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2세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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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바사 왕조 제6대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Gustav II Adolf

파일:Gustavus_Adolphus.jpg}}}
출생
1594년 12월 9일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로노르[1]
사망
1632년 11월 6일 (37세)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뤼첸
재위
스웨덴 왕국의 왕
1611년 10월 30일 ~ 1632년 11월 6일
배우자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 (1620년 결혼)
자녀
크리스티나 여왕, 구스타브 (사생아)
아버지
칼 9세
어머니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나
형제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사베트, 칼 필리프
종교
개신교 (루터교회)
서명
파일:구스타브 2세 아돌프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업적
3.1. 군사
3.1.1. 반론
3.2. 내치
4. 영토 확장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편집]


나는 내 생명을 내걸고 그대들과 함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

바사 왕조 제6대 스웨덴 국왕, 핀란드 대공 (1611년 ~ 1632년 ). 영미권에서는 라틴어식 이름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로 더욱 알려졌다. 스웨덴에서의 별칭은 대왕(Gustav Adolf den store).

별명은 북방의 사자(Der Löwe aus Mitternacht)[2]이나 황금의 왕[3]으로 불렸다.


2. 생애[편집]


나중에 스웨덴 국왕 칼 9세가 되는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나[4]의 맏아들로, 스웨덴의 독립 시조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손자였으며 외가로는 덴마크 올렌보르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

칼 9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중 뇌졸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문제는 부왕으로부터 스웨덴 왕위와 동시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개판이 된 스웨덴의 외교 상태도 물려받았는데 1611년 당시 스웨덴은 그야말로 사방이 적이었다. 당장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4세와 핀마르크 지방 문제를 두고 칼마르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칼 9세가 조카이자 구스타브 2세에게는 사촌형이 되는 시기스문드의 스웨덴 왕위를 찬탈해 즉위한지라 폴란드-리투아니아와도 적대관계였던데다가, 루스 차르국혼란 시대에 개입하는 바람에 루스 차르국과의 외교 관계도 망가진 상황이었다.[5]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 개혁에 착수하는 동시에, 30년 전쟁 중반부터 참전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여 위기에 몰렸던 개신교 세력을 구원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협했다.

그러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피콜로미니의 기병 돌격에 자신이 신임하던 청색 연대가 붕괴되고 스웨덴군이 위기에 몰리자 이를 수습하다가 피콜로미니의 기병에 의해 전사하였다. 전투 자체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오판으로 스웨덴군이 승리했지만 국왕과 정예병을 상당수 잃어버린 스웨덴의 손실은 뼈아팠다. 아들을 남기지 못해 딸이 크리스티나 여왕으로 즉위했다.


3. 업적[편집]



3.1. 군사[편집]


30년 전쟁에서 여러 혁신적인 전술을 내놓아 활약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때문에 일명 근대전의 아버지 라는 별명이 잘 알려져 있다. 클라우제비츠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겼고, 조지 S. 패튼 등도 그러한 평가를 내렸다.

군사행정에 있어서는 초기형의 국민개병제 하의 상비군을 만들어서 어느 정도 훈련된 대규모 징집병을 동원할 수 있었고, 보병전에 있어서는 테르시오로 대표되는 두꺼운 사각방진 대신 얇은 선형진을 도입해 높은 화력과 포병에 대한 회피능력을 만들었으며, 기병전에 있어서는 종래의 카라콜 전술을 버리고 다시 돌격을 중심으로 한 교리를 만들어 기병을 다시 부각시켰으며, 포병전에 있어서는 경량화 된 야전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기동성을 높히고 테르시오 같은 두꺼운 방진을 격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해군 역시 현대 스웨덴군까지 이어지는 체계를 정비하였다.

특히 인구나 자원 같은 물적 악조건을 내부적 시스템 개선을 통해 만회하는 정도를 넘어 패권을 행사할 만큼 끌어 올리는 강소국의 탄생이란 면에서 구스타브 아돌프 치하의 스웨덴은 먼 훗날 독일 제국을 만든 프로이센 왕국의 모델이 될만큼 중요했다. 당장 구스타브 아돌프가 죽은 후 70여 년 뒤 스웨덴 제국의 패권을 대북방전쟁을 통해 결정적으로 꺾어놓은 러시아 제국 표트르 대제의 모델도 역설적이지만 이 시기 스웨덴이었다.


