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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麴義
?~197?
1. 개요
4. 평가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인물이자 원소의 수하 장수로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양주 서평군 출신.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야말로 잡장 그 자체의 취급을 받았지만, 알고 보면 삼국지의 숨은 맹장으로 후한 말 군웅할거의 흐름을 바꿔버린 장군이다.


2. 정사[편집]


자치통감에 따르면 전한 상서령 국담(鞠譚)의 후손으로 그 집안은 원래 국(鞠)씨였다가 이후 국담의 아들 국비(鞠閟)가 난리를 피하여 서평으로 도망가서 국(麴)씨로 고치며 살았다고 한다.

국의는 오랫동안 양주의 국경 지대에 주둔하여 강족의 전술에 능하였다. 처음에는 한복을 섬겼는데 그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한복과 싸우나 패한다. 원소는 한복을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국의와 서로 결탁했다.

어부라장양을 납치한 후 원소를 배반하고 반기를 들자 원소의 지시를 받아 어부라의 군대를 업현 남쪽에서 격파했다.

192년, 계교 전투가 발발하는데 국의는 여기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 공손찬이 원소를 공격하기 위해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하에 주둔하자 원소가 국의에게 영을 내려 방패를 든 8백의 군사와 1천의 강노대를 이끌게하여 선봉에 세우고 원소 자신은 보병 수만으로 후위에서 진을 형성했다.

공손찬은 원소군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기병을 보내 원소군을 공격했다. 국의가 이끄는 병사들은 방패 아래에 숨어 움직이지 않다가 공손찬의 기병대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자 동시에 모두 일어나면서 돌진했으며, 원소군의 강노 부대가 강노를 발사하여 공손찬의 기병 천명을 대파하고 공손찬이 임명한 기주자사 엄강을 사로 잡아 참수했다.

이어진 추격전에서는 다리 위에서의 공손찬의 후위 병사까지 격파하고 마침내 공손찬의 진영까지 들어가 아문(牙門)을 뽑아버리고 대장기를 노획하는 등 맹활약한다. 이렇게 원소의 전군이 패주하는 공손찬군을 쫒는 상황에 원소는 다리에 이르러 승리를 확신하고, 말의 안장을 풀었다. 이때 원소 주변에는 수십명의 강노병과 대극병만이 있었는데, 이 때 흩어졌던 공손찬의 부하들 2천명이 이를 노리고 포위해서 공격해와 긴급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전풍이 원소를 데리고 도망치려하자 원소는 오히려 투구를 벗어던지며 맞서 싸웠고, 이에 원소군이 사기가 올라 항전하고 때마침 국의가 와서 공손찬 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195년 12월, 원소는 국의와 유우의 아들 유화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선우보와 합쳐 공손찬을 대파하고 2만의 수급을 얻는다. 그러나 역경성에 들어간 공손찬을 1년 동안 공격하다가 국의의 군량이 다 떨어져 병사들이 굶주려 도망갔고 때를 노린 공손찬의 우회 공격에 크게 패하여 치중을 모조리 잃기도 했다.

그런데 그 뒤 197년 무렵, 갑자기 원소에게 숙청되어버렸다. 영웅기와 후한서 원소열전에 따르면 국의가 스스로 공적이 있음을 믿고 교만하게 굴었으므로 원소는 불러들여 죽이고 그 국의의 무리를 아울렀다고 하는데, 자세한 기록이 없으니 정말 뜬금없어 보일 뿐."교만하게 굴었다"는 예나 지금이나 독재자들이 숙청할때 붙히는 단골멘트이므로 단순히 국의 세력이 커졌고, 이를 경계한 원소가 숙청했을 가능성도 있다. 교만하게 굴었다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므로 딱히 입증할 길도 없고 지배자 입장에선 입증할 이유도 없기 때문. 하지만 국의의 숙청을 기록한 영웅기를 사서를 만들어낸 왕찬은 딱히 원소와 친하다는 기록도 없고 원소와 적대한 위나라의 신하라는 입장이니 원소를 위해서 변명해야하는 이유가 없다. 이후 국의의 패잔병이 죽을까 두려워 저항했으나 원소가 소탕했다.


3. 연의[편집]


공손찬의 군사를 상대로 활약하면서 여기서는 엄강을 직접 죽이는 등 활약을 펼치지만 조운을 띄워주기 위한 희생양으로 조운에게 죽는다. 심지어 이문열 평역본에는 정사를 자주 인용하는 작품임이 무색하게 "국의 따위"라는 말이 더 붙어 더 잡장처럼 만들어놨다.


4. 평가[편집]


국의의 숙청 이유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공적을 믿으며 교만방자했다는 기록 뿐이라 여러가지 추론이 난무하나, 단순한 패전 책임 문제에 따른 숙청설, 혹은 애초에 원소와 연합 관계로 시작했고 독자적인 부곡을 거느리고 있었던 점에서 원소와 명확한 상하관계라기 보다는 반 종속적인 관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객장에 가까운 관계였던 데다 시기적으로는 곽도, 심배원담, 고간으로 대표되는 원소의 친위 세력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권력 독점을 노린 원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는 설, 더 나아가서는 북방 전선의 핵심 책임자였던 국의의 입지에 더해 '불궤'[1]라는 표현, 잔당들이 공손찬과 연합하고 있었다는 것 등에 주목해 원소의 권력 강화 움직임에 자극받은 국의가 공손찬과 원소의 대립각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믿고 반란 혹은 독자적인 세력화 등의 계획을 품었다가 원소에게 선통수(...)를 맞았다는 설 등으로 나뉜다.

국의 자신의 본심이 어느 쪽이었든 간에 원소가 국의를 '불러들여' 죽인 뒤 그 무리를 병합했다는 표현을 보면, 국의는 원소의 움직임을 예상치 못하고 순순히 소환에 응하다 죽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국의는 숙청되고, 유우의 아들인 유화는 더 이상 기록상에서 등장하지 않으며, 선우보는 공손찬 멸망 이후 아예 조조 진영에서 활동하는[2] 등 원소 세력 내 북방 전선 핵심 인물들의 행보가 석연찮고, 국의 숙청 이후엔 원소 본인이 친정에 나서며 그 공백을 채우기 때문에 대대적인 숙청과 조직 개편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양주 출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민족인 강족이나 대기병 전술에 능한 장수였을 공산이 크다. 당장 공손찬 상대로 얻은 전과를 보면 특히 기병을 박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공손찬의 기병이 그 당시 상당한 위상이었음을 감안하면 전술로 그걸 무찌른 국의도 충분히 명장이라 할 수 있지만 처세에는 그다지 밝지 못했는지 일찍 숙청되면서 별로 잘 안 알려진 장수다.


5.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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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석에 따라서는 반란을 계획했다고 볼 수도 있다.[2] 전예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원소와 선을 긋고 조조의 편을 든 것은 그렇다 쳐도 아예 자신의 세력 기반이던 유주를 떠나 관도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공손찬 멸망 이후 조조와 연계하며 원소를 견제하다 유주에서 쫓겨났고 원소 사후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면서 유주로 돌아갔다는 설이 유력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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