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별무반 (문단 편집) == 개요 == >"‘짐(朕: 고려 예종)이 지금 다행스럽게도 달제(達制)를 마치고 국사(國事)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의로운 깃발을 들어 무도함을 정벌하여 아버지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 하셨다. 이에 명령하여,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 中書侍郞平章事) 윤관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정병(精兵) 300,000 명'''을 거느리고 정벌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 《고려사 열전, 윤관》 >"당나라 고종이 평양을 함락시켰을 때(고구려 당시)는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고려 인종 원년)은 전대에 비해 또 '''배가 늘어'''났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1권 의장과 호위 中> [[고려]]시대 중기,당시 고려의 중앙군이라 할수 있던 2군 6위의 경군(京軍)은 토목공사를 비록한 과도한 역역과 부족한 군인전 등으로 붕괴되어 갔고 더욱이 [[숙종(고려)|숙종]] 9년([[1104년]])에 정주로 진출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고려가 잇달아 패하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거국적 관점에서 편성한 고려의 특설 군사조직이다.[* 원래라면 경군 소속 군인들은 역역이 면제되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명칭의 뜻은 정식 무반(武班)[* 무관직의 다른 말. 문관직은 문반(文班)이라 하여 두 관직을 합쳐 양반(兩班)이라 한다. 조선시대 [[양반]]의 어원이다.]인 국왕 친위대,[* 순검군, 견룡군, 공학군.] 경군,[* 2군 6위.] 외군[* 양계의 주진군, 5도의 주현군.]을 제외한 '''별(別)도의 무반(武班)'''. 그래서 '별무반(別武班)'이다.[* 특이한 점은 武자에 대한 [[피휘]]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혜종(고려)|혜종]]의 휘가 '무(武)'인 탓에 '무(武)'는 '호(虎)'로 바꿔야 했던 점을 감안하자면 매우 특이한 사례. 이는 별무반의 등장 자체가 기존 2군6위(二軍六衛)의 위상 약화를 의미하고, 특히 2군(二軍) 즉 응양군, 용호군의 위상 약화는 왕실의 위상 약화로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고려 중기로 가면서 [[무신정변]] 등을 겪으며 이에 따른 고려 왕실의 권위 하락으로 갈수록 [[피휘]] 규정이 느슨해졌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기존 경외군을 제외하고도 별도로 17만의 대군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고려의 병영국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다만 상술하다시피 이 시기 경군을 비롯한 기존 고려의 군사체제는 유명무실화되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고려사 윤관 열전에 따르면 이 17만이라는 숫자조차도 30만의 정병(精兵)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로 보아 별무반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