세라 상술한 아신왕처럼 상대가 너무 강했다는 쉴드도 한 몫 했다.
    • 말년의 동성왕(479 ~ 501)▲
    • 말년의 의자왕(641 ~ 660)◎△ : 다만, 최종 승자인 신라 측의 조작이 아니냐는 의견도 꽤 있는 편. 하지만 무왕 때까지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것을 끊어낸 말년의 외교 판단으로 대당관계를 파탄내서 당과 신라의 양면 협공을 초래했다는 점은 명백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있긴 하지만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앉히는 등의 무리한 왕권 강화 노력 때문에 백제 귀족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결국 예식진 같은 매국노에게 붙잡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을 강요당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 신라
    • 진지왕(576 ~ 579)△◎ : 방탕한 짓을 일삼다가 폐위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귀족과의 갈등 끝에 폐위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6.1.2. 남북국/후삼국시대[편집]


  • 통일신라
    • 혜공왕(765∼780)▲◎: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그로 인한 왕권 약화로 인해 국정에 손을 놓은 조선 순조와 비슷한 임금이었다. 대신 한국 역사상 왕족들의 권한이 가장 컸던 나라가 신라였고, 이후 왕족들이 계속해서 사직을 어지럽히는 반란을 수 없이 일으켰으며, 왕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는 비판이 삼국사기나 동국통감에 나왔다는 점에서 보면 왕족들도 혜공왕의 문제를 가볍게 뛰어넘었다는 관점과 문무왕의 정치를 본받아서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을 보면 암군이라고 분류하기엔 억울한 면이 있다.
    • 헌덕왕(809 ~ 826) : 사실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답이 없는 암군이다. 개혁을 실시하려던 조카 애장왕을 시해한 후 찬탈했지만,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등 가뜩이나 망가져 가던 나라를 본인의 실정으로 더 망가뜨려가기만 하였고, 게다가 기근이 발생하고 도적 떼가 창궐하고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등의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재난이 있었지만, 왕 본인은 뭐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했다.
    • 진성여왕(887 ~ 897)◎ : 매체에서의 언급 탓에 암군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기록만 가지고 암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편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실책을 떠넘겼다는 평가 역시 공존하는 중. 더군다나 이 무렵의 신라는 진성여왕 즉위 전부터 답이 없어진 나라였는지라... 다만, 농민들이 각지에서 못 살겠다며 난을 일으키는 혼란기였음에도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해 혼란상을 나 몰라라 하고 방치만 한 점은 명백히 쉴드 여지가 적은 편이다.
    • 효공왕(897 ~ 912) : 효공왕도 따지고 보면 선대의 실책을 떠안은 것에 가깝다. 그리고 본인 역시 정통성 면에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어 실권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편.
    • 경애왕(924 ~ 927)▲◎ : 과거에는 한국사 대표 암군 중 한 명이라는 악평을 들어야 했지만, 제사 장소인 포석정에서 이나 마시며 놀고먹다가 후백제군에게 잡혀 견훤에 의해 억지로 자살했다는 부분은 왜곡이라는 견해가 많으며, 실상은 계절 문제로 간절히 제사를 지내다가 정보 부족으로 습격에 당한 것이었다던가, 고려와 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신라군을 원군으로 파견해 돕고 거란과도 커넥션을 만드는 등, 후백제샌드백이나 마찬가지였던 전대 암군들에 비해 나름대로 능동적인 시도를 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부분에서 비운의 왕 정도로 보는 재평가 의견도 꽤 많은 편.
  • 발해
    • 폐왕(793 ~ 793)△
    • 대현석(872 ~ 894?)◎: 사실 이 무렵의 발해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상태라서 마냥 암군으로 평하기는 어렵다.
    • 대인선(906?~926)◎: 이 쪽도 마찬가지. 다만, 어느 정도 발해 멸망의 책임이 있다.
  • 후백제
    • 신검(935 ~ 936)▲△ : 다만, 이 쪽은 아버지 견훤의 무리한 후계자 선정[11]에 대해 반발하는 입장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신검은 견금강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 목이 짤릴 것이 너무 명확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적국인 고려에 귀순하는 것도 딱 삼국지 원담처럼 비참하게 죽을 확률이 100퍼이니 과장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생을 몰아내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이 그나마 신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후고구려
    • 말년의 궁예(901~918)★▲△ : 무리한 철원군으로의 천도, 관심법 같은 조악하고 엽기적인 방식의 왕권 강화 등등으로 인해 호족들의 불만을 샀고, 결국 태조쿠테타로 몰락하고 만다. 그렇지만 지금은 역사학계 내에서 재평가 논쟁이 있다. 대표적으로 승자 왕건을 위해서 기록 축소나 인물평이 깎아졌냐는 논란. 하지만 말년을 제외하면 암군이 아니었다는 증거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는 의자왕과는 달리, 궁예는 오히려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점점 불리한 쪽으로 향하고 있다.


6.1.3. 고려[편집]


  • 정종(945~949)◎: 처음부터 황제의 자리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북쪽 호족[12]들의 도움을 받아 왕규의 난을 계기로 사실상 왕규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하였다. 하지만 제위 내내 자신의 제위를 도운 왕식렴 세력에게 휘둘리다시피 했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시도한 서경 천도와 광군 양성은[13] 온갖 무리수가 난무한 탓에 왕권 강화는 커녕 민심 이반만 불러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4] 결국 제위 4년만에 동생에게 양위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며, 얼마 있지 않아 죽게 된다. 하지만 그가 죽는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기록이 있어 최종 승자인 동생 세력에 의해 기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15]

  • 목종(997~1010)◆◎ : 초창기에는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천추태후김치양이 서로 불륜을 저지른 것에 대해 결국 멘탈이 나가버린게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엉뚱하게도 남색에 빠져버리면서 결국 강조의 정변과 2차 여요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 의종(1146 ~ 1170)▲△ :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암군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임금. 그러나 의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더더욱 막장이었는지라, 의종 복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게 아이러니.[16]


  • 말년의 공민왕(1351 ~ 1374)▲◎: 노국대장공주 사후 그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임금은 결국 정사에 소홀해졌고, 결국 홍륜에 손에 시해당하게 된다. 다만 공민왕 말엽의 난행이 기록되어있는 고려사가 조선 왕조에서 편찬되었기에 어느 정도 폄하되어 있을 여지가 크며 난행도 과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 우왕(1374 ~ 1388)▲△◎ :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이인임에게 휘둘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온갖 기행들이 세세히 기록된 것을 보면 멀쩡한 임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폄하되기까지 했다는 것은 사실. 물론 요동 정벌 시도만큼은 빼도박도 못하는 병크다.


6.1.4. 조선 · 대한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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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조(1455 ~ 1468)★◎ : 세조가 처음으로 부정적인 면으로 재평가를 받을 때는 쿠데타와 별도로 왕으로서는 명군이었다는 긍정적인 평도 많았지만, 2010년대에 세조의 각종 취약점이 재조명되면서 암군이라는 평가가 꽤 늘었다. 물론 세조는 군사정권 시절에 받은 명군이라는 평에 어울리게 나름 긍정적인 업적도 여럿 남겼다지만, 그에 못지않게 부작용도 너무 컸다. 아버지이 가꿔놓은 국정 시스템을 말아먹는 한편 공신 우대정책을 펼쳐서 한명회를 비롯한 권신들을 만들어 냈고, 재위 말기에 그나마 구성군 등 신공신을 등용해 구공신에 대한 견제책으로 삼았지만 구공신 견제를 제대로 못한 실책이 있다.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 한창 미화될 때와 같은 찬양 수준의 호평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 그러나, 일단 긍정적인 업적이 있다는 점에서 ◎표를 추가한다. 호불의 군주로서 조선 선대 왕들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라질 뻔했던 수많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의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준 점,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하여 일반 백성이 부패한 수령을 고소할 수 있게 한 점,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점[17]은 치세와는 별도로 크게 평가받는다.

  • 연산군(1494 ~ 1506)★△ : 무오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폭군은 커녕 암군과도 동떨어진 군주였고, 무오사화 때 잠시 흔들리다가도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나름 진정되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2년간 저지른 패악이 그 원인과 그 이전 10년의 무난한 행적으로도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18] 갑자사화가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쉴드가 있지만 이게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종의 두 후궁은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 조선 시대의 율법으로는 부친의 후궁 역시 모친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명백한 패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록상으로도 이미 연산군은 즉위 혹은 그 이전부터 윤씨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갑자사화는 윤씨의 죽음을 빌미로 양신을 숙청하고 전제권력을 얻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물론 연산군은 전제권력을 거머쥘 정도로 능력과 책임감이 있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및 시스템을 모조리 거덜낸 다음 폐위되었다. 연산군 시대가 조선 시절 전체 중에 가장 왕권이 강한 시기였던 만큼, 이후에는 군약신강 기조가 이어지게 된다.[19]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인데다가 이후 중전이 된 정현왕후가 아들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위할 때도 모자란 데 없이 즉위하였다.

  • 선조(1567 ~ 1608)◎ : 능력 자체는 인사능력을 포함해서 조선의 역대 임금들 통틀어서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나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20]해서 대신들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특진시키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임진왜란 이외에는 의외로 꽤 뛰어난 임금의 면모를 생각보다 많이 보였던 것. 동의보감 편찬 명과 훗날 대동법의 모태가 되는 대공수미법을 시행하여 민생을 살피기도 했고, 붕당을 적절히 이용해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준수한 내치를 이끌었다. 그리고 여진족이 강세해지자 노토부락을 정벌하는 등 임란 이외에는 외치에서도 평타 이상은 쳐주고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포문을 연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장한 측면이 컸으며, 결정적으로 임진왜란의 활동은 전형적인 암군 그 자체이자 의심병 말기 환자의 행보라고 봐도 무방하다. 충무공을 내리고 원균을 앉히는 결단은 어떤 의미로 봐도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아들이랑 이순신이 잘 나가는 게 두려워서 끊임없이 견제를 놓은 찌질이 소인배였다. 참고로 광해군은 어차피 자기 아들이자 후사를 이을 인물이고[21], 이순신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등용해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는 것은 제 살 까먹기나 다름없는 한심한 짓이었다. 한 마디로 편협하고 옹졸한 인성을 가진 인물. 무엇보다도 임란이 터지자 바로 파천을 궁리했던 점도 크게 까이는 부분이다.[22] 물론 위에 나온 내용처럼 초, 중, 후반부의 업적이 탁월한 임금이라서 전쟁 이전(목릉성세, 인재발탁)이나 이후(중립외교, 국가재건)에나 선견지명에 가까울 정도로 각종 정책과 국가 비전을 쏟아낸 점에선 임진왜란의 찌질한 모습만 없었다면 성군에는 못 미쳐도 통치한정 명군은 될만한 의외의 인물이다. 하나의 정답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헷갈릴만한 공과가 양쪽 모두 엄청난 인물이지만, 연산군의 10년의 태평성대가 2년의 폭정을 덮을 수 없었듯이 기축옥사와 임란 7년 한정의 추태 때문에 실제의 업적과는 별도로 교육적으로 본받아선 안될 암군이라는 정도의 평이 어울린다.[23]

  • 광해군(1608 ~ 1623)★△◎ : 전형적인 암군 겸 폭군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갑작스레 긍정의 평이 나오는 군주들 중 한 명. 하지만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그려져 왔고, 사실은 연산군과 매우 유사한 암군이라는 평가가 가장 객관적이다. 연산군의 10년 태평성대처럼, 광해군도 신하들의 견제를 받을때는 그 신하들과 함께 태평성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잔소리하는 그 실무자들을 죽이면서 광해군이 본인만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자 열심히 국가를 말아먹고 폐출된 인물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광해군의 재평가는 일본인 학자[24]를 시작으로 정치적 의도를 위한 여론에 가깝다. 하지만 역사의 행적을 본다면, 광해군은 무익하고 잔인한 암군으로 긍정적인 총평을 내리기는 힘든 인물이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봐주는 한명기 교수 같은 측에서도 외치 측면에서는 폐위된 군주임에도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내정 측면에서는 가혹한 궁궐 공사로 재정파탄을 초래했다는 혹평을 듣고 있다. 이외에도 대동법 같은 산업 혹은 구휼정책에는 항상 시행 반대를 해왔으며, 간신 이이첨을 육성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뜻있는 신하들과 왕족들을 죽이는 정치 깡패로 사용하며 국가를 망가트리고, 그 간신들의 똥물에 본인도 자멸한 것을 보면 절대로 좋은 왕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럼에도, 2000년대부터 교과서에서는 광해군이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황당한 명목으로 미화되기 시작하더니, 대중의 이미지는 완전무결한 영웅급으로 실제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까지 미화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순신 등을 주제로 한 영화드라마가 성행하면서 전술한 선조의 의심병 말기 환자짓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면서 마치 사도세자의 비극과 같은 류로 광해군도 미쳤을것이라는 동정 여론도 많이 생겨났다. 물론 다음 임금으로 즉위하는 조카가 광해군의 실책까지 덮어써서 가장 이미지는 나쁘지만,[25] 광해군은 말년에 연산군 같은 짓을 하다가 쫓겨난 무능한 폭군일 뿐이며 현대인들의 정치적 여론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덮는 영웅으로 2000년대 대중 매체에서 완벽한 영웅왕 이미지로 역사왜곡을 일삼고 있을 뿐, 실제로는 왕으로서의 인성과 업적 모두 앞뒤 임금들보다 찌질했던 럭키 연산군에 가깝다.

