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제국 (r20220720판)

문서 조회수 확인중...

둘러보기

[ 펼치기 · 접기 ]
























로마 제국
Imperium Romanum (라틴어)

파일:11818 (1).webp
최종 분할
파일:Western_Roman_Empire.png
395년 서로마 제국의 최대 강역[1]
395년 ~ 476년
[ 펼치기 · 접기 ]

기원전 27년/286년[1]/395년[2] ~ 476년[3]/480년[4]/486년[5]/1453년[6]

별칭
서로마 제국(Imperium Romanum Occidentale)
위치
남유럽, 서유럽, 북아프리카
명목 수도
로마[2]
실질 수도
메디올라눔(밀라노) (395년 ~ 402년)
라벤나 (402년 ~ 455년)
로마(455년~473년)
라벤나(473년~476년)
언어
라틴어 (공용어)
갈리아어
게르만어
베르베르어
기타 지방 언어
종교
고대 로마 다신교 (380년 이전)
니케아기독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임페라토르)
주요 황제
호노리우스 (395년 ~ 42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422년 ~ 455년)
마요리아누스(457년 ~ 461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475년 ~ 476년)
주요 실권자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395년 로마 최종 분할
401년 알라리크 1차 이탈리아 전쟁
406년 2차 이탈리아 전쟁
410년 로마 약탈
410년 서로마 브리타니아 포기
418년 서고트 왕국 건국
433년 프랑크족 북 갈리아 왕국 건설
439년 서로마 북아프리카 상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
455년 2차 로마 약탈
461년 마요리아누스 1차 반달원정 실패
468년 동·서 로마 연합군 반달 왕국군에게 참패
469년 서고트 왕국 독립 선포
473년 서로마 갈리아 남부 상실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
486년 수아송 왕국 멸망
}}}
성립 이전
최종 분할 통치 이전 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
오도아케르의 정권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수에비 왕국
반달 왕국
부르군트 왕국
수아송 왕국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역대 황제
3.2. 최종 분할 이전 제국과 서로마의 상황
4. 멸망 이후
5. 관련 문서
6. 관련 창작물




1. 개요[편집]


Western Roman Empire(영어) / Imperium Romanum Occidentale(라틴어) / 서로마 제국(한국어)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를 일컫는 용어로, 395년부터 476년까지의 기간 동안 존속한 로마 제국 서방 관할 행정 기구와 서방 황제 휘하 정부를 가리키는 학문적 별칭이다.

395년 1월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이 제위를 승계하면서 최종 분할된 로마 제국 중 서부지방을 서술한다. 로마 제국의 서방 정부 황제와 그 정부는 81년간 존속하였고, 476년에 상실되었다.



분할 이후 속주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상실한 속주에 게르만족들이 개별 왕국을 건국해 빠르게 쪼개졌다. 그럼에도 최후까지도갈리아 북부와 이탈리아 반도, 달마티아 지역은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었고, 아직 게르만족들이 점령한 영토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시기였기에 명군 자질이 있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황제에게 조금 더 오랜 시간이 주어졌다면 훨씬 더 오래 존속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로마시기때 처럼 제국의 수도가 그대로 로마였다고 아는경우가 많은데, 실질적으로는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밀라노, 라벤나, 로마 등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동했다. 다만 관념적으론 당대인들은 로마를 언제나 수도로 인지했다.

2. 상세[편집]


서기 4세기 이후의 후기 로마 제국 등으로 불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로마 제국 아래에서 분담 통치는 낯설지 않은 국가 통치 방법 중 하나였다. 실제 서기 395년 이후의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로마 황제들의 정부 분할은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래에서의 동서분할 이전부터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만 생각해보면, 테오도시우스 1세가 두 아들을 위해 만들어낸 제위계승 방식이 아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흔히 로마 제국의 분할로 불리는 서기 395년 1월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로마법, 국제 개혁 조치 아래에서 2명 이상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체제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두정치로 번안되는, 테트라키아(Tetrarchia)인데, 로마 제국은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부제)로 삼았다가, 이듬해 정제(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서로마 일대의 관할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이는 과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두 손자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후계자인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사후 나란히 제국을 공동 집정관 형태로 물려주기로 계획한 계승계획과 그 본질이 달랐으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존속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공동황제 취임과도 그 결이 다른 국제 개혁 내지 개헌이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역사를 도미나투스 등장부터 설명한다면, 서기 285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허나 이는 로마 제국의 국제 개혁부터 살펴봐야 되는 문제인데다,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제국은 서기 395년 이후처럼 극단적으로 두 개의 행정정부가 각자의 관할을 가지고 운영되는 형태로 존속하지 않았다. 쉽게 설명하면, 테트라키아로 불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로마가 물리적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하는 임페라토르 아래에서 복수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393년 1월 23일 이후부터의 로마 제국은 당대, 후대의 로마인들의 생각과 달리 복수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황제의 두 아들이 동부와 서부 정부를 통치한다고 해도 끝내 영구적 분할처럼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분할 아래 두 개의 정부는 이전부터 서로 다른 언어 사용 빈도와 경제 기반 등이 조금씩 멀어지면서 로마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의 국가 아래 두 정부였다고 해도, 후대의 사람들에게 항구적 분단 내지 쪼개진 제국 형태로 인식됐다.

395년 1월, 테오도시우스가 메디올라눔(밀라노)에서 사망하자 아르카디우스는 제국 동부를, 호노리우스는 제국 서부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제국은 훨씬 이전부터 동-서 양 영역에 각각의 황제가 군림하며 통치하는 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이후, 이미 동-서에 각각 정제와 부제가 있었으며, 한동안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우스 2세, 율리아누스 치세하에서 통일된 적은 있었지만, 이후 다시 양쪽의 영역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통일도, 서방참제 에우게니우스를 토벌한 394년 9월부터 그가 사망한 395년 1월까지의 불과 수개월에 불과했던 찰나의 기간이었다. 제국의 분할 통치가 영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395년을 흔히 분열의 시기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후에도 동-서 두 제국은 '하나의 로마'라는 보편적 인식을 유지했으며, 5세기의 다사다난했던 정세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로마 제국의 분열",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후대에 역사 서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도 엄밀히 말하면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 상실'이다.

분할 이전부터 자금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제국 동부와는 달리 제국 서부는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떨어졌고 게르만족의 침공에도 항상 시달려야 했다. 동로마를 12세기 말까지 강대국으로 지탱해주던 그리스 및 소아시아, 로마의 빵 바구니라 불리던 이집트 등 알짜배기 지역은 모두 동로마가 가져갔다. 지금이야 서로마 지역(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과 동로마 지역(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옛 유고 연방, 터키,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을 비교하면 쟁쟁한 선진국들이 포진한 서로마 지역의 경제력이 압도적이지만, 당시에는 농업생산량과 교역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동방에 비해 국력이 떨어졌다. 영국, 스페인은 현대에도 농사짓기 썩 좋은 국가가 아니고, 프랑스는 농사짓기 좋은 땅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간이 덜 되어 숲이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양 무역이 활성화되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오히려 세계와 더 연결이 잘 된 지역이지만, 지중해 무역과 동방 무역이 대세이던 당시까지만 해도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는 무역로에서 동떨어진 변방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현재 알제리와 튀니지가 위치한 북아프리카 지역이 당시에도 크기는 작지만 서로마에서 가장 세수가 잘 걷히는 비옥한 땅이었다.

제국 분할 이후 50여 년간 서로마는 스틸리코, 콘스탄티우스 3세[3], 아에티우스 같은 걸출한 사령관들의 노력으로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 무력한 황제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오레스테스 등의 실권자가 황제를 쥐락펴락하였으며 결국 오도아케르에 의해 황제가 폐위당하면서 서로마는 멸망했다.

