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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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라틴어
고전
SENATVS
현대
Senatus
영어
(Roman) Senate

1. 개요
2. 명칭
3. 구성
3.1. 프린켑스 세나투스
3.2. 의원 선출
3.3. 정원
3.4. 구성원의 출신
4. 건물
5. 신격화
6. 연혁
6.1. 왕정
6.2. 공화정 초중기
6.3. 공화정 후기
6.4. 공화정 말기: 내전기
6.5. 원수정
6.5.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6.5.2. 플라비우스 왕조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6.5.3. 세베루스 왕조
6.6. 3세기의 로마 원로원
6.7. 4~7세기의 로마 원로원
6.8.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6.8.1. 시작
6.8.2. 상원의 등장
6.8.3. 11~12세기
6.8.4. 대중정치의 영향
6.8.5. 후기
6.8.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의 정치 기구이다. 로마 왕국 시절부터 동로마 제국 말기까지 계속 존재했다. 이탈리아 반도로마 시에 소재한 원로원, 즉 '로마 원로원(Senatus Romanus)'은 공식 기록상 603년까지 존속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4세기부터 14세기 중반까지 존재하였다.


2. 명칭[편집]


‘senatus’는 노인을 뜻하는 ‘senex’에 접미사 ‘-atus’가 결합한 단어로, 즉 원로들의 모임을 뜻한다.

로마를 상징하는 단어로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이 로마 원로원과 시민을 의미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아직도 로마시 공고문이나 맨홀뚜껑, 심지어 현(現) 로마시의회에서도 쓰이는 단어다.

상원을 표현하는 Senate는 바로 이 기관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래서 상원의원도 Senator가 된다.


3. 구성[편집]



3.1. 프린켑스 세나투스[편집]


원로원 제1인자
Princeps Senatus

로마 제정 혹은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의 ‘원수(元首)’를 뜻하는 직위. 흔히 기원전 27년 1월부터 시작된 아우구스투스가 자처한 칭호로 ‘프린켑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까지의 로마 황제’로 아는 경우가 많으나, 공화정 시대에 접어든 이후 생긴 아주 오래된 명예직이다. 그 뜻은 직역 그대로 ‘원로원 내 제1인자’, ‘원로원 내 으뜸’을 뜻한다. 기원전 5세기 평민과 귀족 모두의 존경을 받은 발레리우스 가문의 가주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처음 지명받아 취임했고, 공화정 시대 기준으로 마지막 프린켑스 세나투스는 기원전 28년 정식으로 지명받아 취임한 옥타비아누스다.

집정관 직과 함께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 체제, 즉 로마 공화정을 상징하는 자리로 1년마다 바뀌는 선출직과 달리 원로원을 장악한 실질적인 로마 공화국 최고 영수 자리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통상적으로 인구조사(켄수스) 때마다 감찰관 2명이 전직 집정관 경력자 중 신망있는 사람 중 한명을 지명해 부여하는 방법으로 취임했다.
취임할 경우, 통상적으로 5년간 이 직위를 유지했고, 로마 헌법상 프린켑스 세나투스의 6가지 권한[1]이 부여돼 실질적인 권한은 현직 집정관, 감찰관보다 더 막강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오른 원로원 의원은 집정관보다 먼저 원로원 발언권을 행사하고 이를 특권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선사할 수 있었으며, 집정관의 발언을 중간에 반박하거나 끊고 회의 주제를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는 권한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원전 80년, 술라는 원로원 권한을 크게 키우면서 프린켑스 직이 가진 각종 명령권을 제한하도록 명령해, '원로원 안에서 가장 먼저 발언권만 행사할 수 있는 자리'로 국한시켰다. 따라서 술라 개혁 이후 취임한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카툴루스, 키케로는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지명받았음에도 우선 발언권만 행사했다.

로마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긴 ‘권위’, ‘명예’, ‘자유’를 상징하는 명예직[2]인 만큼, 원로원 안에서 인기가 많다고 해서 누구나 오를 수 없는 직위로 평가받았다.

역대 프린켑스 세나투스 자리는 거의 대부분 파트리키 중에서도 최고 명문가만이 독차지했다.[3] 공화정 시대 전체에서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취임했던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약 25명 정도에 불과한데, 이들 중 파트리키가 아닌 사람은 한 손으로 꼽힐 정도이며 그마저도 실제로 이 직위를 역임했는지에 대해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키케로의 경우 카이사르 사후 원로원의 리더였던 것은 맞지만 실제로 전통적인 의미의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역임했는지에 대해서는 반론 또한 많다.

씨족 가문 중 가장 많은 프린켑스 세나투스 역임자를 배출한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파비우스, 발레리우스 가문 등으로, 역대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대한 사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순위를 매기기는 힘들다. 한편,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명성에 비해서는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확인된 인물이 적어 단 1명에 불과하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는 원로원 제1인자 자리인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4]

허나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8년 취임 후 두 번의 조정 헌법 발표 후 기원전 27년 1월 16일을 기점으로 로마 제정(프린키파투스)를 열면서 바뀌게 된다. 그는 역대 프린켑스 세나투스 중 합법적인 방법으로 기원후 14년 자신의 양아들이자 상속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두 친혈육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특권 형태로 물려 주고 사망한다. 하여 아우구스투스 이래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직위는 로마 황제의 전유물이 되었다.


3.2. 의원 선출[편집]


이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은 공화정 시절엔 원로원 의원 가운데서 선출된 감찰관이 결정했다. 주로 공직을 맡은 경험이 있는가를 최우선하였고 그 다음 어느 가문 출신인가와 재산을 보았다고 한다. 의원들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고위관직에 선출되면 높은 순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집정관과 같은 최고위직의 경우 선출 전에 이미 원로원 의원인 상태에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법무관의 경우 선출되면 원로원은 이미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법무관의 수는 제국이 팽창한 이후에도 해마다 제국 전체에서 8명에 불과하였으므로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호민관은 법무관 다음 랭크에 해당되는 고위직이므로 원로원 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호민관의 수는 10명이었고 종신직인 원로원 의원의 수는 300명, 나중에는 600명으로 늘어났으므로 해마다 18명(법무관 + 호민관의 수)의 원로원 의원이 죽거나 강등되지 않은 해에는 호민관도 원로원 의원이 되지 않은 때도 많았다. 법적으로는 호민관은 당선과 동시에 원로원 의석을 얻었으나(아티니우스법) 공화정 후기로 가면서 이 법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훗날 로마가 제정시대가 되었을 땐 감찰관을 따로 두지 않고 황제가 겸임하게 되어 황제가 뽑게 되는데 그 역시 뽑을 때 공직을 맡은 경험을 보았다. 따라서 황제는 자신의 측근을 원로원에 임명하려면 주로 자신이 법무관과 같은 고위직에 그를 추천, 당선시켜 공직 경험을 쌓게한 뒤 원로원에 임명하는 수순을 밟았다. 따라서 제정 시기에도 원로원 의원이 되는 조건에 큰 변화는 없었다.


3.3. 정원[편집]


전통 시대에는 300명이 정원이었으나 원로원을 강화하려는 술라에 의해 600명으로 늘어났고,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원을 900명으로 더 늘렸다. 그 뒤 원로원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아우구스투스가 정원을 600명으로 줄여 그대로 이어진다. 현대식으로 비유한다면 국회의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법안 처리 과정은 크고 길어지게 되므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대통령행정명령이 부각되는 것과 같다. 반대로 국회의 정원을 단 한 명으로 줄이면 그 의원은 대통령과 동일한 정통성을 보유하면서 입법권까지 갖게 되므로, 대통령이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원로원 역시 하나의 조직인 이상 제대로 된 실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규모가 필요하다. 로마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써 회부된 안건들을 심의하고, 더 나아가 결의된 사항을 집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충분한 인재풀이 없으면 명목상 실권이 있어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것. 따라서 술라는 충분한 인재풀을 확보하여 원로원의 세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정원을 늘린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구성원의 숫자가 너무 늘어나면 의원 개개인의 영향력은 작아지고 커진 규모만큼 내부의 합의도 어려워지며 특히 기존의 원로원 구성집단과 다른 입장 및 이해관계를 가진 신규 구성원이 늘어난다면 통일된 입장을 취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즉 카이사르는 역으로 원로원의 정원을 크게 늘림으로써 각각의 의원들이 가지는 중요성과 영향력은 떨어트리고, 하나의 정파로써 원로원파가 통일된 행보를 취하기 어렵도록 만든 것.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이 정원을 줄임으로써 각각의 의원이 가지는 권위를 높여주는 것으로 원로원의 환심을 산 것이다.


