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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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주요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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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주요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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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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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61·63대 총리
윈스턴 처칠 경
Rt Hon. Sir Winston Churchill


KG OM CH TD DL FRS RA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Winston%2BChurchill.%2B1941.jpg

본명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처칠[1]
출생
1874년 11월 30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옥스퍼드셔 주 우드스톡 블레넘 궁전
사망
1965년 1월 24일 (향년 90세)
영국 런던 켄싱턴 구
재임기간
제61대 총리
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
제63대 총리
1951년 10월 26일 ~ 1955년 4월 7일
서명
파일:윈스턴 처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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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1]
부모
父 : 랜돌프 처칠
母 : 제니 제롬 스펜서처칠
배우자
클레멘타인 처칠(1908 결혼)
자녀
1남 4녀
학력
파일:해로우 스쿨 문장 원형.png 해로우 스쿨 (졸업)
파일:영국육군사관학교 문장 원형.png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졸업)
정당

신체
168cm, 62kg, O형[2]
종교
개신교 (성공회)무종교 (불가지론) → 불명[3]
약력
상무부 장관 (1908-1910)
내무부 장관 (1910-1911)
영국 해군 장관 (1911-1915)
랭커스터 공작령대법관 (1915)
탄광 장관 (1917-1919)
영국 육군 장관 (1919-1921)
대공부 장관 (1919-1921)
식민지 국무 장관 (1921-1922)
재무부 장관 (1924-1929)
해군 장관 (1939-1940)
국방장관 (1940-1945)
보수당 대표 (1940-1955)
국방부 장관 (1951-1952)


1. 개요
5. 소속 정당
6. 저서
7. 어록
8. 여담
9. 대중매체의 처칠
9.1. 영화
9.2. 드라마
9.3. 소설
9.4. 만화 및 애니메이션
9.5. 게임
10. 관련 링크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윈스턴 처칠_미소.jpg

영국의 제61대·63대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 총리이며 엘리자베스 2세 시대의 첫 영국 총리이다.

"영국 총리"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세계적으로 가장 인지도 높은 영국 총리 중 한 명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와 맞서 싸우면서 열세인 전황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과 선견지명을 발휘해 전세를 뒤집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 차별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어두운 부분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처칠은 명과 암을 모두 가지고 있는 영국의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윈스턴 처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윈스턴 처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조울증[편집]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검은 개(black dog)라 불렀으며, 이 우울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그림.

천국에 가서 첫 백만 년 동안은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그림은 그의 우울증을 덜어주는 데 기여를 했지만,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게 어느 정도의 중증이었냐면 처칠은 평생 발코니나 기차역의 철로 가까이에 가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뛰어내릴까봐. 또한 매순간 강렬하게 느껴지는 좌절감과 죽고 싶은 충동을 자신의 이성만으로 이겨내야 했다고 한다.

여튼 양극성 장애인지라, 조울증도 있었다. 그의 조증때 벌어지는 삽화들[2]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그 어두운 시간을 견뎌내었다.

파일:external/static.standard.co.uk/21-winston-painting-415.jpg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에도 시가를 입에서 떼지 않는다.

이 부분은 2021년 1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영상

그의 우울증에 유전적 요인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그의 네 자식들 중 두 명도 알코올 의존증으로 죽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3]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00 - 1904
정계 입문


1904 - 1924
입당


1924 - 1964
복당


6. 저서[편집]


윈스턴 처칠은 정치인이었지만 작가이기도 했다. 글로 먹고 산 사람답게 상당히 많은 회고록을 남겼고, 1953년 이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위인전 보정으로 자기 변명이 좀 많다. 젊은 날부터 정치 투신까지를 그린 《나의 전반생》은 한국에도 꽤 많이 번역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회고록인 《세계의 위기》는 잘 안 알려졌고, 야인[4] 시절에 여러 이야기를 쓴 수필집은 한국에서 번역이 되었다. 처칠의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나의 전반생》과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제2차 세계대전》.[5]

이 밖에도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 전기와 조상인 제1대 말보로 공작 전기도 썼었다. 초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은 어마어마한 전공을 올려서 공작위에 서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이나 되어서야 자손인 처칠에 의해서 평전이 나오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공작이 앤 여왕의 총애를 받는 자신의 아내를 배경으로 영국 정계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유도한 것과 함께 부정부패로 재산을 모았다는 대중적 의심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권력 남용이 의심되는 여왕과 아내와의 관계에다가 부정부패 의혹까지 겹치면서, 당대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저평가되었다. 자손인 윈스턴 처칠이 초대 공작을 옹호하는 전기를 쓰지 않았다면 지금도 악평이 학계의 주류적 의견이 되었을 것이다.