동로마는 수도 밖의 거의 모든 땅이 적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치열한 공성전 끝에 수도가 함락되는 방향으로 화끈하고 장렬하게 멸망했지만, 서로마의 멸망 과정은 사뭇 다르고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특이한 경우이다. 전통적으로 속국이나 산하 이민족을 다루던 방식인 조약 혹은 동맹(foedus)의 형태가, 서로마 중앙정부에서 더 이상 제대로 이민족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역이용당해서 하나하나씩 지방 속주의 영토와 서로마 군대의 주요 보직이 게르만인에게 넘어가다가 마침내 오도아케르가 동로마에 바치는 형식을 빌려서 서로마 황제직 자체를 폐지함으로써 멸망한 것이다.

3. 역사[편집]


크게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3.1. 역대 황제[편집]


자세한 것은 서로마의 역대 황제를 참조.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을 통치하게 된 호노리우스스틸리코를 처형하는 등 무능의 극치를 달렸고 그의 통치 시기에 로마 약탈과 브리타니아 속주가 로마의 영향력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의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암살당했고 그의 사후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더욱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후 게르만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황제들이 등극하기 시작했고[4] 마지막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가 퇴위당하면서 제국은 소멸한다.


3.2. 최종 분할 이전 제국과 서로마의 상황[편집]


최종분할된 것으로 설명되는 서기 395년 전부터 로마 제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동방과 서방이 영구적으로 분열될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395년 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생기며 제국의 헤게모니가 동방으로 옮겨지고 있던데다, 군장교와 여러 지식인들이 발렌티니아누스에게 공동황제 임명을 요청해 제국을 각가 분담할 것을 건의한 상황 등은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처럼 제국이 두 황제가 각자 정부를 거느릴 경우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케했다.

서로마 제국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서로마 제국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의 한계와 최종분할 이전 제국의 상황을 살펴봐야 된다. 이에 관하여 학자들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제국의 멸망은 제정이 가진 국가체제적 한계와 제국 안팎의 이유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마 제국이 왜 동로마와 비교해 빠르게 쪼개지고 멸망했는지도 직간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전인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 공화정은 도시국가를 벗어난 상황에서 로마가 팽창하고 정복국가가 되면서 그 한계에 봉착했고, 공화정 후기인 기원전 2세기 이래로 로마는 일찌감치 큰 내전을 치루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 상황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가이우스 마리우스술라가 양분한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10년간의 내전을 시작으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같은 로마군을 사병화한 정치가들이 권력을 쥐거나 정쟁을 벌였고, 시간이 흐를 수록 원로원파와 민중파의 대립은 여러 형태로 지속됐다. 이는 술라의 개혁, 카이사르의 내전 승리 등을 거치며 점차 특정 개인의 영구집권이 가능한 형태의 제국화 됐는데,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고 내전을 승리한 이후 실질적으로 상황 종료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암살됐고, 다시 시작된 내전은 카이사르의 양자로 외종손이 되는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후의 숙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악티움 해전을 끝으로 승리하면서 종식된다. 그리고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 이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2년 뒤인 기원전 27년부터 조정헌법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공화정체의 등장과 공화정 수호'라는 명분으로 실질적인 제정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전까지 존속한 약 300년간의 초기 제정, 즉 프린키파투스(원수정)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만들고 정착시킨 프린키파투스는 술라 개혁 이전의 공화정, 술라 개혁 이후의 공화정과 비교해 확실히 효율적이고 로마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프린키파투스는, 황제가 황제라고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형태의 '형식적 공화정의 탈을 쓴 제정'이었다. 로마 황제로 불리는 프린켑스 혹은 임페라토르는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여러 권한들(임페리움 등)을 원로원의 승인, 군대의 충성 선언 개념으로 합법적으로 수여받아 합법적으로 공화국인 로마를 통치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제정은 동서고금의 일반적인 제정과는 여러 부분에서 그 차이점이 분명했고 이로 인한 한계와 모순도 뚜렷했다. 따라서 황제가 네로처럼 합법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대놓고 불법을 저지르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면, 로마법상 주권자인 원로원과 로마인민들의 모임인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에게 탄핵되고 축출도 가능했다[5].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지 받은 로마시민권자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였다. 즉, 쌍두정 형태의 입헌군주정 내지 세습 가능한 종신대통령인 프린키파투스는 상황이 된다면 부자세습, 형제세습이 가능하고 황실로 불리는 가문이 있는 입헌군주정이면서도, 승인만 있으면 누구나 제위에 오를 수 있는 제정이면서도 공화정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정은 안정적으로 운영되더라도 동서양의 다른 제정과는 그 차이점이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된 사람의 능력이 출중하거나, 대가 끊겨 혈통적 한계가 명확할 경우 그 유연성 측면에서 다른 제정과 비교해 여러 이점이 존재했지만 온전한 혈통적 정당성이 있어도 세습군주제의 장점을 온전히 가져갈 수 없었던 제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제정은 네로,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처럼 확실하게 탄핵된 황제가 있는 경우라고 해도, 제위를 놓고 여러 군사령관들이 다투는 경우가 발생할 경우 내전은 장기화될 위험요소가 많았다. 물론 1세기 중반인 41년 1월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암살 사건 당시처럼 20명 남짓의 근위대 병사들과 원로원 일부가 공모한 급박사건처럼 후임자 클라우디우스를 중심으로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민중과 원로원 내 황제파들이 똘똘 뭉쳐 즉시 반격한 경우에는 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당대의 요세푸스, 후대의 디오의 말처럼 공화정 회귀를 노린 일부 세력이 온전한 지지 없이 황제를 폭군으로 몰아 암살했다가 스스로 몰락한 사건에 가까웠고, 로마인들에게도 멀쩡한 상황을 내전으로 몰아갈 상황에 불과했다.

어찌되었던 간에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초기 제정(프린키파투스)은 각 왕조가 몰락하거나 정치적 혼란으로 야기된 황제의 암살 등이 벌어질 경우 네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와 같은 내전이 발생시킬 위험 요소가 많았다. 간단히 말하면 제국은 평화기 속에서도 황제가 암살될 경우, 자칫 준내전에 빠질 위험성이 높았다. 문제는 이 내전이 장기화될 경우 그 혼란은 원로원이 가진 여러 권한, 각 속주 총독 및 군사령관들의 현지 병력 장악 등과 맞물리면서 더 큰 내전으로 심화될 상황이 곳곳에 산재했다는 점이다.

이런 불안 요소 속에서 서기 2세기 중반부터 로마는 국가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넓어지는 국경을 방어할 병력이 많이 필요하게 됐고, 필요한 돈은 많아졌다. 서로마 제국이 위치한 서방에서는 2세기 이래 갈수록 강해지는 게르만족의 침공 빈도 증가로 많은 군인들이 필요했는데, 네로 시대부터는 로마시민권자들로 충원되는 로마군 정규병 지원규모가 본국 이탈리아를 기준으로는 본국과 수도에서 근무하는 프라이토리아니로 그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게 됐다. 이에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 이래로 로마는 속주 태생 로마시민권자들의 속주병 입대를 허가하는데, 그럼에도 제국은 2400km나 되는 서방 방어선 방어만으로도 많은 군인들이 필요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많은 병력 수요만큼 들어가는 물자도 많이 필요했고, 게르만족들의 침공 빈도가 많아지는 중에 그 강도가 커지면서 대규모 전쟁 가능성도 갈수록 높아졌다. 이 결과, 2세기부터 로마 황제는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선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고 이를 해결해야 됐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평화기로 알려진 서기 2세기 중반부터 3세기 초까지 로마 황제들은 로마와 전선을 오가며 격무에 시달렸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제국의 현군들로 알려진 이들도 이런 상황을 해결하다가 전선에서 죽었다.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 중 최초로 로마군 숙영지에서 승하했고, 철인황제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게르만족의 본국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내고 귀환 중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이는 "제국의 마지막 황금기" 혹은 "평화의 절정"이라고 찬사받은 세베루스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원시적 도미나투스를 제시하면서 프린키파투스의 모순을 개혁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영국 요크에서 사망했다.

