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병 (문단 편집) === [[근대]]: 기원후 18~19세기 === || [[파일:29BE51C200000578-3129572-image-a-30_1434651192.jpg|width=100%]] || || 근대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퀴레시어, 후사르, 울란을 재현한 모습. ||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기병의 위상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머스킷]]을 사용하는 [[전열보병]]이 대두되었고, [[소총]]에 장착하는 [[총검]]이 발명되자 더이상 장창병의 보호를 받을 필요도 없어져서 이내 장창병이 폐지되었다. 그러고도 잘 정비된 총병 전열은 단독으로 자신들을 향해 돌격해오는 기병대에게 잘 저항할 수 있었고, 격퇴 사례도 두드러졌다. 거기에 기술의 발달로 [[포병]]이 더욱 강화되면서 굳이 기병을 보내지 않더라도 선제타격으로 보병대열에 충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원거리 투사무기를 사용하는 경기병 역시 거의 사라져 돌격전에서 한 두발 사격하는 정도였고, 마상에서 활과 총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이집트 [[맘루크]] 기병대는 피라미드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전열보병|보병방진]]의 화력을 못이기고 궤멸하기도 했다. 이렇듯 화력에서도 보병과 포병에 밀리고, 양성과 유지비용면에서는 보병보다 비싸서 기병의 활동 비중이 그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기병은 여전히 중요한 전력이었다.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병과였으며, 전투초기 주요거점이나 지역쟁탈전, 정보수집 등 전투/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전초전은 주로 기병들이 맡았으며, 빠른 투입이 필요할 때 어느 병과보다 먼저 도착하여 전투를 치룰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적의 정찰병, 소규모 치중대가 이동하거나 , 적이 나뉘어 후퇴하거나 퇴각할 때에 기병만큼 추격/섬멸에서 효율적인 병과는 없었다. 특히 [[러시아 원정]]에서 후퇴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육군의 치중대나 정찰대, 그외 소규모 부대나 나뉘어져 있는 수많은 병사들과 행군 낙오병들은 러시아의 [[코사크]]기병대에 의해 직접적인 전투나, 보급부족 등으로 목숨을 잃은 바 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야전과 회전에서 기병의 중요성은 다시 대두되었다. 가령 이시기 유럽각국은 기병의 역할을 축소시키면서 보병과 혼재편성하는 일이 지배적이었으나[* 예를 들어 모리스 백작은 한 군단을 3580명으로 편성하여 그 중에서 정찰용 기병을 대대급 병력인 220명의 절반가량(110?)으로 혼재편성하였었고, 나폴레옹기 프랑스 원정군 편성을 살펴 보면 기병군단 외에 각 군단에도 경기병 병력이 약간씩 혼재편성되어 있는걸 확인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기병의 돌파력을 잘 살리기 위해 기병으로만 구성된 단독부대를 사단급 병력 규모(Corp)로 창설 및 재편성하였으며, 기병의 작전수행을 엄호하기 위해 기마포병대를 적극 활용하였다.[* 기마포병을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한건 30년 전쟁당시 스웨덴의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고, 뒤이어 러시아가, 그 이후 더 대규모로 본격적으로 편성하고 운용한 것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2세)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보고 베껴서 1791년에 도입하였다.[[https://military-history.fandom.com/wiki/Horse_artillery|링크]] 및 James Marshall-Cornwall, , Penguin Books, 2002, p.31] 또한,[[독일·폴란드 원정]]이후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창기병]]만의 독자부대로서 [[울란]]을 창설하여 자기 통솔하에 두기도 하였다. || [[이미지:somosierra2.jpg|width=100%]] || || 소모시에라 전투 전개도 || 그리하여 돌파력을 이용한 기병의 돌격은 다시금 위력을 발휘하였고, 제병협동이 되면 성공율도 높았다. 