의외로 장편소설도 하나 썼다. 제목은 《사브롤라》. 1900년에 출간했다고 한다.


7. 어록[편집]


누군가 그러더군요. 짖는 개를 볼 때마다 돌을 던지면 절대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한다고요.

You will never reach your destination if you stop and throw stones at every dog that barks.

1923년 12월 3일, 런던의 Shepherd's Bush Empire Theatre에서 있었던 연설 중[6]

[7]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엄청난 일이건 작은 일이건, 크건 하찮건 상관 말고, 명예로움과 분별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는 경우들이 아니라면, 절대 포기하지 마시오.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 — 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etty — 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ur and good sense.

1941년 영국 해로우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 전문[8]

[9]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뿐이라고.(I have nothing to offer but blood, toil, tears and sweat.)[10]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11]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 어떠한 공포가 닥쳐와도, 승리.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It is victory, victory at all costs, victory in spite of all terror, victory, however long and hard the road may be; for without victory, there is no survival.)

1940년 5월 13일, 수상 취임 직후 첫 하원 연설 중[12]


영국은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13]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1940년 6월 4일에 있었던 하원의원 연설 중[14]

[15][16][17]


자본주의의 고질적 결함은 풍요의 불평등한 분배고, 사회주의의 태생적 미덕은 고통의 평등한 나눔이다.

The inherent vice of capitalism is the unequal sharing of blessings. The inherent virtue of Socialism is the equal sharing of miseries.

1945년 10월 22일에 있었던 하원의원 연설 중[18]


(중략) 만약 대영제국과 그 연방이 천년을 이어간다면, 후대의 인류는 '바로 지금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their finest hour)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if the British Empire and its Commonwealth last for a thousand years, men will still say, 'This was their finest hour.

1940년 6월 18일, 하원 회의에서 영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연설 중[19]

[20]


이 전쟁은 독일과의 전쟁(War with Germany)이 아니라, 독일에 맞선 전쟁(War against Germany)이다!

"War with Germany"라고 표현한 의원을 논박하며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용기이다.

Success is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21]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was so much owed by so many to so few.

1940년 8월 20일 영국 본토항공전 승리 이후 영국 왕립공군 조종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22]

[23]


그럼 우리가 이겼군.

1941년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24]


불쌍한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신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스탈린을 잘못 알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얄타 회담 후 각료들에게[25]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조차도 아닙니다. 차라리 시작의 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1942년 11월 10일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 연설 중[26]


발트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안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에 걸쳐 철의 장막이 내려졌습니다.

From Stettin in the Baltic to Trieste in the Adriatic,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

1946년 5월 3일 미국 미주리주에서 냉전공산주의에 관하여[27]

[28]


전쟁에는 결단. 패배에는 투혼. 승리에는 아량. 평화에는 선의가 필요하다.

In War: Resolution. In Defeat: Defiance. In Victory: Magnanimity. In Peace: Good Will.[29]


한 국가의 앞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투자는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는 일이다.

There is no finer investment for any community than putting milk into babies.

1943년 3월 21일 라디오 연설 중[30]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A pessimist sees the difficulty in every opportunity; an optimist sees the opportunity in every difficulty


연설은 여자의 치마처럼 짧되 충분히 커버할 만큼은 되어야 한다.[31]


정치라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며, 똑같이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전쟁에서는 단 한 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희생당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Politics is almost as exciting as war, and quite as dangerous. In war you can only be killed once, but in politics many times.[32]


만약 히틀러지옥을 침공한다면 나는 하원에서 악마에 대한 지지 연설이라도 할 수 있다.

