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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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기병4.jpg
설리번 윌리엄 홈즈(Sullivan William Holmes) 작,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98년
영국 육군의 로열 스콧츠 그레이즈(Royal Scots Greys) 기병대[1]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군기를 빼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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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육군 기병 병과 휘장.
기병용 외날도 세이버 두 자루를 교차시킨 모양새다.
현재는 미 육군 기갑, 공중강습, 기계화보병 등의 부대 중 기병 부대에서 개편된 일부 부대가
전통 계승 차원에서 전투 병과 인원들이 해당 휘장을 사용한다.

1. 개요
2. 기병의 장점(위력)
3. 기병의 단점
4. 역사
4.1. 고대: 기원전 9세기 ~ 기원 후 4세기
4.2. 중세: 기원 후 4 ~ 15세기
4.2.1. 중기병
4.2.1.1. 랜스 돌격
4.2.1.1.1. 충돌
4.2.1.1.2. 백병전
4.2.1.1.3. 일격이탈 연속돌격 전술?
4.2.2. 경기병
4.2.3. 중기병 VS 경기병
4.3. 근세 : 기원 후 15~18세기
4.4. 근대 : 기원 후 18~19세기
4.5. 20세기
4.6. 21세기
4.6.1. 공중 기병대
4.6.2. 기갑 기병대
4.6.3. 주한미군 기병대
4.6.4. 기마경찰
5. 유명한 기병대
5.1. 현실
5.2. 가상
6.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6.1. 현실
6.2. 가상
7. 각종 매체에서의 기병



1. 개요[편집]


기병은 전투 전에도,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유용하다.[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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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4]


기병(, Cavalry)은 육군에 존재했던, 군마에 탑승한 채로 싸우는 전투병과를 의미한다. 똑같이 말을 탄다고 해도, 이동을 위해 말을 사용하는 보병 병과 장교, 기마보병, 포병, 수송 병과 등은 기병이 아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말 또한 훈련과정에서 단련된다. 말은 군마로 쓰기 위해서 최소 3년 정도는 집단 훈련과 빠른 걸음, 구보의 연습 및 사람과의 친화 등을 가르쳐야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훈련으로 능력을 키워나가야 했다.[5] 그런 말을 예비마까지 포함해 몇 필이나 거느려야 하는 것이 기병. 그래서 유목민처럼 목축이나 수렵 따위의 생업(生業)을 목적으로 사람과 말이 함께 자연스럽게 단련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위적으로 기병이라는 병종을 얻기란 무척이나 힘들었다.[6] 한마디로 고급 병과.

기병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무조건 말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기동력이 좋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건 반만 맞는 말이다. 여건에 따라서 기병은 말에서 내려 걸어다녔다. 항상 말을 타고 이동한다면 전투에 돌입했을 때 말이 이미 지쳐있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기병이 아무리 정찰대의 역할을 자주 맡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보병과 함께 다니기 때문에 보병과 보조를 맞출 겸 걷는 경우가 많았다. 겸사겸사 말도 좀 쉬고. 기병대가 진짜로 기동력이 우수한 이유는 이 가지는 수송력 때문이었다. 기병 한 명이 말 여러 필을 대동하기 때문에 수송력 또한 좋았다. 진짜 전투용 말은 어지간하면 짐을 싣지는 않았지만 상기했듯 기병은 말 여러 필을 대동한다. 반대로 보병의 기동력이 낮은 것도, 진지를 설치하기 위한 치장들의 수송, 진지 설치와 식사를 위해 늦어도 초저녁에는 진군을 멈춘 것 등에 있다.

냉병기가 효과적이고 화기의 위력이 좋지 않았던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단적인 예로, 사무라이 같은 무사 집단이 있었던 일본을 살피면 스와 분쿠로[7][8][9]와 같은 일개 기수에게 무사들도 손쉽게 패했다. 보병으로 유명한 로마조차 등자가 없던 시절에서도 기병 30명은 보병 100명과 똑같은 투표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러나 기병이 항상 보병보다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잘 훈련된 보병의 밀집대형은 기병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로마군의 내전에서도 카이사르 휘하 소규모 중보병대가 더 많은 수의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저지한 전과도 있고 고구려 동천왕의 중기병대는 위나라 관구검의 창병대에게 참패를 당했으며 프랑스 네 원수의 근위기병대는 영국 레드코트의 방진을 뚫지 못했다.

2. 기병의 장점(위력)[편집]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 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을 타고 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나는 기병들이 보병 대열의 중앙에 모여있는 것을 보였다. 그들은 창을 들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보병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자, 그들은 전선 곳곳에서 동시에 돌격을 시작했다. 한 부대는 우익, 다른 부대는 좌익, 그리고 세 번째 부대는 중앙으로 돌격해 나갔다. 우리 군사들은 그들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앙에 있었는데, 많은 군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가장 가까운 사단인 좌익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좌익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우익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그들이 좌익과 중앙보다 더 비참하게 도주한 것을 보았다.

바하 앗딘,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10]


왜적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적병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다른 기예(技藝)는 없고 단지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만이 있을 뿐인데, 그 궁시는 사거리(射距離)가 우리 군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만 그들의 전마는 힘이 매우 좋아 치달리며 진격하기에 적격이라서, 순식간에 아군(我軍) 속으로 돌입(突入)하기 때문에 아군이 저절로 그 위세에 눌려서 무너지곤 한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적에 접전할 때마다 꼭 패하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의 전마를 막을 기구를 설치하여 돌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군의 마음을 안정시켜 동요되지 않게 하고는 꿋꿋이 서서 사격을 하게 하면, 적병이 진입을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체하며 머뭇거릴 것이요, 그러는 사이에 선봉(先鋒)이 모두 죽으면 뒤에 오는 자들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 분명하니, 그들이 도망치는 기회를 이용해서 추격하며 사격한다면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조익, 『포저집』


기병은 아래와 같은 강점으로 인해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가진다. 크게 분류하자면 하나는 충격력, 다른 하나는 기동력이다.

  • 충격력은 기병이 가진 질량과 속도에서 오는 것으로, 말과 기수의 무게를 합치면 적어도 500kg이 넘어가고[11] 이런 덩치가 최소 50~60km/h의 속도로 달려오면 그 운동에너지는 어지간한 자동차에 들이받히는 것과 맞먹는다. 매체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갑옷과 방패는 엄청난 방호능력을 발휘했기에 화살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백병전에서도 단칼에 쓰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기병의 돌격으론 적 두세명이 그대로 꿰뚫렸다고 기록될 만큼 그 위력은 고전시대 다른 병과와는 궤를 달리한다.

  • 상대방에게 강력한 위압감을 주며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멀리서부터 돌진해 오는 기병대의 위압감은 상상 이상으로, 시각적인 위용뿐 아니라 소음, 특히 땅이 울릴 정도의 진동[12]은 아무리 대기병 훈련을 받고 무기와 방어시설을 준비한 보병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공포심을 선사한다. 기병대가 돌진해오는 것만으로도 비숙련보병들은 사기가 무너져 그대로 패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 기병 돌격의 충격력에 대열이 무너지면, 거의 대부분은 그걸로 끝이었다. 대열이 무너진 구멍으로 기병들이 계속 돌파해 들어오며 보병대의 내부, 후방, 측면을 정신없이 타격하기에, 아무리 정예보병[13][14]이라 할지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진형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 말이 가진 힘 자체도 무시하기 힘든 요소다. 전투마는 품종개량 및 훈련을 통해 전투에서 공격성을 발휘하기 마련인데, 말발굽질은 제대로 맞으면 뼈가 박살나며, 체급 대비 악력이 부족할 뿐, 반 톤에 이르는 큰 덩치에서 나오는 치악력은 굉장히 치명적이다. 이러한 점들은 방어구를 잘 갖추고 튼튼한 대열을 유지하고 있는 보병들에게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지만, 대열이 무너진 보병들이 기병에게 취약한 이유 중 하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경험을 수기로 남긴 프랑스 기병 장교의 기록에도 말이 한 입 물어 뜯으니 얼굴 가죽이 뜯겨져 나가고, 복강이 뜯겨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였다는 살벌한 내용이 있다.

  • 무엇보다도 기병의 절대우위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기동성 그 자체였다. 전쟁사상 명장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전략/전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원하는(유리한) 때에, 원하는(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것이다. 보병에 대해 압도적인 기동력을 가지고 있는 기병은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 있어 보병에 비해 싸울 때와 장소를 먼저 고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점이었다. 반대로 보병에게는 시작부터 엄청난 핸디캡을 깔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기마 그 자체만으로도 전장에서 보병보다 훨씬 넓은 시야(높이)가 보장되며, 각종 보고와 명령을 빠르게 주고받는 정찰전령에서도 압도적 우세였기에 보병대보다 훨씬 빠른 선제대응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기병은 오랜 세월 동안 전장의 주역으로서 활약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장 사기 수치가 구현되지 않은 RTS게임에서도 공격력-방어력 낮은 유닛이 이동속도가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코스트를 가지고, 그에 걸맞는 활약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는 걸 떠올려라. 비용마저 저렴하다면 사기 논란이 끊이지 않는, 매우 강력한 전략적 강점을 보일 테고.

  • 목책이나 마차, 장창병 등 장애물을 설치하여 충격력과 기동력을 저지하고, , 쇠뇌, 머스켓 등 원거리무기로 딜링을 하면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쯤은 머나먼 고대시절부터 다들 알고 있었다. 입스타는 누가 못하나 실제로 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장궁병을 잘 활용하며 연승했던 경우 등 예외적인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15][16] 기병이 가지고 있는 절대우위는 여전했다. 싸움을 피하고 상대방의 주위를 빙빙 돌며 방비가 잘된 곳은 피하다가 취약점이 보이면 그곳을 집중공략할 수도 있고, 탈출하려는 적병만 추적 도살하고 이따금 소규모 교전만 치르며 대규모의 적군을 이동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릴 수도 있고, 아무리 봐도 영 아니다 싶으면 그 전장에서 아예 떠나 버리고 상대방의 후방기지 등 또 다른 약점을 터는 것 또한 기병의 마음대로였다. 보병은 이런 변덕스러운(?) 기병을 따라 헉헉대며 뛸 수 밖에 없었으며,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기병보다 늦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보병들의 집중력이 좀 흐뜨러졌다 싶으면 킬각을 본 기병이 돌아와 쾅! 이런 일방적인 선택권 하나만으로도 기병이 (그 비싼 비용에도 불구하고) 선호되었던 것이다.

  • 근대 이후 기병이 가진 위력적 장점은 모두 퇴색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 까지 잘 써먹었고 2차 대전이나 심지어 현대전에 해당되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기병이 나름 활약했는데 보병을 쫓는덴 기병만한게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나폴레옹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적과 싸워야 했는데, 물자가 바닥나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승리하여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강화는 거절할 정도였으나, 러시아 원정에서 기병 대다수를 잃은 결과 막상 이겨도 큰 피해를 주지 못해 계속되는 전쟁과 그로 인한 물자 바닥과 등돌린 민심으로 인해 전투에선 승리해도 전쟁에선 패배하여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러한 강점들 덕분에, 기병대 쪽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 결과 보병과 기병의 싸움은 기병이 대부분 우위를 차지했다. 보병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 등 원거리 화력이 충분한 숙련병일 경우 전투의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기병 부대가 보조병의 지원을 받거나, 피해를 감수하고 정면돌격을 반복하여 어떻게든 짓밟는 경우가 흔했다.

이렇듯 기병은 전략적, 전술적으로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갖기에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담당하는 등 핵심전력으로 분류되어 왔다. 보병으로도 망치 역할을 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통 농경왕조처럼 기병전력이 부족한 경우에나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망치 역할로는 기동력과 충격력이 있는 기병을 더 선호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심지어 한니발 같은 전쟁사상 최고의 명장조차 기병전력이 상대보다 열세인 경우에는 패하기도 했다.

랜스(랜스차지), 스웜 전술, 망치와 모루 전술 등의 항목들에 기병의 속성에 대한 추가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참조하자.


3. 기병의 단점[편집]


이토록 강력한 병과가 기병이지만, 적지 않은 단점도 있다.

  • 전장 환경, 지형 및 기상환경에 따른 영향
가령 폭우가 쏟아지면 정말 답이 없는데 특히 물렁한 지형에서 폭우가 쏟아진다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말의 다리가 논두렁 같은 지형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면 완전히 살아있는 과녁으로 전락하고 만다. 말의 다리는 에 비해 생각보다 무척 연약해서, 수렁에서 억지로 빠져 나오려다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강의 기병을 지휘했던 맹장 신립탄금대 전투에서 지리멸렬하게 패배한 이유도 조선군 체제상 중기병의 부재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전날까지 이어진 비로 전장이 진흙탕이 되어 버려 주력인 경기병들이 제대로 된 기동을 할 수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코르테스남미 정복모세의 기적 수준으로 무적을 자랑하던[17] 23기의 기병도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다가 패한 적이 있다. 다만 이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뛰어난 기동성으로 불리한 지역을 피하고 유리한 장소를 먼저 골라서 싸우는 걸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또한 공성전이나 시가전같은 전장환경에서도 기병이 이점을 발휘하기 어렵다. 특히 공격쪽일 때 단점이 두드러진다. 위에서 소개된 기병의 이점인 기동력과 돌파력을 활용하기가 어렵고 말에서 내려 사실상 보병으로 싸우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8] 다만 그렇다고해서 기병이 공성전에서 무용지물까지는 아니었고 활용하기 나름에따라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2차 빈 공방전 당시에 폴란드군을 주축으로한 신성동맹의 구원군이 윙드 후사르를 앞세워 오스만군의 포위를 깨부수고 빈을 구원한 사례가 매우 유명하다. 반면 공자측이었던 오스만군은 산하의 크림 칸국 기병대가 인근 지역을 정찰하여 구원군의 접근을 미리 포착하고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어야 했으나 지휘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신성동맹군에게 허를 찔리고 대패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 보병의 밀집대형에 취약함
이는 부피와 질량의 차이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보병이 어깨를 맞대고 서면 1m 당 3~4명이 붙을 수 있지만 기병은 1명이 한계. 최악의 경우 기병 1명은 보병 4명과 동시에 대결해야하여 불리했다. 또한 말은 본능적으로 뾰족한 물건에 뛰어들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장창이나 파이크로 밀집대형을 이룬 보병은 기병으로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기병 역시 이 같은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카라콜 전술을 꺼내들거나 기병용 창의 길이를 늘리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총검[19]수발식 소총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기병이 밀집대형을 이룬 보병대와 정면대결하는 것은 도저히 승산이 없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7년 전쟁 중 프랑스 왕국군과 영국 및 동맹군 간에 벌어진 1759년의 민덴 전투가 있다.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군 중앙에 배치된 기병대 63개 대대[20]가 영국 및 하노버 전열보병 9개 대대와 정면 대결을 벌였다. 아직 대기병 방진이 도입되기 전 시기라 보병은 선형 대열을 이룬 상태로 포격을 맞아내어 가며 전진했고 프랑스군 기병대는 순차적으로 3파로 나뉘어 영국보병대에 돌격을 가했다. 이때에 프랑스 기병대는 영국 보병보다 숫적으로 우세한데다가 프랑스군 포병의 지원사격까지 받을 수 있었다. 전열보병들이 기병대의 말발굽에 짓밟혀 버릴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놀랍게도 영국 전열보병들은 예상을 뒤엎고 프랑스군 기병의 세차례에 이은 돌격을 모조리 분쇄했고 프랑스군 기병대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즉 18세기 즈음에 이르면 기병이 수적으로 충분한 상황에서조차 보병의 밀집대형을 정면으로 돌격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되어버렸다.
다만 장창이나 머스킷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밀집 대형을 이루었다고 기병에 완전히 무적까지는 아니었다. 보병의 밀집대형은 일반적으로 정면의 전투력이 매우 막강하지만 사실상 사각지대인 대열의 측면과 후방은 취약했다. 즉, 기병이 보병대열의 측면과 후방으로 우회할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보병도 대기병 방진을 짜면 사방으로 사격을 할 수 있어 기병이 상대하기는 어렵지만 대기병 방진을 짠 보병대는 적 보병과 포병에 그만큼 취약했다.[21] 결론적으로 보병과의 정면 대결이 어려워진 이후에도 기병은 강점인 기동성을 살려 적의 취약점을 타격하고 다른 병과인 보병, 포병등과도 협동함으로써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 지휘 통제의 어려움
기병은 정밀한 기동지휘 및 돌발상황 대응이 보병에 비해 어렵다. 기병돌격을 생생하게 그려낸 워털루(1971년 영화)나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같은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일단 돌격명령이 떨어져 수백~수천 기의 기병이 우르르 달려 나가기 시작하면 신호전달이 매우 어려워진다. 목소리는 커녕 나팔 소리도 듣기 힘들 정도로 소란스러우며 흙먼지 때문에 깃발신호를 눈으로 보기도 어렵기에, 한 번 시작한 돌격을 취소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22] 여기에 기병들이 차지하는 단위면적까지 매우 크다 보니 대형이 거대해지는 문제까지 더해져, 기병대가 정밀한 기동을 짜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정교한 작전 및 포진, 상황대응이 가능한 보병에 비해, 앞선 지휘제대의 방향전환에 따라 후속제대가 일제히 방향을 트는 정도의 매우 단순한 기동으로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다.
전근대~근대의 전투에서 기병은 일반적으로 양익 좌우에 배치되어 아군의 측면을 엄호하고 상대 양익에 배치된 기병을 우선적으로 격파하여 적 측면을 우회하는 양상을 보였다. 문제는 기병의 지휘 통제가 쉽지 않다보니 아군 기병대가 패주하는 경우에는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대로 적 기병을 격파했는데 통제가 어렵다 보니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거나 약탈에 몰두하느라 전장을 이탈해버리는 경우도 왕왕있다. 결국 기병전은 유리하게 전개되었는데 기병을 지휘통제하는데 실패하여 정작 전투에서는 지는 사례들도 많다. 전근대에 벌어진 브라이텐펠트 전투, 엣지힐 전투, 네이즈비 전투 등이 기병의 지휘통제가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 잘 나타난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같은 매체에서는 기병들이 시작부터 무조건 전력으로 돌격하는 그림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말의 체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트롭-캔터-갤럽으로 구분되는 속도 조절을 하며 적을 향해 나아갔다. 너무 빠르게 갤럽을 시작하면 적진에 닿기 전에 체력이 소모되어 말의 속도가 떨어져 충격력이 떨어지고, 너무 늦게 갤럽을 시작하면 적군이 대기병 방진을 짜는 등 대응할 시간을 주게 되는데다가 속도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진에 닿게 된다. 물론 공격로의 경사나 토질을 비롯한 지형이나 적의 화살 공격 여부 등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해서 기병 지휘관은 기병의 이동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속도 조절의 타이밍을 잘 재는 것은 훌륭한 기병 지휘관이 갖춰야 할 덕목. 특히 적 역시 기동하는 기병간의 전투에서 적절한 돌격 시점을 포착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했다.

위의 단점들은 지휘하는 능력과 전술에 따라 해결할 수 있지만 기병에는 이 단점들을 모두 능가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기병을 훈련 및 양성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엄청나다. 기병은 인간인 기병뿐 아니라 동물인 군마가 필수적인데, 군마는 가장 좋은 말을 골라 쓰는데다 이를 사육해서 훈련시키고 먹이는 비용이 장난 아니었다.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 대규모의 기병을 육성했던 한나라의 경우[23] 기병1기의 유지 비용은 보병의 8.7배에 달했다. 또한, 미국 남북전쟁 당시 기병대 1개 연대를 조직하는 데 당시 돈으로 30만 달러(지금 돈으로 약 80억원), 유지하는 데 연간 10만 달러(지금 돈으로 약 13억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지금의 미국은 겨우 수십~수백억원 단위의 비용에 그리 신경쓰지 않지만 당시엔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다.[24] 남군과 북군 모두 개전 초에는 비용 문제 때문에 기병대를 적극 활용하지 못했다.[25] 즉, 태어날 때부터 말 등에서 살아간다는 말이 있는 유목민족이 아닌 이상 기병을 양상시키는데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하기가 벅찼고 보병에 비해 숫자가 적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였다. 기병 1천을 키울 돈이 있으면 보병 거의 1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진짜 꼭 필요한 만큼만 딱딱 뽑은 것이다.
더구나 보병들이 먹는 군량(, , 등)에 비해 군마들이 먹어야 하는 마초()는 부피가 대단히 커서 수송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된다. 수송이 어렵다고 아무 풀이나 먹여 현지조달을 하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수백~수천 마리의 말이 먹을만큼 풀이 넉넉한 곳도 생각보다 드물다. 자주 간과되는 사실은 말은 거의 중량 400kg 이상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의 동물이라는 점이다. 즉 소비하는 식량의 양자체가 어마어마하다. 대규모의 군마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작전할 수 있는 환경은 비옥한 초지가 수십~수백만 km2 단위로 펼쳐진 스텝지대에서나 가능했다. 뿐만아니라 아무 풀이나 마구 먹였다간 말이 힘을 내기는 커녕 배탈 등으로 픽픽 쓰러질 수도 있기에 반드시 검증된 마초를 먹여야 한다.
물론 귀리와 같은 곡물을 군마의 사료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곡물을 규격화한 덩어리가 보급에 널리 활용되기도 했다. 헌데 건초가 아니라 곡물을 활용해도 말은 하루에 최소 장정 3인분에 해당되는 곡물량을 소비한다.
덤으로, 말은 도 많이 마시기에 식수 보급도 생각보다 큰 부담이 된다. 따라서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기병의 작전과 행군은 식수를 획득하기 용이한 곳으로 제한을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군마에 대한 보급의 어려움을 잘 묘사한 작품 중 하나가 남한산성(영화)인데, 애써 몰고 온 값비싼 군마들이 고립된 남한산성에서 제일 먼저 비상식량으로 전락하는(...) 생생한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밖에도 기병 운용에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있다. 대표적으로 수의사편자공이 기병 운용에 필수적이다. 즉 기병 운용을 위해서 보급체계가 복잡해진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수의사나 편자공 없이 배째라 식으로 기병을 운용할 수 있긴한데 이같은 전투근무지원 체계가 부실하다면 군마손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는다.

