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트리다테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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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왕국 8대 군주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초대 군주

Μιθραδάτης Στ' Εὐπάτωρ |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
파일:mithridates.jpg
제호
한국어
미트리다테스 6세
그리스어
Mιθριδάτης
영어
Mithridates VI
존호
바실레프스
별명
에우파토르(Eupator: 고귀한 출생)
부모
미트리다테스 5세(아버지)
라오디케 6세(어머니)
형제자매
미트리다테스 크레스투스(남동생)
카파도키아의 라오디케(누나)
라오디케(여동생)
니사(여동생)
록사나(여동생)
스타티라(여동생)
아내
라오디케(첫째 아내)
모니메(둘째 아내)
키오스의 베레니케(셋째 아내)
폰토스의 스트라토니케(넷째 아내)
히프시크라티아(다섯번째 아내)
대 아도보기오나(정부)
자녀
콜키스의 미트리다테스(장남)
아르카티아스(차남)
마차레스(삼남)
파르나케스 2세(사남)
시파리스(오남)
폰토스의 클레오파트라(장녀)
드리페티나(차녀)
아테나이스(삼녀)
미트리다테스 2세(사생아)
소 아도보기오나(사생아)
아리아라테스 9세(사생아)
오르사바리스(사생아)
생몰 년도
기원전 135년 ~ 기원전 63년
재위 기간
기원전 120년 ~ 기원전 63년




1. 개요[편집]




폰토스 왕국 제8대 국왕,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초대 국왕.[1]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해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젊은 나이에 즉위해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소아시아 일대에서 세력이 약소했던 왕국을 일약 최강국으로 육성시켰다. 그러고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뒤를 잇겠다는 의지로 로마 공화정과 수십 년에 걸친 3번의 전쟁을 감행했으나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에게 연전연패한 끝에 파멸했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기원전 132년 폰토스 왕국의 수도인 시노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폰토스 제7대 국왕 미트리다테스 5세이고, 어머니 라오디케 6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4세의 딸이었다. 남동생으로 미트리다테스 크레스투스가 있었고, 여자 형제로 카파도키아의 라오디케, 라오디케, 니사, 록사나, 스타티라가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국왕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그런데 미트리다테스가 15살이 될 무렵인 기원전 120년,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가 호화로운 연회에 참석했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왕국을 아내 라오디케 6세와 미트리다테스, 그리고 미트리다테스 크레스투스의 합동 통치에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와 남동생 모두 나이가 어렸기에 그들의 어머니 라오디케가 당분간 섭정으로 모든 권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에 미트리다테스 5세가 로마로부터 아리스토니코스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준 대가로 받아낸 프리기아가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다.

라오디케 6세는 그보다 크레스투스를 아꼈다고 한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궁정을 탈출하여 폰토스 동부 지역과 소아르메니아 일대의 산맥에 숨어서 체력을 향상시키고 독극물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언어를 배웠는데, 한 기록에는 50개에 달하는 언어를 익혔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116년에서 113년 사이의 시기에 은신처에서 나와 폰투스로 귀환해 백성들에게 국왕으로서 환영받았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어머니 라오디케와 남동생을 권좌에서 축출해 감옥에 가두고 폰투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라오디케 6세는 옥사했고, 크레스투스 역시 얼마 안가서 처형되었다. 이후 여동생 라오디케와 결혼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승계를 보장함으로써, 혈통의 순결을 지키고자 했다.

2.2. 재위 초기[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PonticKingdom.png

미트리다테스 6세가 통치를 막 시작할 당시, 폰토스 왕국은 소아시아 북쪽 연안의 약소국에 불과했다. 그는 이 나라를 소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육성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정복전쟁을 단행했다. 우선, 흑해의 동쪽 지역에 위치한 콜키스와 여러 독립 왕국들을 정복했고 소아르메니아를 공략했다. 기원전 110년 타우릭 케르소네소스, 크리미아, 보스포로스 왕국으로부터 스키타이인들의 침략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기원전 109년 보스포로스 욍국 내에서 사우마코스가 반란을 일으켜 파이리사데스 5세를 죽이고 폰토스 왕국을 적대했지만 2년 만에 디오판토스 장군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디오판토스가 이끄는 6천 병력을 먼저 보내 스키타이인을 무찌르게 한 뒤, 2명의 장군에게 대규모 병력을 맡겨 크림 반도로 건너가 스키타이 왕 팔라쿠스를 상대하게 했다.

스키타이족은 여러 차례 크림 반도를 침공했지만 미르리다테스는 그들을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결국 스키타이족은 미트리다테스의 패권을 인정했다. 여기에 흑해 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올비아와 아폴로니아로부터 트라키아인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트라키아인을 격파한 뒤, 그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코카서스의 산악 해안과 비티니아 해안, 헤라클레이아 폰타케를 제외한 흑해 해안 전역이 그의 통치에 귀속되었다. 이리하여 흑해 무역거래에서 얻어낸 막강한 부를 손아귀에 확보하여 군사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는 로마 공화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로 눈길을 돌렸다. 기원전 104년,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3세와 협의하여 파플라고니아를 분할했다. 로마는 사절단을 보내 파플라고니아 분할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의 정당섬을 설파해 사절단을 빈손으로 보냈다. 이후 갈라티아를 압박하여 일부 영토를 확보했다.

한편, 카파도키아 왕국의 통치자 아리아라테스 6세가 기원전 116년경 피살되었는데, 이 사건의 배후에 그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실하지 않다. 미트리다테스의 누나이자 아리아라테스 6세의 아내인 카파도키아의 라오디케는 두 아들이 아직 어려서 통치할 수 없기에 기원전 102년까지 1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던 기원전 102년, 비티니아 왕국 군주 니코메데스 3세가 카파도키아를 침공하여 단숨에 굴복시킨 뒤 라오디케와 결혼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가 대군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비티니아군을 몰아낸 뒤, 누나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아리아라테스 7세 필로메토르를 카파도키아 왕위에 앉혔다. 하지만 그는 곧 조카를 모살하고 자신의 사생아인 아리아라테스 9세를 카파도키아 왕으로 옹립했다.