If Hitler invaded Hell, I would make at least a favourable reference to the devil in the House of Commons.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보좌관 존 콜빌(John Colville)에게[33]

[34]


적이 나를 노리고 쏜 총알이 맞지 않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35]


수상이 되는 것보다 경마 더비 대상경주에서 우승하는 말의 마주가 되고 싶다.[36]


평화는 강자의 특권이다. 약자에게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 예전에 써본 다른 체제들을 제외하면.

Indeed, it has been said that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37]

[38][39]


배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Without ships, we cannot live.

2차 세계대전 당시 대서양의 제해권 장악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난 이제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됐다. 창조주께서 날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I am ready to meet my Maker. Whether my Maker is prepared for the ordeal of meeting me is another matter.

75세 생일 기념 축사이자 자신의 묘비에 적힌 글귀 중 일부. 그리고 처칠은 이 말을 한 후로도 15년을 더 살았다.


승리의 순간에 샴페인은 당연하다. 그건 패배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40]


나는 돼지를 좋아한다네. 개는 우리를 우러러보고 고양이는 우리를 얕잡아보지만, 돼지는 우리를 자기와 똑같이 취급하지.

I am fond of pigs. Dogs look up to us. Cats look down on us. Pigs treat us as equals.

1946년 11월, 사위 크리스토퍼 솜스와 함께 런던 근교 차트웰의 별장 안에 있는 축사를 둘러보며 했다고 알려진 말[41]

[42][43][44]


만약 지옥을 통과하는 중이라면,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

If you're going through hell, keep going.

영미권에도 널리 알려져있는 처칠의 명언이지만, Finest Hour라는 전기에 따르면 출처 불명이라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겪을 것이다.

뮌헨 협정 당시 평화를 가져왔다는 네빌 체임벌린의 발언을 듣고 한 말. 이 말은 6개월 이후 현실이 된다.


째뜬우이가하여고하은거시아

Underidoderidoderiododeriodoo[45]

원어민조차 번역이 필요한 괴랄한 발음으로 악명높은 윈스턴 처칠의 대표적인 밈이다.



8. 여담[편집]


아래의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이 밖에도 그의 흔한 영국인다운 괴상한 품행과 배짱을 보여주는 기행은 무수히 많다.

파일:attachment/churchill-met-tommy-gun.jpg
지금 보여주는 사진은 현대에는 처칠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었지만, 원래 톰슨 기관단총, 시가, 중절모 3종 세트는 금주법 시대 전형적인 미국 마피아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46]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이를 이용해 이 사진을 마치 현상범 수배지같이 만들어 "처칠은 현상금이 걸린 악질 마피아 두목 같은 놈이다!" 라는 선전을 대량으로 유포했는데, 막상 영국에서는 "마피아 보스처럼 무자비하게 독일군들을 싹 쓸어버릴 것 같은 카리스마 총리 각하다!", "딱 처칠 총리네요!" 등의 반응을 보이며 선전 효과는 고사하고 되려 영국인들의 사기 증진 효과가 나는 바람에 스스로 선전을 중단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행의 민족다운 기상의 영국인 선전/선동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괴벨스가 실패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다.[47] 한편으로 이 선전은 오히려 괴벨스가 영국을 자만하고 방심하게 만들어서 국가 방어에 집중하지 못게 하려는 목적의 선전이었다는 평도 있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괴벨스는 영국의 애국심을 역이용해 허를 찌르려 했던 셈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괴벨스는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선동 사건으로 영국에서의 인식이 크게 나빠져 몇몇건에서는 그의 앙숙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대영선전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런 스타일링에 대해 처칠이 강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내려고 일부러 갱처럼 이렇게 차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사실과 조금 다르다. 일단 처칠의 유명한 옷차림은 당대에는 전형적인 명문가 귀족 신사의 차림이었다. 처칠이 자주 썼던 홈보그라는 중절모도 중절모 중 가장 격식있는 모자였고, 그가 입은 검은 조끼와 재킷에 회색 줄무늬 바지도 테일코트 다음가는 격식을 가진 준례복 '블랙라운지' 스타일이었다. 쓰리피스 정장에 모자와 지팡이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정도의 전형적 영국 신사 스타일. 그러니까 처칠은 영국에서 가장 유서깊은 가문 중 하나로 수많은 귀족들을 배출한 스펜서-처칠 가문 사람인 만큼 그냥 당대 자기 계층에서 흔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을 뿐이다.[48] 그가 추가한 아이템을 굳이 들자면 시가 정도인데, 젊었을 때까진 맛도 못 봤지만 쿠바에 가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쿠바 하면 시가지' 하는 바람에 한 번 피워 봤다가 너무 맛있어서 계속 피우게 된 거라고. 즉 강인한 갱 이미지가 생긴 건 반쯤은 괴벨스 탓이고, 나머지 반쯤은 그냥 처칠 자신이 너무 강인험악하게 생겨서다.