3.4. 구성원의 출신[편집]


로마 왕정 시대에는 ‘원로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부족 장로 등 노인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다가 귀족이라면 30세 이상부터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이 되었다. 구성은 장년층 이상 귀족들의 모임으로 바뀌었지만, 초기 이름을 잘 바꾸지 않는 로마의 특성상 그 이름이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5] 또한, 공화정 시절 당시 로마에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즉 원로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조각상을 보면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거듭하던 로마 공화정 초창기에는 평민을 노예로 매매하고 탄압하던 명문귀족층(파트리키)의 아성 같은 곳이었다. 공화정 말기가 되면 성장을 거듭한 신흥 상류층 평민들[6]의 실력행사와 온건파 귀족들의 타협시도로 점차 비귀족에게도 문이 열리게 되어서 로마 연합을 완성하면서 체계가 확고해졌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주도하여 극복하면서 그 유효성을 증명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의원을 해먹은 것은 아니고, 귀족이냐 평민이냐를 떠나서 명문가(nobiles, 노빌레스) 출신들로 원로원이 구성되었다.

선거를 통한 선출직이 아닌 원로원 내부의 엄격한 검사를 거친 선발직이고, 종신직이었긴 하지만 짧은 수명과 정쟁, 전쟁 등에 따른 기존 귀족계층의 지속적인 감소로 그나마 비교적 구성인원의 물갈이가 잘 된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원로원 의원 자체가 많이 전사(戰死)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물갈이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물갈이는 기존 세력인 대귀족가문이 갈리냐 갈리지 않느냐의 문제인 만큼 그저 원로원 의원이 많이 죽는다고 해서 물갈이가 되는 게 아니다. 죽은 자를 대신해서 들어오는 신입 의원들이 기존의 가문인가, 새로이 떠오르는 가문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옛날 잘 나가는 가문이란 건 직계방계까지 숫자가 굉장히 불어나는 법이고 제한된 원로원 의석수 내에서 의석을 따기 유리한 대귀족가문에서 얼마든지 다수의 인물들을 들여보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7]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옛 귀족가문들이 점차 사라지고 신흥 가문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귀족가문들의 청장년들이 많이 죽었음과 동시에 비귀족가문 출신 중장년의 능력을 보고 새로 뽑았다라는 결론이 난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씨족은 옛날부터의 정통귀족이긴 해도 영향력이 줄어 있었던 반면 그라쿠스 형제가 속해있었던 셈프로니우스 씨족은 원래 평민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 코르넬리우스 같은 전통 귀족 씨족들이 동급으로 대우하며 통혼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한 '평민귀족'이었다. 원로원 체제의 경직성이 극에 달한 공화정 후반기에도 폼페이우스 스트라본[8]이나 옥타비우스[9] 같은 촌동네 토호들도 들어올 수 있었을 정도면 꽤 열린 집단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라쿠스 형제의 임차지 재분배정책에 반발한 것은 출신가문을 막론하고 실제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지도층에 속한 원로원 의원과 그 가족들이지 유서깊은 명문귀족 전체는 아니었다.[10] 결국 극도로 경직되어서 기득권 사수에 열을 올리다 체제의 유효성은 잃고 말았지만, 기본적으로 인재들에게는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4. 건물[편집]


고대 로마의 원로원 건물로는 쿠리아 호스틸리아(기원전 53년 화재로 파괴), 쿠리아 코르넬리아(기원전 44년 신전으로 용도 변경), 쿠리아 율리아(현존)가 있었다. 동로마 원로원은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로원 건물을 사용했으나, 이후 황궁에서 회의를 열게 되었다.


5. 신격화[편집]


공화정 후기에 이르게 되면, 아나톨리아 속주에서는 그리스인들에게 원로원이라는 기구 자체가 신격화되어 우상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고대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최고권력자가 종종 우상숭배 대상이 되었는데,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는 원로원이 최고권력자로서 숭배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쥐고 난 이후인 기원전 29년 이래로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을 수립한 1차 헌법 조정(기원전 27년) 이후부터 임페라토르가 우상숭배되는 것으로 대체된다.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 당시인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계자 티베리우스 시대를 기준으로, 아시아 속주를 중심으로 한 옛 헬레니즘 제국 영내에서 원로원은 로마 여신과 신격 율리우스(일명 '디비 카이사르'), 황제와 함께 우상숭배 대상으로 모셔졌다.


6. 연혁[편집]



6.1. 왕정[편집]


원로원의 기원은, 초기 왕정로마의 왕(rex)에게 조언을 해주던 부족 장로들의 모임으로 보고 있으며, 그 때문에 노인들의 모임인 senatus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름 그대로 '원로'원이었다.

왕에게 조언을 하는 지도급 원로들의 회의체로 씨족 지도자들의 회의체 개념이었고, 왕은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왕정 체제 후 왕의 권한이 증대되면서 순수 자문회의가 되었다가 공화정 아래에서 갈수록 권력과 영향력이 커지게 됐다.


6.2. 공화정 초중기[편집]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 시대를 연 이후,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의결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은 로마의 행정과 정치 등 국책의 중심이었다. 처음에는 거의 원로원 중심의 정치가 이루졌지만 이후 원로원을 견제하는 민회와 호민관의 존재로 인해 균형을 이루었다.


6.3. 공화정 후기[편집]


포에니 전쟁의 승리를 거두고 뒤이은 전쟁에서 헬레니즘 제국을 차례차례 격파하면서 로마는 막대한 부와 권력이 모이는 도시가 된다. 그러나 당시 농업경제구조의 부조리로 인해 해외의 대규모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한편 그만큼 기존의 자영농 중산층이 대거 극빈층으로 몰락하여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11]

그라쿠스 형제호민관의 권한으로 농지법을 제정하여 이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원로원 의원들의 폭동으로 살해당하여 개혁은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결의'라는 초법적인 권한을 손에 넣게 되는데[12], 이는 원로원에서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한 모든 시민을 초법적으로 규탄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었다. 사실상 계엄령+사형선고(+ 선전포고).[13]


6.4. 공화정 말기: 내전기[편집]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기존의 로마 시민병 체계는 무너지고, 로마의 정치는 여러 군벌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술라는 일시적으로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민중파를 자처하며 민중파였던 카이사르와 협력하면서 오히려 원로원이 약화된다.[14]

카이사르의 내전은 원로원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했다. 갈리아 전쟁이 종결된 후 인기가 높아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진짜배기 민중파였고 그가 갈리아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로마에 돌아오면 그 다음 수순은 집정관이 되어(이미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보내 호민관에 당선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유는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거 사전작업을 위한 것) 농지법을 개량할 거라고 생각해 불만을 품은 원로원에서[15][16] 자신들과 성향이 가까운 폼페이우스를 같은 편으로 끌여들어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시키는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안 되었고 예상과 달리 이탈리아 도시들이 빠르게 카이사르 측으로 가담해버리면서 제대로 된 전투 하나 없이 이탈리아 본토를 그대로 카이사르에게 내주게 됐다.

히스피니아 지방의 폼페이우스 세력이 일소되고 그리스로 도해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벌인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폼페이우스는 몰락했고, 망명 의도를 의심한 이집트 조정의 권신들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내전은 사실상 종결된다. 남은 반 카이사르파 의원들이 아프리카에서 재기를 꾀했지만 탑수스 전투에서 집정관 경험이 있는 반 카이사르파 의원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항복하고 은퇴하여 원로원은 과거의 권력을 상실했다. [17]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 원로원은 키케로를 중심으로 다시 주도권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 뒤를 이어서 안토니우스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꿰어차면서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에 키케로가 총대를 메고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밀어줘서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키케로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인 능력은 이미 만렙을 찍은 인물이었고 군대 지휘권(당시 로마군은 거진 다 카이사르파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휘하려면 그와 관계가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을 무기로 삼아 역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집정관 자리를 얻어낸다.

