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로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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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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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버나드 로 몽고메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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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알라메인의 몽고메리 자작
버나드 로 몽고메리[1]
Bernard Law Montgomery
KG GCB DSO PC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rnard_Law_Montgomery.jpg

출생
1887년 11월 17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서리 주 케닝턴[2]
사망
1976년 3월 24일 (향년 88세)
잉글랜드 햄프셔 주 알턴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작위
초대 알라메인의 몽고메리 자작[3]
가터 훈장
바스 훈장
복무
영국군 (1908~1958)
최종 계급
원수
경력
제9보병여단장
제8보병사단장
제3보병사단장
제2군단장
제5군단장
제8군 사령관
제21집단군 사령관
참모총장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아일랜드 독립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서명
파일:버나드 몽고메리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2. 제2차 세계 대전
2.3. 엘 알라메인의 승리
2.4. 이탈리아 전역과 D-DAY 후
2.5.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
2.6. 전쟁의 막바지
2.7. 전후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3.2.1. 패전의 책임 전가
4. 기타
4.1. 전쟁의 역사
4.2. 꾀보 몬티
4.3. 그 외
4.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파일:959036cc76e5e21b026c537f09b51aa4.jpg 그랜트 IV 전차와 몽고메리 장군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남기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슬픔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히틀러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의 망상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수천만 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의 작가 후기 중에서

영국의 군인. 1,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전후 초대 알라메인의 몽고메리 자작위를 받았다.


2. 생애[편집]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편집]


1887년 런던에서 몽고메리 가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앙리 2세마상창시합 중 실수로 죽이고 그로 인한 푸대접으로 위그노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 후 처형당한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 백작의 영국으로 망명한 후손이다.

아버지 헨리 몽고메리가 성공회 성직자였기에 금욕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에 엄격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4]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완고하고 거만한 성격이 되었다. 특히 어머니의 무심함은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으며,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자인 데이비드와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5]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성격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그였다는 것.

이렇게 우중충한 소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 후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왕립 워윅셔 연대 1대대의 보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보병 소대장으로 참가하였다. 몽스 전투에서 대대의 절반이 소멸하고, 국경 전투에서 오른쪽 폐에 총알이 박히고 무릎에도 적탄이 관통하여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는 등[6] 여러 지옥도에서 살아남았다. 전간기에는 보병방어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이끌어 냈지만 당시 영국 육군의 화두는 전차였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1925년 브르타뉴에서 휴가를 지내던 중 사랑에 빠졌는데 베티 앤더슨이라는 17세의 금발미녀였다. 당시 39세였던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7] 그러나 몽고메리는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부모와 함께 스위스의 렌크(Lenk)라는 곳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것이란 소식을 듣고 그는 그들이 묵을 장소를 알아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앤더슨은 베티 카버(Betty carver)라는 여성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몽고메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미망인으로 12세와 13세인 두 아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몽고메리는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친구가 되었고 1927년 둘은 결혼했다. 그들은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나갔고 이듬해 외아들 데이비드[8]가 태어났다. 1937년 아내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몽고메리는 프랑스 전선의 영국원정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후 후퇴하는 영국군을 보호하기위해 아라스 전투로 독일군을 저지하여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도왔다. 이후 본토로 귀환해 육군 재건에 전념했다.

에르빈 롬멜 원수가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 왕국군이 저지른 大삽질을 메꾸기 위해 급파되어, 번개같은 작전으로 오코너 중장을 사로잡고 영국 서부 사막군을 거의 괴멸상태까지 몰아넣었다. 중동 사령관 웨이벌 대장이 인도로 전출되고 후임이 된 오킨렉 대장은 서부 사막군을 제8군, 일명 '사막의 쥐떼'로 재편하고 재도전, 한때 밀어붙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다시 롬멜의 반격을 받고 닐 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8군의 전력 절반 가량을 날려먹고(가잘라 전투) 토브룩까지 함락되는 타격을 입었다.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오킨렉은 엘 알라메인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닐 리치 중장을 해임하고 8군의 지휘권을 직접 잡고 롬멜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1차 엘 알라메인 전투). 그러나 오킨렉은 처칠의 무리한 공세 요구를 비현실적이라서 불가능하다고 거부했고 이에 처칠은 카이로까지 가서 오킨렉을 마구 갈구고 패배주의에 물들었다며 해임한 뒤 그 후임으로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을 임명하고 8군 사령관으로 몽고메리 중장을 임명한다.

하지만 몽고메리 역시 처칠의 기대를 저버리고(...) 전력을 보강하고 우주방어로 일관하고 있었다. 몽고메리는 먼저 롬멜을 마구 폄하하면서 그를 칭송하는 풍조를 몰아냈고, "이제부터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한다. 마음에 안 들면 옷을 벗으라"며 부대를 장악했으며, 장병들을 맹훈련시키면서 우주방어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 30일에 실시된 롬멜의 마지막 대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여(알렘 엘 할파 전투) 독일군의 이집트 진공 능력을 완전히 소모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섣부르게 공세에 나서는 대신 처칠의 거듭된 압박에도 전력을 증강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칠은 내내 몽고메리의 능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때 롬멜은 자신의 실책에도 몽고메리가 반격을 하지 않자 상대가 너무 소심하다고 평했다고. 하지만 아프리카 군단과 이탈리아군이 피폐해지는 보급에 시달리는 동안 몽고메리는 8군의 전력을 하루가 다르게 증강시켜 갔는데, 아프리카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독일 제27전투비행단 소속 정찰기가 시속 300마일의 속도로 8군의 병력 주변을 돌면서 그 시간을 계산해봤더니 무려 10분이나 걸렸다고 한다.