애초에 처칠은 갱단 두목처럼 보이는 저 사진을 죽도록 싫어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손에 술이나 총을 든 모습을 찍히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난 술은 피했는데 그 몹쓸 사진,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때문에 여태까지 곤욕을 치르고 있지. 다른 것도 있지만 그 사진이 나한테 입힌 손해가 커"라고도 말했다고. 영국 내 처칠의 다른 정적들도 문제의 사진을 이용해서 괴벨스가 했던 것과 비슷한 정치적 공세나 비판을 퍼붓기도 했던 모양이다. 하여튼 이 사진 때문에 노동당소련에게는 엄청 까였다고 한다.

파일:Churchillsniper.jpg
재미있는 건 연합군의 독일 침공이 시작되자 영국군에서는 저 톰슨을 든 처칠 사진에 독일어로 저격수라고 써서 독일에 유포하였다는 것.[49]

  • 그 외에도 처칠을 대표할 유명한 사진으로는, 윈스턴 처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정색한 표정이 담긴 사진이 있다.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Winston%2BChurchill.%2B1941.jpg
하필 이런 험상궂은 표정으로 찍힌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얽혀있는데, 사진작가유서프 카쉬[50]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전쟁을 치르며 영국을 이끄는 그의 카리스마를 담아내려 했는데, 처칠이 도무지 입에서 시가를 놓지를 않자 참다 못해 처칠이 입에 문 시가를 손으로 쏙 잡아빼 버렸다고 한다. 이에 열받은 처칠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는데,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에 담아낸 것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파일:external/acurator.com/Karsh_Churchill_Smile.jpg
처칠은 사진을 찍은 후 잠깐 침묵하다가 굳은 표정을 풀면서 한 장 더 찍으라고 했고, 그렇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그리고는 촬영 뒤 카쉬에게 악수를 청하며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 찍게 할 수 있군." 이라고 했다고. 이 때문에 이 사진은 사진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진이 되었다. 처칠도 이 사진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다. 기분이 풀어졌는지 윗 사진과는 달리 후덕한 표정이다. 이중 첫 번째 사진은 2016년 9월부터 발행되어 현행권으로 유통 중인 영국 5파운드 폴리머 신권 뒷면의 처칠 경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영란은행 사이트 인증. 3D 지폐 이미지 드래그를 통해 뒷면을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8월 23일 캐나다 오타와의 페어몬트 샤토 로리에(Fairmont Château Laurier) 호텔에서 보관 중이던 위 사진이 도난(바꿔치기)당한 것이 발견되어 수사중이다.링크

  • 우리가 알고 있는 중년의 뚱뚱한 사진만 봐서 그렇지, 젊었을 적을 보면 대단한 미남이다.[51] 여기에 청년 시절 사진이 나와 있다. 또한 처칠은 2차 대전 연합국 지도자들 중에서 젊었을 시절이 가장 잘생긴 지도자로 꼽혔었다. 참고로 2위는 이오시프 스탈린.

