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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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무반 | 別武班
대원수(大元帥)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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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
도탕군(跳盪軍)
사궁군(射弓軍)
경궁군(梗弓軍)
정노군(精弩軍)
강노군(剛弩軍)
대각군(大角軍)
철수군(鐵水軍)
발화군(發火軍)
석투군(石投軍)
출정 병력: 도합 170,000 명[1]

1. 개요
2. 역사
2.1. 구성과 활약
3. 여담


1. 개요[편집]


"‘짐(朕: 고려 예종)이 지금 다행스럽게도 달제(達制)를 마치고 국사(國事)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의로운 깃발을 들어 무도함을 정벌하여 아버지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 하셨다. 이에 명령하여,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 中書侍郞平章事) 윤관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정병(精兵) 300,000 명을 거느리고 정벌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 《고려사 열전, 윤관》


"당나라 고종이 평양을 함락시켰을 때(고구려 당시)는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고려 인종 원년)은 전대에 비해 또 배가 늘어났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1권 의장과 호위 中>

고려시대 중기,당시 고려의 중앙군이라 할수 있던 2군 6위의 경군(京軍)은 토목공사를 비록한 과도한 역역과 부족한 군인전 등으로 붕괴되어 갔고 더욱이 숙종 9년(1104년)에 정주로 진출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고려가 잇달아 패하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거국적 관점에서 편성한 고려의 특설 군사조직이다.[2]

명칭의 뜻은 정식 무반(武班)[3]인 국왕 친위대,[4] 경군,[5] 외군[6]을 제외한 별(別)도의 무반(武班). 그래서 '별무반(別武班)'이다.[7] 기존 경외군을 제외하고도 별도로 17만의 대군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고려의 병영국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8] 더불어 고려사 윤관 열전에 따르면 이 17만이라는 숫자조차도 30만의 정병(精兵)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로 보아 별무반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2. 역사[편집]


고려 초까지 여진은 간간히 골치거리를 만드는 북방의 이민족이긴 했어도 거란처럼 국운을 건 전쟁을 벌여야 될 정도로 위협적인 세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11대 문종임금 재위시절부터 여진의 위협이 격화되기 시작했으며 그 중심에는 동여진 완안부(完顔部)가 있었다. 그리고 15대 숙종 시절에는 고려에서 정규군을 동원하여 여진 정벌을 결심할 정도로 위협적인 세력이 되어 있었다.

숙종은 임간과 윤관에게 군대를 주어 2번에 걸쳐 천리장성 인근에서 깔짝거리는 여진을 축출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고려군은 여진을 쫓아내기는커녕 역으로 찰지게 얻어맞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이에 윤관은 잇따른 패전이 보병 위주로 편성된 고려군 조직의 문제로 분석했다. 이에 기병 위주로 편성된 여진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고려군 역시 강력한 기병으로 맞불을 놓는 것이 최선이라 주장했고, 고려 조정도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윤관이 (...) 말하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보건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굳세니, 마땅히 군사를 쉬게 하고 군관을 길러서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이 싸움에서 진 것은 적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윤관이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을 만들었다.

<<고려사>> <윤관 열전>


2.1. 구성과 활약[편집]


기존 고려 정규군과는 별개의 조직으로 17만에 달하는 대규모 임시 전투부대였다. 평민이라도 역량만 있다면 가리지 않고 받았으며 전마를 보유하고 있는 장정은 권세가의 자제라도 가리지 않고 징병했다. 익히 알려진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9]을 중심으로 여러 특수병과들이 존재했다. 일부 병과는 별호제반 기록에서만 확인되고, 일부 병과는 고려군 전시편제인 오군(五軍) 구성에 포함되어 있었다.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은 각각 기병과 보병부대를 가리킴이 확실하나 특수병과들은 역할이 명확히 남아있지 않아 병과 명칭과 몇가지 간략한 기록을 통한 추정만 가능하다.

신기군의 경우 기병대였으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대였다. 다만 그럼에도 그 숫자는 소수였을것 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신기군은 말을 가진 자만이 입대 할 수 있었는데 말을 가진자는 당연히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사궁(射弓)과 경궁(梗弓)은 활의 크기에 따라 나눈 궁병 부대, 정노(精弩)와 강노(剛弩), 대각(大角)은 크기와 위력, 역할에 따라 나눠진 노병 부대로 추정된다. 60년대 이기백은 대각을 군악대로 보았으나 고려사 최충헌전에 최충헌이 최충수와 교전하며 어고에 보관되어 있던 대각노를 쏘았다는 기록, 김취려전에 김취려가 거란유민을 토벌하며 신기군, 내상군, 대각군 등의 정예군졸을 거느렸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큰 뿔을 재료로 한 노를 다루는 노병부대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10]