2.3. 엘 알라메인의 승리[편집]


결국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2차 알라메인 전투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거세게 밀어붙인 결과,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사실상 괴멸하여 이집트에서 리비아를 거쳐 튀니지에 이르는 먼 후퇴를 하게 만든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추적, 튀니지에 틀어박히기 전에 괴멸시키려 했으나, 기갑 지휘에 서투른 면이 있었던 데다가 롬멜이 몇차례 효과적으로 반격을 했고, 악천후로 공군력이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실패하였다.

이 무렵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하여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포위되었고, 독일군은 영웅시되었던 롬멜이 또다시 패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독일로 불러들였다.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했던 미군은 카세린 계곡의 참패를 경험하는 등 처음에는 빌빌대어 영국군 장군들 뿐 아니라 아이젠하워조차 자군의 전투력을 의심할 정도였지만, 조지 S. 패튼으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전력이 급상승,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양 방향에서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아프리카 군단은 독일군이탈리아군 합쳐 거의 30만의 포로를 남기고 소멸했다.


2.4. 이탈리아 전역과 D-DAY 후[편집]


이후 미군과 함께 시칠리아 상륙 작전을 실시하는데, 여기서 진격방향과 주공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패튼과 사이가 벌어지고,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항상 과감한 공격을 주장하는 패튼과 가급적이면 방어전을 위주로 적군의 힘을 소진시킨 후 마무리를 가한다는 몽고메리는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다.[9] 카세린 전투에서 미군의 한심한 꼴을 본 몽고메리는 미군의 전투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전공 욕심에 불타는 패튼[10]은 자신의 전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명장 롬멜을 격파한' 명성에 빛나는 몽고메리를 라이벌로 보고 그보다 먼저,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면 몽고메리는 전공 욕심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몽고메리는 당시 사령관이던 알렉산더 장군을 꼬드겨 잘 진격중이던 미군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진격로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독일군은 무너져내리던 이탈리아군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성할 시간을 벌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전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패튼 역시 꼼수를 써서 위력정찰을 핑계로 진격을 개시해 서부 시칠리아를 쓸어버리고 팔레르모에 먼저 입성하기에 이른다. 패튼이 병사들의 원성을 산 것도 이 무렵이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패튼을 그다지 신경 안 썼지만, 그가 시칠리아에서 엄청난 전과를 세워 자신의 전공이 가려지자 슬슬 약이 올랐는지 이후 패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서로 만날 때마다 싸웠고, 이들을 지휘하는 아이젠하워는 뒷머리를 잡고 오마 브래들리가 이를 중재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매일 일어난 셈. 이러고도 연합군 총사령부가 멀쩡하게 돌아갔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1.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2. 전략을 토의한다.
3. 패튼과 몽고메리가 서로 내가 옳네 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4. 곧 두 사람끼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버로우.
5. 회의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 원수가 뒷머리를 부여잡는다.
6. 브래들리 장군이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를 달래러 간다.
1. 다시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이하 반복.

몽고메리는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총지휘하여 작전을 성공시켰고, 이후 노르망디에 연합군을 묶어두려는 독일군을 상대로 영연방군을 지휘하며 격전을 치르다가 이후 상륙한 패튼의 3군이 망치 역할을 하는 동안 모루 역할을 수행, 패튼의 부대가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주력을 붙잡아두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두 지휘관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 이후 예상보다 적은 희생으로 훨씬 빨리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몽고메리와 패튼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특히 미군의 빛나는 승리를 취재하길 원하는 미국 기자들이 패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몽고메리를 무능한 인물, "답답한 영국놈"으로 포장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했다. 따라서 지크프리트 선과 라인 강을 넘어 독일영내로 먼저 들어가는 장군이 되길 원했던 두 사람은 라이벌보다 먼저 전과를 거두기 위해 서로 더 많은 보충병력과 보급품을 원했고, 그에 반하여 아이젠하워는 영국군이나 미군 모두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한데다가 어느 한쪽에 물자를 집중하기도 난감하여 양측을 최대한 공평하게 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군과 미군 양부대가 사이좋게 진격속도가 떨어지게 만드는 좋지 않은 결과만 낳았다.


2.5.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편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후퇴보다 빠른 진격속도에 기고만장해져 있었고, 비실거리는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걷어차기 위해 획기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된다. 그 와중에 노르망디 이후 간간히 간단한 임무를 뛰며 놀고먹는(?) 공수부대가 눈에 들어왔고,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이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기획되게 된다. 이것은 영미 3개 공수사단(영국 제1공수사단, 미국 82공수사단101공수사단에 추가로 자유 폴란드군 공수여단)이 네덜란드 일대에 강하해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와 협력해 교량을 확보하고, 영국 육군의 주력인 30군단이 확보된 교량을 따라 독일군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른헴을 장악하여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자는 거창한 작전이었다. 정체된 전선을 불과 2개 군단급 전력으로 타개한다는 매력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엄청난 떡밥[11]이 걸려 있었다. 게다가 당시 연합군은 이 진격속도 때문에 수송되는 연료보다 더 많이 잡아먹으며 길어진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엔트워프항을 위시한 네덜란드 지역을 일부 장악할 필요도 있었기에 성공만한다면 꿩먹고 알먹기였다.