  • 인조(1623 ~ 1649)◎ : 외정 측면에서 실책(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많이 저질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병자호란 등의 전쟁의 책임이 그의 외교 정책이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 상황의 악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오수창 교수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가 '역사평설 병자호란'이라는 것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누가 봐도 자신의 빼도박도 못할 실책으로 일어난 일이고, 병자호란 때는 아예 선전포고문까지 먼저 보내는 초대형 실책까지 저질렀다. 여기에 청이 병자호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는 정묘호란으로 청나라가 숨통이 트여서 일어난 일이기에 자신의 무능력으로 초래한 측면이 상당하다. 또 큰아들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으로 후계 구도와 효종의 계승명분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린 결과 증손자까지 피해를 보게 했다는 점에서도 꽤나 까인다. 하지만 암군 목록 중에서는 선조, 세조에는 한참 못 미침에도 광해군, 연산군보다는 하위권 정도의 정상적인 암군(?)이다. 현실적으로 자국 내에서는 무난하게 통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조 자체가 광해군의 불필요한 삽질 때문에 탄생한 왕[26]이기 때문에, 광해군을 쫓아낸 것 하나만으로 17세기 조선의 회복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도 있다. 거기다가 학계에서는 갈수록 '식민사관이 억지로 띄워준것이지 실제 당시 조선인들이 암군으로 쳤던 것은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는 광해군과는 달리 인조는 선조의 여민휴식 정책으로 대표되는 전후부흥을 꽤나 성공적으로 이어받은 왕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 2010년대 ~ 2020년대 연구에서 보면 인조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은 상당한 전후복구와 부흥을 이루었으며 명군인 아들 효종의 치세에 긍정적인 성과를 많이 남겨줬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다. 학계 연구나 논문 같은건 들여다 보지도 않고선 역사를 단편적으로 밖에 해석 못하는 소위 인터넷 역사 매니아의 가십거리로 이미지에 정말 손해 많이 본 왕이다. 애당초 선조-광해군-인조 이 조선 중기 세명의 왕 자체 평가를 두고 봤을때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인한 광해군의 신격화에 다른 두 명의 이미지가 이용당했다는 게 갈수록 명백해 짐에도 도무지 교과서나 대중적 인식에 이런 학문적 성과가 제대로 반영되는 게 없으니 이런 한심한 작태가 계속 이어지는 황당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말이다.

  • 고종(1863 ~ 1907)△◎ : 망국의 군주라고 까이거나 나름 조국의 독립에 애를 쓴 비운의 군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 당시 청나라,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의 주변 상황도 그렇고 애초에 조선왕조실록철종 이후 고종실록, 순종실록 등의 편찬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놓고 보면 논란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확고한 반일파인 황현매천야록에서 고종을 많이 비판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일제의 왜곡이라고만 할수도 없다. 물론 <매천야록>은 야사이므로 여기 실린 기사들을 모두 팩트라고 믿기엔 조심해야 한다.[27] 나름 자주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와 시대적으로 너무 불리했다는 점도 있지만, 아내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 등등을 자주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벌하지 않아 방관하였고, 무엇보다도 동학농민혁명에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결정은 빼도박도 못할 실책이다.[28] 또한, 러시아에 의존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지만, 이는 러시아의 호응도 얻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력도 전혀 줄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에게 균형추가 쏠리면서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최소한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려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하나[29], 사실상 일본으로 국권이 넘어가는 상황인지라 무위에 그쳤다.

6.1.5. 북한[편집]


이 아니므로 암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이 문서에는 쇼군 등의 다른 예도 있고, "군주"의 국어사전 뜻도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북한의 김씨 가문을 표현하기에 정확하니 특별히 추가하였다. 전제군주제 문서에도 북한의 예가 있으니 참조.

  • 김일성(1948 ~ 1994)★◎ : 미국의 개입 여부를 오판하고 6.25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면서, 나아가 이산가족까지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8월 종파사건 등 인재풀의 씨를 말려버린 지독한 숙청을 통해서 독재 3대 세습의 포석을 깔아둔 것 역시 전제군주입장으로 본다면 업적이라면 업적이다.[30]

  • 김정일(1994 ~ 2011)★◎ : 북한 대기근 등 경제적 파탄과 고립. 국가는 개막장으로 만들면서도 독재자로서의 카리스마와 정치력 하나는 상당하면서 아버지 말년에는 아버지를 허수아비로 앉혀두고 권력을 차지하며 끝내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해 3대 세습을 해낸 전형적인 암군이다. 아버지 세대까지만 해도 적어도 현재의 베트남 수준까지는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북한이었으며 아니면 최소한 고난의 행군까지는 막을 수가 있었던 북한 사회를 완전히 세계 최악의 빈국으로 말아먹고 공사를 끊임없이 일으켜 국고를 바닥낸 인물로 아버지보다 더 막장이었다. 탈북자들 중에서도 그나마 김일성을 좋게 봐주는 사람들은 있어도 김정일은 무조건 악평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여담으로, 일본 만화 아카메가 벤다!의 슈라는 김정일이 모티브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업을 복구하면서 홍성남 총리나 박봉주 총리가 제시한 경제개혁안에 어느정도 동조하면서 돈주들이 많이 발생되었으며 개인 소유권 개혁 과정도 상당부분 추진한 면도 존재한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목란광명회사를 통해 외국만화영화나 외국영화를 내장한 DVD나 VCD를 허용하면서 상당부분 경제가 복구된 측면도 존재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 역시 김정일이 리타이어된 김일성대의 과학기술발전을 다시 복구하는데 성공하면서 상당한 기반이 다는 아니지만 복구가 되고 있다. 공업기반을 어느정도 복구하면서 돈주의 발전과정 역시 김정일이 추진한 과정이 존재하면서 돈주들의 활동 역시 용인해 그에 대한 댓가를 요구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왜곡은 있으나 성군이라는 위치는 아닌 셈이다.]

  • 김정은(2011 ~ 현재)★◎ :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둘 다 막장 독재자들이기는 했어도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해 기어이 국가를 유지한 것에 비해서 적대국에 손을 벌리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 버렸다. 물론 이 지경이 된 것에 할아버지나 아버지 역시 책임이 막중하기는 하지만... 사실 초반에는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는 해도 크게 말아먹은 것은 없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아버지가 더 이상 망할 것도 없게 만들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31]


6.2. 동양사[편집]


