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쇼 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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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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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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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ght Honourable
넬슨 자작
1st Viscount Nelson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82833674.jpg

작위
제1대 넬슨 자작 (1st Viscount Nelson)
제1대 브론테 공작 (1st Duke of Bronte)
출생
1758년 9월 29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노포크 주 번햄소프
사망
1805년 10월 21일 (향년 47세)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 HMS 빅토리 함상
신장
164cm[1]
복무
영국 왕립해군
1771년 ~ 1805년
최종 계급
중장
근무
HMS 빅토리
HMS 로웨스토프
HMS 아가멤논[2]
HMS 캡틴[3]
HMS 테세우스[4]
HMS 뱅가드[5]
HMS 엘리펀트[6]
HMS 푸드로이언트[7]
주요 참전
미국 독립전쟁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1797)
아부키르 만 해전
코펜하겐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
서훈
바스 훈장
종교
기독교[8][9]

1. 개요
2. 생애
3. 전술 특징
4. 성격
5. 후손
6. 기타
7.1. 영화
7.2. 소설
7.3. 게임
7.4. 만화



1. 개요[편집]


영국 해군영웅으로, 나폴레옹유럽을 석권하고 영국 본토를 위협할 때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10]를 무찌르고 전사한 명장이다. 넬슨은 당시 적수가 없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를 물리친 몇 안되는 군인이다.[11]


2. 생애[편집]



파일:619px-Young_Nelson.jpg

HMS 로웨스토프에서 근무할 당시 그려진 초상화.
그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던 상관 윌리엄 로커를 위해 그려진 것이다.
1758년 11명의 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난 넬슨은 1770년 12세에 해군에 입대했다. 외삼촌이 함장으로 있는 HMS 레조너블(Raisonnable) 함의 조타수로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다만, 뱃사람이면서도 해군생활 내내 배멀미로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12] 1780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그 뒤에는 지중해대서양에서 프랑스 혁명정부의 함대와 싸우는 데 앞장섰다. 1794년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 섬을 점령했으나, 이때 오른쪽 눈을 잃는 첫 부상을 당한다.


파일:800px-John_Jervis,_Earl_of_St_Vincent_by_Francis_Cotes.jpg


파일:Surrender_of_the_San_Nicolas_at_St_Vincent.jpg

세인트 빈센트 백작 존 저비스 경.[13]
넬슨은 세인트 빈센트 해전 당시 저비스 휘하에서 복무하며 큰 전공을 세웠다. 저비스는 평생 동안 넬슨에게 좋은 상관이자 스승으로 남았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산 니콜라스 함의 항복을 접수하는 넬슨.[14]
1797년에는 존 저비스 제독 휘하에 들어갔고 스페인 해군을 상대로 벌어진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당시 영국 함대는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는데[15] 넬슨이 저비스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함선인 캡틴 함[16]을 변침시켜 스페인 함대의 집결을 저지한 덕택에 영국 함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넬슨은 직접 함상 전투에 뛰어들어 스페인 함대의 산 니콜라스 함[17]와 산 호세 함[18]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넬슨의 행동은 엄연한 항명이었지만 넬슨의 항명 덕분에 승리했으므로 아무도 넬슨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 직후 넬슨을 만난 저비스는 그를 힘껏 안아줬으며 항명을 지적하는 보좌관에게서 넬슨을 두둔해주었다고한다. 같은 해 4월 넬슨은 영국 해군에서 9번째로 높은 청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Blue)직에 올랐다.


파일:Sir_Horatio_Nelson_when_wounded_at_Teneriffe.jpg

테네리페 전투에서 오른팔을 잃는 넬슨.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넬슨은 두 번째 부상을 당한다. 넬슨은 테세우스 함을 배정받아 스페인 테네리페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적탄에 맞아 오른팔에 복합 골절상을 입었는데 문제는 이를 제대로 치료할수가 없었다.[19] 결국 넬슨은 오른팔을 절단해야 했고 5달 가까이 임무를 쉬어야 했다. 결국 넬슨 스스로도 오른쪽 눈을 잃은것에 이어 오른팔까지 잃은 것에 꽤나 절망한 모양인지 노트에 '나는 이제 끝났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


파일:Nelson_at_the_Battle_of_the_Nile.jpg


파일:vanguard box [header].jpg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기함 오리앙 함의 폭발을 목격하는 넬슨.[20]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넬슨이 탑승했던 기함 HMS 뱅가드
그러나 넬슨은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여 이집트 원정을 떠난 나폴레옹을 섬멸하는 임무를 맡는다. 비록 나폴레옹을 붙잡지는 못했지만 넬슨은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21] 이 전공으로 넬슨은 나일의 남작(Baron Nelson of the Nile)[22]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며 군 경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후 넬슨은 나폴리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나폴리 국왕이 하사한 브론테 공작 작위를 받았고 또한 영국 정부로부터 해군 서열 7위인 적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Red), 해군 서열 6위인 청색 중장(Vice Admiral of the Blue)직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영국-덴마크 사이에 벌어진 코펜하겐 해전(1801).
영국 해군은 이 전투를 통해 덴마크가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23][24]
1800년에서 1801년에 걸쳐 영국의 몰타 점령 문제를 계기로 두 번째 무장 중립 동맹[25]이 결성되었다. 참가국은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이었는데 문제는 러시아였다. 이 당시 영국은 발트해를 통해 동유럽으로부터 곡물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변덕스러운 러시아의 차르 파벨 1세가 영국 선박들이 발트해를 통과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덴마크도 러시아에 동조했다.

