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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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2호

746호

747호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 봉투 및 의거자금 송금증서
매천 황현 매천야록
매천 황현 오하기문


1. 설명
2. 평가
2.1. 기타


1. 설명[편집]




구한말 학자이자 재야 문인 매천 황현[1]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기록물이다. 총 6권에 7책으로 되어 있다. 황현은 경술국치 후 얼마 뒤 음독 자살했는데, 그가 자결하기 전까지의 기록은 고용주가 기록했다. 1차 사료로서 역사자료가 되기는 하나 역사서는 아니며 당대에 풍문으로 떠도는 온갖 카더라 통신을 위주로 쓴 일기에 더 가깝다. 예를들어 구한 말 왕실과 위정자들의 부패에 관한 현재의 낭설의 대부분이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2] 그래서 단순한 번역가였던 김택영 같은 인물도 포함되는 근대 초기 사학사에 황현의 이름은 없다.

1864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 이전까지는 큰 사건들만 기록하다가, 갑오 개혁을 전후한 시점부터 1910년까지는 기록이 상세해진다.

정식 사서가 아니기 때문인지 유교적 사관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시니컬하고 쿨한 느낌의 문체를 사용했다. 그래서 위정자들의 잘못이나 하늘같은 상감 마마의 행적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고, 서양 세력이라고 하여 특별히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고 청나라의 행각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등의 사고의식을 엿볼 수 있다. 예외는 일본. 처음에는 '인'으로 서술하다가 이들이 조선을 넘보는 수위가 높아지면서 '왜놈'으로 일관되게 표현이 바뀐다.


2. 평가[편집]


기존 실록이나 사서, 외국 자료 등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구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매천야록은 저자가 역사사로 기록한것이 아니라 개인의 기록이며 사건들의 중심에 있어서 교차검증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역사서로 보면 안된다. 무엇보다 저자의 의도가 역사서를 집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뇌피셜.

특히 저자는 동학 농민 운동을 '동비(동학+비적)의 난동'으로 표현하는 등 동학군의 행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동학 운동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사정들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나, 방법에서 동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본 것. 그런데 이건 당시 조선에서 일반적인 민란에 대한 사대부의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 표창을 받은 위정척사파는 물론이고 개화파들도 일관적으로 그들을 도적떼나 역적으로 보았으니 그리 충격적인 일들은 아니다[3]. 사대부인 그가 공감한 것은 민란의 배경이지, 동학 운동 그 자체는 아니였다. 자신이 직접 참여한 독립협회에 대해서 대단히 호의적으로 기술해놓았는데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매천야록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기록해놓았서가 아니라 당시 공식사료들이 개연성 부분에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의 이유들이 왜 그랬는지 적어놓았고 당시 소문이나 세평들을 가감없이 기록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비판적으로 참고하기도 하였다.

매천야록이 사료로서 조금이라도 평가를 받는다면 황현이 살던 당대에 흘러다니던 야담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과 사대부이자 일부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이 이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뤘다는 점 때문이지, 내용 자체가 신빙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의친왕의 모친의 사망 시기가 정사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거나, 이완용자기 며느리의 무릎을 베고 있는 것을 일본 유학 갔다온 장남이 보고 충격을 받아 자결했다는 이야기(이완용 문서를 보면 알지만, 시간대부터 안 맞다.)나, 아무개는 고자라서 쓸모가 없었기에 아무개 부인이 바람을 피웠다 같은 루머, 김병국민규호거시기한 관계였는데 김병국이 판서가 되자 민규호가 "대감이 판서이니 이제 나는 정경 부인"이라고 농을 걸었다는 당시 우스개소리도 있다. 이는 사료상으로 가치가 있는게 아니라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어떤 루머와 소문이 돌고 반응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당시 민중이나 사대부의 생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도움이 되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읽는 사람의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한 책이라 이 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떤 사건이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는 철저한 사료 검증의 노력이 크지 않고, 저자의 취향에 따라 혹은 단순히 주위에서 도는 야담을 수록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황현은 독립 협회에 참여하는 등 객관적 관찰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그렇다고 직접적 관계자라서 내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지식 부족이 두드러진다. 때문에 저자의 취향이 아닌 인물이나 당시 민중들에게 악평을 받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학계에서는 그냥 평판이 어떻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지만. 문제는, 대중의 입장에선 이 책을 읽고 나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내용이 바로 이런 신뢰성이 불분명한 자극적인 기록들이라는 것이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 다른사료와 교차검증 해서 판단할 내용이고, 개인적인 평가역시 당시 인물의 세평내지 소문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학술적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시기 정사인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기 때문에 읽다 보면 태평성대가 따로 없고 세도정치 시기 실록 또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수준이 이전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19세기 이후 정사라고 하는 실록은 다른 시대에 비해 사료 가치가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나 구한말에는 매천 황현과 같은 문인들의 일기나 주한 외국 외교관이나 선교사 수기등이 풍부 하기 때문에 사료끼리 내용이 충돌하면 교차해서 검증은 하되, 이런 내용이 왜 실렸는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한다.

그러므로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1955년에 한국 사료 총서의 제 1집으로 '매천야록'을 간행하면서 그 서문에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 하였다.

2.1. 기타[편집]


도무지의 어원 해석이 있다. 도무지로 바뀌기 이전에는 도모지였으며, 도모지(塗貌紙)는 얼굴에 창호지와 같은 종이를 발라서, 차츰 종이를 덧붙여 질식시켜 죽게 하는 사형의 일종이라고. 링크 하지만 이건 민간어원에서 보는 어원 해석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참고로 저자인 황현은 매천야록과 더불어 죽기 전에 썼던 절명시로도 유명하다. 그는 한일병합이 공표된 직후, “내게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아편을 치사량 이상으로 복용하여 자결했다. 그가 남긴 절명시에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 나라를 잃고 말았던 조선 말 지식인의 고뇌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링크

황현의 자결을 독립이나 계몽과 같은 실질적 행동을 거부한 회피나 변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적 관점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유학자인 황현의 자결은 단순히 개인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절명시 3수에서 드러나듯이 사회 지도층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책임 의식에 가깝다. 당장 유교에서 충의 상징으로 숭상하는 아쉬움은 있을 수 있겠지만, 시대적, 사회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행위를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2000년 6월 16일 도전 골든벨 경북고등학교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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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수 황씨로, 황희가 그의 선조다.[2] 황현은 수도와 동떨어진 지리산에 살며 자신을 등용하지 않는 세상을 비난하며 살아갔다.[3] 사실 동학 농민 운동이 지금처럼 위대한 민중 혁명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받게 된 때는 박정희 정부 시절이었다. 왜냐하면 박정희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동학군에 참가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 이전까지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대체로 '폭동'이나 '반란' 같은 부정적이었고, 그런 이유로 지금도 나이가 든 세대들이나 혹은 시골에 사는 노인들의 경우는 동학 농민 운동을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