  • 윈스턴 처칠 사진을 검색해보면 그중 반 이상은 시가를 물고 있거나 들고 있다. 처칠 본인도 평생동안 25만개에서 30만개에 가까운 시가를 태웠다고 스스로 이야기 할 정도로 시가에 푹 빠져 산 애연가다. 그래서인지 시가와 관련된 이야기도 제법 전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 90세까지 천수를 누리다 갔다. 워낙 어마어마한 양이라 그만큼 시가를 좋아했다는 의미지 진짜 30만개까지 피우지는 않았을 거라 추측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18살에 시작해서 하루에 11개 피웠다 치면 도달 가능한 숫자인 만큼, 30만개 까지는 아니라도 20만개~25만개 정도는 충분히 넘었을 법한 숫자다. 보통 시가란게 독하고 비싼 물건이라 일반 사람들은 가끔가다 주머니 사정 좋을때 한번씩, 매일 피울만큼 재력이 되는 사람들도 하루에 보통 한둘, 많으면 네다섯 이상으론 안 피는 편이지만 이 영감은 이 비싸고 독한 시가를 평생 남들이 궐련 담배 피는 것만큼 자주 폈다. 아무리 시가가 속담을 안 하고 입담을 한다고 해도, 이 정도면 폐암이 아니라 후두암이나 구강암으로 일찍 죽지 않은 게 기가 막히고 용한 정도이다.[52]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인도하기로 되어있던 전함 2척[53]을 그냥 압류해버린다. 이유는 당장 전함이 필요하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 붙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결국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탓에 독일 쪽으로 붙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 젊은 장교 시절, 에 타다가 난간을 잡았는데 마침 풍랑으로 배가 흔들려 오른쪽 어깨탈구되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에 치료가 시원찮았는지 오른쪽 어깨의 습관성 탈구와 통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그렇게 반불구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중에 연설을 할 때도 제스처를 주로 왼팔로 했다고 한다. 어깨의 부상 때문에 기병임에도 랜스나 세이버 같은 무기를 쓸 수 없어 당시 최신형 자동권총이었던 마우저 C96을 구매해서 썼다. 그런데 냉병기를 쥘 수 없게 된 덕분에 수단에서 소속부대가 포위당해 주변 동료들이 떼로 전사하는 아수라장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54]

  • 미국이 2차 대전에 공식 참전하기 전, 미국의 협력을 얻기 위해 윈스턴 처칠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벌거벗고 샤워장에서 나오다가 갑작스럽게 들른 루스벨트와 마주쳤다. 당황한 루스벨트가 몸을 피하려 하자, "대영제국의 총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다만 이 사건의 경우 당시 처칠은 미국의 협력과 루스벨트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매우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서,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민망한 순간에 정치적 기지를 발휘한 일종의 시의적절한 재담(才談)으로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 1920년대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55]에 갔다가 분노한 노동자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당당히 시가 하나 빼물고 노동자들 사이를 걸어서 유유히 걸어나갔다고. 가장 인상 험악하게 생긴 노동자에게 담뱃불을 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모두 그 지역에 이해관계, 목표, 그리고 하수인들을 갖고 있습니다. 쪼잔한 건수로 서로 맞서지 맙시다. 대영제국과 러시아가 관심이 있는 만큼 당신이 루마니아의 90%를 먹고, 우리가 그리스의 90%를 먹으며, 유고슬라비아는 50:50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We have interests, missions, and agents there. Don't let us get at cross-purposes in small ways. So far as Britain and Russia are concerned, how would it do for you to have ninety percent dominance in Rumania, for us to have ninety percent of the say in Greece, and go fifty-fifty about Yugoslavia?"
여기서 빠졌지만 불가리아는 75:25였고, 결국 80:20으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이것이 각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유고슬라비아는 다행히 소련 영향권에 들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지만 나머지 나라들은...). 수 개 국가들의 존망을 푼돈 거래하듯 해버렸고 그대로 그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소련으로 넘어간 루마니아 땅은 소련 붕괴 후 유럽 최빈국이 되어버렸다. 사실 애당초 유고슬라비아는 영국, 소련이 마음대로 거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티토가 이끌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파르티잔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독일, 이탈리아 노획장비로 무장한 공군, 기갑부대까지 갖춘, 오랜 게릴라전으로 숙련된 80만 대군이었다. 게다가 그 지도자 티토는 자신을 암살하려 든 스탈린에게, 자꾸 암살자를 보내면 자기도 보내겠다고 경고를 날릴 정도로 겁없고 깡다구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열강인 영국, 소련이 맘을 먹는다면 유고를 제압하고 영향권에 넣는 게 이론상으로는 가능했지만 2차대전으로 녹초가 된데다 냉전을 준비해야 하는 두 국가 입장에서 그러기는 현실적으로 너무 버거웠다.