영국 정부는 하이드 파커 경이 지휘하는 함대[26]를 덴마크로 보내 무력 시위를 하도록 했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함대는 영국 함대와 비교하면 수도 적고 훈련도도 낮았지만 해안 포대의 엄호를 받고 있어서 손을 쓰기가 까다로웠다. 때문에 전투는 치열한 포격전으로 점철되었다. 한편 넬슨은 이번 작전에서 엄청나게 애를 먹고 있었다. 지휘관인 파커 경은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돌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는 넬슨과는 상성이 최악이었다. 넬슨이 보기에 공격을 조금만 지속하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파커 경은 깃발 신호를 보내 넬슨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파커 경이 깃발 신호로 퇴각을 재촉하자 참다 못한 넬슨은 실명한 눈에 망원경을 갖다 대고 부관에게 말했다.

'(깃발)신호가 보이지 않는구만.'

치열한 전투 끝에 덴마크는 영국에게 굴복했고 무장 중립 동맹은 깨졌다.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고 러시아의 차르는 시해당했다. 결과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넬슨은 코펜하겐 해전의 승리로 자작에 서임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영국 본토를 침공할 대규모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불로뉴 항에 상륙정들을 집합시키게 했다. 기겁한 영국 정부는 넬슨을 파견해 불로뉴 항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고 넬슨은 저돌적인 성격답게 불로뉴 항의 프랑스 함선들을 탈취할 작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넬슨의 작전은 실패했고 영국 함대는 물러나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에만 주력했다.

불로뉴 항 공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과 프랑스는 숨고르기 목적으로 1802년 3월 25일아미앵 조약을 체결한다. 두 국가 사이의 충돌이 잠시 완화되자 넬슨은 본국으로 돌아가 여행을 즐겼고 요양차 버밍엄에 머물렀다.

하지만 아미앵 조약1803년 5월 18일을 기해서 무효화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에 돌입한다. 넬슨은 새로운 기함으로 빅토리 함[27]를 받았고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중장(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에 올라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인 툴롱의 봉쇄 임무를 수행한다.[28][29]


파일:67912.jpg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상대한 피에르 빌뇌브 제독.
아미앵 조약이 무산되자 프랑스는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불로뉴에 전력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고 병력 수송 함대를 호위할 인물로 빌뇌브 제독을 선택한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에게 봉쇄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전략적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30]

이런 상황에서 전공에 목말랐던 넬슨이 대형 사고를 저지른다. 넬슨은 자신이 맡고 있던 툴롱의 봉쇄망을 느슨하게 해 프랑스 함대를 유인하는 계책을 썼는데 이게 잘못되어 툴롱을 빠져나온 프랑스 함대를 아예 놓쳐버린 것. 당황한 넬슨은 급히 프랑스 함대를 뒤쫓았으나 결국 붙잡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위해 함대를 반납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 해군성에서는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를 풀고 탈출한 빌뇌브 함대를 잡아 족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영국 함대들이 봉쇄를 풀고 사라지자 프랑스 함대는 항구에서 기어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넬슨의 실수 덕에 프랑스 해군은 전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했으나[31]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영불 해협을 향해 항진하지는 않았다.[32] 지휘관인 빌뇌브는 결전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33] 한편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격멸할 기회[34]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소극적인 자세 탓에 실패했고 답답해진 영국 해군성은 넬슨을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빌뇌브가 함대를 끌고 카디스에 틀어박히자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상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35] 불로뉴의 군대를 오스트리아 전선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빌뇌브에게 지중해를 통해 나폴리로 항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빌뇌브가 움직이지 않자 분개해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빌뇌브의 후임으로 카디즈에 파견한다. 당황한 빌뇌브는 급히 카디즈를 출항했고 트라팔가르 곶에서 넬슨이 이끄는 27척 전열함 규모의 영국 함대와 마주치게 된다.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찔렀으나 전투 도중 프랑스 해군 전열함 르두터블 함의 마스트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전투가 끝나기 직전 사망했다. 현재도 보존되어 있는 HMS 빅토리 함에 넬슨 제독이 총에 맞은 장소가 표시되어 있는데, 위치는 후갑판의 타륜 앞부분이다. 허파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힌 총탄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죽어갈 때 군의관에게 자신의 치료 대신 다른 부상자의 구호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남겼다고 한다. 관련 기록화에서는 갑판에 쓰러진 넬슨 주위에 여러 장교들이 모여서 임종을 지키는 모습을 묘사한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 넬슨은 부상을 입은 직후 곧바로 부하들이 하갑판의 부상자 수용실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당시 빅토리와 르두터블 사이의 교전이 워낙 치열해서[36] 넬슨의 부하 장교들이 도저히 임종을 지킬 여유가 없었다.