이 일련의 일로 비티니아와 폰토스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기원전 100년 양측은 전쟁을 단행했다. 양측은 로마의 지원을 받고자 로마에 잇따라 사절을 보내 원로원 의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쳤다. 그러던 기원전 99년 또는 기원전 98년에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폰토스에 찾아왔다. 마리우스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로마보다 더 강력하거나 로마에게 복종해야만 안전할 거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미트리다테스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한편 카파도키아 주민들은 미트리다테스의 잔혹한 통치에 반감을 품고 아리아라테스 7세의 동생 아리아라테스 8세를 옹립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는 기원전 96년 카파도키아를 전격 침공하여 아리아라테스 8세를 몰아냈다.

그러자 니코메데스 3세는 자신의 아들이 아리아라테스 6세의 셋째 아들이라 주장하며 카파도키아 왕위를 쟁취하려 들었다. 니코메데스 3세는 카파도키아의 라오디케와 자신의 아들을 로마로 보내 원로원에게 이 '진실'을 밝혔다. 그러자 미트리다테스는 환관 고르디오스를 로마로 보내 아리아라테스 9세가 아리아라테스 5세의 아들이라고 우겼다. 원로원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이해하지 못해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에게 연전연패한 니코메데스 3세는 니코메디아에서 포위당하자 로마 공화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기원전 95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등 사절단을 파견해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니코메디아의 포위를 풀고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아직은 로마 공화국과 싸울 생각이 없던 그는 순순히 따랐고, 사절단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카파도키아 왕국의 새 국왕으로 세우도록 했다. 그러던 기원전 91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지 않는 로마에 불만을 품고 대대적으로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로마는 이 전쟁을 치르느라 대외 상황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소아시아로의 확장 정책을 재개하기로 했다. 마침 비티니아 왕국의 왕 니코메데스 3세가 죽은 뒤 아들 니코메데스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통치 능력이 부족하고 성격이 우유부단해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곧장 비티니아를 침공해 기원전 91년에서 89년 사이에 니코메데스를 몰아내고 니코메데스의 이복형제인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국왕 아르오바르자스 1세를 폐위시키고 카피도키아를 병합하려 했다. 이에 로마는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를 폰토스로 보내 두 왕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하게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처음에 로마의 요청에 복종하고 동맹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병력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나중에 니코메데스 4세에게 보상하라는 아퀼리우스의 요청에 "로마의 요청으로 프리기아를 공략했으니, 로마 공화국은 내게 빚을 졌다"라며 거부했다.

폰토스 왕의 태도에 화가 난 아퀼리우스는 기원전 89년 니코메데스 4세를 부추겨 폰토스를 침공해 아마스트리스를 약탈하게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펠로피다스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 항의했다. 그는 프리기아와 카파도키아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데 니코메데스 3세가 제멋대로 빼앗았으며, 이제는 니코메데스 4세가 아마스트리스를 침공하여 약탈한 건 명백한 불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로마가 일방적으로 비티니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며,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니코메데스 4세로부터 미트리다테스가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에게 비티니아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요구가 거부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마침내 로마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막이 올랐다.


2.3.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편집]


파일:비티니아 터키 1.png
기원전 89년 아나톨리아 반도

기원전 89년, 미트리다테스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아르켈라오스를 대동하여 프리기아로 진격했다. 니코메데스 4세가 이끄는 비티니아군은 이에 맞서 할리스 강의 지류인 암니아스 강변으로 진군하여 폰토스군과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는 비록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낫전차를 동원하여 적 보병대를 무차별 살육하자 비티니아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한 덕분에 대승을 거두었다. 니코메데스 4세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로마군과 합세한 뒤, 프로토파키움 요새로 쳐들어온 폰토스군과 재차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 역시 폰토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둠을 틈타 로마군 진영을 이탈하여 페르가몬 왕국으로 도주했고, 진영에 남아있던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로마 장수들은 니코메데스 4세와 함께 프리기아의 '사자의 머리'로 불리는 요새로 피신해 프리기아인들을 징집하여 훈련시키려 했지만, 프리기아인들이 비협조로 나오자 포기했다. 카시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파메아로 갔고, 니코메데스 4세는 페르가몬으로 갔으며, 마니우스는 미틸레네로 재차 피신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여세를 몰아 군대를 소아시아 전역으로 파견하여 순식간에 공략했고, 흑해 어귀를 지키고 있던 로마 함대 지휘관들의 항복을 받아낸 덕분에 에게 해의 패권도 확보했다.

기원전 88년 미틸레네에 숨어있던 마니우스를 체포한 미트리다테스는 그를 전쟁의 주범으로 비난하고 당나귀에 묶어서 여러 곳을 돌며 대중 앞에서 미친 척 하라고 강요했다. 이후 금을 녹여서 그의 목구멍에 붓는 방식으로 죽였다. 아시아 대부분의 도시들은 폰토스에게 투항하고 미트리다테스를 해방자로 떠받들었다. 그들은 막대한 속주세를 강요하는 로마의 통치에 지쳤고,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미트리다테스를 추앙했다. 다만 키클라데스, 마그네시아, 카리아, 파플라고니아 등 일부 도시는 여전히 저항했으며, 로도스는 로마와의 동맹을 굳건히 지켜 미트리다테스가 파견한 해군을 격파했다.

이렇듯 기세를 드높이던 미트리다테스는 그리스 철학자 스케프시스의 메트로도로스로부터 로마인들을 학살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메트로도로스는 그렇게 한다면 로마의 소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고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이 폰토스에 전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설명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충고를 따라 여러 아나톨리아 도시에 남아있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의 학살을 조직적으로 감행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로 인해 8만 명에 달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를 13세기 프랑스 이주민들이 학살된 시칠리아의 만종에 빗대어 (소)아시아의 만종(Asiatic Vespers)이라 지칭한다. 생존자들은 로도스로 피신했는데, 그 중엔 카시우스도 있었다.