이후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면서 키케로와 원로원은 쓸모가 없어진 옥타비아누스를 팽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 속셈을 다 꿰뚫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파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는 목적을 달성하자 힘과 세력이 남아있던 안토니우스와 화해하는 것으로 뒤통수를 거하게 갈긴다. [18] 여기에 카이사르파인 레피두스가 합류하면서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고 원로원 의원 130명을 추방에 처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카이사르파 공통의 적이었던 키케로는 예외.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려 분노한 안토니우스가 꼭 죽여야 한다고 의견을 내자 레피두스는 거기에 동의하고 옥타비아누스는 2일간 안 된다고 버티다가 3일째에 양보하여 유일하게 죽는다.)


6.5. 원수정[편집]




6.5.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편집]


로마 공화국 하의 원로원 주도 체제가 몰락한 이후, 원로원이 가진 권력은 임페라토르로 넘어가게 된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창건자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부터 프린키파투스 체제로 로마 정체가 바뀌게 되면서, 공화정 시대에 비해 권력과 명성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애당초 공화국 하의 법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형식상의 헌법상 권력은 원로원이 가지고 있다는 모양새를 취했다. 따라서 1세기의 원로원은 명확하게 공화국 하의 법적 지위를 가졌음에도, 점차 원로원 의원 개인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그 성향이 변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실질적으로 약화시켰으나, 교묘하게 그 권위를 존중하여 황제가 원로원으로부터 '인준'(호민관 특권의 부여)을 받는 형식으로 원로원의 체면을 살려주게 된다. 아울러 그는 민회가 가지고 있던 입법권, 사법권, 선거권을 원로원에게 이관시켜주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임페라트로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내전 승리 이후 아그리파와 함께 원로원을 900명 정원에서 600명 정원으로 재개편하면서, 원로원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시대 후반부가 되면,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당시와 비교해 원로원의 권력은 현저히 약화된 모습을 띠게 된다.

이 시대의 임페라토르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 임명 방법도 공화정 시대와 묘하게 다르게 바꾸는데, 그 방법은 황제가 법령을 통해 개인을 원로원 의원에 임명하거나 연령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의 또 다른 변화는, 좌석의 배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들은 두 집정관 사이에 앉는 전통이 생겼고, 의장 역할을 겸했다. 또 공화정 시대와 달리 이때부터 원로원 의원들의 회의 방식도 변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직접 입법하거나 연설을 할 경우 반대하지 않았다.

아울러 원로원 내에는 황제가 내린 특권을 부여받은 참관인이 회의장에 들어오는 '참관인 제도'가 새롭게 도입됐다. 물론 이 조치로 혜택을 본 것은 당연히 아우구스투스의 혈육들과 양자들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재위 후반이 되면 아예 황제가 자신의 혈육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예처럼 갓 성년식을 치룬 10대 후반 소년들에게 제왕교육 현장실습 차원에서 회의장 맨 앞자리에 앉아, 법령으로 그 발언권을 보장받고 황제 곁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권리를 행사케 했다. [19]

또한 반역죄 재판과 치안판사 선출 제도가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조치로 원로원으로 이관된다. 따라서 제정 시대부터 나타난 반역죄 재판들은 원로원에서 진행되고 판결이 내려졌으며, 원로원은 이를 담당한 치안판사를 지명 후 투표를 통해 임명하게 되는데 최종결정권은 황제가 장악했고 확정권은 황제만 가지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조치 이후 문자 그대로 거수기가 됐다. 그리고 이런 원로원 장악 및 견제는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 아래에서 진행된 판사 관할 구역 개편과 행정명령권 장악 조치로 절정을 찍게 되는데[20], 이때가 되면 원로원은 자신들 스스로 무력감을 느낄 정도가 된다.

그럼에도 원로원은 법률적으로 황제의 즉위를 인준하는 한편, 황제에 대한 탄핵을 할 수 있는 등 견제장치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장치들은 보통 행사하기 어려웠고, 프라이토리아니 같은 군조직 등을 포섭하지 않는 이상 원로원이 단독으로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이 제도로 '국가의 적' 선고를 받고 탄핵 당한 황제가 바로 네로다.


6.5.2. 플라비우스 왕조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편집]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치하 아래에서 황제권은 법적으로 완전히 확립되고 안정을 찾았다. 반면 원로원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후반기인 클라우디우스~네로 시대보다 훨씬 그 실권이 약화되어갔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인정 받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황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부자가 만들어낸 프린키파투스(원수정)는 형식적 공화국인 로마제국이 갖는 이중적 국제 아래에서 황제와 원로원의 상호견제가 어느 정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로마황제는 오늘날 입헌군주제의 군주와 동일했고 로마는 민회의 대표격인 황제와 원로원이 이끄는 쌍두정(Diarchy) 형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황제는 원로원의 일원이며, 기원전 29년 조정헌법 아래에서 내전을 종식시킨 공화정체의 국가원수이자 상징이었다. 당연한 말인데 원로원의 인준과 결의는 로마 정부의 핵심이었고, 원로원은 네로처럼 대놓고 불법행동을 자행할 경우 법률적으로는 이 특권을 박탈하는 결의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이전까지 원로원은 국가의 적 선포와 결의 통과로 황제를 축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플라비우스 왕조는 69년 창건과 동시에 원로원이 가진 인준 무효권, 즉 탄핵권을 법률적으로 제거했다. 더불어 황제정을 제도화함과 동시에 공화정을 부정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 법이 제정되어 카파톨리아 신전에 헌법으로 동판에 걸린 이후, 단지 황제의 즉위를 인준할 수 있는 권한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면, 베스파시아누스의 제위계승법은 완전히 형식적 공화정을 부정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베스파시아누스가 만든 이 법은 황제가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형식적으로 법을 지키면서 통치한다면, 다시 말하면 네로처럼 아예 원로원을 무시하면서 법을 어기고 황제가 증거조작, 불법 행동을 벌이지 않는다면 원로원이 마음대로 황제를 탄핵하지 못하게 법제화 시킨 조치에 가까웠다. 즉, 황제가 네로처럼 완전히 날뛰며 자격미달 행동을 밥먹듯 하지 않으면 합법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로마인들과 원로원에게 아예 원로원이 필요없다는 것을 보여줬고, 국정 문제해결과 결정을 황궁 안에서 관료들과 처리한 다음 통보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베스파시아누스 체제 이후를 기준으로도 분명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원로원을 대놓고 무시한 행태라고 비난받았다.

2세기 원로원은 제 아무리 제정의 안정과 맞물려 유명무실해지더라도, 제국 통치 분야 전반에서 인재풀의 역할을 여전히 담당했다. 하지만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오현제 시대동안 황제 주변의 측근 관료층이 강화됐고, 그들의 전문성은 갈수록 세밀성을 요구하는 제국의 팽창한 행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의 원로원, 행정, 관직 정비 개혁 아래에서 원로원의 행정 조직 역할 기능을 약화되고, 관료 계층과 전직 집정관 출신들의 행정 조직 역할은 강화된다.

원로원의 역할은 약화됐지만 최소 콤모두스 시대에 일어난 루킬라의 황제 암살 미수 전까지는 그 권위와 인재풀로서의 역할, 행정 실무 영역에서의 주요기능은 유지했다. 그렇지만 루킬라의 콤모두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말 그대로 원로원 주요 인사들이 박살나면서 원로원은 타격을 받는다. 더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부터 도미나투스 체제 등장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부터 활용된 차기 황제 제왕교육 방법 역시 원로원을 통한 명예로운 경력 참여는 명예만 받고 나머지는 황제가 직접 선정한 학자나 원로원 의원들이 전담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원로원의 제왕교육 실습장으로서의 역할까지 이때부터 없어지게 된다.[21]

콤모두스 시대에는 루킬라의 콜로세움 암살미수사건 이후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들이 연이어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처리하고, 이런 모습이 거의 정례화되게 된다. 아울러 클레안데르 같은 인물들이 원로원 의석과 선출직 명예직들을 공공연하게 매관매직하면서, 원로원의 권위는 급격히 추락하게 된다.

