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병 (문단 편집) ==== 중기병 ==== || [[파일:mode_01.jpg|width=100%]] || || 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그드족의 허리띠 장식. 5세기경 || 동로마 제국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중기병대와 궁기병대의 제병협동 전술이나 돌파전술이 유행하였고, 서로마 제국 멸망 후 프랑크 왕국에서도 백병전을 하는 기마병의 사회적 위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후한~ 남북조 시대를 기점으로 중기병의 역할이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3-4세기 무렵인 [[남북조시대]]에는 마갑을 갖춘 [[선비족]] 기병대 등 마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한국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중장기병이 집중 육성되었다. [[삼국시대]] [[공손찬]]의 백마의종도 마찬가지지만, 유럽의 중기병과 달리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에서는 기병대열에 궁기병을 섞어서 활을 쏘면서 돌격하는 진형이 많았다. 더불어 동로마와 중동에서 중기병대는 적진의 측면이나 후방에 돌진하였으나, 서유럽의 중기병은 정면과 측면을 가리지않고 적진을 돌파하였다. 그리하여 11세기 말에 벌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부터는 서유럽의 중기병대는 근접전에서 이슬람권의 기병대를 압도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숫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병의 돌격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는 했다. 동로마 역사가 [[안나 콤니니]]는 서유럽의 노르만인 기병대를 보고 "[[거인]]의 힘으로 당긴 화살을 튕겨내며 [[바빌론]]의 성벽마저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하였는데, 1097년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앞뒤로 서유럽 중기병대의 돌격을 받은 튀르크군은 패주를 면치 못했고,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군 500명과 성당 기사단 8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 2만 6천명의 살라딘 군대를 박살내버리기도 했다. 유럽 중세 초-중기 중기병의 갑옷은 [[체인메일]]로, 휘황찬란한 [[플레이트 아머]]가 도입되기 훨씬 전이었으며 말도 이후의 육중한 체구의 군마보다는 작은 소형마를 썼다.[* 하지만 큰 말을 타고 싸운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예로 그 자신이 여러 이슬람 왕조들을 섬기면서 중동으로 쳐들어온 유럽 [[십자군]]과 직접 싸우기도 했던 관리이자 학자였던 우사마 이븐 문끼드는 그의 저서인 성찰의 서에서 "[[낙타]]처럼 덩치가 큰 검정 말을 타고, [[갑옷]]과 [[흉갑]]을 걸친" 필립이라는 프랑크인 기병을 보았고 자신이 그를 상대로 말을 탄채로 직접 창으로 그를 찔렀는데 그 부위가 허리의 피부 근처라서 필립은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출처: 성찰의 서/ 우사마 이븐 문끼드 지음/ 김능우 번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2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갖춰입은 중기병대의 돌파에 보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수였다. [[장창]]병들이 빼곡히 늘어서서 돌격을 저지하거나 똑같이 중기병을 돌격시켜 맞불을 놓거나, 그도 아니면 지형과 요새 등의 기물을 이용해야 했는데, 보병은 기병 돌진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버틸 강단있는 정예여야만 했고, 중기병 맞돌격의 경우는 장비와 기량 차이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문제가 있었으며, 마지막의 경우는 전술적인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11세기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가 열리면서 서유럽 깡패 기병대 중 하나였던 노르만 기병대의 후예로서 기병전력이 훌륭했고 존 왕의 시대에 잃어버리기 전까지 11세기부터 프랑스땅도 많이 소유했었기에 좋은 군마들과 평지를 확보했었다. 실제로 12세기엔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전쟁에서도 중기병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제는 리처드 1세 사후 뒤를 이은 존 왕의 병크로 프랑스 땅을 대다수 잃어버린다. 백년전쟁 중에 프랑스 땅을 일부 수복하긴 하지만 최종결과는 결국…] 그러나 웨일스와의 전투에서 장궁의 위력을 알게되었고 14세기 백년전쟁에서 자신들보다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위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면서 중기병들을 하마, 중보병 전력으로 활용하고[* 기병은 방어 측면에선 이점이 없기 때문. 예나 지금이나 탱커역할은 보병이 훌륭했다.] 장궁병을 대폭 활용하여 방진을 짠후 [[니가와]]를 시전하는 전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중기병들은 자주 하마하기 시작했으나 말에서 내린 중기병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말에 올라 본래의 기병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본적으로 기병인만큼 마상전투를 고도로 훈련했다고 한다.[* '푸아티에 전투(1356), 클리포드 J. 로저스' 발췌.] 몇개의 사례로 [[크레시 전투]]에서는 하마기사들이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기병으로 전환하여 추격 섬멸하였고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일단 하마하여 싸우다가 막바지에 전황이 불리한 순간 다시 중기병으로 전환, 결정타를 날리며 승리를 이끌었으며 장미전쟁에서도 일단은 하마한 채로 싸우다가 추후에 기병돌격을 감행했다. || [[파일:attachment/Mongol_Heavy_Carvaly.jpg|width=100%]] || || [[몽골]] 중기병 || 동시대 동아시아에서는 발해의 멸망 이후 [[거란]], [[여진족]] 등 만주의 철광을 확보한 유목민족들이 집중적으로 중기병을 육성, 그 군사력으로 [[북송]]을 재패하고 연해주,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한때를 호령했으며, [[남송]]과 [[고려]]역시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을 운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몽골]]족 역시 군의 편성에서 중장기병을 많이 운영하였다. 마갑을 씌운 중무장기병은 원나라 말기까지, 멀리는 청나라 때까지 존속하였다. || [[파일:e9fba0459f5be42b99acd6c826ce6ce1.jpg|width=100%]] || || 청나라의 갑주와 마갑 || 조선은 초기에는 중기병을 40%, 활을 다루는 궁기병을 60%로 구성했으나 [[세조(조선)|세조]]대 궁기병 비중을 대폭 늘리면서 중기병은 사실상 없어지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주로 궁기병들만 남게 된다. 단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 창기병의 모습이 그려져있는것으로 보아 중기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편곤]]등의 근접무기들이 자리잡으면서 서양과 비슷한 방향으로 기병 활동 성격이 변하게 된다.[[http://www.muye24ki.com/zb41pl8/zboard.php?id=free&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102|최형국,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조선군 환도는 일본 와키자시와 비교해도 짧을 정도로 좀 많이 짧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