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 9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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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위치
3.1. 학설에 따른 위치 비정 논쟁
3.1.1. 함흥 평야설(폐기)
3.1.2. 함경남도 일대설(함흥 ~ 길주 일대설)
3.1.3. 함경남북도 일대설(함흥 ~ 두만강)
3.1.4. 연길 일대설
3.1.5. 두만강 이북 700리설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동북 9성은 '동북에 쌓은 9개의 성'이라는 뜻으로, 12세기에 윤관을 중심으로 개척했던 고려 동북 지역의 변경을 가리킨다.


2.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의 여진 정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위치[편집]


파일:external/arim.pe.kr/li_ancient_309_yungwan.jpg
여러 학설에 따른 동북 9성의 추정도.[1]
순서
축성
시기
비고
1
영주성(英州城)
1107년 12월
(예종 2년)
· 길주 지역 내 성 중 중앙에 위치
· 길주 지역 내 성 중 가장 먼저 축성, 본영
2
웅주성(雄州城)
· 길주 지역 내 성 중 가장 남쪽에 위치
· 길주 지역 내 성 중 두 번째 축성
3
복주성(福州城)
· 현재의 함경남도 단천
4
길주성(吉州城)
· 길주 지역 내 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
· 현재의 함경북도 길주
5
함주성(咸州城)
1108년 2월
(예종 3년)
·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
6
공험진성(公嶮鎭城)
· 윤관이 선춘령에 세운 척경입도비(선춘령비)
· 9성 중 최북단에 설치
· 숭녕진(崇寧鎭)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
7
의주성(宜州城)
1108년 3월
(예종 3년)
· 이 성은 여진을 개척한 지역에 쌓은 성이 아니고 함경남도 원산에 쌓은 성이다.
8
통태진성(通泰鎭城)