이와 함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부터 나타난 원로원의 또 다른 변화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들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속주 출신의 기사계급 신참자들이 그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황제가 기사계급들을 대거 기용하고,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황제가 이탈리아 태생이나 이탈리아 혈통의 속주 태생 기사계급 가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예고된 일이긴 했다[22]. 당장, 플라비우스 왕조때 대거 입성한 속주 태생 원로원 의원들의 등장은, 네로 사후 벌어진 네 황제의 해로 인한 원로원 의원들의 자연감소와 새로운 왕조 탄생에 따른 인위적 개편이 컸다. 그렇지만 원로원 내 출신지 구성의 변화는 로마 제국 내에서 어떤 지역의 경제와 영향력이 커지고, 줄어드는지 확실히 설명하는 지표였기 때문에 로마 내에서 서서히 이탈리아 출신들의 입지가 줄고 본국 중심의 속주통치 개편 변화는 자연스레 황제가 주도권을 쥐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도미티아누스 시대부터는 황제의 추천 아래 급격히 증가한 지중해 동부와 푸닉(옛 카르타고 일대) 태생 신참자들이 원로원에 입성하고 그들의 고속승진이 당연시되면서 새로운 귀족가문들의 등장과 특정 부자 속주들의 입김은 원로원 내에서 강화됐다. 이는 이 시기 등장한 이탈리아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안토니누스 가문, 안니우스 가문과 같이 본래 갈리아나 히스파니아에서 기원하면서 이탈리아에 정착해 혼인을 통해 만들어지거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이전까지는 생판 듣지도 못한 가문들이 원로원 안에서 뼈대있는 명문가로 자리잡는 현상이 가속화됐다.반면, 로마와 이탈리아의 터줏대감인 공화정기 노빌레스 가문들이나 최소 네로 이전부터 일찌감치 로마 귀족에 편입된 오래된 이탈리아 내 에트루리아 등 지방 출신의 오래된 귀족들(대표적으로는 케이오니우스 가문[23])은 출신 인물이 황제의 양자가 되거나 혼맥 없이는 원로원 안에서 집정관이나 법무관 진출이 어려운, 명예만 있고 실권은 없는 원로원 의원으로 변화시켰다.[24] 그리고 이런 변화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하드리아누스 시대를 기점으로 부유한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레반트 및 그리스 일대 출신들이 부와 권력을 쥐고 의석을 세습하는 형태의 문벌귀족화를 초래하면서 원로원의 관료화 및 경직화 흐름이 강화되고 족벌주의 형태 역시 개인의 명예와 가문의 존속보다는 황제와의 연줄을 중요시하는 인재풀 내 귀족화 방향으로 변해갔다.


6.5.3. 세베루스 왕조[편집]


콤모두스의 폭정과 페르티낙스 아래에서의 개혁 실패 후유증을 정리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2세기 후반 등장한 전형적인 푸닉 출신 원로원 신참자였다. 그러나 그는 오현제 시대때 등장한 다른 세습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철저하게 족벌주의 아래에서 파벌정치를 강화하여 원로원과 협치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세운 세베루스 왕조에 이르면 황제를 중심으로 한 관료 체계가 더욱 강화되면서 특정지역 편중 문제를 완화하려는 노력 아래 원로원의 힘을 빼는 방향으로 그 흐름이 이어진다. 이 결과, 원로원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경쟁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제압한 이후 반 세베루스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고, 인적 개편을 하는 과정에서 그 실권을 거의 잃어버린다[25]. 그리고 이때 세베루스 황제는 자신과 아내 율리아 돔나 쪽을 지지하는 푸닉, 레반트, 아나톨리아 출신들을 대거 기용하면서도, 껍데기만 남아 재산이 부유한 기사계급보다 못한 수준이 된 이탈리아 출신 옛 귀족들을 원로원에 재입성시켜주거나 그들을 많이 배려하는 방향으로 원로원을 다룬다. 이런 흐름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의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방법은 원로원을 황제자문기구(Consilium principis)보다 못한 위치까지 만들어 카라칼라와 게타 즉위 당시 원로원은 후임황제 인선 문제도 참관 못 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 시대가 되면, 원로원은 형식적 결정권까지 황제자문회의 소속에게 그 우선권을 넘겨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엘라가발루스 시대가 되면, 세나쿨룸(senaculum)이라는 이름으로 황실 여인에게 허락된 특별 기구까지 만들어진다. 이 결과, 황실 여인들이 원로원 회의장에 참관인 제도를 이용해, 지정석을 차지하고 회의에 참석한 뒤 권위있는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원로원의 역할은 권위만 있고 알맹이는 없는 상태가 된다.

세나쿨룸 제도는 황제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을 위해 제정된 특별법으로 등장했는데, 이는 엘라가발루스가 4년도 안되어 몰락하면서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의 명령으로 페지됐다. 왜냐하면 시리아 에메사 여인들의 행동은 이전의 소 아그리피나처럼 황제 자리 뒤에서 커튼을 치고 듣거나 루킬라처럼 측근들을 이용해 발언권을 행사한 방법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구의 등장은 원로원의 힘이 백여년 사이에 바닥까지 사살상 떨어진 것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 시대부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동안, 사실상 전권을 휘두른 황실 여성들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허락된 가마, 의복, 보석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회의장에 출석해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 국정에 직접 참여했다. 이런 이유로 엘라가발루스 시대의 율리아 마이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의 율리아 마마이아는 합법적으로 원로원에 출석해 발언권을 행사했는데, 황실 여인들의 공개적인 출석은 공교롭게 원로원 내에서의 의사결정이 다시 진행되는 모양새를 띠게 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시대의 원로원은 일시적으로나마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원로원 내지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 원로원과 꽤 흡사해진 모양새로 운영됐다.


6.6. 3세기의 로마 원로원[편집]


이 시기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개혁 이전부터 이미 행정관료 인재풀 역할이 최선일 정도로 껍데기만 남은 터라, 사실상 귀족 신분을 나타내는 문벌귀족의 상징 정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의 갑작스러운 몰락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제위에 오른 사건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형식적인 권한만 남은 원로원이 함량미달의 지위와 권위를 가진 황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제대로 보여줬고 이는 프린키파투스(원수정)가 가진 모순적 문제와 로마 제국이 가진 한계와 맞물려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따라서 군인황제시대의 시작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부터 원로원은 그들이 가진 권한으로는 반격할 수 없던 황제에 맞서 황제 암살을 시도하려고 파견된 총독이나 파견 원로원 의원들과 공모하거나,[26] 고르디아누스 부자 같은 인사들이 아프리카 속주와 같은 부유한 지방과 연합해 황제를 참칭할 때 인준만 해주는 척하고 이권만 챙기는 자세를 보여주게 된다.[27]

이런 분위기는 갈리에누스의 대대적인 개혁 아래, 의원들이 모든 군 고위 지휘관 직에서 배제되고 군대가 주둔하는 속주 총독들에게 형식적 명령권만 갖게 되면서 달라지게 된다. 이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시대부터 원로원 출신 총독, 지휘관들이 황제를 자처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한 목적이 컸다. 따라서 황제 입장에선 원로원 출신의 반란 위험을 차단한 효과를 얻게 됐다.

다만 실무권한을 행사하자면 어쨌건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인재풀을 제공할 곳은 원로원이었기에 실질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 유지됐는데, 갈리에누스가 행정분야도 개혁하면서 기사 계급 출신들이 원로원 의석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원로원 의원급의 관등을 가진 것으로 '쳐 주어' (황제 입장에서)시간과 절차를 생략하고 쉽게 고위직에 올릴 수 있도록 하면서 (영어 위키백과 Adlecti 참조: 이렇게 편법적이라면 편법적으로 임명된 사람들을 'Adlecti', 이 임명행위를 'Adlectio'라고 한다.) 이런 기능까지 상실했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시기부터 인재풀로서의 역할까지 직업장교들과 기사계급 출신 관료들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원로원의 위세는 빈껍데기만 남게 된다.

이런 이유로 갈리에누스가 268년 암살된 이후, 원로원은 그저 유력한 군벌에게 황제 도장을 찍어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도미나투스(전제정) 시대가 되면 실무 권한은 거의 모두 관료 조직으로 넘어가고, 원로원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해져 의원의 기능은 예식적인 것에 머물게 되었다. 원로원 뿐 아니라 민회도 그 권한이 거의 없어졌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시대 이후부터 원로원 의원의 역할은 경기대회나 축제를 주최하거나 자문을 하는 것이 거의 전부가 되었을 정도.

