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병 (문단 편집) ====== 연속돌격? ====== 한국에서는 [[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20180715/486263/600576955/1157371823/048255151bf867db3477f510857ff7f0.jpg|기사들이 일렬씩 순차적으로 돌격하여 랜스로 찌르고 곧바로 방향을 돌려 빠져나와서 후방으로 가서 다시 랜스를 보급받으며, 후열이 먼저 돌진한 앞열을 엄호하면서 연쇄적으로 돌진했다는 설]]이 '''[[퇴물|2010년경]]'''[* 이 근거 없는 헛소문이 정설이 아니라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https://m.dcinside.com/board/rome/801217|(자세한 반박)]] '''2021년'''부터다. 무려 '''10여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This Is Total War]]의 서양사 게시판에서 벌어진 [[https://cafe.daum.net/shogun/9xm/7084|논쟁]]이 발단이 돼서 인터넷 상으로 퍼져 있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랜스 전술이었다는 근거는 커녕 실존했다는 근거조차 '''[[뇌피셜|없다]]'''. 링크에 들어가보면 다수의 뇌피셜 소설가가 한사람의 진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무식한 고집쟁이 취급하며 다굴치고 있다. 창기병들을 얇은 대열을 이룬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눈 뒤 방진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하는 전술은 실제로 사용되었지만, 이건 적을 포위해서 교란하고 노출된 약점을 찌르는 목적이지 랜스를 공급받으며 정면에서 연쇄 돌격으로 방진을 깎아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중세의 지배적인 전술이 아니라 고대부터 근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기병 전술이었다. || [[이미지:Klushino2.jpg|width=100%]] || || 클루시노 전투(1610). [[파이크]]를 앞세운 보병 전열에 돌격하는 후사르. 1620년경 그림 || 그리고 이런 이론의 타당성을 강화하는 근거로 자주 사용되는,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 역시 랜스로 앞열만 찌르고 열이 번갈아가며 연쇄 돌격을 행하였다거나, 이를 위해 대열이 얇았다거나, 창병을 이기기 위해 기병창이 의도적으로 길어졌다는 이야기들도 애초에 사실이 아니다. 우선 후사르 랜스가 보병들의 장창보다 길다고 기록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쯤 보병용 장창이 기동성을 위해 4.2~4.8m로 짧아졌기 때문이다.''' 1629년 스웨덴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후사르 랜스의 길이는 5m 정도(3.8-5.6m)로, 초기에 5.98m였다가 1616년부터 5.3m로 규정된 스웨덴 장창보다 짧은 편이었다. 1737년 Kampenhausen 소장이 랜스의 길이가 3싸젠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18세기 폴란드와 19세기 러시아의 도량기준이 달라 폴란드식으로는 5.3m인 것을 러시아 것으로 치환하여 6.2m로 착각한 것으로 시작하여 파이크를 상대하기 위해 후사르의 랜스가 그에 맞춰서 길어졌다는 추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 2열 횡대로 바꾸기 이전까지 후사르들은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Klushino#/media/File:K%C5%82uszyn_1610.JPG|''huf''라고 불리는 두꺼운 4-5열 종진]][* 상황에 따라 3열까지 줄일 수 있었다]으로 돌격했다. 연쇄돌격은 무슨 비장의 전술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돌격이 실패해서 패주하거나 예비대의 지원을 받으며 후퇴하는 기병전의 일반적인 상황들을 앞의 '스웨덴 장창에 맞춰서 길이를 늘린 랜스' 떡밥과 연결해서 과잉해석한 것이다. 한국사로 비유하자면 조선 각궁이 저격소총급 초살상무기라는 전제하에 모든 정황을 끼워맞추면 군사들이 지나치게 먼 거리에서 맞지도 않는 활을 쏘다가 왜군이 칼을 들고 가까이 달려들면 겁을 먹고 도망쳐버린다고 비판하는 실록의 기록[* 왜적은 총을 잘 쏘지는 못한다 해도 아군이 활 두 발을 쏘는 사이에 별안간 앞에 나타나니 우리 나라 사람은 잘 쏜다고는 하지만 멀면 맞추지 못하고 가까우면 왜적의 칼을 두려워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활을 쏘고 나서 단병(短兵)으로 달려들까 두려워하여 미처 쏘지도 못하니 활을 쏘는 것도 믿을 게 못 되는 실정입니다. 왜적이 칼을 잘 쓴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칼을 잡고 나아가면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들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왜적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806007_002|#]]]에서조차 초장거리 파르티안샷 저격 전술로 왜군을 농락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들은 빠르게 사기를 회복하고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마치 새끼들을 빼앗긴 암사자와 같이 복수심에 불타며, 더욱 힘차게 돌격해 그물을 찢듯이 '''적진을 뚫고 나갔다'''.