9
평융진성(平戎鎭城)
· 진양진(眞陽鎭)에 설치한 성으로 추정

1108년(예종 3) 윤관이 예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 별무반을 조직하여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들을 정벌한 후 쌓은 9개의 성. 강동6주와 더불어 고려의 북진 정책을 상징한다. 각 성의 위치는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에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9성의 위치, 특히 선춘령 및 공험진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가 남아있다. 게다가 설치 당시의 9성은 함주, 웅주, 영주, 복주, 길주, 의주, 공험진, 통태진, 평융진인데 반환할 때의 9성은 함주, 웅주, 영주, 복주, 길주, 통태진, 선화진, 진양진, 숭녕진으로 명칭이 달라 더욱 의심스럽다. 다만 의주는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에 쌓은 성으로, 여진 지역을 개척하고 쌓은 성이 아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성의 위치를 적자면,
  1. 의주(함경남도 원산)
“의주 : 원래는 고구려의 천정군이었다. 신라 문무왕 21년 (681)에 이를 차지하고 정천군으로 개칭했다. 고려 초에는 용주라 불렀다. 성종 14년(995)에 방어사를 두었다가, 뒷날 지금의 명칭(의주)로 고쳤다. 예종 3년(1108)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 권제58 지리3>
"또 의주의 땅은 정주(定州)의 남쪽이었기 때문에 여진을 쳐서 쫓아낼 필요가 없어서 뒤에 설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은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9성이라 병칭하면서도 철거한 수에는 넣지 않은 것이다.”
<고려사 권제58 지리3>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7리요, 남쪽으로는 안변부(安邊府)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통부 관내 영풍현(永豐縣) 경계까지 30리이며 북쪽으로는 문천군(文川郡)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일명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정천군(井泉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용주(湧州)라 일컬었으며 성종(成宗) 14년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으며 예종3년에 성을 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덕원도호부>
덕원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으로, 의주는 현재의 함경남도(또는 강원도) 원산이고 여진을 정벌한 지역에 쌓은 성이 아니고 고려땅에 쌓은 성이다.
  1. 함주(함경남도 함흥)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는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기거하던 곳이다. 예종 2년(1107)에 원수(元帥)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쳐서 내쫓았다. 〈예종〉3년(1108)에 주(州)를 설치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았고, 진동군(鎭東軍)이라 불렀다. 큰 성(城)을 쌓아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948호를 이주시켜 그곳을 채웠다. 〈예종〉4년(1109)에 성을 철수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고, 뒤에 또 원(元)나라에 편입되어 합란부(哈蘭府)라고 불렀다. 공민왕 5년(1356)에 옛날 영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만호부(萬戶府)로 고치고 영(營)을 설치하였으며, 강릉(江陵)·경상(慶尙)·전라(全羅道) 등의 군마(軍馬)를 모아 지키게 하였다. 〈공민왕〉18년(1369)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함평(咸平)이다. 요해처가 2곳으로, 함관령(咸關嶺)【부(府)의 북쪽에 있다.】과 대문령(大門嶺)【홍헌(洪獻)에 있다.】이다."
<고려사 권제58 지리3>
"본래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오랫동안 동여진(東女眞)에게 점거(占據)되었는데, 고려 예종 2년에 윤관 등에게 명하여 여진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3년에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일컫고 성을 쌓아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천 9백 48호를 옮겨채웠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으로 돌려주었는데, 뒤에 원 나라에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 일컬어져 쌍성에 속해 있었다. 공민왕 5년에 우리 환조(桓祖)에게 명하여 쌍성을 격파하고 옛 강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고쳐병영을 설치하고 강릉(江陵)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 등 각 도의 군마(軍馬)를 모아다가 변경을 지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함흥부>
함주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이다.
  1. 복주(함경남도 단천)
"복주(福州)는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기거하던 곳으로,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 불렀다. 예종 3년(1108)에 주(州)를 설치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예종〉4년(1109)에 성(城)을 철수하여 그 땅을 여진(女眞)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나라에 편입되어 독로올(禿魯兀)이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우왕 8년(1382)에 단주안무사(端州安撫使)로 고쳤다. 요해처가 2곳인데, 이판령(伊板嶺)【주(州) 동북쪽에 있는데, 곧 마천령(磨天嶺)이다.】과 두을외령(豆乙外嶺)【주(州) 남쪽에 있는데, 곧 마운령(磨雲嶺)이다.】이다."
<고려사 권제58 지리3>
"본시 오림금촌(吳林金村)으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축출하고 성을 쌓고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를 두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함몰되어 독노올(禿魯兀)이라 일컫던 것을 공민왕(恭愍王)이 수복하였고, 신우(辛禑) 때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지단주사(知端州事)로 고쳤고,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만들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단천군>
복주는 현재의 함경남도 단천이다.
  1. 길주(함경북도 길주)
"길주(吉州)는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弓漢村)이라 불렀다. 예종 3년(1108)에 주(州)를 설치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예종〉6년(1111)에 중성(中城)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나라에 편입되어 해양(海洋)【삼해양(三海陽)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공양왕 2년(1390)에 웅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주(州)가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난도(卵島)가 있다."
<고려사 권제58 지리3>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령되었다가, 고려 예종 2년에 윤관과 오연총을 보내어 군대 17만을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지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동쪽은 화관령까지, 북쪽은 궁한령, 서쪽은 몽라골령까지를 우리의 영토로 만들고,궁한촌에다 6백 70칸을 쌓고 길주(吉州)라고 이름 붙였다(길주가 최북단임을 증명하는 근거중 하나로, 북쪽으로 길주까지 확장했다고 나와 공험진 두만강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3년에 방어사을 두었고, 6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바로 그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와서 이 지역이 원(元) 나라에 편입되어 해양(海洋)이라고 이름붙였다. 또 삼해양이라고도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註)에, “해양(海洋)은 땅 이름인데, 지금은 길주(吉州)에 있다. 해양에서 북쪽으로 50리를 가면 태신(泰神)이요, 태신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면 적알발(的遏發)이다. 해양ㆍ태신ㆍ적알발의 3개소에는 모두 맹안(猛安)이 있는데, 속설에 이것을 3해양(三海洋)이라 한다. 공민왕 때에 수복되었고, 공양왕 2년에 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를 설치하고, 영주 및 선화 등의 진을 모두 이 주(州)에 예속시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길성현>
길성현은 현재의 길주로, 길주는 현재의 함경북도 길주이다. 그 외에도 웅주는 함경남도 홍원, 영주는 함경남도 북청이라는 설이 있고, 통태진은 <고려사절요> 에 묘사된 척준경의 경로에 의하면 길주 이남이다. 공험진은 지리지를 따르면 두만강 일대인데, 정작 동북 9성 개척 당시의 시대를 살펴보면 길주 이남에 있으니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다.


