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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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헤라클레아 전투
3.1. 양군의 움직임
3.2. 전투
3.3. 전투 후
4. 아스쿨룸 전투
4.1. 배경
4.2. 전투
5. 로마와 카르타고의 동맹
6. 시칠리아 원정
7. 베네벤툼 전투
8. 그 후
9. 의미



1. 개요[편집]


BC.280 ~ BC.275년까지 로마 공화국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마그나 그라이키아)과 그 동맹인 에페이로스 왕국과 벌인 전쟁이다. 명칭은 한니발 전쟁과 마찬가지로 피로스 1세의 이름에서 따왔다.

피로스 전쟁은 로마와 타라스(타렌툼)의 작은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의 해군이 타라스의 영해를 침범한 것에 대하여 두 국가 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스스로 로마에 맞설 군사력이 없었던 타라스는 에페이로스의 왕이자 당대의 명장인 피로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피로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 에트루리아, 투리이, 루카니아, 삼니움족이 얽히고 설킨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했으며 또한 시칠리아 섬의 분쟁에도 개입하여 시칠리아에 대한 카르타고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도록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병력 공급이 가능했던 로마의 조직력 앞에 피로스 1세는 무의미한 승리만을 거듭하다가 결국 손을 떼게 되었다.

변방의 야만인에 불과했던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공화국이 지중해 세계에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로마 공화국은 이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했고, 118년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거치며 지중해 세계의 최강대국으로 도약했다.


2. 배경[편집]


타라스(Ταρας)[1]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고 불렸던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그리스계 대도시였다. 타라스의 강력한 파벌 중 하나였던 민주정파는 필로카리스 또는 아이네시아스가 당수였는데 이들은 로마에 적대적이었다. 로마인들이 타라스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독립성을 잃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타라스의 시민들은 로마인들이 제3차 삼니움 전쟁 이후에 타라스에 세력을 뻗칠 것을 두려워했다. 기원전 290년에 삼니움족이 로마에 항복하자 로마인들은 아풀리아와 루카니아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고 기원전 282년,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움, 투리이[2]인들과의 전투를 마무리지었으며 로마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인 크로톤, 루크로이, 레기움에 진입했다. 타라스의 민주정파는 로마인들이 갈리아, 루카니아, 에트루리아, 삼니움, 브루티움을 꺾는다면 다음 차례는 바로 타라스라고 생각했다. 타라스의 또 다른 걱정은 투리이의 귀족정파들이 권력을 잡자 로마인과 손을 잡기로 하고 로마의 군영을 도시내에 건설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투리이는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멤버였으므로 로마의 침략이 임박했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타라스의 파벌로 아기스가 이끄는 귀족정파가 있었다. 그는 로마에 항복하면 귀족정파들이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항복을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들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이런 속셈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러던 기원전 282년, 타라스인들이 디오니소스 축제를 열어 바다에서 연극을 하고 있었을 때, 로마 선박 10여 척이 갑자기 바다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 선박은 무장한 병사들과 식량을 잔뜩 싣고, 투리이에 설치된 군영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타라스인들은 로마인들이 타라스의 영해에 침입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위반하고, 영해를 침범하자 해군을 출동시켜 로마 선박을 공격했다. 그 결과 로마 선박 수 척이 침몰했고 한 척은 나포되었다. 이런 일을 벌인 뒤 타라스인들은 로마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둘이 싸울 경우, 로마에게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에페이로스 왕국의 왕 피로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병사와 선박을 투리이에 보내 민주정파를 도와 귀족정파를 내쫓았다. 이렇게 되자 투리이에 설치된 로마 군영에 주둔한 로마군은 철수했고 로마인들은 사자를 보내 생포된 병사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협상이 결렬되면서 타라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기원전 281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가 이끄는 로마 군단이 타라스로 진격했다. 타라스는 삼니움족과 사렌티니아인의 원군을 받았음에도 패배했다. 타라스인들은 아기스를 보내 로마인들과 휴전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곧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협상은 피로스 왕이 보낸 3000명의 에페이로스 호플리테스가 밀로의 지휘하에 타라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결렬되었다. 집정관 바르불라는 곧장 철수하였으나 철수 도중 그리스인들의 공격을 받아 병력의 일부를 잃었다.