파일:Mithridates_VI_of_Pontus-56aaa83c5f9b58b7d008d2ac.jpg
알렉산드로스 3세의 초상을 본뜬 미트리다테스 6세의 주화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키루스 대왕다리우스 1세의 후예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고 자칭했다. 그는 로마의 압제로 고통받는 그리스인들을 해방시켜주겠다고 선포하고, 대왕의 모습을 본딴 자신의 초상화가 새겨진 동전을 대대적으로 주조해 그리스와 소아시아 전역에 배포했다. 그는 자신이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 세계를 지켜낼 위대한 해방자라고 칭하며 스스로에게 '메가스(Megas, 대왕)'라는 칭호를 붙이게 했다. 이에 로마의 위협을 받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이 호응하면서, 그는 전쟁 초반에 로마를 상대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뒤이어 기원전 88/87년 겨울 아르켈라오스에게 대규모 함대를 맡겨 아테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델로스를 침공하게 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주민 2만 명을 학살하여 델로스를 제압한 뒤 아테네에게 돌려줬다. 아테네 지도자 아리스티온은 즉각 폰토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한편 미트리다테스의 부하 메트로파네스는 폰토스에 호응하길 거부한 데메트리아스, 마그네시아, 에우보이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한편, 로마는 동맹시 전쟁을 마무리했지만 후속 조치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이탈리아 내의 모든 라틴 시민권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수여하기로 했는데,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투표권을 어떻게 줄 지가 문제였다. 원로원은 새로운 로마 시민들에게 8개의 부족을 할당하려고 했는데, 이는 기존의 로마인들이 35개 부족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명백히 불평등한 대우였다. 호민관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새 로마 시민들을 기존의 35개 부족에 할당하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심한 반발이 일었고, 루푸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접근해 자신의 법안이 통과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마리우스는 루푸스를 도와주는 대가로 미트리다테스를 응징하는 원정군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루푸스는 이에 동의했고, 마리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퇴역병들을 로마 시내로 불러들여 루푸스의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원로원은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고 휴일을 선포하고 모든 시내의 상업을 중단했다. 이에 마리우스와 루푸스의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망쳤다. 마리우스는 그를 숨겨주는 대가로 휴일 선포를 취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루푸스는 집회를 연 뒤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를 35개 부족에 배당하는 법안을 가결 시키고 놀라 시에 주둔하고 있던 원정군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준다는 법안을 가결시켰다. 그러자 본래 원정을 이끌기로 되어 있었던 술라는 몹시 분노해 놀라에 주둔한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마리우스는 노예와 검투사를 모아 항전했으나 패배하고 북아프리카로 망명했고, 술라는 로마에 입성한 뒤 원로원을 설득해 마리우스와 루푸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게 하고 루푸스가 통과시킨 모든 법안을 철회시켰다. 이후 새 집정관에 선출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자신의 법안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한 뒤 미트리다테스를 상대하러 발칸 반도로 출진했다.

술라는 에피로스에 상륙한 뒤 아테네로 진군했다. 그는 보이오티아를 통해 아티카로 진군하면서 테베 등 대다수 도시 국가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아테네는 로마군에게 포위된 뒤 기원전 87년/86년 겨울 내내 공성전을 치르면서도 미트리다테스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술라는 아테네가 순순히 복종하지 않자 맹공을 퍼부은 끝에 피레우스 항구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후 식량 공급을 철저히 차단해 수비대가 굶주리게 만든 끝에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리스티온은 아크로폴리스로 도망쳤다가 곧 체포된 뒤 아테나 신전 제단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술라는 아테네에 무거운 벌금을 매기는 선에서 마무리 했다.

기원전 86년, 술라의 로마군은 북상하여 아르켈라오스가 이끄는 폰토스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에서 맞붙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당시 로마군의 규모는 4만 명인 반면에 폰토스군은 1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폰토스 지휘관 아르켈라오스는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카이로네이아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술라는 적군이 돌투성이었던 언덕 아래에 진지를 구축한 걸 보고, 적의 장기인 팔랑크스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채고 곧바로 전투에 응했다. 폰토스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로마군의 좌익을 포위하려 했지만, 술라가 직접 예비대를 이끌고 지원하여 막아냈다. 뒤이어 중앙과 우익에서 로마군이 압도하면서, 폰토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아피아노스는 이 전투에서 폰토스군의 사상자는 11만 명에 달한 반면 로마군의 전사자는 12명밖에 안 됐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계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치른 지 며칠 후, 맹세를 어기고 술라의 정권을 무너뜨린 킨나가 파견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휘하 로마군이 술라를 체포하러 접근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유혹했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결국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길 포기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고자 이동했고, 술라는 이들을 쫓는 대신 아르켈라오스와 상대하러 출진했다.

이 당시 아르켈라오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부관 도릴레이우스가 소아시아에서 데려온 8만 병력과 합세하여 군대를 불린 뒤 보이오티아로 진군하여 그곳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내고 있었다. 술라는 전투를 벌일 장소를 물색한 끝에 오르코메노스의 지형이 소규모 병력으로 대군을 상대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여기서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사상자는 100명에 불과했고 폰토스군의 사상자는 1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현대 학계는 이 역시 과장된 기록으로 간주하지만 로마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건 확실하다고 본다.

이후 술라는 에게 해에서 암약하는 폰토스 해군을 무찌르기 위해 새 함대를 조성하기로 하고, 부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함대를 모집하라고 명령했다. 루쿨루스는 로마의 동맹국들을 잇따라 방문해 전함을 받아냈다. 키레네에서는 7년간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루쿨루스는 이곳에 방문해 내전 당사자들을 중재하여 평화를 맺게 하고 원조를 받아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다스리던 이집트에도 찾아가 선박 원조를 받아내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와 폰토스 중 한쪽을 택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기에 무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함대를 편성하는 데 성공한 루쿨루스는 로도스 인근 해역에서 폰토스 해군과 맞붙어 격파한 뒤 크니도스와 코스 섬을 확보한 후 키오스 섬에서 미트리다테스 군대를 재차 물리치고 사모스를 공략했다. 뒤이어 렉턴 곶에서 다시 한번 승리를 거뒀으며, 테네도스에 집결한 네오프톨레모스 장군 휘하 미트리다테스 함대와 대규모 해전(테네도스 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폰토스 해군은 소멸되었고, 로마군은 소아시아로 넘어갈 발판을 마련했다.