[* However, they swiftly recovered their spirit and resumed their strength. Thirsty for revenge, like a lioness whose cubs have been stolen from her, they charged even more vigorously into the enemy and '''passed through them''' as if they were breaking through a net.] >---- >순례자들의 여정과 리처드 왕의 무훈 - 아르수프 전투(1191) >엄청난 분노에 사로잡혔고 어떠한 군사 기술도 가장할 수 없었던 리샤르는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했고, '''정확히 로마군의 중앙에 이르러''' 전투를 교착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로마군) 최전열의 궁수 부대가 돌격을 잠시도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군 후위의) 바송빌에게 압력을 가하며 강하게 뒤로 몰아붙였고, 그런 다음 두카스의 부대를 공격했다. 그곳에서 집요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리샤르를 따라간 기병들 중 많은 수가 쓰러졌다; 하지만 기병들이 강하게 밀고 나가는 가운데 쓰러졌기 때문에 군대 전체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기병들의 압력이 엄청났고, 방패에 부딪힌 창이 부러지면서 큰 소음이 울려 퍼졌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왔고 모든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리샤르는 결국 사나운 돌격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로마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창에 맞아 쓰러진 두카스가 거의 포로로 잡힐 뻔했다.[* Richard, possessed by great anger and not capable of making any pretence of military science, charged with the cavalry around him, until, '''reaching the very center of the Roman army''', he brought the battle there to a standstill, since the archer force on the front line did not withstand him even briefly. Then exerting pressure on Bassonville, he forcefully drove him back, and next attacked those about Doukas. There an obstinate battle developed, and many of those with Richard fell; but since they fell in the midst of a great press, no awareness of it reached the army. The pressure was immense, and a heavy din of spears breaking on shields arose; numerous arrows flew and danger lurked everywhere, until, pressing heavily with a fierce charge, Richard constrained them to give back. Then Doukas himself, who had been overthrown with a lance, came near being captured.] >---- >Joannes Kinnamos(1143-?), trans. Charles M. Brand, ''Deeds of John and Manuel Comnenus''.] 이 시대의 군사저술가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병 돌격은 단번의 돌격으로 적의 대열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서 가능한 한 빨리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일단 말과 기수의 체력과 정신력이 무한하지 않다. 이름만 가난한 전우들이지 부유한 기사들이었던 성전기사단조차도 기사 한 명당 전투마 '2마리', 서전트 기병 한 명당 한 마리씩만 지급되었으며, 보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13-14세기의 평범한 기사들의 군마의 품질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연속된 돌격으로 말이 지쳐도 함부로 바꿔탈 수도 없었다. 더구나 [[십자군 국가]]들 같이 항시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면 군대의 주력이자 직업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30%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 중기병들은 전의가 낮은 편이고 심하면 거의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경우도 있었다. 위의 ''충돌'' 항목에 인용된, 얇은 선형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프랑수아 드 라 누의 말처럼 이런 훈련도 낮은 기병들은 단 한 번의 패주로도 전의를 잃고 전투력을 상실할 수 있었으며 보통 정예병력도 돌격 2-3번이 한계였다. [[헤이스팅스 전투]]나 [[크레시 전투]] 같은 중세의 유명한 전투들의 기병 연속 돌격 사례가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건 자세히 뜯어보면 전부 돌격이 실패하고 패주한 것이거나[*치비타테(1053) Then Robert, seeing his brother so fiercely attacked by enemies resolved to yield not an inch, charged fiercely and proudly into the midst of the hostile ranks, aided by the troops of Count Gerard and followed by the Calabrians whose leadership had been entrusted to him. He speared them with his lance, beheaded