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병 (문단 편집) ==== 중기병 VS 경기병 ====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현대 역사가들은 경기병을 중기병보다 우위에 두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유럽 봉건시대 기사의 갑주를 '리더십 결여'의 산물로 평하며 기병의 생명인 기동성과 화력을 떨어뜨리고 기습을 불가능하게 만든 반면, 몽골의 경기병은 기동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전술을 펼 수 있었다고 평했다. 또한 [[존 키건]]은 날붙이끼리 부딪히던 중기병의 전법을 육탄전을 고무하던 [[게르만족]]의 군사문화와 결부시켰다. 특히 [[레그니차 전투]]는 유럽식 중기병과 중앙아시아 경기병의 충돌로 서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오히려 서양 쪽에서 많은 의의를 두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프로이센이 리그니츠의 전장 위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바람에 숱하게 강의주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로 전장에서의 기동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례로 차용되며 당시 유럽식의 충격기병이 경장비의 기병을 상대하는데 겪었던 어려움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Legnica|위키피디아에도 언급이 있다]]. 하지만 '''몽골군 전력의 20~40%은 항시 중기병이었다.''' 더불어 중기병을 열심히 육성한 세력이 경기병 위주의 세력을 제압하고 복속시킨 사례 또한 많다. 최초로 중장기병을 육성했을거라 추정되는 사르마티아는 그 중장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들을 제압하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고구려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요동에서 생산 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중장기병을 양성하여 남만주와 중만주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들어선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도 중장기병을 운영했고 청나라도 중장기병을 운영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직접적으로 싸우는 데는 중장기병이 우세했다. 특히 금나라는 극단적인 초중장기병[* 송나라 기록에는 중기병끼리 쇠사슬로 서로를 묶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금나라 기록에는 없어 청 건륭제 시기인 18세기에 이미 이거 기병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걸 쇠사슬로 묶었다고 비유한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까지 나올 정도로 중장기병 육성에 심혈을 기울인 국가였는데, 바로 그 중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인 [[요나라]]를 완파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쟁을 보면 그야말로 요나라가 불과 10년도 안 되어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훨씬 적은 병력을 거느린 금나라한테 거의 일방적으로 참패를 당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는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군사 주력이 활을 주무기로 삼은 경기병이었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모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중무장 기병을 주력으로 내세운 [[금나라]] 군대한테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참패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요나라가 결코 허약한 나라는 아니었으니, [[금나라]]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약 200년 동안 동북아에서 [[송나라]]와 [[서하]]를 억누르며 최강대국으로 군림했던 군사 강국이었다. 심지어 금나라한테 철저하게 얻어맞고 다 망해가던 와중에도 송나라 10만 대군을 두 번이나 패주시킬 만큼 거란족들은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그런 거란족들을 상대로 박살을 낸 것을 보면 금나라의 중무장 기병들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몽골고원의 유목민 또한 복속시켰다.[* 몽골 고원의 부족들이 전투민족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칭기스칸 이후의 일이고 그전에는 오히려 요나라와 금나라의 압제에 신음하던 약소세력이었다. 정말 경기병이 우월하고 중기병이 저열하다면, 몽골은 칭기스칸이 등장하기도 전에 그 우월한 경기병의 힘으로 요금의 중기병을 대파하고 제국을 세웠어야 한다. 결국 경기병은 우월하니 중기병이 우월하니 하는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이는 아랍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집트]]의 [[맘루크]] 중기병과의 전투에서 몽골기병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맘루크 기병과의 근접전을 강요받았고, 그 근접전에서 몽골기병은 크게 패한다. 맘루크는 기마술, 창술, 검술, 궁술에 모두 통달해야 했으며 4 과목에 대한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충실한 갑옷의 힘으로 마상사격에서도 우위를 점했고 결국 몽골군은 사격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해 근접전 승부에 끌려나올 수 밖에 없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이슬람 경기병은 번번히 유럽의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570기의 중기병이 2만이 넘는 이슬람군을 박살내는 전투까지 있었고 이런 전투들이 한두가지도 아니고 아예 시리즈물로 많았다. 결국 나중에는 이슬람에서 육성한 동급의 중기병이 이에 대항하여 맞돌격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또한, 중기병 위주인 이란 사파비조의 경기병 위주인 몽골계 칸국들의 전쟁에서는 이란 사파비조가 대한 대단한 우세를 띄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징기스칸 기병 VS 콰레즘 기병의 2차전이었는데, 이 삼백년 만의 승부에서 결과가 달라진 건 앞서 맘루크 기병 VS 몽골 기병의 사례와 같이 '''사파비조측이 몽골 기병에게 근접전을 강요하는 전법을 집중적으로 개발'''한 데 있었다. 사실 무장이나 전술에서 딱히 달라진 건 없었고 몽골계 칸국들이라고 무능한 장군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란계 중기병이 징기스칸 시기에 당했던 결과의 설욕에 성공했던 건, '''이들을 지휘했던 그 당시 지휘관들 자체가 몽골-튀르크계 전법의 전문가였기에 징기스칸식 전법의 강약을 너무나도 잘 꿰고 있었던 반면 몽골계 칸국들은 징기스칸 시기와는 달리 아군의 강약을 파악하는데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달라진 점은 우선 몽골계 칸국들에겐 없거나 부족한 화기를 직접 공격용이 아닌 전장을 제한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정찰 용도로 경기병 부대를 반드시 따로 편성해서 징기스칸 때와는 달리 몽골계 기병의 우회 타격이나 지휘선 교란을 결코 허용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이러니 사파비조 기병을 상대하는 몽골 기병들은 징기스칸 시기와는 달리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중기병들과의 근접전을 자주 강요당해야 했고, 그냥 봐도 알 수 있듯 콰레즘 시절 당시 중기병과 거의 무장이 달라진 적 없었던 이란 중기병들에게 속절없이 깨져나갔다. 이렇듯 중기병은 전장에서 매우 강력한 병종이었으며 중기병 무시 풍조는 17-19세기에 걸쳐 유럽에 팽배했던 중세 무시 사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기병과 중기병중 어느 쪽이 언제나 우세하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으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그 효력이 다른 병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것이 두차례의 도릴라이움 전투로 십자군 중기병이 근접전을 강요한 1차 도릴라이움전투에서는 십자군이 승리했지만 투르크 궁기병의 스웜전술에 휘말인 2차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십자군이 궤멸당했다. 근접전에서는 중기병이 우세한 반면, 경기병은 적과 직접 충돌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데에 더 유용했다.[* 정찰, 약탈, 수송대 호위, 패퇴하는 적 추격, 후방 급습 등의 비정규전 등등 전면 교전 이외의 모든 부류의 작전에 쓰임새가 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전쟁은 전투에서 승부가 나기 때문에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기병이 보조하는 형태로 병력을 구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