이런 외부적 상황 속에서, 제국의 행정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할 만큼 발달하지 않았고 세금 징수와 속주통치는 여전히 황제와 총독, 황제와 지역유력자 간의 서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단점이 있었다. 이는 프린키파투스가 공화정과 전제정 사이의 타협점과 같은 국제인 터라 서기 4세기 이후의 로마 전제정(도미나투스)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로마 황제와 로마 엘리트들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줬다. 따라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 중 오현제 시대의 끝으로 불린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갈수록 고도화, 전문화되는 속주 행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직접 명령에 대한 노력을 많이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황제 주도로 국가 운영의 틀을 바꾸려고 시도했다. 이는 콤모두스 시대때 방치되는 듯 했지만, 콤모두스 시대의 폐단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다시금 문제 해결을 위해 황제들은 노력했다. 세베루스 가의 황제들은(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지역민들이 기부한 공공건축물들을 모두 황제의 이름으로 짓도록 하고 각 속주 간의 통행세 등을 황제의 이름으로 동일하게 징수케했다. 아울러 로마 황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 인재들 외의 기사계급 관료들을 통해 행정결정을 내리고, 지방의 많은 수의 군대를 중앙에서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들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 일대의 속주들에서 그 효과가 컸고, 어떤 로마 황제도 동방보다 낙후되거나 비슷했더라도 갈수록 그 한계가 명확해지는 서로마에서 온전히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워했다. 일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포로로 잡은 게르만족을 광산이 아닌 북이탈리아와 판노니아, 갈리아로 이주시켜 농민으로 정착을 시도했다가 절반의 성공만 거뒀고, 게르만족들이 정착한 일대의 생산력은 그들이 정착한 곳이 인구가 줄거나 초토화된 동네가 많아 빠른 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 전염병이 돌고, 툭하면 국경 밖 게르만족들이 침공하는 상황이 반복됐으니 서로마 일대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즉, 서로마 제국에 해당되는 지역들은 동방과 비교해, 제국의 평화가 절정에 다른 팍스 로마나 후기에도 지방의 많은 군대들은 각 지역의 군사령관 내지 총독들의 명령권 아래 속해, 제국이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에 상당한 정치술과 군대 장악이 필요한 지역이었다.

서로마 제국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지중해 서부, 동부 간의 경제력 차이와 원시적 세금징수, 노예수급 감소,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 시작된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경제력 침체와 그 한계로 인해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벌어져 있었다. 당장 하드리아누스 이후부터 부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상징인 원로원은 푸닉(오늘날의 북아프리카 모로코, 알제리, 리비아 북부), 그리스, 아나톨리아, 레반트 일대가 고위직 등을 독차지하는 상황이었고, 그나마 서로마에서 잘나간다는 본국 이탈리아 인재들은 몇몇 가문을 제외하고는 거진 동로마 출신들에게 밀려나 있었다.[6][7] 이탈리아 출신이나 이탈리아의 오래된 귀족가문들도 어려움을 겪거나 재산규모가 크게 줄어, 오래된 공화정기의 명문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처럼 살아남았다고 해도 잠시 원로원 의석에 복귀 못하는 등 고전하고 있으니, 그 다음으로 발전했다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일대나 제국에서 가난하고 낙후된 촌놈 동네로 취급된 서로마의 변방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경쟁력은 동로마보다 떨어졌다. 이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을 지지한 발칸 반도(특히 일리리아 지방)과 푸닉 지방, 처가의 근거지인 시리아 속주 출신들을 대거 등용하면서도 이탈리아 출신들의 특권을 오히려 확고하게 인정해주고 서방 출신 인재들의 등용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세베루스 황제를 비롯한 2세기 후반 이후 황제들은 서로마의 낙후 및 이 일대 인재 육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이런 격차 속에서 들어갈 돈은 많은데, 동서간의 경제격차 심화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의 연이은 대규모 건축물 축조, 세금 감면 등의 시혜책 등이 대개 지중해 동부나 수도 로마에 편중되어 일시적 대책으로는 한계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트라야누스가 활용해 원로원과 지역유지들이 지지한 속주 통치, 세금징수 정책은,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도 이례적으로 활용한 방법, 즉 공화정 시대때 원로원이 활용한 세금징수원을 고용해 세금을 징수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를 돌리는 운영이었다[8]. 로마 황제들은 황제가 원로원과 함께 속주세를 거두어 들었는데, 2세기 트라야누스의 방향이 간편하고 지지를 얻었음에도 트라야누스의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속주세가 지역마다 힘 있는 속주는 많이 걷고 많이 혜택을 보는 방향인데다 그 중간과정에서 비리가 많았다. 따라서 낙후된 속주가 많고 필요한 자원은 많이 필요한 서로마에게는 2세기 당시 원로원과 다른 속주 지역유지들이 좋아한 세금징수와 재원활용은 그다지 유쾌한 상황만은 아니었다.

이는 필요한 돈과 인적, 물적 자원이 늘어나는 현실과 맞물리면서 2세기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들의 그 고민을 더 깊어지게 했고, 그럴수록 서로마는 동로마와 비교해 황제들의 능력치를 많이 요구했다. 다행히 이런 조치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위기에 빠진 본국 이탈리아와 남갈리아 일대를 중심으로 경제규모를 유지시키기 위해 자금을 쏟아붓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국고 잉여금을 확보하는 국고 확장, 긴축 정책 활용으로 급한 불을 끄게 된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이런 조치들은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성장동력을 잃고 정체된 서로마 일대의 도시경제가 그 발전 동력을 갖췄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시대처럼 재도약하는 것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제국과 서로마 지방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가 즉위한 그 해부터 자연재해, 외적의 침략 등을 받으며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때부터 제국 서방, 동방에서 연이어 외적의 침공이 벌어지고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불리는 전염병까지 창궐했는데, 동방에서 서방으로 퍼져나간 전염병과 레누스(라인강) ~ 다누비우스(다뉴브강)으로 이어진 전선에서 벌어진 끝없는 게르만족들의 침공은 제국의 병력 및 국고 피로감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행정부가 고도화된 행정, 사법 문제 해결을 위해 전문화되고 관료제 아래에서 그 운영이 발전하면서 이에 따른 유지 비용 역시 갈수록 늘어났던 터라 마냥 서로마 문제 해결에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제국의 국고 피로감과 경제적 취약성 속에서 기존 국가체제적 한계와 위험요소가 대내외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상황에 빠져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군인 황제시기를 거치면서 황제가 수시로 교체되자 황제의 권위는 추락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자 각지에서 반란을 비롯한 불온한 움직임이 심상치않게 가시화됐고 이는 당장이라도 제국이 혼란에 빠질 위험성을 가중시켰다.