3.1.1. 반론[편집]


21세기 들어서 로버츠가 제시했던 유럽 군사사 해석의 강고한 틀은 점점 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혁신적인 네덜란드, 스웨덴군과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테르시오라는 이분법이 허물어지고 있다. 기존의 군사 혁명론 테제에서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군의 테르시오는 16세기 전장을 지배했으나 17세기에는 도태될 운명의 둔중한 전술 대형이었고, 새로이 등장하는 혁신적인 군대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많은 연구들은 이러한 이분법이 실제 역사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기존의 많은 군사사 서술은 스페인의 테르시오를 거대한 사각형의 전술 대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 특히 스페인어권 연구자들은 그러한 개념은 오해이며, 테르시오는 스페인군 보병 연대를 가리키는 고유 용어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스페인이나 신성 로마 제국군의 테르시오는 항상 거대한 사각 방진 대형을 치고 싸웠던 것이 아니라, 지형과 전술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전술 대형을 유연하게 채택하였다. 장창과 화기 중 어떤 무기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지 여부도 상황에 따라 달랐다. 영어권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 연구의 대표적인 권위자인 피터 윌슨 역시도 17세기 들어서 ‘둔중한 사각 방진’은 제국군에서 이미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과 제국군의 대결은 ‘혁신’과 ‘반동’의 대결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흔히 거론되는 제국군의 낡은 테르시오보다 우수한 스웨덴군이라는 개념은 실제 사료적 뒷받침이 전무하며, 역사를 근대화를 향한 단일한 전진으로 바라본 19세기적 사관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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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잉글랜드군 전술 교리의 재검토: 스튜어트 시대 잉글랜드는 군사적으로 낙후되었는가(2022)

구스타브 2세는 근대전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군사 천재라고 오랫동안 알려졌으나 최근 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 구스타브 왕이 군사 혁명의 선구자라는 로버츠와 파커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윌슨에 따르면 구스타브의 군대나 틸리-발렌슈타인의 군대나 별 차이가 없었고[6] 뤼첸 전투에서 전술적인 실책을 보여주며 정예병들을 다수 잃었다. 단, 기병의 "접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다.[7]

구스타브 2세는 기병의 근접 접촉을 늘리고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구스타브 왕의 기병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8] 그러나 구스타브 왕의 기병과 발렌슈타인-파펜하임-피콜로미니의 기병은 큰 차이가 없었다.[9]

구스타브 왕이 "구식" 스페인식 테르시오 전술에 비해 더 얇은 진형을 갖춘 선형 전술을 썼으니 선진적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우선 테르시오는 전술이 아니라 스페인의 정예한 연대를 부르는 말이고 총병 비율이 구스타브 왕의 보병보다 더 낮기는 했지만 그만큼 대(對) 기병전에서 더 효과적이었다. 뤼첸 전투에서 피콜로미니의 기병은 카라콜을 했는데[10], 스웨덴의 정예한 청색 연대는 제대로 대항도 못 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게 되었을 정도로 구스타브 왕의 보병은 대(對) 기병전에 효율적이지는 않았다.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 포병이 황제군의 포병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구스타브 왕을 포병이 야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한 선구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17세기 야전에서 포병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야전에서 포병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최초의 전투는 1709년 말플라케 전투다.[11] 그렇지만 사보이아 공국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가 구스타브 2세의 스웨덴 포병을 보고 포병의 중요성을 간파해 포병 육성에 힘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17세기의 전선에서 포병이 중요하지 않았더라도 스웨덴 포병이 당대 유럽 국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3.2. 내치[편집]


대한민국에서는 30년 전쟁의 주요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스웨덴에서는 국내 개혁을 더 높게 평가한다. 문제는 그렇게 쌓아올린 국가적인 역량을 다 전쟁에 쏟아부었다는 것이며 스웨덴은 그 시기 프랑스마냥 전쟁과 내정이 동시에 가능한 미친 국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당장 전쟁부터가 가진 모든 것을 짜내야 가능한 수준의 국력이었기 때문에 승전과 개혁이 황금기로 이어지지 못했다.

