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1세

덤프버전 :




프랑수아 1세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프랑스 왕국 발루아앙굴렘 왕조 초대 국왕
프랑수아 1세[1]
François Ier

파일:François_Ier_Louvre.jpg}}}
이름
프랑수아 당굴렘
(François d'Angoulême)
출생
1494년 9월 12일
프랑스 왕국 코냐크 코냐크 성
사망
1547년 3월 31일 (향년 52세)
프랑스 왕국 랑부예 성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515년 1월 1일 ~ 1547년 3월 31일
밀라노 공국의 공작
1515년 10월 11일 ~ 1521년 11월 20일
신체
200cm
배우자
프랑스의 클로드 (1514년 결혼 / 1524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1530년 결혼)
자녀
루이즈, 샤를로트, 프랑수아 4세, 앙리 2세, 마들렌, 샤를, 마르그리트
아버지
앙굴렘 백작 샤를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
형제
마르그리트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프랑수아 1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프랑스 왕위 계승
2.3. 내치에서의 업적
2.4. 종교개혁과 사망
3. 가족
3.1. 프랑스의 클로드
3.2.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4.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누구나 그의 말을 들으면 그가 학문이든 예술이든 논하지 못할 분야가 없을 정도로 호방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에 놀란다.... 그의 재능은 전쟁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문학과 회화, 언어에도 탁월했다.

- 당시 프랑스 주재 베네치아 대사 마리노 카발리


16세기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초대 왕이다.

키가 무려 200cm로 역대 프랑스의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잉글랜드 왕국헨리 8세도 188cm로 당대에나 지금이나 엄청난 장신이였지만 프랑수아 1세가 넘사벽으로 더 컸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두 사람 다 장신이다.


2. 생애[편집]



2.1. 프랑스 왕위 계승[편집]


선왕 루이 12세의 사촌 샤를 도를레앙과 사보이아 공국 공작 필리포 2세의 장녀 루이사[2]의 아들로 왕의 5촌 조카였다. 루이 12세가 아들이 없는 발루아 본가의 루이 11세의 왕녀 잔과 결혼하여 루이 11세의 사위이자 샤를 8세의 매형 자격으로 왕에 즉위했듯, 프랑수아도 후사가 없었던 루이 12세의 왕녀 클로드와 결혼하여 루이 12세의 사위 자격으로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그 이전 청년기에는 왕족으로서 군생활을 지내며 방탕함을 몸에 익혔고,[3] 잘생긴 외모와 당당한 체격을 갖춘 남자로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또한 어머니와 누나의 영향으로 자존감 하나는 지존이었다고 한다.


2.2. 대(對) 합스부르크 전쟁과 국가재정[편집]


프랑수아 1세는 2m에 달하는 장대한 체구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스포츠로 다져진 튼튼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520년,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북부의 발링헴 지역에서 잉글랜드튜더 왕조 제2대 왕 헨리 8세와 만나 회담을 가졌다. 양국의 자존심을 걸고 화려하게 꾸미느라 돈지랄이 난 이 발링헴 회담에서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는 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레슬링 시합을 가졌는데, 헨리가 프랑수아에게 완패하는 치욕을 당했다. 프랑수아 1세가 젊은 시절에 브르타뉴 지역의 레슬링 선수들한테 레슬링을 배웠기 때문에 그 자신도 뛰어난 레슬링 실력을 지닌데다 헨리 8세(188cm)보다도 키가 훨씬 더 컸다. 레슬링 실력이 뛰어난데다 키와 체격까지 더 컸으니 당연히 헨리 8세가 질 수 밖에. 다만 프랑수아 1세는 이 회담을 통해 헨리 8세와 손을 잡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견제하려 했으나, 헨리 8세는 도리어 전쟁을 피하고,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관계를 중재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엄청난 돈을 들인 이 회담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 국왕으로서 그의 삶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으로서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의 최강기를 구가하던 카를 5세와의 이탈리아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처음엔 선왕 루이 12세가 실패했던(제3차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 침공에 나서 초기 마리냐노 전투(1515)에서 스위스 용병대를 물리쳤으나 곧 스페인군에 밀려 패퇴했고, 동맹자였던 교황 클레멘스 7세독일 용병단에 의해 로마가 쑥대밭이 되자 카를 5세편으로 돌아섰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 역시 스페인 손에 넘어갔다. 그 후의 제4차 이탈리아 전쟁(1521~1526)에서도 밀려,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참전하는 친정에 나섰으나 오히려 대패하였고 한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에게는 일대의 치욕적인 굴욕이었으나 스페인 입장에서는 최고의 전성기였다.[4]