결국, 3세기의 위기, 군인황제 시대 등으로 불리는 기간 동안 로마는 과거 콤모두스 시대를 거치며 겪은 혼란 이상의 혼동 속에 고생하게 된다. 로마 제국과 황제들은 이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 전까지 어떤 황제도 여러 이유로 이를 말끔히 해결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는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고, 갈리에누스는 건국 이래 최악의 상황 수습에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제국을 재통합한 아우렐리아누스는 태양신의 대리인으로 명시될 황제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군주정 개혁을 추진 중 비리를 저지른 측근의 농간으로 암살됐고,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이점을 살려 통치한 프로부스는 원로원, 서민들의 지지에도 중세 농노제를 연상시키는 경작지, 도시 재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 손에 어이없게 암살됐다.

3세기 내전은 장기화됐는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인물들의 집권과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아이밀리아누스 같은 야심가들의 연이은 등장은 애매모호한 모순점이 가득한 프린키파투스가 가진 정치적 혼란 증폭 위험도를 높였다. 그래서 3세기 기간동안 중앙에서는 여러 야심가들의 제위 쟁탈전과 각 속주 총독들의 황제 선언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 제대로 된 정치는 불가능했고, 신병 충원 이후 활용될 병력의 제대로 된 대응 역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방, 동방 전선에서는 여러 이민족이 침공하면서 로마 군사력은 이에 대응하며 제국을 방어했다. 다행이라면 제국의 각 지역이 모두 이런 준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것은 아니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피해가 누적된 곳은 제국 동부 일대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서부 일대, 즉 서로마 제국 일대였다.

상술했듯 서로마 지방은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부터 제국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반도와 그 북부에서 블록경제로 경제적 규모를 키운 갈리아 남부 지방의 경제적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었는데 3세기 동안 게르만족들의 침공이 갈리아 중심부까지 이어져 피해규모가 커지면서 치안까지 불안해지게 됐다. 내전 기간동안 탈영병들과 유랑농민들이 무장도적이 되고, 연례행사처럼 게르만족들이 침공하는 상황은 그렇지 않아도 동로마보다 낙후된 서로마 상황을 갈수록 안 좋게 했다. 더욱이 영구분할로 불리는 테오도시우스 사후, 서로마 관할에 속할 지역들은 풍요로운 그리스,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를 두루 가진 동로마와 비교해, 푸닉 지방(옛 카르타고 지방) 외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동네가 적고 2세기 중반 이래 굵직굵직한 권세가까지 배출하지 못하여 중앙의 관심에서도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서로마 제국의 상황이 향후 어떻게 예상되는지 짐작될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카리누스를 무너뜨리고 단독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연이어 발생하는 반란을 모두 제압하고, 급상승하는 물가와 국경지대의 불안, 고도화된 행정 통제 대응 향상 등을 목적으로 도미나투스(전제정)을 실시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전제정을 실시함으로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안정됐지만 거의 1백년 동안 지속된 내전에 제국의 경제와 행정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렇기에 군인 황제시기 동안 약화되어 동방과 서방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누더기가 된 제국을 사두정치를 통해 통치한다. 이는 황제 한 명이 통치하는건 힘들었고 제국을 분할해 1명의 정제와 3명의 부제를 두어 제국을 다스리도록 한 이유였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 로마제국은 부제들의 내전에 돌입한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자진 퇴위한 후 3명의 부제가 추가적으로 더 출현해 제국을 사실상 5등분해 다스렸다. 그리고 이 내전의 승자는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쟁쟁한 경쟁자인 4명을 배제하고 313년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즉위한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비교적 안정화되었지만, 과거 로마 황제들이 그랬듯 그의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들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슈퍼맨은 아니었기에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식견과 경험 아래에서의 능수능란함에도 로마 제국은 서방에서 온전히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죽음 이후 대제의 아들 콘스탄스콘스탄티누스 2세의 내전과 율리아누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제국은 서서히 약해졌다.

요비아누스 사후 제국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4명이 제국을 4등분해 통치했지만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암살당하는 등 결말이 좋지않았고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다시 재통합되기 전까지 제국은 분할되었다. 그는 각지에서 난립하는 부제들을 격파하고 불안정한 지방을 안정화시켰다. 특히 당시 논쟁거리였던 기독교 교리 문제를 해결했고 이교금지 정책을 실시해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는 서로마 문제를 해결하던 중 모든 조치를 하기도 전에 밀라노에서 사망했다.


3.3. 스틸리코알라리크[편집]


훈족의 발흥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여파로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제국의 국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고 국경부근에 거주하던 게르만 부족들은 대이동에 밀려 국경을 너머 로마의 속주들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정주민인 로마인과 게르만인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지만 당시 제국 행정부는 각종 부정부패와 내전으로 극심한 혼란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지방 관리들의 극심한 무능으로 단순한 국경분쟁이 격렬한 폭력사태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봉기한 게르만인에게 로마군이 철저히 패배함에 따라 로마제국은 게르만 부족들이 제국 영내에 거주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게르만인들은 상대적으로 강력한 동로마 대신 상대적으로 빈약한 서로마제국 영내로 이동했다.
그리고 2세기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서로마는 일찍부터 곡물 수급량과 자원이 부족한 동네인 터라,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했고 기반시설과 자원이 풍부한 동로마보다 훨씬 암담한 상황에 직면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서거한 이후 당시 나이가 어린 호노리우스 황제 대신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위인 최고사령관(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크 밀리타이) 스틸리코가 국정 전반의전권을 쥐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권력의 공백을 훌륭히 채웠으며, 선황의 아들들이 평화롭게 제국을 온전히 승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여러 쟁쟁한 경쟁자들의 도전에도, 대제의 두 아들 중 호노리우스는 로마제국의 서방속주들을 승계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망 이후 야만족 침공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포에데타리 중 하나로서 다키아 지방[9]에 거주한 서고트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서고트족은 알라리크를 지도자로 추대하며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트라키아 속주를 포함한 일대를 약탈하고 파괴한 알라리크는 아드리아노플을 함락시키며 동로마 제국을 유린했다.

동로마 제국의 동방 군단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에프탈을 견제하기 위해 소아시아에 주로 전개되어 있었고 서방군단들은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지휘했지만 사후 스틸리코 휘하로 배속되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에 주둔하고 있어서 알라리크의 침공에 동로마 제국은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요청으로 스틸리코가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해 알라리크를 압박해 포위에 성공했지만 당시 동로마의 재상인 루피누스의 간계로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의 휘하의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송환하도록 요구해 스틸리코는 결정적인 순간에 알라리크를 격파하지 못했다. 결국 이어진 협상에서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알라리크는 397년 또다시 거병하여 그리스 반도 전역을 유린하며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는데 스틸리코가 이끌고 온 서로마 제국군에 의해 또다시 포위당했지만 이번엔 알라리크는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스틸리코 대신 동로마 제국과 협상해 일리리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틸리코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이때 북아프리카에서 9만의 병력을 규합한 길도가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마우레타니아 속주 대부분을 장악하고 카르타고를 점령하자 서로마제국엔 비상이 걸렸다. 길도는 로마에 대한 식량 수출을 금지함으로서 제국이 식량난을 겪도록 유도했고 식량 수급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서로마제국은 이 조치에 제국 경제의 전반이 흔드리기 시작했다. 길도의 식량금수조치로 서로마제국 내의 식량가격이 폭등하자 스틸리코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식량들을 사들이도록 명령하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스틸리코는 로마 원로원을 통해 길도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했으며 길도의 정적인 마스케젤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그로 하여금 길도를 저지하도록 했다. 마스케젤은 로마군과 함께 길도를 제거했고 마우레타니아 속주의 이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국 전반이 약화된 상황에서 이민족들의 침공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인강과 도나우강 유역에서 야만족들의 활동이 빈번해지고 있었고 약해진 제국은 과거와 달리 야만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399년엔 브리타니아 속주에 위기가 닥쳤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돌파한 픽트족이 잉글랜드 내륙 깊숙한 곳으로 밀려오면서 속주에 파괴가 만연했고 주둔군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속주 전체가 야만족들에게 떨어졌다. 결국 스틸리코 장군이 본토에서 대군을 이끌고 오면서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스틸리코는 야만족들과 협상을 진행했고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로 협의하면서 불안한 평화는 지속됐다.