전국에 재판소를 세워서 법치주의의 근간을 마련했고, 잦은 전쟁으로 폐교 위기에 몰렸던 웁살라 대학교를 다시 부흥시키는 한편 에스토니아 타르투에 타르투 대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한, 네덜란드에서 차관을 빌려 팔룬 등지에 구리광산을 개발했는데, 이 대목은 경제적, 군사적인면 모두 중요하다. 스웨덴의 무역 규모를 10배 가까이 끌어올리는 동시에 대포의 대량 보유를 가능케 해서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 당시 대포는 내열성 때문에 포신을 청동으로 주조해서 그렇다.

참고로, 철제 주물 대포 같은 것도 있었으나 청동제 대포에 비해 훨씬 저렴했지만 신뢰성이 낮아 초기엔 거의 해적들이나 쓰는 용도였다. 그러나 그런 주철 대포를 헨리 8세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아르마다를 격파하는데 쏠쏠하게 써먹으면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강철 포신으로 된 대포는 19세기 독일의 크루프 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였다.

이외에도 군사 개혁과 맞물려 군관구를 창설했고 오늘날 스웨덴핀란드[12]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스웨덴의 예테보리, 우메오, 룰레오, 핀란드의 우시카우풍키(Uusikaupunki)[13]와 소르타발라(Sortavala)[14]를 세웠다.


4. 영토 확장[편집]


잦은 정복 전쟁을 통해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사촌형 지그문트 3세와의 스웨덴 왕위 계승 분쟁으로 스웨덴-폴란드 전쟁을 벌여 리가를 포함한 리보니아를 실질적으로 석권했으며 1660년 올리바 평화 조약으로 폴란드 바사 왕조의 스웨덴 왕위 주장이 철폐될 때 공식적으로 영유를 인정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러시아발트해 진출을 100년이나 늦춘 장본인이다. 동란 시대에 개입하여 동생인 칼 필리프 공작을 차르 후보로 내세워놓고 이를 철회하는 것을 핑계삼아 새로 선출된 루스 차르국의 초대 차르 미하일 1세를 압박하여 켁스홀름(Kexholm)[15]잉에르만란드(Ingermanland)를 할양받아 발트해로 나오는 길을 원천 차단시켰다. 때문에 루스 차르국은 서유럽과 교류하기 위해 아르한겔스크를 이용하여 백해 무역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으나 백해가 1년 대부분 얼어있는 바다라 서유럽과 교류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미하일 1세의 손자 표트르 대제가 즉위하고 대북방전쟁 도중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고 나서야 러시아인발트해를 이용하여 서유럽과 교류할 수 있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얻는 스웨덴의 독일 영토인 포어포메른[16] 같은 경우도 구스타브 2세의 사전 장치 덕분에 획득이 가능했다. 본래 포메른의 통치 가문인 그라이펜 가문은 1532년 체결된 그림니츠 조약으로 만약 가문의 대가 끊기면 브란덴부르크에서 포메른을 상속받게 합의하였으나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처남인 게오르크 빌헬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구스타브 2세는 오데르강 하구를 틀어막아 이윤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마지막 포메른 공작 보기슬라프 14세를 구워 삶아 사후 포메른이 양쪽으로 분할되어 상속될 수 있도록 장치를 해두었고 결국 스웨덴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포어포메른 뿐만 아니라 포메른 공국의 수도인 슈테틴까지 가져가 호엔촐레른 가문을 엿 먹였다.


5. 기타[편집]