이처럼 프랑수아 1세는 당대의 평가와 같이 "전쟁에서도 외교에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군주"였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라이벌 카를 5세에게 크게 패하고 생포되어 포로 생활을 하는 등 씻기 어려운 치욕을 겪었고, 말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와 대립했지만 결국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파일:suleiman.karl.jpg
프랑수아 1세(좌)와 쉴레이만 1세

자신이 직접 나선 전쟁에서 참패하고 포로가 된 치욕으로 인해 카를 5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한 때문인지 틈만 나면 카를 5세와 신성 로마 제국에게 복수하려고 들었다. 제6차 이탈리아 전쟁(1536~1538)때는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카를 5세에게 대항하려 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유럽 국가들의 비난만 샀다. 특히 제7차 이탈리아 전쟁(1542~1546)때는 악명 높은 오스만의 해적 겸 해군 제독인 바르바로사 하이레딘 파샤가 이끄는 함대가 프랑수아 1세의 허가를 받아 1543년 프랑스 남부 툴롱에 정박하고, 니차 등 이탈리아 해안 등을 공격하자 유럽 각국에서 교황에게 프랑수아 1세를 파문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쳤다.[5]

더구나 카를 5세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도 여러모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프랑수아 1세가 노른자 땅인 부르고뉴 공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때 당시 스페인 제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 떠난 조카 카를 5세를 대신하여 부르고뉴 공국[6]을 대리 통치하고 있었던 마르가레테가 이를 저지한 바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 제위를 놓고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와 경쟁할 때도 그녀의 계책으로 거부 푸거 가문의 자산이 대거 융통되어 카를 5세의 이름으로 선제후들에게 뿌려졌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카를 5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스페인 제국에게 질 수 없다는 듯 프랑수아 1세는 아메리카 신대륙에도 관심을 가져 자크 카르티에를 파견해 캐나다를 탐험하게 하기도 했다.

잦은 원정과 실패, 건축, 배상금 등으로 프랑스의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고, 왕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그저 관직매매를 통해 임시변통을 했을 뿐이었다. 앙시앵 레짐의 병폐 중 하나인 관직매매징세권 매매는 이 시기에 악화되었다.


2.3. 내치에서의 업적[편집]


대외정치와 재정쪽으로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인격적으로는 예술의 후원자이자 인간적이고 너그러웠던 유쾌한 왕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프랑수아는 호탕하면서도 너그러운 성격으로, 당대 프랑스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프랑스 궁정에서 평민 출신으로 푸대접을 받던 며느리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항상 염려하고 챙겨주었다.

문화적인 공적도 많은데 이탈리아 반도의 르네상스 문물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문화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후원해주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저택을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하다.[7] 그가 예술 문화 발전의 기틀을 다진 덕분에 그 아들인 앙리 2세 대에는 이탈리아 출신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공로로 프랑스의 문화가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궁정 역시 정비되어, 기존의 거친 궁정을 대신하는 세련된 궁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라틴어를 밀어내고 프랑스어공용어의 위치를 확립했던 것도 이 시기(1530년대)였다.[8]

151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 출마했는데, 여기서도 카를로부터 태클이 들어왔다. 선거 자금으로 300,000 굴덴을 뿌렸으나 경쟁 후보인 카를 5세가 당시 독일 최고의 금융 가문으로 통하던 푸거 가문과 벨저 가문의 힘을 빌려 850,000 굴덴을 뿌린 결과, 선거에서 패배한 것.


2.4. 종교개혁과 사망[편집]


종교면에서는 외치와 재정만큼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스스로를 '교회의 보호자'로 여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1533년부터 개신교가 득세하고, 1534년에 '벽서 사건'까지 발생[9]하자 개신교 탄압을 심화시켰다. 1535년 7월에 <쿠시 칙령>을 내려, 당장 복음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추방하겠다고 선포했다. 게다가 그의 개신교 탄압에 반발하는 개신교들을 군대로 무자비하게 탄압했는데 개신교의 위세가 강했던 프랑스 남동부 메린놀 지역에서 수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탄압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내 개신교 신자들은 국외로 도주해야 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카를 5세와 대립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하여 카를 5세를 견제했다. 장 칼뱅은《기독교 강요》<서문>의 헌사를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치는 편지로 서술했다.