5세기에 들어선 401년엔 야만족 중 고트족의 세력이 크게 일었는데 알라리크는 이 시기 고트족 부족과 몇몇 다른 부족과 연합했고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1차침공] 스틸리코는 이 유래없는 대대적인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제국의 국경선을 지키는 많은 군단들에게 소집령을 내렸고 로마제국의 국경방위력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401년 말 고트족이 침공을 개시하자 스틸리코는 로마군을 지휘해 폴렌티아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한다. 이 전투에서 알라리크의 부인과 자식이 사로잡혔고 약탈한 막대한 재화를 손에 넣는다. 스틸리코는 이 재물과 가족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철군을 요구했지만 알라리크는 거부했고 둘은 베로나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재차 격파했고 이 패배로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와 협상하여 판노니아로 철군한다.

알라리크는 물리쳤지만 제국 국경 전반에서 불협화음이 이어졌고 406년엔 고트족 족장 라다가이수트가 10만의 부족민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밀고 들어왔다.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한 야만족에 대응하기 위해 로마군은 얼마 없는 군대를 집결시켰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군대는 회전이 가능할 정도의 병력이 없었다.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스틸리코는 국경수비대와 이탈리아 방위군은 물론이고 사루스의 고트족 부대와 울딘의 훈족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지경이었다.

라다가이수트의 고트족 부대는 약탈을 지속하면서 이탈리아 북부의 플로렌스를 포위한다. 10만의 고트족 부족민들이 도시를 포위하자 스틸리코는 고트족 군대를 역으로 포위하라 지시했다.

플로렌스는 압도적인 열세에도 공성병기가 부족한 고트족의 침공을 연이어 저지했고 식량같은 물자 보급이 원할하지 않은 고트족 부대는 서로마군의 역포위에 초조해졌고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스틸리코는 라다가이수트가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게 포위당한 플로렌스에 강을 통해 물자를 지속적으로 지원해줬고 고트족 부족들을 안팎으로 묶어뒀다. 로마군은 단합되지 못한 고트족 부족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며 포위를 유지했고 결국 포위당한 라다가이수트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지만 크게 패했고 8월 23일 그는 처형당했다.

406년에서 407년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서로마제국에게 큰 암흑기였다. 국경에 주둔한 군단들이 이탈리아의 전쟁에 동원되면서 국경수비대는 몰려드는 야만족들을[10] 견디지 못했고 갈리아 내부로 상당한 수의 게르만 부족들이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무참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서진을 이어나갔고 동시에 브리타니아의 참제 콘스탄티누스 3세 또한 갈리아를 침공하면서 당시 서로마제국의 권력을 쥐고있던 스틸리코의 입지또한 크게 흔들렸다.
스틸리코는 사루스를 보내 콘스탄티누스 3세를 상대하게하였고 성공적으로 격파함으로서 침공군이 알프스를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세력이 미약한 탓에 추가적인 공세는 할 수 없었다.

제국이 흔들리자 알라리크는 또다시 군대를 일으켰고[2차침공] 노리쿰을 점령하면서 금을 내놓지 않으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겠다 로마 원로원에 엄포를 놓았다. 연이은 악재로 여력이 없는 서로마제국이었지만 원로원은 금을 지불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원로원의 반대에도 금을 지불하는데 동의했고 원로원과 스틸리코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원로원과 황제의 음모에 스틸리코는 408년 올림피우스의 군대에 의해 사로잡혔고 이내 처형당한다.

파일:external/www.historia.ro/alaric2_0.jpg

408년 스틸리코가 숙청된 뒤, 그의 휘하의 3만군대는 그대로 알라리크에게 투항했고 408년 10월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 속주의 심장부로 진격한다.

알라리크는 서로마군을 격파하고 로마를 포위하면서 호노리우스에게 서고트족이 정착할 땅을 요구했지만 협상의 의지도 없는 황제와 제대로된 협상이 되질 않았다.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해 평화롭게 땅을 획득하고자 했지만 결국 4번째 협상시도도 무위로 돌아가면서 410년 서고트족은 로마 약탈을 자행한다. 이는 기원전 390년의 그것에서 무려 800년 만의 재앙이었다.

로마 약탈은 지중해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동로마제국도 로마 약탈에 민감히 반응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양쪽 로마제국 모두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알라리크를 저지할 수 없었고 약탈을 마친 알라리크는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하면서 도시들을 약탈했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남부 원정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병마로 사망했고 처남인 아타울프가 서고트 족의 왕이 되었지만 얼마안되어 암살당한다. 서고트족은 419년 테오도리크 1세가 호노리우스와 협상하여 아키텐지방의 땅을 얻으며 서고트왕국을 건국한다.


3.4. 훈족아에티우스[편집]


423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죽은 뒤 425년에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즉위했다. 서로마는 야만족의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된 5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이미 방어 능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반달족, 고트족, 그리고 프랑크족이 약탈하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럼에도 제국은 여전히 막대한 영토의 강대국이었고 야만족들도 로마 제국의 복속된 상태였다. 하지만 허약해진 제국은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서로마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직까지 상당한 여력이 남아있었던 서로마는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참제 요한네스를 격파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6살이란 어린 나이에 황제사 되었고 어린 나이탓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섭정으로서 제국을 통치했다.

이러한 시기 반달족의 왕 군데리크는 대규모 부족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정착할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히스파니아 속주에 도달하고도 이들이 남하를 계속하자 서로마제국은 알란족과 고트족과 연합해 이들에게 맞섰지만 타라코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반달족은 히스파니아 속주 깊숙히 진입했다. 반달족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여 서지중해를 장악했고 이는 해군이 없는 서로마제국에게 큰 재앙이었다. 반달족은 히스파니아 남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질세라 갈리시아 부근에서 수에비족이 영토를 크게 넓혀 히스파니아에서 로마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런 악재를 거치면서도 서로마 제국의 정치는 극심히 혼란한 상황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로마의 참제 요안네스의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에티우스와 보나파키우스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어린 황제의 섭정인 갈라 플라키디아는 요안네스 측에서 복무한 아에티우스를 견제하고자 보나파키우스를 지원했다. 하지만 보나파키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편지와 소문이 돌자 당시 카르타고에 있던 보나파키우스를 라벤나로 소환시키려했지만 보나파키우스가 반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다시금 내전이 발발한다.