기원전 85년, 발칸 반도의 통치 체계를 재확립한 술라는 그리스 섬들을 공략하는 데 전념했다. 한편 플라쿠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마케도니아에서 헬레스폰트를 건너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플라쿠스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매우 엄격한 지도자였던 플라쿠스가 폰투스군을 맹추격하길 원하였고 그의 부하였던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폰투스군이 떠나고 없는 도시들을 점령한 뒤 약탈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플라쿠스는 핌브리아를 해임하고 로마로 귀국할 것을 명령했지만, 핌브리아는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플라쿠스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병사들 모두 핌브리아를 따라 약탈을 하기를 원했기에 플라쿠스를 배신했다. 플라쿠스는 달아나다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핌브리아는 미트리다테스의 잔존 병력을 격파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격하여 페르가몬 시에서 포위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배를 타고 피타네 시로 달아났고, 이를 추격한 핌브리아군은 피타네를 포위했으나 미트리다테스 6세의 도주를 저지할 해군이 없어서 루쿨루스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몰래 강화를 맺기로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피타네에서 배를 타고 빠져나온 뒤 기원전 85년 하반기에 다르다누스에서 술라와 만나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3,000 탈렌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70여 척의 함선을 술라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대신, 술라는 포로가 된 폰토스 병사들을 전원 석방하고 그가 폰토스 왕위를 계속 맡는 걸 용인했다.

그렇게 해서 폰토스와의 전쟁을 종식한 술라는 핌브리아를 상대하러 이동했다. 기원전 84년, 핌브리아는 술라의 군대와 대치하여 회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집정관 플라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해 두려워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미 충분한 전리품을 약탈하여 욕심을 채운 상태라 핌브리아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술라에게 붙기로 하였고 병사들에게 배신당한 핌브리아는 자결했다. 술라는 새로 붙은 병사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기존 병사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터키 지역의 점령지에서 마음껏 약탈하도록 허용했다. 그 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에게 핌브리아의 2개 군단을 맡기고 키트리다테스를 감시하게 한 뒤, 자신은 여러 신전과 도시들에게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은 후,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내전을 벌인 끝에 정권을 다시 장악하고 정적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2.4.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편집]


미트리다테스는 지난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쇠약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한편, 용병대를 대거 고용해 지난 전쟁으로 잃은 병력을 복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그는 팔랑크스가 로마 군단병을 상대로 연전연패한 걸 교훈으로 삼아 팔랑크스를 버리고 기병과 궁병 위주로 군대 체계를 개편했다. 보스포러스 지역과 콜키스에서 과중한 세금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장남 미트리다테스를 이 지역의 섭정으로 삼아서 이를 진압하게 했다. 장남 미트리다테스는 반란을 모조리 제압하고 질서를 잡았지만, 너무 유능한 나머지 주민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으면서 아버지의 질투를 사고 말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장남이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주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그는 아들을 시노페로 소환한 뒤 황금 족쇄에 묶은 채 감옥에 넣고 나중에 처형했다. 그 후 모페레네스[2]가 콜키스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그는 폰토스군 총사령관으로서 술라에 맞섰으나 연전연패한 전적이 있던 아르켈라오스가 미트리다테스 필로파토르와 손잡고 역모를 도모했다고 의심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폰토스에서 달아나 무레나에게 귀순한 뒤 미트리다테스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징집했으니 먼저 침공하라고 설득했다. 무레나는 핌브리아 장병들의 군심을 사고 공적을 세울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본국에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83년, 그는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의 국경 인근의 마을인 코마나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당시 콜키스인과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간 상황이라서 코마나를 구원할 병력을 보내기 힘들었다. 이에 그는 평화 협정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무레나는 술라가 그리스로 돌아가기 전에 평화 협정을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조약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약탈을 벌인 후 카파도키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미트리다테스는 사절단을 로마로 보내 평화 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82년에 무레나는 미트레다테스에 속한 400개의 마을을 점거했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사절단이 오기를 기다릴 뿐 그와 전투를 벌이려 하지 않았다. 무레나는 막대한 제물을 챙기고 카파도키아로 부사히 돌아갔다.

얼마 후, 술라가 보낸 사절이 무레나를 찾아와 조약이 여전히 유효하니 폰토스 왕국을 상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술라는 무레나에게 폰토스를 좀더 괴롭히라고 종용하는 밀서를 보냈다고 한다. 무레나는 사절 앞에서 본국의 지령을 따르겠다고 밝혔지만, 사절이 돌아가자마자 전쟁을 재개했다. 키트리다테스는 로마가 전쟁을 선언했다고 믿고 즉각 대응했다. 우선 카파도키아 출신의 귀족으로 미트리다테스에 의해 카파도키아 왕으로 옹립되었다가 술라에 의해 축출된 뒤 미트리다테스의 부관을 맡고 있던 고르디오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무레나를 견제하게 했다. 고르디오스는 할라스 강가에서 로마군을 목격하고 고지대에 진영을 설치한 뒤 미트리다테스가 올때까지 기다렸다.

무레나는 소규모의 적이 고지대에 진을 치고 있는 걸 확인했지만, 지난 전쟁 때 연전연패한 폰토스군을 우습게 여기고 강 건너편 평야지대에 진영을 세웠다. 얼마 후 현장에 도착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적이 별다른 경계없이 진영에서 쉬고 있는 걸 보고 기병대를 대거 파견해 적진으로 돌격시키고 궁병대에게 그 뒤를 따르며 기병대를 지원하게 했다. 로마군은 지난 전쟁과는 달리 팔랑크스를 대동하지 않고 기병과 궁병 위주로 몰려오는 적군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무레나는 급히 일부 보병대로 기병대를 저지하게 해 시간을 끌게 하는 한편, 나머지 병사들에게 언덕 위에서 전투 대형을 갖추도록 했다.

그러나 폰토스 기병대는 앞을 가로막은 로마 보병대를 무참히 짓밟고 언덕 위의 적을 향해 돌격했다. 미처 전열을 갖출 틈이 없었던 로마군은 순식간에 압도되었고, 무레나는 몇몇 측근만 대동해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의 편을 들었던 소아시아의 많은 도시 국가들이 미트리다테스에게 귀순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여세를 몰아 카파도키아로 진군해 모든 로마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또 다시 전쟁을 벌이는 무레나를 비난하고 가비니우스를 파견해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또한 가비니우스는 미트리다테스와 카파도키아의 아리오바자네스 1세를 화해시키기 위해 협상을 주관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4살짜리 딸과 아리오바자네스를 약혼시켰고 아리오바자네스 1세의 카파도키아에서의 영유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무레나는 로마로 소환되어 정계를 강제로 꺼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난 전쟁의 패배로 손상되었던 명성을 회복했다.