  • 군마 양성 및 획득의 어려움
여기에 또 다른 큰 단점은 말도 엄밀한 동물인지라 외부 요인에 멘탈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말은 낯선 환경이나 소음 등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혼란스러운 나머지 제어가 안되어서 기병이 패배한 경우도 많았다. 비슷한 예로 아케메네스 제국 창건자인 키루스 2세가 리디아 왕국[26]과 전투를 벌였을 때 페르시아의 군마와 달리 리디아 기병대의 군마는 낯선 동물인 낙타의 체취에 혼란스러워했고 페르시아군이 낙타부대를 앞세워 승리를 거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제대로된 기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기수 뿐 아니라 말 역시 군마로 철저히 단련시켜야했다.
따라서 기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훈련받은 군마를 획득하는 시스템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병이 도태되는 시점까지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까다로운 문제였다. 즉 기병을 일단 한번 대량손실한다면 단시간 내에 재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말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으니 훈련을 받은 군마들도 전장의 가혹한 환경, 특히 포위전시에는 대량으로 죽어나갔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원정 이후의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의 사례가 있다. 러시아 원정의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프랑스 군의 전력은 괴멸되었는데 기병 전력 역시 원정기간 동안 17만 마리가 넘는 군마를 손실하며 치명타를 입었다. 러시아 원정 이후 이어진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인적자원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어떻게든 프랑스군을 재건하여 40만여명의 병력을 편성했다. 문제는 이 대병력에 기병전력이 턱없이 빈약했다는 것이다. 보병 전력은 대대적인 징병령을 시행하는 한편 실업상태인해군 승조원을 보병으로 전환하고 포병 전력은 교회 종까지 징발하여 대포를 제조하여 어떻게든 수량은 맞춰놓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러시아 원정 당시에 나폴레옹 군에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1:1에 달했다. 원정 직후인 1813년 봄 무렵 뤼첸 전투 당시에 이 비율은 거의 8:1까지 떨어졌다. 이 비율은 나폴레옹이 근성을 발휘하여 기병대 재건에 매달린 결과 다소간 회복되었다. 같은 해 가을 무렵인 라이프치히 전투 즈음에는 프랑스 기병전력이 외형적으로나마 회복하여 보병과의 비율이 3.5:1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 편성된 기병대원의 무려 80% 가까이는 말을 한번이라도 타본 경험이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의 다른 병과 역시 기량저하 문제를 겪고 있었으나 기병대는 특히 심각했다. 프랑스군은 급히 훈련받은 기수와 군마를 전장에 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전의 기병대와 같은 역량을 기대할 수는 없었고 당연히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결국 부실한 기병전력은 전쟁 후반기부터 종전시점까지 두고두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는 문제가 되었다.

러시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의 기병대를 조롱하는 영국의 만평


4. 역사[편집]



4.1. 고대: 기원전 9세기 ~ 기원 후 4세기[편집]


고대은 품종 개량이 되지 않아 크기부터 작았다.[27] 승마도구인 마구(馬具)가 발달하지 않았고, 일부 기마민족을 제외하고는 직접 말을 타는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차가 많이 등장한다.[28] 기병은 보통 정찰용으로 쓰거나 말을 타고 투창의 용도로 사용하였고 말 위에서 칼이나 활을 쓰지는 않았다. 실제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기동 보병이 많았다. 후대의 용기병 또는 현대의 기계화보병과 유사한데, 말의 기동성만 이용한 것이다.

어쨌든 이후 말의 품종 개량과 마구 발달을 통해 무장한 전사(戰士)를 태우고도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군마가 탄생하면서 전차는 도태되고 중기병(重騎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등자없이 승마하여 칼과, 창, 투창, 활 등을 다루는 훈련영상.

고대에는 아직 등자가 발명되지 않았었고, 안장도 제대로 개량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낙마하지 않고 달리면서 창과 검을 자유롭게 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물론 초기에는 추격전과 투창 등을 이용한 유격전이 많았다가,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 때부터 장창을 들고 돌격하는 기병이 충돌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기병들도 창을 쥐고 적 보병을 향해 돌격하여 진형을 무너뜨리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실제로 수차례 승마실험을 통하여서 검증도 되었다. 물론 안장과 등자가 있는 것에 비해 승마 안정감이 떨어졌고, 중세 유럽처럼 겨드랑이에 창을 끼워놓고 돌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대의 유목 민족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전투법을 일찍부터 썼는데, 중국에서는 조나라 무령왕이 이들을 본떠 호복기사(호복을 입은 기마무사)라는 기병부대를 편성하여 승마에 적합한 의복과 무장을 갖추고 활을 쏘는 궁기병을 편성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 진나라에서는 냉병기로 무장한 기병부대를 별도로 편성하였는데,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기병대로 적의 보급로를 끊어서 승기를 잡은 일화가 유명하다.


4.1.1. 경기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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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조나라의 호복기사. 말이 대단히 작은데,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 마종의 크기를 고려하여 그린 것이다.

고대의 전장에서 기병이 처음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을 사용하는 궁기병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활을 든 기병대가 제일 먼저 등장하였으며 일찍이 아시리아 제국에서도 주요 병과로 취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기병대에 착안하여 등장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오랑캐 옷을 갖춘 기마무사)들 역시 을 쏘는 경기병이었다.

경기병은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스텝 지대로부터 동쪽으로는 만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목민들의 주력 병종이었다. 유목민들에게는 목축과 수렵이 생계수단이었기에 고대부터 자연스럽게 경기병이 육성되었고, 광활한 초원은 활을 필요가 아닌 필수품으로 만들었기에 양다리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양손을 이용해 활을 쏘았다고 한다.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스스로를 '활의 백성'이라 자처했으며 중국의 문헌에도 이들을 '장성 이북 궁술의 나라'라고 일컫는 표현들이 보인다.

빠른 기동력을 갖춘 경기병들이 다수 모이면 칼이나 창 등의 냉병기를 든 보병은 그저 과녁일 뿐이고 중기병조차도 대응이 힘들었다. 똑같이 원거리 무기를 갖추지 않았으면 이들의 화살공격에 맞설 수 없었고, 무장이 가벼워 빠른 탓에 말을 타고도 이들을 추격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병을 많이 보유한 유목민족들은 정주민들에겐 악몽같은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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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의 궁기병

이 활을 든 경기병들은 다른 병과들처럼 대오를 맞춰 적과 교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여러 뭉텅이로 쪼개어 적을 에워싼 뒤 벌레떼(swarm)처럼 우르르 달려들어 공격하다가 우르르 빠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반복되는 화살 공격에 적들이 손실을 견디지 못해 전투의지를 상실하거나, 대오가 무너지거나 할 때 중기병 등을 이용한 돌격을 겸하여 적을 무너뜨리기도 했는데 카르헤 전투가 대표적이다.[29]

다만 근접전에서는 불리하였고 마상사격이 일반 사격에 비해 어렵고 사거리가 짧아서, 보병들이 전투력을 온존하고 있다가 역습, 경기병들에게 근접전을 강요함으로써 패배시키거나, 보병의 화망에 압도당해 경기병이 패배한 경우도 많았다. 보병의 경우는 사거리가 더욱 길고 관통력 운동에너지가 모두 큰 롱보우/장궁을 사용한 반면 경기병은 말위에서 휘두르기 좋게(말위에서 사용할 때 덜 거치적거리는) 숏보우/단궁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컨데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때에 조나라 이목이 흉노군을 유인하여 백병전을 펼쳐 흉노군 10만 명을 몰살한 적이 있었고, 한나라의 흉노 원정에서는 곽거병이나 이감이 기병대로 돌격하여 백병전으로 이들을 제압한 이력이 있었다. 삼국시대 때는 원소군의 국의가 활을 쏘며 전진해오는 공손찬의 백마의종 기병부대를 방진과 쇠뇌를 이용하여 격퇴한 바 있고, 위나라의 전예조창과 함께 수송용 수레를 원형으로 빙 둘러 장애물을 삼아 원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쇠뇌를 쏘면서 오환의 기병대를 격퇴한 바 있다. 로마에서는 트라야누스 집권기에 기병과 궁병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파르티아 원정을 펼치어 유목민족 기병대를 제압하기도 하였다.


4.1.2. 중기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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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이

인류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이었으나, 말의 품종과 마구가 개량되어 보다 무거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어져 중기병이 탄생했다. 최초의 중기병은 고대 중동에서 등장한 카타프락토이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기원전 10~7세기경에 아시리아 기병의 화려한 장식에 영향을 받아 마갑을 입힌 카타프락토이가 등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말과 기수를 갑주로 감싼 중장기병은 기원전 5~6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때 화살에 잘 견디기 위해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때 중장기병은 철제 흉갑, 투구, 그리고 말 전면만 가리는 철제 마갑을 씌운 모습이었다. 활과 단창, 철퇴와 장검으로 무장하여 돌격과 돌파보다는 말을 타고 적을 기습하거나, 측면과 후방교란, 그리고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을 쏘는 적 궁기병 혹은 궁병과 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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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중기병 헤타이로이

기병의 돌격전술은 조금 나중인 기원전 4세기경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 쓰면서 대외 원정을 다니다 보니 아시아 고원에까지 알려졌다. 보병과 협동하여 기병의 충돌력을 활용하는 이 전술을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한다. 파르티아, 박트리아의 유목민들은 철제비늘갑주와 마갑을 씌우고, 장창을 도입한 중장기병으로 돌격과 충격전술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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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기병 간의 교전 장면. 양손으로 창을 쥐고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시기 중기병은 아직 안장의 발달이 미흡하고 등자도 없어 후대의 본격적인 중기병과는 차이가 있었다. 보통 말 위에서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인 카우치드 랜스가 아니라 양손으로 창을 움켜쥐고 내지르거나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승마 시 안정감이 떨어졌고 양팔을 모두 사용하는 동작의 한계상 전투 간격이 넓어 조밀한 전투대형을 이루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육중한 갑주와 말의 돌파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당시 이들 중기병들이 막강한 활약을 펼치는가 하면 고대 지중해 유역에서도 중기병은 많은 활약을 펼쳤다. 흔히 궁기병에 로마군이 유린됐다고 알려진 카르헤 전투에서도 이들 중기병이 돌격전을 벌여 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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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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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에 남아있는 개마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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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기마인물형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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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수나라 시기까지의 중기병 발전을 카툰풍으로 묘사한 그림.

동아시아에서는 기원후 2~3세기경 삼국시대까지도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의 수가 없거나 매우 적었으며 본격적으로 대량 운영된 것은 중국판 게르만족 대이동이라 할 수 있는 5호 16국 시대부터였다. 마갑이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었는지는 아니면 유목민들을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수입된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기원후 2~4세기경 선비족이 먼저 중장기병을 대량 운용하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등장함을 보면 유목민으로부터 전파받은 걸로 추정된다. 한국은 서기 3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에 개마무사가 나타나, 그 쯤에 중장기병이 운영된 걸로 추정된다. 이밖에 가야에 기마인물형 토기나 마갑 유물 등이 발굴되어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이 한반도 남부에서도 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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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의 등장이 늦다는 것이지, 동아시아에서도 중기병을 이용한 충격 전술 자체는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본격적으로 기병을 이용한 돌격전이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 한나라흉노 원정 당시로, 이 무렵부터 기병대가 본격적인 전투병력으로 대량 육성되면서 이광의 아들 이감이 흉노 기병대에게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거나 곽거병이 기병 800명을 이끌고 흉노군 2천 명을 궤멸하는 등 주로 기병 간 돌격전이 많이 펼쳐졌다.

이후 기원후 2세기경 삼국시대때에 여포가 기병을 이끌고 장연에게 돌격해 승리한 기록이 있고, 조인이 기병을 이끌고 돌격전을 펼쳐 포위당한 아군을 구출한 기록들이 등장해 기병대가 보병에게 돌격한 사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밖에 관우가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 지휘관인 안량을 살해한 기록도 있으며 기원후 240년경에 고구려의 동천왕이 5천의 철기병(중장기병인지는 불분명)으로 위나라 군대에 돌격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이 방진으로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4.2. 중세: 기원 후 4 ~ 15세기[편집]


지역을 불문하고 고대에도 기병대는 중요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즈음의 서유럽에서는 기병대의 역할은 종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미 동서 로마제국에서도 보병보다 중무장한 기병대가 전력의 주축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세워진 프랑크 왕국의 군대도 초기에는 보병이 중심이었으나, 8세기 중엽부터 군벌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각각 사병을 육성하고 기마병을 육성하기 수월한 봉건제도를 실시하였고, 이미 그 전부터 기사계급이 성장하여 기병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활약상도 점점 증가하였다. 주로 창이나 냉병기를 이용해 백병전 위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는 카우치드랜스라는 창 파지법이 유행하면서 창을 든 중기병대가 주축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과 중동에서는 국가 단위로 대규모로 기병을 육성하였는데, 서유럽에서 중기병들이 대거 활약하는 것에 비해, 동로마와 중동의 중기병대는 측면이나 후방의 돌파를 위해 가끔 쓰이는 것에 그쳤고 서유럽과 달리 궁기병의 활용이 매우 빈번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활을 이용한 경기병이 존재하였으며, 후한시대부터 기병을 이용한 충돌 및 돌격전술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북조시대부터는 마갑까지 갖춘 중무장기병대의 돌격전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한민족 국가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다룬 벽화가 등장하거나, 마구, 마갑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농경국가임에도 기병 비중이 은근히 높은 편인데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1018년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기병 12,000기를 매복시켜 거란군을 격파한 바 있으며, 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북계의 주진군 총병력이 4만 명인데 그중 기병이 약 5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병력 중에 8분의 1이 기병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기병으로 윤관이 창설한 별무반의 신기군을 들 수 있으며, 고려 말 홍건적왜구를 상대로 싸운 인간흉기 이성계 사병 2천 명도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30]

이시기의 일본 역시 기병의 활용도가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는데 황산전투 이후 왜구가 타고 다니던 말 1,600여 필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31] 사무라이의 시작도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수였으며 14세기에 접어들면 적극적으로 창이나 검을 이용한 기마근접전을 하는 등 기병을 주력으로 한 부대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런 구성이 사라지는 건 일본이 다이묘라는 이름의 군소세력으로 나뉘어져 대규모 기병을 다룰 경제력이 사라진 전국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다케다 가문의 기마 군단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퍼질 정도로 일본 기병의 영향력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2.1. 중기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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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그드족의 허리띠 장식. 5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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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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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소드와 런들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서유럽 기병들. 14세기 후반 그림

동로마 제국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중기병대와 궁기병대의 제병협동 전술이나 돌파전술이 유행하였고, 서로마 제국 멸망 후 프랑크 왕국에서도 백병전을 하는 기마병의 사회적 위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후한~ 남북조 시대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역시 중기병의 역할이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남북조시대에는 마갑을 갖춘 선비족 기병대 등이 활약하는 등 3~4세기 이후부터 마갑을 갖춘 중무장 기병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한국에서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중장기병이 육성되고 운용되었다. 삼국시대 공손찬의 백마의종도 마찬가지지만, 유럽의 중기병과 달리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에서는 기병대열에 궁기병을 섞어서 활을 쏘면서 돌격하는 중기병 대열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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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드 랜스

서기 9~10세기에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돌진하는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라는 새로운 기병전술이 등장했다. 등자와 함께 등장한 이 기술이 서유럽에서 기병이 활약할 수 있게 더욱 보탬이 되었다. 카우치드 랜스는 창을 잡을 때 겨드랑이를 활용함으로써 한손만으로도 창을 안정적으로 쥘 수 있었고, 남은 다른 한손으로는 방패를 쥐어 화살이나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으며[32], 양손으로 창을 쥐는 것과 달리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거나 양팔의 간격이 넓지 않아 좌우로 간격을 좁혀 집단으로 대열을 이루기도 수월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에 의하면 이미 서기 10세기 이전부터 동로마 제국이슬람에서는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몽골 등이 많이 사용하여 수렵이나 전투를 그린 회화에서 많이 보이고, 청나라 시대에 기병을 그린 삽화에서도 확인된다. 10세기 이전 서유럽에서는 마상전투를 다룬 그림이나 태피스트리에서 창을 쓸 때는 여전히 말 위에서 두 손으로 창을 잡은 모습이 확인된다.

그러면서도 중기병을 서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나 이슬람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동로마와 중동은 여전히 중기병대를 적진의 측면이나 후방을 타격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나, 서유럽에서는 중기병을 보병/기병, 정면/측면을 가리지않고 적진에게 돌파하는 용도로 수시로 사용하고, 돌격의 횟수도 단번이 아닌 여러 차레로 나누어 축차돌격을 감행하는 등 전투 내내 말이 탈진하여 쓰러질 정도로 중기병들의 돌격을 많이 활용하였다.[33] 이를 통해 11세기 말에 벌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부터 이미 서유럽의 중기병대는 근접전에 한해서 이슬람권의 기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기창돌격을 맨몸으로 맞아야했던 보병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까지 필요없을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릴라이움 전투로, 앞뒤로 서유럽 중기병대의 돌격을 받은 튀르크군은 패주를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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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세에 맞춰 창의 형태도 한손으로 잡고 겨드랑이에 끼기 쉽도록 변화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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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용 갑옷의 오른쪽 가슴 부위에는 창받침이 생겨났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의 도입으로 기병대 대열도 약간 변화하였는데, 종전에는 마름모나, 삼각형, 쐐기형으로 대열을 편성하여 대열을 두껍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가로로 길고 얇게 펼쳐진 횡대 대열을 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열을 가로로 길게 배치할수록 창을 이용하여 적을 더 많이 찌르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대열이 얇아 최초 돌격이 저지되었을 경우 병력을 후퇴시켜 재정비한 후 재돌격하는 것이 두꺼운 대열에 비해 더 수월하였다.

이것 말고도 중장갑화로 서유럽의 기병들은 막강한 돌격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동로마 역사가 안나 콤니니는 서유럽의 노르만인 기병대를 보고 "거인의 힘으로 당긴 화살을 튕겨내며 바빌론의 성벽마저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하였고, 실제로 서유럽의 보두앵 4세는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 500명과 성당 기사단 8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 2만 6천명의 살라딘 군대를 박살내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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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중기병의 갑옷이라고 해봐야 체인메일이었을 시절이라 이후 휘황찬란한 플레이트 아머가 도입되기 훨씬 전이었으며 말도 이후의 육중한 체구의 군마보다는 작은 소형마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갖춰입은 중기병대의 돌파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이때까지도 기병 돌격에 대해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장창병들이 빼곡히 늘어서서 돌격을 저지하거나 똑같이 중기병을 돌격시켜 맞불을 놓거나, 그도 아니면 지형과 요새 등의 기물을 이용해야 했는데 장창병들의 경우는 기병 돌격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버틸 강단있는 정예 보병대일 필요가 있었으며 중기병 맞돌격의 경우는 장비와 기량 차이에 심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문제가 있었고 마지막의 경우는 전술적인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11세기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가 열리면서 서유럽 깡패 기병대 중 하나였던 노르만 기병대의 후예로서 기병전력이 훌륭했고 존 왕의 시대에 잃어버리기 전까지 11세기부터 프랑스땅도 많이 소유했었기에 좋은 군마들과 평지를 확보했었다. 실제로 12세기엔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전쟁에서도 중기병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위에 '기병의 장점' 항목 상단에 인용된, 살라딘의 회고록에서 나타나는 서유럽 기병대의 무시무시한 무용의 주인공이 바로 리처드1세와 앵글로-노르만 기병대이다.[34] 그러나 웨일스와의 전투에서 장궁의 위력을 알게되었고 14세기 백년전쟁에서 자신들보다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위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면서 중기병들을 하마, 중보병 전력으로 활용하고[35] 장궁병을 대폭 활용하여 방진을 짠후 니가와를 시전하는 전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중기병들은 자주 하마하기 시작했으나 말에서 내린 중기병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말에 올라 본래의 기병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본적으로 기병인만큼 마상전투를 고도로 훈련했다고 한다.[36] 몇개의 사례로 크레시 전투에서는 하마기사들이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기병으로 전환하여 추격 섬멸하였고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일단 하마하여 싸우다가 막바지에 전황이 불리한 순간 다시 중기병으로 전환, 결정타를 날리며 승리를 이끌었으며 장미전쟁에서도 일단은 하마한 채로 싸우다가 추후에 기병돌격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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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중기병.

동시대 동아시아에서는 발해의 멸망 이후 거란, 여진족 등 만주의 철광을 확보한 유목민족들이 집중적으로 중기병을 육성, 그 군사력으로 북송을 재패하고 연해주,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한때를 호령했으며, 남송고려역시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을 운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몽골족 역시 군의 편성에서 중장기병을 많이 운영하였다. 마갑을 씌운 중무장기병은 원나라 말기까지, 멀리는 청나라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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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갑주와 마갑

조선은 초기에는 중기병을 40%, 활을 다루는 궁기병을 60%로 구성했으나 세조대 궁기병 비중을 대폭 늘리면서 중기병은 사실상 없어지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주로 궁기병들만 남게 된다. 단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 창기병의 모습이 그려져있는것으로 보아 중기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편곤등의 근접무기들이 자리잡으면서 서양과 비슷한 방향으로 기병 활동 성격이 변하게 된다.최형국,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조선군 환도는 일본 와키자시와 비교해도 짧을 정도로 좀 많이 짧기 때문이다.


4.2.1.1. 랜스 돌격[편집]

The captains or captaine that charges either with troups or troupe, cares not much whether the companies breake their launces or not, but desires them to enter resolutely, and to keep close together.

If they be wel conducted, their leaders command more than half of them to carie their swords or pistols in the bridle hand, rather than faile to vse the sword & pistoll, & quit their Lances;

but they wil be sure to place the best of the Lantiers in the forefront. Lightly of euery hundred, 15. or 20. know how to breake:

being wel broken, with care of the goodnesse of the staffe and head, the blowe of the Launce is little lesse in valor vnto the pistoll:

the charge of the Lantiers is terrible and resolute, being in carier to breake, the enemies perceiues their resolution is to enter, and not to wheele about like vnto the pistolers.

......

The most Chiefes or Souldiers of account are armed at the proofe of the Pistoll. If the Leaders commaund their troupes to spoyle horses, the Launces are more sure.

창기병대와 함께 돌격하는 부대장들은 부대원들이 적을 제대로 찌르든 안 찌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단호하게 진격하고 서로 가까이 선 대형을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제대로 지휘된다면, 지휘관들은 창기병들 중 절반 이상이 고삐를 잡은 왼손에 검이나 권총을 쥐고 있으라고 지시하며, 그렇게 해서 (백병전에서) 랜스를 버린 뒤 검과 권총을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을 방지한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창기병들 중 정예들, 즉 일반적으로 100명당 창을 잘 다루는 15-20명을 제일 앞열에 배치할 것이다:

좋은 품질의 창대와 창날로, 잘 겨냥된 랜스의 타격은 권총 사격에 비교할 때 기백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창기병들의 돌격은 무섭고 단호하다, 그들이 창으로 찌르기 위해 진격하는 모습을 본 적들은 그들의 확고한 결심이 권총기병처럼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지휘관들이나 중요한 기병들은 방탄인증된 갑옷으로 무장하며, 따라서 지휘관들이 부하들에게 (갑옷을 입은 기수 대신) 말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면 권총보다는 창으로 이 명령을 수행하기가 더 쉽다.