them with his sword, dealing out fearful blows with his mighty hands. He fought with each hand, both lance and sword hit whatever target they were aimed at.He was unhorsed three times; thrice he recovered his strength and returned more fiercely to the fray. His fury merely increased, as does that of the lion that roars and furiously attacks those animals less strong than himself, and if he meets resistance becomes more ferocious and burns with greater anger. He gives no quarter, he drags off his prey and eats it, scatters what he cannot devour, bringing death to all. In such a way did Robert continue to bring death to the Swabians who opposed him. 한 치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적들에게 형이 사납게 공격당하는 것을 본 로베르는, 자신이 지휘를 맡은 칼라브리아인들을 이끌고 제라르 백작의 부대의 지원하에 적들 가운데로 맹렬하고 당당하게 돌격했다. 그는 힘센 두 팔로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하며 적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칼로 목을 베었다. 그는 양 손으로 싸웠고, 그가 휘두르는 창과 검이 모두 정확하게 목표를 맞혔다. 그는 세 번이나 낙마했고, 세 번 모두 힘을 회복하고 전보다 더 사납게 전투로 돌아왔다. 사자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에게 포효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다가 저항에 부딪히면 더 사나워지고 더 큰 분노에 불타는 것처럼, 위기를 겪을수록 그의 분노는 오직 늘어날 뿐이었다. 사자는 무자비하게 먹이를 끌고 가서 잡아먹고 남은 잔해를 흩어놓는다. 그런 식으로 로베르는 자기에게 대적하는 슈바벤인들에게 계속해서 죽음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 아풀리아의 기욤, 치비타테 전투(1053)][*크레시(1346) 알랑송 후작의 부대는 대오를 잘 갖추고 진격해 잉글랜드군과 교전에 들어갔고, 다른 방향에서 플랑드르 후작의 부대도 그렇게 했다. 두 영주가 거느린 부대들은 궁수의 저지선을 뚫고 잉글랜드 태자의 대대에 달려들어 상당시간 격전을 벌였다. 프랑스왕은 그들의 깃발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가고 싶어했지만 앞에 있는 궁수들의 울타리를 넘을 수 없었다. "그 날 왕은 에노의 존 경에게 멋진 흑마 한 마리를 선물로 주었는데, 존 경은 자기 깃발을 드는 기사 쟝 드 퓌셀 경을 그 말에 태웠다. 기사를 태운 흑마는 달려 나가 잉글랜드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가 발을 헛딛고 도랑에 빠지면서 기사에게 심한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그 날 잉글랜드군은 포로를 잡으러 대오를 떠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사에게 더 이상의 위협은 없었다. 종자가 그를 일으켜 주었지만 왔던 길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와야 했다. 라브루와와 크레시 사이에서 토요일에 치러진 이 전투는 험하고 잔혹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용감한 행위가 전해지지 못한 채 이곳에 파묻혔다. 저녁 무렵이 되어갈 때 많은 프랑스 기사와 시종들은 영주를 잃고 들판을 오락가락하다가 작은 무리를 지어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금세 격퇴당했다." - 프루아사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68218|크레시 전투]](1346)] 유인후퇴전술이었다. 헤이스팅스 전투를 기록한 푸아티에의 윌리엄(c.1020–1090)의 연대기에서는 그냥 대놓고 잉글랜드인들의 맹렬한 반격에 겁을 먹은 기사들이 등을 돌려 도망쳤고 윌리엄 공작의 전열의 대부분이 패주했다고 표현한다. [[살라딘]]의 측근이었던 바하 앗딘은 아르수프 전투에서 십자군 기사들이 도망치는 무슬림 기병들을 추격하다가 매복을 경계하며 멈춰서서 재정비를 하고 다시 추격하는 식으로 총 3번의 돌격을 가했다고 표현한다.[*아르수프(1191) The enemy made a charge and they fled, but then the enemy halted for fear of an ambush, so our men halted and made some resistance. Then there was a second charge and our men fled but fought as they fled. The enemy halted again, as did our men. A third charge followed, which brought them to the tops of some hillocks there and a ridge of hills. 적군의 돌격 앞에 우리 군사들은 도주했으나, 적들이 매복을 경계하며 추격을 멈추자 우리 군사들도 돌아서서 약간의 저항을 시작했다. 적들이 두 번째 돌격을 시작하자 우리 군사들이 다시 도망쳤지만, 그러면서도 싸웠다. 적들이 다시 추격을 멈추자 우리 군사들도 다시 멈춰섰다. 