3세기 후반이 되면 황제 자문기능의 역할도 도시 시의회 수준에 그치게 될 정도로 추락했고, 그나마 남아있는 실권이라면 의원들에게 세금 혜택이 부여되고, 기사계급과 신분상 구별을 받아 귀족 대우를 받는 사회적 위신 등이 전부일 정도로 약화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이르게 되어서는 원로원과 기사계급 사이의 보직 구분이 폐지되었으며, 원로원 정원을 2천 5백여명 수준으로 확장해버린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에 대한 인기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대단히 높았다. 왜냐하면, 로마 원로원에게는 세금의 혜택이 부여됐고 로마 원로원이라는 직함 자체가 일종의 제국 내의 최고 명사라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또 로마 원로원이 되려면 일단 제국 전역에서 최상류층에 속해야 했고, 실질적으로 최상류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 원로원 의원인 600명 안에 들지 않으면 인정해 주지 않았고 제 아무리 원로원과 기사계급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었더라도 원로원 의원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귀족을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대도시마다 원로원이 있긴 하였으나 로마 원로원만은 로마 거주자들뿐 아니라 제국 내의 모든 성공한 사람의 최종 획득 타이틀이라서, 그 상징성은 여전했다.

5세기 황제 지위가 왔다갔다 하던 시절에는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씁쓸한 사례로는 455년로마 약탈[28]을 그나마 좀 인간적으로 마무리하도록 협상을 한 것을 들 수 있다.


6.7. 4~7세기의 로마 원로원[편집]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이르러 330년 노바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로운 행정수도가 되고 제국의 헤게모니가 지중해 동부로 옮겨지고 로마 원로원은 점차 지방자치적인 기구로 위상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노바 로마에도 역시 원로원이 새롭게 창설된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이다.

옛 비잔티움은 시 원로원을 따로 둘 정도의 큰 도시도 아니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새로이 태어나면서 원로원을 두었지만, 아직 로마 원로원과 동급은 아니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 말기였던 359년에 비로소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승격됐다.

그 뒤 로마 원로원의 지방 기구화는 더 가속화됐고 그 위상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로마 원로원은 폐지되지 않았다. 심지어 서로마의 행정수도 내지는 황제의 거처가 밀라노, 라벤나에 있던 때에도 서로마의 원로원은 쭉 로마에 있었지, 밀라노나 라벤나로 옮겨가거나, 콘스탄티노플처럼 새로 창설된 적은 전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명목상으로나마 (서)로마의 수도는 계속 로마였다. 의외일지 모르는데 황제도, 제국의 부와 권력도 로마를 떠난 이후에도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부유함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단 이러한 이유로 동로마에서는 서로마보다 소위 고인물 현상이 덜해서 사회가 보다 능력주의 베이스로 돌아갔고, 출신이 한미해도 황제나 고위인사 눈에 들면 즉시임관(?)되어 당대에 바로 출세할 수 있었다고 한다.[29] 고대 후기에서 동로마 초중기까지의 네임드 귀족, 관료들도 영어 위키백과를 보면 대부분이 부모, 조부모 정도가 밝혀져 있고 그 이상의 선대까지 추적이 되는 케이스가 잘 보이지 않는다. 고대 로마 시절의 유명 귀족들이 거의 비슷비슷한 이름으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서, 영어 위키백과의 표제어 기준으로 이름 뒤에 (consul BC ooo), (praetor BC ooo) 등으로 언제 무슨 직책을 지냈는지를 붙임으로써 한 집안 내에서 동명이인을 구분해야만 했던 것과 대조된다.[30] 콤니노스 이후의 후기 동로마도 이름 뒤에 (son of OOO), (governor of ooo)[31] 등의 직위를 붙여서 동명이인을 구분하는 문서들이 여럿 있다. 여하튼 이 점이 고대 후기 당시의 동로마가 서로마와 달리 사회적 유동성을 갖추었고 또한 자영농이 서유럽처럼 농노로 전락하지 않고 탄탄한 사회의 기층을 이루게 한 비결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콘스탄티노플(구 비잔티움)부터가 그 이전에는 소도시라서 현지 기득권 세력이 거의 없었던 것도 크다.[32] 이는 사실 로마 이전 군주제에 대한 경험 차이도 작용했다고 보인다. 로마 이전의 서방지역에는 본격적인 군주제 국가가 없었고 주로 원로원 과두정이나 부족국가들이었던 반면, 동방지역에는 아케메네스 제국, 헬레니즘 제국과 그 후신 디아도코이 계열 왕국들이 있었는데, 특히 헬레니즘 국가들의 특징은 '왕의 친구'(hetairoi, philoi)들로 불리는 자문단들이 실세로 자리매김하는 체제였다. 친구란 즉 군주와의 친분, 군주의 총애 등이 1순위이고 신분이 귀족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이므로 이 지점에서 족벌을 제낄 수 있는 능력이 설 자리가 생겼던 것인데, 거의 같은 지역인 그리스-동지중해 지역에서 거의 비슷한 인재채용 원리가 후대인 고대 후기~중세 초기 동로마에서 발휘된 것이다.

자세하게 들어가면, 원로원 의원의 남계 후손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본인은 의원이 아니더라도 원로원 계급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들 모두가 vir clarissimus[33]라는 타이틀을 갖고 오다가 그렇게 누적되어 4세기가 되자 원로원 계급의 인원 수가 너무 많아져 내부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34]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였던 354년vir illustris[35], vir spectabilis[36]을 vir clarissimus 위에 옥상옥처럼 추가했다. 그것이 공식화 된 것은 20년 정도 지난 372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 때였다.[37] 주목할 점은 로마 제국이 관료제가 진전된 결과 이 원로원 계급 내의 세부 등급과 관직들이 연동된 것이다.[38] 즉 왕조 시절 동아시아의 정1품, 종1품처럼 관등 내지는 품계 비슷한 기능을 했던 것이다. Notitia Dignitatum에 따르면, 이 3개 중 최고등급인 vir illustris에는 대관구 장관(Praefectus praetorio, 舊 근위대장), 도시 장관 혹은 특별시장(Praefectus urbi), 야전군사령관(Magister militum), 궁정 비서실장(Magister officiorum) 등의 최고위직들이 해당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더 흘러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가면 뒤의 2개는 원로원 참가 자격조차 없어지고 원로원 내에는 illustris만 남았다고 한다.[39][40] 그래서 illustris는 예전의 clarissimus만도 못하게 떨어져서, 새로운 차별화 호칭으로 그 위에 vir gloriosus[41] 및 gloriosissimus[42], vir magnificus[43]를 신설했다. 여담으로 한참 후대인 콤네노스 이후에는 황족과 그 인척의 족벌정치[44]로 나라가 운영되었으므로, 그들에게 내리는 호칭이 또 여러 가지가 개발되었는데, 보다 보면 이것보다도 더 호칭 인플레의 진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탈리아 반도가 오도아케르를 거쳐 동고트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시점에도 로마 원로원은 존속하였다. 로마 입장에서는 이민족 출신인 오도아케르와 동고트족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려 자신들이 '원로원의 보호자'라고 주장하며 역으로 원로원을 자신들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공존은 552년 동로마 제국과 동고트의 싸움 와중에 원로원과 동로마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은 동고트에 의해 몰살당하면서 끝났다. 동로마 제국이 동고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로마를 수복하고 다시 원로원을 만들었지만 서로마 시대와는 달리 전국적인 기능은 완전히 잃고 지방의회(참사회)로 완전히 전락했다.

비록 서로마는 멸망했어도 로마 원로원은 여전히 지혜와 번영의 상징이었고,의원들은 도시를 이끄는 최고위층의 엘리트로서 대우받아왔다. 하지만 긴 혼란기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세계의 중심 로마는 황무지로 변해갔고, 중세 초 로마 원로원은 서서히 소멸해 갔다. 이에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황폐화된 로마를 보며 "이런 때에 원로원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시민들은 어디로 떠난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기록상에 남아있는 로마 원로원의 마지막 활동은 603년 포카스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이후 원로원은 쇠퇴하여 적어도 랑고바르드족이 침입한 7세기 전후로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보이며, 로마 원로원이 쓰던 쿠리아 율리아 건물은 교황 호노리오 1세630년교회로 개조해버렸다. 이는 구 로마 원로원 귀족층이 완전히 로마 교회의 고위 사제단, 즉 사실상의 교회 귀족으로 변모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한다. 한편 구 로마 원로원의 소멸은 곧 무엇이 로마(인)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늘 정해왔으며 그 모범으로 여겨지던 엘리트 집단의 소멸을 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45][46]

원 로마 시의 원로원은 기록상으로 사라진 지 500년 만에 조금 다른 형태로 부활했는데 1144년 교황령에서 교황과 시민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해 시민들이 교황을 축출해 코뮌이 들어서면서 자체적으로 부활시켰고, 이후 1145년교황코뮌 양측의 타협과 함께 코뮌의 조직으로 추인받게 된다.