Williams, Roger, Sir (1540?-1595), 'A briefe discourse of warre. written by Sir Roger williams Knight; with his opinion concerning some parts of the martiall discipline]'


Whereupon I will say that although the squadrons of spears do give a gallant charge, yet it can work no great effect, for at the outset it killeth none, yea, it is a miracle if any be slain with the spear. Only it may wound some horses ......

Although the first rank may with their spears do some hurt, especially to the horses, yet the other ranks following cannot do so, at the least the second and third, but are driven to cast away their spears and to help themselves with their swords.

그러므로 비록 창기병 부대가 용감하게 돌격하더라도, 그것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창기병의 돌격은 충돌 순간 아무도 죽이지 못하며, 누구라도 창에 맞아 죽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단지 말 몇 마리에게나 부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

비록 첫 번째 열의 창기병이 창으로 적에게, 특히 적이 탄 말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힐 수 있더라도 뒤따르는 다른 열들은, 최소 두 번째와 세 번째 열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대신 창을 버리고 검을 들고 싸워야할 상황에 처한다.

La Noue, François de. 1587. 'The politicke and militarie discourses of the Lord de la Novve. Whereunto are adioyned certaine obseruations of the same author, of things happened during the three late ciuill warres of France'


4.2.1.1.1. 충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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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돌격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제일 앞열에 선 숙련된 창잡이(5-6열 종대의 경우 100명 중 15-20명)였다. 나머지 인원이 든 랜스는 거의 장식에 가깝고 진형 잘 유지하면서 따라가기만 해도 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절반 이상은 검이나 권총(16세기 이후) 같은 근접무기를 바꿔 들기 편하게 왼손에 미리 들고 있으라고 지시받는다.

무릎과 무릎을 맞댄 밀집대형을 유지한 기병의 돌격은 이상적인 환경에서 충돌 직전 최고 속도가 빠른 캔터나 느린 갤럽(15km/h 전후) 정도로 꽤 느린 편이었다. 지형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느린 캔터로 충돌한 경우도 흔했을 것이다. 기병 충격 전술은 속력이 느려지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진형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으므로 충동적이고 단순무식한 기사의 이미지와 달리 인내와 규율이 중요했다. 1220년대에 편찬된 윌리엄 마셜의 전기에는 토너먼트 단체전에 참가한 기사들이 레이디들이 지켜보는 것을 보고 의욕이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밀집대형으로 동료들과 열을 맞추면서 일정한 속도로 상대편 부대를 향해 진격했다고 묘사된다.[37]

His side drew up in good and serried order, but their opponents scorned to do so: oozing proud confidence because of their mighty numbers, they charged in disarray to meet them before their lists.

There were no preliminaries or warm-up jousts!

They went straight at it with all their might, storming in disorder at the Young King's battalion, who met them fiercely, fired to fight well.

You'd have seen maces smashing down on heads, swords cutting through heads and arms.

And the over-confident came off worse: charging as they were with no formation, not keeping together at all, they were quickly routed and sent reeling back, the first to arrive the first to leave.

The Marshal left the king and rode after a troop who were trundling off in retreat; he charged into their midst with such force that he brought a knight crashing down, but he didn't stop to take him captive: he was bent on giving such an account of himself that all who saw him would have to bear true witness!

He drove them back and sent them packing, showing them the way with fearsome blows.

Another troop now fell on him in numbers, forcing him back to the Young King's lines; but with that they left the combat, in which the Marshal's display had won him mighty esteem that day from all who'd witnessed it.

의 부대는 훌륭한 밀집대형으로 모여 섰지만, 상대편은 그렇게 하는 것을 멸시하며 거부했다: 수적인 우세를 믿고 거만한 자신감을 내보이면서, 그들은 어지럽게 뒤섞여 돌격했다.

예선전(preliminary)이나 준비운동용 창시합(warm-up joust)은 없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서 진격해 젊은 왕의 부대로 무질서하게 뛰어들었고, 왕의 부대는 전의를 불태우며 사납게 맞서 싸웠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철퇴가 머리를 깨부수고 칼이 머리와 팔을 베어 가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던 측이 더 못 싸웠다: 전혀 서로 뭉치지 못하고, 대형을 갖추지 않은 상태로 돌격했기 때문에, 그들은 빠르게 격퇴당했고 뒤로 휘청거리며 쫓겨났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윌리엄 마셜은 왕의 곁을 떠나서,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적 부대 하나를 뒤쫓아 말을 달렸다. 그는 강한 기세로 적들 가운데 돌격해서 기사 한 명을 쓰러뜨렸지만 그를 포로로 잡기 위해 멈춰서지 않았다: 그는 누구라도 진실한 증언을 할 수밖에 없을 그런 (흠 없는) 공적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공격들로 도망칠 방향을 가르쳐주며 적들을 물리치고 쫓아냈다.

이후 다른 부대가 수적 우위를 앞세우며 윌리엄 마셜에게 덤벼들어서 그를 젊은 왕이 있는 대열로 몰아붙였지만, 그들은 윌리엄 마셜을 더 추격하지 않고 전장을 떠났고, 그 싸움에서 윌리엄 마셜이 보인 무용은 그것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에게 커다란 존경을 가져다주었다.

-Nigel Bryant, trans., The History of William Marsha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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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창기병 훈련. 1902년경

'무릎과 무릎을 맞댄 밀집대형'이라는 표현은 비유나 과장이 아니며, 회전에서 대열을 이루고 돌격하는 기병들은 말 그대로 무거운 장화나 다리 갑옷을 신지 않으면 짓눌려서 부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다리를 딱 붙인 채 느린 속도로 달렸다. 12-13세기 기사문학의 표현을 빌리면 '장갑이나 과일을 위에 던져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창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어야 했다.

제대로 장전해서 쏠 경우 무기 자체의 위력은 권총이 랜스보다 더 강했지만, 달리면서 들이받을 때의 물리적인 충격과 공격적인 기세에서 전해지는 심리적인 충격으로 창기병이 권총기병에 비해 이점이 있었다.

랜스 돌격의 위력으로도 같은 중기병의 방패와 사슬갑옷, 또는 후대의 플레이트 아머를 뚫고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웠으며, 특히 제일 앞열에 서는 정예 기병이 입는 상등품 갑옷을 뚫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5세기의 콘도티에로 피에트로 몬테는 오직 어리석은 자들이나 말이 아닌 기수를 겨냥한다고 주장했으며 16세기의 군사저술가 프랑수아 드 라 누이는 갑옷을 입은 기병이 창에 맞아 죽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동시대 카스티야의 기사인 후안 퀴자다도 일단은 기수의 배를 찌르라고 조언하지만 기수가 아닌 말을 찌르는 사람도 많다고 덧붙인다.


4.2.1.1.2. 백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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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케런 전투. 1530년경 제작

창기병의 대형은 2~4열의 선형진과 백병전을 대비한 5~6열의 종대 대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열이 얇아질수록 랜스 돌격의 접촉면이 늘어나는 대신 백병전에서 밀려나거나 돌파당할 위험이 커졌다.

In fighting on horseback with heavy armor, we must keep our horse's head toward the opponent, trying to get him by the side or back, and so that he cannot do the same to us. And furthermore, and most importantly, we must stand our ground or push toward the opponent, particularly when the opponent drives his horse over us, since if we do not then collect the reins, or do not press forward as much as possible, and our horse will easily fall backward or we will eventually be driven from the lists(Line of battle?), and various other disgraces will happen to us.

Therefore whenever the opponent drives his horse toward us, we should drive ours toward him, and if he throws a blow with a sword, estoc, warhammer, or similar weapon, we should receive it with our sword or with one arm. If the opponent pushes at us, we should push him back with speed and strength, so that he falls backward.

중무장 상태의 마상전투에서, 너는 항상 말머리를 상대가 있는 방향쪽으로 유지하고, 반대로 상대는 너를 정면에서 마주하지 못하도록 상대의 측면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버티거나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어야한다. 상대가 너를 밀어붙일 때 고삐를 잡아 버티거나 가능한 한 정면에서 맞받아치지 못한다면, 너의 말은 간단히 뒤로 밀려날 것이고, 너는 결국 시합장(또는 전열)에서 벗어나거나 그와 비슷한 치욕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네 쪽으로 말을 몰아서 달려들면, 너도 반드시 정면에서 맞받아쳐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검, 에스터크, 워해머 등의 무기로 공격을 가하면, 너도 오른손에 든 검이나 건틀릿을 낀 왼손으로 정면에서 받아쳐야 한다. 상대가 너를 밀어붙이면 너도 강하고 빠르게 정면에서 밀어붙여야한다.

-Pietro Monte, (1509), Pietro Monte's Collectanea: The Arms, Armour and Fighting Techniques of a Fifteenth-Century Soldier, trans. Jeffrey L. Forgeng.


Q. If attacked by heavy cavalry?

A. As soon as you discover his design, ploy quickly into one or several close columns, according to the time at your disposal, and then charge the centre of the advancing line; turn back as soon as you have pierced it; then by deploying and making a half turn, you can take in rear these great heavy troopers, whom you will surround and overthrow, one by one, at very little cost to yourself.

......

Carbineers should, then, attack lancers as they would cuirassiers; that is to say, charge in column, and pierce their centre.

Once among them, the carbineers should close in on them, hand to hand, and try always to roll them up in mass, to drive them back huddled together and helpless, as far as possible.

The lancers, crowded together, can neither point nor parry, and one of two things must happen: either they will throw away their lances to draw their sabres, in which case you will fight them with equal chances, or they will decide to keep the lances, in which case you will get them very cheaply.

Our flank files in the lancers of the Imperial Guard did not carry lances.

I remember in two cases in 1814 (at Hoogstraaten, near Breda, and Pont-Atrecin, near Lille) coming in contact with a body of Russian and Prussian lancers who, like ourselves, were bent on holding a narrow road, bordered by deep ditches.

I placed at the head of my column our gallant carbineers, and ordered my lancers to follow them, after having put their lances in the boots and drawn sabres.

Having penetrated to the centre of the enemy's crowded masses, our success exceeded our highest expectations, as we sabred them without risk to ourselves.

Q. 중기병의 공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A. 적의 의도를 알아채는 즉시, 주어진 시간에 따라서 기병들을 하나 또는 여러개의 밀집된 종진으로 배치하고, 중기병 대열의 중앙으로 돌격해야 한다.

중앙을 뚫고 나간 다음 반바퀴 돌면 이 크고 무거운 기병들의 뒤를 잡을 수 있고, 매우 쉽게 하나씩 포위해서 각개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

창기병도 흉갑기병과 동일한 방식으로 상대해야 한다; 즉, 종진으로 돌격해서 중앙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대열을 돌파해서 포위한 뒤, 백병전으로 최대한 강하게 압박해서 창기병들이 서로 무질서하게 뒤섞여 무력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창날로 찌를 수도 창대를 휘두를 수도 없게 된 창기병들은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창을 계속 들고 있거나[38]

, 창을 버리고 세이버를 뽑아들거나.

전자는 아주 쉽게 제압할 수 있고, 후자는 서로 동등한 조건에서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제국 근위 창기병 연대들은 양익의 기병들이 창으로 무장하지 않았다.

나는 1814년에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사례(하나는 브레다 근처의 호흐스트라텐에서, 다른 하나는 릴 근처의 퐁아트레셍에서)를 겪었다.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 옆에 깊은 도랑이 파인 좁은 도로를 차지하기로 결심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창기병대와 교전했다.

나는 종진의 전위에 용감한 용기병들을 배치하고, 후위에 창을 내려놓고 세이버로 무장한 창기병들을 배치했다.

우리가 적들의 밀집한 대열 가운데를 뚫고 나간 뒤, 이어진 성공은 예상을 뛰어넘어서 우리는 아무런 위험 없이 적들을 검으로 베었다.

-Antoine Fortune de Brack, (1831), Cavalry outpost duties


백병전에서 갑옷 입은 적 기병을 공격할 때는 주로 얼굴과 골반과 겨드랑이의 갑옷 틈새를 노렸다. 그리고 충돌 상황과 마찬가지로 기수 대신 말을 먼저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And setting off at the gallop, placing your lance in the lance-rest, aim for the enemy's belly,

and once the lance is broken, you shall take hold of the estoc, which should be strapped onto the left-hand side of the front arcon, secured in place in such a way that you draw it the scabbard does not come with it. And when fighting with these weapons, strike at the visor and the voids, that is, the belly and the armpits.

After you have lost or broken the estoc, you shall take hold of the arming sword, which shall be girded on your left-hand side, and fighting until you have lost or broken it, you shall take hold of the hammer, which shall be attached to the right-hand side of the belt with its hook. Reaching down, you shall find it, and pulling upwards, the hook will release and, with hammer in hands, you shall do what you can with it until you lose it.

And after it is lost, you shall reach behind you and draw the dagger from behind your back.

And you shall grapple with your enemy with all these weapons that you have at your disposal, striking and aiming at the voids, that is, the belly and the armpits, and at the visor, with the estoc or sword and with the hammer in hand, for by wounding the head and the hands he will inevitably surrender.

갤럽으로 달리면서, 랜스를 겨드랑이 창받이에 끼우고, 적의 배를 겨눠라.

랜스가 부러지면, 뽑을 때 검집이 딸려오지 않도록 안장턱 왼쪽에 고정시켜 묶어둔 에스터크를 뽑아들고 면갑과 배와 겨드랑이의 갑옷 틈새를 찔러라.

에스터크를 부러트리거나 잃어버리면, 왼쪽 허리에 찬 아밍소드를 뽑아들고 싸워라.

아밍소드를 부러트리거나 잃어버리면, 오른쪽 허리에 걸어둔 워해머로 손을 뻗어서 잡고 위로 당겨서 고정을 푼 다음 들고 싸워라.

워해머를 잃어버리면 등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들어라.

에스터크 또는 아밍소드, 워해머를 손에 들고, 배와 겨드랑이와 면갑의 갑옷 틈새를 때리고 찌르면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적과 격투를 벌여야 한다. 머리와 손에 부상을 입히면 적은 어쩔 수 없이 항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Juan Quijada de Reayo, (1548), Doctrina del arte de la cavall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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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딤 전투. 1370년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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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us Hector Mair (1548), Opus Amplissimum de Arte Athletica, 뮌헨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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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hausen, (1614), Ritter kunst : Darinnen begriffen, I. Ein trewhertziges Warnung- schreiben wegen deß Betrübten Zustands jetziger Christenheit. II. Undersicht aller Handgriffen so ein jeder Cauallirer hochnötig zu wissen bedarff

17세기의 군사저술가 조르조 바스타는 패주하는 적을 추격할 때를 제외하면 수축구보(collected canter)가 가장 적절한 속도이며 그보다 빨리 달리면 검을 다루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말을 잃거나 말에서 떨어진 기병들이 도보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때문에 후안 퀴자다는 전투 중 말을 잃었을 때 도보전투에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리 전면만 판금이고 뒷부분과 발 부분은 사슬로 이루어진 경량화된 다리 갑옷을 입을 것을 추천한다.

카파르땁의 프랑크족 기병대가 적은 수로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적군 수가 적음을 알고 그들을 공격하러 갔다. 그들은 한 무리를 이루어 우리를 공격하려 매복하고 있었다. ...

우리는 적군 중 18명을 낙마시켰다. 그중에는 창에 찔려 죽은 자,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지고도 무사한 자, 그리고 타던 말이 창에 찔리는 바람에 걸어가야 하는 자가 있었다.

적군 중 무사하여 땅에 있던 자들은 자신들의 칼을 붙잡고 서 있다가 자신들의 옆을 지나가는 모든 병사를 칼로 쳤다. 줌아 알누마이리가 적군 중 한 명의 옆을 지나가자 그 적병은 줌아에게로 걸음을 내딛어 그의 머리를 칼로 쳤다. 줌아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적병은 칼로 투구를 절단했고 그의 이마를 갈랐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피가 다 마를 정도로 나왔고 이미의 상처는 물고기 입처럼 열려 있었다. 우리가 프랑크인들과 싸우는 가운데 나는 줌아에게 가서 말했다. "아부 무함마드, 당신은 왜 상처에 붕대를 감지 않소?"

그는 "지금은 붕대로 상처를 처맬 시간이 아니오." 라고 말했다.

우사마 이븐 문끼드(1095-1188) 저, 김능우 역, '성찰의 서'


4.2.1.1.3. 일격이탈 연속돌격 전술?[편집]

기사들이 일렬씩 순차적으로 돌격하여 랜스로 찌르고 곧바로 방향을 돌려 빠져나와서 후방으로 가서 다시 랜스를 보급받으며, 후열이 먼저 돌진한 앞열을 엄호하면서 연쇄적으로 돌진했다는 설이 2010년경 This Is Total War의 서양사 게시판에서 벌어진 논쟁이 발단이 돼서 인터넷 상으로 퍼져 있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랜스 전술이었다는 근거는 커녕 실존했다는 근거조차 없다.

애초에 헤이스팅스 전투크레시 전투에서 기병들이 저런 전술을 쓴 기록이 있다거나, 말이 방진에 달려드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랜스의 살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등 논쟁에서 당연하다는 듯 인정되고 있는 여러 전제들이 거짓이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면서 억지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없는 것이 없는 이유를 증명하기가 몇 배는 어렵기 때문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우선 중세 후기 - 근세 초기 서유럽 창기병의 대형은 2~4열의 선형진과 백병전을 대비한 5~6열의 종대 대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열이 얇아질수록 랜스 돌격의 접촉면이 늘어나는 대신 백병전에서 밀려나거나 돌파당할 위험이 커졌다.

17세기의 군사저술가인 벨하우젠과 크루소는 창기병들을 얇은 대열을 이룬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눈 뒤 방진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돌격하는 전술을 제안했지만, 이것도 정면에서 무한 사이클 차징으로 방진을 깎아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이 이론을 만든 시기에 서유럽에서 창기병은 이미 멸종된 지 오래였다. 그들과 달리 이전 시대의 군사저술가들은 모두 두꺼운 밀집대형으로 돌격하는 것이 정석적인 방식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돌격의 목적은 적의 대열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서 가능한 한 빨리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Therefore let us hasten to attack them and, when our lances are broken, let us approach closer as quickly as possible brandishing our unsheathed swords around their heads, so that their pride may be brought low by our constant blows.'

'그러므로 서둘러 저들을 공격하여, 우리의 랜스가 부러졌을 때, 뽑아든 칼을 저들의 머리 주위로 휘두르며 가능한 한 빨리 가까이 접근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의 끊임없는 타격으로 저들의 긍지가 꺾이도록.'

월터의 안티오키아 연대기 - 1차 다니스 전투(1115)


Richard, possessed by great anger and not capable of making any pretence of military science, charged with the cavalry around him, until, reaching the very center of the Roman army, he brought the battle there to a standstill, since the archer force on the front line did not withstand him even briefly.

Then exerting pressure on Bassonville, he forcefully drove him back, and next attacked those about Doukas.

There an obstinate battle developed, and many of those with Richard fell; but since they fell in the midst of a great press, no awareness of it reached the army.

The pressure was immense, and a heavy din of spears breaking on shields arose; numerous arrows flew and danger lurked everywhere, until, pressing heavily with a fierce charge, Richard constrained them to give back. Then Doukas himself, who had been overthrown with a lance, came near being captured.

엄청난 분노에 사로잡혔고 어떠한 군사 기술도 가장할 수 없었던 리샤르는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했고, 정확히 로마군의 중앙에 이르러 전투를 교착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로마군) 최전열의 궁수 부대가 돌격을 잠시도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군 후위의) 바송빌에게 압력을 가하며 강하게 뒤로 몰아붙였고, 그런 다음 두카스의 부대를 공격했다.

그곳에서 집요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리샤르를 따라간 기병들 중 많은 수가 쓰러졌다; 하지만 기병들이 강하게 밀고 나가는 가운데 쓰러졌기 때문에 군대 전체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기병들의 압력이 엄청났고, 방패에 부딪힌 창이 부러지면서 큰 소음이 울려 퍼졌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왔고 모든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리샤르는 결국 사나운 돌격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로마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창에 맞아 쓰러진 두카스가 거의 포로로 잡힐 뻔했다.

요안니스 킨나모스 - 안드리아 전투(1155)


However, they swiftly recovered their spirit and resumed their strength. Thirsty for revenge, like a lioness whose cubs have been stolen from her, they charged even more vigorously into the enemy and passed through them as if they were breaking through a net.

하지만 그들은 빠르게 사기를 회복하고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마치 새끼들을 빼앗긴 암사자와 같이 복수심에 불타며, 더욱 힘차게 돌격해 그물을 찢듯이 적진을 뚫고 나갔다.

순례자들의 여정과 리처드 왕의 무훈 - 아르수프 전투(1191)


I saw them grouped together in the middle of the foot-soldiers.

They took their lances and gave a shout as one man.

The infantry opened gaps for them and they charged in unison along their whole line.

One group charged our right wing, another our left and the third our centre.

Our men gave way before them.

It happened that I was in the centre, which took to wholesale flight. My intention was to join the left wing, since it was nearer to me.

I reached it after it had been broken utterly,

so I thought to join the right wing, but then I saw that it had fled more calamitously than all the rest.

나는 기병들이 보병 대열의 중앙에 모여있는 것을 보였다.

그들은 창을 들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보병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자, 그들은 전선 곳곳에서 동시에 돌격을 시작했다.

한 부대는 우익, 다른 부대는 좌익, 그리고 세 번째 부대는 중앙으로 돌격해 나갔다.

우리 군사들은 그들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앙에 있었는데, 많은 군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가장 가까운 사단인 좌익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좌익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우익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그들이 좌익과 중앙보다 더 비참하게 도주한 것을 보았다.

바하 앗딘 - 아르수프 전투(1191)


But when the Germans observe their order fully, they bring with them a variety of arms; in particular they have some form of bombards on the flanks, which can work very easily against mounted crossbowmen and against troops in heavy armor (who are called 'men-of-arms" in vernacular).

When the Germans wish to encounter them they place their spears in a strong position, somewhat like the shape of a St. Andrew's cross.

This way the horses cannot penetrate the formation of the German footsoldiers without great harm, while if they remain at a distance they are frequently pushed by the infantry - and once the line or division begins to move back, it is as good as lost.

하지만 독일인들이 완전한 전투 대형을 갖추었을 때, 그들은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온다; 특히 양 측면에 일종의 화포를 배치하는데, 이 무기는 기마쇠뇌병과 무거운 갑옷을 입은 군사들(지방어로 '중장병들'이라고 불리는)을 상대하는 대 아주 효과적이다.