같은 성격[17]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당대 최측근이 그 성격을 두고 "모두가 폐하와 같이 뜨겁다면 다 타버려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런 성격 탓에 "누가 자기 앞에서 말을 얼버무리거나 더듬는 것을 참지 못 했으며 심지어 그게 적국이 보낸 사신이라고 해도 도로 내쫓아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하인이 자신의 앞에서 우물쭈물거리고 답답하게 굴자 을 때렸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런 불 같은 성격 탓에 "만약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죽지 않았다면 30년 전쟁은 30년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전쟁을 임하는 입장에서도 그냥 조금 유리한 상황에서 황제와 조약을 맺는 선으로 끝내려는 개신교 제후들과 다르게, 구스타브 2세의 경우는 "내 말대로 안 할 거면 그냥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극단적 중 극단적인 입장이라 같은 편인 개신교 제후들과도 마찰이 많을 정도였다. 아군이랑도 반목할 정도였으면 얼마나 구스타브 2세의 성격이 불 같았었는지, 그 성격을 감안하고도 같은 편으로 남았을 정도였는지 그 능력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식 상비군의 시초답게 자신이 직접 키워낸 상비군에 애정이 많았던지 "자신의 병사들과는 숙식을 같이 했고 발이 가라앉는 진창에서도 직접 병사들 사이를 시찰하고 안부를 물었다."는 기록이 있고 "웬만하면 병사들의 실수는 그냥 넘어갔다."는 언급도 있다. 당시 시대에는 병사들에게 줄 돈이 체불되거나 미뤄지는 건 거의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18]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경우, "돈이 밀리면 보급품이라도 잘 챙겨줬다."고 상비군에 대하여 잘 대해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보수는 한참 미뤄다가 주는 게 당연하고 보급품은 자비로 챙겨가야 하는 시대인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병사들에게 잘 해줬는지 "전장에서 왕이 죽었을 때, 그 소식에 모랄빵이 난 게 아니라 병사들이 분노에 차서 돌격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는 왕, 군사적으로는 총지휘관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를 이겼다.

왕비는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이며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이다. 결혼하던 시절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가 구혼을 하러 신분을 숨기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갔을 때,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아버지이자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요한 지기스문트는 그의 정체를 알게 되자 미래의 사위에 대해 매우 흡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한 지기스문트가 술병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구스타브 2세에게 적대적이었던 게오르크 빌헬름[19]이 즉위하면서 양측의 결혼은 사실상 파토난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구스타브 2세를 만나본 게오르크 빌헬름과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어머니 프로이센의 안나[20]가 이 결혼을 무조건 진행시켜야겠다고 마음먹어서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프로이센 공국까지 건너가 결혼 협상을 진행한 덕분에 결혼할 수 있었다. 구스타브 2세와 왕비의 사이는 좋았으나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스웨덴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 했고 왕자를 출산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 결국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 나중에 크리스티나 여왕을 낳은 후 "더 이상 임신이 어렵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구스타브 2세는 아들 낳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외동딸에게 남자 옷을 입혀 키웠다. 문제는 구스타브 2세 본인이 30년 전쟁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죽은데다, 즉위 당시 크리스티나 여왕의 나이가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는 것. 심지어 전쟁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수준을 넘어 일을 몇 배로 벌려놓고 죽은 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30년 전쟁을 종료하기까지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가 키워놓았던 국력 중에 상당히 많은 힘을 전쟁을 끝내고 그 후유증을 이겨내는데 소모해야 했다.

