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곶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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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곶 해전
영어: Battle of Cape Bon
시기
468년
장소
튀니지 본 곶
원인
반달 왕국을 멸망시켜서 아프리카 속주를 탈환하려는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합동 공격
교전 세력
파일:western_roman_mon_256.png 서로마 제국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동로마 제국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andal_flag.png 반달 왕국
지휘관
파일:western_roman_mon_256.png 마르켈리누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바실리스쿠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에데사의 헤라클리우스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andal_flag.png 가이세리크
병력
육군 100,000명[1]
1,113척[2]
불명
피해
함대 절반 소실
불명
결과
반달 왕국의 대승. 서로마 제국의 몰락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468년, 바실리스쿠스가 이끄는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연합군이 반달 왕국의 군주인 가이세리크와 맞붙은 해전이다. 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이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2. 상세[편집]


435년, 반달족의 지도자였던 가이세리크는 카르타고를 공략하고 아프리카 속주를 석권한 뒤 반달 왕국을 건국했다. 그 후 반달족은 지중해 전역에서 해적 행위를 일삼았고, 455년 서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약탈한 뒤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딸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후 서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마요리아누스는 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에게서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기획했으나, 461년 카르타고 노바에 함대를 집결시켰다가 사전에 로마 내부의 배신자들로부터 원정 계획을 전해들은 가이세리크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함대가 불살라지면서 실패했다.

467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세안테미우스를 서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세운 뒤 아프리카 속주를 탈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원정군 사령관으로는 황후 아일리아 베리나의 남동생이었던 바실리스쿠스가 선임되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이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직책을 역임하며 동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아스파르와 아일리아 베리나의 강력한 추천에 따른 인선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달마티아의 서로마군 지휘관 마르켈리누스, 동로마 제국의 장성인 에데사의 헤라클리우스도 참여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원정군은 10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케드레누스는 1,113척의 함대가 구성되었다고 서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50,00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이 원정에 사용된 군자금은 프로코피우스가 기술한 1,300켄타리아(130,000 로마 파운드), 존 리두스가 주장한 64,000파운드의 황금과 700,000파운드의 은, 칸디두스가 주장한 65,000파운드의 황금과 700,000파운드의 은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바실리스쿠스는 본군을 이끌며 카르타고로 항해했고, 마르켈리누스는 사르데냐 섬을 공격할 예정이었으며, 에데사의 헤라클리우스는 카르타고 동쪽의 리비아 해안에 상륙하기로 했다. 연합군은 시칠리아 섬에서 조우한 뒤 작전대로 움직였다. 원정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마르켈리누스는 사르데냐 섬에서 반달군을 손쉽게 몰아냈고, 헤라클리우스 역시 카르타고 동쪽의 리비아 해안을 장악했다. 그 후 바실리스쿠스는 시칠리아 섬 맞은편에 있으며 카르타고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본 곶에 도착했다.

가이세리크는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후, 책략을 쓰기로 했다. 그는 바실리스쿠스에게 항복할 테니 평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도록 5일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바실리스쿠스는 그 말을 믿고 5일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함대를 규합한 가이세리크는 밤중에 로마 함대가 집결한 본 곶으로 소리없이 이동했다. 반달군은 많은 선박에 가연성 물질을 가득 채웠다. 이후 그들은 배에 불을 붙인 뒤 로마 함대를 향해 보냈다.

그 결과, 본 곶에 정박하고 있었던 로마 함대는 대화재에 휩싸였고, 뒤이어 반달 함대가 습격하여 배를 구출하려 드는 로마군을 공격했다. 바실리스쿠스는 전투가 한창일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바실리스쿠스의 부관이었던 요한네스는 갑판 위에 서서 많은 적을 죽였다. 그러나 그가 탄 배는 곧 나포되었고, 가이세리크의 아들 겐소는 항복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요한네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배 밖으로 뛰어내려 익사했다.

"절대 개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겠다!"

이 날 로마 함대의 절반은 불에 타 파괴되거나 침몰하거나 나포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바실리스쿠스를 따라갔다. 한편 에데사의 헤라클리우스는 사막을 통해 트리폴리타니아로 퇴각한 뒤 2년 동안 그곳에서 버티다가 소환령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마르켈리누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철수했다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의 선동을 받은 부관에게 암살당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가이세리크는 마르켈리누스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강력한 적수로 여겼던 자가 사라진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바실리스쿠스는 백성들의 분노와 황제의 처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야 소피아에 피신했다. 레오 1세는 그를 기필코 끌어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베리나의 간절한 설득에 마음을 바꿔 트라키아의 헤라클레아 신타카로 추방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은 두 번 다시 서로마 제국과 함께 원정을 벌일 여력이 없었고, 서로마 제국은 패전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한채 476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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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코피우스의 기록[2] 케드레누스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