1547년, 50세를 조금 넘긴 프랑수아 1세는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병상에서 죽어가던 프랑수아는

"주님, 처음에는 왕관이 저에게 주시는 선물인줄 알았습니다만 지금은 너무도 무겁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사인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매독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 이는 남의 아내를 NTR하는 바람에 매독에 걸렸다는 소문이 확대된 것이었다.

사후 그의 시신은 장례를 치룬다음 첫째 왕비와 어머니가 묻힌 생드니 대성당에 묻힌다. 그러나 수백년이 지나고 나서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가 공화국이 될때 그의 무덤은 왕비랑 어머니의 무덤과 함께 혁명 과격파에게 파괴된다.


3. 가족[편집]


바람기가 상당한 걸로 유명해 장인 루이 12세의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 젊은 왕비 잉글랜드의 메리[10]의 침실 근처를 어슬렁거려서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괜히 왕비와 추문이 나서 왕위고 뭐고 다 날릴까봐.


3.1. 프랑스의 클로드[편집]


파일:Arms_of_the_Kingdom_of_France_(Ancien).svg
프랑스 왕비

[ 펼치기 · 접기 ]
카페 왕조
위그
로베르 2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
이탈리아의 로잘라
부르고뉴의 베르타
아를의 콘스텐체
앙리 1세
필리프 1세
프리슬란트의 마틸다
키예프의 안나
홀랜드의 베르타
몽포르의 베르트라드
루이 6세
루이 7세
로슈포르의 루시엔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카스티야의 콩스탕스
(루이 7세)
필리프 2세
샹파뉴의 아델
에노의 이사벨
덴마크의 잉에보어
메라니의 아녜스
루이 8세
루이 9세
필리프 3세
카스티야의 블랑카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아라곤의 이사벨
브라반트의 마리아
필리프 4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헝가리의 클레망스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
샤를 4세

부르고뉴의 블랑슈
룩셈부르크의 마리아
에브뢰의 잔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
장 2세
부르고뉴의 잔
나바라의 블랑슈
보헤미아의 보나
오베르뉴 여백작 잔 1세
샤를 5세
샤를 6세
샤를 7세
루이 11세
부르봉의 잔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앙주의 마리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루이 11세)
샤를 8세
루이 12세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브르타뉴 여공작 안
프랑스의 잔
브르타뉴 여공작 안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잉글랜드의 메리
프랑스의 클로드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카테리나 데 메디치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로렌의 루이즈

부르봉 왕조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마리아 데 메디치
오스트리아의 아나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 15세
루이 16세
마리아 레슈친스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오를레앙 왕조
루이 필리프 1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프랑스 카페 왕조 국왕 · 프랑스 발루아 왕조 국왕 · 프랑스 부르봉 왕조 국왕 · 프랑스 오를레앙 왕조 국왕



파일:Banniel_Breizh_1.0.svg.png
브르타뉴 공작


[ 펼치기 · 접기 ]
브르타뉴 왕조
노미노에
에리스포
살로몬
파스케텐
브르타뉴 왕조
낭트 왕조
알란 1세
구르마엘롱
알란 2세
드로고
낭트 왕조
렌 왕조
호엘 1세
게레흐
코난 1세
조프루아 1세
렌 왕조
에오젠
알란 3세
코난 2세
하와이즈
코르누아유 왕조
호엘 2세
코르누아유 왕조
펜티에브르 왕조
알란 4세
코난 3세
베르타
코난 4세
펜티에브르 왕조
플랑타주네 왕조
투아르 왕조
콩스탕스
아르튀르 1세
알릭스
플랑타주네 왕조
투아르 왕조
드뢰 왕조
조프루아 2세

피에르 1세
드뢰 왕조
장 1세
장 2세
아르튀르 2세
장 3세
펜티에브르 왕조
몽포르 왕조

장 4세
장 5세
장 6세
블루아 왕조
샤를 1세
몽포르 왕조
프랑수아 1세
피에르 2세
아르튀르 3세
프랑수아 2세
몽포르 왕조




발루아 왕조
발루아 왕조
샤를 2세
루이
발루아 왕조

클로드
프랑수아 4세
앙리

프랑수아 3세



파일:Claude of France.jpg
프랑수아 1세의 첫 번째 왕비. 선왕 루이 12세와 두 번째 왕비 안 드 브르타뉴 사이의 딸.[11]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아버지 프랑수아 2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후계자가 되었다. 프랑스의 왕 샤를 8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먹을 생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대리혼까지 마친 안을 낼름 납치했고, 안은 이미 결혼했으니 너랑은 못한다고 난리쳤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자기 왕비로 삼아버렸다. 당시 막시밀리안 1세의 황녀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왕비가 되기 위하여 어린 나이부터 프랑스 궁정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샤를 8세가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딸이 모두 닭 쫒던 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치사하게 결혼한 안과의 사이에 살아남은 남성 후계자가 없었다.