서로마 궁정은 시기스블츠 장군을 진압군으로 파견해 보나파키우스를 공격했고 보나파키우스는 429년 가이세리크를 북아프리카로 끌어들이면서 전쟁의 양상은 혼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보나파키우스는 카르타고를 잃고 세력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지만 극적으로 로마와 보나파키우스 사이의 오해가[11] 아에티우스의 음모임이 밝혀지면서 양측의 오해가 풀리며 내전은 종식된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반달족은 서로마제국에 있어 큰 위기였기에 430년 서로마는 보나파키우스에게 반달족을 몰아내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칼라마 전투에서 패배한 보나파키우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히포 레기우스에서 농선전을 펼쳤다.430년 5월에서 7월까지 이어진 두달의 공선전 끝에 포위가 풀리자 보나파키우스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파견한 아스파르 장군과 함께 반달족과 맞섰지만 또다시 패배하면서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반달 왕국을 건국한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신임을 잃은 아에티우스 대신 보나파키우스를 서로마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아이티우스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아에티우스의 선제공격으로 내전이 다시금 발생했고 432년 라벤나 근교의 리미니에서 보나파키우스가 아에티우스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보나파키우스는 전투가 끝난지 3개월 후 숨을 거둔다. 전투에 패배한채 도망친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왕 루아의 지원으로 보나파키우스의 사위로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된 세바스티아누스를 몰아내고 총사령관의 자리를 차지한다.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보호자 노릇을 하면서 아에티우스는 제국의 영향력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436년 갈리아로 진격한 아에티우스는 부르군트족의 왕 군다케르를 무찌르고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다음해 조약을 파기하고 2만여명의 부르군트족을 살해한다. 서로마제국은 436년에서 438년까지 히스파니아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수에비족 그리고 서고트족과 전쟁을 벌인다. 아에티우스는 대승을 거두며 막대한 군사적 성과를 이뤘지만 이듬해 439년 서고트족의 반격에 크게 패하면서 로마의 리토리우스 장군이 전사하면서 전선이 무너지자 아에티우스가 급히 복귀하여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아에티우스는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부근에 정착시켰고 알란족을 노르망디 부근에 정착시키면서 계속해서 서로마를 괴롭히던 이민족들의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했다.

하지만 바가우다이[12]의 준동으로 히스파니아 속주가 또다시 공격받자 443년 군대를 파병해 이들을 진압한다. 이어서 445년엔 아에티우스는 계속해서 세를 불리는 반달족을 견제하기 위해 히스파니아에 추가적인 군대를 파견했고 446년엔 서고트족까지 공격했지만 이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크게 패했다.

447년 바가우다이는 갈리아 서북부의 아모리카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지만 알란족의 왕, 고어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해 진압된다. 이어서 449년에 히스파니아에서 또다시 바가우다이가 준동했고 사라고사와 타라조나 등 히스파니아 동북부를 파괴하고 점령했다. 그리고 수에비족이 이들을 지원하면서 타라코넨시스 속주로 진격했고 서로마군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450년엔 아에티우스가 프랑크족의 왕위계승에 개입하면서 갈리아의 종주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지만 이는 로마와 국경선을 마주보고 있는 훈족의 경계를 받기에 충분했다.

5세기 중반에 이르자 게르만 부족들을 평정한 훈족의 세력권이 서로마의 국경선에 다다랐고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호노리아의 청혼[13]을 빌미로 갈리아와 북이탈리아에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14]
서로마는 아틸라의 침공에 갈리아의 중심지인 오를레앙(아우렐리아눔)을 내주면서 무력하게 무너지는가 했지만 아이티우스와 서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 연합군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의 주력부대를 격파하면서 일시적으로 침공이 주춤해졌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카탈라우눔 평원 아틸라를 물리쳤지만 로마군의 피해도 절반 이상인 만큼 로마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고 게르만 부족의 피해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국 병력 손실이 너무 컸기에 이듬해인 452년, 아틸라의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아퀼레이아가 불타고 여러 도시들이 파괴당하자 당시 교황인 레오 1세의 설득에 2차 침공군은 철군한다.

아이티우스는 전쟁의 승리자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혹여나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음모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에는 서로마 황제들은 동로마에서 임명되어 부임하거나 원로원에서 선출되게 되었다. 아이티우스도 죽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죽자, 455년 반달족이 두 번째 '로마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도 원로원 의원들을 데리고 로마를 탈출하려하다가 시민들에게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고만다.

3.5. 최후의 순간[편집]


파일:1024px-Roman_Empire_under_Majorian_(460_CE).png
아이티우스 사후 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잉글랜드에서 철수하였고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를 빼앗긴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갈리아 곳곳에 야만족 세력이 눌러 앉게 되었고, 그 바람에 서로마의 영토는 누더기로 변해버렸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본거지 이탈리아 반도뿐이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살해된 뒤 마지막 20년은 스틸리코나 아이티우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어떻게든 지탱해나가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사실상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 출신 권신들의 입김을 받은 9명의 황제가 연달아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무력하게 몰락해 가는 시절이었다. 다만 이걸 외세에 의해 망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게르만 출신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오도아케르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간신들이지, 외세는 아니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15], 브리타니아[16], 히스파니아[17], 북아프리카의 '변경'에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앵글로색슨족, 서고트족, 수에비족, 반달족 등이 잇따라 침공해 정착함에 따라 군사력이 계속해서 약해진 로마제국은 정치적 약화와 맞물려, 점차적으로 이탈리아 와 몇몇 속주들의 일부분을 다스리는 수준까지 제국의 영토가 축소됐다. 물론 최후의 순간까지 갈리아 북부[18] 그리고 발칸 반도 일부 지역, 달마티아 지역[19]을 포함해 수백만 명의 인구를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 개혁과 안정에 성공하면 건재할 수도 있었다.

455년 반달 왕국이 게르만족의 만행 이후로 폐허가 된 로마를 재차 약탈했고 당시 황제였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사망하자 차기 황제는 갈리아 주둔군과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아비투스가 등극했다. 갈리아 사령관이었던 아비투스는 주둔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동로마 제국에게 자신의 황제 지위를 인정해달라 요구했다. 동로마의 승인을 받은 아비투스는 이탈리아에 잔류한 반달족들을 몰아냈지만 해군이 빈약한 서로마를 노린 반달 왕국의 침공은 계속됐고 456년 카푸아에 상륙한 반달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리키메르 장군을 카푸아로 파견하여 두차례 싸워 반달족을 몰아냈다.

하지만 아비투스는 갈리아 출신 인물들을 등용했고 라틴계 인물들이 주류인 로마 원로원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리키메르는 기회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고 지지기반이 미약한 아비투스를 폐위했다. 리키메르는 모든 군권을 장악했고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가 황제의 음모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참고 삼아 황제를 허수아비로 앉히고 모든 실권을 자신이 가졌다. 리키메르는 황제를 공석으로 남겨두고 권력을 자기가 통제하고자 했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1년이 지난 457년 친구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는 마요리아누스를 서로마의 정식 황제로 인정했고, 마요리아누스는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에 맞서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458년 여름 반달족의 침공군을 격퇴하며 가이세리크의 처남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마요리아누스는 함대의 필요성을 느꼈고 라벤나마세나에 함대를 재건했다. 또한 매우 약해진 군단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게르만 부족과 훈족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며 군대를 강화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아비투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20] 서고트왕국의 테오도리크 2세는 아비투스 황제의 폐위에 크게 반발하며 서로마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히스파니아는 이민족들이 눌러앉기 시작하면서 제국이 도시와 정착지에서 밀려나는 상황이었고 마요리아누스 대에선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서고트 왕국은 히스파니아 속주의 대부분과 남부 갈리아에 이르는 강대한 왕국이었지만 서고트족 뿐만이 아닌 서로 다른 야만족들이 왕국 아래로 복속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기에 결속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마요리아누스의 원정군은 루그두니움을 점령하면서 부르군트족을 복속시켰고 서고트 왕국과의 결전을 벌여 남부 갈리아를 수복하며 히스파니아 본토 깊숙히 진격했다.

긴 공성전을 거치며 사라고사를 점령한 원정군은 타라코를 거쳐 남하했고 반달 왕국의 증원군을 격파하면서 서고트족이 처음 호노리우스에게 받은 갈리아 남서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제국이 다시 회복했다. 원정군은 여세를 몰아 수에비 왕국으로 진격했고 수에비 족 또한 최초의 영토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제국에게 몰수당했다.