  • 하루는 의회에 늦게 출근해서, 상대편 의원이 "아니, 의회에도 늦는 사람이 무슨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깠는데, "너도 나처럼 이쁜 마누라 집에 있어봐라,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겠냐?" 라고 하여 주위를 웃음바다에 빠뜨린 뒤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 영국 본토 최초의 여성의원이자 미국 출신 여성 하원의원 낸시 애스터와의 설전도 유명하다. 낸시 애스터는 남편인 월도프 애스터[56] 하원의원이 자작 귀족 지위를 물려받음으로서 하원의원에서 물러났을 때, 남편이 권유해서 하원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고, 26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1923년 술 허용 연령대를 18세 이상으로 올리고 1928년 공무원 남녀 동등권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많은 족적을 남겼다.[57][58] 이 낸시 애스터가 의회에 출석한 처칠에게 "당신이 내 남편이었다면, 당신의 찻잔에다 독을 탔을 겁니다(Sir, if you were my husband, I would poison your drink)"하고 독설을 하자, 처칠은 "부인, 당신이 내 아내였다면, (당신의 남편으로 사느니 차라리) 그 찻잔을 마셨을 거요(Madam, if you were my wife, I would drink it.)"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생략된 부분이 있다보니 '당신 같은 분이 타주는 독이라면 기꺼이 마시겠다'라는 해석이 퍼진 적이 있었다. 이러면 모두 궁금해 할 낸시 애스터의 외모는 아래와 같다.
파일:Nancy Astor_Viscountess Astor.jpg
파일:Nancy Astor and Waldorf Astor.jpg
파일:Nancy_Astor_Viscountess_Astor.jpg
젊은 시절의 낸시 애스터
1935년의 남편과 함께
1949년의 낸시 애스터

  • 어느 날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앞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술을 많이 마신 처칠은 취해 있었다. 이 파티엔 영국 노동당의 베시 브래드록(Bessie Braddock)이라는 여성 국회의원도 참석했었다. 베시 브래드록은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자 여성, 어린이, 복지, 청소년 범죄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맹렬한 운동가로 "투쟁하는 베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 브래드록이 처칠을 망신 주려고 처칠에게 다가가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윈스턴, 당신은 완전히 술에 취하셨군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취했어요"(Winston, you are drunk,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drunk.)라고 외쳤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처칠은 "베시 부인, 당신은 못생겼어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못생겼지요. 그래도 난 내일 아침이 되면 술이 깨겠지만, 당신은 여전히 역겹도록 못생긴 그 얼굴 그대로일 거요("Bessie, my dear, you are ugly,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ugly. But tomorrow I shall be sober and you will still be disgustingly ugly.")"라고 대꾸했다고 한다.[59]

  • 팔불출이었는지 자기 사위를 굉장히 맘에 안 들어했다.[60] 이 때문에 사위는 장인어른에게 호감도를 올리려고 처칠을 '파파'라고 부르며 애교를 많이 부렸다.[61] 어느날 사위가 묻기를,
사위: 파파는 어느 정치인을 가장 존경하죠?
처칠: 무솔리니.
사위: 그 사람 파시스트잖아요?
처칠: 근데 지 사위도 총살시킨 놈이었거든.[62]

  • 사후이긴 하지만, 그가 2차대전 당시 연설 때 사용하던 틀니가 경매에 나왔는데 한국 기준으로 2,800만원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됐다. 세계를 구한 이(齒)[63]

  • 시가 같이 매우 좋아하던 기호품들에는 아주 환장을 해서, 2차대전 중에 처칠에게 보내는 물품에 대해 '독살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독검출 과정은 무시해도 좋으니 빨리 시가를 내 앞에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처칠의 식품담당 검사원은 많이 고생했다. 오죽하면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그 급박한 상황에도, 단골 가게의 주인이 폭격 후에 "수상 각하께서 항상 즐기시는 물건은 안전합니다."라고 연락해줄 지경.

  • 전람회에 작품을 냈다가 낙선한 화가가 어느 날 윈스턴 처칠을 만나 불평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불평이었다. 화가는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 심사위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처칠이 대답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달걀을 낳아본 적이 없네. 그래도 달걀이 싱싱한 것인지 상한 것인지 가려낼 능력은 있네. 평생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어도 심사위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말을 먼저 꺼낸 화가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처칠이 덧붙였다. "어떤 심사위원이 보더라도 뽑힐 수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노력해보게나"라고. 사실 처칠은 전문 화가 수준의 풍경화를 그릴 정도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도 경매에서 비싸게 팔리긴 하지만, 이건 예술성이 있어서라기보다 유명한 (악명높은) 사람이 그린 것이라 그런 것인 반면 처칠의 그림은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피카소에게 "평생 그림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말 다했지 않은가.[64] 그래서 처칠의 그림은 여전히 경매에서 히틀러의 그림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2021년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소장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의 그림이 109억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 직후 모로코마라케시를 그린 풍경화인데,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이라고.