3.1. 학설에 따른 위치 비정 논쟁[편집]


파일:윤관척경.png
선춘령(先春領)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겨진 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공험진을 찾는다면 9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현실은 시궁창. 만약 이 때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선춘령에 세운 비를 찾는다면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

조선세종 또한 선춘령의 위치를 파악해보려 신하들을 닦달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4군 6진의 개척 명분을 "공험진이 두만강 위 700리이니 두만강 까지 우리 땅이다."로 정하게 된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방은 공험령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말이 전하여 온지 오래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이 장백산[2]

북쪽 기슭에 있다고 하는데 역시 사실인지 모르겠다. 『고려사』에 '윤관이 공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하였다. 지금 듣건데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약 길이 막히어 쉽사리 사람을 시킬 수 없다면 폐단 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데 강 밖에 옛 성이 많이 있다는데 그 옛날에 비갈(碑碣)[3]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4]할 수 있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아홉 개의 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이 지금 어느 성이며, 어느 쪽에 있는가.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실록 세종 21년 8월 6일


아래에 3가지 혹은 4가지 학설이 있으나 고고학으로 실증된 학설은 아무 것도 없다. 문헌상으로는 두만강 이북 700리설이 유일하나 이마저도 각 학자의 견해에 따라 반박과 논쟁들이 있는 상황이다.


3.1.1. 함흥 평야설(폐기)[편집]


파일:동북 9성 함흥 평야설.jpg

동북 9성이 함흥 평야 일대에 있었다는 설. 일제강점기 시절 이케우치 히로시 등 6명의 학자들이 주장한 학설로 과거에는 교과서에까지 실리기도 한 학설이었으나 이후 임나일본부설과 비슷하게 주류 학계에서 폐기되었으며 역사 기록과도 맞지 않는 학설이다.

임용한의 말에 따르면 일종의 프로파간다가 담겨있는 학설이라고 한다.

함흥 평야설. 이건 일본인 학자 이케우치 등이 주장한 건데 이건 음모가 있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을 점령하고 나서 하는 말이 "너희는 생전 어느 나라 공격도 안하고 비굴하게 살아온 애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너희를 다스려야 너희의 민족성이 바뀌고 우리 밑에서 큰다."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 그럴려다 보니까 우리 나라는 남의 나라 영토로 쳐들어 간적이 없어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윤관의 9성을 함흥 근처라고 우긴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9부 고려의 여진 정벌 2 中


이 설에는 국력이 더 약했던 공민왕 시절조차도 함흥 평야를 넘어 개마고원까지 진출했으므로 진격에 어려운 것이 아니며, 바로 위인 함흥 평야 일대에 9성이 옹기종기 있었다면 17만 대군을 편성할 이유도 없고, 각 성 사이의 교통로가 끊겨 방어가 어려웠을 이유도 없다는 지적 등이 있다.

함흥 평야 일대를 차지한 이후로 여진족이 이를 발판으로 금나라를 세웠다는게 정황상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여진족이 일어난 발판은 어디까지나 만주 벌판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함흥 평야를 차지해서 그 곳을 발판으로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높고 높은 개마고원과 함경산맥이 있어서 적절치 않다는 것. 하지만 동북 9성을 차지하면서 금나라로 성장했다는 것을 함흥 평야 일대의 힘만으로 성장했다고 볼 경우 문제가 있는 것이지 고려에게서 차지했다는 점으로 본다면 충분히 성장했다고 볼수 있는 주장이다.[5] 그리고 여진의 기반과 별개로 나름대로 생산성 좋은 함흥 평야를 후방의 곡창지로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비록 변방지역이었던데다가, 여진족 역시 농업기술이 원시적이어서 어느 정도 제한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농업을 아예 안했던 것은 아니며, 심지어 이들은 어로생활을 하거나 배를 타기도 했었다. 함흥 역시 바다를 끼고 있어 소금을 얻는 등 나름 가치성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순 없다. 고려 역시 작지만 천리장성 이북 영토 중에서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었던 함흥을 노렸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함흥일대에서만 점령해 9성을 이곳에만 쌓았다고 볼 여지는 전무하다.