독일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크프리트 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네덜란드 방어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국군의 판단이었고[12]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렇게 작전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른헴 주위에 2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정규군 1개 기갑사단, 정규군 보병사단과 그 근처에 무장친위대 대대가 집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SS 기갑 대장인 명장 빌헬름 비트리히가 지휘하는 제2 SS 기갑군단으로, 무장친위대 전력 중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동부전선에서 죽어라 싸우다가 서부전선으로 온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다만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재편된 후, 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개발살이 나버려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동부전선에서 온 B 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후방의 시골구석, 즉 아른헴으로 보내져 휴식 겸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하던, 말이 사단이지 연대 수준도 못되게 짜부러든 전력이었다. 그러니 네덜란드 방면이나 독일 본토쪽으로 공세가 올 것을 대비해서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한 제2 SS 기갑군단을 후방인 아른헴에서 보충과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 하필이면 '방어의 사자' 모델 원수였다.

B집단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은 영국군 공수부대의 강하로부터 단 3시간 만에 방어 계획을 수립, 친위대 뿐 아니라 해군, 공군 지상대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세를 분쇄한다. 반격 작전 내내 모델 자신이 매일 전선에 나아가 전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증원 부대 투입이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SS 기갑부대 지휘관 빌헬름 비트리히와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의 지휘 역량까지 더해져서 연합군은 그야말로 완패하고 말았다.

특히 이 작전의 실패가 더 뼈아픈 이유는, 연합군에서 고급 인력으로 꼽히는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막상 그 상대는 독일군 최정예도 아닌, 2선급 예비부대나 교도대라는 점에서 전투에도 지고 전쟁에도 진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델 장군과 그 참모들에게 진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독일군이 존나 세서 질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징징대지도 못한다. 거기다 패튼의 부대는 마켓 가든 작전에 보급이 집중되어 프랑스와 독일 국경 근처까지 도착했음에도 멈춰야했다

한편 이 작전의 실패는 훗날 몽고메리의 평가를 크게 깎아먹는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작전 실패 자체도 그렇지만, 몽고메리가 작전이 실패한 이후 패배의 책임을 정작 용맹하게 분투했지만 정치적으로 돌봐줄 빽이 없는 외국의 망명 장군에게 몽땅 전가하는[13] 찌질한 추태를 부렸기 때문이며 이후 망명 장군에게 사석에서만 사과하고 그 이후에는 케어조차 안 하였다. 사실 작전에 실패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대원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불패의 상승장군 또한 아주 없진 않으나 전쟁사를 통틀어서도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한다는 점에서[14] 알 수 있다시피 전쟁에서 승패는 병가지상사고 모든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약체화된 독일군에게 쳐발린 것도, 고금을 통틀어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이고 당시 독일 측 지휘관인 발터 모델이 겁쟁이나 용렬한 지휘관이 아닌 당대의 손꼽히는 명장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패전 책임을 외국의 망명 장군, 그것도 허접한 똥별이 아니라 충분히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던 장군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운 졸렬한 행동은 후대의 사람들이 '군인'을 평가함에 있어 당연히 크나큰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밖에 없으며, 때문에 후세의 인물들이 보기에 몽고메리의 평가는 당연히 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성질 더럽기로 몽고메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조지 S. 패튼의 경우에도 수많은 실책을 저지른 바 있으나, 최소한 자신의 실패를 남에게 덤터기씌운 일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패튼은 후세의 평가 또한 인성과 별개로 적어도 능력만큼은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마켓 가든 작전은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을뿐더러 영국 제1공수사단은 사실상 전멸하고[15] 미 제82공수사단도 노르망디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쓸모없는 수십 km의 둑길만 차지하는 참패로[16]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서부전선의 전 부대의 진격이 중지되었고[17] 이에 작전 실패와 더불어 미국 언론들에게 맹렬하게 씹히게 된다.[18] 하지만 아이젠하워가 불똥튈 것을 염려했는지 열심히 몽고메리를 옹호해주기도 했고 기껏해야 사단급 출혈[19]이었기 때문에 넘어가게 된다. 결국 라인 강 도하라는 작전 목적이 달성된 것은 작전 6개월 이상이 지난 45년 3월, 그것도 패튼의 손에 이루어진다. 이후 연합군은 망명정부 요청에 따라 보급에 중요한 항구인 앤트워프 해방에 진력했고 캐나다군 13,000명의 사상자를 낸 스헬데 전투를 통해 강 저편의 독일군을 몰아내며 앤트워프 항 사용이 가능해지며 겨우 보급에 숨통이 트인다. 결국 아른헴이 해방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였다.


2.6. 전쟁의 막바지[편집]


1944년 겨울, 독일군은 악천후를 이용해 1940년 프랑스 정복을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미군이 초반에 대패하다가 반격에 성공하여 승승장구하는 동안 몽고메리의 영국군은 네덜란드 지역의 독일군을 소탕하면서 미군 진영이 뚫리게 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전투 종료 후 "몽고메리가 승리를 자신의 덕으로 돌린다"는 기사가 미국 쪽 기자들에 의해 나돌게 된다. 원래 당시 몽고메리의 발언은 "우리도 승리에 일조했다" 정도였지만, "미군의 대승을 질투하는 영국놈"을 만들려는 미 언론에 의해 과장된 것이다. 아무튼 이후 미국쪽의 몽고메리에 대한 평가는 급락한다.