  • 중국
    • 하나라
      • 걸왕◎★△▲ : 하나라를 멸망시킨 폭군으로 평가받으나 기록의 사실여부나 하나라의 실존 여부에 논란이 있으므로 ◎를 붙인다.
    • 상나라
    • 서주
      • 소왕 :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주나라의 하락세를 유발한 장본인.
      • 여왕
      • 유왕▲ : 서주에서 동주로 전환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장본인이자 유명한 포사 이야기의 주인공.
    • 춘추시대
      • 위선공
      • 제양공▲ : 난세에 막장 군신이 들끓었던 춘추전국시대 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개막장 패륜 군주였다.
      • 관이오 사후 제환공
      • 말년의 제경공◎ : 전성기에는 안영전양저를 중용하여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가기는 했으나 후계자 선정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망명 공족 전(田)씨의 세력 확장을 방조하여 여(呂)씨가 끊어지는 원인을 초래했다.
    • 전국시대
      • 위혜왕 : 인사면에서 실정을 저질러 손빈, 공손앙 등의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이 타국에서 뜻을 이루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하서지방을 진나라에게 내주고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옛 수도권인 하동 지역은 이후로 진나라에 계속 털리다가 결국 반세기 이후 진나라에 완전 상실된다. 제위왕과의 회견에서 보물 에피소드는 덤.
      • 초회왕 : 진나라의 연횡책에 넘어가 친진파를 중용하여 타국의 신용을 잃었으며 이마저도 진나라의 유인에 넘어가 억류되어 객사라는 최후를 맞게 된다.
      • 연혜왕 : 제나라 정복으로 잘나가는 악의를 시기하여 반간계에 넘어가 이를 내쳐서 결국 거의다 먹기 직전이었던 제나라를 토해내었다.
      • 조도양왕 : 간신의 참언을 듣고 염파를 내쳤으며 멀쩡한 적장자인 조가를 폐하고 총첩출신의 아둔한 조천을 세우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 장평의 대패 이후에도 그나마 나름 버텨오던 국가의 역량은 본격적으로 도양왕 대에 이르러 기울어지게 된다.
      • 제민왕 :전국시대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제나라를 확실하게 말아먹은 암군이다. 초창기에는 그럭저럭 잘 다스렸지만 지속적으로 성과를 거두면서 점차 거만해지고 다른 국가들의 정치에 간섭하고 맹상군 등 명재상들을 내쫓으면서 제나라를 국제적 왕따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결국 악의가 이끄는 연나라 대군에 의해 제나라가 전국칠웅중 가장 멸망할 뻔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부하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건 덤이다.
      • 제왕건 : 진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리적 이점을 누렸다지만 군왕후가 섭정하던 시절에는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간 편이었다. 군왕후 사후 내부로는 후승의 전횡을 방조했고 외부로는 세객들의 말만 듣고 진나라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아 결국 망국의 군주로 전락했다.
    • 초한쟁패기
      • 항우 : 용맹과 군사적 능력은 중국 역사상에서도 늘 거론될 만큼 막강했지만 정치 역량이 형편없었다.
    • 전한
    • 후한
      • 안제
      • 환제
      • 영제 : 관직을 채소 등 물건처럼 팔아치우고 환관에게 휘둘려 사실상 후한을 멸망시킨 장본인. 이러한 막장 통치로 소제헌제동탁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삼국지의 시작
    • : 원술이 칭제하고 세운 비정통 국가.
      • 원술 : 변변한 능력도 없으면서 칭제하여 사방을 적으로 돌려 몰락했다.
    • 삼국시대 : 까놓고 말해서 삼국지가 '실패자들의 로망스'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삼국의 주요 군주들 가운데 크고 작은 병크를 안 터뜨린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만약 이 시대 군주들이 병크를 좀 덜 터뜨렸다면 사마씨의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는게 아니라 이들 중 하나가 중국을 통일했을 것이다.
      • 조위
        • 말년의 조조 : 서주 대학살 등을 비롯하여 초창기에도 여러가지 병크를 터트리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잘 대처 했을 뿐만 아니라 원소 등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을 제압하고 황하 일대와 장강 이북 지역까지 모두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순욱 등을 비롯한 자신의 친위세력마저 숙청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위왕으로 즉위한 후로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또한, 후계자 선정과정에서도 여러가지 병크를 저질렀다.
        • 조비◎ : 인성에 문제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비상시 황실의 방패막이 될 수 있는 황족과 외척을 지나치게 배척했으며[32], 구품중정제[33] 실시로 귀족 세력이 대대손손 관직을 해먹게 만들어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귀족들이 황권을 위협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또 아버지 조조의 삽질인 적벽대전이나 유비의 삽질인 이릉대전급의 임팩트가 없어서 그렇지 재위기간 내낸 무리한 남정을 꾸준히 추진하고 다 말아먹었다. 다만 이러한 평가는 최근에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형성된 것으로, 과거엔 암군으로까지 여겨지진 않았기에 조비가 정말로 암군이었는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암군으로 평가가 확정된 말년의 손권, 조예, 유선, 사마염과는 달리 조비 같은 경우는 사가들로부터 인성에 대한 평가가 나빴지 군주로서의 실정은 그냥 애초에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 말년의 조예 : 제갈량 사후에 과한 사치를 부렸고, 계통이 불명확한 조방을 무리하게 후계로 지명하여 조상의 실정 및 이후의 고평릉 사변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아주었다.
      • 촉한
        • 말년의 유비 : 이릉대전을 말아먹었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겼다면 암군으로 불릴 일은 없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거의 적벽대전의 조조와 관도대전의 원소 급으로 말아 먹은게 문제. 신하들이 뜯어말리던 전쟁 강행했다가 수많은 장수와 수만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 당시 유비가 전쟁 전 임명했던 재상 제갈량이 수습을 잘해서 그렇지 정상적인 국가였으면 그대로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농담삼아 제갈량이 50대에 세상을 떠난 책임의 일부는 제갈량이 이 피해를 수습하느냐고 고생했기 때문에 유비가 져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 말년의 유선◎ : 어떤 관점으로 유선을 평가하느냐에 따라 말년엔 암군으로 변질됐지만, 그래도 봐줄만한 부분들이 있었다는 평과 몇 가지 잘한 걸로 말년 암군으로서 전체 과오를 덮으려고 본다는 평으로 나뉘고 있다. 자세한 건 유선 항목의 평가 단락 참조. 다만 황호를 등용해 국정을 말아먹은 건 엄연히 실책이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위에 맞서기 위해 모이는 와중에 앞장서서 항복을 선언하였다.
      • 손오
        • 말년손권 : 이궁의 변 이전에도 사섭 사후 교주에서 벌인 짓이나 여일 등 간신배를 신임하고 그의 말에 따라 충신들을 유폐하는 등 암군의 기질을 보였다.
        • 손휴 : 손침을 처단하기는 했지만 무능한 복양흥과 장포 등 가신들에게 휘둘려 새 정치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손호가 즉위하게 되는 나비효과로 이어지게 된다.
        • 손호★△ : 삼국시대 최악의 폭군이자 암군. 수많은 신하와 백성을 학살하고 사치를 심하게 일삼다 나라를 멸망시켰다.
    • 서진
      • 사마염 : 황제가 뇌물 수수를 일삼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신하들로부터 영제만도 못한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다만 재위 초반엔 태강의 치로 일컬어지며 호평받았다.
      • 사마충
    • 남북조시대
      • 동진
      • : 창업 군주 유유, 그나마 내정을 제대로 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은 유의륭,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던 마지막 군주 유준 제외하고는 무슨 저주라도 걸린양 암군과 폭군으로 도배가 된 최악의 막장 왕조였다.사마씨의 저주 유구한 중국사를 통틀어도 순위권 안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군재를 갖춘 위진남북조 시대 최고의 명장 창업군주 유유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황하 이남의 땅을 대부분 장악했고, 무엇보다 촉한 멸망 이후 오랫동안 대가 끊겼던 '한의 유씨 황실 복원'이라는 국가 이념까지 계승하게 돼, 한황실 400년의 치세를 겪어 '황제는 유씨만이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던 당시 중국의 민중들을 매혹할만한, 당대 기준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대의명분까지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암군과 폭군들이 줄줄이 출몰한 끝에 60년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유의륭 이후 정말이지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걍 범군 정도만 두세명 정도 더 출현했더라면 우리가 아는 남북조 시대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유의부△▲ : 정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황음무도한 암군이라 결국 폐위당했다.
        • 유준 : 간언하는 자를 탄압하고 지나친 사치를 부려 국고를 바닥나게 하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였다.
        • 유자업▲ : 사치향락과 근친겁탈에 빠져 온갖 기행을 저지르다 재위 1년만에 살해당했다.
        • 유욱 : 이 사람도 사치향락과 음란행위에 빠져 살았다.
        • 창오왕★▲ : 살인이 일상이던 미치광이 소년.
      • 북위
        • 말년의 도무제
        • 선무제 : 제위 초반부터 외척인 고조에게 국정을 맡겼고, 이들에게 휘둘리는 정치를 했다. 자귀모사[34]라는 악습을 폐지한다는 점은 좋았으나, 문제는 그 수혜자가 바로 북위 후기를 말아먹은 주범인 영태후라는 점에서 이것마저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정책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효문제가 실시한 한화정책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고 황족고관들의 사치를 방관하였다. 결국 그의 사후 북위는 육진의 난의 혼란에 휩싸여 휘청거리다가 동위서위로 분열하며 멸망하게 된다.
      • 북주
        • 우문윤 : 엄청난 폭정으로 수나라 건국의 빌미를 제공했다. 우문옹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 북제
    • 수나라
      • 수양제★▲ :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그 능력을 사치와 지나친 원정, 주색잡기에 사용하여 결국 나라를 말아먹었다. 그래서 중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 당나라
      • 당고조◎(618~626) : 무능력한 배적을 감싸고 돌면서 이를 위해 중신 유문정을 처형하였다. 게다가 당 건국 초에 설인과 등 유력 군벌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나중에 태종으로 즉위하는 이세민의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3남 이원길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그저 묵과하였다. 결국 이러한 불공정한 처사와 돌궐의 침입이라는 명분이 맞아떨어져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다. 다만, 그 기록이 아들인 태종측의 주장으로 쓰여있는지라 역사왜곡이라는 시선도 있다.
      • 당중종
      • 성신제◎ : 내준신 등 혹리들을 통한 공포정치로 많은 사람을 숙청으로 죽였지만 이 일은 불가피한 일 이었고 몇가지 내치 관련 업적도 성공하였으며 그 때에 백성들은 살기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신제를 악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유교 때문에 긍정적인 면은 없애고 자체적으로 황제 대접을 하지 않고 황후 대접한다. 측천무후라고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표현해서 폭군이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하지만 외치면에서는 완벽히 실패한 인물로 이 점 때문에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나라의 대표적 외교정책인 기미정책이 이 시기부터 파탄을 맞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발해가 탄생하고 토번이 흥기하였으며, 돌궐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기미정책의 파탄으로 인해 당 중기~말기의 국방은 기존의 제도인 부병제로는 도무지 지탱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 절도사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강해진 절도사들의 폐해로 인해 당나라는 끝내 멸망하였다. 어찌본다면 당나라가 절도사에 휘둘리는 데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래도 명재상 적인걸 등을 등용해서 당 현종 초기[35]에 당이 발전할 수 있게 기틀을 닦은 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치세의 명군이자 난세의 암군, 혹은 내치의 명군이자 외치의 암군이라고 평가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천보 연간 이후의 당현종
      • 당숙종
      • 당의종 :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당나라 최악의 암군.
      • 당희종
    • 연 : 안록산이 칭제하고 수립한 나라.
      • 광렬제▲ : 범양에서 거병할 때만 해도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많은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하북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양을 함락시키는 등 굵직한 성과를 내었지만, 이 때 칭제한답시고 진군할 시기를 놓쳐 당나라에 숨돌릴 시간을 주었다.[36] 그리고 휘하 군대의 학살을 방조해 민심이 돌아섰고, 본인도 말년에 포악해졌으며,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을 밀어주려다 안경서에게 시해되었다.
      • 안경서 : 아버지 안록산을 죽여 반군의 구심점을 와해시켜버렸다. 기어코 사사명에게 시해된다.
    • 오대십국시대
      • 후량
        • 주전충▲: 기껏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했건만 주색은 기본이고 자식들과의 갈등도 심해 아들들에게 살해당한다.
      • 후당
        • 이존욱 : 초반에는 주전충을 관광보낸 뒤 후량을 멸망시키고 주변 번진을 전부 쓸어버림으로써 후당을 개창하고 심지어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도 격퇴하는 등 명군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름 안정기에 접어들자 해이해진 것인지 평소 즐기던 음주가무 및 연극으로 소일했고 내정에서도 막장 가도를 달린 끝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 후진
    • 요나라
    • 금나라
    • 북송
      • 송휘종: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뛰어났으나, 즁요한 건 이 사람의 신분은 황제였다. 금과 힘을 합쳐 요를 멸망시킨 뒤, 요의 패잔병을 끌어들여 금을 치려 했지만, 이를 듣고 화난 금 태조가 군을 몰아 쳐들어오자, 무책임하게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물러났다. 그 결과는.......
    • 남송
      • 송고종◎ : 악비 문제로 많은 지탄을 받는 군주이나[37] 소흥화원이나 남송관요 등을 만들어 남송의 문화융성에 꽤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보면 꽤 나름의 업적을 보여주기도 한다.
      • 송이종
      • 송도종
    • 명나라
      • 정통제◎ : 토목의 변 이전, 난신 왕진에게 휘둘렸던 영종.[38]
      • 말년의 성화제 : 초기에는 대인배의 면모도 보여주고 혼란도 수습하는 등 긍정적인 행보를 걸었으나, 말년에 방술에 빠지고 만귀비를 비호하는 등 실정을 많이 저질렀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항목을 참조.
      • 명 4대 암군
        • 정덕제◎ : 혼자놀기의 진수. 그러나 이 양반은 국정운영에서 나름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재위기간 내내 놀기만 한게 아니기 때문에 평가가 갈린다.
        • 가정제 : 명나라의 명대신 해서가 이 양반 앞에서 대놓고 연호 '가정'의 의미를 다르게 불러서[39] 깠으니 말 다했다.
        • 만력제◇ : 중국사 최악의 암군, 명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은 만력제가 30여년간 정무에 손을 놓아서라고 후대의 역사서인 명사에서도 언급하기도 한다. 중국사 최초로 파업을 한 황제다. 게다가 자국이 우선인데도 조선에 구휼미를 무리하게 보내 고려천자라는 멸칭을 얻었다. 정무를 보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편중독, 우울증 등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그의 유골이 작살나는 바람에 영원히 미스테리로....
        • 천계제◆◎ : 마에스트로. 동생은 실책은 있었을지언정 망국이 확실한 명을 구하려고 고군분투 했지만 이 사람은 그런거 없이 일을 안하고 나무를 깎기만 했다. 다만 이 양반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 항목 참고.
    • 청나라
      • 말년의 건륭제◎★ : 과거에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자 중국 최후의 명군[40]으로 꼽혔으나,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단지 선대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을 뿐인 암군이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다. 무엇보다 말년은 딱 암군.[41]
      • 가경제△◎ : 강희제 시절부터의 성세가 워낙 임팩트 있어서 치하에 나라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가경제가 암군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가경제가 특별히 무능했다는 부분은 없고, 오히려 건륭제가 남긴 문제들을 그럭저럭 수습했다. 다만 화신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내탕금으로 축적한 일만은 옹호하기 어려운 편.
      • 도광제 : 검소하고 청렴했으며 아편 척결에 앞장섰지만 그 외에는 무능했다.
      • 함풍제
      • 선통제△◎ : 황제로 있을 때는 너무 어려서 허수아비라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만주국에서의 행적을 보면 암군이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애초에 만주국 자체가 일본의 괴뢰국이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없었다는 걸 감안하자. 그런 의미에서 ◎표기도 추가한다.
    • 중화제국




  • 태국
    • 톤부리 왕조
      • 말년의 탁신 대왕★◎ : 태국판 이존욱이자 궁예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정신병에 걸린 이후부터 암군이자 폭군이 되었고,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다만 그를 몰아내고 들어산 차크리 왕조가 그에 대해 역사왜곡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 차크리 왕조
      • 라마 10세: 무려 전근대적 전제 왕권이 사라진 21세기의 암군이다.[42] 왕세자 시절부터 암군과 폭군 기질을 모두 보여서 태국 국내외로부터 우려를 받았지만 결국 즉위하였다. 심지어 전근대였으면 폐세자로 찍힐 사고들을 쳤음에도 부왕 푸미폰이 계승권을 지켜 주었다. 이 때문에 2020년에는 태국에서 군부독재 종식 운동과 함께 왕정 개혁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6.3. 서·남아시아사[편집]


  • 인도
    • 무굴 제국
      • 말년의 샤 자한
      • 아우랑제브★◎ :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애매한 편이다. 인도 역사상 희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라는 점때문에 무굴 제국 해체에도 일조한 암군이자, 폭군이라는 지적도 많지만, 이걸 빼면 내정 면에서나 외치에서도 상당한 업적을 세워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뉜다. 일단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등의 많은 종교가 공존하는 인도에서 비(非) 무슬림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일삼은 면에서는 빼도박도 못할 폭군이다.[43]