3.1.2. 함경남도 일대설(함흥 ~ 길주 일대설)[편집]


동북9성 길주 이남설은 한백겸에 의해 작성된 『동국지리지』 (1615년)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 「동계」조에서 9성의 설치 범위는 홍원(洪原)부터 이성(利城) 사이이며, 선춘령은 마천–마운령 사이로 보았다. 입비처(立碑處)는 마운령에 있는 것이라 하고, 윤관비는 마운령 위의 석추구기(石樞舊基)로 보았다. 한백겸은 동북9성이 길주 이남에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中, 이인철 경복대 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7, vol.23, pp. 247-292 (46 pages)〉


함흥 평야설과 두만강 이북 700리설의 절충설 정도된다. 이 경우 6세기에 신라 진흥왕이 북진했다가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상실한 범위[6]와 비슷해진다.

조선 중-후기 한백겸,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주장한 이설로 9성의 위치가 길주 내지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남 일대에 9성이 위치했다는 주장이다. 고려 측에서 반환을 주장할 때 내세운 근거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함경 산맥 남쪽에 해안을 따라 9성이 일렬로 위치해 있다면 방어선이 지나치게 넓어지는데 반해 교통로가 취약해진다. 중간에 한 곳만 끊어져도 9성 전체의 교통 단절로 이어지고, 이럴 경우 9성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 상호 연계를 통해 방어선을 짤 수 있는 서희의 강동 6주와는 상황이 다르다.

특히 갈라수 전투는 길주로 구원을 가던 오연총의 군대가 공험진에서 여진군과 맞닥뜨려 싸웠으나 시원하게 말아먹은 전투인데, 이 역시 남쪽에서 길주로 가던 길목에 공험진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험진이 너무 북쪽에 있으면 고려군의 기동이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로 국내에서 전쟁사 관련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임용한 교수가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3.1.3. 함경남북도 일대설(함흥 ~ 두만강)[편집]


함흥 평야설, 두만강 이북 700리설, 함경남도설의 절충설이다. 함경남도 일대설과 절충해서 두만강 하류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는 함경남북도 - 두만강 일대설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애초에 국력이 훨씬 약해진 고려를 이끌었던 공민왕도 함경남도 일대와 개마 고원 일부를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며 세종대왕 시기 선춘령과 공험진을 대의 명분으로 공험진 내방소를 경원군으로 비정하여 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혔기 때문이다.


3.1.4. 연길 일대설[편집]


두만강 이북 700리설과 함경남북도 일대설의 절충안이다. 9성이 천리장성 이북과 연길, 왕청 인근에 걸쳐있었다는 설이다.

고려사동국여지승람에 쓰여있는 기록을 근거로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에 있었다고 보지만, 문서 맨 위 그림처럼 두만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 1907년에 발견된 무자년 비석을 선춘령비로 보는 관점이다. 공험진 내방소는 경원군에 있었고 외방어소는 두만강 북안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3.1.5. 두만강 이북 700리설[편집]


파일:동북 9성 점령 예상도.jpg


KBS에서는 여러 학설 중 이 학설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일본의 학자들이 주장한 함흥 평야설도 나왔으나 평가는 좋지 않다. 제1학설은 왜 안나왔는지 의문. 중국(?)

조선 초기 기록인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들을 토대로 공험진의 위치가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가 되는 곳(공험진 외방소) 즉, 두만강 북쪽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공험진이 소하강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Ⅰ. 머리말

고려의 북쪽 국경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 현재까지 다수의 논란이 있어 왔으나, 아직까지 정설(定說)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고려의 국경을 대체로 압록강 하구에서 원산만까지 이어진 것으로 확정적으로 비정하여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여러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현행 한국사 교과서와는 상당히 다르게 고려의 북쪽 국경을 서술할 여지가 있다.