사실 이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몽고메리의 잘못도 있고 그와 동시에 몽고메리의 말이 맞는 점도 있었다. 우선 몽고메리 자신이 자존심+영국에 대한 자부심이 센지라 어느 정도 "미국이 나 없으면 못 이겼다."라는 뉘앙스를 풍긴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아이젠하워조지 마셜은 격분하였고 몽고메리는 해임 위기에까지 몰렸다가 사과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뿐만 아니라 아르덴 대공세가 막 시작되었을 때에는 브래들리에게 "내가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도 안그러더니 꼴이 뭐냐?"라는 식의 모욕을 줘서 이때부터 패튼뿐만 아니라 다른 미군 장성들과도 거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라서, 아르덴 대공세 초기의 패퇴는 미군의 너무나 상황을 낙관한 사단 배치가 원인 중의 하나였으며 몽고메리 말대로 영국군이 쓰고 있던 팬텀 통신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아 초기에는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일부 미군 장성들의 나태한 상황 대처에 뿔이 난 몽고메리의 반응도 있다. 오히려 몽고메리는 자신의 연락장교들을 이용해 연락이 엉킨 미군에 비해 초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야전군을 지휘하는 자신과 거의 동급인 연합군 장군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분명히 정치적, 외교적인 잘못이었다. 하여간 이 더러운 성질은... 덧 붙이자면, 아르덴 대공세는 첩보를 싸그리 무시하고 독일군의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에 "오려면 올테지" 라고 대답하고 전혀 준비를 안해 허를 찔린 브래들리에게는 몽고메리에게 마켓 가든 작전만큼이나 치욕스러운 전투였던 것이었다. 그러니 몽고메리가 저런 실언을 한 것은 말그대로 안그래도 아픈곳을 들쑤신 것...

아르덴 전투 이후 사실상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궤멸 상태가 되었고, 이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손쉬운 먹이가 된 라인 강 도하작전을 먼저 벌이려고 노력했으며, 아이젠하워는 미군의 손실을 우려하여 영국군이 먼저 라인 강 돌파를 하도록 허가했으나 패튼이 몰래 먼저 도하해 버려 또다시 영광을 빼앗긴다.

1945년 5월에 독일이 패망하자, 1945년 6월에 독일을 무찌른 공로를 인정받아 소련에서 전승훈장을 수훈했다. 총 17명의 수훈자 중 서방 연합군 측에서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이 사람뿐이다.


2.7. 전후[편집]


몽고메리 원수는 전쟁이 끝난 후에 연합군측 독일 점령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46년 몽고메리 오브 알라메인 자작에 서임되었고, 영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까탈스러운 성질과 정치적 처세술의 미흡함 때문에 참모총장 당시 평은 영 좋지 않았다. 이후 초대 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 부사령관[20]을 역임, 그리고 NATO에서 물러난 뒤에는 군을 은퇴하여 저술 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문필가로써의 평가는 《전쟁의 역사》도 그렇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평이다. 자칭 시인인 조지 S. 패튼이 악평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밖에도 남아공 백인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거나 대약진 운동 중인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에게 속아 중국이 기아상태라는 말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흑역사를 남겼다.

몽고메리 장군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자신의 라이벌들인 롬멜이나 패튼과는 달리 89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1976년 햄프셔의 저택에서 편안히 사망했다. 사후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 후 몽고메리 장군의 금고를 열었지만 리볼버 권총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고 한다.

죽기 전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는지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주님께 나아가 내가 알라메인에서 앗아갔던 모든 목숨들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겠지...''



3. 평가[편집]



3.1. 긍정적 평가[편집]


몽고메리의 전략적 식견은 그럭저럭 훌륭한 편이었다. 자신이 구성한 전략이 상황에 맞아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인내심도 있었으며, 아군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을 확실하게 계산하고 조성하는, 그리고 그 상황이 왔을 때 적을 압도해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독빠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한국의 밀덕후들은 엘 알라메인의 전투를 소련군이나 벌일 법한 무식한 인해전술 어택땅으로 비하하지만, 그런 소모전이야말로 아군과 적군의 교환비와 작전목표의 성공여부에 대해서 확실한 계산이 서지 않는다면 벌일 수 없는 전투다. 또한 그 당시 아프리카 군단의 전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있는데 무리한 공격으로 자멸했다고 욕먹는 롬멜이 무조건 공격만 한 게 아니라 재공격이 불가능해 보이자 엘 알라메인 방면에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방어선을 깔았고 공세를 시작한 몽고메리의 앞에는 지뢰 50만 발과 즐비하게 깔린 추축군 대전차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승리의 조건을 조성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그냥 죽치고 있었다고 폄훼하는데, 사실 몽고메리가 취임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사를 조금만 훑어봐도 공격할 때가 아닌데 윗분들의 압박 때문에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패배하거나 아니면 명령을 거부했다가 목이 잘린 장수는 엄청 많이 볼 수 있다.[21] 이 말인 즉 윗분들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회피하면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유능한 지휘관이다.

그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처칠은 승리에 대한 조급증으로 몽고메리의 전임자들을 날려버린 전적이 있으며[22] 싱가포르 전투에서도 전멸할 때까지 싸우라는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아서 퍼시발이 일본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결과를 만든 적이 있다. 처칠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빨리 공격하라는 닦달을 했지만 몽고메리는 그런 압력을 무시하고 8군의 역량을 키우는 뚝심을 보였다.

그가 자신의 참모진들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버릇이 바로 "100% 확신하는가"였으며, 영국 8군이 롬멜에게 결정타를 먹일 병력과 자재를 계속해서 보존하여 알라메인의 승리를 거두어 내었다.