유언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 의무를 다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유언'.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 말 잘 받아 적었는가? 내가 뭐라고 했는가?", 또는 "내 할머니가 자네보단 키스를 잘하겠네"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저 공식적인 유언을 남긴 이후 넬슨 제독은 몇번이나 자신의 말을 받아 적었는지 확인했고 심지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도 깨어나서는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 운운한 건, 죽기 직전 빅토리의 함장 하디(Thomas Hardy)[37]에게 키스해 달라고(작별인사를 뜻함) 한 다음 하디 함장이 키스하자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럼주에 담겨 7일 만에 영국에 도착했는데, 이 때 당시 럼주가 그의 피에 의해 붉게 물든 일화에서 따와 붉은색 럼주를 '블러디 럼'이라 부르게 된다. 참고로, 그 때 당시 그 럼주는 애도의 의미로 사람들이 나눠 마셨다든지, 선원들이 몰래 럼을 빼 마시느라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통 안에 럼주는 남아있지 않았고 시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다. 넬슨의 시신이 급행으로 런던까지 이동할 때 부패를 막으려 럼주에 담겨 보내진 건 맞다. 그러나 럼주만 넣은 게 아닌 장뇌와 좀약을 잔뜩 넣고, 거기에 관이 놓인 메인 마스트 밑에서 해병대원들이 경계 근무를 했다.[38]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관례 중 하나가, 복무 중 사망한 사람의 시신은 본국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장사를 지낸다는 점이다.[39] 이 때문에 전사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장하는 것이 원래 관례였지만 넬슨의 경우 유언 때문에 수장하지 않고 본국으로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다. 이는 영국 해군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에 해당한다. 넬슨의 장례식은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들, 1만명의 수병들이 참석했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루어졌다.[40] 그의 유해가 안장된 곳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3. 전술 특징[편집]


넬슨의 군사적인 장점과 단점을 꺼내자면 단연코 과감함과 저돌성이 나올 것이다. 넬슨은 지휘권이 없을 때조차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는 일이 빈번했다. 일례로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은 넬슨이 멋대로 스페인 함대의 침로를 가로막아 대승한 전투다. 비록 승리를 가져왔으나 넬슨의 이러한 행동은 명백히 규율 위반이었다. 하지만 도박이 성공해서 더 좋은 결과를 불러왔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만 봐도 이때 넬슨 휘하의 장병들은 맨 먼저 스페인 전열함 2척을 나포할 수 있었다.

또한 넬슨은 휘하 함장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했다.[41] 넬슨은 늘 함장들에게 작전에 얽매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할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재량권의 부여와 넬슨 특유의 과감함+저돌성이 가장 빛났던 승리는 다름 아닌 아부키르 만 해전이다.

이 당시 프랑스 함대를 이끌던 프랑수아 브뤼예 제독은 전열함 13척을 난공불락인 위치에 줄지어 배치해놓았다.[42] 이 곳은 포함과 해안 포대의 보호까지 받는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만약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와 똑같은 숫자의 전열함으로 정석이자 유일한 공격 방법인 횡대 항해를 시전했을 경우 전투는 영국이 큰 피해를 입고 간신히 승리하거나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정이 단 하나의 닻만 내리고 있다는 부분을 주목했다. 더불어 함정과 모래톱 사이에 일정 정도 개방된 물길을 발견하였다.[43] 난공불락 요새의 약점을 파악한 함장들은 넬슨의 지시를 기억하며 물길 속을 파고들었고 여러 함정이 그 뒤를 따랐다.


파일:오리앙의 폭발.jpg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화약고 유폭으로 폭발하는 프랑스 기함 오리앙

영국 함대의 대담한 기동은 곧 승리를 불러왔다. 들어가는 중간에 함선 한 척이 좌초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다른 함정들은 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국 함대가 발포를 시작하자 프랑스 함대는 마치 샌드위치처럼 양쪽에서 포격을 받게 됐다. 방어적인 배치가 오히려 움직임을 틀어 막는 독이 된 셈이다. 그리하여 우선 횡대를 이뤘던 3척의 프랑스 함정이 박살났다. 120문의 함포를 탑재한 프랑스의 오리앙(L'Orient) 호는 아주 강력했으나 불행하게도 갑판 위 일부 페인트 통에 불이 붙어 화약고가 폭발해버렸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될 무렵, 프랑스 함대는 전열함 3척을 제외한 모두가 항복했다. 또한, 나머지 3척 중 2척은 도망갔고 1척은 좌초된 뒤였다.