샤를 8세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가 선왕의 왕비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해 낳은 장녀가 클로드. 부모는 총 9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것은 클로드와 막내 여동생인 르네가 유일했다. 프랑스의 공주이고 어머니의 후계자로 브르타뉴 공국의 주인에다 프랑스 왕비까지 된 클로드는 권력을 누릴만 했지만, 대단하신 시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시누이인 나바라 왕비 마르그리트에게 밀려서 영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유명한 앤 불린이 어릴 때 클로드의 시녀로 프랑스 궁정에 있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문화의 최첨단이었고 잉글랜드는 불모지였는데, 프랑스에서 세련된 매너를 배워간 앤 불린은 잉글랜드에서 인기가 높아져 퀸카 대접을 받았다.

또한 앤의 언니인 메리 불린도 클로드의 시녀로 있었다. 본래 메리 불린은 헨리 8세의 동생 메리 공주가 루이 12세의 세 번째 왕비로 프랑스에 시집올 때 시녀 자격으로 따라왔다. 루이 12세가 죽자 메리 공주는 친정인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메리 불린은 프랑스 궁정에 계속 남아 클로드의 시녀가 되면서 동시에 프랑수아 1세의 정부가 되었다.[12]

이렇게 놀아나는 남편이었지만 클로드는 늘 품위있게 처신했다.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는데, 본래 허약한 편에다 결혼 생활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고 총 7명의 자녀를 낳았다.
클로드의 자녀
  • 루이즈(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약혼을 하지만 3세의 나이로 사망.
  • 샤를로트(딸): 언니가 사망한 이후 역시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약혼을 하지만 9세의 나이로 사망.
  • 프랑수아(아들): 어머니가 상속받은 브르타뉴 공국을 상속받지만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객기부리는 바람에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에게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부왕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아들들을 잡아둔다. 이때 프랑수아와 동생 앙리가 카를 5세에게 끌려갔다.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혼담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 앙리 2세(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출신 카테리나 데 메디치와 결혼했다. 본디 메디치 가문은 상인 집안이라 카트린은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좀 쳐졌는데, 형 프랑수아의 사망으로 앙리 2세가 왕이 되면서 그녀도 덩달아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 마들렌(딸):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제임스 5세와 결혼했다. 마들렌이 자녀 없이 1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제임스 5세는 역시나 프랑스 출신의 마리 드 기즈를 두 번째 왕비로 맞이했다. 마리 드 기즈의 딸이 훗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다.
  • 샤를(아들): 오를레앙 공작위를 받았다. 자녀 없이 24세의 나이로 사망.
  • 마르그리트(딸):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3]와 결혼해서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를 낳았다.


3.2.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편집]


파일:Arms_of_the_Kingdom_of_France_(Ancien).svg
프랑스 왕비

[ 펼치기 · 접기 ]
카페 왕조
위그
로베르 2세
아키텐의 아델라이드
이탈리아의 로잘라
부르고뉴의 베르타
아를의 콘스텐체
앙리 1세
필리프 1세
프리슬란트의 마틸다
키예프의 안나
홀랜드의 베르타
몽포르의 베르트라드
루이 6세
루이 7세
로슈포르의 루시엔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카스티야의 콩스탕스
(루이 7세)
필리프 2세
샹파뉴의 아델
에노의 이사벨
덴마크의 잉에보어
메라니의 아녜스
루이 8세
루이 9세
필리프 3세
카스티야의 블랑카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아라곤의 이사벨
브라반트의 마리아
필리프 4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헝가리의 클레망스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
샤를 4세