매우 까다롭고 욱하는 성격도 강했지만, 온갖 쌍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라이벌 패튼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어휘를 구사하였으며, 부하들을 대놓고 닦달하기보다는 주로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국 영국에 대한 애국심도 매우 강한 인물이었으며, 가족들에게도 무척 자상했던 아버지였다고 전해진다.


3.2. 부정적 평가[편집]


몽고메리 역시 패튼 못지 않게 장교고 사병이고 가리지 않고 닦달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부하들의 총평은 장군이라기보다는 훈련소 교관같다는 것이었다. 퇴역 후 런던시내에서 그의 전 부하가 거리에서 그를 만나 반갑게 인사했지만 "군인 출신인 사람이 복장이 그게 뭔가?"라는 핀잔만 들었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자신은 '고급 장교들은 규정 외 복장이 가능하다'는 거의 사문화된 법규를 절묘하게 이용하여[23][24] 자신을 돋보이려 한 점 등은 사제 전투복과 쌍권총, 승마부츠, 반짝이 철모로 치장한 패튼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기타 인간적인 면모를 뒤로 하고 지휘관으로서의 문제는 사실 위에 서술한 장군으로서의 장점들이 사실 1차 대전에나 적합하단 점에 있다. 전략적인 식견이 있고 작전수립능력도 출중했지만, 상황의 변화에 대처하는 전술적인 능력은 미숙한 편이었고, 특히 마켓 가든 작전의 대참사를 보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요시되던 기갑 전력을 이용한 기동전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했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보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데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경험과 그 개인의 성향 등으로 인한 한계로 보인다. 마켓 가든 작전에서도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하한다는 마켓 작전의 구상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지만, 적군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도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공수부대를 지원할 가든 작전을 말아먹고, 귀한 공수부대도 날려먹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합군 간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매우 중대한 역할을 패튼 못지 않게 했다. 미군이 임무수행을 제대로 못했지만 우리가 잘해서 독일놈들이 졌느니 어쩌니 하는 식의 자뻑과 처칠의 보조를 맞추는 미국 전공 약탈식 행보는 미군의 분노를 일으켰고 후에 아르덴 전투 직후 아이젠하워가 직접 몽고메리의 모가지를 날리려고까지 했다. 롬멜의 비판점 중 한가지가 상관과 타 장군들을 무시하고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는 똥고집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아저씨는 단독작전은 몰라도 연합작전엔 영 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대인배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가 아니었으면 독일군이 지들끼리 싸우기 바쁜 영국과 미국의 사이를 이용해 서부전선을 고착화 시켰을 것도 명백하다.


3.2.1. 패전의 책임 전가[편집]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 인품이 부족한 것은 사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단점을 영국군 원수로서 공적 영역까지 끌고 왔다는 것이 몽고메리라는 인물의 크나큰 결점이라 할 수 있다.

마켓 가든 작전의 처절한 실패 직후인 1944년 10월 17일, 몽고메리는 영국군 참모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폴란드 공수부대를 비판하며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Stanisław Sosabowski)를 전출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영국군 공수군단장 브라우닝 중장 또한 참모차장인 로널드 윅스 중장에게 폴란드 공수부대의 역량에 의구심을 표현하며 '이 장교(소사보프스키)는 위기 상황에서 무력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고 논란을 일으키며 맡은 바 임무들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는데 현재 35년째 영국군 공수부대에서 근무 중인 마이크 러셀 대령은 2012년, 《Polski Bohater》(Polish Hero)에서 이러한 몽고메리와 브라우닝의 행적에 대하여 패전의 비난을 소사보프스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 평가하였다.

사실 폴란드 제1 공수여단은 마켓가든이 이미 다 망한 시점에서 연합군의 강요에 못 이겨 영국 제1 공수사단을 구하려 뛰어든 것이었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악조건에서 제한적으로나마 탈출구를 뚫어준 희생양이었다. 몽고메리도 사적인 자리에서 소사보프스키에게 사과했을 정도이다. 사실 소사보프스키는 처음부터 이 작전이 총체적 난국인 것을 알고 적극 반대했던 인물이다.

소사보프스키는 억울한 누명을 피하기 위해 영국군 관계자에게 자신이 이 작전을 반대했다는 증서를 써 달라고 했다.

그러나 증서를 받은 그는 그냥 증서를 돌려주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다 죽고 나서 이딴 휴지조각이 무슨 소용이겠소...'


결국 1944년 12월 26일,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폴란드 공수여단장에서 물러났는데 모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장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한직에만 머물렀고 33년의 군 경력을 마감하며 1948년 퇴역할 당시에는 300파운드의 퇴직금 뿐 연금조차 받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75살까지 영국의 CAV 일렉트릭스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1967년 9월 25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76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25] 그러나 영국군 장교들은 마켓 가든 작전에서 누구보다 분투하고 정확한 상황 판단을 보였던 소사보프스키에게 패전 책임을 전가한 몽고메리의 이기적이고 뻔뻔스런 면모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26]