6.8.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동로마 제국에서도 여전히 큰 영광으로 여겨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도 원로원이 있었으며 14세기 중반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이 원로원은 모체인 국가가 1453년에야 망했기 때문에 국가가 멸망한 뒤 비참한 꼴을 맞는 일은 피할 수 있었고, 구성원들도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력인사로 남아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에 들어 동로마 제국의 공화적 면모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실권이 없었다는 과거의 인식과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고대 로마 시의 원로원과 달리, 이것은 아예 존재 자체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편. 영어의 압박이 괜찮다면 영어 위키백과의 'Byzantine Senate' 일독을 추천한다.


6.8.1. 시작[편집]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공된 이후 로마 정부는 여러 혜택을 보장하면서 기존 로마시의 원로들을 유인하면서 신도시의 원로원을 빠르게 구축해갔다. 이때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을 따라 함께 노바 로마로 떠나는 모든 의원들에게 땅과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당근책을 제시했는데, 황제가 유인책까지 사용해 사실상 이주를 권장한 까닭과 상당수의 로마 원로원 인사들이 대개 지중해 동부에 터를 둔 이들이 많아, 상당수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각자의 이유로 동쪽의 노바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때 노바 로마에서 처음 개회된 새로운 원로원은 로마 원로원 본원을 그대로 옮겼거나 아예 없애고 대체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방 담당 분원'이었고, 실제 위세 역시 이름만 남은 로마 원로원과 비교해도 초라했다. 그래서 이 일대 근처에서 열리는 지방의회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 지방의회와 비슷한 수준인데다, 새 수도 천도로 세워진 원로원임에도 실질적 권력이 전무했다.

359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을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격상시키면서[47] 정원도 2000명으로 늘렸다. 초기의 원로원은 여타 제정시기와 마찬가지로 과거 시대의 여러 형식적 내지 의식적(ceremonial)인 기능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참여층은 로마 제국의 주요 정치참여 계층으로서의 입지를 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테오도시우스 법전이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비준하기 위해 원로원에 안건으로 회부하거나 원로원의 만장일치를 거치는 방식을 갖추었던 것은 그러한 요인이다. 형식성이 실질성과 분리되어 인식되는 근현대의 인식과 달리 과거에는 그러한 형식은 상당한 정도의 실질을 '담보'하는 요건으로서 인식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절에 이르러 제국은 법률입법, 행정권의 최종적인 대권이 국가를 표상하는 1인의 황제의 권한으로 집중시키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것은 이후 1천 년간에 걸쳐서 꾸준하게 진행되는 하나의 경향으로서 지방 위에 군림하는 정부, 계급을 초월하여 모두를 종속시키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창출하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54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명하는 집정관직이 철폐된다. 다만 그 권한을 명시한 법령 자체는 9세기 말이나 10세기 초, 레온 6세가 신법령(Novellae)[48]으로 폐지를 천명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로원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인 콘스탄티노스 광장의 한쪽에 있는 원형의 건물이 의사당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는 아예 궁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건물로 의사당이 옮겨졌다. 이 건물은 마그나브라(Magnaura: 라틴어의 Magna Aula에서 옴)[49]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황제가 사절단을 접견하는 중요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레온 6세는 죽기 전 원로원 회기에 나가 전통적으로 황제들이 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963년에는 원로원 의장(Proedros)이라는 상당한 고위직 품계도 신설된다.

원로원의 여전히 남아있는 중요한 정치적 기능은 정치적 공백 시기에 부여받는 전권이었다. 당연히 원로원 내 상당한 숫자의 의원들은 하나같이 제국의 유력한 실력자들이었고 사회 주도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결격사유를 가졌던 아스파르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니카 반란을 뒤에서 조장하고 의원들 사이에서 새 황제를 옹립하고자 하기도 했다.[50] 인기가 없었던 이라클로나스 모녀를 폐위시키고 콘스탄스를 세운 후 아직 어렸던 그로부터 섭정을 부탁받았던 것도 원로원이었다. 유스티누스 2세티베리우스 2세 등의 즉위를 결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를 보호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콘스탄티노스 8세도 몇 년 재위 못하고 딸들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 왕조의 단절이 시간문제일 뿐 가시화되자, 주요 관료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이제 공식적으로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도약하였다. 로마노스 3세[51]콘스탄티노스 9세[52]가 배출된 가문들이 바로 원로원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의 문민통치는 결국 미하일 6세 시대에 이르러 권력중추에서 배제된 군부의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점차 무너지게 된다.


6.8.2. 상원의 등장[편집]


앞서 언급한 콘스탄티노스 9세는 11세기 중반에 들어 원로원에 상당한 변화를 꾀하였다. 이미 학제개편으로 좀 더 다양한 계층간 이동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려 했던 그는 원로원 의원 자격을 대폭 떨어뜨려 주요한 상인, 공장장 등 평민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시민의 상층부에게까지 문호를 열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로원의 대표성은 상당히 제고되었으며 원로원과 시민대중의 거리를 좁혔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로마제국은 기존의 원로원을 초월하는 또 하나의 좀 더 중심적인 의사결정기구를 만들게 된다. 이 기구는 보통 기록에서 상원(Prote-Sygkletos)으로 불리며 일반적인 원로원(Sygkletos)과 구분된다. 이 기구는 어느 정도 품계가 있어야 참여할 수 있는 원로원과 달리 황제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참석하여 황제와 보다 직접적으로 정책을 논의할 수 있었다. 이 '상원'은 이후 오랫동안 존속하여 14세기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영어권에서는 Privy Council 등의 유사한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제국의 정책논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황제는 원로원을 대상으로 현재의 상황과 정책의 필요성을 강변한다. 원로원은 이를 만장일치로 지지하는 정통성을 부여하는 형식을 담보한다. 고대-중세의 정치에서는 이러한 형식 역시 시민대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회복리에 대한 정당성을 보증할 수 있는 증거로 여겨졌다. 황제는 직접적으로 상원 구성원들의 자문과 논의를 접한 끝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 이후의 정책 집행은 여러 부서(Logothesion)로 이루어진 비서국(Sekreton, 조선을 기준으로 하자면 승정원과 유사한 기구) 휘하의 관료들이 담당하게 된다.


6.8.3. 11~12세기[편집]


바실리오스 2세의 사망으로 제위계승이 혼란해지자 황권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었던 수도 관료귀족과 지방 군사귀족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고 11세기 중반 내내 동로마의 정치구도는 수도 관료귀족 vs 지방 군사귀족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후자를 대변하던 알렉시오스 1세의 쿠데타의 성공으로, 전자와 구성원이 거의 일치하던 원로원의 기능은 많이 퇴색되었으며 심지어 원로원 의원직을 황제가 판매하게 되었다.(...)[53]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가 본인의 입지를 굳혀 콤니노스 왕조가 안정화된 12세기에도 원로원의 역할은 지속되었다. 요안니스 2세1137년 안티오키아 공국이 평화조약을 제안했을 때 이 안건을 원로원으로 회부하였다. 1147년, 시칠리아-아풀리아 공국이 침략을 개시하자 마누일 1세는 원로원의 연설을 통해 침략자들을 규탄하였으며 이후 황실과 지휘관, 전략가들로 구성된 상원을 소집하여 대응을 논의하였다. 다만 11세기 중후반과 비교하여 달라진 점은, 정국운영의 안정성과 일치된 이해관계에 의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콤니노스 황실이 대대적으로 정부기구와 상원의 참여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정부기구 수장, 특히 상원은 황족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것을 이른바 '족벌체제'의 저열한 독점현상으로 보고 저평가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대체적으로 잘 운영되었다. 실무는 수장급 이하의 실무관료들이 맡고 전체적인 총괄, 책임이나 상부기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황제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황족들이 배치된다는 조직원리에 의해[54] 구성된 체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런 정교한 체계를 무턱대고 무너뜨린 안드로니코스 1세 이후 오히려 제국의 복잡한 사회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6.8.4. 대중정치의 영향[편집]