  • 터키
    • 오스만 제국
      • 말년의 쉴레이만 1세 :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낸 명군이지만, 자식 관리가 완전히 엉망이었다. 황후 휴렘 술탄 등의 음모에 빠져 제국 국민 대다수의 인망을 얻고 있던 장남 무스타파를 반역죄로 처형(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했으며, 막내인 바예지드 역시 반역을 의심하여 처형. 결국 바로 아래에 나오는 셀림 2세가 뒤를 이었지만, 그 정체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처음 보는 막장 황제. 자식 문제뿐만 아니라 말년에 갈수록 황후나 그녀에게 빌붙은 관료들의 말만 믿고 유능한 신하를 처형장으로 보낸다거나, 부패에 찌든 신하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등의 실책도 저질렀다.[44]
      • 셀림 2세 : 재상에게 정권을 넘긴 최초의 황제였으며, 직접 군사 지휘를 한 적이 없는 최초의 황제이기도 했다.[45]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맡은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재능이 일단 합격 수준이었지만, 지방 총독이나 부재상이 되려면 반드시 재상에게 '선물' 을 바쳐야 하는 상황을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영락없는 호구 인증. 이후에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황제의 애첩이나 모후가 정치에 끼어들고 예니체리가 황제를 갈아치우는 등의 사태가 다 셀림의 치세에 그 싹이 텄다.
      • 말년의 이브라힘 : 실정으로 폐위 후 살해당했다.[46]
      • 아흐메트 3세 : 이른바 튤립 시대라 불리는, 오스만 문화의 또 한 번의 중흥기를 이루어낸 군주였지만, 그 외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은 매년 유럽 군대에게 털렸으며,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실정이었지만 그는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하렘의 후궁들과 놀거나 튤립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다.(…)
      • 그 외 예니체리에게 옹립된 모든 황제들 : 사실 이 부분은 애매하다. 예니체리들의 입맛에 따라 제위에 오른 황제 가운데 정신병을 앓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국 전성기 때까지의 황위계승분쟁에서 예니체리의 지지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즉위할 수 있었던 인물도 있기 때문. 또 쇠퇴기에도 분명 예니체리가 옥좌에 올려줬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통치에 임했던 황제도 있다.
      • 무스타파 4세 : 니잠 제디드 개혁을 꾀하던 셀림 3세를 유폐한 뒤 죽이고 부패한 예니체리의 후원으로 술탄이 되어 오스만 제국을 파탄냈다.
      • 마흐무트 2세◎ : 오스만 제국을 좀먹던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니잠 제디드의 부활을 이끌어 제국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더 붙여놓은 것은 업적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시대에 이미 이집트 총독과의 관계가 악화된 결과 아들인 압뒬메지트 1세 대에는 고문 대 몰트케의 조언을 무시해 이집트가 사실상 독립해버리는 등 제국 쇠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게다가 마흐무트 2세의 치세 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로마노프 제국의 간섭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크림 전쟁으로 이어진다. 만일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돕지 않았다면 패전했을 것이다.

  • 이스라엘
    • 이스라엘 왕국
      • 사울▲: 죽음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성경인 사무엘기열왕기를 보면 자살했다고 나오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사했거나 아군[47]에게 살해당했거나, 혹은 진짜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사울 항목을 참조하라.
      • 말년의 솔로몬: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말년의 실정은 중국의 당현종, 건륭제와 비견될만한 인물이다.
    • 유다 왕국

  • 쿠웨이트
    • 자베르 3세 : 걸프전쟁 당시 쿠웨이트의 군주로서, 걸프전쟁 때 보여준 처신에 대해서 말이 있다.

  • 오만
    • 사이드 빈 타이무르△: 전근대적인 정책과 쇄국으로 국가를 후퇴시켜 공산주의 반군이 들끓게 되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아들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가 영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행히도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는 명군으로 오만의 르네상스를 가져왔으며, 오만은 정치적으로도 아주 안정된 국가에 속한다.


6.4. 서양사[편집]


  • 로마 제국(서로마동로마 포함)
    • 칼리굴라◎ : 사후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다.
    • 말년의 네로★◎ : 흔히 폭군으로 평가를 받지만 사실상 암군에 가깝다. 그리고 집권 초기에는 비교적 정치를 잘 했다.
    • 콤모두스★▲△
    • 엘라가발루스▲: 해괴한 레반트식 신상을 로마 시 한복판에 세웠다. 여사제를 검열삭제까지 하고...
    • 호노리우스◎ : 410년 로마 함락-약탈 때 찌질한 모습은 과장된 것이다. 로마가 이미 기울어 갈 때라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고.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포카스★▲△ : 서양의 수양제
    • 유스티니아누스 2세 :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값을 가진만큼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의 정신과 권력욕이 모든걸 말아먹었다.
    • 콘스탄티노스 8세 : 최근의 연구로 재평가가 되고 있다. 항목 참조.
    • 미하일 7세 : 별명이 "-1/4"인데, 그의 재위기간 동안 화폐 가치가 3/4로 떨어졌기 때문(...)
    • 안드로니코스 1세★▲△ : 사실상 로마 제국 멸망의 제일공신.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씨앗[48]도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결국 시민들에게 폐위된 뒤 비참하게 죽었다.
    • 이사키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되면서 시민들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군사적 능력은 좋았지만 관직을 시장의 채소처럼 판매(...)하여 로마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 알렉시오스 3세△◎ : 최근에는 오히려 실패한 중흥군주로 재평가받고 있다. 종전의 이미지가 너무 짙게 자리잡아서[49]
    • 알렉시오스 4세 : 진짜 암군은 3세가 아니라 4세 이 인간이었다. 이 인간의 뻘짓으로 4차 십자군이 일어났다.
    • 미하일 8세 : 명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암군에 가깝다. 미하일 8세가 싸지른 X은 후임황제가 치워야 했고 그러고도 X은 많이 남아서 오스만한테 제국은 멸망당하고 만다.


  • 영국
    • 잉글랜드 왕국
      • 플랜태저넷 왕조
        • 리처드 1세 (1189 ~ 1199)◎ : 암군으로 평가받았으나 군주로서의 능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훌륭한 모습을 보인 적도 많다. 그러나 무리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국내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다.
        • 존 왕(1199 ~ 1216) :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도,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도 모두 답이 없는 막장 군주였다. 그나마 초기에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귀족들의 압력에 억지로나마 마그나 카르타라는 중요한 유산을 남기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권 1순위인 인물은 '존' 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있다.
        • 에드워드 2세(1307 ~ 1327)▲△
        • 말년의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리처드 2세(1377 ~ 1399)△
      • 랭커스터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찰스 1세 (1625 ~ 1649)▲△◎ : 찰스 1세가 폭군이었다든가 무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전제군주제를 선봉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평가가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 영국의 정치 상황은 무작정 국왕이 독단적으로 정무를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랐는데, 찰스 1세는 이를 유연하게 대응할 정치 감각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우직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왕정 자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게다가 재정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 제임스 2세 (1685 ~ 1688)△☆◎ : 다만 현재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매우 유능하고 근면한 군인이요 행정가였으나 정치가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 정도로 재평가받고 있다.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하노버 왕조
        • 조지 1세(1714 ~ 1727) : 암군이라는 건 영국 국왕으로서의 행적에 한정.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로서는 뛰어난 명군이었다. 영국 국왕으로서의 행적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영국의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위안이다. 어찌보면 영국 국왕은 그냥 맡아만 준 것에 가깝다. 조지 1세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은 하노버 선제후라는 정체성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50]
    • 대영제국
      • 윈저 왕조
        • 에드워드 8세 :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망각하는 등[51] 무개념이었던데다 나치 부역 논란까지 남겼다.[52]

  • 프랑스
    • 프랑스 왕국
      • 발루아 왕조
        • 장 2세: 왕으로서는 완전히 무가치했다는 평을 들었다.
        • 샤를 6세
        • 프랑수아 2세(1559 ~ 1560)
        • 샤를 9세(1560 ~ 1574)
        • 앙리 3세(1574 ~ 1589)▲◎ : 암군이라기보다는 명군의 업적이 더 많았다. 종교문제에 휘말리는 수모를 겪었지만, 나바라 국왕 앙리(앙리 4세)와 협력하여 기즈 공을 살해하였고, 종교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긴 했다. 다만 자식이 없어 앙리 4세가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앙리 3세가 앙리 4세에게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 부르봉 왕조
        • 루이 14세(1643 ~ 1715) : 스스로 태양왕이라고 칭하고 콜베르를 등용해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하지만 업적은 고작 이 뿐이다. 검소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외에도 자연국경설을 주장해 수많은 전쟁으로 재정을 파탄내는 상황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증축했다.[53] 게다가 낭트칙령을 폐지하여 위그노들이 해외로 망명하고, 이로인해 프랑스 내부의 상업이 위축되는 최악의 결과도 루이 14세가 만들었다.[54] 제 나라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스페인 군주로 앉혀 스페인을 위성국화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영국만 좋았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을 만든 셈
        • 루이 15세(1715 ~ 1774)
        • 루이 16세(1774 ~ 1792)▲△◎ :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부정적 재평가가 나오면서 루이 16세의 성품과 능력이 긍정적 재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래도 혁명을 촉발시킨 원인이 그에게도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루이 16세를 옹호하는 측에서도 바렌느 배신사건은 쉴드쳐주지 않으며 그의 능력으로 혁명을 막기란 불가능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 루이 18세(1815 ~ 1824)◎ : 적어도 동생보다는 나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샤를 10세는 관용 없이 절대왕정을 무조건 고수하려는 입장이어서 오죽하면 그가 후사가 없을 때 차라리 루이 18세가 최대한 장수해 샤를 10세가 왕위에 오르는 걸 늦추는 것을 바랐을 정도.
        • 샤를 10세(1824 ~ 1830)△
        •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 루이필리프 1세◎ : 개인적인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으며, 높은 신분의 귀족임에도 검소하게 지내는 등 긍정적인 면모가 있어 샤를 10세의 폐위 이후 입헌 군주정 체제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술트 내각과 기조 내각의 실책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이로인한 불만은 프랑스 2월 혁명과 제2제국의 도래를 불러왔다. 샤를 10세처럼 완전히 무능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무리인 측면도 있어 ◎표를 추가한다.(마리우스의 할아버지도 손주녀석에게 "왕의 잘못이 아니라 꼬붕이 패거리들 탓이다"라고 했다.[55])
    • 노르망디 공국
      • 노르망 왕조
        • 로베르 2세(1087 ~ 1106)△ : 만약 그가 잉글랜드 왕위를 노리지 않고 노르망디 본토에서의 내치도 잘했다면 노르망디는 잉글랜드와 완전히 별개의 나라가 되어 잉글랜드와의 동군연합이 아닌 독립국가로서 좀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플랑타주네 왕조
        • 리샤르 4세(1189 ~ 1199)◎ :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평가와 마찬가지.
        • 장 1세(1199 ~ 1216) : 노르망디 공국의 육지 영토를 모조리 상실해버렸다. 그나마 채널 제도를 지켜내긴 했지만 이마저도 육지가 아니라 섬이라서 사실상 그의 치세에 노르망디 공국이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
    •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제2제국
      • 보나파르트 왕조
        • 나폴레옹 1세(1804 ~ 1814, 1815)△◎ : 19세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의 전 유럽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나,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대륙 봉쇄령을 반포해 역으로 고립을 자초한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나폴레옹 일파들과 군대는 폴란드나 독일 서부지역을 제외한 전 유럽 지역을 약탈하고 폭정을 저질렀으며, 이는 피지배민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여기저기서 나폴레옹 지배에 반발하는 봉기가 발생하게 된다.[56]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꽃피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 제국을 응징하겠다고 원정을 단행했다가 대패했으며 이는 제1제국의 몰락의 계기로 작용한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길 수 있었던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본인의 실책과 휘하 원수들의 불화 등으로 영국의 아서 웰즐리와 프로이센의 블뤼허 등 반불연합군의 명장들에게 패했다. 그래도 프랑스 내 민심은 잘 휘어잡았으며, 가족들이 사치스럽게 지내는 와중에도 본인은 검소했다. 말년에 여러 실책들을 저질렀으나, 거의 전 유럽을 제패하여 유럽의 모순을 깨뜨리고, 라틴아메리카 독립에도 영향을 주는 등[57]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대 인물들의 평은 호불호가 모두 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에 대해 전쟁의 신 그 자체(Der kriegsgott selbst.)라고 극찬했고, 헤겔 역시 유럽의 낡은 체제를 부수는 그를 긍정하는 평을 남겼으나, 베토벤 등 그가 황제가 된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그의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다. 장 란이나 루이 니콜라 다부같은 유능한 원수들을 발탁해 중용한 것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나폴레옹 3세(1852 ~ 1870)△◎ : 내치에 있어서는 나름 업적을 남겼지만 크림 전쟁 개입 등으로 제국 쇠퇴의 빌미를 제공했고 프로이센 왕국과의 외교 문제에서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신도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됨으로써 비참하게 몰락했다.[58]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아노 1세를 멕시코의 괴뢰 황제로 두어 북아메리카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다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되면서 오히려 멕시코에서 프랑스의 평판이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전반적인 국정 운영 능력도 큰아버지[59]에 비해 부족한 편이었다.