3.3. VS 에르빈 롬멜[편집]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을 밀어낸 장군으로 유명하지만 둘을 묶어 라이벌이라 하기엔 둘에게 공통점이 별로 없다.

몽고메리는 롬멜의 기동전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격파한 걸 보면 호적수라기보단 되려 극상성의 인물이다. 롬멜은 호전적으로 정찰하고 다양한 속임수를 써서 적을 속여 공격 기회를 만드는 걸 선호하는 지휘관이고, 몽고메리는 객관적으로 승산이 있다고 판단될 때까지 오래 기다리면서 전력을 모아서 공격하는걸 선호하는 지휘관이다. 쉽게 말해 롬멜은 속전속결로 끝내기, 몽고메리는 기다리다가 힘이 충분히 모이면 확실하게 끝내기. 발터 모델의 전술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또한 몽고메리가 북아프리카의 지휘관으로 배치됐을 때 이미 롬멜의 보급선은 너무 길어져서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병력 소모가 일어나고 연료도 없어 기동전을 할 수 없는 불리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만약 롬멜과 어느 정도 대등한 상황에 배치됐다면 몽고메리 또한 롬멜의 기동전과 속임수에 말려들어서 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롬멜이 그러한 상황에 빠진 것도 안 그래도 영국 해군과 공군때문에 지중해 보급 라인이 불안정해지고 최고사령부는 소련에 신경쓰고 있는데,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당시 북아프리카 군단에는 해당되지 않는 모토로 무리하다가 북아프리카 군단의 전투력을 알아서 깎아먹어서 발생한 일이니 롬멜이 불리한 상황을 아쉬워할 것까진 없다.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본국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적절한 방어 위치 사수나 충분한 보급 대책 없이 자신의 군대를 자동 소모의 길로 몰아넣는 것은 매우 큰 실책이기 때문. 물론 북아프리카 군단의 패망은 애당초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 시점부터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였긴 하다.

그리고 야전 총사령관으로의 자질로도 차이가 극명한데, 롬멜과 몽고메리 둘 다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위아래 없이 덤비는 게 특징[27]인데 그래도 몽고메리는 타 장성들과의 갈등으로 심각한 작전적 피해를 초래하지 않았지만[28] 롬멜은 프랑스 침공때 부터 죽는 순간까지 갈등으로 자신의 예하부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일개의 사단장이 같은 집단군의 타 부대는 고려없이 막 나가다가 아라스에서 작살날 뻔 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는 폰 아르님과 얼마나 심하게 대립했는지 엘 알라메인과 횃불 작전 이후 독일군의 조직적 철수 및 반격작전에 큰 방해가 되었을 정도. 백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인데 폰 룬트슈테트와 방어기갑사단 문제로 미친듯이 싸우다가 이도저도 아닌 위치에 배치하여 초기 독일군 대응 실패를 초래하였으며 공격 이후에도 반격을 지휘하러 온 친위대 장성에 반대하고 폰 클루게 원수와 지휘권 작전문제로 미친듯이 싸우면서 시간을 보냈고 야전 최상급 지휘권의 부재는 독일군이 살기 위해 저항했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반격 및 수비작전 시행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4. 기타[편집]



4.1. 전쟁의 역사[편집]


전후에는 <전쟁의 역사>라는 책을 펴냈는데,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나와있다. 1996년에 책세상에서 상, 하권으로 출간되었다가 2004년에 다시 단권으로(1038쪽, 49000원) 재출간되었다. 안타깝게도 번역의 질은 좋지 않다. 비전문가가 번역한 티가 많이 나서 역사 및 군사 용어나 고유명사들의 오류가 많고, 어색한 표현들이 난무한다. 자주포를 "자동 주행 대포"라고 옮긴다던가, 전투기와 폭격기를 구분하지 못해서 B-17B-24 폭격기를 가리키면서 각각 "포트리스 전투기"와 "리버레이터 전투기"라고 옮긴다던가, 카를 되니츠 제독의 이름이 처음에는 "도에니츠(Doenitz)"로 표기되었다가 몇 페이지 뒤에서는 다시 "되니츠(Dönitz)"로 나오고, 일본 항모 히류는 영어 표기인 Hiryu를 그대로 읽은 "히리우"로 둔갑하는 등... 9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제2차 세계 대전 부분만 들춰봐도 실소가 나오는 오류들이 가득하다.

전쟁사에 관심 있으면 읽어보는 게 좋지만 책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라든가 몽고메리의 개인적인 편견, 몇몇 부분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도 들어가 있으니 그 부분에선 조심하는게 좋다. 당시 서양학계의 정설이라지만 임나일본부설을 대놓고 일본군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고 쓰고 있다. 임나일본부나 인종차별은 당시 워낙 보편적이었으니 넘어간다 쳐도, 제2차 세계 대전 부분 서술에서 지극히 편애적인 차이를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분량이 고작 30여 페이지밖에 안 되는데 그중에서 자신이 돋보이는 엘 알라메인 전투는 무려 3페이지 이상을 할애해 기본골격부터 진행상황까지 자세히 서술한 반면, 가장 큰 실수로 지적받는 마켓 가든 작전은 제대로 언급도 안 하고 서부전선 독일군 최후의 반격인 아르덴 대공세에 슬쩍 묻어가는 식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객관적 시각을 견지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처칠의 대표적인 실책인 갈리폴리 전투에 대해서도 "지휘관들이 온갖 실수를 함으로써 그 멋진 전략적 아이디어는 좌절되고 만 셈"이라고 쓰면서 처칠을 노골적으로 변호한다.