심지어 함선의 피해를 제외하고 봐도 영국 측은 사상자가 천 명도 되지 않은 데 반해 프랑스 측은 포로까지 합하면 최소 수천에서 최대 1만에 달하는 피해를 봐야 했다. 해전만 따졌을 때 그저 방어만 하는 상대를 이토록 압도적인 차이로 박살낸 경우는 전례가 드문 일이니 만큼 넬슨의 재량권 부여와 저돌성이 얼마나 큰 군사적 재능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덧붙여 나일 강 전투의 여파는 몇몇 역사가들이 트라팔가르 전투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길 정도다.[44]

4. 성격[편집]


뛰어난 능력에 비해 굉장히 못난 성격이었는데 공격적이고 욕쟁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기분나쁜 독설을 거침없이 하여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기에 적이 많았으며 인간적으로는 결점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시칠리아의 반왕당파 반란에 개입했고 거기서 벌어진 학살극에 연관되었다는 것과 후술할 엠마 해밀턴과의 추문이다.

여성편력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넬슨과 내연관계이던 엠마 해밀턴은 유부녀로 넬슨의 상관인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었는데, 넬슨을 아끼고 그 가능성을 높게 본 윌리엄 해밀턴은 자기 후배이자 부하가 아내와 사귀는 것을 묵인했을 뿐더러 심지어 세 사람이 한 집에서 함께 살기까지 했다. 해밀턴 경의 임종 때에도 엠마와 넬슨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지켰고, 때문에 처음부터 해밀턴 경은 엠마를 아내로 삼기보다는 사교계에서의 추문으로 곤란해진 엠마를 보호[45]하기 위해 명목상으로만 결혼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밀턴 경이 보호하고자 했던 대상은 엠마가 아니라 조카였던 찰스 그레빌(Charles Greville)이라는 인물이다. 그레빌은 명문가의 자손이며 국회의원이었는데, 당시 엠마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빌은 어차피 신분이 낮은 엠마와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돈도 궁해서 부자집 딸과 결혼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런 이유로 동거하던 엠마가 거추장스러워지자, 그레빌이 자신의 삼촌인 해밀턴 경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결혼 당시 엠마는 26세이고 해밀턴 경은 60세였으며, 평생 해로했던 부인과 사별한 이후였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이었으며, 조카를 위해 엠마를 떠안은 해밀턴도 엠마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엠마가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무관심했던 것이다. 이는 영화[46]로도 나올 만큼 유명하며, 그녀와 나눈 연서가 경매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말이 좋아 로맨스지 막장 드라마. 위에 언급된 유언 중에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호레이샤 넬슨도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47] 이건 실현되지 못했지만...


5. 후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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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의 유일한 혈육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넬슨과 엠마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호레이샤는 고모들이 데려다 키워서 엄마처럼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만 하층민으로 태어나 순전히 타고난 미모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랐던 엄마의 미모를 전혀 물려받지 못하고 아버지 넬슨의 외모만 물려받아서 외모 문제로 좀 구설수에 시달렸다. 남아 있는 젊은 시절의 초상화는 굉장히 못생긴 걸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못생긴 건 아니고 평범한 외모였는데 어머니가 워낙 소문난 미인이어서 후대에까지 구설수가 되고 있다. 어머니 엠마는 호레이샤가 15살 때 사망했는데 호레이샤는 죽을 때까지 엠마를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생모 손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으니 애정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엠마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피하기 위해 부인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어쨌든 호레이샤는 동네 목사결혼하여 조용히 살면서 10명의 자녀를 낳았고, 지금까지 그녀의 자손은 이어지고 있다.

넬슨은 영국에서는 남작(1798년) 작위를 받았다가 1801년 자작으로 승격되었고, 양시칠리아 왕국에서는 1799년에 무려 브론테 공작(Duke of Bronté) 작위를 받았지만, 호레이샤는 적자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넬슨 백작으로 승격된 작위와 함께 양시칠리아의 브론테 공작위도 형 윌리엄이 계승하게 된다. 다만 브론테 공작위는 여성 승계가 가능해서 현재 두 작위는 각각 다른 사람이 보유하고 있다.[48][49]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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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투 직전에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말을 남긴 것도 유명하다. 이건 직접 입으로 한 말은 아니고, 깃발 신호로 전 함대에 알린 것. 신호의 편의를 위해서 깃발 신호에 자주 쓰는 단어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England 'confides that", "할 것이라고 자신한다(믿는다/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보낼 생각이었으나, 깃발 신호 단어집에는 confide와 duty라는 단어가 없었다. 한 글자씩 일일이 올리기에는 번거로웠고, 이 최후의 격려 문구를 보낸 직후 바로 작전지시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도 부족해서 confide 대신 들어간 것이 '예상한다'라는 뜻의 'expects'(문맥상 의미는 바란다/기대한다). duty는 대체할 만한 단어도 없고 너무 길지도 않아서인지 일일이 한 철자씩 깃발을 올렸다. 그래서 위의 신호기가 'd u t y'라고 하나씩 올라와 있는 것이다. 출처
두 단어의 뉘앙스가 상당히 다른데, 전자는 장병들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지만 후자는 일단 이런 식의 문장은 잘 안 쓰므로 어색하고, 조금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느낌마저 든다.[50] 때문에 함장들은 이 문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넬슨을 숭배하다시피 했을 뿐 아니라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깃발 신호에 익숙했던 장병들은 당연히 본래 의미를 눈치껏 알아듣고 환호했으며, 이 위엄돋는 문구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압도적인 승리와 넬슨 제독의 전사라는 드라마틱한 배경과 어우러져서 전설이 되었다.