12세기 말, 콤니노스 선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제국의 거버넌스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때를 기하여 각 지방의 유력자들은 각지의 도시 참사회(Boule)의 여론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지방군의 통제까지 손에 넣기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과격한 찬탈과 폭정으로 시작된 이 흐름은 이사키오스 2세 시대에 격화되었다. 많은 지방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반란에 가담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식으로서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당근'을 제시하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원로원 참여'의 가능성이었다. 그의 시대에 제국정부는 세바스토스(Sebastos) 품계를 저렴한 값으로 여러 지방 유지나 상인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세바스토스 품계는 원래 알렉시오스 1세동생들을 높여주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던 것이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 특별한 직위를 제공함으로써 지방을 중앙의 정치에서 이탈시키지 않도록 묶어두고자 했다. 그리고 그 조치는 성공적이어서 이후 점차 지방의 반란이나 불복종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통치는 또한 원로원이 엮여 있는 의사결정구조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원로원은 그 특성상 상당수의 법관들과 성직자들이 포함되며 당연히 이들의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안드로니코스의 급격한 찬탈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레온 모나스테리오스(Leon Monasteriotes) 대법관과 같은 사람은 당당하게 원로원 회기 중에 안드로니코스에게 호통을 치는 등 반대의사 표시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안드로니코스도 레온을 '원로원의 입'이라고 부르기만 하고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에 맞서 안드로니코스는 궁정으로 시민들을 적극 초청하여 늘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였으며 그때마다 수시로 유세와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시민들에게 전달하였다. 평소에는 애써 감춰왔던 원리였으며 콤니노스 왕실이 거의 100년 동안 타협선전으로 잘 묻어두었던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이로서 폭발하게 된다. 안드로니코스는 이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국가적 위기와 결부하여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다.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와 이따금의 폭력적 개입은 매번 원로원과 정부, 군대도 무력화시키곤 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숱한 폭정에도 불구하고 거의 3년 가까이 집권할 수 있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렇듯 팽배한 시민집단의 힘으로 인해 정국운영이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특별세를 걷어야 하는 등 국가중대사가 있는 1196년의 경우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 전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전체 민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4세가 실망스러운 행보를 지속적으로 보였고, 그가 데리고 온 십자군이 조건 이행 문제로 계속 웅거해 있어서 제국이 위기에 빠지자 1204년 1월 25일에는 시민집단이 원로원과 종교회의소 구성원들까지 함께 소집시킨 가운데 자체적으로 새로운 황제 후보를 물색하여 니콜라오스 카나보스라는 사람을 황제로 선포하기까지 했다.


6.8.5. 후기[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 점령되었다가 수복된 뒤인 14세기에도 의사결정기구로서의 원로원은 유지되었다. 기록상 원로원 회기가 언급되는 마지막 사례는 1341년 내전 발생 소식이 전해진 데 대한 대응으로 소집된 원로원 회의일 것이다. 1360년대 이후로는 대부분의 관직품계들이 기능을 상실하고 허직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 시기가 되면 사실상 원로원도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추밀원 혹은 상원은 안드로니코스 2세 시기에 언급된다. 이 시기에 들어 상원은 약간의 개편을 통해 콤니노스 시대와 달리 교회 성직자들이나 일반 시민들을 구성원으로 뽑기 시작하여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대표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특히 세금문제를 조절하는 경우에는 일반 농민을 초빙하여 직접 의견을 구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몬페라토의 후작이 되는 테오도로스는 논문을 통해 상원을 임기제/선출제로 개편하며 황제조차도 따라야하는 법적 구속력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비록 그의 개혁안은 채용되지 않았지만 이후 '보편법관'(Universal Judge)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6.8.6. 참고 자료[편집]