다만 인물화는 그리지 않았는데, 인물화도 그려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나무는 '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65]

  • 비슷하게 자동차 경연대회에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된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멋지고 화려한 고급차가 아니고 평범한 승용차를 최우수 자동차로 뽑았다. 한 고급차 소유주가 와서 "내 차가 더 멋지지 않으냐"고 따지자 "부인, 부인의 차 보닛을 열어보니 저 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럽더군요. 하지만 저 차는 엔진 구석구석까지 다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차가 더 멋지겠습니까?"라고 답했다.

  • 종군기자 시절 대한제국의 한성에 방문해 손탁호텔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지만, 손탁호텔은 1902년 만들어졌고 처칠은 1900년에 이미 하원의원이었다.

  • 그는 W.C를 매우 싫어했다. 화장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글자가 W.C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적들이 이걸 가지고 비아냥거린 게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들도 이 머릿글자를 가지고 각종 프로파간다 선전물을 만들기도 했다. 아래는 그 예시인 일본 제국의 선전물이다.
파일:t7834ccmwff31.jpg

  • 사이렌 수트(Siren suit)를 개조하여 만든 '처칠 롬퍼(Churchill Romper)'라는 옷을 유행시킨 바 있다. 자세한 것은 롬퍼 참조.

  • 2차대전 직후 등장한 영국 노동당애틀리 내각이 대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자 처칠과 보수당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의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휴식시간이 되자 의원들은 화장실로 몰렸는데, 애틀리 총리의 옆 변기에 자리가 있는데도 처칠은 굳이 다른 줄을 서서 볼일을 보았다. 그러자 애틀리가 처칠에게 물었다.
애틀리: "제 옆자리가 비었는데도 다른 줄을 서셨는데, 제 옆에 있기도 싫을 정도로 제가 싫으신 겁니까?"
처칠: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에틀리: "그럼 왜 빈 자리를 두고 굳이 줄을 서신 거죠?"
처칠: "그야 총리께선 뭐든 큰 거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달려들지 않소."
애틀리와 처칠의 관계는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였지만, 사적으로는 서로의 장단점을 인정해주며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당장 전임 총리를 사퇴시키고 다음 총리로 처칠이 지명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준게 애틀리였고, 처칠이 첫 전시내각을 꾸릴 때 함께 내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바로 이어서 총리를 한 것도 애틀리였다. 게다가 애틀리 본인도 행정업무에 대한 실력있는 능력자였고.

  • 2차 대전 중에 처칠이 이라크 대사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대사에게 술을 권했다고 한다. 이에 대사가 "저는 이슬람교를 믿으므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세상에 이럴 수가. 오 하느님, 예수님, 아니 알라여!"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실제로 처칠이 생전에 위스키를 즐기는 애주가였고, 벨즈 위스키를 사랑했던 처칠이 듣기에 이보다 슬픈 말이 있었을까? 사실, 골초 이미지가 유명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위스키코냑을 매우 좋아하는 애주가라서 매일같이 즐겨마셨는데 레몬과 얼음을 넣은 하이볼을 좋아했다고 한다. 처칠은 유독 저가형 위스키를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벨즈는 존바, 블랙앤화이트 등의 위스키와 비견되는 저가형 위스키로 유명하고, 조니 워커 레드 라벨 역시 벨즈보다는 가격대가 높지만 저가 위스키로 유명하다. 저가 위스키는 '알콜 부즈(에탄올 특유의 향)'와 '진한 피트향'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니트[66]에는 매우 적합하지 않으나, 하이볼이나 잭콕,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면 매우 맛있고, 조니워커 레드 라벨과 콜라의 궁합은 애주가들 사이에서 '고소함과 달콤함'으로 매우 유명하다. 처칠이 하이볼을 좋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저가 위스키가 입맛에 맞았을 수 있다.