  • 넬슨도 한때 하프페이 함장으로 지냈다. 1789년 영국 해군이 평시 편성으로 전환되어 지휘할 함선을 배정받지 못해 몇 년 간 급여를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는 예비역이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기간 중 프랑스 해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793년 아가멤논 호의 함장 직책을 배정받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 그가 노예 무역의 옹호(적극적 지지, 방관)자였다는 점에서 넬슨 동상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출처 실제로 넬슨이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는 점은 전공자가 아닌 이상은 거의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51] 하지만 기사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영국 사회에서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가 쓰여지고 약 3년 후,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의 여파로 비록 영국 본토는 아니지만 바베이도스에 있는 그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 그의 유산에 대해서는 굉장히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이 부러움을 준다. 런던트라팔가 광장에 가보면 그의 동상이 기함이었던 HMS 빅토리호의 돛대 높이와 같은 55m 높이의 기둥 위에 서서 영불 해협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넬슨 기념탑)

그가 최후를 맞았던 HMS 빅토리 함과 관련된 것들도 매우 잘 보존이 되어 있다. 현재 HMS 빅토리 함은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영국 포츠머스의 히스토릭 독야드에 있는 드라이 독에 영구보존되어 있으며, 내부는 당시 해군 장병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박물관 함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놀랍게도 또한 근처의 건물에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돛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 점[52]도 전시되어 있다. 이때 주의할 것이 하나 있는데 HMS 빅토리 함은 입장권 하나로 단 한 번만 입장이 가능하다. 즉, 입장했다가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위해선 표를 다시 사야 한다. 그외 몇몇 시설도 이와 동일한 제한이 걸려 있다.
참고로 HMS 빅토리 함은 비록 명예직에 가깝지만 아직도 영국 해군의 함적에 남아있다. 미 해군 역시 1797년에 건조된 자국의 대형 프리깃 USS 컨스티튜션 함을 현역함 명부에 남겨두고 있다. 차이라면 빅토리는 영구적으로 정박 상태로 묶여 있지만 컨스티튜션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여전히 항해 가능 상태로 남아 있는 '진짜 현역함'이라는 것이다.

  • 눈과 팔을 잃은 것을 포함해서 이상할 정도로 군 생활 동안 중상이 많았다. 오른쪽 눈을 잃었고, 중상으로 인해 오른팔을 자르기까지 해야 해서 흉한 외모가 되고 만다.[53] 나일강 해전에서도 프랑스 해군의 포탄에 이마를 맞아 뼈가 드러날 정도로 부상을 입어 응급 치료를 받아야 했다. 사실 현대적인 의학적 치료법과 위생 개념이 자리잡지 못했던 당시는 간단한 상처도 제대로 치료를 못해 감염으로 죽는 시기였다. 오히려 넬슨은 저런 큰 부상들을 여러 차례 입었고 장애인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명운이 엄청나게 좋은 것이다. 또, 위에도 써 있지만 넬슨은 건강도 좋지 못해 남은 왼쪽 눈마저 시력이 나빠졌으며, 멀미를 하는 체질이었다. 이런 주제에 끝까지 해군으로 살고 해군으로 죽었으니 어쩌면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 넬슨 사후 태어난 폴란드 태생의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 작가인 조지프 콘래드(해양 문학의 걸작 The Nigger of the Narcissus를 집필했다)는 영국 해군의 어떤 영광도 넬슨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고 넬슨을 극찬했다. 실제 조셉은 영국 출신은 아니지만 영국으로 귀화해서 영국 해군 장교가 되기도 했다.

  • 2002년 영국의 BBC가 1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투표에서 무려 9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장군, 제독으로 한정하면 1위로서 말버러 공작보다 높은 순위임은 물론 동시대 나폴레옹을 물리친 진짜 주역인 웰링턴 공작조차 넘어서는 순위이다.[54]

  • 그의 이름을 딴 넬슨급 전함들이 2차 대전 당시 활약했다.