부르고뉴의 블랑슈
룩셈부르크의 마리아
에브뢰의 잔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
장 2세
부르고뉴의 잔
나바라의 블랑슈
보헤미아의 보나
오베르뉴 여백작 잔 1세
샤를 5세
샤를 6세
샤를 7세
루이 11세
부르봉의 잔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앙주의 마리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루이 11세)
샤를 8세
루이 12세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브르타뉴 여공작 안
프랑스의 잔
브르타뉴 여공작 안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잉글랜드의 메리
프랑스의 클로드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카테리나 데 메디치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로렌의 루이즈

부르봉 왕조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마리아 데 메디치
오스트리아의 아나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 15세
루이 16세
마리아 레슈친스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오를레앙 왕조
루이 필리프 1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프랑스 카페 왕조 국왕 · 프랑스 발루아 왕조 국왕 · 프랑스 부르봉 왕조 국왕 · 프랑스 오를레앙 왕조 국왕



파일:Eleanor of Austria.jpg
프랑수아 1세의 두 번째 왕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미남왕' 필리프와 카스티야의 여왕 후아나 사이의 장녀였다. 어머니인 후아나는 아버지 필리프가 사망한 이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형제들은 페르디난트 1세와 막내 카탈리나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모인 마르가레테[14]의 손에서 자랐다.

엘레오노르는 이모부였던 포르투갈 왕국의 왕 마누엘 1세의 세 번째 왕비가 되어 2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사망했고, 딸인 인판타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고 50대에 사망했다.[15] 첫 번째 남편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20대 초반의 엘레오노르는 다시 남동생 카를 5세가 있는 궁정으로 딸과 함께 돌아왔다. 황제의 큰누나인 엘레오노르는 좋은 정략 결혼 상대였기 때문에 카를 5세는 간을 봤고, 결국 10년 후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마드리드에 잡혀와 있던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재혼하게 된다.

당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어린 시절 프랑스 왕실에서 미래의 왕비로 지냈던 엘레오노르의 고모 마르가레테의 협약으로 혼인이 결정되었고, 이것을 '귀부인들의 협약'이라고 한다. 엘레오노르는 딸을 두고 프랑스로 가게 되었는데 자존심이 강했던 프랑수아는 굴욕적인 혼인에 매우 기분이 상했고, 결혼 생활 내내 왕비를 푸대접했다.[16] 하지만 엘레오노르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하며, 의붓아들인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결국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고, 프랑스의 궁정에서 후계자가 없는 왕비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외롭게 살다가 남편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한 이후 다시 동생 카를 5세에게 돌아왔다. 이후 어린 시절 두고 온 딸 인판타 마리아에게 함께 살자고 했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오래 살았던 딸은 어머니와 동거하기를 거부했고, 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사망했다.


4. 창작물에서[편집]



4.1. <튜더스>[편집]


파일:프랑수아 1세(튜더스).png

배우는 엠마뉴엘 르콩트. 프랑스의 왕으로 주인공 헨리 8세가 열폭하는 대상이다. 서로 동맹하고 배신하고를 무한 반복하는 사이. 실제로 직접 대면하게 되면 체면상 형제처럼 친한 척을 하지만 헨리 입장에서는 싫은 놈인데, 상대는 프랑스의 왕이라 성질대로 할 수 없으니 더 열받는 상대다.

시즌 1에서는 평화 협정 겸 프랑수아의 아들과 메리 공주의 약혼식에서 직접 만나는데, 처음에는 서로 친근하게 대하다가 프랑스의 모든 것이 잉글랜드보다 뛰어나다는 말에 빡친 헨리가 프랑수아에게 직접 레슬링 시합을 신청한다. 프랑수아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헨리가 자신을 겁쟁이라고 하자 프랑스의 명예가 걸렸다며 헨리의 도전을 받아주고 가볍게 헨리를 이긴다.[17]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헨리는 재차 재대결을 요구하고 토머스 모어에게 평화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토머스 모어가 그런 짓을 하면 잉글랜드의 왕이 더욱 더 가볍게 보일 것이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서명한다.

시즌 2에서는 왕비가 되려는 앤 불린에게 그녀가 앉으려는 자리는 절대로 가벼운 자리가 아니라고 하며, 만약에 나는 내가 왕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 운명을 바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18] 앤 불린은 계속해서 엘리자베스를 프랑수아의 막내 아들과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프랑수아는 앤 불린이 왕비인 것을 인정하기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사생아와 결혼시킬 수 없어서 거절했다.