2.5.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편집]


기원전 83~80년, 미트리다테스는 흑해 지역에서 발발한 반란을 토벌하고 아들 마카레스를 콜키스로 파견해 여러 그리스 식민도시를 공략하게 했다. 그러는 한편 로마에 사절을 보내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카피도키아 영토 일부분을 넘기는 걸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로마는 국내 문제로 바빴기 때문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힘으로 카파도키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장녀 클레오파트라를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와 결혼시켜 아르메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아르메니아 왕이 카파도키아를 침략하게 해, 폰토스는 이 일과 무관한 척했다. 아르메니아 왕은 수많은 전리품과 30만에 달하는 주민을 포로로 삼아 아르메니아로 데려가 자신이 수도로 정한 티그라노케르타에 거주하게 했다.

그 후 몇년간 군대를 대규모로 양성하는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우호 조약을 체결했고, 히스파니아에서 활동 중인 로마 반란자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동맹을 맺어 돈과 함대를 보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미트리다테스에게 마르쿠스 마리우스 등 군사 고문을 보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세르토리우스는 아시아, 비티니아, 카파도키아 일대를 미트리다테스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그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해적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해 그들이 지중해 일대에서 날뛰어 로마를 괴롭게 했다.

기원전 74년, 비티니아 군주 니코메데스 4세가 사망했다. 그는 자녀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비티니아는 이에 따라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자 미트리다테스는 로마가 유언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제우스포세이돈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백마가 모는 전차를 바다에 빠뜨렸다. 이후 장병들 앞에서 로마인들이 이탈리아와 로마 자체를 노예로 만들 정도로 권력과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을 부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조약을 준수하지 않고 여전히 기만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로마가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를 상대로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 있고 바다에서는 해적들의 침략을 받고 있으며, 고귀한 시민 일부가 자신과 동맹을 맺고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로마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뒤, 탁실레스와 헤르모크라테스와 함께 비티니아로 쳐들어갔다.

비티니아로 함대를 이끌고 온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적의 압도적인 군세에 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휘하 병력을 이끌고 칼케돈으로 퇴각했다. 그리하여 비티니아를 손쉽게 공략한 미트리다테스는 뒤이어 칼케돈으로 진군하여 코타의 부관 누두스의 로마군을 격파한 뒤 칼케돈을 포위했다. 한편 그의 함대는 칼케돈 항구로 항해하여 도시를 지키던 로마 해군을 격파하고 항구를 장악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원로원 계급의 루키우스 만리우스를 포함한 3,000명의 로마군이 전사했고 함선 64척이 노획되거나 침몰했으며, 폰토스군의 사상자는 2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미트리다테스는 여세를 몰아 니케아, 람사코스, 니코메디아, 아파메이아를 공략하고 여전히 로마를 따르는 키지코스로 진격해 포위했다. 로마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전직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킬리키아 총독으로 선임하여 폰토스를 제압하게 했다. 그는 로마에서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의 지휘를 받던 2개 군단 잔여 병력과 다른 2개 군단을 연합하여 총 3만 보병과 1,600 기병을 편성하여 아시아로 이동했다. 얼마 후, 탈영병으로부터 키지코스 인근에 진을 치고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폰토스군이 30만 명에 달하며, 육로와 해로 모두에서 보급품을 전달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사들은 코타는 내버려두고 별다른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폰토스로 진격해 약탈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루쿨루스는 이를 거부하고 칼케돈으로 진군했다. 루쿨루스의 군대는 미트리다테스와 협력하고 있던 로마의 반란자 마르쿠스 마리우스와 니케아 인근의 오트로이아에서 맞붙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군대 사이에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물체가 떨어졌다. 모양은 피토스(포도주 항아리)와 비슷했고, 색은 녹은 은과 비슷했다고 한다. 양군은 이에 놀라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물러섰다. 이후 마리우스는 보급품이 며칠 밖에 남지 않아서 철수했고, 루쿨루스는 칼케돈을 구원한 뒤 키지코스를 포위한 미트리다테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미트리다테스와 가깝고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언덕에 숙영지를 세워서 적군이 키지코스 반도에 갇히게 만들었다. 계다가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곧 해상에서의 보급도 끊어질 예정이었기에, 대규모 병력이라 막대한 보급품을 마련해야 했던 미트리다테스는 곧 곤경에 처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포위 공격 중에 병에 걸리거나 부상당한 자들을 후방으로 보내기로 하고 기병대에게 후송을 맡겼는데, 루쿨루스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10개 코호트를 이끌고 린다코스 강변에 매복했다가 그들이 강을 건너는 도중에 습격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15,000명의 병사와 6,000마리의 말이 로마군에게 포획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트리다테스의 부관 에우마코스가 이끄는 폰토스 별동대는 프리기아를 침공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로마 시민을 학살하고 피시디아, 이사우리아, 킬리키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갈라티아의 분봉왕 중 한 명이었던 데이오타로스가 공격하여 에우마코스에게 타격을 입혔다.

기원전 73년 초, 미트리다테스가 이끄는 폰토스 진영에 비축되었던 보급품이 고갈되었고 육상에 이어 해상에서의 보급마저 끊겼다. 그 결과 굶주림이 창궐했고 일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일부 병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신을 뜯어먹기까지 했으며, 나머지는 나물을 캐먹었다고 한다. 여기에 역병까지 창궐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급락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키지코스를 계속 공격했지만, 키지코스 주민들이 공성 무기를 불태우고 적진을 빈번하게 습격하자, 결국 철수를 결심했다. 그는 우선 로마군을 피해 람사코스에서 농성하고 있는 주민들을 돕기 위해 몇 척의 함선을 파견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마리우스, 파플라고니아의 알렉산드로스, 그리고 내시 디오니시오스의 지휘 아래 10,000명의 정예병과 50척의 배를 에게 해로 보내고, 나머지 육군은 람사코스로 진군하게 했으며, 자신은 함대와 함께 파리오스로 향하기로 했다.

폰토스군은 밤에 행군을 개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이세포스 강과 그라니코스 강을 건너면서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적이 달아난다는 걸 알게 된 루쿨루스가 끈질기게 추격해 20,000명을 사살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다수의 병력을 수습하여 함대에 싣고 니코메디아로 떠났지만,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본인도 물에 빠져 죽을 뻔했지만 그와 동맹을 맺은 해적들이 구조 작업을 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후 루쿨루스는 에게 해로 이동하는 적 함대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테네도스 섬과 아카이아 본토 항구 사이에 있는 13척의 배를 나포했다. 폰토스 주력 함대는 렘노스와 스키로스 사이에 있는 네아이 섬이라는 접근하기 어려운 것에 배를 정박시켰지만, 루쿨루스는 육로를 통해 네아이 섬을 가로질러 적의 후방을 습격했다. 그리하여 적선 32척을 침몰시키거나 노획했고, 디오니시오스는 자살했고 파플라고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생포되었다. 마르쿠스 마리우스는 동굴로 숨었다가 체포된 후 루쿨루스에 의해 처단되었다.