피로스가 타라스를 돕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피로스가 과거 코르키라 섬을 정복하는 데 타라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로마의 적인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움, 그리고 일리리아인들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리시마코스에게 빼앗긴 마케도니아 왕국를 되찾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많은 군자금이 필요했다. 그가 타라스를 도와 로마인들을 격파하고 시칠리아 섬을 카르타고인들로부터 보호한다면 그는 사실상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며 마케도니아 재정복에 필요한 풍부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3. 헤라클레아 전투[편집]



3.1. 양군의 움직임[편집]


에페이로스를 떠나기 전, 피로스는 우선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3]와 동맹을 맺고 9천의 병력과 50마리 코끼리 부대를 받겠다는 약속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테살리아의 기병, 로도스 투석병을 모집해 기원전 280년 봄, 2만 5천에 달하는 병사들과 함께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8개 군단과 같은 수의 보조병(Auxilia)을 편성한 8만 명의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뉘어 각지에 배치했다.

2개 군단은 전직 집정관 바르불라의 지휘하에 베누시아에 주둔하며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견제하여 피로스의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로 하고 2개 군단은 로마에 남아 방어를 맡았다. 그리고 남은 4개 군단은 그해의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각각 2개 군단을 지휘하여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는 에트루리아를 압박하여 피로스와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라이비누스는 타라스로 가면서 루카니아인들의 영토를 약탈하고 헤라클레아를 향해 진군했다. 그는 이곳을 점령해 피로스와 그리스의 식민지인 칼라브리아의 연결을 끊어 칼라브리아가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3.2. 전투[편집]


에페이로스군은 2만의 팔랑기타이, 6천의 호플리타이, 3천의 히파스피스타이, 2천 궁병, 투석병 500명, 기병 4천에 피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부터 지원받은 20마리의 코끼리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약 3만 5천여 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집정관 라이비누스의 로마군은 2만의 로마 군단병과 1만 9천여의 동맹시 보병, 2천 ~ 6천여 정도의 기병대로 구성된 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피로스는 로마군이 도착했음에도 움직이지 않으며 동맹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나중에서야 동맹군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피로스는 시리스 강 옆에 펼쳐진 벌판에서 로마군과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피로스는 평원에 병력을 배치한 뒤 로마군을 기다리고 싸우기 전, 집정관 라이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은 로마와 남부 이탈리아의 분쟁을 중재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며 이미 남부 이탈리아가 자신에게 심판관 역할을 기대하니 로마 측에서도 이를 받아들여주길 바란다고 전하였다. 라이비누스는 피로스의 제안을 거부하고 강을 건너 피로스군의 맞은 편에 막사를 차렸다.

피로스는 시리스 강 왼쪽에 포진하고 로마군이 강을 건너서 먼저 공격해오길 기대하였다. 피로스는 로마군이 강을 건널 때 기병과 코끼리로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경보병을 강에 포진한 뒤 로마군이 강을 건너거든 즉각 자신에게 알리라고 명령하였다. 새벽이 되자 로마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역사상 최초로 로마 군단병과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라는, 서로 다른 강력한 두 중보병이 자웅을 겨루게 된다.

로마 기병이 먼저 재빨리 강을 건너 감시중인 경보병을 공격하여 퇴치하였고 피로스는 로마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자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기병을 이끌고 로마 기병을 공격하였다. 그의 경보병과 중보병도 로마 군단병을 항해 진군하기 시작하였고 에페이로스 기병은 로마 기병의 대열을 흐트러놓은 뒤 후퇴하였다. 피로스의 투창병과 궁병이 원거리 공격을 시작하고 그의 팔랑크스가 로마 군단병을 공격하였다. 강을 건넌 로마 군단병과 팔랑크스의 전열은 거의 비슷하였다.

팔랑크스는 7번에 걸쳐 로마 군단병을 공격하였으나 군단병은 전열을 유지하며 공세를 버텨내었다. 팔랑크스는 그들이 여지껏 만난 중보병 중 가장 강력한 상대를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 군단병 역시 7번을 공격하였으나 팔랑크스 진형을 뚫는 데 실패하였다. 두 중보병의 혈전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어느 시점에서 전투의 격렬함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피로스가 전투 중 사망했다는 오보가 퍼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피로스가 그의 경호원 중 한 명에게 그의 갑옷을 입혔는데 그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군단병들은 큰 소리로 함성을 질러 기쁨을 나타냈다.