이 저서에서 이순신을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 것이 잘 알려져있다. 다만 이 책에서 한국의 역사는 다루지 않으며, 대신 일본의 전쟁사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패배한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언급된다. 또한 당시 아시아의 해군 전술을 과소평가하는 부분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29]



4.2. 꾀보 몬티[편집]


그 외에도 이 사람에 대해서 소소하게 알려진 일화들로 북아프리카 전선 당시 롬멜에 대한 대반격을 준비하면서 그 작전의 일환으로 자신과 빼다박은 용모를 지닌 연기자를 고용해서 사령부 안에 침투한 독일군 첩보원들을 감쪽같이 낚았다든가,[30] 가짜 부대를 만들 때는 간이 화장실에 일보는 사람 인형도 설치하게 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4.3. 그 외[편집]


전쟁 중 왕가로부터 하사받은 강아지 두 마리를 각각 '히틀러'와 '롬멜'로 이름붙였던 일화로 유명하다.

엄격한 금욕주의자로 한평생 담배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31] 영국인답게 차는 좋아하여 꼬박꼬박 마셨다. 술담배를 즐긴 윈스턴 처칠 총리와 이걸 가지고 대화한 적도 있다. 몽고메리가 "수상 각하, 저는 평생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시고, 담배 한 개비도 피운 적이 없어서 늘 건강합니다."라고 말하자, 처칠은 "장군. 나는 매일 이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고 위스키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지만 이렇게 건강하다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그리고 몽고메리 장군이 88세, 처칠 수상은 90세까지 살았으니 오히려 처칠이 몽고메리보다 더 오래 살았다.

그리고 성격은 그야말로 괴팍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하고 언쟁이 붙으면 마치 사냥개처럼[32]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며, 당시 영국 정계에서 성격이 가장 나쁜 것으로 유명했던 윈스턴 처칠 수상조차 포로가 되어 몽고메리 장군과 잠시 이야기하게 된 빌헬름 리터 폰 토마 장군[33]을 "성질 고약한 몽고메리와 이야기하게 됐다"고 동정할 정도였다.

마티니의 바리에이션 중에 몽고메리라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진과 베르무트를 15:1로 한 것인데 헤밍웨이도 마신 바리에이션이라고 한다. 이름의 유래가 몽고메리 장군은 자기병사 대 적의 비율이 15:1이어야 싸울거라고 하는 비아냥으로 만든 바리에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몽고메리 자작은 손자까지 3대가 이어지고 있으나, 현재 자작인 1954년생 손자에게 아들이 없고,[34] 방계로 이을 형제나 사촌 역시 없기 때문에 3대에서 끊어질 예정이다.[35]


4.4. 대중매체에서[편집]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 영국군 원수로 나온다. 능력치는 쓸만하지만, 현실처럼 상황변화에 잘 대응하지 못하고 본인의 성향에 반영한 것인지 '보수파' 트레잇이 달려있다.