외동딸 크리스티나 여왕은 어린 시절 남장을 하고 자란 탓인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 해서인지[21] 꽤나 특이한 인물로 성장했다. 스물이 넘어서까지 신하들이 "결혼은 언제 할 꺼냐?"는 닥달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로 떠나면서 한때 유력 결혼 후보였던 외사촌 오빠인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 카를 구스타프[22]에게 양위하면서 스웨덴 바사 왕조는 단절되었다. 그 후 퇴위할 때 왕실의 귀금속을 몽땅 들고 나갔어도 호화 사치 생활을 하고 금방 탕진한데다가 금새 본국에 손을 벌려 본국에선 아버지와 달리 불평을 엄청나게 샀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크리스티나를 귀빈으로 대우했고, 사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묘소를 마련해줬다. [23]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투가 벌어지면 늘 앞장서서 싸웠으며, 이 때문에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지만, 끝내 죽는 순간까지도 앞장서서 싸우는걸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선두에서 싸우다 폴란드군 저격수가 쏜 총에 어깨를 맞아 팔과 손가락에 장애가 왔으며[24] 이후 무거운 금속 갑옷을 입지 못 해 소 가죽으로 만든 버프 코트만을 걸치고 다녀야 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군대가 늘상 뛰어난 사기와 전투력을 자랑했던 이유가 바로 그의 이런 행동에 힘입은 것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나쁘게 볼 수는 없지만, 상술한 뤼첸 전투에서 그를 전사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해당 전투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다시는 갑옷을 입지 못 하게 되면서 말단 스웨덴군의 지휘관들 사이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본받기 위해 점차 금속 갑옷을 입지 않는 퐁조가 퍼지기 시작했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또한 이를 알고 병사들을 이끌어어야 할 지휘관들이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 것에 경악하고 갑옷을 착용하라고 명령했으나 해당 명령에 복종하는 장교들이 없었다고 한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30년 전쟁에서 득세할 때,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사이에는 "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구스타브 자신도 비공식적인 언급으로 메클렌부르크 공작에게 "내가 만약 황제가 된다면..."이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스웨덴인 황제를 뽑느니 차라리 미친 사람이라도 독일인 황제가 더 괜찮다는 제후들의 결사적인 반대 탓에 어영부영 무산되었다.[25]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독일 내에서 개신교의 보호자로는 환영을 받았지만, 쭈구리가 된 독일 개신교 제후들을 향해 소리치거나 겁박하고 겁쟁이라 구박을 주는 탓에 정작 황제후보로는 평이 좋지 않았다. 다만 구스타브가 독일에 상륙하기 전까지 개신교 제후들은 가톨릭 세력에게 가루가 될 정도로 개박살이 나서 항복 직전이었기에 겁쟁이 아니면 쭈구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26]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구스타브 2세의 포메른 상륙 이전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 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 개신교 측으로 참전했다가 처참하게 대패를 해서 현타가 왔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조차도 자신들이 졌다고 여겼지, 끝끝내 역전해서 가톨릭을 패배시킬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편집]


스웨덴의 메탈 밴드 Sabaton의 The Lion From The North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사람을 다룬 곡이다.

문명 5에서는 스웨덴의 지도자로 등장. 문명 5/등장 문명/스웨덴 문서 참조. 문명 6에서는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하며, 확장팩에서 스웨덴의 지도자가 딸 크리스티나로 낙점되어 지도자로 등장하지는 못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결정판에서 스웨덴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1419년에서 1819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는 게임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유로파 유니버설리스 2에도 등장한다. 군주로서의 능력치는 9, 9, 9[27]에지휘관으로서의 능력치는 6/6/5/1로 동시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등 30년 전쟁의 지휘관들을 발라먹는 위엄을 자랑한다. 4에서도 마찬가지로 6, 6, 6의 최대 수치를 가진 군주로 나온다.[28]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여러 퀘스트와 이벤트에서 얼굴을 비추고, 또 가나돌 NPC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모바일 게임 라스트오리진에서 이 인물을 본딴 철혈의 레오나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주인공 안토니오 꼬레아의 지인으로 등장하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숙적으로 짧게 언급된다. 또 바사 호와 관련되어 언급되기도 한다.