  • 양파 애호가였다. 양파 자체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파가 건강에 직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구에 정박할 때 마다 양파를 잔뜩 사들여 선원들에게 양파를 가능한 날것으로 먹도록 지시한데다 전사하기 11일 전 쓴 편지를 보면 다른 해군 선장들에게도 이를 따를 것을 권유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7.1. 영화[편집]


  • 미국에서 만든 1941년 영화 '레이디 해밀턴'[55]에서 당시로서는 영화계의 뉴비인 로렌스 올리비에[56]비비안 리와 함께 공연했다. 이 둘은 실제 신혼부부였는데, 영화 역시 엠마와의 절절한 로맨스가 강조되었다.

  • 프랑스 영화 "아우스테를리쯔 대전투"에서는 앞 부분에 잠깐 나온다. 보통의 초상화 이미지와는 달리[57] 외팔이에 외눈안대를 한 좀 흉측한 모습이었다.

  • 피터 핀치, 글렌다 잭슨 주연의 1973년도 영화도 넬슨과 엠마 해밀턴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에서는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잭 오브리가 넬슨 밑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그의 입으로 넬슨이 어땠는지 묘사되며[58] 영화에서 자주 언급된다.

7.2. 소설[편집]


  • 수잔 손탁의 "화산의 연인들"은 엠마와 넬슨의 연애담을 그린 작품.

  • 소설 혼블로워의 주인공 혼블로워는 넬슨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 테메레르에서는 간간이 이름을 비치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사망이 오보로 나온다. 적 용이 돛에 불을 붙여 돛에 깔렸는데, 이때 훈장이 가슴에 눌어붙게 된다. 그리고 본토를 침공한 프랑스군과의 마지막 결전에서 함대를 이끌고 철수하는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중 배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테메레르에게 노에제 옹호하고 용들을 함부로 대한다면서 비판 받는다.

7.3. 게임[편집]


  • 토탈 워 시리즈에서는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 일단 대영제국 고유 유닛으로 HMS Victory가 나왔다가,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 본인 등장하고 있으며 능력치는 캐사기적이다 별이 하늘을 찌르는 능력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122문 1급함을 타고 있어서 전함 몇 개는 다 쌈싸먹는다. 그러다 죽으면 영국은 꿈이고 희망도 없다. 그나마 유럽 캠페인에는 테크를 끝까지 올릴 수 있기에 성능좋은 전함을 조합해서 넬슨의 함대를 격파할 수 있지만 이집트 캠페인에는 올릴 수 있는 테크가 제한되어 명함조차 못 내밀 소형 전함밖에 못뽑아 아예 건드리지도 못한다. 이 작품에서는 나폴레옹이 주인공이라 역사적 전투를 모두 프랑스군으로 플레이하는데 DLC로 특별히 워털루 전투를 영국군으로 플레이할 수 있게 해놨지만 넬슨이 지휘하는 나일 해전과 트라팔가르 해전은 끝내 영국 시점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다. 워털루 전투의 경우에는 적장이 무려 끝판왕인 나폴레옹에 보병 최강인 근위대까지 있고 구원병으로 오는 프로이센군은 역사와는 달리 도움이 안되기에 영국군 시점에서 어려운 플레이를 해야 하는 반면 해전들의 경우 적장이 넬슨과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허접하기에 너무 쉬운 전투가 되어 흥미를 끌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이다.



  • 문명 6에서 위대한 제독으로 등장한다. 효과는 항만 특수지구에 조선소 즉시 건설.

7.4. 만화[편집]