독일인들은 기마쇠뇌병과 중장병들로 이루어진 군대와 교전하고자 할 때, 자신들의 창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를 닮은 단단한 형태로 배치한다.

이렇게 해서 기병들은 독일군 보병 진형을 큰 피해 없이 돌파하지 못하게 된다. 기병들이 거리를 벌리고 있으면 일반적으로 적 보병들에게 {화약 무기의 사격으로?} 밀려나며, 전열이나 사단이 일단 물러나기 시작하면{기병부대가 패주하면} 그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Pietro Monte, (1509), Pietro Monte's Collectanea: The Arms, Armour and Fighting Techniques of a Fifteenth-Century Soldier, trans. Jeffrey L. Forgeng.


말과 기수의 체력과 정신력은 무한하지 않았았다. 이름만 가난한 전우들이지 부유한 기사들이었던 성전기사단도 기사 한 명당 전투마 '2마리', 서전트 기병 한 명당 한 마리씩만 지급되었으며, 보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13-14세기의 평범한 기사들의 군마의 품질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모든 기사나 향사들이 전투에 익숙한 것도 아니었고, 십자군 국가들 같이 항시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면 군대의 주력이자 직업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30%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 중기병들은 전의가 낮은 편이고 심하면 거의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경우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기병전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훈련도 낮은 기병들은 단 한 번의 패주로도 전의를 잃고 전투력을 상실할 수 있었으며 정예병력도 돌격 2~3번이 한계였을 것이다.

헤이스팅스 전투 같은 현실의 기병 연속 돌격 사례들은 전부 돌격이 실패하고 패주한 것이거나 유인후퇴전술이었다. 살라딘의 측근이었던 바하 앗딘은 아르수프 전투에서 십자군 기사들이 도망치는 무슬림 기병들을 추격하다가 매복을 경계하며 멈춰서서 재정비를 하고 다시 추격하는 식으로 총 3번의 돌격을 가했다고 표현한다. 프랑수아 1세마리냐노 전투 이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다름이 스위스군에게 가한 30번의 돌격을 자랑했지만, 이게 각 부대가 30번씩 돌격했다는 의미인지, 얼마나 진지한 의도로 말한 숫자인지는 알 수 없다.[39]

Then Robert, seeing his brother so fiercely attacked by enemies resolved to yield not an inch, charged fiercely and proudly into the midst of the hostile ranks, aided by the troops of Count Gerard and followed by the Calabrians whose leadership had been entrusted to him.

He speared them with his lance, beheaded them with his sword, dealing out fearful blows with his mighty hands. He fought with each hand, both lance and sword hit whatever target they were aimed at.

He was unhorsed three times; thrice he recovered his strength and returned more fiercely to the fray. His fury merely increased, as does that of the lion that roars and furiously attacks those animals less strong than himself, and if he meets resistance becomes more ferocious and burns with greater anger. He gives no quarter, he drags off his prey and eats it, scatters what he cannot devour, bringing death to all. In such a way did Robert continue to bring death to the Swabians who opposed him.

한 치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적들에게 형이 사납게 공격당하는 것을 본 로베르는, 자신이 지휘를 맡은 칼라브리아인들을 이끌고 제라르 백작의 부대의 지원하에 적들 가운데로 맹렬하고 당당하게 돌격했다.

그는 힘센 두 팔로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하며 적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칼로 목을 베었다. 그는 양 손으로 싸웠고, 그가 휘두르는 창과 검이 모두 정확하게 목표를 맞혔다.

그는 세 번이나 낙마했고, 세 번 모두 힘을 회복하고 전보다 더 사납게 전투로 돌아왔다. 사자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에게 포효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다가 저항에 부딪히면 더 사나워지고 더 큰 분노에 불타는 것처럼, 위기를 겪을수록 그의 분노는 오직 늘어날 뿐이었다. 사자는 무자비하게 먹이를 끌고 가서 잡아먹고 남은 잔해를 흩어놓는다. 그런 식으로 로베르는 자기에게 대적하는 슈바벤인들에게 계속해서 죽음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아풀리아의 기욤, 치비타테 전투(1053)


Certainly the French launched the first fierce attack but, charging in disorder, they were beaten off and, quickly tiring, turned tail. Richard the king's son and a hundred knights were sitting on their horses ready for battle; the rest fought on foot in the field with the king.

In the forefront William Crispin and eighty knights charged the Normans, but their horses were quickly killed, and they were all surrounded and cut off. Godfrey of Serrans and other knights of the Vexin then fought back valiantly, and made the whole line fall back somewhat. But the seasoned warriors re–covered their courage and strength and captured Burchard and Otmund and Aubrey of Mareil and many other French knights, who had been unhorsed.

프랑스군은 첫 번째 맹공격을 가했지만, 무질서하게 돌격해서 격퇴당했으며 빠르게 지쳐서 등을 돌려 도망쳤다. 왕(헨리 1세)의 아들인 리처드와 기사 100명은 말 위에 앉은 채 전투준비를 갖추었고, 나머지는 왕과 함께 전장에서 도보로 싸웠다.

선두에서 윌리엄 크리스핀과 (프랑스의) 기사 80명이 노르만인들을 향해 돌격했지만 그들의 말은 순식간에 살해당했고 기수들은 모두 포위당해 단절되었다. 세랑의 고드프루아와 벡생 출신의 다른 기사들은 이후 용감하게 저항했고, 적진 전체를 어느 정도 밀어붙였다. 하지만 노련한 전사들은 용기와 힘을 회복하여 Burchard, Otmund, Aubrey of Mareil, 그리고 다른 많은 낙마한 프랑스 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오더릭 바이탈리스 - 브레뮬 전투(1119)


The enemy made a charge and they fled, but then the enemy halted for fear of an ambush, so our men halted and made some resistance.

Then there was a second charge and our men fled but fought as they fled.

The enemy halted again, as did our men.

A third charge followed, which brought them to the tops of some hillocks there and a ridge of hills.

적군의 돌격 앞에 우리 군사들은 도주했으나, 적들이 매복을 경계하며 추격을 멈추자 우리 군사들도 돌아서서 약간의 저항을 시작했다.

적들이 두 번째 돌격을 시작하자 우리 군사들이 다시 도망쳤지만, 그러면서도 싸웠다.

적들이 다시 추격을 멈추자 우리 군사들도 다시 멈춰섰다.

세 번째 돌격은 우리 군사들을 나지막한 언덕 위와 구릉지의 능선으로 몰아붙였다.

바하 앗딘 - 아르수프 전투(1191)


알랑송 후작의 부대는 대오를 잘 갖추고 진격해 잉글랜드군과 교전에 들어갔고, 다른 방향에서 플랑드르 후작의 부대도 그렇게 했다. 두 영주가 거느린 부대들은 궁수의 저지선을 뚫고 잉글랜드 태자의 대대에 달려들어 상당시간 격전을 벌였다. 프랑스왕은 그들의 깃발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가고 싶어했지만 앞에 있는 궁수들의 울타리를 넘을 수 없었다.

그 날 왕은 에노의 존 경에게 멋진 흑마 한 마리를 선물로 주었는데, 존 경은 자기 깃발을 드는 기사 쟝 드 퓌셀 경을 그 말에 태웠다. 기사를 태운 흑마는 달려 나가 잉글랜드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가 발을 헛딛고 도랑에 빠지면서 기사에게 심한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그 날 잉글랜드군은 포로를 잡으러 대오를 떠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사에게 더 이상의 위협은 없었다. 종자가 그를 일으켜 주었지만 왔던 길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와야 했다.

라브루와와 크레시 사이에서 토요일에 치러진 이 전투는 험하고 잔혹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용감한 행위가 전해지지 못한 채 이곳에 파묻혔다. 저녁 무렵이 되어갈 때 많은 프랑스 기사와 시종들은 영주를 잃고 들판을 오락가락하다가 작은 무리를 지어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금세 격퇴당했다.

프루아사르 - 크레시 전투(1346)


16세기 폴란드 후사르의 전열은 이상적으로는 4열이었고 정예부대는 3열까지 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실전에서는 5~6열도 흔했다. 17세기에는 기동성이 요구되는 전장 환경에 맞춰 부대 규모가 줄어들고 전열도 이상적으로는 2열, 실전에서의 표준은 3열이 되었다.

후사르도 랜스로 앞열만 찌르고 빠지면서 깎아내는 짓은 하지 않았고 한 번의 돌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충돌 이후 적들이 무너지지 않으면 대부분은 세이버를, 일부는 워해머나 권총을 뽑아들고 백병전을 벌이게 되는데, 돌격에 실패한 창기병은 백병전에서 더 크고 무거운 말을 타고 종심이 깊은 종대 대형을 이루고 더 많은 권총으로 무장한 쿼레시어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예비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재빨리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다음 돌격을 준비하면서 랜스를 재보급받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전 돌격에서 부러지지 않은 랜스가 제일 앞 열로 이동되었고, 나머지는 에스터크나 그보다 가벼운 기병검을 들고 돌격했다.
재돌격은 무한정 반복될 수 없었고 1629년 Gorzno 전투에서 '일부' 후사르 부대가 간신히 3~4회의 돌격을 해냈다는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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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르의 랜스가 장창을 이기기 위해 길어졌다는 신화는 1656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후사르가 (실제 역사와 다르게) 스웨덴 장창부대를 짓밟는 장면이 나오는 호프먼의 영화 "대홍수"에 의해 대중의 상상 속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629년 스웨덴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후사르 랜스의 길이는 5m 정도(3.8-5.6m)로, 초기에 5.98m였다가 1616년부터 5.3m로 규정된 스웨덴 장창보다 짧은 편이었다. (1737년 Kampenhausen 소장이 언급한 랜스 길이 3싸젠을 근거로 후사르 랜스의 길이가 6.2m라는 잘못된 인식이 생겼다. 19세기 러시아 싸젠으로는 6.2m지만 18세기 폴란드 싸젠으로는 5.3m다. 1670년 Fredro도 5m 정도 길이의 랜스를 권장했다.)

사실 후사르 랜스가 보병들의 장창보다 길다고 기록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쯤 장창이 다루기 쉽도록 4.2-4.8m로 짧아졌기 때문이다.

후사르가 장창부대를 상대로 이긴 몇 안 되는 성공 사례들이 있었지만, 일반적인 인식에 비해 훨씬 적으며, 아군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승리를 거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예를 들어 1577년 Lubieszow 전투에서 란츠크네히트 3,000명이 후사르의 돌격에 궤멸당했지만, 그들은 먼저 근위대의 헝가리인 보병 600명과 정면에서 교전을 시작한 이후에 공격당한 것이었다. 1588년 Pitschen 전투, 1610년 Klushino 전투에서 후사르가 거둔 다른 유명한 승리들도 정면 돌격으로 대열을 이룬 장창부대를 격파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장창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랜스가 길어진 것이 아니라, 랜스의 길이를 6.2m로 잘못 계산한 것이 발단이 돼서 장창에 맞서기 위해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고 논리를 끼워 맞추게 된 것. 국내 인터넷 역사 커뮤니티의 논쟁에서는 이 결론에서 더 나아가서 랜스의 길이와 살상력을 중심에 놓고 모든 전술을 재구성한 결과 연쇄 돌격으로 앞열만 찌르고 빠지면서 방진을 깎아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 것이다.[40] 비유하자면 조선 각궁이 저격소총급 초살상무기라는 가정하에 모든 정황을 끼워맞추면 군사들이 지나치게 먼 거리에서 활을 쏘다가 왜군이 칼을 들고 가까이 달려들면 겁을 먹고 도망쳐버린다고 비판하는 실록의 기록에서조차 초장거리 파르티안샷으로 왜군을 농락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법이다.


4.2.2. 경기병[편집]


중세 전장에서 경기병이 자주 맡은 역할은 정찰 및 적진 교란과 전투 종반에 후퇴하는 적의 추격이었다. 적이 진형을 구성하고 있을 때 경기병이 먼저 나가서 전반적으로 찔러보고 약점을 찾는 식이거나 중기병의 돌파 시에 함께 나아가 적진에 사격을 가해 중기병의 돌파를 쉽게 해주는 식이다. 실제로 금나라의 기병 편제는 항상 중기병과 경기병이 한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 경우 중기병의 돌파가 쉬워질 뿐 아니라 적도 중기병으로 맞대응할 경우 충돌 전에 먼저 적의 숫자와 기세를 꺾어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전투의 종반에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전력을 가장 확실하게 줄이는 데에 경기병만큼 좋은 병과도 없었다.

고대에서부터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41]이었고, 중세에도 활을 든 경기병은 꽤 많은 활약을 했다. 활약의 내용은 고대나 중세나 크게 변하지 않아서, 말을 타고 계속 이동하면서 적에게 화살을 퍼부어서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12세기 초반에는 경무장한 금나라 기병 17명이 자기들을 쫓아오는 2,000여 명의 북송 보병대를 활만 쏘아 일방적으로 유린하여 궤멸시킨 일화가 있다.[42]

14세기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에서 chevauchee라는 기마 약탈 전략을 운용했는데 경기병의 기동성을 활용해 프랑스 영토들을 초토화하고 약탈하는 전략을 운용했다. 다만 약탈하는 과정에서 하마하는 경우도 있었을테니 관점에 따라 승마보병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잉글랜드만 썼던 전략은 아니었으나 유독 잉글랜드가 자주 사용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화살을 소진한 장궁병들 중 일부가 즉흥적으로 기병으로 합류하기도 했는데 잉글랜드가 저런 기마 약탈 전략을 상당히 자주 썼던만큼 충분히 가능했을 수 있다.

몽골 제국의 경기병은 두 종류의 합성궁과 세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는데, 활의 사용은 단순한 엄호, 견제를 넘어서 적의 대열을 와해시키고 타격을 주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중기병도 다수 존재했으나 역시 동시대의 기병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경장이고, 전투의 주력은 주로 활을 든 경기병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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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공국 중보병을 쏘아죽인 몽골 경기병.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나라들에서 유독 활을 이용한 경기병을 많이 운용하였는데, 예컨대 유럽의 헝가리중동의 여러 이란계, 튀르크계 제국들이나 중국이 많은 경기병을 운용했다. 그 중에서 사산 왕조맘루크에서는 중무장한 기병이 활을 쏘며 돌격하는 전술로 유명했다. 조선은 정책적으로 궁기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고, 일본의 초기 사무라이들 또한 마상궁술을 중시 여겼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가 발달하기 전 일부 서유럽 기사들도 마상궁술을 사용하곤 했다.


4.2.3. 중기병 VS 경기병[편집]


서양이든 동양이든, 근현대의 역사가들은 경기병을 중기병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중기병의 갑옷을 겁쟁이의 자기위안급으로 폄하하기까지 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봉건기사의 갑주를 '리더십의 결여'의 산물로 평하며 유럽 중기병의 갑옷이 기병의 생명인 기동성과 화력을 떨어뜨리고 실질적으로 기습을 불가능하게 만든 반면, 몽골의 경기병은 기동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전술을 펼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존 키건은 날붙이를 부딪히는 것을 고집했던 중기병의 전법을 육탄전을 고무하던 게르만족 특유의 군사문화와 결부하기도 했다. 바투가 행한 서방원정이 이를 증명한다고 믿었다.

특히 레그니차 전투는 유럽식 중기병과 중앙아시아 경기병의 충돌로 서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오히려 서양 쪽에서 많은 의의를 두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프로이센이 리그니츠의 전장 위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바람에 숱하게 강의주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로 전장에서의 기동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례로 차용되며 당시 유럽식의 충격기병이 경장비의 기병을 상대하는데 겪었던 어려움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에도 언급이 있다.

하지만 몽골군 전력의 20~40%은 항시 중기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유목민 징집병이긴 했지만 유목민의 특성상 사냥[43]과 약탈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자체가 전투훈련의 연속이어서 일반적인 농경민족의 군대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괜히 화약무기가 대량으로 보급될 때까지 농경국가가 유목국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게 아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말이 사람보다 많아서 무장을 해도 군마의 체력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리그니츠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의 참전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사안이며, 튜튼기사단 참전의 주요 출처인 얀 듀고츠 연대기에서 전투에 참가, 전사했다고 기록된 기사단장 포포 본 오스테른의 사망연대가 리그니츠 전투 10여 년 후고, 당시 기사단장도 아니었으며, 리그니츠 전투 직후 프로이센에 대한 튜튼기사단의 대규모 공세를 미뤄보면 리그니츠 전투에 튜튼기사단이 참전했더라도 주전력의 참가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바투가 직접 지휘한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숫적으로 열세한 상황인 데다 귀족들이 등을 돌려 추가적인 지원을 받기 힘들었고 전력의 상당수가 보병이라 기병전에서 불리한데도 불구 사조강을 배경으로 몽골군의 기동을 제한시키고 백병전을 강요, 오히려 몽골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바투가 직접 가신들과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서 전황을 안정시키고 수부타이군이 뒤늦게 도하에 성공해서 헝가리군의 배후를 습격해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승리와 패배가 한끝차이인 상황이었으며 40년 후 헝가리군은 이때보다 더더욱 중무장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몽골계 노가이칸의 침공 당시 성공적으로 결전을 강요, 격파한 바 있다. 즉 지휘관이 우수하고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고 운을 제대로 탄 것이 몽골의 최고의 장점이다. 이런 우수한 지휘관이 없고 오히려 상대편에 우수한 지휘관이 있는 원 말기의 경우 기병대의 무장이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의 병사들에게 깨져나갔다.

인터넷에는 몽골군의 임팩트 때문에 경기병이 중기병을 압도한 사례들이 주로 퍼져있지만 실제로는 중기병을 열심히 육성한 세력이 경기병 위주의 세력을 제압하고 복속시킨 사례 또한 많다. 최초로 중장기병을 육성했을거라 추정되는 사르마티아는 그 중장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들을 제압하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고구려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요동에서 생산 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중장기병을 양성했으며 이러한 중장기병의 힘을 바탕으로 경기병이 날뛰는 남만주와 중만주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들어선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도 중장기병을 운영했고 청나라도 중장기병을 운영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직접적으로 싸우는 데는 중장기병이 우세했다. 특히 금나라는 극단적인 초중장기병[44]까지 나올 정도로 중장기병 육성에 심혈을 기울인 국가였는데, 바로 그 중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인 요나라를 완파하고[45] 몽골고원의 유목민 또한 복속시켰다.[46]

이는 아랍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집트맘루크 중기병과의 전투에서 몽골기병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맘루크 기병과의 근접전을 강요받았고, 그 근접전에서 몽골기병은 크게 패한다. 하지만 맘루크가 근접전만 했던 것은 아니다. 맘루크는 기마술, 창술, 검술, 궁술에 모두 통달해야 했으며 4 과목에 대한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인잘루트에서는 몽골군이 돌격해오자 맘루크들도 활을 쏘며 응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맘루크들은 근접전'만' 잘한 것이 아니라 근접전'도' 잘했던 것이다. 아무튼 맘루크 기병대는 충실한 갑옷의 힘으로 마상사격에서도 우위를 점했고 결국 몽골군은 사격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해 근접전 승부에 끌려나올 수 밖에 없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이슬람 경기병은 번번히 유럽의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570기의 중기병이 2만이 넘는 이슬람군을 박살내는 전투까지 있었고 이런 전투들이 한두가지도 아니고 아예 시리즈물로 많았다. 결국 나중에는 이슬람에서 육성한 동급의 중기병이 이에 대항하여 유사한 형태로 돌격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http://basiloikon.egloos.com/1642282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중무장한 로마군이 숫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튀르크군을 이겨버렸다.

경기병 우선만 부르짖는 사람들이 또 하나 중대하게 빠뜨리고 있는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이란 사파비조와 몽골계 칸국 기병 사이에 벌어졌던 승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기병 위주인 이란 사파비조의 경기병 위주인 몽골계 칸국들에 대한 대단한 우세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징기스칸 기병 VS 콰레즘 기병의 2차전이었는데, 이 삼백년 만의 승부에서 결과가 달라진 건 앞서 맘루크 기병 VS 몽골 기병의 사례와 같이 사파비조측이 몽골 기병에게 근접전을 강요하는 전법을 집중적으로 개발한 데 있었다.

사실 굳이 말하면 무장이나 전술에서 딱히 달라진 건 없었고 몽골계 칸국들이라고 무능한 장군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란계 중기병이 징기스칸 시기에 당했던 결과의 설욕에 성공했던 건, 이들을 지휘했던 그 당시 지휘관들 자체가 몽골-튀르크계 전법의 전문가였기에 징기스칸식 전법의 강약을 너무나도 잘 꿰고 있었던 반면 몽골계 칸국들은 징기스칸 시기와는 달리 아군의 강약을 파악하는데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달라진 점은 우선 몽골계 칸국들에겐 없거나 부족한 화기를 직접 공격용이 아닌 전장을 제한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정찰 용도로 경기병 부대를 반드시 따로 편성해서 징기스칸 때와는 달리 몽골계 기병의 우회 타격이나 지휘선 교란을 결코 허용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이러니 사파비조 기병을 상대하는 몽골 기병들은 징기스칸 시기와는 달리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중기병들과의 원하지 않는 근접전을 자주 강요당해야 했고, 그냥 봐도 알 수 있듯 콰레즘 시절 당시 중기병과 거의 무장이 달라진 적 없었던 이란 중기병들에게 속절없이 깨져나갔다.

이렇듯 중기병은 전장에서 증명하듯 매우 강력한 병종이었으며 중기병 무시 풍조는 17-19세기에 걸쳐 유럽에 팽배했던 중세 무시 사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기병과 중기병중 어느 쪽이 언제나 우세하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으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그 효력이 다른 병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것이 두차례의 도릴라이움 전투로 십자군 중기병이 근접전을 강요한 1차 도릴라이움전투에서는 십자군이 승리했지만 투르크 궁기병의 스웜전술에 휘말인 2차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십자군이 궤멸당했다. 근접전에서는 중기병이 우세한 반면, 경기병은 적과 직접 충돌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데에 더 유용했다.[47] 어차피 대부분의 전쟁은 전투에서 승부가 나기 때문에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기병이 보조하는 형태로 병력을 구성했다.

애당초 경기병>>>중기병 이라는 단순한 논리대로라면 중앙아시아,서아시아,동아시아,유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들이 죄다 경기병만 죽어라 양성하지 중장기병을 양성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화약무기의 발달 이전까지 대다수의 문화권이 심혈을 기울여 중장기병을 육성했고 유목민조차 정복한 땅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되면 최대한 중장기병을 많이 육성했다.[48] 애당초 중장기병 자체가 경기병을 카운터 치기 위해 나온 병과다[49]


4.3. 근세 : 기원 후 15~18세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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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군의 화기에 의해 저지당하는 프랑스 중기병의 돌격. 1503년에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ñola)를 다룬 그림이다.