세 번째 돌격은 우리 군사들을 나지막한 언덕 위와 구릉지의 능선으로 몰아붙였다. - 바하 앗딘 - 아르수프 전투(1191)][* [[프랑수아 1세]]는 [[마리냐노 전투]] 이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다름]]이 스위스군에게 가한 30번의 돌격을 자랑했지만, 이게 각 부대가 30번씩 돌격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모두 합쳐서 30번이라는 의미인지, 애초에 얼마나 진지한 의도로 말한 숫자인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바야르의 전기에 의하면 마리냐노 전투에서 장다름들은 장창방진 안으로 침투해서 치열한 혼전을 벌이다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프랑스군이 그저 장다름의 돌격만으로 스위스군을 물리친 것도 아니었고, 프랑스군이 가진 [[포병]]들로 계속 집중 [[포격]]을 가하여 스위스군한테 큰 타격을 입히는 틈틈이 계속 장다름이 돌격을 하여 간신히 스위스군을 물리친 것이었다.] 왜 이런 오해가 시작되었는지 명확한 기원을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다음의 링크에 나오는, 몇 개의 제대로 나뉘어서 사선 대형으로 달려가다가 첫 번째 제대의 돌격이 성공하면 두 번째 제대가 전과를 확대한 다음 이후 제대들은 상황에 맞게 싸우고, 첫 번째 제대의 돌격이 실패하면 후속 제대들의 엄호 하에 돌아온다는 자료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섣불리 추격에 나서면 다음 열의 기병에게 당하기 때문에 보병은 꼼짝도 못하고 맞아야 했다'는 서술이 이 자료의 상황과 유사점을 보이기 때문. [[https://m.dcinside.com/board/armor/3558?headid=&recommend=&s_type=subject_m&serval=%EB%9E%9C%EC%8A%A4|*]] 위에 인용된 프랑수아 드 라 누의 묘사처럼, '랜스를 든 중기병들이 얇은 횡대로 돌격하고, 한번에 일부 제대(100명 중 25명)만이 돌격하고, 창으로 한 번 찌르고 검을 한 번 휘두른 뒤 후퇴'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들 자체는 실제로 많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문제는 매우 중요한 세부사항들이 인지되지 못했거나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드라누의 정확한 설명에 따르면 횡대로 돌격하는 건 멀리서 창으로 찌르고 빠르게 물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접촉 순간의 충격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고, 100명 중 25명만이 한 번에 돌격하는 건 나머지 75명은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서워서 도망쳤기 때문이고(...), 창으로 찌르고 바로 후퇴하는 건 이미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도망쳤고 돌격이 실패한 상황에서 혼자 남아서 싸우다가 개죽음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런 돌격 실패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드라누는 얇은 횡대보다는 4열 이상의 두꺼운 대열을 추천한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추정해보면 아마도 19세기 군사사학자들의 '기사/중기병의 중세 천 년 지배' 이론과 린 화이트의 등자이론을 그것에 반박하는 최신 학설들과 어설프게 절충하려 한 점일 것이다. 기사의 중세 천년 지배 이론은 문명적인 19세기의 전쟁에서 군대의 중추는 정교한 전술에 따라 배치된 보병들이므로 반대로 미개한 중세의 전쟁은 멍청하고 난폭한 기병들의 힘에 지배되었을 거라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린 화이트의 등자이론은 등자의 발명이 무거운 갑옷을 입은 중기병의 카우치드랜스 충격 전술을 가능케 했으며 이로 인한 중기병의 무력 우위가 중세 유럽 봉건제의 형성에 기여했고, 기병의 우위를 가져온 등자와 카우치드랜스라는 기술이 장궁과 장창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대체되는 '14세기 보병 혁명'으로 봉건제가 해체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술결정론이다. 반면에 존 프랑스 등 현대의 연구자들은 19세기의 편견을 버리고 사료를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중기병과 봉건제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으며[* 봉건제는 전쟁을 위한 기병 양성에 유리한 제도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에 봉건제를 최초로 도입한 노르만 왕조는 정작 전시에 봉신 기사들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처음부터 방패세를 걷어서 그 돈으로 용병 기사와 승마궁병을 고용하는 것을 더 선호했으며 연대기 작가 슈거는 [[윌리엄 2세]]를 '부자이며, 뛰어난 상인이자 기사들의 봉급 지급자paymaster'로 묘사했다] 기사 지배 이론은 매우 과장됐고 중세시대의 전쟁에서도 보병과 보병전술이 매우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인터넷 역사 애호가들이 이러한 양측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서로 모순되는 여러 주장들을 대강 절충한 결과 '중세의 보병들은 기사들이 돌격하기만 해도 겁먹고 흩어지는 오합지졸이 아니었고 기병 돌격은 잘 짜인 보병 방진을 절대 정면으로 돌파할 수 없지만 그렇게나 막강한 보병들을 중세의 기사들이 정면으로 짓밟고 전장을 지배했다'는 모순된 결론이 나왔고 이 말도 안 되는 이론을 그나마 말이 되게 설명하기 위한 시도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연쇄돌격으로 방진 깎아내기 이론이었을 수 있다. 이렇듯 인터넷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반박의 여지 없는 정설로 인정되어온 이론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전제부터가 잘못된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