대표적으로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포병과 보병의 압박에 밀리었으나, [[뮈라]]장군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적의 정면에서 돌격하자 전투의 판세가 바뀌었으며, 스페인 전역에서 벌어진 '''소모시에라 전투'''(Battle of Somosierra, 1808)에서는 좁은 비탈길과 언덕에 포진되어 있는 스페인군의 방어진을 [[울란]]이 선봉에 서서 4열종대로 비탈길을 올라가며 돌격을 가하여 적 포병과 보병진을 휘저으며 아군 공격의 활로를 열어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기병편성과 운용에 대한 설명 출처는 '주정율, <나폴레옹의 기병전술에 관한 연구>, 군사89호, 군사편찬연구소, 2013'] 또한 대전투 속에서 벌어지는 부분 교전이나 쟁탈전에서도 기병부대가 돌격하여 보병부대를 격퇴하거나 고전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기병의 투입율도 꽤 높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전선 중앙에 위치한 프라첸 언덕 쟁탈전 중 중앙군의 좌익에 위치하며 적과의 교전으로 지쳤던 프랑스군 제4전열보병연대를 러시아 콘스탄틴 대공의 근위중장기병대가 일시 격퇴하여 4연대 예하 1대대를 궤멸시켰으나, 이후 나폴레옹이 예비대로 둔 근위기병대와 함께 기마포병의 포격으로 이들을 후퇴시키자, 러시아 근위중장기병대가 자군의 보병진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대열이 붕괴되버려 다시 프랑스 근위기병대가 돌격하여 격멸한 바 있다. || [[파일:attachment/Lg_Chasseur_s-Fate.jpg|width=100%]] || ||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엽기병. [[http://www.keithrocco.com/inventory/details.php?productid=409&subcategory=54|Keith Rocco 作]] || 같은 전투에서 전선 북쪽에 위치한 [[뮈라]]가 맡은 프랑스군의 좌익과 [[바그라티온]]이 맡은 러시아군의 우익은 아예 기병대가 선봉에 서서 전선을 주도하였고, 프랑스측의 2개 흉갑기병사단이 전선 중앙의 틈으로 돌격을 가하여 북쪽전선 전체를 프랑스군의 승리로 뒤집어놓았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이 자신들이 구축한 3개의 보루에서 방어를 펼치며, 공격에 지치거나 물러나려는 프랑스군을 향해 기병대로 돌격을 하며 특히 [[바그라티온]]이 [[다부]]와 [[네]]가 이끌던 공격부대를 몇 차례에 걸쳐 격퇴한 적이 있으며, 이에 맞서 [[뮈라]]가 나서 맞대응을 하며 격렬한 기병전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전투 후반부에는 러시아의 마트베이 플라토프 장군이 이끄는 코사크 기병대가 보로디노 마을에 주둔중인 프랑스 보병대의 후방으로 쇄도하자 공황상태에 빠진 프랑스군 좌익 대부분이 2시간 동안 진격이 지연되었었고, 전투 종반부 마지막 남은 러시아군의 대보루에 대해서 프랑스군 제2기병사단이 우회돌격을 감행하여 러시아군의 보병과 포병을 무력화시켰다. 더불어 가끔 보병과 떨어져있거나 방어에 취약한 포병을 기병이 예기치않게 공격하여 무력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포병은 이런 접근전에서 재빠른 기병에게 매우 무력하였으며 이렇게 기병에게 포병을 제압당한 쪽은 일방적으로 포격을 당하여 패배할 수 있기 때문에 전투의 성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예나 전투]]에서는 비록 나중에 격퇴되었지만, 네 장군의 휘하 6군단 소속 기병연대가 프로이센군 포대 30문을 유린한 적이 있고, 앞서 언급한 소모시에라 전투에서는 [[울란]]이 스페인군 포병진을 분쇄하여 프랑스군이 공격활로를 열어 승리할 수 있었으며, [[보로디노]]전투에서도 프랑스 기병이 러시아군 보루를 우회하여 보병의 후방에서 돌격해들어가 포대까지 무력화 시킨 바 있다. 그리고 [[워털루]]전투에서는 영국의 스코츠 그레이(Scots Grey)기병대가 프랑스 기병대에 격퇴되기전까지 프랑스군 포병진에 들이닥쳐 큰 피해를 입힌 적도 있다. 이시기 회전에서 기병은 보통 좌/우익 등의 측면에서 적진에 대한 우회돌격에 주력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필요할 때에는 포병과 보병 지원 혹은 단독으로 중세의 기사들처럼 정면에서 적 보병에게 돌격하여 적을 직접 물리치고 와해시키는 역할도 꾸준히 맡아왔고 그 전과도 혁혁하였다. 