기원전 72년, 루쿨루스는 부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에게 해군을 맡기고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또한 코타에게는 4,000명의 폰토스군이 주둔한 헤라클레이아 폰티카 공략을 맡겼다. 미트리다테스에게 복속되었던 소아시아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로마에게 도로 귀순했지만, 테미스키라 주민들만은 미트리다테스를 지지했고, 강력한 요새인 아미소스에서 버텼다. 루쿨루스는 아미소스를 포위하여 맹공을 퍼부었지만, 주민들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3] 그러는 사이, 미트리다테스가 동원한 4만 보병과 4천 기병이 아미소스 인근의 카비라에 도착했다. 루쿨루스는 이들을 먼저 상대하기로 하고, 산길을 통해 카비라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어진 기병전에서 로마군이 패했고,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던 폼포니우스가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루쿨루스는 일단 군대를 산으로 후퇴시켰고, 미트리다테스가 평원에 군대를 배치하고 루쿨루스에게 회전을 벌이자고 요구하는 걸 들어주지 않았다.

루쿨루스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폰토스 기병대 때문에 평야로 내려가길 주저했다. 그러던 중 아르테미도로스라는 사냥꾼이 찾아왔다. 그 지역의 모든 산길을 알고 있던 그는 평원과 폰토스 기병을 피하면서 폰토스 진영의 바로 위쪽에 있는 요새로 들어가는 진로로 안내했고, 루쿨루스는 거기에 진영을 세웠다. 미트리다테스는 이에 대항하여 로마군의 보급을 차단하고자 기병대를 수시로 파견했다. 루쿨루스는 보급품을 얻기 위해 중무장한 호송대를 보내기로 하고, 소르나티우스 지휘 아래 10개 이상의 코호트로 하여금 보급마차를 지키게 했다. 폰토스 기병대가 이들을 공격했지만, 로마 군단병들은 그들을 격퇴했다. 이후 마르쿠스 파비우스 하드리아누스가 이끄는 또다른 보급 호송대가 이동하던 중 4,000명의 폰토스 기병들의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현장의 좁은 계곡이 적 기병의 전투력을 제한한다는 걸 눈치채고 반격을 가해 적 기병 2,000명을 사살했다.

그날 밤 목숨을 건지고 돌아온 기병들로부터 참패를 보고받은 미트리다테스는 퇴각하기로 마음먹고 심복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짐을 비밀리에 꾸리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도중에 누설되었고, 병사들은 몹시 동요하여 지휘관의 명령도 받지 않은 채 막사에서 뛰쳐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트리다테스가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루쿨루스는 적이 혼란에 빠진 걸 보고 대부분의 기병을 보내 도망치는 적을 살육하게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2,000명의 기병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에게 망명했다. 이때 그는 내시 바키데스를 왕궁으로 보내 누이, 아내, 첩들을 죽이게 하여 적에게 유린되지 않도록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의 누이인 니사 만이 죽지 않고 루쿨루스에게 사로잡혔다고 한다.

미트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로 달아나자, 폰토스 수비대 지휘관들은 루쿨루스에게 대거 항복했고, 아미소스 역시 결국 함락되어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루쿨루스는 뒤이어 폰토스의 항구도시인 시노페를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해 함락시켰지만, 이번에는 주민들이 원해서 저항한 게 아니라 미트리다테스가 주둔시킨 폰토스군의 강요를 받은 점을 고려하여 약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후 칼데아와 티바레니를 공략하고 소아르메니아를 공략했다. 기원전 70년,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를 넘기라고 요구하고자 처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보냈다. 그러나 티그라네스 2세는 루쿨루스가 서신에서 자신을 왕중왕이 아니라 '왕'이라고만 칭한 것에 분개했고, 미트리다테스를 넘기길 거부했다. 이에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69년, 루쿨루스는 카파도키아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2,000~3,000명의 기병대를 귀족 미트로바르자네스에게 맡겨 로마군을 견제하게 했다. 미트로바르자네스는 로마군이 숙영지를 설치하고 있을 때 돌격했지만, 3,500명의 강력한 분견대가 이들을 격파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패배 소식을 접하자 만카이오스에게 티그라노케르타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타우루스 산맥에서 전투 부대를 모집하기 위해 떠났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루쿨루스는 2개 군단과 500명의 기병만 이끌었다고 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16,000명의 군단병과 3,000명의 기병, 투석병, 궁수를 갖췄다고 기술했으며, 에우트로피우스는 로마군의 병력이 18,000명이었다고 기술했다. 한편 아르메니아 전역에서 동원된 티그라네스 2세의 군대 규모는 로마군을 압도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25만 보병과 5만 기병이 그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원로원에 보낸 편지를 인용해, 2만 투석병과 궁수, 55,000명의 기병, 15만 보병이 티그라네스 2세의 지휘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더 나아가 60만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와 10만 보병이 루쿨루스를 상대했다고 주장했으며, 헤라클레아의 멤논은 8만 명의 보병과 기병이 티그라네스의 지휘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계는 이러한 수치가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고 보지만, 로마군에 비해 압도적인 수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티그라네스 2세에게 루쿨루스를 먼저 공격하지 말고 보급로를 차단해 굶주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티그라네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가 자신이 로마군을 격멸하여 명성을 떨치는 걸 시기해 그러는 거라 여기고, 전투대형을 갖춘 로마군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절로 왔다기엔 너무 많고, 싸우러 왔다기엔 너무 적다."