  • 한국에선 절판되어버린 비운의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에서도 트라팔가르 해전 파트에서 당연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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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가 5피트 4인치(164cm)라고 기록되어 있다.출처[2] 64문 3등급 전열함. 넬슨이 정식 함장 자격으로 처음 부임한 함선이다. 넬슨은 개인적으로 아가멤논 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3] 74문 3등급 전열함.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 당시 넬슨의 전함이었다.[4] 74문 3등급 전열함.[5] 74문 3등급 전열함. 아부키르 만 해전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함선이며 영국 함대의 기함이었다.[6] 74문 3등급 전열함. 영국-덴마크간에 벌어진 코펜하겐 해전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전함.[7] 80문 3등급 전열함.[8] "Who was Nelson?", rmg.co.uk[9] "Nelson: the man of prayer", 「The Church Times」, 2006.11.2.[10] 이 당시 스페인은 영국과 전쟁을 벌일 만큼 원수진 일이 없었지만 나폴레옹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코가 꿰인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영국 해군을 압도하기 위해 스페인 해군도 동원했다.[11] 다만 이것은 넬슨과 나폴레옹의 병과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넬슨은 어디까지나 해군이었고 나폴레옹은 뼛속까지 육군이어서 해전에서 어떤 작전전술을 펼쳐야 하는지 잘 몰랐다.[12] 배멀미는 오랜시간 배를 타도 적응되는 감각이 아니라서 그렇다. 실제로 해군복무를 하게되면 함상생활을 이,삼십년 가까이 했음에도 배멀미로 고통받는 부사관이나 장교를 흔히 볼 수 있다. 병들이야 함상생활을 6개월만 하면 육상근무로 전환해 전역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지만 함상생활에 생계가 달린 부사관이나 장교는 계속 참고 근무하는 수 밖엔없다.[13] John Jervis, 1st Earl of St.Vincent[14] 넬슨이 적함 장교로부터 칼을 건네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유럽 해전에서의 항복 의례였다. 해전뿐망 아니라 육전에서도 항복 의례가 지휘관의 칼을 넘겨주는것이었다.[15] 영국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15척, 프리깃 5척이었고 스페인 함대의 전력은 전열함 24척, 프리깃 7척이었다. 다만 스페인 함대는 뭉치지 않고 2개의 함대로 분산되어 있었다.[16] 이 당시 영국 함대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74문 3등급 전열함이다.[17] 80문 3급 전열함.[18] 112문 1급 전열함.[19] 오늘날 골절상은 수술을 통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그런 수술 개념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골절상을 당하면 치료할수 있는 방법이 부목으로 자연 치유가 되지 않는한 없어서 되지않을 경우 썩어가기에 무조건 그 부위를 절단하는 수밖에 없었고 마취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영어 관용구 중에 'Bite the bullet(입에 총알을 물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당시 골절로 인해 절단 수술을 할 때 마취 없이 총알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모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근데 문제는 저 시대 총탄은 통짜 납덩어리였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건강에 좋을리가 없었다. 그만큼 이 당시의 절단 수술은 위험하고 또 고통스러웠으며 심지어 수술 후 과다출혈이나 쇼크로 사망하는 사람도 비일비재했다. 넬슨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넬슨의 경우는 아니지만,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에 그런 수술이 잘 묘사되어 있다.[20] 그림에서 넬슨이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이는 전투 중 적탄을 이마에 맞아 피부가 벗겨지는 부상을 당해서 그렇다. 하지만 비교적 작은 부상이었으므로 붕대를 감고 곧바로 다시 전투를 지휘했다.[21]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전멸당하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었고 프랑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이집트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 탈출하는 굴욕을 당한다.[22] 사실 이 호칭은 넬슨의 전과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당시 영국 정부의 방침이 총사령관이 아닌 인물은 남작보다 높은 작위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하여서 넬슨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정부에 이렇다할 연줄도 없었다. 그러니 당시 상황에서는 영국 정부가 넬슨에게 가능한한 최고의 영예를 베풀어주기는 한 것.[23] 그러나 해전 이후 덴마크는 오히려 영국에 대한 반감만 커지다가 결국 나폴레옹의 편에 붙는 나비효과가 되어버렸다.[24] 참고로 안데르센이 쓴 홀거 단스케(동화)에도 언급되는 전투다. 문서 참조.[25] 첫 번째 무장 중립 동맹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을 견제하고자 결성되었다.[26] 전열함 12척, 프리깃 5척 규모였다.[27] 새로 건조한 것이 아니고 퇴역하다시피 한 함선을 전면 수리해서 재취역시킨 것이다. 다만 감안해야 하는 것이 빅토리 함은 원래부터 잘 뽑힌 축에 속했고, 당시에는 목조 범선 특성상 같은 설계로 만들어도 같은 성능이 나온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은 배는 수리를 해서라도 계속 쓰는 것을 선호했다.[28] 이 당시 영국 해군은 함대를 동원해 프랑스의 항구들을 모조리 봉쇄함으로써 프랑스 함대가 한 곳으로 뭉치는 것을 막았다. 아무리 프랑스 함대의 수준이 허접이라고 해도 일단 뭉치면 위협적인 전력이 되기 때문이다.[29] 또한 영국 해군은 규모면에서 매우 거대했으나 그만큼 지킬 영역이 많았고 함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함대에 봉쇄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럽에 함대 전력을 집중시킬 여력이 있었다.