Ⅳ. 문헌과 현지답사에 의한 공험진·선춘령 위치 비정

"공험진·선춘령은 동북9성 중 가장 북단에 위치하였으며, 선춘령에는 고려의 경계를 알리는 상징성을 지닌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글이 새겨진 비석을 세웠다. Ⅲ장의 <표 1>에서 살펴본 것처럼 동북9성 지역은 고려 예종 때뿐만 아니라 조선 전 시대에 걸쳐 역사적·군사적·외교적·행정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공험진은 선춘령 인근의 최전선에 세운 군사적 목적의 거점이었다. 다시 말해 동북9성 중 윤관 등의 여진 정벌 목적 혹은 정벌의 역사적 의미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공험진과 선춘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9성 연구에 있어서, 공험진·선춘령의 위치를 비정하고 또 그 현재적 위치를 찾아내는 작업은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에 따라, 필자는 2015년 10월 6일부터 7박8일 일정으로 공험진·선춘령의 현재적 위치를 찾는 현지답사를 진행하였다.[7]

··· 「중략」 "역사적으로 두만강 이북에 있는 공험진 이남부터는 조선의 관할 지역임을 주장하여 명으로부터 11처 지역의 여진 귀속 문제를 승인받았고, 이것으로 볼 때 조선 초기에는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예종 이후 여진 정벌을 통해 이룩한 국경을, 공민왕 때에도 실질적인 점유와 관계없이 선춘령 이남을 대외적인 국경선으로 주장하여 역사적 영유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원명 교체기의 조선왕조도 고려의 영토관을 계승하여 선춘령 이남 지역은 조선의 영토로 한다는 역사적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나아가 『세종실록』 「지리지」와 『용비어천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공험진·선춘령 관련 기록을 토대로 직접 현장을 답사하여 보면, 이 기록들은 현지 조사 자료를 근거로 한 것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자료들의 거리와 지명 등을 근거로 현지를 답사하여 고증한 결과 공험진은 오배산성에 비정할 수 있고, 선춘령은 고려령에 위치했음을 비정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실지 답사를 통하여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가 파악되며, 동북 9성은 실제로 기록에 나오는 대로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700리 지점에 위치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中, 이인철 경복대 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7, vol.23, pp. 247-292 (46 pages)〉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세 가지 정도의 의견이 사서 내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있고, 4군 6진 개척을 위한 명분성 주장이라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더 나아가 1330년대 사료인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에 당대 《윤관전》을 인용하여, "9성의 폭과 둘레가 7일 일정"이라고 기술한 것을 바탕으로 정평에서 회령까지 12일 반이 소요되는 만큼, 고려군이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야 두만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적극적인 비판도 학계내에서 제기된 상황이다.[8]

요약하면 두만강 이북 700리설은 9성 반환에 대하여 찬성하던 고려 측의 주장들 중 방어상의 문제점[9]은 일단 만족한다고 하지만 사료상에 나타나는 이동거리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존재하는 학설이라 볼 수 있겠다.


4. 관련 문서[편집]



[1] 최창국. 공험진(公嶮鎭)과 통태진(通泰鎭) -고려와 여진의 후기 전투를 중심으로- 참조.[2] 백두산을 말한다.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장백산은 중국에서 백두산의 소유권을 주장할때 쓰는 말이라는 것인데, 실제론 조선 시대까지 백두산과 장백산을 번갈아 가며 썼다.[3] 돌로 만든 비석이라는 뜻이다.[4] 글을 베껴오는 일.[5] 고려가 정복했다시피한 동여진의 권리를 고려에게서 직접 넘겨 받은 격이되니 친 고려파 여진족들과 다른 여진 부족들을 관리하고 지배할 위상과 명분, 구심점 전부 얻은 셈이다. 땅의 크기나 힘과 별개로 무지막지한 것을 얻은 지라 성장이 가능해졌다는 주장은 충분히 있다. 물론 이건 함흥 평야 일대가 아니더라도 적용되는 일로 어디까지나 함흥평야만 정복했다면 완안부의 성장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6] 함흥 평야부터 마운령 이북까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진출한 범위이다.[7] 현지에서 만난 홍석립자촌의 한 거주자 노인은 단지 수분하 건너편의 산에 오래된 성터가 있고, 그 성터가 ‘고려국’이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전한다.[8] 홍성민(2021), "금대 사료 등의 재검토를 통해 본 고려 윤관의 여진정벌", 東洋史學會 2021年 春季硏究發表會: 동아시아사의 보편성과 특수성.[9] 거리가 멀어서 방어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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