그러나 뒤이은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수적으로 로마군의 몇 배에 달하는 아르메니아군은 로마군에게 대패했고, 티그라노케르타는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미트리다테스는 티그라네스 2세와 함께 아르메니아 북부로 달아난 뒤 새로운 군대를 모으면서 파르티아프라아테스 3세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구원군을 보내준다면 파르티아로부터 탈취했던 영토를 되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루쿨루스는 포로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파르티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동맹을 맺으면 티그라네스 2세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라아테스 3세는 양측의 제안에 딱부러진 대답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루쿨루스는 소르나티우스 등 폰토스에 남아있는 부하들에게 병사들을 동원해 자신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매사에 엄격한 루쿨루스를 따르기보다는 소아시아에 남아서 약탈을 벌이길 갈망했다. 장교들은 이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루쿨루스를 돕지 못하고 폰토스를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이 고르디에네에 있는 루쿨루스의 진영에 이르렀을 때, 장병들은 이들을 부러워하며 자기들도 자유롭게 약탈하길 갈망했다. 루쿨루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얼른 전투를 벌여서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티그라네스 2세가 결전을 회피하자, 루쿨루스는 결전을 강요하기로 하고 기원전 68년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인 아르탁사타로 진군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결전을 미룰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로마군과 격돌했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군은 또다시 참패했고, 아르탁사타는 루쿨루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후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가 캅카스 산맥 너머로 도주하자, 루쿨루스는 이들을 추격하려 했다. 그러나 장병들은 약탈을 제한하고 힘든 행군을 강요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대장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루쿨루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옥하기로 유명한 메소포타미아의 아르메니아 영토를 침공하도록 강요했고, 루쿨루스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메소포타미아로 남하하여 니시비스를 포위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틈을 타 기원전 67년 봄 폰토스로 쳐들어갔다. 그는 소규모 로마 분견대를 사로잡은 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가 루쿨루스를 지원하기 위해 폰토스에 주둔한 2개 군단을 이끌고 이동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즉각 트리아리우스를 요격했고, 젤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4명의 대대장과 150명의 백인대장을 포함하여 7,000명이 전사했고, 폰토스는 미트리다테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루쿨루스는 니시비스 포위를 그만두고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미트리다테스와 대항하려 했지만, 병사들은 그를 더 이상 따르길 거부했다. 그들은 지갑을 루쿨루스의 발 앞에 던지며 그가 이 전쟁에서 개인적으로 이익을 얻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전쟁을 하고 싶으면 그 혼자 하라고 조롱했다.

루쿨루스는 어쩔 수 없이 갈라티아로 철수했고, 티그라네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아르메니아로 돌아가서 세력을 재건했다. 이리하여 루쿨루스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공적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에 로마는 기원전 66년 지중해 해적 토벌을 완수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동방 원정을 맡겼다. 갈라티아에 도착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일련의 사태로 심기가 매우 좋지 않았던 루쿨루스는 그를 사냥개가 쓰러뜨린 사냥감을 낚아채는 새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탐욕스러운 인간이라고 조롱했고, 루쿨루스를 따라 전쟁을 수행해온 베테랑 병사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선사해 순식간에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루쿨루스가 굴욕감을 안고 로마로 쓸쓸히 귀국한 뒤, 폼페이우스는 폰토스 왕국을 향해 진격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루쿨루스와의 전쟁 여파로 병력 자원이 부족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정면전을 치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산맥 깊숙히 후퇴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서 보급에 곤란을 겪게 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보급 관리에 있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고, 로마군은 별다른 보급 문제 없이 폰토스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순조롭게 공략했다.

전쟁에 지친 폰토스 장병들이 꾸준히 탈영하자, 미트리다테스는 그들을 잡는 대로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눈을 찢거나 산채로 불태웠다. 그러면서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어떤 조건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그쪽으로 귀순한 모든 로마 탈영병을 제공하고 무조건 항복하라"고 답하자, 그는 탈영병이 급증할 것을 우려해 이를 거부하고 로마인들의 탐욕 때문에 절대로 그들과 평화를 맺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직후 폼페이우스는 기병대를 보내 적의 전초 기지를 습격하여 도발한 후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폰토스군이 추격했다가 라코스 강변에서 참패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로 도주하려 했지만 티그라네스 2세가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하자 콜키스로 도망쳐 그곳의 산악지대에 몸을 숨겼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티그라네스 2세가 폰토스와 동맹을 끊고 로마의 봉신이 되는 조약을 맺게 한 뒤, 여전히 미트리다테스를 지지하는 알바니아와 이베리아 왕국을 공격하여 모조리 굴복시켰다. 또한 콜키스의 여러 부족들에 사절을 보내 로마에 귀순할 것을 권고했고, 부족들은 대세의 흐름을 읽고 로마에 귀순했다. 이후 아직 보스포러스에 숨어 있는 미트리다테스를 봉쇄하고자 세르빌리우스 휘하 함대를 파견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소규모 기병을 이끌고 콜키스에서 크림 반도까지 도망친 뒤 로마군에 맞서기 위해 또다른 병력을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아들 마카레스가 아버지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미트리다테스는 그를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꼬드겨서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게 한 뒤 기습 체포 후 살해했다. 뒤이어 또다른 아들 파르나케스 2세에게 크림 반도의 지배권을 맡기고 병력을 모집했다.


2.6. 최후[편집]


그러나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민중은 더 이상 왕을 따르려 하지 않았고, 파르나케스 역시 자기도 형처럼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걸 우려해 기원전 63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미트리다테스가 머물고 있던 판티카파에움 성채로 몰려들고 장수들 마저 더 이상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자, 미트리다테스는 절망에 빠져 독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처럼 독살당할 것을 염려해 독약을 아주 조금씩 복용해왔기 때문에 내성이 생겨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켈트족 출신 경호원이자 친구인 비투이투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로부터 미트리다테스의 시신을 접수받은 뒤 폰토스의 옛 수도 야마사(아마시아)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무덤에 묻었다.