피로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두려워하기 시작한 에페이로스군이 동요하자 멀쩡히 살아있던 피로스는 말을 타고 병사들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보병 라인을 지나갔다. 이러한 대담한 행위에 병사들은 용기를 되찾았고 두 세력은 다시 전투에 임하였다.

로마군에 대하여 어떠한 우위도 갖지 못한 피로스는 결국 자신의 전투 코끼리를 투입하기로 하였다. 로마 기병대는 에페이로스군의 측면을 매우 위협하는 상황이었는데, 로마 기병의 말들이 피로스군의 코끼리들을 보고 크게 놀라게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 기병대가 흩어지자 그때까지 버티던 로마 군단병도 패주했다. 피로스는 자신의 테살리아 기병을 내보내 군단병을 공격하였으며 이것으로 승부는 결정되었다. 로마인들은 강을 건너 달아났고 피로스는 전장을 장악하였다.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의 손실은 1만 5000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으며 히에로니무스는 7천이라고 언급하였다. 디오니시우스가 기록한 피로스의 전사자는 1만 1천, 그리고 히에로니우스는 3천이라 기록하였다. 어느 역사가의 기록을 참고하더라도 피로스는 그야말로 피로스의 승리를 한 셈이었다.


3.3. 전투 후[편집]


전투가 끝나자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원군이 피로스에게 합류하였다. 그러나 레기움의 병사들은 피로스에게 합류하러 가다가 로마 군단병을 만나 섬멸당했다. 피로스는 에트루리아에 진입하고자 하였으며 진군 도중 캄파니아와 라티움을 약탈하였다. 하지만 아나그니라는 도시에서 그의 진군은 멈추었는데 여기서 코루키아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피로스는 그의 병사에 전사자가 워낙 많았으므로 싸우기가 여의치 않다고 보았는데 아마도 라이비누스와 바르불라가 이끄는 로마 군단이 피로스의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는 후퇴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로마군은 그를 뒤쫒지 않았다.


4. 아스쿨룸 전투[편집]



4.1. 배경[편집]


겨울 동안 피로스는 로마의 패배로 인해 로마에게 정복당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로마에 정복당한 도시들 대부분이 그대로 로마편에 남았으며 오직 소수의 부족들만이 피로스 편에 붙기로 하였다.[4]

다음해인 기원전 279년, 북상한 피로스는 집정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가 이끄는 로마 군단과 조우하였다. 두 병력은 거의 비슷한 수였다.

로마의 4개 군단은 대략 4만여 명의 병력이었고 300개의 대 코끼리용 투석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코끼리로 인해 패배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군단병들은 불에 타오르는 무기를 지급받았으며 또한 소가 끄는 전차가 동원되었는데 전차에 탑승한 병사들이 가진 긴 창은 코끼리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달구어진 아궁이들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을 던짐으로써 코끼리를 도망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피로스에겐 19마리의 코끼리와 기병대가 있었는데 이것은 로마군을 능가하였다. 피로스는 로마군의 기동이 팔랑크스보다 유연함을 파악하였고 따라서 테스프로티아와 카오니아 보병대를 중앙에, 좌익에는 그리스 용병들을 배치하고 우익에는 팔랑크스와 타라스를 비롯한 루카니아, 브루티 보병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경보병과 코끼리를 두 부대로 나누어 후방에 예비대로 배치하였으며, 피로스는 직접 중앙 뒤편에 예비대로 배치된 2천의 기병대를 지휘하였다.


4.2. 전투[편집]


첫째 날, 피로스의 코끼리들과 기병대는 숲과 언덕 지형에 방해를 받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팔랑크스가 눈에 띄는 활약을 하였다. 팔랑크스는 로마의 1번 군단과 동맹시 군단으로 이루어진 좌익을 격파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3번, 4번 군단은 타라스와 그들의 연합으로 구성된 중앙을 격파했다. 이렇게 싸우는 동안 다우니족으로 구성된 로마 측 병사들이 피로스군의 캠프를 공격했다. 피로스는 즉시 자신의 예비 기병대를 보내었고 뒤이어 코끼리들이 투입되어 다우니족을 격파하였다.