  • 벨기에
    • 레오폴드 2세(1865 ~ 1909)◎★ : 콩고 자유국 군주로서의 행적은 말할 것도 없이 폭군의 행보였으며, 벨기에 본토에서는 명군이었다는 주장이 많지만 사실 벨기에 국왕으로서의 평가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자신의 정부를 위해 도가 지나친 수준의 사치를 부린 탓에 검소한 성향의 벨기에인들에게는 평가가 좋지 않았으며, 복지에 있어서도 매우 소홀했다. 무엇보다 플란데런(플랑드르)의 네덜란드계 벨기에인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킨 점 때문에 벨기에에서 프랑스계와 네덜란드계의 마찰이 더욱 심각해지는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되었다.

  • 독일
    • 신성 로마 제국
    • 독일 제국
      • 빌헬름 2세(1888 ~ 1918)△ : 즉위하자마자 비스마르크를 내치고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했다.[60]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을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독일은 고립되어 갔다.[61] 더군다나 고립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식민지를 지배하겠다고 칭다오를 공격해서 청나라로부터 99년 동안 조차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난 헤레로족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914년에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정세를 오판해서 결국 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데 일조하였으며[62], 1차 세계대전 중반부터는 실권을 루덴도르프에게 내주고 꼭두각시가 되었다. 결국 킬 군항의 반란과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제정이 폐지되고 퇴위된 후에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으나 호시탐탐 독일 제국의 복원을 노렸다. 또한, 히틀러가 베네룩스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전위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치를 극찬하는 모습을 보여 호엔촐레른 가의 명예에 먹칠했다. 이외에도 창녀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독일 황실의 권위를 내핵까지 근접하게 만들었다.





  • 오스트리아
    • 합스부르크 제국[72]
      • 마리아 테레지아(1740 ~ 1780)◎: 느슨한 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강력한 개혁 정책을 통해 하나로 묶은 것은 분명 그녀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가 암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그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일으킨 차례의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63], 오히려 막대한 전비만 소모하며 후대 군주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64] 또한, 여성 군주임에도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의 통치철학인 금욕주의, 도덕주의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65],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죽고난 후에는 통치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여 기껏 강화시켜 놓은 황권을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식농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공동 통치자인 첫째 아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66], 특정 자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로써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녀는 느슨한 연합체인 합스부르크 제국을 하나의 국가로 묶은 업적이 있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당대에 국모라고 평가받았으므로 ◎표를 추가한다.
      • 페르디난트 1세(1835 ~ 1848)◆: 합스부르크 가문판 사마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실제로 그의 치세대에 통치는 메테르니히와 그의 일가친척들이 도맡아했다. 결국 1848년 혁명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자 조카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양위하고 제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 프란츠 요제프 1세(1848 ~ 1916): 1848년 혁명 이후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전제적 통치로 일관했으며, 1848년의 혁명을 계기로 드러난 자국의 허약한 군사력을 다시 강화시키는 데 무관심했다.[67] 그 결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대패하게 되고, 제국의 주요 영토인 헝가리에서 소요사태까지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헝가리 귀족들과 대타협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도 전제적 통치를 고수하면서 다민족 국가인 제국에 독일어 사용만을 허용하여 민족주의의 발흥을 불러왔다. 또한, 그는 제국역량 강화에 매우 소홀히 하였는데, 동시대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이 산업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반면[68],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에 제국 내의 산업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이스트리아 반도 정도였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69] 게다가 그는 보스니아 합병 문제로 삼제 동맹을 깨뜨려버리는 우를 범한다. 또한, 빌헬름 2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가 된 후에는 독일에 과잉 의존했으며, 독일 제국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카이저에게 빈번한 조언조차 하지 않았다.[70] 그는 오로지 자기권력 지키기에만 집중했으며,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여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짓들만 벌였다.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조카가 살해당하자, 이를 핑계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병합하기 위해 군사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전쟁을 도발했다. 결국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벌여[71] 국가를 파탄냈으며, 그의 사후 즉위한 황제인 카를 1세는 대단히 유능하였으나, 그의 치세대에 제국이 살아날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헝가리
    • 헝가리 왕국
      • 호르티 미클로시△ :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내륙국의 제독인 이 사람은 명목상으로 왕정을 유지하지만, 카를 1세나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의 군주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이를 이용해 독재를 했다. 트리아농 조약 이후의 상황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고[73][74], 2차 대전 때에는 추축국으로 가담한다.[75] 그래도 전범은 아니었고, 후임이 워낙 막장 전범이기에 평가가 마냥 박하지만은 않기도 하다.

  • 스페인
    • 압스부르고 왕조[76]
      • 펠리페 2세(1556~1598)◎ : 원주민 노예제 폐지, 콩키스타도르 개혁, 레판토 해전 승리, 포르투갈 합병 후 동군연합 체제 형성 등 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책도 커서 알짜배기 땅인 네덜란드를 상실하였다. 게다가 무적함대가 드레이크 경에게 대파되었고, 이로인해 사실상 스페인은 열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표를 추가한다.
      • 펠리페 3세(1598 ~ 1621)
      • 카를로스 2세(1665 ~ 1700)◆◇
    • 보르본 왕조[77]
      • 카를로스 4세
      • 페르난도 7세
      • 이사벨 2세
      • 알폰소 13세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왕 없는 왕국의 섭정 신분으로 스페인국을 이끌었다. 하지만 무자비한 철권 독재 정치를 폈을 뿐만 아니라 정적들을 나치에게 무너진 프랑스로 보내고 이들을 나치가 학살하는 것을 도왔다.
      • 말년의 후안 카를로스 1세 : 스페인 군부의 꼭두각시로 내세워질 운명이었으나, 프랑코의 후계자가 암살당하는 등의 행운을 틈타 실권을 장악한 뒤 프랑코 체제를 해체하고, 이에 반발하는 쿠데타를 진압하는 등 명군의 명모를 보였으나 재위 말년에 보츠와나에서 벌인 사치와 향락이 발각되면서 사실상 반강제로 퇴위했고, 퇴위 뒤에도 발각된 스캔들 때문에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화정 복귀여론까지 돌 지경.

  • 이탈리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무솔리니를 사실상 무혈 입성시켜 추축국의 전쟁 범죄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하지만 막상 이탈리아는 2차대전 기간 졸전만을 거듭하여 오히려 민폐만 끼쳤다. 에마누엘레 본인은 결국 패전이 가까워지자 무솔리니를 실각시키지만 이미 이탈리아는 세계대전 패전국이자 전범국가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결과적으로 2차대전 패전 후 분노한 국민에 의해 왕정이 폐지당하고 자신은 물론 태자였던 아들까지도 살아있을 때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 루마니아
    • 카롤 2세△(1930 ~ 1940) : 자신의 정부를 위해 국가의 1년치 예산에서 20%에 가까운 보충 예산을 편성하고 사치를 부리는 행각을 자행했다.[78] 이러한 막장 통치로 결국 총리 안토네스쿠의 압력으로 퇴위하였다. 근데 안토네스쿠 이 인간은 줄을 잘못 서서...

  • 불가리아 차르국
    • 페르디난트 1세(1908~1918) : 무리한 욕심으로 발칸 전쟁에서 영토를 잃고, 1차 대전에서 불가리아군의 세르비아에서의 학살을 야기한 장본인이다.
    • 보리스 3세(1918~1943)▲ :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로 뇌이 조약으로 인해 파탄난 불가리아 차르국을 떠안았다. 그러나 무능하면서도 전제적인 통치로 일관했고, 2차 대전에 추축국으로 가담한다. 결국 1943년에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불가리아에는 국민군단연합이라는 나치의 괴뢰국이 된다.


6.5. 아프리카사[편집]


  • 이집트 왕국
    • 파루크 1세(1936 ~ 1952) : 사실상 영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실권이 거의 없없기 때문에 국민들을 마구 억압한 건 아니지만 각종 기행을 일삼은 탓에 암군 취급을 받는다.

  • 에티오피아 제국
    • 이야수 5세 :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서 친이슬람 정책을 펼치고 친독정책을 펼치는 등 정치감각이 결여돼 기어코 폐위되었다. 다만 에티오피아 내 무슬림들에게는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며, 이들은 오히려 이야수 5세가 폐위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경향이 강하다.

  • 줄루 제국
    • 말년의 샤카★◆ : 남아프리카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들소 전략'이라는 전술을 창안한 뛰어난 지략가였던 샤카는 줄루 제국을 건국하고 매우 빠르게 그 세를 넓혔으나, 홀어머니를 여의고 정신병에 걸려 폭군이 된 뒤 백성들이 농사짓지 못하게 만들어 기근에 시달리게 하거나, 임산부들과 임신한 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잔혹한 기행을 벌이는 암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샤카의 두 이복동생이 그를 암살하게 된다.

  • 중앙아프리카 제국
    • 장 베델 보카사(1976 ~ 1979)★△ : 대통령이었다가 친위쿠데타를 통해 군주가 된 건 위의 나폴레옹 3세와 비슷하지만, 나폴레옹 3세와 달리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도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으며 군주로서의 역량 또한 나폴레옹 3세보다도 더욱 막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폭정은 폭정대로 휘두르면서 정작 나라를 위한 긍정적인 업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7. 가상의 암군[편집]


여기선 인품은 좋으나 능력이 나쁜 군주, 능력은 좋은데 인품이 나쁜 군주, 히어로, 악인, 안티 히어로 등이 죄다 섞여 있으므로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 가담항설 - 선대 왕, [79]
  • 감수성 - 감수왕
  • 갓 오브 하이스쿨 - The King[80]
  • 괴도 조커 - 알라딘 국왕[81]
  • 눈물을 마시는 새 - 권능왕
  • 더 위쳐 시리즈 - 데마벤드 국왕
  • 리그 오브 레전드 - 비에고[82]
  • 리멤버 - 아들의 전쟁 - 남규만
  • 리어왕 - 리어왕
  • 롤랑롤랑 - 윌리엄
  • 롤링스타즈 - 바키
  • 마기 - 아부마드[83]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 오딘[84]
  • 마하바라타 - 유디슈티라
  • 말레피센트(영화) - 스테판 왕
원작이 아닌 실사영화 참조.
  •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 - 브륀 왕국의 팔롱 왕[85], 피그넬리아 아르샤빈[86], 발렌티나 그링카 에스테스[87]
  • 무적코털 보보보 - 반들반들리나 4세
  • 무한도전 - 대왕[88]
  • 메이플스토리 - 선대 신왕, 헤카톤, 샤렌 3세
  • 베르세르크 - 미들랜드 국왕
  • 블랙 팬서 - 트차카
  • 성전사 단바인 - 프라온 엘프
  • 소피루비 - 멀구나 왕국 국왕
  • 스타크래프트 2 - 아크튜러스 멩스크[89], 말라쉬[90]
  • 신격의 바하무트 GENESIS - 샤리오스 13세, 샤리오스 17세
  • 신비한 별의 쌍둥이 공주 1기 - 해님나라, 달나라(문마리아 여왕은 혼수상태라서 정황을 파악할수 없었다.), 이 외의 5개국 국왕들. 브라이트:흑화 이후 한정.
  • 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 - 왕여[91]
  • 아르슬란 전기 - 이노켄티스 7세[92], 고타르제스 2세[93], 오스로에스 5세, 안드라고라스 3세, 키리카라 2세[94]
  • 아카메가 벤다! - 황제
  • 앵그리버드 시리즈 - 킹 피그
  • 야인들의 마피아게임 3편 - 알파고
  • 얼음과 불의 노래 - 로버트 바라테온, 아에곤 4세, 아에니스 1세, 바엘로르 1세, 아에리스 1세, 아에리스 2세, 조프리 바라테온, 발론 그레이조이, 메리아 마르텔
  • 엘릭 사가 - 엘릭[95]
  • 워르테니아 전기 - 루피스 여왕[96]
  • 워해머 판타지 - 루드뷔크 2세, 보리스 골드게더, 디터 4세, 칼레도르 2세[97]
  • 원피스 - 와포루, 루브니르 국왕, 스테리, 돈키호테 도플라밍고, 쿠로즈미 오로치, 아발로 피사로, 빈스모크 저지
  • 은하영웅전설 - 은하제국프리드리히 4세[98]
  • 이계진입 리로디드 - 젝센가드 라텐베르크
  • 작약만가: 서리꽃 - 황봉림
  • 진격의 거인 - 칼 프리츠[99], 프리츠[100]
  • 조이드 제네시스 - 지인
  • 제로의 사역마 - 올리버 크롬웰[101], 필립 3세[118], 죠세프[102], 빅토리오 세레발레[103]
  • 파이널 판타지 XV 유니버스 - 레기스 루시스 카일룸[104]
  • 프린세스 - 비욘 카칸 표르도바[105]
  •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 - 버블검 공주
  • 트로이 - 프리아모스
  • 태조 왕건 - 궁예(태조 왕건)[106]
  • 터닝메카드 - 레드홀의 국왕
  • 해적전대 고카이저 - 총사령관 왈즈 길
  • 해피니스 프리큐어! - 블루[107]
  • 황후가, 돌아왔다 - 리오넬
  • 황후의 품격 - 이혁
  • 히어로메이커 - 뭉클리아[108], 골드 수저[109], 베르미누 3세[110]
  • UFO로보 그렌다이저 - 베가 대왕
  • 은하전국군웅전 라이- 라코우
  • 버림받은 황비-미르칸, 회귀전의 루블리스
  • Fate/Grand Order - 이문대의 왕들[111]
  • 포켓몬스터 XY - 아리 공주