튼튼한 갑옷과 말의 빠른 기동성으로 움직이는 중장기병은 냉병기 시대의 현대전차라 할 수 있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화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아예 기병자체가 점차 힘을 잃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돌격창을 사용하는 창기병이 존재하는 한편, 검과 권총으로 무장하는 용기병(Dragoon)도 나타났다.

기병끼리의 전투에서 총으로 원거리 사격을 가하는 것이 백병전을 하는 것보다 유리하고, 총을 쏘아대는 보병들에게 기존의 중기병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특히 1587년 쿠트라 전투(Battle of Coutras)에서는 프랑스 국왕군의 중기병이 위그노군의 총기병에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중기병들인 돌격 기병들이 쇠퇴하고, 사격 위주로 싸우는 총기병대가 오와 열마다 번갈아 교차 사격을 하는 스웜 전술의 발전형인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병화기의 화력이 기병화기보다 위력이 높아 카라콜의 효율성이 생각보다 떨어졌기 때문에 카라콜의 변형전술인 신교도 카라콜, 스네일(snail), 리마콘(limacon) 등이 그 주를 이루다가 30년전쟁에서 스웨덴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총을 쏜 뒤 돌격하는 "하카펠리타트"를 육성함으로써 돌격기병을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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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갑이 줄어들고 기마병이 입는 갑옷도 변화하였는데, 화기가 발달하기전에는 전신 판금갑옷을 입다가, 화기가 발달하고 나서부터는 총알을 막으면서 사람이 입고 다닐만한 무게를 지니기 위해 맞아도 덜 치명적인 부위의 갑옷을 없애는 대신, 중요 부위를 매우 두껍게 하는 갑옷양식이 유행한다.

이후 서양에서는 흉갑이라던지 방어구를 충실히 입은건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그래도 창기병은 울란을 퀴레시어와 후사르들을 보조하는 용도로 적절히 조합해서 쓰던 나폴레옹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간은 살아났지만 이미 주력은 이전시대부터 그랬듯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창기병은 따로 익혀야 할 훈련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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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기병대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병대의 전술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명나라 군대는 마갑을 폐지하고 핸드 캐논 등을 활용하는 기병대를 같이 운용하기도 하였고, 청나라 군대는 별도의 편성없이 기병대가 기병무기 전반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도 부분적으로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을 잔존시켜 운영하기도 하였고,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군을 상대로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창기병들은 경기병의 장비를 갖추어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경우 일찍이 창기병이 사장되었으며, 왜란 이후 조총수 중심으로 편제가 뒤바뀜에 따라 서양 국가들처럼 다른 기병-특히 궁기병-들의 입지도 매우 좁아진다. 또한 인구 증가로 인해 초지가 농지로 개간되며 말을 키울만 한 지역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점차적으로 유럽의 용기병이나 후사르를 결합한 듯한 운용법을 보이게 된다. 거점 방어 시에는 하마하여 가지고 있던 총이나 활로 보병들과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수색대로 활동하거나 포병과 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러다 화력에 짓눌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돌진하여 편곤이나 기병용 환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추격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역할이었다.출처: 후기 조선군 기병의 후사르/드래군화가 되어간다는 잡설들

일본의 경우 보병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국시대와 평화로운 에도 막부를 거치면서 전투용 마술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센다이 번과 토사 번을 중심으로 의전용 마술이 근근히 이어져내려왔다. 특히 토사 번(현재 고치 현)은 마술 문화가 매우 발달해 말을 키우기에는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2위에 달하는 약 3만 5천마리의 말을 생산했을 정도였다. 토사의 번교에서는 무사들에게 마술 교육을 매우 장려했으며, 심지어 조선 통신사가 보여준 조선군 기병대의 진법인 마상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까지 카와고에 번(현재 사이타마 현)에서 배워와서 번의 주요 마술로써 가르치기도 했다.출처: 이명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마상재(馬上才) 공연과 일본의 마술(馬術) :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년 2월

총기가 등장하고부터는 활을 이용하는 궁기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머스킷이나 권총을 이용하는 기병의 수가 증가하였는데, 이미 일찍부터 서유럽에서는 이를 이용한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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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군과 청군의 교전

특히 준가르와 청나라의 전쟁에서 기병대의 화기사용이 더욱 두드러졌다. 준가르군은 뛰어난 소구경 화포와 기동력을 이용하여 화력전을 펼쳤고, 적이 다가오면 지리적인 엄폐물을 활용하거나 수송용으로 쓰인 낙타등을 엄폐물로 삼아 말에서 내려 총격전을 펼쳤는데, 청나라 군대도 이에 하마사격과 화력전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군의 기병대가 마상궁술과 하마총격술, 화포사격술 등 다양한 사격전술을 펼치며 기술적 변화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아프리카 서부와 북부의 여러 나라들도 강력한 기병들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 오늘날 수단 공화국은 군대의 주력 부대는 기병들이 맡았는데, 슈크리(Shukuri)라고 불린 중무장 기병들은 타고 다니는 말한테 두꺼운 퀼트나 구리로 만들어진 머리 보호대와 가슴 받이 등으로 구성된 갑옷을 입혔다. 다만 수단의 기병들은 대부분 사회 상류층인 귀족들이라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여 총이나 대포 같은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정책에 반대했다. 그래서 1770년대 초에 수단 북부의 푼즈 술탄국을[50] 방문했던 유럽인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는 푼즈 술탄국의 군대 전체에 머스킷 소총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했다.#

또한 오늘날 북아프리카 내륙의 차드 공화국에 있었던 카넴 보르누 제국도 군대의 주력은 기병 부대였다. 카넴 보르누 제국의 기병들은 이웃나라인 푼즈 술탄국의 기병들처럼 두꺼운 퀼트로 만든 전투복을 말한테 입혔으며, 기병들이 가진 창은 날의 길이가 굉장히 길어서 거의 창 전체 길이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전성기인 11세기 말과 12세기 초 무렵, 카넴 보르누 제국은 무려 10만 명의 기병들을 거느렸으며[51]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이 아프리카 북부를 잠식해오자 오스만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오스만 군대 방식으로 훈련을 받은 머스킷 소총병을 말에 태운 기마 총병 부대를 편성하였다.#

4.4. 근대 : 기원 후 18~19세기[편집]


18-19세기에 이르자 머스킷을 사용하는 전열보병이 전장의 주력이 되었고, 소총에 장착하는 총검이 발명되어 이제는 장창병의 보조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기병대가 단독으로 잘 정비된 총병 전열을 향해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로 취급되었다. 거기에 기술의 발달로 포병이 더욱 강화되면서 굳이 기병을 보내지 않더라도 선제타격으로 보병대열에 충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기병은 다시 고대 세계처럼 보조군으로서의 능력을 더 절실하게 요구받았고, 이에 따라 보병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도맡게 되어 수많은 병과가 파생된다.

물론 돌파력을 이용한 돌격전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다른 병과와 협동해 제한적으로 실시되었고, 원거리 투사무기를 사용하는 경기병 역시 거의 사라져 돌격전에 사격을 하거나 돌격을 하면서 한 두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상에서 활과 총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이집트 맘루크 기병대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보병방진의 화력을 못이기고 궤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시대의 기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병이 전장의 주역에서 밀려나 전장의 보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보병 사이를 파고 들거나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해 사살하는 것에서는 기병이 압도적이었으나, 화력으로는 보병과 포병에 밀리고, 가격에서는 보병에 잽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장에 기병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이 당시 보병은 대부분 총검으로 무장한 머스킷총병이었고, 이들의 원거리 화력은 얇은 선형진에서 극대화되었다. 또한 아군 포병이 이들을 잡으려 하여도, 고폭탄이 개발되지 않아 볼링공같은 탄환을 날릴 뿐이었던 이 당시의 포병들은 얇은 선형진을 상대로 그 효율이 극도로 떨어졌다. 포탄이 공처럼 통통 튕기며 지나가면서 그 궤적에 있는 보병을 죄다 으스러뜨리는 것이 이 당시 포병의 개념이었는데, 선형진 상대로는 직격해 봐야 그 위치에 선 적 병사 두셋만 잡고 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선형진은 측면에서의 기병 돌격에 극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아군 기병대가 달려들면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적군 보병들은 필연적으로 원형진 또는 방진을 짜서 밀집대형을 갖추어야 했고, 그러면 아군 포병의 사격이 제 효율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기병은 중세의 기사들과는 달리 정면돌격으로 적의 전열을 직접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적의 측후면을 교란하고 아군 포병의 사격이 진가를 내도록 도왔으며, 패잔병을 추격하고 정탐을 수행하는 등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다. 따라서 기병 장교들은 첩보장교를 맡기도 하였으며, 기병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중요한 역할은 전장에서 언제 돌격할지 타이밍을 재는 것이었다. 적의 전열이 빵빵한 시점에서 정면돌격하는 것은 순식간에 압도적인 보병의 화력 앞에서 벌집이 되어 전멸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며, 기병대가 제 때 돌격하지 않으면 적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 올 말미를 헌납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가 되면 기병용 갑주가 거의 사라져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는 주로 말의 중량에 좌우되고[52] 승마자의 장비는 별 상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나폴레옹 전쟁기의 워털루 전투에서 괴멸당한 영국군의 스코츠 그레이(Scots Grey)는 후사르와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했고, 근위 기병대(Horse Guard)는 군복에 투구만 착용했지만 말이 대형마였기 때문에 중기병으로 분류된다. 물론 이시기에도 퀴레시어나 캐러비니어 같이 갑옷을 입은 기병은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은 당연히 중기병으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 주요 기병의 병과는 다음과 같다. 각 병과의 자세한 설명은 개별 항목을 참고.


4.4.1. 울란[편집]


Ułan(폴란드어)/Ulanen(독일어)/Uhlan(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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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봉기 당시 러시아군에게 돌격하는 포즈난 기병대.

근대 창기병. 울란(우완)은 폴란드 등지에서 부른 이름이며, 영어로는 랜서라고 했다.

나폴레옹이 쏠쏠하게 전쟁 내내 써먹은 창기병대의 경우 제대로 진형을 짜서 들이치면 경기병인 후사르는 물론 심지어 중기병인 드라군이나 흉갑기병을 능가하는 전력을 과시했다. 워털루 전투에서는 프랑스 경창기병 연대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영국의 정예 중기병대 '스콧츠그레이'(ScotsGrey)를 개발살내기도 했다.[53]

물론 이때 당시엔 두 부대의 정면격돌이 아니라 스콧츠그레이가 프랑스군 보병과 포병을 상대로 무쌍을 찍다가 너무 신나서 대열이고 뭐고 엉망이 된 상태에서 프랑스 퀴레시어와 울란의 공격을 받아 괴멸당한 예외적인 상황이었다.[54] 일단 검기병이 아무 준비도 없이 창기병이 해달라는 대로 정면으로 꼴아박는 일부터 잘 없으니까.

그래도 영국 최고의 정예 기병이 창기병에게 박살난 건 사실인지라 이에 영향을 받은 영국군에도 창기병이 등장하게 된다. 윈스턴 처칠도 창기병 출신이다.[55]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의 대기병 기병대의 주력은 16개 연대의 프랑스 퀴레시어이다. 나폴레옹은 장비를 일신하여 갑옷 착용율을 높였고, 폐지되어가는 분위기였던 배갑도 부활시켜 장갑 방어력을 늘려서 프랑스 기병대의 대 기병 요격부대로 큰 활약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경기병이지만 척후임무 및 적 전열의 측후방 타격이 가능한 등 매우 기동성과 활용도가 높은 검기병인 후사르에 비해 창기병이라 방향전환이 힘들어[56] 측면이 약하고 검기병이 창기병이 해달라는 대로 순순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면충돌해 주지 않는 데다가, 진형이 풀리거나 창의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창은 기본적으로 조준해서 찌르는 무기인데다가 창을 가지고 진형을 만든이상 적이 움직인다고 해서 그에 맞춰 창의 지향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고, 검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할 찰나에 빠르게 뽑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훈련 강도도 일반 기병보다 강해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로도 기병의 주력은 검과 총을 사용하는 후사르가 되어야 했다.

병과상으로는 경기병에 속한다. 이유는 빠른 기창돌격를 위해 덩치보다는 속도가 빠른 말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남북전쟁 당시 미 연방 정부군(북군)과 반란군(남군) 둘 다 창기병을 운용하긴 했다. 제 6 펜실베이니아 기병연대 '러시즈 랜서(Rush's Lancers)' 와 제24 텍사스 기병연대가 각자의 대표적인 사례인데,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창기병으로서의 인상적인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4.4.2. 후사르[편집]


Hus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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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기 영국군 제11 후사르 연대[57]의 후사르.

대표적인 경기병/검기병.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 또한 경기병에서 출발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중세 기사급의 중기병이 되어버린 케이스다. 후사르의 원조는 헝가리 등지의 동유럽계 경기병이었으며, 19세기 전쟁 등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굽은 검인 세이버를 휘두르는 털모자 쓴 기병이 바로 후사르다.


4.4.3. 샤쇠르[편집]


Chasseur à che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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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엽기병. Keith Rocco 作

프랑스의 추격기병. 당연하지만 '엽기적인 기병'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냥꾼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Chasseur'를 직역하여 수렵의 렵(獵)자를 사용해 엽기병이라 일컫는다. 이들은 후사르와 장비 면에서는 비슷했지만, 사냥꾼이라는 의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이 주임무.


4.4.4. 퀴레시어[편집]


Cuiras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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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퀴레시어.

흉갑기병. 총탄과 기병도에 대한 약간의 방호력을 가진 두꺼운 흉갑을 입는 돌격용 병과. 대표적인 중기병이었다. 이들은 중기병이었기에 굽은 검인 세이버를 쓰는 후사르나 샤쇠르와는 다르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직선형의 기병도를 장비했다.[58] 중기병보다 상대적으로 작고 속도가 빠른 말을 타는 경기병인 샤쇠르나 후사르는 속도를 이용한 베기에 유리한 세이버를 장비했다.

또한 나폴레옹의 대 기병전용 기병대의 주력으로 활약했는데 나폴레옹은 장비를 일신하여 갑옷 착용율을 높였고, 폐지되어가는 분위기였던 배갑도 부활시켜 장갑 방어력을 늘려서 프랑스 기병대의 대 기병 요격부대로 큰 활약을 벌였다.[59]


4.4.5. 드라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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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다온다 전투(Battle of Majadahonda)에서 프랑스군의 흉갑기병을 상대하는 영국군 용기병.[60]

용기병. 기병총 드라군을 다루는 병사로 어원은 이들이 다뤘던 총의 이름에서 나왔다. 본래는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전장에서는 말에서 내려 하마전투를 하는 승마보병으로서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으나, 이후 18세기에 들어와서부터는 후술하는 총기병과 비슷하게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 전투도 행하게 되면서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뀌게 되었다.

영국군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잡다한 기병 병과를 해체하고 중 드라군과 경 드라군으로 개편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뒤 오히려 대륙의 영향을 받아 여러가지 기병 병과가 생겨나게 된다.


4.4.6. 캐러비니어[편집]


Carabinier(프랑스어)[61], Carabineer/Carbineer(영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poleon_Carabiner_of_1812_by_Bellange.jpg
나폴레옹 기병대 소속의 후기 캐러비니어. 1812년 보로디노 전투 당시의 총기병대를 그린 그림이다. 우상단 언덕에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총기병대는 제국 근위대 소속은 아니지만 2개 연대밖에 없던 최정예 기병대라 종종 나폴레옹의 경호를 서기도 했는데 이 그림도 그런 상황을 그린 것이다. 해당 그림의 총기병대 부사관은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전달하고 있으며 퀴러시어보다도 잘 차려입은 갑옷이[62] 눈에 띈다.

총기병. 카빈[63]을 다루는[64] 병종으로, 이쪽은 드라군과는 달리[65] 처음부터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전투를 염두에 두었던 부대이다. 따라서 적의 탄환을 막을 충분한 갑옷과 총을 다루는 것의 편의를 위해 대형마를 운용 했다. 따라서 중기병으로 분류.[66] 이들은 루이 14세 당시의 프랑스 기병대중 최정예를 기마총병대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례했다. 총기병대가 왜 최정예 기병 취급을 받았는지 살펴보자면 원래 18세기 당시 기병들의 화기는 권총 정도 였으나 프랑스 총기병대는 기병총을 들고 마상 사격까지 할 수 있었다. 이는 사격과 승마 모두에 도통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고 그렇기에 총기병대는 엘리트 기병으로 대우 받았다. 나폴레옹 휘하에서 총기병대는 두개의 연대를 갖추었고 낭수티등 유능한 중기병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는 중기병 사단에 배속되어 싸웠다. 이들은 흉갑기병 연대가 10여개에 달하는 숫자를 갖추었을 때 겨우 2개 연대를 갖추었을 뿐이었기에 그 희소성은 엄청 났다. 하지만 실전에서 이들은 졸전을 거듭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졸전이다. 이들의 진형에 일련의 헝가리 후사르들[67] 이 돌격해 왔고 이들의 지휘관인 세바스티아니 장군은 중기병에게 경기병이 돌격해오다니 저 바보들ㅋㅋㅋ 하며 박장대소 했지만[68] 이게 웬걸 총기병대는 장군을 버려두고(!!!) 패주했다. 결국 이 후사르들과 교전한 것은 총기병대 뒤에 서있던 제1 흉갑기병 연대였고 전투 후에 이들은 모든 중기병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다. 어쨌든 이 사례 외에도 그 멋진 장비와 두 개 연대 뿐이라는 희소성에 비해 총기병대는 나폴레옹 전쟁 내내 졸전을 거듭했지만 총기병은 19세기까지 남은 대표적인 기병 병종이었고 나중에 가면 퀴레시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흉갑기병이 된다. 사실 총기병대가 흉갑기병이 된데는 조금 슬픈 내막이 있다. 원래 총기병대는 곰가죽 모자에 검정색 말을 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근위대 소속 기마척탄병 연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69] 하지만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피튀기는 치열한 전역에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들이받는 오스트리아 울란과 앞쪽 갑옷밖에[70] 안입은 오스트리아 흉갑기병에게 계속 피해를 입자 최우수 인적자원이[71] 전쟁에서 자꾸 소모되어감을 우려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흉갑과 곰가죽 모자 대신 프랑스 경창기병 연대와 거의 같은 디자인의 금속제 신그리스풍 투구를 지급했다. 웃긴 것은 이 명령을 받은 이들의 반응인데 이들은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용맹을 의심하여서 흉갑을 입으라는 줄 알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여러 모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흉갑이 사람을 안전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들은 그 후에도 쭉 투구와 흉갑을 입고 싸우게 된다.

이들 역시 드라군과 마찬가지로 치안 유지에 투입되었고, 이 때문에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데, 현재 이탈리아군 소속 헌병군이탈리아 헌병군은 1814년에 창설된 사보이아 왕가 소속 총기병 연대가 1861년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이탈리아군에 편입된 것이 기원이다.


4.4.7. 시파히[편집]


سپاهی(오스만 터키어)/sipahi(영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Vienna.Sipahis.jpg
제2차 빈 포위 당시의 시파히 기병대.

오스만 제국의 정규 기병대[72]로, 예니체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군단의 핵심전력. 크게 근위대인 '카프쿨루'와 유럽의 봉건 기사격인 '티마를르'로 나뉜다. 훗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식민지군이 운용하던 경기병대인 '스파히'와 영국 동인도 제국 소속 인도인 용병인 '세포이'의 모티브기도 하다. 항목참조.


4.5. 20세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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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기병대. 붉은 바탕에 녹색 옷깃·소매는 기병병과의 복색이였으며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기병창 및 기병도는 전부 독일,러시아제를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이름은 騎兵이지만 사실상 機兵으로 체계화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미국 남북전쟁을 참관한 유럽 기병 장교들은 "미국 기병은 총만 쏘네?"하며 비웃었다. 미군, 특히 북군의 총이 발달한 것도 있지만[73] 급히 군의 규모를 늘리다 보니 마상 검술을 비롯한 수준 높은 승마술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남군의 기병 사령관이었던 존 싱글톤 모스비의 부대는 세계 최초로 기병도를 장비하지 않은 기병대로 유명하며 젭 스튜어트와 함께 남군 최고의 기병사령관으로 꼽히는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의 기병대는 말은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하마상태에서 치뤘다. 하지만 리볼버레버액션식 라이플을 비롯한 연발총의 발달로 기병이 칼 휘두를 일은 거의 사라졌고, 마상에서 연발총 쏘는 게 효율도 좋았다. 남군의 한 장교는 세이버는 캔따개나 요리용으로 쓰는것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단 기병의 세이버 돌격이 아예 없었던건 아니다.영문위키를 참조

하지만 유럽에서도 보불전쟁, 미국 남북전쟁 등의 전훈을 참고하여 19세기 중후반부터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발달과 전장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기병 운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전후 무렵 즘의 시점에서 기병은 사실상 기존의 기동력을 살리고 여기에 화력을 결합하는 운용법이 활발히 논의되었다.카타콜 전술의 부활? 그 결과 1차 세계대전 무렵에 기병은 전통적인 기병보다는 승마보병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대표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경우 1882년에 정규 경기병(후사르), 창기병(울란) 연대들을 용기병 연대로 전환시켰다. 14개 경기병 연대와 14개 창기병 연대 전체가 용기병 연대로 전환된 결과 러시아 제국은 46개의 정규 용기병 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74] 독일 제국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중반 즈음에 기존 경기병, 창기병 등 각종 기병부대를 참호전에 적합한 기마소총사단(kavallerie-Schutze, 카바레리 쉬체)으로 일괄 전환하여 운용했다.