비록 포병과 보병의 사격과 전투능력의 향상으로 인하여 이전 시대에 비해서 입지도 줄어들고, 공격과 돌격이 실패하는 일도 그전에 비해 잦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과 기회를 포착하여 투입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것이 전장의 성패를 좌우 하는만큼 세밀한 기병운용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더욱이 이시대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나폴레옹은 포병과 보병의 제병협동과 기병만의 장점을 부각시키어 운용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성취를 이루는데 기병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하였다. 나폴레옹 시기 대략적인 프랑스 대육군의 기병편성비율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전쟁 당시 원정군 편성에서 총원 17만 6천 명 중 보병이 20사단, 기병사단만 11개로, 각 군단에 배치된 기병을 제외하고 [[뮈라]]가 지휘한 5개 기병사단(division)의 규모가 21,000명에 [[장바티스트 베시에르|베시에르]]가 지휘한 2개 기병연대(regiment)의 규모가 6,000명으로 독립 기병부대의 규모가 27,000명에 달하였다.[* James Marshall-Cornwall, , Penguin Books, 2002, p.131 책에서 적고 있는 각 군단별 light Cavalry division이 어느정도 규모인지는 불명확함] 제4차 대프랑스 동맹전쟁 중이던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총병력 60,000 ~ 75,000 명중 기병은 11,000 ~ 17,000명 정도[* 인용서적 마다 숫자 차이가 있고, 예비대로써 돌격전을 치룬 병력이므로 독립기병사단으로 추정되며, 각 군단에 편성된 기병은 제외한 수치로 짐작됨], 제5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이자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편성비율은 보병 145,000명에 기병 27,000명[* James Marshall-Cornwall, 같은 책, p.195]으로 보병과 기병은 4.37~5.51:1의 편성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여담으로 이 시기가 되면 기병용 갑주가 거의 사라져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는 주로 말의 중량에 좌우되고[* 더하여 보통 중기병들은 경기병보다 키나 덩치가 더 컸고 사용하는 기병도 역시 더 길고 무거웠다.] 승마자의 장비는 별 상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나폴레옹 전쟁]]기의 [[워털루 전투]]에서 괴멸당한 영국군의 스코츠 그레이(Scots Grey)는 후사르와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했고, 근위 기병대(Horse Guard)는 군복에 투구만 착용했지만 말이 대형마였기 때문에 중기병으로 분류된다. 물론 이시기에도 퀴레시어나 캐러비니어 같이 갑옷을 입은 기병은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은 당연히 중기병으로 분류되었다. 더불어 보병이나 기병에게 돌격전을 치뤄야 하는 중기병들은 중세 기사들과 동일하게 돌격할 때는 촘촘한 밀집대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대열유지를 위해 시속 20㎞ 내외의 속력을 유지하며 달려나갔다. 이 시대 기병지휘관으로 유명했던 [[뮈라]]도 되도록이면 행군때 말은 걷게하고, 적에게 접근하여 돌격전까지 되도록 천천히 달리는 트롯(trot)으로 달리게 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https://en.wikipedia.org/wiki/Horses_in_the_Napoleonic_Wars#:~:text=On%20the%20battlefield%2C%20the%20cavalry,%2Fh%20(12%20mph).|링크]] 단, 예외적으로 워털루 전투당시 아서 [[아서 웰즐리|웰링턴]]휘하의 기병대는 풀갤럽 즉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돌격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주요 기병의 병과는 다음과 같다. 각 병과의 자세한 설명은 개별 문서를 참고. 본 문서에서는 각 병과에 대하여 개략적인 설명만 서술한다. * [[울란]] * [[후사르]] * [[샤쇠르]] * [[퀴레시어]] * [[드라군]] * [[캐러비니어]] * [[시파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