7.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편집]


군주제의 국가를 운영하는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보통 군주 각각이 몇 가지 능력치를 가지며 이것이 게임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군주라는 것이 그냥 약간의 버프, 디버프 정도만 주는 경우라면 별 상관이 없지만 군주의 능력치가 게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 플레이중인 국가에 암군이 들어선다면 게임 진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기도 한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 - 게임 내 대부분의 국가가 군주제이기에 랜덤한 확률로 랜덤한 능력치의 후계자가 등장하여 왕위를 잇게 된다. 그런데 군주 능력치에 따라 받는 포인트가 게임 내 거의 모든 행동에 대량으로 소모되어 사실상 돈보다도 중요한 메인 자원이기에 암군이 등장하면 참 골치아프다. 다른 변수를 제외하고 비교한다면 능력치 최하의 군주와 최고의 군주를 둔 나라는 기술개발만 할 경우 속도가 3배나 차이난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 국가를 플레이한다기보다는 중세 영주 개개인을 플레이하는 것에 가까운 게임 특성상 캐릭터 능력치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며 능력치가 쓰레기인 캐릭터가 계승받는다면 난이도가 급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상속법과 각종 음모를 통해 능력치 구린 자식을 죽이거나 투옥하거나 하는 등 플레이어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암군의 등장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하다보면 이것이 게임의 메인 컨텐츠 중 하나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 토탈 워 시리즈 - 전반적으로 군주 능력치가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특히 시기상 현대에 가까운 배경을 가진 작품일수록 군주보다는 개별 장군들의 영향이 크며 원하지 않는 군주를 갈아치우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영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 꽤 큰 패널티를 가진 왕도 가끔 나온다. 작게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수입및 민심 감소부터, 크게는 모든 영토에 디버프를 걸어버리거나 외교에 페널티를 주는 경우가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1] 이 표현은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 사마휘방덕공유표를 평하면서 한 말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당나라당현종이나 청나라건륭제 역시 명군 같은 암군이라 할 수 있다.[2] 세종, 정조[3] 이전에 이 문서에서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 선조의 경우는 미묘하다. 임진왜란 이전 25년간은 명군이었다. 그는 이미 조선 국왕의 평균 재위 기간을 넘긴 상황이었다. 너무 오래 집권해서 말년에 추한 모습을 보여 암군으로 분류되는 케이스. 까이는 것도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인배적인 면모와 자신의 몸 보전만 신경쓰는 모습 때문이지 능력 때문이 아니다. 그래도 똑같이 25년을 재위했는데 아예 목숨까지 헌납한 고려의종보다는 한수 낫다고 치자. 선조는 임진왜란이 없으면 명군 축에 들지만, 의종은 무신정변이 없어도 암군인 건 함정.[4] 심지어 이 두 명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선왕을 아버지로 두었고, 본인의 능력도 특별히 무능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무난한 후계자로 평가받으며 각각 12년의 재위기간 전반기에는 국정을 그럭저럭 처리했었다. 그러나 그 정치력을 대규모 숙청에 활용하고는 군왕의 책임감을 망각하고 멋대로 살기 시작하면서 비가역적인 폐해를 남기고 물러나게 된다. 이들은 '숙청과 황음으로 국가의 전성기를 끊어놓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 후계자'라는 점에서 평행이론 수준으로 전형적인 사례이다.[5] 퇴위한 상황이 금상 덴노의 후계자 결정에 개입하여 덴노의 사망 이후 마음에 드는 또 다른 자기 아들을 차차기 덴노로 삼으면서도 기존 덴노의 후손들이 그대로 계승권을 갖는 등의 복잡하고 비정상적인 덴노직 계승이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누가 덴노로 즉위하든지 정통성에 컴플렉스가 생기는 정말 개나소나 권신 등 외부 세력의 지지를 받으면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남북조시대의 싹이 이미 그 이전 시대에 자라고 있었던 것. 심지어 나중에 남북조로 나눠지는 두 계통이 10년씩 번갈아가면서 덴노직을 계승하는 등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한다.[6] 고려고종, 조선 철종 등이 있다.[7] 대표적인 케이스가 후술할 페드루 2세와 무함마드 자히르 샤다.[8] 일본의 왕은 엄연히 천황이였다. 하지만 천황이 워낙 허수아비라서 실질적인 일본의 왕은 막부의 장군(쇼군)이나 다름없었다.[9] 예를 들자면 후한 환제, 영제. 고려의 우왕, 명나라의 만력제. 다만 자히르 샤의 경우는 딱히 전대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나지불라의 독재 및 탈레반의 만행으로 나라가 왕정복고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10] 암군을 무조건 만악의 근원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성 같은 것은 재발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A] A B 당연하지만 이런 군주는 어쩔 수가 없다. 장애에 의한 실수 또는 무능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11]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견훤이 걸핏하면 신검을 갈구고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중에서 추허조가 신검을 구하고 전사한) 2차 대야성 전투, 벽진군 전투, 고창 전투를 거치면서 견훤과 신검의 부자관계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그런 신검에게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생기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12] 패강진 일대 호족들과 서경총관이었던 왕식렴 세력을 일컫는다.[13] 물론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거란의 침략을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거란은 송나라를 치기 전 배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14] 오죽하면 그가 죽자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15] 그의 사후 자식이었던 경춘원군이 광종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16] 그 예가 김보당의 난. 주도자인 김보당의 경우 평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인 인물이라서 무신정변 당시에는 무사했었던 것이다.[17] 이 세가지 업적 중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업적은 모두 손자인 성종 대에 도로아미타불이 된 감이 있다.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 시절 만들어진 법이고, 세조가 쿠데타로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이를 폐지한 것이다. 이 법이 부활한 것은 성종 대로, 이에 애민정신이 상당했던 세종이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부민고소금지법이 사실상 성종 대에 만들어진 법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18] 전근대 국가에서 국왕 및 최고 권력자의 횡포로 2년만에 나라가 쑥대밭이 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유명한 동탁이나 망나니 손침도 무너져가는 나라에 쐐기를 박은 것에 가깝지만 어쨋든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기간은 단 2년이었다.[19] 왕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면 신하들은 '그건 연산이나 하는 짓입니다'하고 주장하게 된다.[20] 인재풀로는 조선의 올스타급 능력자들이 모인 세종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세종의 경우 신하들이 능력이 있어도 뭔가 성격이 무지막지하게 드세다던가 뇌물, 친인척 비리 은폐같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던가 온갖 사건사고를 시도때도없이 치던가 하는 임금 입장에서 참 컨트롤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던 반면, 선조는 또 그렇지도 않아서 휘하 신하들이 전쟁통에 휘말려도 끝까지 국가와 임금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인재 보는 눈 하나는 정말 조선 역대 임금중에서도 수위로 꼽을만 하다. 당장 선조의 최고의 인사 업적인 이순신만 해도 전쟁 중 선조의 끝없는 의심과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죽을때까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분골쇄신했다.[21] 어차피 즉위할 광해군인데 왜 견제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임란 발발의 책임으로 신하들이 선조가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많았기 때문이다.[22] 세간의 평대로 선조의 파천이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을 당황시켜 시간을 끄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항전 한번 시도해보려 하지 않고 일단 도망가려는 자세는 군주로 실격이며 무엇보다 언제고 요동으로 어가를 옮겨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입조하려 했던 점은 도저히 커버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차라리 선조를 적극적으로 실드칠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머리는 좋다, 결과는 좋았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23] 사실 선조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순수한 인물의 현실을 후세대 사람들이 선악에 비추어 판단하려고 하기에 벌어지는 왜곡 현상이다. 선조는 전쟁 도중에도 지능 하나는 비상했으나 그게 스스로 국가를 파탄내며 이득을 취하는 행동이라서 찌질이로 욕을 먹는 것이고, 무려 40여년이나 통치하면서 지능적인 분야한정으론 항상 우수한 능력을 보인 2개의 얼굴을 가진 임금이다. 하지만 교육적으론 워낙에 본보기가 되기 어려운 국가 지도자인지라, 그냥 무능한 바보라고 가르치는 케이스가 많은 편.[24] 최근에는 민족주의 진영에서 광해군을 옹호하고 있지만, 초창기의 광해군 재평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과 중국의 심리적 거리감을 떼어놓기 위한 명목이었다. 즉,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조선과 중국을 서로 분리하는 역사적 거리감을 만드는 시발점으로 이용하기 위한 관점에서 일본 측이 광해군을 이용했다.[25] 사실은 인조가 복수귀가 되어 반정을 일으킨 것도 광해군이 굳이 방계 왕족이었던 인조의 동생을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밖에도 광해군의 찌질한 숙청 때문에 반란을 준비하는 당파와 왕족이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26] 인조는 본래는 왕위와는 연관이 없는 평범한 방계 왕족(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한참 왕권 강화에 미쳐서 왕족과 신하들을 죽일 때, 인조의 어린 동생을 잡아서 죽어버렸다. 게다가 광해군은 왕기가 서린 집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조의 가족이 살던 집을 빼앗았고, 이로 인해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아들의 죽음에 이어 살던 집까지 빼앗긴 울분때문에 홧병으로 죽게 된다. 당연히 광해군에 대한 인조의 복수심은 폭발했고, 마침 쿠데타 세력이 복수에 미친 인조를 얼굴마담으로 사용했다.[27] 실제로도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으므로 이걸 근거로 구한말 역사를 논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28] 고종이 임오군란에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는지는 애매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결정은 교차검증까지 되는 사실이다.[29]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독립운동가 수준의 활동에 그쳤고, 황제로서의 직위와 영향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고종이 더욱 영리하게 나섰다면 아내처럼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30] 그러나 반론을 보게 된다면 사실상 많은 경제적으로 복구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하면서 8.3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이나 문화개방 등 상당부분 계획경제 틀외에서 상당부분 사적생산단위와 생필직장을 통해서 외화상점으로 돈표를 가지고 여가를 보내는 과정이나 외국영화 등을 감상이 가능하며 사적생산단위를 통해서 돈주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 김정일과 김정은 때에 국영기업이나 무역회사를 경영하게 된다. 어찌보면 공업은 박살났지만 개인이기주의가 발현되면서 상당부분 자립이 가능하게 된 것도 이때까 시초였다.[31] 그러나 김정은도 사실상 암군의 위치의 역사 과정이 왜곡된 면이 존재하고 있으며 사실상 2012년과 2013년, 2014년, 2016년, 2019년에 상당부분 경제개혁조치를 실현화하면서 돈주의 발생을 인정하고 수익을 보장하라는 지시가 내린 바가 있다. 특히 기업소법과 무역법, 양어법, 축산법, 농장법, 편의봉사법 등 상당부분을 개정하면서 주민들의 양어와 기업소 설립 그리고 돈주들의 부동산관리법 등 상당부분을 허용하면서 개인 소유권이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인정이 되었다. 