다우니족은 구릉지 꼭대기로 후퇴하였고 피로스는 코끼리들을 3번, 4번 군단병들에게 보내 공격하였다. 피로스는 불화살과 투석으로 코끼리들을 지원하였다. 로마인들은 코끼리의 공격을 피해 나무로 지은 진지에 머물고 있었다. 피로스는 자신의 아타마니아, 아카르니아, 그리고 삼니움족으로 구성된 보병을 보내 로마군을 진지에서 끌어내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로마 기병의 공격을 받았다. 이렇게 한참을 싸우다 마침내 해가 질 무렵이 되어 양군은 서로 물러났다. 어느 쪽도 확고한 승기를 잡는 데 실패했다.

새벽이 되자 피로스는 자신의 경보병을 보내 전날 로마인들이 점거했던 험한 지형을 차지했다. 그 뒤 이어진 전투에서 로마인들은 탁 트인 평야에서 피로스군을 상대해야했다. 팔랑크스와 로마 군단병은 다시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코끼리 부대가 로마군을 상대로 돌진하였다. 로마인들은 즉시 소가 이끄는 사륜 전차를 동원해 맞섰는데 피로스가 코끼리에 동행시킨 투창병이 전차대에 투창을 퍼부어 무력화시켰다. 코끼리들은 로마 군단병의 전열을 흔들어놓았고 피로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기병을 내보내 로마군을 향해 돌격시켰다. 로마군은 패주하였고 그들의 주둔지로 퇴각한다.

전투 결과 로마군은 8천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피로스는 3천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장교들이었다. 피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러온 장교에게 "이런 승리를 한 번만 더 한다면 우린 모두 끝장이다"고 말하였다.


5. 로마와 카르타고의 동맹[편집]


전투 후 피로스는 로마인들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조약을 맺자고 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있는 한 강화는 없다라며 강경하게 답변하였다. 특히 이들 중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가 나이가 들어 눈이 먼 상태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에게 강화를 거부할 것을 촉구하였다. 피로스는 단지 그의 동맹국가들의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요청을 했을 뿐이지만 로마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피로스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어 로마와 대항할 것을 생각했는데 카르타고는 피로스가 로마보다 더 위험하다고 보고카르타고 역사상 최대의 실수[5] 이를 거부한 뒤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이때 세 번째로 갱신된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조약으로 인해 로마와 카르타고는 피로스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동맹을 맺게 된다. 이로써 피로스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있는 그리스 동맹까지 보호해야하는 입장에 처했다.


6. 시칠리아 원정[편집]


시라쿠사를 지배하던 참주 티니온소시트라토스는 피로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캄파니아와 남부의 로마 동맹시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가 불리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이 실수임을 파악하였다.

두 번에 걸친 전투에서 연이은 승리를 하였으나 그때마다 피로스는 전사자가 많았으므로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꺾였다. 그래서 그는 시칠리아로 가서 그곳의 그리스인들을 카르타고인들로부터 지키기로 하였다.

기원전 278년, 카르타고인들은 피로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를 보내 시라쿠사를 포위하는 한편 피로스가 항해할 선박을 찾아 감시하였다. 피로스는 카르타고와 마메르티니 용병대의 감시를 뚫고 시칠리아에 상륙하였으며 그곳에서 파노르무스[6]와 에릭스[7]를 점령하였다. 이에 카르타고인들은 피로스에게 릴리바이움[8]을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에서 철수하겠다고 제안했으나 피로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동안 이어진 싸움에서 그는 계속 병력의 손실을 입었으나 손실을 보충할 병력은 적었다. 타라스는 피로스가 떠난 뒤 로마인들에 의해 계속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그들의 해군을 통해 피로스에게 주어지는 보급을 끊으려 하였다. 결국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한 피로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로마인들과 또다른 싸움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7. 베네벤툼 전투[편집]


기원전 275년, 피로스는 이탈리아에 상륙했는데, 계속된 병력 소모로 인해 전력이 감소된 상태였다. 이 베네벤툼 전투 이후 피로스는 에페이로스로 귀국하였고 그 결과 삼니움족과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불리는 남부 이탈리아는 로마에 정복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는 군대를 보내 남하하도록 하였다. 이들 중 2개 군단은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의 지휘를 받아 말벤툼이라는 도시에 숙영지를 차렸다. 피로스는 말벤툼에 접근하였는데 그때 그의 군대는 보병 2만, 기병 3천, 그리고 20여 마리의 코끼리를 동행하고 있었다. 로마군은 보병 1만 7천, 기병 1200으로 구성되었다.