Angeliki E. Laiou and Dieter Simon, Law and Society in Byzantium, 9th-12th Centuries , Dumbarton Oaks, 1994.
Demetrios Kyritses, The imperial council and the tradition of consultative decision-making in Byzantium(eleventh to fourteenth centuries), Power and Subversion in Byzantium, Ashgate Publishing, Ltd., 2013.
Demiter Angelov, Imperial Ideology and Political Thought in Byzantium, 1204-1330,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Niketas Choniates, Tr. by Harry J. Magoulias,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4.
Paul Magdalino, The Empire of Manuel I Komnenos 1143-118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Dejan Dzelebadzic, Provincial Sebastoi, From the End of 12th to Mid 13th Century, Recueil des travaux de l’Institut d’études byzantines L, 2013.
Telemachos C. Lounghis, The Byzantine historians on politics and people from 1042 to 1081, Byzantion Vol.72, No. 2, 2002.
[1] 원로원 소집 및 폐회권, 발언권 부여, 원로원 회의 장소 지정, 원로원 회의 절차 및 질서통제권, 로마 공화국과 원로원 이름으로 외국 대사와의 면담 및 교섭, 원로원 최종권고 명령권.[2] 현대 사회와 로마 사회에서 말하는 이 단어들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로마인과 로마사회에서 통용된 권위, 명예, 자유란 평등사상이나 민주주의가 아닌 “나(가문)는 다른 사람(가문)보다 나은 존재이나 그들을 존중한다”는 의미와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우선시될 자유와 명예가 있다”는 이중적 의미의 권위, 명예, 자유를 뜻했다.[3] 발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파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이밀리우스, 만리우스 등 소위 'gentes maiores'로 불린 대가문들이 이 직위를 거의 독차지했다.[4] 술라를 빼면 이들 모두 파트리키 대가문 출신이 아니며, 술라도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몰락한 지파 출신이었다.[5] 로마인들은 본래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다.[6] 이들은 원래 평민이었으므로 호민관 출마 또한 가능했다.[7] 실제로 공화정 후기까지도 이렇게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클라우디우스나 코르넬리우스 같은 1급 명문 귀족가문들이 있었다.[8] 폼페이우스의 아버지[9]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부[10] 오히려 삼두정치라는 판을 짜서 토지개혁정책을 강행통과시키는 쇼를 성공시킨 사람은 명문귀족 율리우스 씨족 출신인 카이사르였다.[11] 문제는 이 대규모 농장이 국유지라는 것. 이 토지는 원래 포에니 전쟁 등 해외에서 원정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토지는 황무지가 된 군인들에게 지급되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원로원 의원들이 이를 가로채간 것.[12] 법적 권한이 아니다. 원래 로마법은 민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로마 자국민을 무한대로 때려잡을 수 있는 이런 권리를 민회에서 통과시킬 리가 없기 때문. 사실상 민중파를 때려잡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3] 사실 계엄령도 사형선고도 선전포고도 엄밀히 말하면 전부 법적 권한이기 때문에 초법적 수단인 원로원 최종결의와는 차이가 있다.[14]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내전 당시 술라 밑에서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아 한몫 단단히 챙겨간 이력이 있다. 그런 그들이 민중파를 자처한 것만으로도 술라의 개혁이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15]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권고를 카이사르에게 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카이사르가 집정관 선거에 나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였지 그가 갈리아 총독직을 오래 차지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시당초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을 오랫동안(약 10년) 맡고 있었지만 그 동안 단 한 번도 원로원이 문제삼은 적이 없었다.[16] 사실 당시 총독직따윈 신참 원로원 의원이 돈을 벌려고 가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당시 가세가 기울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총독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고리대금업을 통해 돈을 긁어모은 전력이 있었다.[17] 고대 로마에서 집정관 재직 여부는 군권의 순서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었다. 카이사르 암살자들이 밀린 이유도 집정관을 역임한 무게감 있는 인사가 키케로를 빼면 한 명도 없었고(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집정관 경험이 있긴 했지만 전임자가 사망하자 임명된 보결 집정관이라 그 권위는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재력도 힘도 없었기 때문.[18] 눈엣가시같은 자신을 원로원이 봐주는 이유가 군대 지휘권 때문이라는 건 명백했고, 만약 자기 휘하의 군대가 해산된다면 옥타비아누스는 정말로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넘은 것도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19] 이 조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외손자 사후, 남아있는 남자혈육들(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을 위해 만든 민회 선거구 개편 법령을 여러 개 통과시켜, 원로원에게 목줄을 채우고 그들의 인생과 가문 전체의 흥망을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민회와 함께 미리 판을 짜놓고, 특유의 정치술을 활용해 "돈도 많이 들고 경쟁도 치열해 당선확률도 떨어지니, 돈 안 들고 모두 관직을 역임케 하겠다"며 원로원의 숙원사업인 "선거구 내에 원로원 의원들의 우선 의사권 보장 및 각 선거구 배정"을 들어주는 당근을 준다. 이후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낸 뒤 법을 통과시키면서, 민회 안에 교묘히 자신을 지지한 평민과 기사계급들을 쪽수로 각 선거구에 배속시켜 마음대로 명예로운 경력 전체 판도를 장악해버린다.[20] 당시 칼리굴라의 명분은 "원로원 여러분들이 원하시는대로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해주겠다"며 아우구스투스가 했던 제도를 부활시키는 방법이었다. 즉, 티베리우스가 돌려준 당근을 원로원이 가진 불만을 이용해,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조치로 원상복구 시킨 셈.[21] 물론 참관인 제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며, 황족들이 어리거나 의석을 갖지 못하는 경우에는 여전히 활용됐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습장 역할을 통한 원로원의 교육자로서의 역할 축소/상실이란 황제가 원로원의 협력 없이도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만들었다는 개념에 가까웠다.[22] 이때 원로원 의석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칼리굴라의 추천 아래 법무관까지 오른 뒤 이후 황제까지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클라우디우스 시대 후반에 능력을 인정받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부친 트라야누스 장군이 대표적이다.[23]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와 그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의 본가로 콤모두스 가문이라고도 한다. 이 가문은 최소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원로원을 대대로 차지하며 고위직을 역임한 에트루리아 지방의 대표 명문가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직계는 수대째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티베리우스~트라야누스 시대까지 굵직굵직한 자리를 귀족 신분으로 차지한 집안이었다. 즉, 2세기가 아닌 공화정 말/원수정 초부터 원로원에 이름을 올린 이탈리아 귀족 중 하나로, 가문의 명예와 위상은 여타 이탈리아 귀족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의 명문가였다.[24] 당연한 말인데, 수대째 원로원 안에서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의석만 세습한다는 것은 제 아무리 이름을 날린 귀족가문이라 해도 부와 명예를 신흥귀족들보다 못하게 만들었고, 플라비우스 가문처럼 신흥가문이 제위를 차지해도 도전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25] 과거에는 세베루스가 이탈리아 출신들만 선별해 때려잡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가 때려 잡은 이탈리아 출신들이란 2세기 이래 원로원을 장악한 푸닉지방이나 지중해 동부에 본적을 둔 이탈리아 거주 권세가들이었을 뿐 재력이 떨어진 진짜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베루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시대까지는 명맥을 유지한 이탈리아나 서방속주 출신 인재들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대 원로원 정책을 추진했다.[26] 물론 모두 실패했고, 이 사건들은 막시미누스가 원로원을 더욱 적대하면서도 개무시한 이유가 된다.[27]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환영하며 그들을 황제로 추인해주면서도, 누미디아 총독으로 자신들과 사이가 괜찮은 카펠리아누스 소환은 권고차원에서 제안 했을 뿐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 법적 책임을 모두 떠넘겼다.[28] 사실상 로마 납세에 가까웠다. 극렬한 저항을 우려한 반달족 왕 게이세리크는 그냥 기존에 잡은 포로를 돌려주고 인신에 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막대한 전리품을 요구했고, 그걸 로마에서 자진해서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29] 동로마에는 실제로 중앙 귀족, 지방 호족, 기사 등 사회 상층부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황제가 더러 있다. 레오 1세, 유스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미하일 2세, 바실리오스 1세, 로마노스 1세 등. 단 콤니노스 왕조 시대의 족벌화 이후로는 그 다음 왕조인 앙겔로스, 라스카리스-바타치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첫 황제 모두가 콤니노스가와 친인척이어서(심지어 4차 십자군 이후의 지방정권의 왕가들까지도 모두 서로 멀든 가깝든 친인척이었다.) 평민 출신 황제는 나오지 않았다. 후기 동로마는 완전히 고인물이라고 할 만하다.[30] 네로 황제의 부계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Gnaeus Domitius Ahenobarbus, Lucius Domitius Ahenobarbus 등을 보면 정신이 없다.[31] Alexios Komnenos (disambiguation), John Komnenos 등을 보면 마찬가지로 정신이 없다.[32] Constantinian Senate (IV-V century)의 20~25분대 참고.[33] 아주 유명한 분(very famous man)[34] vir illustris 중, 'The custom of Roman senators of late antiquity appending the title of vir clarissimus to their names developed gradually over the first two centuries. During the fourth century, the senatorial order greatly increased in number, so that the title became more common and new titles were devised to distinguish senators of a higher dignity, namely vir spectabilis and vir illustris.'[35] 빛나는 분(Illustrious man)[36] 존경스러운 분(admirable man)[37] vir illustris 중, 'The first instance of vir illustris occurred in AD 354 with its use by the Praefectus praetorio. For some decades it was used inconsistently, but then more regularly, perhaps in connection with a formal codification of honours by Emperor Valentinian I in AD 372.'[38] 아우구스투스 문서를 보면 나오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마치 중근세 일본 쇼군들이 기존 천황 정부(공가 公家)를 냅두고서는 자체적인 막부(무가 武家)를 따로 만든 것처럼, 공화정 시절의 기존 정부조직을 냅두고서는 자체적인 황제 직속 조직을 따로 만들었는데, 4세기 와서 이 둘 간의 구분이 사라져서 합쳐진 것이다.[39] vir illustris 중, 'The Illustres soon were regarded as the active membership of the Senate; and by the middle of the AD fifth century, Spectabiles and Clarissimi were no longer expected to participate in the Senate. By the reign of Emperor Justinian I, all senators were considered Illustres.'[40] 신라골품제에서도 역사가 오래되면서 진골의 남계 후손이 엄청나게 늘어나 거의 모든 요직을 독점하자, 6두품 정도나 빼꼼 하면서 존재감을 유지했고, 5두품 이하는 거의 의미가 없어졌었는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다.[41] 영광스러운 분(glorious man)[42] ssimus는 최상급이므로 앞의 것보다 이게 더 높다. 참고로 지금 이탈리아어에도 그대로 쓰이는 표현이다. 악보의 표현인 피아니시모(매우 약하게), 포르티시모(매우 강하게)도 이 최상급 어미가 쓰인 것.[43] 장엄한 분(magnificent man)[44] 그래도 일족이라고 절대로 다 중용하지는 않고 능력을 매우 중시했다. 위치 때문에 양면전쟁, 심지어 삼면전쟁, 신들린 외교 등이 강제된 동로마의 주요인사들이 능력이 없었다면 절대로 1453년까지 못 버텼다.[45]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8p, 원문: 'The end of the senate in the West removed a group that had always set the standards of what Romanness meant.'[46] 위에서 말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한탄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왔을 것이다.[47] 여담으로, 로마 시에만 두던 로마 특별시장(Praefectus Urbi)도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같이 두기 시작했다.[48]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그리스어 편집. 왜 이때까지 안 되어 있었어? 라는 의문을 제기할 법 하지만, 법전의 양이 워낙 많은 데다가, 7~9세기를 지배했던 외침, 내전, 성상파괴운동 등보다는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미루어져 있었다.[49] Aula는 영어로 옮기면 court, 즉 궁정이란 뜻이 된다. 마냐(Magna)는 '대'라는 뜻이니 Magna Aula 는 즉 대법정, 대궁정 정도의 뜻이 된다. 누군가 이것을 aura 로 착각했는지 산들바람이라고 잘못 옮기기도 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possibly from Latin: Magna Aula, "Great Hall"'이라고 나와 있다.[50] 'Lars Brownworth'라는 미국의 교사 출신 역사 저술가의 블로그에는 'In 532 they participated in the Nika Riots hoping to replace Justinian with one of their own members.'라는 대목이 있다. 실패 후 보복으로 원로원 회당이 황궁의 접견 홀로 용도변경되었다. 마찬가지로 바로 앞의 블로그에 'Justinian repaid them by confiscating the Senate House and turning it into a reception hall for the Great Palace.'라는 대목이 있다.[51] 아르기(이)로스. Argyros[52] 모노마호(코)스. Monomachos[53] 위의 'Lars Brownworth'의 블로그에 'The Senate itself retained considerable prestige, especially in the 11th century when the "court party" came to power following the death of Basil II. With the final triumph of the military faction on the accession of Alexios I Komnenos the Senate began to fade into irrelevance and the title of senator could be bought from the emperor.'라는 대목이 있다.[54]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차관까지는 직업공무원(늘공), 장관직에 정치인(어공)을 앉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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