4.2.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편집]


스페인rtve에서 방영한 사극 Carlos, rey emperador에서도 등장한다. 여러 여자들과 열심히 놀기 바쁘고 그나마 있는 안 드 몽모랑시의 조언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카를로스에게 탈탈 털린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08:58:42에 나무위키 프랑수아 1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프랑스의 왕호 작명법대로라면 후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와야 '1세'가 된다. 프랑스 왕 중에는 프랑수아 2세가 있으므로 이사람 역시 프랑수아 1세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대에 이미 프랑수아 1세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당시 만들어진 기념 메달 등에 FRANCISCUS I라고 쓰여 있는 경우가 많다. 파일:francismedal.jpg[2] 루이사의 어머니는 부르봉의 마르그리트로, 필리베르토 2세는 루이사의 친동생, 카를로 2세는 이복동생이었다.[3] 실은 사위가 못마땅했던 루이 12세가 군무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엄격함을 체득해 보라며 국경지대의 군부대로 보낸 것이었지만, 도리어 군대에서 방탕함을 배운 것.[4] 그 후 카를 5세의 포로로 잡혔다가 아들 둘을 볼모로 보낸 조건으로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로 돌아온 후, 발루아-앙굴렘 왕조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두 아들들을 돌려받았고, 카를 5세가 부르고뉴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소유지와 아르투아 지방,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또한 배상금 200만 크라운을 지불했는데 1차분으로 넘긴 120만 크라운을 헤아리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는 배상금 덕에 스페인 국고는 금화로 넘친 반면 프랑스는 초긴축 기조를 강요받았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 신성 로마 제국을 평생 증오했다. 여담으로 이 캉브레 조약은 "마담들의 평화"라는 이명으로 불리는데,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카를 5세의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협상을 벌였기 때문.[5] 사실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던 카를 5세 역시 동맹까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의 시아파 사파비 왕조와 나름대로 접촉하며 프랑스와 수니파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다. 다만 오늘날에는 기독교 유럽 국가가 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맺은 군사동맹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 억지춘향식 결과주의적 해석이라 타당한 평은 아니다.[6]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미 부르고뉴 본토는 프랑스 왕령에 흡수된 상태였고 홀란트, 플랑드르, 브라반트와 같이 부르고뉴와 동군연합으로 묶여있던 저지대 국가를 통치하고 있었다.[7] 이렇게 프랑수아 1세가 다 빈치를 후원해주었기 때문에 다 빈치는 감사의 의미로 <모나리자>를 비롯해서 프랑스로 올 때 가지고 온 작품들을 모두 왕에게 선물했다.[8] 다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처음 선언한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당시 사보이아 공국의 자치주였던 발레다오스타였다. 발레다오스타는 지금도 이탈리아프랑스어권 지역으로 남아있다.[9] 프랑수아의 침실 문까지 개혁 벽보가 붙었다.[10] 헨리 8세의 여동생. 루이 12세의 3번째 부인이며 자녀없이 사별한 후 헨리 8세의 신하 찰스 브랜던과 비밀 결혼을 감행해 딸을 낳았고 메리의 외손녀가 바로 '9일 여왕'으로 유명한 제인 그레이.[11] 어머니에게는 세 번째 남편.[12] 메리 불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하여 프랑수아 1세로부터 "가장 수치스러운 창녀", "나의 전용마차" 등으로 불렸고, "누구나 올라탈 수 있는 잉글랜드산 암말"이라고도 불렸다. 잉글랜드로 귀국한 후 헨리 8세의 정부가 되기도 했다.[13] 여담으로 둘은 5촌이다. 마르그리트의 할머니 루이사의 이복동생이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아버지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2세이다.[14] 샤를 8세와 약혼했던 그 마르가레테.[15] 인판타 마리아는 혼인 적령기 당시 가장 부유한 신부였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결혼하지 않았다.[16] 왕비가 처음 궁으로 오는 날에 애첩이랑 테라스에서 히히덕거리면서 본다든지...[17] 두 사람이 레슬링 시합을 벌였고 프랑수아가 헨리를 상대로 압승을 거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젊은 시절의 헨리도 엄청난 거구의 장사였지만 프랑수아는 그 이상이었다.[18]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는 왕비의 지위의 무게에 대한 순수한 경고거나, 둘째는 고귀한 태생도 아니면서 감히 왕비의 자리를 노리냐는 조롱의 의미일 수도 있다. 후에 끝까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를 사생아 취급한 것을 보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