대체역사소설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에서는 작중에서는 이윤신으로 나오게 되는 이순신을 유래없는 명장이라 평가하는 당대 인물로 등장한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는 A급 항해사로 등장한다. 포격술 스탯이 높고 포격과 관련된 좋은 스킬들이 많아 평가가 매우 좋은 편. 스웨덴어 레벨이 무려 5나 되어서 스톡홀름 등의 도시에서 언어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소소한 장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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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스톡홀름 왕궁의 전신.[2] 30년 전쟁 당시의 맹활약으로 개신교군이 붙여준 별명. 스웨덴어로는 Lejonet Från Norden[3] 이탈리아 용병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 이탈리아어로는 일 레 도로(il re d'oro)라고 한다.[4]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초대 공작 아돌프의 둘째딸. 아돌프는 덴마크-노르웨이 프레데리크 1세의 막내아들로 훗날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의 왕조가 되는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시조이다.[5] 참고로 칼 9세가 바실리 4세를 구원하기 위해 원병을 보내면서 지그문트 3세가 혼란 시대에 직접 개입했다. 결국 혼란 시대에 개입해서 루스 차르국과의 관계도 망가지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는 이중으로 사이가 벌어진 셈.[6] Lutzen(2018)[7] The new knights(2021)[8] The new knights(2021)[9] Lutzen(2018)[10] Lutzen(2018), Wallenstein's Army, 1625-1634(2019)[11] Malplaquet 1709(2020)[12] 스웨덴어로는 Län, 핀란드어로는 Lääni.[13] 스웨덴어로는 뉘스타드(Nystad). 대북방전쟁을 끝낸 뉘스타드 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유명하다.[14] 스웨덴어로는 소르다발라(Sordavala). 겨울전쟁의 패전으로 핀란드가 소련에게 빼앗긴 전략적 요충지이다.[15] 현 러시아 프리오제르스크.[16] Vorpommern.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독일 영토인 포어포메른은 스웨덴이 오랫동안 점유하였고, 현대 독일연방공화국의 뿌리인 브란덴부르크의 포메른 영토였던 힌터포메른(Hinterpommern)은 현재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17] 아마도 바사 왕조의 성격적인 유전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구스타브 1세와 백부 에리크 14세, 요한 3세, 아버지 칼 9세 모두 다 비슷한 성격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8] 당시 상비군이나 용병들의 월급이 밀린 것을 점령한 지역의 약탈품으로 대체하는 것은 굉장히 흔했고, 실제로 이 때문에 치안 문제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에서 저항을 마주한게 흔한 일이었을 정도로 군인에 대한 대우는 징집병이건 상비군이건 크게 다르지 않았을 정도였다.[19] 게오르크 빌헬름은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주군인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에게 충성을 다했다.[20] 요한 지기스문트와는 근친결혼이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가 이 근친결혼 덕분에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21] 아버지는 일찍 전사했고, 어머니 마리아 엘레오노라가 끝내 정신이상이 온 바람에 고모인 카타리나 공주 밑에서 자랐다.[22] 누나 카타리나 공주의 아들로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의 시조이다.[23] 다만 크리스티나 여왕은 내치적으로 학문에 힘쓰고 프랑스의 유명 철학자 데카르트를 초청하는 등 스웨덴의 문화 및 학문에 과도하게 힘을 썼고, 이 때문에 국가적이나 귀족들에게는 비판을 받았을 지언정 스웨덴 민중들에게는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24] 오른쪽 어깨에 맞았는데 저격수의 총알이 워낙 깊이 박히다보니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도저히 제거할 수가 없어 수술이 실패하고 만다. 어깨에 박힌 총알은 신경을 자극하여 구스타브가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했고 팔과 손가락을 못 쓰게 되었다.[25]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곧 독일왕이었고,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프랑스계 성향이 짙었던 하인리히 7세체코인으로의 정체성이 강했던 하인리히 7세의 손자 카를 4세를 제외하면 독일인이었다. 19세기 이전에도 민족주의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독일 지역의 왕은 독일인, 하다못해 독일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개념은 있었다.[26] 그들의 적이자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지독하게 자비없는 인물인 것도 한몫했다. 일례로 보헤미아 전쟁에서는 보헤미아 왕위를 날치기하며 반역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영토 뿐만 아니라 선제후 작위까지 빼앗아서 자신의 동맹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한테 쥐어주고 반역한 신교 귀족들의 땅은 죄다 몰수해서 땡처리 했다. 덴마크 전쟁에서는 반역한 메클렌부르크 공국을 회수해서, 그 당시엔 아직 자신의 충신 코스프레를 하고 있던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한테 하사했다. 이렇듯 유서 깊은 영지들도 마구잡이로 몰수하고 선제후 작위조차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줬던 황제를 신교도 독일 제후들은 매우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동양과 다르게, 당시 서구권의 기준으로 볼 때 이렇게 영지를 왕이나 황제가 자기 마음대로 줬다 뺏다 하면 폭군 수준을 넘어서 아예 미치광이라 불렸다. 하지만 개신교 제후들은 끝끝내 스웨덴인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보다 이런 미치광이가 황제인 게 괜찮다고 여겼던 게 스웨덴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긴 했다. 적이었던 개신교 제후들만 아니라 심지어 황제와 같은 편이었던 가톨릭 제후들에게조차 막나가는 미치광이 폭군으로 여겨졌던 황제 페르디난트 2세였는데도 말이다.[27] 4편에서는 6,6,6이 능력치 한계지만 2편과 3편에서 군주 능력치는 3-9 사이였다.[28] 캠페인 내 최대 수치를 가진 군주는 구스타브를 포함해 악바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표트르 대제 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