파일:로드 투 발러/에드워드 몬티.jpg

"에드워드 몬티"가 탑승한 지휘차량입니다. 강력한 리더쉽으로 아군을 결집 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백전불패의 장군입니다. 그의 명성은 사막의 여우 롬멜도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 게임 로드 투 발러:월드워2에서 '에드워드 몬티'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일러스트가 영락없이 몽고메리이다. 보시다시피 인게임 설명에서는 "강력한 리더쉽으로 아군을 결집 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백전불패의 장군"이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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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고메리는 영어 발음을 근거로 한 표기는 아니나 엄연히 표준 표기다. 자세한 것은 몽고메리 참조.[2] 현재는 런던 램버스 소속[3] 몽고메리 자작은 손자까지 3대가 이어지고 있으나, 현재 습작받은 1954년생 손자 헨리 몽고메리에게 아들이 없고, 방계로 이을 형제나 사촌 역시 없기 때문에 3대에서 끊어질 예정이다.[4] 실질적인 집안의 가장은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주로 어머니에게 지시를 받는 등 집안에서 힘이 없었다고 술회한다.[5] 젊은 시절 어머니가 대가족의 모든 가사를 책임지느라 힘겨워했고 그래서 규칙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으로 그 어려움에 대처해야 했는데, 유독 몽고메리는 그런 어머니의 권위와 목적에 자주 충돌했다.[6] 그 당시 모두 몽고메리가 곧 죽으리라 생각했고, 죽은 뒤 묻을 무덤까지 파놓았다고 한다(...).[7] 그의 형인 브라이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장갑전투차량을 활용하기 위한 자신의 개념을 모래에 그림으로 그려가며 보여줬다고 한다.[8] 1928~2020, 아버지 작위를 물려받아 2대 당주가 되었다. 3대 당주는 데이비드의 1남 1녀중 장남인 헨리(1954년생)인데, 딸만 셋을 두었다.[9] 몽고메리는 보병장교 출신이고 패튼은 기갑장교 출신이란 점도 두 사람의 작전견해 차이가 정반대인 이유 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다.[10] 오죽하면 패튼의 승리를 보며 병사들이 병사들의 피와 패튼의 고집으로 이뤄낸 승리라고 할 정도였다.[11] 고향이 그리운 병사들은 물론, 차기 대통령 후보를 노리던 아이젠하워에게는 군침을 삼킬만큼 매력적인 대권 보증수표였다. 귀환병들과 그 가족들이 모두 자길 찍어 준다면...[12] 작전 개시 직전 아른헴 근방에 독일 전차부대의 이동이 확인되었으나 지나가는 부대 정도로 폄하되며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13] 해당 전투에 참여한 폴란드 공수여단장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패배의 책임을 전가받고 이후 한직을 맴돌다 전후에 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하여 살다가 죽었다.[14] 무수한 침략을 받아온 한반도에서도, 10번 이상의 전투를 진두지휘했고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은 장수는 딱 하나밖에 없다. 그 외에는 한두 번 정도의 전투만 수행했던가, 혹은 소규모의 패배를 당한 후 절차탁마하여 대승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스포츠로 봐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이영호의 승률이 71%, 3경기 중 1번은 졌는데도 압도적인 강자로 불린다. 양키스 같은 강팀도 하위권 팀에게 잡힐때가 왕왕 있고...전쟁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보니 온갖 변수가 발생한다.[15] 이후 다시는 전투강하를 못했다.[16] 후일 몽고메리가 이 작전을 90%의 성공이라 자평한 것에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우리나라는 몽고메리가 한번 더 성공해도 될 만큼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대차게 비꼰 것이 유명한 일화.[17] 이는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제4화 보충병에서 닉슨이 언급하기도 했으며 모든 전투계획이 그러하지만 특히나 공수부대의 전투강하는 기습적인 목적이 강하며 또 보급 등의 여러문제로 유럽에서의 연합군의 진격은 멈춰있던 상황이었다.[18] 정작 패튼은 보급 정체만 신경썼을 뿐 몽고메리의 실패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논평을 하지 않았다.[19] 공수부대가 정예병력이라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공수부대는 공수 작전을 안 하면 일반 보병부대에 비해 약간 높은 전투력 이외엔 특별한 가치는 없다. 공수 훈련에 들어간 비용이래야봐야 요즘 특수부대들처럼 비싼 장비들을 떡칠한 것이 아니기에 비싼 것도 아니었고.[20] 당시 사령관은 미 육군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였다.[21] 당장 이순신도 이랬다가 정유재란 직전에 잘렸다. 그리고 그 후임자 원균은 이때다 싶어서 딸랑거리다가 역으로 본인도 윗선의 지시로 싸우러 나갔다가 함대를 몽땅 말아먹는 대참사를 저질렀다.[22] 전임자인 클로드 오킨렉은 롬멜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처칠의 무리한 반격 요구를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가 짤렸다⋯. 정확히 말하면 오킨렉은 몽고메리의 상관인 해럴드 알렉산더의 전임자(둘 다 중동 사령관)지만 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오킨렉이 8군까지 직접 지휘했으니 몽고메리의 전임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8군 지휘관은 닐 리치(Neil Ritchie) 중장이었으나 가잘라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오킨렉에 의해 교체되었다.[23] 당대 고급 장교들의 기본 스킬인 지급 제복 대신 양복점에서 맞춘 사제 제복 착용은 기본이고 그 외에 베레모에 모표 두세 개 달기, 전투복 상의보다 긴 사제 스웨터 입기,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플러 착용 등 셀 수 없을 정도.[24] 괴랄하게도 보병 출신인데도 기갑부대 베레를 썼다. 그렇다고 언제나 기갑부대 베레를 쓰진 않았다. 마켓 가든 작전 중에는 공수부대 베레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지휘하는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대의 베레모를 쓰고 다닌 것.[25] 무엇보다 소사보프스키는 가정적으로도 불행했는데 장남은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가 전쟁에 참전해서 오른쪽 눈까지 잃어 장님이 되었고, 차남은 총기 사고로 사망했다.[26] 그후의 이야기를 좀 더 쓰자면, 1969년 소사보프스키의 유해는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와 포봉즈키 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006년 5월 31일,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은 소사보프스키에게 청동사자상(Bronze Lion)을 추서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27] 몽고메리는 그 유명한 성깔머리 처칠에게 대든 기록이 있는 사람이다.[28] 물론 여기엔 브래들리의 적절한 중재도 있었다.[29] 전쟁의 역사, 책세상 95년 1판 1쇄/2004년 개정증보판 1쇄.[30] 이것은 몽고메리가 SAS를 동원해 롬멜 암살 작전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그 보복이 염려되어서였다.[31] 술의 경우는 아예 알쓰 수준이었다는 듯. 오죽했으면 오마 브래들리가 마켓 가든 작전을 입안한 몽고메리를 보고 '술을 전혀 못하는 그가 인사불성으로 취해 걸어왔다고 해도 그보다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32] NGC <전쟁의 대가들 - 몽고메리 대 롬멜>[33] 1891.9.11.~1948.4.30. 1912년 바이에른 왕국군에 임관하여 1차 대전에 참전, 솜 전투 등 격전을 치르며 2급, 1급 철십자 훈장 및 막스 요제프 십자장을 수훈하였고,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도 잔류한 엘리트 장교이다. 차량화 전술에 대해 깊이 교육받은 지휘관으로서 그는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1941년의 동부 전선을 거쳐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원수의 부하 지휘관으로 종군하였다. 비록 상관과의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헌신적인 지휘관으로서 토마는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몽고메리의 총공세에 의해 아프리카 집단군이 와해 위기에 놓인 1942년 11월 3일, 토마는 히틀러의 후퇴 중지 및 현 위치 고수 명령에 반발하며 자신의 기갑군단 사령부에서 예비 전차 1량을 몰고 나와 전장의 병사들에게로 달려갔다. 전차가 여러 발의 포탄에 피격되며 그는 경상을 입었고, 결국 이튿날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 처칠 경의 걱정대로 토마 장군이 몽고메리 원수와 이야기하며 괴로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몽고메리는 토마 장군의 영국군에 대한 이해도가 자기 생각보다 훨씬 깊음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후 토마는 영국군의 포로로 지냈으며, 1948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최종 계급은 국방군 육군 기갑대장.[34] 딸만 셋이다.[35] 몽고메리 자작위는 1대 자작의 직계 남성 후손만 세습이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