그리고 돈주들이 김일성 대에는 수천에 불과하였고 김정일 때에는 많아야 24만 명 정도로 추산하다가 김정은때에 와서 200만 명대에 증가하게 되었으며 특히 개인소유권의 확립 과정을 인정하며 자동차, 부동산 그리고 그러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사용권으로써 인정하였으며 현재는 만방 망TV 다매체열람기와 목란 수자식다매체열람기 등을 개방하면서 엑스트라넷을 인정하였으며 경제성장률도 미미하지만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연간 5.1%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물론 그래봐야 230억 달러에서 335억 달러 밖에 증가하지 않았다는 단점이면서 상당한 경제가 발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김일성과 김정일처럼 상당한 피를 손에 묻혔기 때문에 그만큼 암군의 위치는 돌이킬 수가 없다.[32] 이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소외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조창, 조식, 하후상이다. 자신의 동생인 조창조식을 죽이거나 소외시킨 것은 그나마 황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핑계라도 댈 소지가 있으나, 자신의 방계친척인 하후상을 죽게 만든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가뜩이나 황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외척과 황족들을 배제하고 방계친척 위주로 그것을 대체한 상황에서 하후상이 죽자, 유사시 황실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막 역할을 할 인물은 조진, 조휴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는 두 인물이 죽을 경우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진, 조휴가 연달아 죽은 후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조상자신의 아버지숙부에 비하면 함량미달의 인물이었고, 결국 조상 일파가 사마의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자 위나라는 바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33] 제안한 사람은 진군이지만, 실행을 명한 건 조비다.[34] 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제도[35] 어디까지나 초기 한정이다.[36] 그런데도 홍농, 장안동관까지 함락되었느니 당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37] 사실 악비 자체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많다. 악비라는 인물의 평가에 따라 송고종명군으로 보느냐, 암군으로 보느냐가 갈린다.[38] 천순제 시절에는 그래도 간신들을 처단하고 우겸의 일을 제외하곤 꽤나 깨끗한 정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9] 원래 의미는 도타울 가(嘉), 아름다울 정(靖)인데, 같은 발음의 다른 의미로 집 가(家), 깨끗할 정(淨)이라고 바꿔 불렀다. '집이 깨끗하다' 라는 의미인데, 청소를 해서 깔끔한게 아니라 가난해서 집안에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다(...)[40] 현재는 후술할 내용대로 건륭제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면서 아버지인 옹정제가 실질적인 중국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족 왕조에 국한하면 명나라의 홍치제가 마지막 명군이다.융경제는?[41] 백련교도의 난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건륭제다.[42] 사실 태국은 명목상 입헌군주제지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깝다. 왕가와 군부가 한통속이기 때문.[43] 아우랑제브의 이 탄압이 나중에 마라타 동맹의 난을 불러오고 이는 영프 등 서구 열강의 침투를 가속화했다.[44] 쉴레이만 대제 사후 오스만 제국의 명군은 무라트 4세가 유일하다. 대제 말년의 실책이 나라를 기울게 한 셈이다.[45] 오스만 제국은 유목민 전사 집단에서 출발한 나라이며, 이러한 전통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에 따라 오스만의 황제는 전사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수틀리면 직접 전장으로 향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실제로도 창건자 오스만 1세로부터 쉴레이만 1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사를 직접 지휘해 본 경험이 최소 한 번 씩은 있었다.[46] 형은 명군인데, 본인은 아니었다. 다만 형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했기에 정신병을 얻은 것은 감안해야 한다.[47] 앞에 나온 성경을 보면, 아말렉 출신 병사가 다윗에게 내가 당신의 원수인 사울을 죽였다라고 입을 털다 다윗의 명에 의해 죽었다는 내용이 나온다.[48] 라틴(서방)인 대학살[49] 억울하게도 위의 안드로니코스 1세만큼이나 그간 악명이 높았다.[50] 이 사람이 영국 내에서 암군 소리를 듣게 된 이유는 순전히 말이 안 통해서였다. 모어로 독일어를 썼고, 프랑스어, 라틴어에 능통했으나, 문제는 늘그막에 덜커덕 왕위를 이어받은 나라의 언어인 영어는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의원들과는 프랑스어라틴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고, 결국 이에 지친 나머지 모국인 하노버 선제후령의 통치에 집중하고, 영국 문제는 의회에 맡기고 신경을 끈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하노버 지방에서는 성군으로 칭송받지만, 영국에서는 그 물에다 물탄 것 같은 싱거운 사람 취급받는다(...). 비슷하게 자신이 왕이 된 나라주류 언어를 못했던 칼 14세 요한은 반대로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쪽은 자신의 모국을 사실상 배신한 덕분에(부르봉 왕정복고를 지지했기 때문에 부르봉 가문의 입장에서는 은인이었던 면도 있지만) 자신이 왕이 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지 1세가 프랑스어가 모어가 아닌 제2언어라서 영국 귀족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것과 달리 칼 14세 요한은 프랑스어가 모어라서 스웨덴 귀족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것이 매우 편했던 점도 크다.[51] 미국인 이혼녀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해 그녀를 왕비로 세울려 했지만 당연히 의회와 영국 국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시달려 끝내 왕위를 동생 조지 6세에게 넘기고 퇴위했다.[52]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 2차 세계대전연합국으로 참전해 수많은 군인들을 잃고,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문자 그대로 나치라면 치를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때 왕이었던 사람이 나치를 옹호하고 있으니 그 반응은 가히... 정작 동생 조지 6세는 버킹엄에 있다가 폭격에 죽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전쟁을 수습하고 영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잦은 스트레스와 폭연으로 결국 폐암에 걸려 형보다도 먼저 죽었다.[53] 궁전 증축 자체는 그리 큰 재정낭비는 아니었지만 여러 악재 속에서 궁전을 지은 것은 실책이 맞다.[54] 제임스 2세가 이를 비판하며 종교의 관용을 추구했다가 기득권 눈밖에 나서 명예혁명으로 폐위당했다는 건 종교 억압이 비단 프랑스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55] 그런데 사실 이런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다. 왕이 문제고 왕정 자체를 몰아내야한다라고 명분을 세우면 국가 전복 시도로 찍혀 목이 짤리기 딱 좋다. 그래서 왕을 직접 비난하지는 못하고 그 신하들이 무능하니 왕에게 국민의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봉기의 목적으로 내세운다. 당장 동학농민혁명도 이를 봉기의 목적으로 내세워서 전근대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는 평도 듣고 있으니..[56] 대표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있다. 이 전쟁 덕에 나폴레옹 군대는 항상 전쟁을 치를 때 이중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57]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위성국으로 삼은 틈을 이용해 라틴아메리카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58] 본인의 실책과 비스마르크의 노련한 외교술의 결과였다.[59] 사실 유전학적으론 큰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자세한 것은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 문서 참고.[60] 대표적인 사례로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마찰을 두 차례 빚은 것이 있다.[61] 다만 삼제동맹은 비스마르크의 역량 덕에 성사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62] 어느 정도로 오판했나면, 분명히 정황상 세계대전급으로 커질 조짐이 보이는데도 황제라는 사람이 개인요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63] 물론 전쟁의 근본 원인은 프로이센의 도발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이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64] 그 전비가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이었으며, 요제프 2세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난 결정적인 이유도 마리아 테레지아 대에 소모된 막대한 전비 때문에 개혁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65]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쇤브룬 궁전을 건축하는 모습, 100여년 전 자국을 멸망위기에서 구해준 국가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멸망시키는 모습이 그 사례라고 볼 수 있다.[66] 이러한 일이 생긴 이유는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살리카 법에 의거하여 남성만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제국도 원래는 살리카법에 따라 남성만이 제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던 카를 6세가 국사조칙을 통해 이를 폐지함으로써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위·헝가리 왕위·보헤미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67]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헝가리의 반란은 결코 진압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크림 전쟁 때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의 통수를 친다.[68] 심지어 1880-90년대에 이르게 되면 독일의 산업역량은 이미 산업혁명의 종주국인 영국과 강대국인 프랑스를 추월할 정도였다.[69] 특히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제국 내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손꼽혔으며, 지역민들조차 굶주림이 가득한 땅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70]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71] 대전쟁 확대는 빌헬름 2세의 책임이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등용해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더욱 파탄낸다.[72]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황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므로 이에 포함시켜 서술[73] 헝가리는 1925년에 초인플레이션으로 기존 화폐를 갈아엎고 헝가리 펭괴를 발행해 화폐로 사용했다. 그 펭괴화 역시 대전 말의 초인플레이션으로 폐지되어 새로운 화폐가 발행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74] 부르겐란트가 오스트리아에 할양되고, 트란실바니아 전역을 루마니아에 넘겨주어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고, 수복 운동이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75] 뮌헨 협정과 빈 중재 등으로 남부슬로바키아와 북트란실바니아, 카르파테니아-루테이나 등을 챙겼지만 전후에 다시 상실한다.[76]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77]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78] 이 보충된 예산은 국왕의 정부가 별장을 사는 데 사용되었다.[79] 아버지가 저지른 추악한 만행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암군이 되었다.[80] 5부에서는 전형적인 악당인 이미지이지만 6부에서 밝혀진 사실은 나름 사정이 있어서 차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항목 참고[81] 34화 요술램프 편에서 등장.[82] 비록 자신이 원해서 왕이 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연애에 빠져 업무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고,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지내던 섬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은 참작의 여지가 없다.[83] 황제국 은행가의 입발림에 넘어가 자국 경제를 황제국에게 의존시키게 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상권이나 외교권 제공권 각종 이권을 팔아 사치를 부렸다. 이로인해 왕족 귀족을 제외한 바그다드의 국민들은 굶주리게 되고 더이상 팔아먹을 국가의 권리가 없어지자 국민을 노예로 수출한다는 미친 짓거리를(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미친 짓거리 맞다. 전쟁포로나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민을 노예로 파는것이니....)하려다가 친동생 사부마드와 이복동생 알리바바의 혁명으로 폐위된다.