[30] 영국 함대의 봉쇄망은 가히 난공불락이라 할만했다. 저비스 제독은 1801년 영국 해군성에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군이 영국 본토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데요, 다만 걔네들이 바다를 통해서 오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라고 썼다.[31] 이 과정에서 스페인 해군의 전력까지 흡수해 트라팔가르 해전 즈음에는 전열함만 33척 규모인 대함대가 되었다.[32] 빌뇌브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카디즈(Cadiz) 항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했다.[33] 이는 빌뇌브가 단순히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면서 해군장교 및 숙련된 선원이 단두대 등으로 날아가 버려 프랑스 해군의 숙련도가 처참했기 때문이다. 빌뇌브 본인 자체가 아부키르 만 해전을 겪으면서 이런 현실을 뼈아프게 다시 한번 절감했으니 말이다.[34] 로버트 칼더(Robert Calder) 제독이 지휘한 피니스테라 곶 해전.[35] 영불 해협은 영국에서 가장 거대한 함대 중 하나인 해협 함대(Channel Fleet)가 틀어막고 있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전함의 호위 없이 병력을 실은 수송선만으로 상륙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36] 특히 빅토리는 르두터블의 돗대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수류탄을 뒤집어쓰던 판국이라 상갑판 전투는 확실히 영국군이 밀리고 있었다.[37] 넬슨은 빅토리 함에 탑승하기는 했으나 함대의 총 지휘관인 '제독'이고 빅토리 함 자체를 책임지는 함장은 하디였다.[38] 아무리 선원들이 거칠다고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독의 관까지 건들 정도로 영국 해군의 선원들이 막장이지는 않았다. 무슨 해적도 아니고... 심지어 그 해적들도 엄격한 규율과 질서로 유지되었다.#[39] 이 때문에 한때 영국에게 점령당했던 거문도에 영국 수병의 묘가 남아 있다.[40] 국가 영웅의 장례식이니 당연한 일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와 넬슨의 사망 소식을 모두 접한 당시 영국 국왕 윌리엄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크다고 말했다고 한다.[41] 이건 사실 넬슨만의 군사적 특징이라기보다는 이 당시 영국 해군의 방침이 그랬다.[42] 함대의 전열 한 쪽은 해안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무리해서 파고들다가는 함선이 모래톱에 좌초할 위험성이 있었다. 따라서 전열의 한 쪽 면은 아예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43] 전열함 1척이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다만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가 이 틈을 파고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44] 골리앗(HMS.Goliath) 호의 함장이었던 폴리(Thomas Foley)의 현장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넬슨이 탄 뱅가드(HMS.Vanguard) 호는 해안선 반대편에서 전투를 벌였다.[45] 사실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동안 미녀다. 넬슨 사후에도 인기가 끊이지 않아 여러 남자들이 얽혔다고 한다.[46] 비비안 리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해밀턴 부인'(1941)[47] 문제는 엠마 해밀턴이 낭비벽이 심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에 도벽까지 있는 문제 많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몇 번의 사기에 당하고 과소비로 중년기에는 말 그대로 알거지로 살다가 죽게 된다. 보통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넬슨의 유언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해밀턴 경의 유산이나 넬슨 개인이 준 재산도 꽤 많았다. 그저 엠마의 낭비벽이 엄청난 것이 문제였지... 영화 '레이디 해밀턴'에선 알코올 중독으로 거지가 된 엠마를 그려서 논란이 됐었다.[48] 제3대 브론테 공작때 서로 분리되어 현재 제4대 브릿포트 자작 알렉산더 넬슨 후드가 당주다.[49] 브론테 공작위는 넬슨의 형 윌리엄의 딸이, 넬슨 백작위는 누나인 수잔나의 아들 즉 조카가 승계받았고 성까지 넬슨으로 바꾸었다.[50] confide를 쓴 경우에는 "잉글랜드는 제군이 의무를 다할 것이라고 믿는다."가 되어 신뢰의 표현이 된다. expect는 "잉글랜드는 제군이 의무를 (당연히)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라는 뜻이 되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나라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강경한 뉘앙스가 있다. 말하자면 expect는 "잉글랜드 제군이랍시고 싸우는 너희들인데 당연히 의무를 다하겠지~?"하는 뉘앙스다(...)[51] 다만 넬슨처럼 당시 막 식민지 개척이 이뤄지는 시대에는 노예 무역이 잘못되었다는 상식 자체가 전무했어서 대부분의 서양인들, 심지어 지식인들마저 노예 무역을 방관했다. 넬슨과 동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위인, 정치인, 학자들이 같은 케이스이다.[52] 포어 탑세일이며 HMS 빅토리 함에 달린 돛 중 두 번째로 큰 돛이었다.[53] 그래서 초상화의 외모는 눈과 팔을 잃기 전에 그린 것이다. 특히 장애인이 되고 나서 넬슨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해져 이때부터는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54] 군인 출신까지 따진다면 1위를 차지한 윈스턴 처칠이 더 높지만, 처칠은 군인보다는 정치가로서 더 유명한 인물이고 엉터리 작전으로 갈리폴리 전투를 대차게 말아먹은 바 있어 군인으로서의 자질은 매우 형편없기 그지없었다.[55] 노골적인 영국 찬양과 전쟁 참가 독려로 고립주의 당시의 미국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56] 영화에서는 뉴비라서 대부분 원거리 촬영이 많았다.[57] 로렌스 올리비에도 주로 안대 대신 의안 연기를 펼친다.[58] 항상 저돌적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것, 그리고 어느 추운 날에 부하가 코트를 입으라고 했을 때 애국심 때문에 안 춥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