사실, 세계대전 시기 이전부터 기병의 역할은 꾸준히 축소되는 경향을 겪었다. 이러한 경향은 화약의 성능이 시대에 따라 개선되어 가면서 시작된 일로 여겨진다. 특히나 무연화약의 개발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화약 성능이 개선되어 유효 사거리와 살상력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터에서 불발탄의 비율도 크게 낮아졌다.[75] 더군다나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해대니 기병의 입지는 더 급추락했다.[76]

하지만 이러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1차 세계대전기까지는 기병이 여전히 중요한 병과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1차대전기 '끊임없이 쏟아지는 기관총의 포화 아래 덧없이 스러져 가는 기병 돌격' 이라는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기관총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당대 사람들의 상상 속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기병대가 무턱대고 돌격하다가 기관총에 녹아내리는 상황은 참호전이 일상적으로 펼쳐진 서부전선에서도 전쟁 초반에나 몇 번 있었지 전쟁 내내 자주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기까지는 아직 보병에게 기동력과 충격력을 부여해줄 자동차나 기갑장비의 개발 및 보급이 대전 이후의 다른 전쟁들에 비하면 턱없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여전히 기병의 기동력과 충격력이 유효한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차대전기의 기병대는 적 견제, 측면 엄호 및 정찰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으며, 훗날의 공수부대나 기갑부대처럼 기동력을 살려 유리한 지점을 미리 차지하는 역할 역시 자주 수행했다.[77] 특히 전선에 우회할 공간이 적었던 서부전선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기병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차 대전 시기에 기병이 활약한 대표적인 예시로 동부 전선 초기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제국 제1기병사단의 사례가 있다. 타넨베르크 전투 당시에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의 늪지와 산림이 많은 지형에서 맞붙었다. 이 때 제1기병사단은 기동력을 잘 살려 산림 지대에서 병력을 신속히 산개하여 러시아 제1군 전체를 견제하여 독일군 주력의 측면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결국 고작 1개 사단(실질 전투력은 보병 여단에 해당[78])이 러시아 1개 야전군 전체를 견제하여 발목을 붙잡는데 성공했고 전투는 독일군의 유례를 찾기 힘든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비행기가 전장에 도입된 이후로는 정찰병으로서의 역할은 다소 축소되기는 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거나 기동력을 살려 유리한 거점을 적보다 빨리 차지하는 등의 활동은 꾸준히 행하고 있었다. 동부전선, 특히 인구밀도가 낮은 중동 지역에서는 특히 활약상이 더 컸는데, ANZAC 용기병대가 터키 보병대에 돌격해 승리한 베르셰바 전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해진 아랍 반란군의 활약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기술이 더 발달한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폴란드창기병대러시아카자크 기병대가 크게 알려졌다. 전간기에는 신생 폴란드 공화국의 창기병대와 소련 적군 카자크 기병대 간의 기병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폴란드 창기병대는 창 들고 전차에 꼬라박은 뒤 전차가 나무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나, 이건 사실 용맹히 싸웠던 폴란드군을 바보로 선전하기 위한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헝가리와 같은 추축국의 프로파간다였던 것을 폴란드가 공산화된 뒤 세계대전 중 공산국가들의 기여를 격하하고 싶던 영국과 미국이 받아서 퍼뜨린 것이다. 실제 폴란드 기병대는 독일군 보병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전차부대와 충돌, 끝까지 저항하다가 몰살당한 사례이며 이 장면을 찍어다 프로파간다용으로 쓴 게 퍼진 것이다.

이 시대의 폴란드 창기병은 말이 창기병이지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고,[79] 전원 개인 화기로 무장한, 말로 이동하는 정예 보병에 가까웠고 말의 역할도 이전 시대같은 충격 전차보다는 고기동차량에 더 가까웠다. 연대 규모로 가면 대전차포와 대공포, 부속 기갑중대까지 붙은 세계대전 기준으로는 매우 현대화된 부대였으나 "창기병"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기병창과 기병도 역시 지급하고 훈련도 했으며, 실제로 창기병 돌격으로 독일군 보병중대를 격파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멸한 사례 중 일부는 퇴각 중인 후방부대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다 전멸했다고 한다.폴란드 기병대는 세계대전 일어나기 몇년 전에 일어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소비에트 러시아군을 분쇄한 활약으로 세계에 막강한 폴란드군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로 동부전선에선 나치 독일에 포섭된 카자크 기병들이 활약했지만, 소련 육군 역시 카자크족을 징집해 추격전이나 게릴라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소련 육군은 여기에 1개 기병군단과 1개 기계화군단을 조합하여 임시편제한 기병-기계화 집단으로 전차나 차량화, 기계화소총제대가 기동하기 힘든 지형에 투입하거나 일반적인 전차부대보다 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게 하여 추격과 포위 기동에 활약하게 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카자크들이 도망치는 독일군들의 목을 수확하고 다녔다고 한다. 1944년에 벌어진 소련군의 기병돌격을 보면, 당시 기병전술의 양상과 효과 및 활약을 볼 수 있다. #. 해당 글에서 현대 전장에서의 기병은 하마 보병으로서 싸웠고 합리적인 전술적 테두리 안에서 운용되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보기드문 전근대적인 기병돌격이 행해지기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병사들에게 추격하는 기병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것이 없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투를 경험하고 훈련된 군마가 어떻게 다른지도 잘 나와있다.

독일군은 2차세계대전 당시 6개 기병 사단을 운용했으며, 대부분 동부전선에서 운용했고 일부 발칸 반도에서 사용한 기록도 있다. 대부분 후방의 빨치산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량과 함께 기병을 편성해 운용했다. 또, 적백내전 당시 백군파에 속했던 카자크를 모집해 2개 카자크 사단을 창설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서부전선에도 참전한바 있다. 무장SS는 치안유지와 후방 게릴라 소탕을 위해 여러 기병부대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무장SS의 제8SS 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가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일화가 있는데, 미육군으로 입대한 어느 인디언 병사(Joe Medicine Crow)는 워치프가 되기 위한 과업 중 2가지, 아군을 전쟁으로 이끌고 적의 말을 훔치는 것을 휘하 부대를 이끌고 SS의 말 50필을 훔침으로써 달성한 바 있다. 기병이 아니라 군마의 경우, 독일군의 차량화와 기계화 비율은 대단히 낮은 편[80]으로 전쟁 기간동안 엄청난 숫자의 말을 징발했다. 1939년 개전 당시에 59만 마리, 1945년 1월에는 120만 마리에 이를 돌보는 인원만 수만명이었다. 중간에 죽거나 다친 말까지 포함하면 유럽 전역에서 최대 700만 마리의 말을 징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독일군은 고질적인 석유 부족으로 최일선의 전차부대를 제외하면 말을 굴려야 했다. 이 말은 수송부대나 포병대, 지원장비 등을 견인하는데 사용되었다.[81]

이탈리아군 역시 기병대가 존재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독소전에 파견된 육군 사보이아 기병연대의 기병돌격. 1942년 8월 24일에 있었던 일로 포병 지원까지 받던 소련 육군 시베리아 보병연대를 기병 돌격으로 박살내버렸다. 졸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군이지만 이런 분전도 많았다. 그리고 실질적인 기병대가 투입된 마지막 전투는 후술된 후베이성 전투지만, 그 기병대로 성공적인 돌격을 달성한 것은 사보이아 연대의 기병돌격이 현재 역사상으론 마지막이다.

일본 육군태평양 전쟁 당시 기병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는 좋은 말이 드물어 근대 이전에도 기병을 대규모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1차대전 직후인 1919년 기병폐지론이 강하게 일어나서 이를 주장한 쿠니시 고시치 육군 소장과 이를 반대하는 제4기병여단장인 요시하시 토쿠사부로 육군 소장 간에 격론이 벌어졌는데, 요시하시 장군의 자살과 함께 기병 폐지론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보병사단에 소속된 기병연대를 먼저 기병정찰대대로 축소한 다음 차츰차츰 폐지했다. 중국 전선에서는 여전히 기병을 사용하여 중일전쟁에서는 4개 기병여단을 유지했지만, 1940년 기병 1여단이 차량화되었고, 1941년 기병2여단이 해체, 1945년에 초에 기병3여단이 해체되어 패전 당시까지 보유한 기병대는 기병4여단 하나뿐이었다. 1945년 6월 중국 후베이 성 라오허커우시에서 비행장을 확보하려는 중국군과 일본군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 일본 육군 기병4여단이 참전하여 여단 이상급 대단위 기병대가 전투를 벌인 마지막 전투라고 한다.

몽골군 역시 2차대전 시기에 기병대가 존재했고, 할힌골 전투에서 활약 했다.

2차대전 당시 자력으로 전군의 기계화를 이뤄낸 군대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미군이다. 말과 마초를 저 멀리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수송하는 것보다 차량을 수송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소련군 또한 쿠르스크 전투 이후부터 엄청난 물량의 전차를 찍어내 군의 기계화에 성공한다. 미군은 기병대를 전간기에 이미 대부분 폐지하거나 차량화 하였으나 제2차대전 까지도 소수의 기병대를 운용했으며 1942년 1월 16일 필리핀 바탄 반도 방어전을 수행하던 제26기병연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미국 역사상 최후의 마상 돌격을 시행해 수적 우세를 점하던 일본군을 격퇴한 전적이 있다.

이렇듯 1차대전기까지는 세간의 인식보다는 훨씬 많이, 2차대전기에는 많이 제한되긴 했지만 약간이나마 정찰, 기동력을 살린 침투, 충격력을 살린 돌격 등의 기병의 '전통적인 역할' 이 쓰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부터 이미 자동차나 오토바이, 기갑장비, 항공기 등 기병의 기동력과 충격력을 쌈싸먹는 병기들이 대거 개발되고 일선에 보급된 탓에 기병의 역할이 확 줄어들었고, 2차대전이 터지자 전간기의 병기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으로 병기들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다른 병과들이 기병의 역할을 대부분 빼앗아 갔다. 이 때문에 1차대전 이후로 기병은 가면 갈수록 비중이 줄어들었고, 2차대전이 끝난 이후로는 사실상 사장되다시피 했던 것. 그러더니 1950년대 초반을 마지막으로 기병대는 모두 전장에서 퇴장했다.

현대에 와서 기병이 활약할 여지는 기마경찰대로서 사용하는 정도이다.[82][83]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장에서의 독일이나 영국, 미국 육군의 '기병대'는 많은 경우 말로만 기병이고, 헬기, 차량화부대나 기갑 또는 기계화 보병이 되어있었다.

물론 한자어로 번역을 해서 기병이 되긴 했지만, 사실은 'cavalry'라는 단어의 뜻 자체가 변한 것에 가깝다.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어 중 비슷한 변화를 겪은 비슷한 분야의 단어를 찾는다면 전차가 있다. 현재는 탱크를 이르는 말이지만 원래는 춘추전국시대에 널리 쓰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를 이르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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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대구역에 집결한 육군 기병대

한국전쟁에서도 대한민국 육군 독립기갑연대 휘하에 기병대가 2개 중대 정도의 규모로 있었다. 개전 초기 전역부터 지연전역 때까지 전장에서 계속 싸웠다. 물론 북한군 탱크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미친 전술은 당연히 아니었고,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교전시 말에서 내려서 보병 전투를 진행하는 드라군처럼 운용하였다. 지연전 전개 기간 동안에는 기병대장 장철부 소령이 적에게 포위되어 전사[84]하는 등 사실상 괴멸되었지만, 북한군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감행포위망을 뚫고 이기는 등 상당한 활약도 했다. 그러나 1950년 8월을 전후한 무렵에는 말이 거의 전멸한 상태에서 추가 수급이 불가능해 보병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말들은 훗날 경찰 및 육군 헌병에 흡수되어 기마경찰대와 기마헌병대가 되었다가 역시 195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1972년에 육군 제1군사령부에서 강원도 산악지대에서의 수송과 대간첩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토종 조랑말을 이용한 타마(駝馬)부대를 창설하기도 했으나 말먹이를 수급하기 어렵고, 기계화 장비들을 도입하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어 1982년에 공식 해체되었다.[85] 현대 한국군에서 정식으로 말을 운용하는 곳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의 승마 교육을 담당하는 군마대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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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군대인 로디지아군도 게릴라전에 쓰기 위해 기병을 운용했었다. 지형상 차량을 원활히 운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유용했을뿐만 아니라, 말이 원래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흑인 게릴라들은 말의 존재를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심리적 압박감도 상당했었다고 한다. 로디지아군 항목의 동영상을 보다보면 드라군 마냥 총들고 말 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런 이유다. 물론 로디지아 자체가 사라지고 나서는 반짝 부활했던 이 기병들도 뿔뿔이 흩어졌겠지만...

4.6. 21세기[편집]


현대전에서는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되면서, 의장대와 기마 경찰대 정도를 제외하면 을 이용하는 부대는 거의 없으며, 과거에 기병이 맡았던 역할은 전차장갑차, 그리고 헬리콥터들이 계승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기갑 부대나 헬기 강습 부대 등은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 타던게 말에서 장갑판 두른 자동차나 헬리콥터가 되었을 뿐이지. 현대에 와서 중기병의 "충격력" 개념은 전차가 계승했고, 경기병과 총기병의 "속도와 범용성" 개념은 헬기장갑차가 계승한 격이다. 이 중 장갑차는 기병처럼 기동하는 역할이 아니라 보병을 수송하는 개념이므로,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병의 기동성을 가진다.[86] 즉, 과거의 승마보병 드라군의 개념을 계승한 것이다. 처음에는 하마(하차) 전투를 위주로 하다가 점점 승마(승차) 전투를 주요 교리로 하게 된 것도 드라군과 장갑차를 타는 기계화보병의 공통점이다.

많은 기갑 부대, 헬기 강습 부대들이 부대 마크에 편자를 넣고, '기병(Cavalry)'이라거나 '드라군(Dragoon)'[87] 등을 부대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예로는 미국 육군의 제1기병사단이나 제2기갑기병연대 등이 있다. 2차 대전중의 독일군 기갑부대는 복장과 마크에서 프로이센 창기병을 계승하고 있었다.

보통 유럽 군대에게 있어서는 기병대는 과거 군대의 전통을 상징하기에 부대의 역사가 몇백년 되어 기갑으로 변환한 병과들도 후사르, 창기병, 샤쇠르, 쿼러시어, 드라군 등의 명칭을 이어받고 있다. 러시아 군가 초원(군가)에서도 가사에 말, 전차가 번갈아 나온다.

반면에 이런 전통이 빈약한[88] 미국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모든 기병 병과가 단 하나로 통일되었고, 지금의 수색대 단대호는 본래, 그리고 현재 미국 기병의 단대호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UH-1 휴이를 주력으로 공중강습전을 벌이는 공중 기병대(Air Cavalry), 기갑차량을 편제받아 위력정찰 역할을 하는 기갑 기병대(Armored Cavalry)로 개편된다. 이후 공중 기병대는 보다 전문적인 공중강습부대나 공수부대 등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대신 카이오와 정찰헬기 등을 사용해 기갑 기병대의 눈 역할을 맡고 있으며, 기갑기병은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산악지역, 사막 등 차량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진짜 기병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다. 정말 험난한 곳은 말로도 못 가니까 걸어가야만 하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산악 지역같은 험한 곳은 말은 힘들긴 해도 그럭저럭 갈 수 있는데 장갑차로는 택도 없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 굳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동만 말을 타고 하는 드라군식의 운용으로도 이런 지형에서는 쓸모가 있다. 그냥 걷는 것보다는 빠르기에 험지에서도 기동성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으며, 사람 대신 기관총이나 견인포 같은 무거운 공용 화기를 운반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기에[89]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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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 기병대. QBZ-03으로 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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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과 기병도를 들고 돌격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기병대.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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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 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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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산악부대에서 밀란 대전차 미사일을 수송 중인 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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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 산악여단에서 보병을 운송하는 군마

한 예로 사막과 산악이 대부분인 중국의 서북부 지역에는 기병대가 현존하고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지형 특성상 차량화부대의 유지, 보수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로 발달한 듯. 비슷한 이유로 몽골 역시 기병대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의 산악부대도 산 같은 험지에선 바퀴달린 탈것보다 4족 보행 군마가 더 적합해 사용중이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기병이 활약했다. 원래 이 땅에 살던 북부동맹이나 탈레반 등은 기계화된 기동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특성상 기병을 사용했는데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부동맹에게 지원나간 미군 특수부대가 폭격 유도를 해주면 북부동맹이 기병 돌격을 실시했다고 한다. 몇몇 전투에선 미군 특수부대도 같이 기병 돌격했다고 한다.이후에 미군도 현지의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노새를 이용한 물자 수송을 하기도 했다. 이 일화를 다룬 영화가 12 솔져스다.

4.6.1. 공중 기병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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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서 이러고 다니지는 않는다
보면 알겠지만 미국 기병대로 위가 빨갛고 아래가 하얀게 인도네시아모나코 국기와 닮았지만 당연히 별 관계 없다. 원래는 성조기에서 Stripes에 해당하는 빨간색과 하얀색이다. 1862년 일반명령 4호에서 기병대 깃발(guidon)을 성조기 줄무니를 이용해 만들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것.

Air Cavalry

냉전과 그에 수반된 베트남 전쟁 당시, 보병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지형들을 통과하여 전장을 자신들이 먼저 고른다는 개념으로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공중강습사단으로 개편되어 제11공중강습연대가 사단 내에 예하 부대로 배속되면서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하늘을 뒤덮은 휴이의 파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수송헬기를 이용한 공중강습전은 여타 다른 공중강습사단들에 소속하는 보다 전문적인 공중강습부대들에게로 넘기고, 정찰헬기와 무장헬기·공격헬기 등을 이용한 정찰화력지원·대전차전 등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기갑 기병대의 눈으로서 OH-58 카이오와 정찰헬기나 AH-64D 롱보우 아파치 공격헬기 등을 통하여 기병대의 정찰을 주로 도맡는 역할이다. 물론 그렇다고 수송헬기 자체를 아예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UH-60CH-47 등으로 구성되는 수송헬기 전력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공중기동 기병대라고 해서 장갑차 같은 지상 기동장비들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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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인지 부대에서 운용하던 헬기의 퇴역식에서는, 과거 기병대의 전통에 따라 애마안락사시키듯이 퇴역하는 헬기를 보내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이 부대의 강습보병들과 조종사 등 항공대 인원들도 군복의 병과표지를 기병의 것으로 달기도 한다.


4.6.2. 기갑 기병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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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얘네도 실전에서 이러고 다니진 않는다.-
Armored Cavalry

베트남 전쟁의 종결 이후, 공중강습사단이었던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삼중임무수행능력(TRICAP, 기갑/항공/강습 3개 임무의 동시수행)을 요구받으면서, 공중강습과 더불어 편제에 전차기병전투차를 편제받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현대적인 기갑 기병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갑차량을 활용한 위력정찰이 주된 임무이며,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또한 기병전투차만이 아니라 전차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정찰만을 수행하는 부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기갑 기병대는 수색대의 역할을 맡고 있는 부대이지만, 타 국가의 수색부대와는 교리가 다소 다르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수색부대들은 가급적 직접교전을 피하여 정찰을 하나, 미군 기갑 기병대의 경우에는 정찰을 한 뒤 그 상대들을 직접 갈아버리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마치 전근대의 기병과도 비슷하다. 아예 현용 CFV(기병전투차)주력전차가 배정되고 직접 교전을 꺼리지 않는 점에서 점에서 타국의 수색부대와는 차이가 큰 편. 중과부적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육군 항공대공군 등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찰만이 아니라 교전에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때문에 단순한 수색부대는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육군 편제에서는 각 기계화 보병사단 직할의 기갑수색대대와 독립 기갑여단의 기갑수색중대가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영문 명칭 역시 동일하게 사용한다.


4.6.3. 주한미군 기병대[편집]


주한미군 한정으로 기병부대를 '항공기갑수색대'라고 부른다. 엄밀히 말하면 주한미군의 카투사 관련 부대들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공중기병과 기갑기병을 합친 표현이다.

다만 부르는 명칭은 다소 독특한데 2000년 초반 기준으로 미2사단 항공여단 예하의 4th Squadron, 7th Cavalry Regiment 7항공기갑수색연대 4대대를 '사칠기갑'이라 부르고, 미8군 예하의 6th Cavalry Brigade, 6항공기갑수색여단을 '육항공'이라 부른다. 이는 같은 기병이라도 '사칠기갑'은 M1 에이브람스, M3 기병전투차 등 기갑기병 위주의 부대[91]이기에 기갑이라고 불렀고 '육항공'은 AH-64 아파치OH-58 카이오와 워리어 등 보유한 공중 기병대였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에 따르면 "2005년, 미국 육군의 개편의 일부 계획인 전투항공여단 계획에 따라 제2보병사단 항공 여단에 제17항공여단과 합쳐져 제2전투항공여단으로 개편되어, 제6기병여단은 편제에서 사라졌다. 배속되었던 제43방공포병연대, 1대대는 제35방공포병여단에 재배속되었다. 제6기병연대, 1전대는 제1보병사단에 옮겨가고, 제3전대는 해산하였다." [92]


4.6.4. 기마경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기마경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유명한 기병대[편집]



5.1. 현실[편집]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93] - 개마무사
  • 그리스(마케도니아 왕국 포함) - 헤타이로이
  • 누미디아 - 누미디아 기병
  • 러시아 - 카자크[94]
  • 로마 제국 -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클리바나리, 아르콘토풀레
  • 몽골
  • 미국 - 러프 라이더
  • 스웨덴 - 하카펠리타트
  • 시크 왕국 - 고르쿠라 사르다르[95]
  • 신성 로마 제국 - 흑기병(Schwarz Reiter)
  • 오스만 제국 - 시파히
  • 잉글랜드 - 노르만 기사[96], 철기대, 스콧츠 그레이
  • 중국
    • 전한 - 기병대에 특별한 명칭을 붙이지는 않았으나 초원 지대에서 흉노와 정면으로 대결하던 질적, 양적으로[97] 최강급의 기병대중 하나라 할 수 있다.
    • 후한 - 백마의종, 호표기
    • 당나라 - 월기
    • 요나라 - 궁위기군, 부족군
    • 금나라 - 맹안모극, 괴자마
    • 원나라 - 천호
    • 명나라 - 북병[98]
    • 청나라 - 팔기군
  • 중동 - 맘루크
  • 카르타고 - 신성 기병대, 누미디아 기병
  •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 파르티안 카타프락토이, 푸쉬티그반
  • 폴란드-리투아니아 - 윙드 후사르
  • 폴란드 - 울란
  • 프랑스 - 노르만 기사[99], 장다르메[100], 프랑스 제국 근위 기병대, 메종 드 루아(프랑스 왕국 근위 기병대), 퀴레시어, 캐러비니어
  • 헝가리 - 후사르[101]


5.2. 가상[편집]




6.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편집]



6.1. 현실[편집]


  • 곽거병
  • 고노자
  • 공손찬
  • 관영
  • 광개토대왕
  • 다케다 신겐[102][103][104]
  • 드제
  • 리처드 1세
  • [105]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106]
  • 설인귀
  • 글필하력
  • 제베, 수부타이몽골제국의 장군들
  • 세묜 부됸니
  • 숭덕제
  • 신립
  •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 아키야마 요시후루
  • 여포[107]
  • 얀 소비에스키
  •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 올리버 크롬웰
  • 우에스기 겐신[108]
  • 위청
  • 유금필
  • 이성계
  • 장철부
  • 정문부[109]
  • 장 바티스트 베시에르
  • 제임스 이월 브라운 스튜어트
  • 조아킴 뮈라
  • 조조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 칭기즈 칸
  • 필리프 르클레르
  •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 한스 요아힘 폰 치텐


6.2. 가상[편집]


  • 브라도 켄드리드[110]
  • 세오덴[111]을 비롯한 로한인들
  • 아라고른[112]회색부대, 임라힐백조 기사단
  • 칼 드로고
  • 키리코 큐비 - 장갑기병대 소속 병사로 무적무패의 강자다. 물론 장갑기병 보톰즈는 SF 로봇 아니메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기병대는 말이 아니라 소형 전투 로봇에 탄 병사들이지만, 적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롤러 대시라는 고속 주행으로 돌진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기동타격대다.
  • Fate 시리즈 - 라이더 클래스 전원


7. 각종 매체에서의 기병[편집]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가상, 현실 배경 상관없이 말을 쓰지만 그 세계의 환상종을 탈것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날 수 있는 종의 경우는 그걸 타고 날기도 한다. 하지만 공중이건 지상이건 대부분의 동물들은 사람을 태울 만큼 힘이 남아도는 경우는 품종개량을 하지 않는 한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특히 새는 자기 몸 날게 하는 것도 힘들다. 때문에 하늘을 나는 것에 사람을 태우면 그리핀 같이 새와 포유동물의 특징이 합쳐진 환상종은 물론 아예 거대화한 조류나 비룡에 탑승하며, 강력한 정예병이나 영웅이면 드래곤을 타기도 한다. 랑그릿사 시리즈 같은 곳에서는 비병으로 분류된다.