피로스의 정찰병은 로마군이 말벤툼에 야영하고 있음을 보고하였고 피로스는 이들을 야습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야습은 그의 군대가 말벤툼에 접근한 시간이 너무 지체된 탓에 이들의 접근을 알고 있던 로마인들은 야습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피로스군의 공격을 쉽게 격퇴했다. 피로스는 코끼리를 투입하였으나 로마인들은 이제 코끼리를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삼니움족에게서 도입한 무기인 필룸을 병사들에게 지급하고 코끼리가 보이면 즉시 투척하게 한 것이었다.[9] 코끼리들은 창에 맞아 부상을 입어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 코끼리들은 보충할 수 없는 전력이었으므로 이는 피로스에게 뼈아픈 손실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로마인들은 거꾸로 그들의 진영에서 나와 공세를 펼쳤다. 그들의 초기 공격은 피로스에 의해 저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피로스가 자신의 남은 코끼리와 호플리테스를 중심으로 로마 보병진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로마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고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이 공격에서 피로스의 코끼리들은 필룸에 의해 무력화되어 에페이로스군의 진영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이를 본 피로스는 즉시 군대를 철수하여 물러났다.

피로스는 코끼리들이 무력화되자 바로 철수했는데 아직 로마군보다 우세한 기병이 있었다는 점에서 로마군과 계속 전투를 치렀다면 한니발이나 알렉산드로스식의 기병운용을 함으로써 승리를 거머쥘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전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그의 병력의 손실이 컸으므로 이번 전투에서도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보고 로마군을 상대로 뒤쳐지는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레비아 전투, 칸나이 전투 등에서 주력군의 손실이 거의 없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한니발의 군사적 능력이 돋보인다고 하는데 한니발 경우는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노리던 방향과 장소로 끌고 들어와 이긴 반면, 베네벤툼 전투의 경우는 처음부터 피로스의 허를 찌른 전투였다. 굳이 따지자면 자마 전투에 가깝다. 이마저도 그나마 다시 준비할 시간과 장소를 알고 있던 자마 전투보다도 상황은 안 좋았다. 사실상 기습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이 상황에서 모습을 보고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애초에 한니발이 자신보다 윗줄로 평가한 게 피로스다. 물론 정말로 윗줄인지는 제쳐놓더라도 단순히 우열은 논하는 것은 금물이다.키배 지름길이니까.

전투 후, 로마인들은 안 좋은 상황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벤툼을 좋은 상황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네벤툼이라고 바꾸었다. 피로스는 타라스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내내 움직이지 않다가 마침내 전쟁을 단념하고 이탈리아를 떠나는데 그에겐 오직 8천의 보병과 500기의 기병만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처음 이탈리아에 상륙했을 때 동행한 2만 5천의 병력 중에서 3분의 2가 전사했던 것이다. 떠나면서 피로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로마와 카르타고인들이 서로 싸울 전쟁터를 뒤로 남기고 떠나는구나.



8. 그 후[편집]


피로스가 떠난 뒤 로마인들은 남하하여 타라스를 압박하였고 결국 기원전 272년, 타라스는 로마에 항복하였다. 로마인들은 타라스에게 그들이 전형적으로 정복민들에게 쓰는 조약을 맺게 하였는데 이는 곧 타라스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그들은 로마가 필요할 때 군사적 원조를 하게한 것이었다. 타라스는 이 조약을 받아들인 뒤 로마의 동맹시로 남았다. 그래도 로마는 타라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으므로 로마군의 군영을 도시내에 설치하였다. 타라스가 무너지자 이탈리아 남부의 다른 도시들도 로마에게 항복하였으며 그들 모두 로마의 동맹시가 되었다.