성공적인 황제의 원정에 막대한 영토를 수복한 서로마제국의 국력은 다시금 상승세를 기록했다. 갈리아 군정장관 시아그리우스의 지휘 아래 몇십 년 간 버티고 있던 갈리아와 제국의 중심부가 연결되었고 히스파니아의 막대한 영토는 제국에게 다시 상당한 세입을 안겨줬다.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제국에 여러 개혁 정책을 단행했고 제국의 부패를 청산하고자 했다. 그리고 원로원과 적대하지 않도록 인선에도 로마계 인물들을 주로 중용하면서 서로마제국의 고질적인 정치적 분열 또한 봉합하고자 노력했다.

국경 지대를 안정시킨 마요리아누스는 이번엔 북아프리카 속주를 재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집결시켰다. 북아프리카 원정을 위해 서로마제국은 재건한 함대와 군대를 대거 카르타고노바에 집결시켰지만 첩자에 의해 정보가 새어나간 탓에 가이세리크의 기습 화공에 함대와 군대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결국 원정이 참사로 끝나자, 실의에 빠진 마요리아누스가 라벤나로 복귀하자 그의 활약으로 자신의 권력에 불안함을 느낀 리키메르는 결국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한다.

그 후 궁정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하나 동로마제국과 서고트 왕국은 물론이고 반달 왕국도 그가 서로마제국의 황제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4년 후 다시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했다. 그러자 동로마는 차기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줬다. 안테미우스는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반달 원정을 준비했고 이번엔 서로마 뿐만이 아니라 동로마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대규모 원정군을 꾸렸다.

그럼에도 절대적인 국력 차이에 원정은 동로마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양국 합쳐서 10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편성되고 카르타고로 진격했지만 동로마 황제의 처남이었던 총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반달왕 가이세리크는 평화 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함대를 주둔할 것을 권했고 바실리쿠스는 그의 말을 믿고 항구에 배를 정박시켰다. 그러자 가이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하고 함대의 대부분이 그대로 불에 타버렸다. 원정군이 그대로 패퇴하자 동로마는 서로마를 버리기로 했고 동로마의 지원이 없는 서로마는 더욱 역량이 떨어졌고 무기력하게 외세의 침입에 무너졌다.

468년에서 470년엔 그나마 명목상으로 로마제국의 봉신국임을 자처하던 야만 왕국들은 서로마제국에게서 독립을 선언했고 제국 영토 상당수에 눌러앉아있던 야만족들이 일제히 제국에서 이탈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와 아주 일부 지역을 제외한 서로마의 영토는 별다른 저항조차 없이 서고트 왕국이나 프랑크족 등 야만족들에게 빼앗겼다.

결국 안테미우스 황제는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의 음모로 살해당했고 472년 올리브리우스는 서로마의 황제로 등극한다. 하지만 동로마제국은 안테미우스의 암살의 배후에 리키메르가 올리브리우스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레오 1세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올리브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한지 40일 후 리키메르가 사망하면서 서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는 바닥을 쳤고 게르만 장군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적인 암투를 벌였다. 서로마제국의 운명은 서서히 경각에 다다랐다.

올리브리우스를 암살한 군더발트는 4개월 후인 473년 글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무기력한 그는 이탈리아로 야만족이 침공해오자 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갈리아를 약탈하도록 할 정도였고 군더발트의 꼭두각시라며 동로마제국은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동로마제국은 율리우스 네포스에게 군대를 지원했고 라벤나를 포위한 율리우스 네포스에게 474년 항복하면서 글리케리우스는 퇴위되었다.

율리우스 네포스동로마제국의 지원아래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나 오레스테스의 반란으로 달마티아로 피신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한다.

파일:external/medias.photodeck.com/001055_xgaplus.jpg

당시에 서로마제국에 군대는 대부분 용병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야만족들은 금전대신 봉급으로 땅을 요구했지만 오레스테스가 이를 거절했고 오도아케르를 필두로 한 야만족들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다. 로마를 초토화시킨 이들은 라벤나로 진격했고 오레스테스오 파울루스의 군대가 이에 맞섰다.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 족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21]와 제국의 실권자인 오레스테스[22]가 분쟁을 일으킨 끝에 오레스테스와 그의 형제 파울루스가 오도아케르에게 제거되고, 오레스테스가 세운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면서 서로마는 멸망했다.[23] 물론 동로마 황제의 눈치를 본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의 폐위 직후, 황제의 '어의'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면서,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청했다.[24] 황제 제노는 "일찍이 오레스테스가 쫓아낸 율리우스 네포스(로물루스 황제의 전임자)가 아직 (달마티아에) 건재하지 않느냐"며 네포스 복위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정작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사실상 이 문제를 방치하여[25] 사실상 서방제국의 소멸을 인정하였다. 그래도 달마티아에서 기반을 닦아 온 전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는 동로마의 임명을 얻어 다시 복귀하게 되었지만 이탈리아 수복 계획을 세우던 중 480년 암살되었고, 같은 해 오도아케르의 침공에 달마티아가 무너지며 서로마는 완전히 끝이 났다. 로마 국가와 제정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 창시자 아우구스투스와 최후의 황제는 이름이 같았는데[26], 건국 1,229년 만의 멸망이었다.[27][28]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로마 제국이 서로마에 해당되는 지역(갈리아, 이베리아,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이탈리아)을 게르만족에게 영토를 뺏긴 것이지, 로마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4. 멸망 이후[편집]


서로마의 희망이었던 마요리아누스가 죽고 나서 세워진 '수아송 왕국(Regnum Syagrii)'은 서로마 제국의 한 축인 갈리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워진 로마인 국가로, 최후의 갈리아 총독이었던 아에기디우스가 초대 왕으로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486년 프랑크족의 남하로 시작된 전쟁에서 패배한 수아송 왕국은 멸망했고 시아그리우스는 이듬해 처형당했다.

황위를 찬탈한 오도아케르는 17년 동안 이탈리아와 달마티아를 지배하다가 이후 493년, 동로마의 황제인 제노의 명을 받고 (실제로는 이이제이, 동상이몽이었지만) 쳐들어온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에게 살해당했고 동고트왕국에 병합됐다.

로마 제국의 서방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서유럽 전역은 크나큰 정치적, 문화적 혼란이 발생하는데 당시 영국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도시 인구가 감소하는 모습도 나타나게 된다.[29] 그 피해는 대단해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세력들의 충돌이 완화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체계를 이룬 1~2세기 정도 지난 다음에서야 회복세를 이룰 정도다.

훗날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날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 월계관을 받으면서 서로마 제국의 후계를 잇는다고 공언했고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된다.

다른 로마계 왕국들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중앙 정부의 붕괴에서 살아남은 예로 북아프리카 서쪽에 살아남은 로마 전초기지들이 있다. 물론 로마정부는 소멸해 무방비로 노출됐지만 반달족 주변 야만족들과 계속 싸워 나가면서 로마-무어 왕국 등 국가도 세우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영향력을 끼쳤다. 6세기 초반에 이르러 옛 고토 중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만나 다시 합치기도 한다.

동로마 제국의 원정군은 서로마의 고토 수복을 위해 전쟁을 했지만 전체 서로마 영토 전체를 되찾지는 못하고 아프리카 북부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남부 지역밖에 수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 페스트의 창궐로 점령지 대부분이 걸레짝이 되어버렸고, 이슬람 제국의 발흥과 롬바르드의 침공으로 대부분의 영토를 다시 상실했다.