석투(石投)는 투석부대임은 확실하나 조선시대 석전군처럼 야전에서 투석구만 사용했는지 공성전에서 투석기까지 함께 다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철수(鐵水)는 공성전 발생시 끓는 쇳물을 부어 적을 막는 부대라는 주장과 야전에서 무기와 갑주 등을 긴급 제조, 보수하는 대장장이 부대라는 주장이 갈리는데 명칭만 있고 역할에 대한 기록이 없어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발화(發火)는 화공부대. 도탕(跳盪)은 중국 문헌을 감안했을 때 선봉에서 싸우는 돌격대로 여겨진다.

신기를 비롯한 각종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별무반 병력의 대부분은 대부분은 신보군과 항마군이었다. 그 중 신보군의 대다수를 이루는 자들은 백정(白丁)이라 불리우는 일반 농민들이었고 항마군을 구성하는 승려들은 수원승도(隨院僧徒)라 불리우는 하급 승려들이었다. 원래 백정은 군역을 지지않는 농민층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고려전기라면 이들은 설사 전투에 동원되더라도 아주 예외적이고 급박한 상황[11]에 동원되어 아주 제한적인 역할만을 맡았다.[12]이러한 농민, 하급승려를 주력으로 하는 별무반의 등장은 2군6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군사제도의 중대한 변화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진족과의 전투를 대비해 꾸준한 훈련을 통해 모든 준비를 마친 고려는 예종 2년 윤관을 원수, 오원총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여진 정벌을 단행했다. 별무반은 천리장성 이북지역, 현재의 함경도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진족을 정벌하여 북쪽 변방으로 축출했으며 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아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초전에 참패를 당한 여진은 오아속(烏雅束)을 중심으로 동북 9성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 "해당 지역을 돌려주면 다시는 고려를 건드리지 않겠다"면서 강화를 요청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윤관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여진과의 계속되는 전쟁이 부담된다고 판단했기에 동북 9성을 반환하면서 마침내 강화가 성사됐다.


3. 여담[편집]


  • 고려시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군대 편제인데다, 내부 구성도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3개이기에 고등학교, 공무원, 한국사능력시험이나 각종 기업체 시험 등 출제하는 곳에 상관없이 한국사 시험에선 자주 나온다.

  •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2회(2014.1.25) 고급 18번 문제로 출제되었다. 페이크를 위한 선택지로 삼별초 내용이 나왔다.[13]

  • 한국의 서브 컬쳐에서는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는데 웹툰 호랑이형님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흰 산의 주인인 아린을 죽이기 위해 붉은 산의 세력과 인간들이 합심하여 기른 부대로 추정된는데 별무반내의 항마군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 별무반의 병과는 고려사 병지에서 별호제반(別號諸班)이라 통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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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개경 인구(약 50만)의 34% 정도이다.[2] 원래라면 경군 소속 군인들은 역역이 면제되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3] 무관직의 다른 말. 문관직은 문반(文班)이라 하여 두 관직을 합쳐 양반(兩班)이라 한다. 조선시대 양반의 어원이다.[4] 순검군, 견룡군, 공학군.[5] 2군 6위.[6] 양계의 주진군, 5도의 주현군.[7] 특이한 점은 武자에 대한 피휘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혜종의 휘가 '무(武)'인 탓에 '무(武)'는 '호(虎)'로 바꿔야 했던 점을 감안하자면 매우 특이한 사례. 이는 별무반의 등장 자체가 기존 2군6위(二軍六衛)의 위상 약화를 의미하고, 특히 2군(二軍) 즉 응양군, 용호군의 위상 약화는 왕실의 위상 약화로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고려 중기로 가면서 무신정변 등을 겪으며 이에 따른 고려 왕실의 권위 하락으로 갈수록 피휘 규정이 느슨해졌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8] 다만 상술하다시피 이 시기 경군을 비롯한 기존 고려의 군사체제는 유명무실화되어가고 있었다.[9] 승려들로 구성된 일종의 승병들이다.[10] 김낙진, 2017, <고려 숙종ㆍ예종 여진정벌과 별무반의 전술체계>, 한국학논총 47[11] 여요전쟁이 대표적이다.[12] 왜냐하면 군역을 지지않으니 훈련을 받을 일도 없고 그저 창 한자루 잡고 끌려온 농민이 바로 백정이었다.[13] 일단 둘 다 '별'자가 들어가는데다 별무반의 항마군을 삼별초의 신의군으로 바꿔버리면 헷갈리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