(이 둘이 아니었으면 반란으로 피의 축제가 벌어질 뻔했다...) 그후 추방되어 트란 섬에서 트란 문화를 연구하는데 이놈이 한 짓중 국민 노예수출이 라는건 독자들 입장에선 꽤 비판받는 일이라 후일담이라도 존재하길 바랬지만 완결이 날때까지 후일담은 없었다. 만화 마기가 비판받는 이유중 하나.[84] 이래저래 평가가 갈리는 편이긴 하나, 결국은 어디까지나 아스가르드를 통치하고 자식들을 사랑하려는 의도, 딱 그것 하나만 진심이었을 뿐, 그 수단은 여러가지로 잘못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85] 원래부터 막장이던 브륀 왕국을 분열시킨 경이로운 암군이다. 특히 후계자 문제를 아주 막장으로 해두었는데 지딴에는 왕비랑 딸을 지킨답시고(단 브륀 왕국에서는 딸 밖에 못낳는 왕비는 경시되고 왕녀는 계승권이 아예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공주로 태어난 자식을 남장시켰다. 자기 대에서 일어난 내란은 변경귀족의 활약으로 종식되었으나 결국 그 문제로 인해 사후에는 여왕의 정통성 가지고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냉정히 보면 왕국을 위해서 딸이 찬밥 먹는다 해도 왕비 이외의 측실을 두어서 후계자 문제를 제대로 해두었어야 했는데 딸 핑계를 대면서 넘어가 버렸다. 사후에는 그 딸이 여왕이 되어서 팔롱이 싼 X을 치우는데 고생하게 된다. 간혹 독자들 중에서는 그 딸 레긴도 암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레긴은 암군이 아니라 전대 왕 팔롱이 왕국을 막장으로 만들어서 지지하는 세력이 아주아주 약했다...[86] 왕은 아니지만 왕 다음 권력을 가진 공녀로 일단은 독립되어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는 공국의 수장이다. 무력은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 식견이나 외교파악하는 능력은 거의 0에 가깝다. 참고로 전쟁에서 한번 졌다고 무책임하게 자살해버린다.[87] 팔롱이나 피그넬리아에 비하면 양반이고 자신의 공국의 통치는 그럭저럭 한 공녀이나 최종목표가 지스터스 7국 지배와 같은 음모를 꾸며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 때문에 소피야 오베르타스와의 관계는 매우 나빠지고 만다.[88] 무한도전 춘향전 특집 때 설정 상 이몽룡 포지션으로서 과거 시험에 응시한 멤버들에게 문제를 출제하는데, 문제는 시험장에서 과거 응시자들을 앞에 두고 먹방을 찍는다거나, 용안이 뭔지를 몰라서 무식쟁이 인증을 제대로 하는 등, 왕으로서 영 아니올시다스런 모습만 보여줬고, 그러면서도 답을 틀린 멤버들의 얼굴에 먹칠을 해대는는 심술을 부렸다. 결국 시험의 말미에 전원 정답을 맞춘 멤버들에게 역관광당하여 온 얼굴에 낙서칠당하는 먹의보복을 당했다(...).[89] 지략과 정치술, 전투력, 지휘력, 행정력 등의 능력 하나는 세계관에서 손에 꼽는 탑클래스이다. 기술력, 경제력에서 훨씬 떨어지는 켈모리안 연합 하나 제대로 제압 못하는 테란 연합의 무능한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냉혹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적을 너무나 많이 만들었고, 덕분에 폭압적이고 가혹한 정치를 펼치는 것은 기본에, 심지어 황태자(후계자)인 아들마저 정적으로 몰아 죽이려 든 것은 크디큰 패착.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낸 적들 때문에 자치령은 끊임없는 외부 침공에 시달렸고, 그 중 최악의 적에게 살해당하고 만다.[90] 능력도, 무력도 출중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이 탈다림을 장기말로 쓰고 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섬기는 광신도였고,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려고 했다. 결국 보다못한 알라라크댈람을 끌어들여 라크쉬르 대결을 벌여 폐위와 동시에 살해당한다.[91] 이 사람이 황제로서 한 일은 간신인 박중헌에게 놀아나면서 충신이자 명장군이던 김신을 자기보다 인기가 많단 이유로 질투심에 눈이 멀어 반역자로 몰아 자결하게 하고, 그의 누이이자 자신의 황후였던 김선을 비롯한 김신의 일가친척들을 몰살시킨 후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 밖에 없다.[92] 이 사람은 그야말로 세계관 최악의 암군이다. 무능한 주제에 괜히 툭하면 끼어들기만 해 잘 될일 다 망쳐 동생 기스카르한테 걸림돌만 되었다. 특히 악당 보댕이 이 사람의 멍청함을 이용해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나라일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는지 그가 죽은 뒤 나라는 개막장이 된다.[93] 다만 맨처음부터 암군은 아니었고 나라를 발전시킨 최고의 명군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혈통이 끊길것이라는 예언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편집증이 생겨 미신을 신봉하고 며느리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며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을 파면하면서 암군이 되었다.[94] 다만 끝에는 후계자 결정을 잘한편이었다. 특히 장남이 워낙 막장이어서 정식 후계자로 임명하지 않아 그가 병이 들어도 장남이 함부로 권좌를 차지하지 못했고 나중엔 정상인 차남을 후계자로 임명하여 나라를 보존할수 있었다.[95] 마검 스톰브링거의 영향도 있지만 황제로서 한 처신을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암군이다. 이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라까지 말아먹었고 본인도 평생 마검 스톰브링거한테 이용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된다.[96] 라이트 노벨로 나오는 여성 군주중에서 암군 오브 암군으로서 선왕 사후 즉위 때는 오르트메아 제국의 계략으로 게르하르트 공작이 사생아 제 2왕녀를 지지하게되어 내전이 일어났는데 불리한 전세에서 주인공 미코시바가 크게 활약하여 역전시키지만 측근인 미하일이 호승심에 닥돌하다 게르하르트 공작파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진다. 내전의 주범인 게르하르트 공작은 미하일을 거래로 2왕녀를 인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루피스는 그 거래를 수락한다.....측근 하나 때문에 내전의 원흉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즉위 했는데 내전에서 활약한 미코시바는 믿을수 없고 그렇다고 약속 지켜서 왕국 밖으로 보내버려 타국에 등용되면 잠재적 위협이 되어버린다는 논리로 내전에서 활약한 영웅에게 남작 작위를 주고 미개발 오지에 보내버린다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근데 이건 타인이 제안한 방법을 그냥 그대로 따라한거다..몰랐다 해도 내전의 원흉에게!) 덤으로 내전에서 삽질해서 근신받던 미하일은 측근이라고 2달만에 복직시켜 버린다. 내전에서 미코시바의 활약으로 끌여들인 중립파는 당연히 이같은 여왕의 행보에 제대로 된 충성을 줄수 없었고 더구나 측근이라는 놈들이 죄다 무인출신이라 명령만 내리고 닥달하는 식이라 내란 이후에도 로제리아 왕국은 피폐해져 버렸다.[97] 사정을 알아보고 배상만 했다면 전쟁을 피할수 있었는데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드워프와의 전쟁을 일으키고 말아 패하며 본인의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엘프 왕국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 패배로 인해 엘프가 건설한 식민지들도 모두 상실하여 올드 월드에서 엘프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98] 정무에 큰 관심이 없고 유흥에 몰두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암군이 맞다. 하지만 이따금 날카로운 뜻이 담긴 발언을 하는 등, 평면적인 암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2차 창작 등에서는 실제로는 유능하지만 제국의 막장 상황에 회의를 가지고 차라리 멸망하길 원했다는 해석도 나온다.[99] 이쪽은 타국의 백성들이 불쌍하답시고 자국민을 버렸다....[100] 진격거 세계관의 만악의 근원 사실상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데 우연히 (자기딴엔) 죄 지은 노예가 거인의 힘을 얻고 자신에게 복수하지 않고 순종하자 그 능력을 썼을뿐이다. 그 노예의 사후 능력이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지 못했다면 그가 세운 왕국은 주변국의 보복에 100% 망했다.[101] 그냥 꼭두각시. 셰필드가 없을때 트리스테인 게르마니아 연합에 겁을 먹었다.[118] 앙리에타의 할아버지.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지만 내정은 엉망이었다. 때문에 본편 시점에서 트리스테인은 패권 국가에서 지역 강국으로 위상이 하락했다. 마자리니가 없었으면 아예 약소국까지 추락했을 것이다.[102] 허무의 마법사라서 왕태자 시절때는 4대계통 마법을 못썼고 이를 모르는 주변은 마력이 없다고 평가해 모친마저 없는 자식 취급하였다. 훗날 비교하던 동생을 암살하게 되고 그 허무함에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사망한다. 능력적으로는 암군이 아닌데 결과는 자신의 왕국 갈리아의 초토화[103] 교황인데 재앙(대륙이 하늘로 떠버리는 현상)을 막겠답시고 세계 이주라고 하여 태평하게 살고있는 주인공측 세계(지구)를 정복하려고 했다! 공중전 최강이라는 알비온 용부대가 고작 구식유물제로센 1기에게 털리고 수많은 군대조차 어쩌지 못하는 요르문간트를 티거 하나로 상대가 되는 수준으로 말이다! 앙리에타가 지구세계와 대화를 할 생각 없냐고 물었을때는 대화로는 평화를 이룩할수 없고교황 맞냐?기습공격 운운했다. 앞에 있는 죠세프는 최소 자국 하나만 망쳤는데 이놈은 최소 다섯 국가를 지옥으로 만들 뻔했다... 지구 침공을 제외해도 왕인 타바사를 납치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였다.[104] 인품은 훌륭하나, 왕도 인섬니아의 시민들과 킹스글레이브 단원들 입장에서는 암군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자신이 어리석은 왕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본인도 인정한 부분.[105] 작중에서는 끊임없이 성군으로 미화되지만…….[106] 드라마 상에서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북벌만 추구하는 암군의 모습이 추가되었다. 현실의 궁예도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드라마 상의 모습은 작가의 창작이 꽤 들어갔다.[107] 비록 왕은 아니지만 지구의 신인 위치에서 블루의 작중 무능함과 뻔뻔해 보일 태도 덕분에 러블리를 포함한 프리큐어들이 아니였다면 자신이 연관된 왕국과 지구는 끝장 났었을 수준이었다.[108] 성국의 성황으로(성국은 투표로 뽑는다.) 성품은 좋은 편이나 타인을 의심할줄 몰라서 개혁으로 나라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상소에 곧이대로 믿어 성국을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그렇게 신하들의 계략에 의해 이용당하던 중 현자의 충고에 성국의 상황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되고 자진 퇴위하여 투표를 통해 다음 성황은 제대로 된 성황을 뽑을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무산되고 만다. 변호하자면 성국의 부패가 쌓이고 쌓인게 너무 커서 뭉클리아는 커녕 평타치는 군주라고 해도 커버가 불가능했던 상황.[109] 성국의 뭉클리아 다음의 성황이자(허수아비인 제로경은 퇴위되었다.) 최강의 검 성국의 초대 성왕이다. 출신은 상급기사 출신으로 이름 그대로 금수저다. 히어로 메이커 세계관의 이어 후술할 베르미누 3세와 맞먹는 암군이며 결과로 따지면 성국을 아예 아작내 버리고 신이 인류에게서 성법을 거두는 설령 성국이 막장이 아니어도 커버가 불가능한 암군이다.[110] 제국의 황제로 골드수저와 다르게 멀쩡하게 돌아가는 제국을 즉위 2년만에 내란 상태로 만들었던걸 보면 질이 더 나쁘다. 즉위 초기 공물 안바친다고 세날에 쳐들어갔는데 세날은 이길수 없다는 군경험자인 힐리스의 직언에도 쳐들어갔다가 대패해 겨우 살아돌아왔다. 그 상황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폐륜왕의 이간질에 넘어가 자신을 지키는 힐리스를 죽이려고 했다!(힐리스는 원정으로 대패한 베르미누를 지키다가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힐리스 휘하의 기사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민들을 학살하였고 지왕의 혼을 풀려는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결국 이번에는 제대로 빡친 힐리스가 근위대 100명을 1초컷으로 날려버리고 베르미누에게 마지막 직언을 올린 뒤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봉인된 지왕의 혼을 홀로 지킨다. 이후 힐리스와 인연이 깊었던 이복형제 후안이 제국의 충신 힐리스를 죽였다며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힐리스가 없어 후안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후 외척인 숙부 머튼경에게 의지하다 장식뿐인 자리에 올라 명분으로만 이용당하면서 약을 먹고 폐인이 된다. 덧붙여 베르미누 전대 황제는 평민인 힐리스를 제대로 기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사후 베르미누 3세가 아닌 제국의 미친 황제로 불린다.[111] 이문대라는 것이 발전 가능성이 없어진 세계이며 실제 각 이문대의 왕들의 운영방식을 본다면 도저히 답이 없을 정도의 세계관들 뿐이다. 다만 평화롭고 완전한 세계를 만들려고 스스로의 의지로 장기집권한 시황제와 신 아르주나와는 달리 이반 뇌제와 스카디는 극한 상황에 몰려서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시황제는 자기에게 반기를 든 삼국지의 영웅들을 포함한 각종 반역자들을 잡아서 태산에 냉동수면시키고 기술독재와 우민화 정책으로 반역의 싹을 뿌리까지 뽑아버리면서 인류의 진보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억지력에게 전정 사상으로 처리 됐지만, 적당히 먹고 살면 그만인 평범한 서민들 입장에서는 시황제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곡식이 자라면서 먹고 살기에 편하고 전쟁도 사라지면서 군대에 갈 필요도 없으며 시황제가 준 보약으로 병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늙음의 고통을 받기 전에 안락사하니 노래라도 부르지 않는 한 지상낙원을 만든 건 사실이다. 신대거신해양 아틀란티스, 성간도시산맥 올림포스도 신대를 끝내지 말고 지구를 계속 지배하기를 선택한 제우스에 의해 인간들이 신에게 종속된 신민으로 전락했지만 아틀란티스의 주민들은 수명이 800년 이상에 마수를 쉽게 잡을 정도로 강해지고, 올림푸스의 주민들은 불로불사가 되고 서번트 이상으로 신체 능력이 향상되며 고등교육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발전이 아닌 정체와 안락함에서는 이문대의 진나라 이상이라고 봐도 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