한편 언어에 있어서는, 서로마의 멸망 시기 쯤에 식자층의 희랍어 지식이 빠르게 쇠퇴하고 라틴어가 학술어에서 단독 권위를 누리게 된다.

5. 관련 문서[편집]




6. 관련 창작물[편집]




[1] A B 그나마 국력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던 395년 동서 분할 때의 강역이다. 이후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북서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속주의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끝내 서로마 전 지역을 되찾지는 못한다.[2] A B 황제가 이사를 간 후에도 관념적으론 로마를 수도로 취급했다.[3]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 421년), 421년 호노리우스와 공동황제로 통치한 인물로,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 410년대의 혼란을 수습, 이후 서고트와 연합해 스페인의 알라니족-반달족을 공격, 스페인의 상당 부분을 탈환한다. 이 사람과 갈라 플라키디아 부부의 아들이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4] 이들의 재위 기간은 길어도 채 1년이 못 되었다.[5] 유념할 부분이 있다면 대중들에게 익히 폭군 내지 암군으로 알려진 가이우스(칼리굴라),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카라칼라)는 네로처럼 불법을 악용해 암살된 황제가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의 암살 사건은 원로원의 카이사르 이전 공화정체 회복 시도,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급박하게 황제가 암살된 형태였고, 그들은 네로와 달리 현대 이후 로마사가 재정립되면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중이다. 실제 두 황제는 수에토니우스, 디오의 주장의 편향된 주장과 달리 암살 이후에도 로마인들에게 그 통치형태로 비난받았을지언정, 네로처럼 함량미달의 황제로 공인되어 정통성을 부정받지 않았으며 그들 가문이 멸문한 이후에도 후임 황제들에게 여전히 로마 제국의 정통성 있는 황제로 평가됐다.[6] 로마 원로원 입회 조건은 기본적으로 재산 규모와 출신 후보들의 추천을 해줄 인맥이었다.[7] 이 부분을 현대적 로마사 관점으로 연구한 해먼드의 1957년 발표에 따르면, 이탈리아 출신 원로원 의원들의 비중은 베스파시아누스 시대까진 80%를 상회했고,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는 동로마 출신들을 총애한 도미티아누스 시대조차도 늘 70% 중후반을 왔다갔다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는 50%대로 추락하더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즉위 직후에는 높게 잡아봐야 44%까지 줄어든 상태가 됐다.[8] 필요할 때마다 속주세를 쥐어짠 네로를 제외한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들의 속주세 징수 방향은 트라야누스처럼 세금징수원을 보내 징수했다고 해도, 지역 유지가 세금징수원과 연합해 징수하는 방법보다는 속주 총독과 파견 관리를 통해 징수하고 이를 산출해 재분배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시대 당시 갈리아에서는 한동안 카이사르의 해방노예 출신인 율리우스 리키누스를 동원해 트라야누스 방법으로 운영한 전례가 있긴 했다. 그런데 그 비리가 엄청난데다 지역유지끼리도 속주총독과 어울려 파벌이 갈리는 문제가 생겨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런 까닭에 갈리아 유력자들까지 로마를 찾아온 다음 불만을 토로해, 아우구스투스가 망신당하고 이를 사죄한 일이 벌어졌다. 결국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리키누스를 즉시 소환하고, 자신의 양자인 대 드루수스를 직접 총독으로 보내 총독과 중앙관리가 세금을 산정해 징수하는 방법으로 바꾼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대 드루수스는 지역유지와 연합한 관리 및 세금징수원들의 횡포를 줄이는 방법을 점차 확대시키면서, 수확량을 토대로 속주세를 중앙에서 징세하는 방향으로 운영하게 된다.[9]루마니아 정도[10] 수에비족, 반달족, 알레만니족, 알란족, 고트족[11] 보나파키우스가 아프리카에서 황제를 참칭할 것이라는 소문[12] 3세기의 위기때부터 서로마의 멸망때까지 준동한 농민반란군[13] 지참금으로 서로마제국의 절반을 주겠다[14] 1차 원정에서 아틸라는 오를레앙까지 진격했고 2차 원정에서는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군했다.[15] 일단 408년에 라인강이 돌파당한 이후, 프랑크, 알레만니, 부르군트족이 갈리아에 정착했고, 이후 로마를 약탈한 서고트족이 아퀴타니아 지방에 정착한다. 노비오드눔(현재의 프랑스 수와송으로 서로마 시대엔 노비오드눔으로 불렸다.)을 중심으로 한 북서부 갈리아는 여전히 로마의 통제하에 있었고, 서로마가 멸망한 후인 486년에 프랑크족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하였다.[16] 383년부터 현재의 웨일즈 지역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 407년 마지막 로마군이 반역자 콘스탄티누스 3세와 함께 갈리아로 떠나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에 대한 사실상 포기 선언을 내리면서 브리타니아는 로마 제국에서 반강제로 독립하게 된다.[17] 수에비족이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 정착하였고, 반달족이 한때 이 지역에 정착하였으나 아퀴타니아 지방에서 밀고 들어온 서고트족에게 쫓겨나고 아프리카로 다시 이주한다.[18] 이 지역의 로마 세력은 서로마가 망한 뒤에도 수아송 왕국으로 상당 기간 세력을 존속하였다. 갈리아 지역에서 로마 세력이 완전히 말소된 건 487년 프랑크 왕국클로비스 1세에 의해 수아송 왕국이 멸망, 국왕 시아그리우스가 처형된 뒤의 일이다.[19] 율리우스 네포스가 지배하는 반독립 영역.[20] 아비투스가 황제가 되기 전 테오도리크 2세에게 지지를 조건으로 히스파니아 속주로의 확장을 용인함[21] 스키리족 출신이다. 부친은 한때 아틸라의 신하였던 에데코.[22] 로마인이며, 오도아케르의 부친인 에데코와 함께 아틸라의 신하로 일했었다.[23] 엄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가 건재했기 때문에 서방의 상실일지언정, 로마 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24]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가 엄연히 군림하는데 이탈리아의 황제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도도 있었다.[25] 당시 동로마 제국도 내외부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방관했지만 황제 제노를 포함한 어떠한 로마인들도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로마 멸망 후 몇년 뒤 동로마는 발칸에 주둔하던 동고트족들을 테오도리크의 지휘 하에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로 보내서 오도아케르를 제거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을 세워서 반독립세력이 되어 버려 이탈리아 탈환에는 실패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영토수복보다는 두 게르만족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의 목적이 더 강했다.[26] 참고로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리스로 천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대를 열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다.[27] 동로마는 이후에도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존속하다가 건국된지 2,206년 만에 멸망했다.[28] 로마 건국 연도가 기원전 753년이라는 기록에 따라 계산한 것인데, 당대의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이라서 실제 연도와는 다를 가능성도 있다.[29] 물론 이건 초기 중세인들이 특별히 무식해서 그런 건 아니다. 게르만 정치인들 역시 희랍-로마 문명을 애호했고, 로마인 인텔리들을 포섭하였다. 도시 인구의 감소는 거대 제국의 붕괴와 정치적 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도시 쇠퇴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인 영국은 애초부터 로마 제국의 변방으로 도시화율이 다른 지역보다 낮은 지역이었다. 브리타니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군사 도시 아니면 속주 행정과 관련된 곳이었으니, 제국이 붕괴하면 같이 쇠퇴하는게 당연한 현상이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고대 로마 문서의 r844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고대 로마 문서의 r844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이전 역사)}}}{{{#!wiki style="display: block; display: none"

문서의 r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07-07 19:58:17에 나무위키 서로마 제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