SF, 특히 스팀펑크 배경인 경우 오토바이가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7.1. 드라마, 영화[편집]


한국이든 외국이든 영화, 사극 등에서 기병전이 제대로 묘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개는 그냥 말탄 기병들이 보병들의 옆을 얌전히 지나가거나, 기병과 보병이 대치한 상태로 질, 질을 주고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13] 한국 사극에서는 삼국기,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불멸의 이순신, 연개소문, 대조영, 천추태후, 선덕여왕, 김수로,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계백, 무신, 대왕의 꿈, 정도전, 징비록, 한국사기, 화랑에서 기병이 나왔다.

역사나 군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이런 묘사에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크다. 일단 말은 매우 비싸며, 말을 탈 줄 아는 전문 배우를 구하기 힘들고, 훈련된 말이라 해도 결국 동물인 만큼 촬영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데다, 기병의 충격력과 돌격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말들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사람 머리 높이에서 떨어지는 낙마 장면은 전문 스턴트맨을 써야 할 정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위험하다. 백병전과 달리 살아있는 생물인 말을 이용한 전투는 사실적인 리인액트가 무척 어렵고 위험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칸나이 전투를 다룬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한니발군의 기병을 묘사하기 위해 고용된 리인액터들은 카우치드 랜스를 사용해야 했다. 고증을 따르자면 창을 양손으로 쥐고 돌격하거나 창을 역수로 잡고 밑으로 내려 찍는 방법을 써야겠지만, 이는 고삐를 다룰 손이 없으며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탓에 낙마 사고의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사극 한편에 수십 수백 억의 예산을 쏟아 붓는 BBC 마저도 기병전의 묘사를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정도로 기병의 연출은 어렵다.

기병전을 그나마 볼 수 있는 영상 매체는 현재로서는 블록버스터 영화 정도이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첫 돌격, 그리고 뒤이어지는 백병전을 살짝살짝 다뤄주는 정도다. 상술했듯 안전 문제가 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기병 돌격 장면은 바로 영화 반지의 제왕펠렌노르 평원의 전투로한 기마대 돌격장면이다. 배우들의 연기력, 막대한 물량, CG와 실사가 조화된 소설적인 연출, 웅장한 BGM(#Riders of Rohan, The Battle of the Pelennor Fields) 등이 아름답게 어울려, 영화 속 전투장면 베스트를 논할때 항상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랭크되는 희대의 명장면이다. 기병이 보병과 접촉하기 전에 3~4회의 화살세례를 온몸으로 뒤집어 써야 한다는 현실적이고도 처절한 요소도 잘 묘사되었다.

덤으로 이 장면을 촬영하다가 두 명의 기수가 낙마해서 촬영팀은 아 죽었구나 하고 다들 기겁했는데 다행히 기적적으로 둘다 아무 말에도 짓밟히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영상물에 기병을 잘 담아내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고 힘들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기병전 묘사도 매우 훌륭하다. 케락의 백성들이 성으로 안전하게 들어올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이벨린의 발리앙(올랜도 블룸)이 이끄는 소수의 유럽 기병대가 압도적 다수의 이슬람 기병대를 상대로 일자형 진형을 장방형으로 바꾸어 가며 돌격하는 장면이 장렬하다. 중장갑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포로로잡히는것도 고증에 맞는다. 영상

<브레이브 하트>도 역사왜곡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러 볼거리가 충실하게 채워진 훌륭한 작품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장창을 기습적으로 빼든 스코틀랜드 보병방진이, 코앞까지 돌진한 잉글랜드 기병을 제압하는 스털링 전투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잉글랜드 기병이 출진하여, 충분한 충격력을 얻을 때까지 속도를 서서히 올리는 장면은 묵음처리가 되는데, 시청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연출도 훌륭하다.

최근에는 HBO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 6 9화의 쟁점인 윈터펠 전투에서 존 스노우램지 볼턴이 각기 이끄는 스타크 병력과 볼턴 병력의 기병 충돌 장면이 화제가 되고 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를 거진 쌈싸먹는 어마어마한 퀄리티를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극중 지휘관들의 전략적 오판과는 별개로 중세 기병의 돌격력과 기병 대 기병간의 난전 묘사를 그 어떤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존 스노우의 시점에서 난전의 현장을 보여주는 롱테이크 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중세판으로 옮겨놨다 봐도 될 만큼 압도적. 전투 종반에 볼턴 창병대의 방진에 존 스노우의 야인 군대가 끔살당하기 직전, 그들을 지원하러 온 베일의 대규모 기사단이 방진의 후미를 강타해 압살해 버리는 장면도 볼 만하다.


하지만 기병전 묘사의 TOP는 역시 1970년 영화 <워털루>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CG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진짜 코사크 기병 2000여 기까지 동원된(!!!) 14,000 여 정도가 동원된 것이 장관이다. 평원을 뒤덮을 기세로 몰려든 기병들이 보병들의 수많은 방진들 사이로 말려드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압권. 배우 하나가 낙마하면 그 사람은 100% 끔살 확정일 정도로 대단히 위험한 장면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찍을 생각을 했는지. 또 포탄이 터질 때마다, 보병들의 일제사격이 있을 때마다 기병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는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연기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기병 돌격 장면이 있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45년 동안 촬영기법이나 녹음장비가 발전해 훨씬 현실감 있는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해졌다.


워 호스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기병 돌격의 장관과 기병의 몰락을 처절하게 그려냈다.


폴란드 영화 "바르샤바 전투 1920"에서 묘사된 볼셰비키 기병대, 복장을 보고 소련군이 아니라 파르티잔이나 민병대로 볼수도 있겠지만 당시 볼셰비키 적군이 트로츠키의 전시 징병제로 급조로 편제된 군대인걸 고려한다면 고증오류가 아니다


프랑스의 TV시리즈 나폴레옹에서 아일라우 전투 당시의 기병돌격을 잘 연출했다. CG없이 액션만으로 말이 보병을 돌파하고 부닥치는 위험한 장면을 잘 보여주었다.


(1분 56초 지점부터)


(처음 지점부터)

바이킹스에서 묘사한 기마 충격 전술. 전투장비나 기술 및 생활사 등 미시사적 고증이 충실한 이 드라마에서 눈여겨볼만한 부분 중 하나이다. 방패벽(shield wall) 전술을 비롯한 보병 방진은 부대 질량이 충분할 경우 방패를 들고 전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해당 장면처럼 겨우 2열 남짓한 정도로는 말과 기수의 체중에 속력까지 빠른 기병의 충격력을 저지할 수 없었다. 무기를 휘두르지 않아도 그냥 부딪쳐 오는 것 자체가 보병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던 것. 사실 부대 질량이 돌파를 저지하기에 충분하다고 해도 전열의 앞 부분은 기병의 충격력을 고스란히 받기에 피해가 크기 마련이었는데, 이는 서유럽 내에서 기창을 이용한 지속적인 기병 충격으로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전술이 발전하는 요인이 되었다.[114]

서부극의 영향으로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암담한 상황에서 기다리는 지원군이나 구조대를 기병대로 부르는 관행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버워치트레이서 대사 중 "안녕 친구들. 해결사가 왔어!"는 원래 영어판에서 "Cheers Love. The Cavarly is here!"이다.

특이하게도 기병이 활약할 여지가 없는 듯한 현대전에서의 기병돌격을 묘사한 작품도 있는데 바로 12 솔져스. BM-21의 포탄이 머리를 스치고 탈레반의 총세례 속에서 돌격하는 21세기판 기병 돌격을 나름 비장미 있게 묘사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검이나 창이 아닌 총을 들고 마상사격을 하며 돌격을 한다는 점도 주목할 요소.영상


7.2. 게임[편집]


대다수의 전략 게임에서는 기병을 그저 빠르고 강한 보병수준으로 구현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를 비롯한 고전 RTS 게임에서도 이런 경향이 강한데, 게임 엔진상 기병의 충격력을 묘사하는 게 어렵고, 게임의 기본 디자인 자체가 전쟁을 정확하게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대신 고증에 맞춰서 보병(검병, 중장보병)과 포병에 보너스 데미지를 주는 대신 장창병에게서 보너스 데미지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단,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에서는 드디어 마상 돌격 시스템이 구현되어 돌진 시 1회 한정으로 큰 데미지를 줄 수 있게 구현되었다.

삼국지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기병, 보병, 궁병이 등장하며, 기병은 빠른 기동력과 공격력이라는 게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기병 묘사다.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병종 적성도가 존재하는데, 기병 적성도가 높을수록 기병의 위력이 강해지기에 기병 적성이 높은 장수가 없는 세력은 기병 운영에 애를 먹는다.(예를 들면 오나라 세력은 전통적으로 기병 약체다.) 일부 시리즈(특히 삼11)에서는 북방에 말이 특산물이고, 북방에 기마대를 잘 지휘하는 장군이[115]깔렸다.빠르고, 전투기술만 풀찍으면 캐사기.

이에 반해 토탈워 시리즈마운트 앤 블레이드처럼 꽤나 훌륭하게 구현해 놓은 게임도 있다. 게임상에서 멈춘 기병은 보병의 좋은 먹잇감이 되며[116], 창병이나 전열보병에 매우 취약하지만, 돌격을 수차례 반복하여 적을 약화시키거나 적을 패퇴시킨 후 전과확대 단계에서 추격하는 임무를 맡는 등.[117] 상당히 현실적이다. 또한 일단 붙어서 칼질을 하는 다른 게임과 달리 충돌시 적 보병이 뒤로 날아가기도 하며, 혹은 한번 들이받았을 뿐인데 전열이 개박살나면서, 모랄빵이 나는걸 생생히 볼 수도 있다.

킹덤 언더 파이어 : 더 크루세이더와 히어로즈도 토탈워나 마운트 앤 블레이드처럼 기병을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적에게 충격 공격을 가해서 영웅이나 유닛이 가진 특수 능력에 필요한 스킬 포인트를 모으는 컨트롤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 적에게나 이러면 안 되고 보병이나 궁병에 들이받고, 인간의 창병이나 마족의 오크 도끼병 같은 카운터는 피해야한다.

또한 경기병과 중기병간의 특성이 꽤 커서 경기병은 창기병이 아닌한 큰 충격을 주기가 어렵고 방어가 약해 잘 죽지만 쉽게 지치지 않고 빠르며, 중기병은 강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으나 첫 돌격 이후 지치기가 쉬우며, 기동 또한 경기병에 비하면 많이 뻑뻑한 편이다.

온라인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직종이다. 그도 그럴것이, 뭔가를 타면서 공격까지 가능해진다면 파티 플레이때 다른 파티원에 비해 이동속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만큼 팀웍에 장애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냥 속도에 따른 성장 및 아이템 파밍 면에서도 밸런스 붕괴가 되기 쉽다. 그리고 일단 기마상태의 전투 자체를 구현하기가 썩 쉽지가 않다. 단순히 시스템을 구현하는것이든,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든 난점이 산적한다. 3D 오픈월드 계통의 온라인 게임이라면 더불어 조작성까지 난해해진다. 그래서 탑승물 개념이 있는 온라인게임도 대부분 전투가 아닐때만 탈 수 있고 전투상태가 되면 탑승물이 사라진다. 굳이 구현하려 든다면 트리 오브 세이비어캐터프랙트슈바르츠라이터, 메이플스토리와일드헌터가 대표적이다. 디아블로3성전사가 군마질주라는 일시적 이동버프 스킬로 구현하기도 한다.

라그나로크 온라인검사가 상위직업으로 전직하면 탑승물을 탈 수 있다. 이동속도가 민첩성 향상 버프를 받는 수준으로 빨라지고 인벤토리 무게제한도 오르지만 패시브 스킬을 찍지 않으면 평타 공격속도가 절반으로 뚝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스킬포인트가 빡빡한 편이다. 3차 전직을 하면 탑승물이 쓰는 전용기술도 생긴다. 이동속도가 빠르니 파티원이 못따라가는건 아닌가 싶겠지만 현실은 기동성과 맷집을 살려서 몹을 몰아오는데 이용한다.

리그 오브 레전드헤카림의 경우 정통 기병의 기동력은 물론 충격력까지 가장 잘 구현한 몇 안되는 사례다. 파멸의 돌격(e)은 이동 속도가 최대치로 증가할수록 가할 수 있는 피해량도 최대로 늘어난다. 이동속도가 많이 추가될 수록 공격력도 늘어나는 패시브는 덤. 이 충격력을 구현한 스킬의 위력을 극대화한 전략이 바로 유성 헤카림. 헤카림의 궁극기인 그림자의 맹습(R)은 적에게 공포를 거는 효과가 있어서 기병의 돌격에 모랄빵이 나오는 것을 어느정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헤카림은 엄밀히 말하면 기병이 아니고 켄타우로스이다. 헤카림을 제외하고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기병이라고 부를만한 챔피언은 세주아니, 클레드정도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각각 멧돼지와 목도리 도마뱀을 타고 다닌다. 이후 이라는 그랄싸한 기병 챔피언이 추가되었다.

배틀필드 1의 경우 1차대전인 만큼 기병이 등장했는데 현실의 기병의 장단점이 자연스레 구현되어 있다. 빠른 기동력과 선회력으로 보병에게 우위를 차지하지만 바위나 장애물등에 기동력을 잃거나 멀리서부터 관측당하면 고화력화기에 벌집이 되거나 저격수에게 머리를 따여 죽는게 다반사다.또는 무리하게 돌격하다 전차나 장갑차에 호떡이 되기도 한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의 인간 진영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기병대인 챔피언의 경우 이동한 거리에 비례하여 공격력이 증가하는 특수능력으로 기병대의 돌격 능력을 어느 정도 구현했다. 3편의 경우 창병이 챔피언의 돌격 특수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기병과 창병 간의 관계도 구현했다.

랑그릿사 시리즈영걸전 시리즈 같은 일부 SRPG에서는 지형에 따라 유불리를 다르게 설정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대표적으로 조정되는 능력치가 바로 기동력이며 이 지형 패널티 때문에 특히 주요 어려운 전투에 실내와 동굴 등의 지형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랑그릿사 시리즈에서는 기병이 시리즈 내내 취급이 좋지 못한편이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철기 시대부터 훈련소에서 훈련 가능한 유닛으로 등장한다. 프랑스와 그리스는 고유 유닛을 가지고 있으며 방어 건물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며 산업 시대부터 전차로 변모한다.
- 중장갑 기병 : 기병, 슈발리에, 헤타이로이, 카타프락트, 기사, 창기병, 흉갑 기병
- 영웅 병력 : 일부 영웅이 20레벨 이하일때 기병으로 등장한다.
- 연맹 병력 : 전차 궁병
- 지상 전술성 병력 : 화궁 사무라이, 몽골족 올록, 켈트 전차, 버팔로 병사 부대, 화승총 사무라이, 쌍권총 흉갑기병, 윙드 후사르, 만델칼루
- 영웅 전술성 병력 : 이순신 장군, 페르디앙 포슈, 영웅 퍼싱, 칭기즈칸, 관우, 도모에 고젠