3. 가족사[편집]


미트리다테스의 가족사는 그의 인생처럼 파란만장했다.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에게 연회 석상에서 독살당했고, 어머니 라오디케 6세는 남동생 크레스투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그를 죽이려 들었다. 이 때문에 수년간 방랑하던 그는 나중에 세력을 끌어모아 정변을 일으켜 어머니와 남동생을 주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원전 115년 또는 113년에 여동생 라오디케와 결혼하여 4명의 아들(콜키스의 미트리다테스, 아르카티우스, 마카레스, 파르나케스 2세)와 2명의 딸(폰토스의 클레오파트라, 드리페티나)을 낳았다. 그러나 라오디케는 기원전 90년 무렵 미트리다테스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멀리 떠나 있는 사이에 어느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았다. 라오디케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독살할 음모를 꾸몄지만 하인들의 고발로 들통났고, 미트리다테스는 라오디케와 그녀에게 협력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기원전 89년 또는 88년 카리아의 밀레토스 또는 스트라토니케아 시를 점령했을 때 필로포이멘이라는 저명한 시민의 딸 모니메를 만났다. 그는 모니메의 아름다운 용모와 훌륭한 지성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모니메에게 자신의 정부가 되어주면 1,500개의 금화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모니메는 이를 거부하며, 자신을 정부가 아니라 왕비로 맞아달라고 요구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그는 모니메와의 사이에서 딸 아테나이스를 낳았다. 모니메는 초기에는 남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차츰 자신에게 간섭을 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은 미트리다테스가 그녀를 무시하면서 사이가 안 좋아졌고, 미트리다테스는 그녀를 제쳐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기원전 72/71년 미트리다테스가 시노페를 떠나 아르메니아로 망명할 때, 모니메는 미트리다테스의 다른 아내 및 딸들과 함께 미트리다테스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기원전 86년, 미트리다테스는 키오스 출신의 시민 베레네케를 세번째 아내로 삼았다. 기원전 72/71년 미트리다테스가 시노페를 떠나 아르메니아로 망명할 때 그녀와 가족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이에 그녀는 독극물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옆에 있던 어머니도 독극물을 요구하자,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독극물을 나눠 먹었다. 어머니는 숨이 끊어졌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이에 궁궐 경비원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고, 경비원은 그녀를 목졸라 죽였다.

미트리다테스는 기원전 86년 이후 폰토스 출신 하프 연주자의 딸인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트리다테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시파레스를 낳았다. 그녀는 미트라테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깊은 총애를 받았지만, 코이눔 요새에서 많은 양의 보물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폼페이우스에게 아들의 목숨을 구명하는 대가로 요새와 보물을 바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트리다테스는 시파레스를 그녀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림으로써 그녀를 처벌했다. 이후 스트라토니케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미트리다테스는 마지막 왕비로 히프시크리티아를 두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여인은 매우 용감하고 말을 잘 다뤄서 남성형 이름인 '히프시크라테스'라고 불렸다. 또한 그녀는 미트리다테스를 무척 사랑해, 그를 위해 머리를 자르고 어딜 가든 따라갔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남편이 판티카파에움에서 자결했을 때, 그녀 역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식들 역시 대체로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 미트리다테스와 첫째 아내 라오디케의 장남 미트리다테스는 콜키스 주민들을 잘 다스려 인망을 한 몸에 받았다가 아버지의 의심을 사 처형당했고, 차남 아르카티우스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 티시온 산에서 행군하던 중 병사했다. 셋째 아들 마카레스는 크림 반도의 지배권을 아버지로부터 양도받고 통치했으나, 폼페이우스의 공세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를 버리고 폼페이우스에게 붙으려 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긴급 체포 후 처형되었다.

넷째 아들 파르나케스 2세는 아버지를 배신하여 죽음으로 몰아넣고 폼페이우스로부터 폰토스 왕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나라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이며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노리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폼페이우스 편을 들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서다 젤라 전투에서 참패한 뒤 잔여 세력을 끌어모으려다 아산드로스 장군에게 살해당했다. 미트리다테스와 라오디케의 두 딸 중 장녀인 클레오파트라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에게 시집가서 화를 피했으나, 차녀 드리페티나는 기원전 72/71년 시노페를 떠나 아르메니아로 망명할 때 자식을 로마군의 포로가 되도록 하지 않으려는 미트리다테스의 명령으로 자살했다.

미트리다테스와 둘째 아내 모니메 사이의 딸 아테나이스는 카파도키아의 왕자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와 결혼했고,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가 기원전 63년 왕위에 오를 때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아리아라테스 10세를 낳았다. 남편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장남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 둘째 아들 아리아라테스 10세를 왕위에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카파도키아에서 추방당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는 여러 정부를 두었는데 그 중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갈라티아의 공주인 대 아도보기오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대 아도보기오나와의 사이에서 미트리다테스 2세와 소 아도보기오나를 낳았다. 미트리다테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를 때 적극적으로 협력해 승리에 일조한 공로로 카이사르로부터 보스포로스 국왕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소 아도보기오나는 갈라티아 귀족 카스토르 사콘다리우스와 결혼하여 파플라고니아의 마지막 왕이 될 데이오타루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미트리다테스에게 카파도키아 왕으로 내세워진 아리아라테스 9세 역시 미트리다테스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어머니는 알 수 없다. 또다른 사생아 오르사바리스는 비티니아 왕자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와 결혼했다가 아버지가 패망한 후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에서 '전리품' 취급받았다. 이후 풀려나서 아나톨리아로 돌아가 벨로나 여신전의 사제이자 사원 국가인 코마나의 통치자 니코메데스와 결혼했고, 이를 통해 코마나의 통치자가 되었다.

4. 평가[편집]


미트리다테스 6세는 15살 때 선왕이 독살당하고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즉위해 어머니의 박해를 피해 은둔할 정도로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는 은둔지에서 기량을 갈고 닦으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정변을 일으켜 어머니와 남동생을 축출하고 진정한 국왕으로 거듭났다. 그후 그는 소아시아의 소국이었던 폰투스의 세력을 대거 확장해 스키타이족을 물리치고 크림 반도 일대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소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육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그는 명군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욕 이른바 대왕병 때문에 로마와의 무모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인 것이 그의 몰락을 초래했다. 확실히 그의 군사적 역량은 소아시아 일대에서는 최강이었지만, 포에니 전쟁을 겪으며 지중해 최강의 군대로 거듭난 로마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를 상대하는 이들은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등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군략가들이었다. 능력이 꽤 출중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로마의 평범한 지휘관 정도는 압도하는 지휘관이었지만 상술한 3인만 만나면 연전연패를 당했다. 계속해서 로마에 깨진 끝에 파멸한 그는 오늘날 역사 애호가들로부터 그닥 명예로운 취급을 받지는 못한다. 또한 계속해서 로마와 충돌한 점과 그럼에도 능력 있는 지휘관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로마 명장들의 전적을 빛내는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사실상 '명장 판독기'로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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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스포로스 왕으로서는 '미트리다테스 1세'가 된다.[2]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의 외삼촌이다.[3]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아미소스 수비대는 도시를 에워싸는 참호를 건설하는 로마군을 막기 위해 곰을 비롯한 큰 동물들과 벌떼를 동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