로마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던 이유는 정복한 민족에게 당시로써는 보기 드물게 온건한 태도를 취한 데에도 있었다. 로마는 패배한 국가를 동맹국으로 삼았는데 과중한 세금을 매기지도 않았고 친로마 정치가를 억지로 앉히지도 않았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전쟁 시 보조병의 조달이 전부였다. 이에 따른 혜택으로써 동맹시민은 로마로부터 라틴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이 시민권만 있으면 로마를 비롯한 어떤 로마 동맹시에서도 로마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유롭게 통상 및 거주할 수 있어 참정권을 제외하면 로마 시민권과 같았다. 이렇게 온건한 노선으로 인해 피로스뿐 아니라 한니발 바르카의 침략에서도 많은 피정복 도시들이 대거 이탈하지 않고 로마와 계속 동맹을 유지하였다. 단 이러한 온건주의는 동맹시들이 자발적으로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을 인정하고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있었으므로 로마의 영토가 넒어지면서 잘 통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리스 국가들은 로마에게 패배한 이후 로마의 동맹시가 되었지만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탈리아 국가들에 비해 로마에 대해 압박을 잘 느끼지 않았고 사사건건 반기를 들었다.[10] 로마는 이탈리아와는 전혀 다른 이러한 그리스의 움직임에 매우 곤혹스러워하여 온건주의 외교 노선에 회의를 가졌고 결국 카르타고코린트를 파괴한 후 주민 전체를 노예로 팔아 본보기를 보이는 한편 점령지의 많은 곳을 속주화함으로써 점점 제국화되어갔다.

헌데 가장 먼저 로마에 원정온 에페이로스는 정작 큰 피해 없이 스무스하게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특히 피로스 군을 불러온 타라스 등의 도시는 징벌적인 조치를 받기도 했다.

신빙성이 의심되긴 하나 로마 장군들과 피로스와의 일화 등으로 미뤄보면 로마 나름대로 피로스를 인정했을지도, 아니면 단순한 용병으로 생각했을지도, 혹은 둘다일지 모를 일이다.

9. 의미[편집]


비록 로마인들은 피로스를 전투에서 이기지는 못했으나 전쟁에서는 승리했다. 이는 피로스가 동시대의 가장 유능한 장군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이 승리 덕에 로마의 군사적 명성은 지중해에서 상당히 높아졌다. 게다가 피로스와 전투를 치를 때 간혹 보인 로마 군단병의 거센 저항은 훗날 군단병이 팔랑크스에 보인 강력함을 의미하였다. 게다가 헬레니즘 국가들에선 피로스 이후 다시는 로마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장군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11]

피로스를 상대로 승리한 뒤 로마는 그들의 군사적 능력이 국제사회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영구적인 우호협정을 맺었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 맞수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로마에 저항하고 있었던 포 강 이남의 모든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기원전 264년 이전에 모두 항복했고, 라티움 지방의 소도시 로마는 최초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지중해의 강자로 등극했다. 그리고 로마는 지중해의 또다른 강자이자 피로스 전쟁 당시 로마의 동맹이었던 카르타고와 지중해 패권을 두고 3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시작한다. 이는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떠나면서 남긴 말대로였다.


9.1. 피로스의 승리[편집]


언어학적으로 피로스 전쟁은 '피로스의 승리'라는 단어를 낳았는데 이 단어는 너무도 많은 희생 끝에 얻은 승리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플루타르코스의 저서에서 유래하며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은 피로스의 말을 기록했다.

두 군대는 마침내 물러났다. 그리고 피로스는 그의 승리를 축하하는 장교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런 승리를 한 번만 더한다면 완전히 망할 것이다."

[1] 라틴어로는 타렌툼(Tarentum).[2] Thurii, 헬라어 Θούριοι.[3]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로 셀레우코스 1세를 죽이고 마케도니아로 망명했다가 마케도니아군의 지명으로 왕이 되었다.[4] 로마 동맹은 의외로 결속력이 튼튼하였으며 이는 100여 년 뒤, 한니발 바르카의 침략에도 굳건한 결속력을 보여준다.[5]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고, 실제로 당대에 피로스가 로마보다 더 위협적인 위치에 있었다.[6] 오늘날의 팔레르모.[7] 오늘날의 에리체.[8] 오늘날의 마르살라.[9] 이때 중보병에게 처음 실용화된 필룸은 이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로마 중보병의 보조무기로 자리잡는다.[10] 또한 그리스 국가들은 선민의식이 강하여 로마를 야만족으로 취급한터라 그들이 야만족으로 여기던 로마에게 정복당한것을 수치로 여겼고 반감이 강한터라 로마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11] 거의인 이유는 헬레니즘 국가인지는 둘째치고 그리스권은 확실한 스파르타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 집정관을 상대로 제대로 대승을 거두며 카르타고를 구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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