[1] 스코틀랜드산 회색 군마로 무장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이 돌격 이후 프랑스 창기병대의 반격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이 전투에서 더 이상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을 이끌던 폰슨비 소장도 이 때 전사했다.[2] 전투 전에는 척후병으로서 주변 정찰 및 진격로 확보를, 전투 중에는 상대방 기병에 대한 견제와 요격, 진격해오는 적 전열 보병들에게 방진을 강요하여 아군 포병 화력 밀집도 극대화, 또 상대 포대 습격이나 빈약한 적 보병 전열에 대한 직접적 강습 및 돌파등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으며 전투 후에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며 전과 확대를 할 수 있다. 물론 패전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기병 예비대가 있다면 추격해오는 적을 교란시킬 수 있다.[3]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에는 이전에 비하면 보조적이지만 여전히 기병이 다양한 상황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기병 병과가 생겨났고 이들은 전장의 상황에 맞게 많은 활약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발달되어가는 화기 앞에 기병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기병들은 전통적인 마상 돌격보다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는 기동 보병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나폴레옹 전쟁기에 생겨난 수많은 기병 병과들은 승마 전투 및 도보 전투가 모두 가능한 드라군으로 일원화된다.[4]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조아킴 뮈라라는 뛰어난 기병지휘관이 있었고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대 1만 1천 기의 돌격은 제 2차 빈 포위전에서의 윙드 후사르 1만 8천 기의 돌격 다음가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남았다.[5] 근대 일본의 기병용 전투마는 2살 때 사들인 망아지에게 3년간의 훈련을 시켜서 기병부대에 배속한 후 1-2년의 훈련을 추가로 거쳤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훈련을 거듭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6]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러시아 원정 이후 시달렸던 가장 큰 문제도 기병의 부족이었다. 보병이야 사격 방법만 알려주고 전열에 세워도 어느 정도의 역할은 기대할 수 있었고 포병도 구닥다리 포라도 무기고에서 꺼내 쓸 수 있었지만 기병만큼은 원하는 정도로 보충할 수 없었다.[7] 그는 검술 시범에서 말을 타고 싸울 수 있으면 참가하겠다며 말 위에서는 누구라도 물리칠 수 있다고 어그로를 끌었는데, 순차적인 다굴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사들을 압도하다가 갑작스럽게 말을 목검으로 후려친 무네노리에게 패한다. 무네노리 정도의 누구나 인정하는 명문 무사가 제대로 맞붙지 않고 말을 공격하는 일종의 꼼수(?)로도 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게 했다.[8] 그런데 사실 꼼수라고 보기는 어렵고, 기병전에서 기수 대신 말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유리할 때가 많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식이었으며 기사의 전성기였던 13세기 유럽에서도 보병이 직접 기병의 공격 거리 안으로 들어가 기병이 탄 말을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비난받기보다는 명예롭고 용감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9] 다만 과거에도 실전이 아닌 시합에서는 말을 공격하는 행위가 꼼수 취급이거나 금지된 경우도 있다. [10]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이다. 해당 장면은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전술적 움직임을 묘사한 것.[11] 말의 몸무게는 약 380~1000kg이며 군마의 경우 대체로 대형이다.[12] 흔히 '지축이 울린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확하게 들어맞는다.[13] 요한 반 나사우가 훈련시키면서 파이크를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양민이라고 모욕한 스웨덴 군도 그 근방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우수한 창병대였는데 일단 장비 면에서는 서유럽 기병에게 밀리던 윙드 후사르에게 처참하게 털렸다. 기병들이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을 이긴 기록은 희귀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총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도 희귀했다는 게 함정이다. 관구검의 대승조차 중국 기록에 의하면 보병과 기병의 합동공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4] 현재 전차나 폭격기마저도 제대로 된 대전차 진지나 방공망을 뚫어본 적이 드물긴 하다. 문제는 그런 게 그 미군에서도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 당장 6.25 때도 탱크들을 막을 수 있다고 평가되던 진지들이나 세계사적 사례가 있긴 있었고 한반도 지형상 전차들이 불리하니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다 북한군의 선봉에 선 T-34에 남한군과 미군 모두 개털렸고 그때서나마 전차의 필요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전차들을 도입하게 되었다.[15] 그런 잉글랜드조차 결국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거나, 무너진 적을 도륙하는데 기병을 바로 꺼내들었다.[16] 프랑스군이 나중엔 장궁병보다 더 사거리가 긴 포병을 잘 활용하며 파훼해 가긴 했다.[17] 당시 유럽인들의 기병은 고작 1기로도 수천~수만 명의 적진을 분쇄해 들어가 적의 지휘관을 척살하는 등 거의 무적 수준이었다. 원주민들이 기병에 대한 대응전술은 커녕 말이라는 동물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반면, 콩키스타도르들은 남미에 오기 전부터 싸움으로 밥을 벌어 먹고 살던 프로페셔널들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거의 현대로 치면 전차 한 대가 보병들을 짓밟고 학살하는 수준.[18] 예외적인 사례겠지만 기병이 성벽을 돌파하는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성벽 앞에 흙주머니를 잔뜩 던져 언덕을 만들어서 타고 올라가거나, 말이 오를 수 있는 거대한 사다리차를 만들어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19] 정확히는 총구에 삽입하는 플러그식 총검이 아닌 장착한 상태에서도 총을 사용할 수 있는 탈부착식 총검의 등장 이후[20] squadron [21] 사각형 대열을 짜면 정면 화력은 1/4로 줄어드는 셈이니[22] 사실 보병도 이러한 특성이 있기는 하다. 한 번 시작한 전면공격을 갑자기 취소하면 왕성하던 병사들의 사기가 자칫 한순간에 최악(아군에 무슨 큰 일이 생긴 것으로 오인→공포심이 급속도로 전염)으로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수대전 항목 참조. 동서고금의 병서들이 "한 번 내려진 군령은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취소하지 말 것"이라는 금언을 넣은 것은 이 때문이다.[23] 무제 치세에 한나라가 보유했던 기병은 30만에 육박하였다.[24] 특히 당시의 미국은 현대의 미국만큼 부유한 국가는 아니었다.[25] 대신 남군은 기병이 자기 말을 직접 조달하도록 함으로써 북군보다 먼저 기병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26]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에 위치해 있던 나라[27] 야생마인 얼룩말의 어깨높이가 1.3m로 오늘날 경주마의 어깨높이인 1.5m보다 작다.[28] 고대 중국에서는 전차 1대에 보병 100명이 붙어 함께 전투했다고 한다.[29] 물론 카르헤 전투 당시 로마 보병들이 막 모집된 신병들임을 감안해야한다. 로마 중보병들은 통념과 다르게 성능 좋은 방패 덕분에 훈련만 잘 돼있다면 화살 공격에 강한 저항력을 보여주었다. 니시비스 전투 등 많은 예가 이를 증명한다.[30] 이들은 가별초(몽골어로는 가베치)라고 불렸는데, 고려인과 몽골인과 여진족 등으로 이루어진 혼성 부대였다.[31] 물론 짐말일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개 해적 집단이 끌고 다닌다기에는 1,600여필은 너무 많은 숫자임은 확실하다[32] 플레이트 아머가 발달한 중세 후기 유럽의 중기병대는 방패를 장비하지 않거나 장식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방패를 들었기 때문에 대신 고삐를 쥐어 더 안정적인 승마가 가능했다.[33] 13세기 영국 수도사 베이컨에 의하면 여러 차례의 재돌격으로 말이 쓰러져 바꿔 타야 했다고 한다.[34] 문제는 리처드 1세 사후 뒤를 이은 존 왕의 병크로 프랑스 땅을 대다수 잃어버린다. 백년전쟁 중에 프랑스 땅을 일부 수복하긴 하지만 최종결과는 결국..[35] 기병은 방어 측면에선 이점이 없기 때문. 예나 지금이나 탱커역할은 보병이 훌륭했다.[36] '푸아티에 전투(1356), 클리포드 J. 로저스' 발췌.[37] But they rode to meet them steadily in good, close formation, no one going ahead of the rest[38]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익숙한 무기에 대한 의존이나 애착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창을 버리기를 주저하다가 허망하게 죽은 창기병들이 있었다고 한다[39] 게다가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그저 장다름의 돌격만으로 스위스군을 물리친 것은 아니었고, 프랑스군이 가진 포병들로 계속 집중 포격을 가하여 스위스군한테 큰 타격을 입히는 틈틈이 계속 장다름이 돌격을 하여 간신히 스위스군을 물리친 것이었다.[40] 왜 내구도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길게 만들었을까? → 장창하고 비슷한 길이네. 장창에 대항하기 위해 길어진 것이구나. → 장창에 맞춰서 길이를 늘린 것을 보면 랜스의 용도는 창방진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구나. → 고작 30-60m 더 긴 공격거리로 어떻게 해서 전술적 이점을 얻을 수있었을까? → 최대한 안정적으로 랜스를 보급받으며 일렬씩 연쇄적으로 돌격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 되겠구나[41] 투창 기병이나 투석 기병 궁기병[42] 폴 J. 스미스, 《천부(天府)에 과세를 해서》, 하버드대학 출판국, 1992[43]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는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대규모 사냥을 실시했다. 유목민은 특성상 사냥을 자주 했기에 이것만으로도 일상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은 셈이다.[44] 아예 중기병끼리 쇠사슬로 서로를 묶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송나라 기록에만 나오고 막상 당사자인 금나라 기록에는 없어 18세기에 해당되는 청 건륭제 시기에 이미 이거 기병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걸 쇠사슬로 묶었다고 비유한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로 신빙성이 떨어진다.[45]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쟁을 보면 그야말로 요나라가 불과 10년도 안 되어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훨씬 적은 병력을 거느린 금나라한테 거의 일방적으로 참패를 당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는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군사 주력이 활을 주무기로 삼은 경기병이었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모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중무장 기병을 주력으로 내세운 금나라 군대한테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참패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요나라가 결코 허약한 나라는 아니었으니, 금나라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약 200년 동안 동북아에서 송나라서하를 억누르며 최강대국으로 군림했던 군사 강국이었다. 심지어 금나라한테 철저하게 얻어맞고 다 망해가던 와중에도 송나라 10만 대군을 두 번이나 패주시킬 만큼 거란족들은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그런 거란족들을 상대로 박살을 낸 것을 보면 금나라의 중무장 기병들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46] 몽골 고원의 부족들이 전투민족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칭기스칸 이후의 일이고 그전에는 오히려 요나라와 금나라의 압제에 신음하던 약소세력이었다. 정말 경기병이 우월하고 중기병이 저열하다면, 몽골은 칭기스칸이 등장하기도 전에 그 우월한 경기병의 힘으로 요금의 중기병을 대파하고 제국을 세웠어야 한다. 결국 경기병은 우월하니 중기병이 우월하니 하는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47] 정찰, 약탈, 수송대 호위, 패퇴하는 적 추격, 후방 급습 등의 비정규전 등등 전면 교전 이외의 모든 부류의 작전에 쓰임새가 있었다.[48] 애당초 중장기병의 발명과 발전을 주도한건 중앙아시아 유목민이다. 기병끼리 자주 싸우는 중앙아시아에서 중기병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중기병의 유용성을 입증해준다.[49] 경기병들이 타고다니는 말은 몽골마 같은 소형종으로 250kg 남짓인 반면 중기병들의 말들은 500kg 가량 되는 중형마들로 경기병의 말들보다 지구력은 떨어질지언정 힘과 순발력은 훨씬 뛰어나기에 짧은 순간동안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기에 경기병들이 따라 잡히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생겼다. 근접전에 들어간다면 말의 체급 차이가 압도적이고 기수들의 무장 상태도 크게 차이 나기 때문에 경기병들은 중기병을 이길 수 없다.[50]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문장에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그려졌는데, 원래 수단은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기 11세기 이후로 이슬람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십자가를 그려넣는 식으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었다.[51] 근대 이전에 10만 명의 기병이면 굉장히 막강한 전력이다.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칭기즈칸몽골군도 처음엔 그 수가 9만 5천 명 가량이었다.[52] 더하여 보통 중기병들은 경기병보다 키나 덩치가 더 컸고 사용하는 기병도 역시 더 길고 무거웠다.[53]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 중기병대를 박살내고 지휘관 폰슨비 소장을 전사하게한 부대는 폴란드 울란이 아니라 일반 창기병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워털루의 영향으로 낚이곤 하는 부분.[54] 더군더나 스콧츠그레이가 박살날 당시엔 그 숫자가 요격하러온 프랑스 기병대에 비해 적었었다. 진형도 엉망인 상태에 숫자도 더 적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55] 하지만 처칠은 고질적인 어깨 탈구 증세가 있어 검이나 창을 쓰지 않고 상부의 허가를 받아 권총을 썼다고 한다.[56] 창기병 돌격은 대열을 이루지 않으면 효율이 몹시 떨어진다. 대열은 대충 갖추고 돌격해도 되는 검기병과 다른 점으로, 대열을 유지한 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방향전환이 어렵다.[57] 바로 이 연대가 저 유명한 발라클라바 전투의 그 경기병 연대이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고.[58] 흔히 이 시대 중기병이 창에 비해서는 짧은 칼을 썼기 때문에 긴 머스켓에 총검을 단 보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면 상대가 안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통념과 다르게 중기병용 기병도는 1m에 달하는 길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59] 프랑스와 더불어 흉갑기병대를 대규모로 운영한 또 다른 나라는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못지않은 흉갑기병대 매니아로 러시아 용기병대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주하면서 유기된 프랑스 기병대의 흉갑을 쏠쏠히 주워서 흉갑기병대로 변신하기도 했다.[60] 자세히 보면 영국 용기병 헬멧이 프랑스 흉갑기병 헬멧과 같아서 뭐지 싶은데 저 헬멧 양식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대한 향수와 유행에 힘 입은 신그리스 양식의 헬멧이라 하여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였다.[61] 정확히는 기마총병대라는 의미의 Carabiniers-à-Cheval(카라비니에르 아 셰발)이라고 한다.[62]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총기병대는 흉갑기병의 흉갑에 황동을 입힌(장교는 구리를 입혔다) 갑옷을 입고 싸웠다. 방호력은 흉갑기병의 것과 다르지 않지만 황금빛이다 보니 멋하나는 타국의 어떤 흉갑도(이를테면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흉갑기병대의 검정색 흉갑)확실히 압도했다.[63] 카빈이란 말 자체가 캐러비니어에게서 유래하였다. 그외에도 등산장비인 카라비너역시 여기서 유래.[64] 사실 드라군과 흉갑기병, 기마척탄병등과 같은 중기병에게 있어 카빈총이 기본 옵션이었다. 물론 기본 옵션인 것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기병 대원들이 잘 안들고 다니긴 했지만..(이 당시 기병대들은 권총도 거추장스럽다고 잘 안들고 다녔다)[65] 드라군도 종류가 있다. 크게는 기마 드라군과 도보 드라군(더 나은 번역있으면 수정 바람)으로 나뉘는데 기마 드라군은 주로 승마 전투를 수행하였던 만큼 말의 크기가 중형~ 대형인 말을 탔고 이들도 총기병처럼 종종 마상 사격을 수행하였다. 도보 드라군은 드라군인데 말이 없는(말은 무척 비싼 것이어서 드라군 연대만큼 말을 준비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드라군으로 사실상 그냥 보병이었어나 말이 생기면 기마 드라군으로 전환이 가능한, 승마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66] 중기병이기에 흉갑기병과 같이 길고 곧거나 약간 굽은 세이버를 장비했다.[67] 헝가리 후사르들은 프랑스 기병대에게 나폴레옹 전쟁 내내 자존심을 구긴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유일한 빛이라고 칭함받는 용감한 기병대 중 하나였다.[68] 보통의 경우 더 큰 말을타고 더 길고 타격력 있는 검을 장비하고 흉갑을 입어 방호력이 좋은 중기병이 경기병을 발라야 정상이다.[69] 그래서 총기병대가 출격했는데 기마척탄병대가 출격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도 하는 등 당대에도 두 부대는 그 모습이 서로 비슷하여 오해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바그람 전투 때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총기병대가 출격했는데 몇몇 사람들은 이 모습을 제국 근위대 기마척탄병들이 출격했다고 오해하였다. 총기병대는 때때로 나폴레옹 호위를 서기도 했던 것도 이러한 오해를 야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70] 오스트리아 흉갑기병은 갑옷이 앞쪽 한 개밖에 없어 등쪽은 전혀 방호받지 못했다.[71] 총기병은 중기병들 중에서도 정예를 뽑아서 편성했다. 하지만 상술한 예에서 보듯이 나폴레옹의 전쟁에서 이들이 보인 모습은 나폴레옹과 중기병대 지휘관들의 대접과 기대에 비해 한심했다.[72] 오스만의 기병은 크게 '아큰즈'(Akıncı) 나 '델릴레르'(Deliler) 라고 하는 비정규 기병대와 신하국, 칸국 등에서 파견된 병사. 그리고 시파히들로 구성되어있다.[73] 특히 연발총이 막 나오던 시기라 공업화가 덜된 남부에서는 북군을 두고 월요일에 장전해서 일주일 내내 쏘는 빌어먹을 양키들이라고 욕했다.=게임 ㅈ같이 하네[74] 다만 러시아 전쟁성(국방부) 산하가 아닌 황실 소속인 근위대 및 카자크나 비슬라브족 기병부대에는 이 같은 개혁이 적용되지 않았다. [75] 전장식 화기를 쓰던 시절에는 불발탄의 비율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76] 영화 워 호스를 보면 초반에 영국 기병대가 독일군의 MG08 십자포화에 일제히 전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77] 이미 기병은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총을 주무장으로 삼는 비율이 급격히 올라갔다. 세계대전기에 들어설 무렵에는 사실상 창칼을 들고 돌격하는 역할을 맡은 기병들조차도 총을 소지하지 않은 자들이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세계대전기에는 기관총, 박격포, 보병포 등 작지만 강한 화력을 내줄 수 있는 병기들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기병대 역시 기병대 소속의 소규모 화포나 기관총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때문에 기병들이 적이 오기 전에 미리 기동력을 살려 빠르게 유리한 고지대를 점령한 뒤 기병대 소속의 소구경 화포와 기관총을 배치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는 상황이 상당히 자주 펼쳐졌다.[78] 기병의 단위부대는 동급의 보병 단위부대보다 인원이 적다.[79] 사실 전술했다시피 1차대전기에도 기병대가 기관총이나 소구경 화포를 보유한 경우는 흔했다. 폴란드 창기병과 그들의 돌격이 워낙 유명한 탓에 새삼스럽게 느껴질 뿐이다.[80] 전격전의 전설의 자료에 따르면 독일군의 월간 차량 생산량으로는 비전투손실의 2%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저조하여 10개의 기갑사단과 6개의 차량화보병사단에게 보유한 차량 대부분을 꼴아 박았을 정도였다.[81] 단, 이는 어디까지나 수송용으로 말이 사용된 것에 가깝지 이것을 본격적인 기병대를 굴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장 독일군처럼 부족한 기계화 탓에 똑같이 말을 많이 사용했던 일본군의 경우 대포를 말로 끄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말들은 포병대 소속이었지 기병대 소속이 아니었다.[82] 단, 중국이나 몽골 등에서는 자동차가 다니기에 부적합한 험지에서 기동력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하여 여전히 극소수의 기병을 군용으로 운용하고 있다. 다만 연발화기가 가득한 현대전에서 기병 돌격을 감행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기병들의 말은 어디까지나 정찰이나 보병의 빠른 이동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지, 옛날의 중기병처럼 충격력을 살린 전술은 사용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83] 그리고 이마저도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기마경찰을 시위진압에 투입시키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기마경찰을 활용했지만 1960년대부터는 기마경찰을 시위진압에서 배제했다.[84] 완전히 포위되어 포로로 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권총 자살하였다.[85] 미처 수습되지 않은 말들은 야생화되어 2000년대 초엽까지 야생마로 살기도 했다.# ,#[86] 사실 이는 헬기도 마찬가지. 공중으로 수송하는 헬기는 보병이 승차하는 장갑차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87] 이쪽은 영국 육군에서 주로 볼 수 있다.[88] 실제로 미국은 독립전쟁기에 드라군밖에 보유할 수 없었고, 폴란드에서 온 의용병단으로 풀라스키의 군단이라는 창기병대를 하나 보유하게 된다.[89] 헬리콥터도 가능하겠지만 대공무기에 취약한 것과 연료문제가 있다.[90] 당장 험비는 전 미 지상군의 종마 역할을 하고 있는 놈이기에 이 녀석을 빼면 병력 수송, 물자 운반 등, 기초적인 지원들도 불가능하다. 트럭들이 있기는 하지만 험비의 마당발(?) 능력에는 못 미친다.[91] OH-58 카이오와 워리어 정찰헬기도 일부 보유하고 있었다.[92] 위키백과에서는 6항공여단이 아닌 6기병여단으로 명기하였다.[93] 개마무사를 고구려만의 고유한 병종이었다고 보는 오해가 많은데,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기병을 운용한게 고구려인건 맞지만 백제 외에도 신라, 가야등 삼한계 남방 국가들 역시 적지 않은 수의 개마무사를 운용했다. 카타프락토이 참조.[94] 민족의 이름이지만, 러시아가 이들로 구성된 경기병 부대를 양성하여 병과의 이름과 같이 쓰였다. 물론 이 이름은 괜히 쓰인 건 아니고 당연히 카자크 족이 기마에 능숙한 전투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 바로 대장 부리바다.[95] 인도 북부의 시크교도들이 세운 나라인 시크 왕국의 기병 부대로 사람과 말이 모두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채로 긴 을 쥐고 돌격하는 창기병으로 운영되었다. 이 사르다르 부대와 맞서 싸운 영국군조차 그들을 가리켜 "세계 최고의 기병대"라고 칭송할 만큼 용맹스러운 부대였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92쪽.[96] 노르만 기사들이 워낙 다양한 곳에 진출하였고 따지고 보면 프랑스와도 봉신관계이긴 해서 마냥 잉글랜드만을 대표하는 기병대라 보긴 힘들 수 있으나 결국 이들이 최후까지 가장 네임드 메인 지배계층으로서 정착한 국가가 잉글랜드이다. 현세엔 이들의 후손들이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내세우지는 않으나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왕가에는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이들을 좀 더 정확히 지칭하자면 앵글로-노르만이다. 그리고 채널 제도의 노르만족은 영국 본토의 노르만계 후손들과 달리 현재까지도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97] 무제 치세때는 20만을 넘었다.[98] 여진족, 몽골족 등 명나라 치하의 북방 유목민족 및 이들에게 동화된 한족들로 구성된 기병부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엄청난 약탈을 저질러서 조선에서는 순수 한족들로 구성된 남병 위주로 파병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99]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노르망디를 상실한 이후로도 계속 노르망디에 잔류한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족과 달리 현재까지도 나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백년전쟁 종전 이후에는 잉글랜드의 노르만족과 달리 메인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100] 프랑스 헌병군의 기원으로 프랑스 왕이 지휘하던 중기병대였다.[101] 후사르라는 이름의 병종은 근세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그 원조는 헝가리 후사르이다.[102] 일단 기병대로 유명은 한데 실제로 기병들을 대규모로 운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강하다. 당시 일본에서 제일 많이 쓰인 키소의 말들은 제주도 조랑말보다 작았고 그나마 숫자가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함부로 군마를 내줬을 리도 없거니와 사갔다는 증거도 없다. 쉽게 말해 말도 없는 주제에 기병대가 어디 있었겠냐는 것. 이에 더해서 다케다 신겐이 활동했던 전국시대 당시의 일본의 기병 전술은 헤이안 시대 무렵까지의 궁기병을 중심으로 했던 전술과는 달리 용기병 내지는 승마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로 변화되어 있었고, 앞서 상기한 군마의 부족이라는 문제 때문에 기병대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용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일본에 본격적으로 기병대가 생긴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103] 단, 일본에 제대로 된 기병이 없었다는 말은 스즈키 마사야의 연구결과만이 인터넷에 떠돌기 때문에 나온 섣부른 결론이다. 스즈키 마사야가 기마대 불가론의 주요 논거로 내세운 근거 중 하나가 일본의 군마가 일반적인 돌격용 군마에 비해 작다는 것인데, 크기 자체는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했던 몽골의 군마라든가 스웨덴의 전설적인 돌격 기병 하카펠의 군마도 비슷하게 작다. 또한 '정예 무사를 임시로 모아서 싸운 것'이 기병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왕국에도 기병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중세의 기사 역시도 편제가 아니라 엄연한 지위기 때문. 아직까지 일본 전국시대에서 기병의 비율은 미지수이며,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편제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마의 퍼센테이지가 다른 문명권에 비해 적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것도 고급 병종인 기병을 펑펑 뽑을 만큼의 돈이 없던 전국시대의 이야기이고, 남북조 말기만 해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정규군도 아닌 해적들이 네자리수의 기병대를 이끌고 기동전을 펼칠 정도였다.[104]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일본 무사들은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었으며, 14세기 남북조 시대가 되자 일본에도 말을 탄 채로 칼과 창 같은 무기를 들고서 적에게 돌격하여 육박전을 치르는 기마 전술이 널리 퍼졌다. 한 예로 1370년에 나온 일본 남북조시대의 무용담을 다룬 책인 태평기(太平記)에 따르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우는살을 발사한 후, 막부군 쪽에서 먼저 함성을 외치며 깃발을 들고 전진했는데, 최초에는 활의 명인들을 늘어세워놓고 서로 활을 쏘아댔으나, 적아군 모두가 용맹한 무사들이었기에, 이윽고 도검太刀과 장도長刀를 빼든 후, 말에 탄 채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링크[105] 전부 중국인이었으나 몽골과 인접한 지방 사람들이었다.[106] 이쪽은 사실 1차대전 당시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는 황실 제1기병대의 육군 기병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기병 출신 인물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기병이란 병과 자체가 쇠퇴하던 시대에 난지라 식료품만 나르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에 병과전환을 신청, 항공장교로 전과했으며 이는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계기가 된다.[107] 출신이 흉노의 영토와 가까운 병주 출신이라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기마술이 뛰어났다고 하며,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도 자신을 기병대장으로 삼으면 된다고 꼬드겨 조조가 일순간 고민하게 했을 정도다. 참고로 조조 역시 기병으로 유명했는데 그런 조조를 고민시킬 정도면 기병대장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던 듯 싶다.[108] 이쪽도 위의 다케다 신겐과 동일한 이유로 기병대를 운용했을 가능성은 작다.[109] 북관대첩 당시 소수의 기병대로 기습전을 펼치며 가토 기요마사를 농락했다.[110] 풀네임은 서(Sir.) 브라도 잇사 크레이탄 켄드리드. 폴라리스 랩소디의 등장인물이다. 작중 최고수준의 야전지휘관.[111] 스노우메인이라는 명마를 타고다닌다.[112] 원작 기준. 반지의 제왕 시리즈 최대의 격전인 펠렌노르 전투에서 기병으로서 싸웠는데 생채기 하나 없이 전투를 끝마쳤다고한다. 최종전인 모란논 전투에서도 말을 타고 참전했다. 던해로우에서 최정예 기병인 회색부대가 당도했을 때 세오덴이 이 부대원들이 아라고른의 무력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매우 큰 힘이될 것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아라고른의 애마는 로헤린이며 이름의 뜻이 그녀의 말이라는 뜻으로 아르웬이 직접 선물한 말이라고 한다. 요정 중에서도 매우 고귀한 아르웬이 자신의 사랑에게 골라 준 말이기에 상당한 명마일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위 내용들은 전부 원작 기준이다. 영화판에선 대부분 보병으로 싸운다. 그래도 두개의 탑에선 기병으로도 싸우며 역시 출중한 무력을 보여준다. 영화버전 애마의 이름은 브레고.[113] 다만 외국은 그래도 여전히 드라마에서 기병을 꽤 볼 수 있지만, 한국 같은 경우는 기병들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도 요즘 이야기고, 예전 사극들에서는 기병들이 꽤 많이 나왔다.[114] 이 전투는 노르드인앵글로색슨인의 전투를 묘사한 것인데, 다른 부분은 충실하게 고증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기병 활용 자체는 다소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경향이 있다. 보병 중심 군사 문화를 가진 앵글로색슨 하 잉글랜드 내에서 마상전투술은 문헌 상으로나 고고학적 발견으로나 노르만 정복 이후에야 증거가 나온다. 따라서 실제 저 시점에서는 기병이 극소수만 운영되거나 아예 없고 기마보병전령 정도만 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드라마보다 약간 후대를 다루는 드라마 라스트 킹덤에서 더 잘 묘사되는데, 색슨 측이 바이킹 측을 사지로 끌어내기 위해 거짓 도주를 할때 전원이 말을 타고 달리고, 적절한 지형에 도착하자 모두 하마하여 바이킹측과 똑같이 방패벽 전술을 쓴다.[115] 북방엔 문관만 아니라면 주로 A~S가 주를 이룬다.[116] 수가 적고 덩치가 큰게 주된 이유다.[117] 전열 돌파는 주로 중기병, 추격 및 전과확대는 경기병이 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