  • 처칠이 연설 문제로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택시 기사가 승차를 거부했다. 불쾌해진 처칠이 이유를 묻자, 기사는 "이제 곧 처칠 총리의 라디오 연설이 있어서요. 그걸 들으려고 하거든요."라고 답했다. 처칠은 기분이 좋아져서 1파운드를 그냥 건네줬는데, 기사가 힘껏 소리쳤다. "손님, 그냥 타세요. 처칠인지 뭔 놈인지 몰라도 역시 돈이 먼저네요." 이미 준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꼴로 우거지상이 된 처칠은 그 택시를 타고 의회에서 내리면서 택시기사에게 "라디오만 듣지 말고 처칠 얼굴이나 좀 알아두시오!"라고 불쾌하게 소리쳤다고 한다.

  • 세계적인 극작가였던 버나드 쇼가 처칠에게 연극표 2장을 건네며 "제 연극에 초대합니다. 혹시라도 동행하실 친구 분이 계시다면 함께 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처칠은 "첫날은 바쁜 사정으로 어려우니 다음 날 가지요. 연극이 하루만에 끝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라고 응수했다. 해석하자면, 쇼는 처칠에게 '당신은 동행할 친구조차 하나 없는 외톨이 아닙니까?' 라고 비꼰 것이고, 처칠은 '그러는 당신은 첫 공연 올리자마자 망할 형편없는 글쟁이 아니오?' 라고 받아친 것[67]. 다만 버나드 쇼 문서에 따르면, 이 일화가 처음 알려졌을 때 주인공들은 버나드 쇼와 처칠이 아니라, 처칠의 아들인 란돌프 처칠과 노엘 카워드(Noel Coward)였다고 하니 실화인지는 불분명하다.

  • 2차대전 말기, 독일이 패전 직전까지 내몰리며 대서양 전투가 끝나가고 해군력에 여유가 생기자, 처칠은 일본에 아시아 함대가 탈탈 털리고 홍콩싱가포르를 손쉽게 내주며 무너진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태평양에 해군 함대를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4년 내내 홀로 일본과 싸운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입장에선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히려는 꼴이라 눈총을 받았고 어니스트 킹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68] 그러던 어느 날, 연합군 수뇌부가 모여 앞으로의 전쟁 수행계획을 논의할 때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킹 제독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영국 함대의 파견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처칠이 갑자기 다짜고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 영국 함대를 태평양으로 보내고자 하는데 찬성하시지요?"라고 몰아붙였고, 루스벨트가 그 자리에서 OK! 해버림으로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 파견될 수 있었다.

  •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글에 상당히 민감했다. 본래 종군기자 출신이었던 처칠은 문법규칙에 까다로웠고,[69] 자기 글에 편집자들이 손대는 꼴을 못 봤다. 앞에서 언급된 명언들은 대부분 연설문에 포함되어 있는데, 처칠은 이 연설문을 완성하기 위해서 몇 주나 투자하면서 교정을 봤다. 그래서 어느 편집자가 처칠의 문장에서 전치사로 끝나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바꿔놓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처칠은 그 즉시 'This is the kind of impertinence up with which I shall not put.'이라는 항의서한을 보내 질책했다고 한다. 가끔 치사(preposition)의 의미를 과잉해석하여 전치사로 문장을 끝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70], 이것을 희화화하는 문장을 답신으로 보냈다. 설명하자면 원래 문장은 '(생략) impertinence which I shall not put up with.'(참을 수 없는 무례)인데 여기서 억지로 전치사 2개(up with)를 통째로 which 앞로 보내서 '~ up with which ~' 를 만들었다. 전치사 2개를 통째로 관계대명사 앞으로 보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영어권 화자에게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린다. 이는 내용상으로 편집자를 디스하는 동시에, 문장 구조적으로 무조건 문장 말미의 전치사를 제거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전쟁 중에 정보국장이 단어 하나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지적한 사례가 존재하는데, 사실 이건 지적할 만한 사례였다. 왜냐하면 문제의 단어가 'intense'를 사용할 자리에 'intensive'를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intense는 원래 크거나 강대하고 혹독하다는 의미이고, intensive는 작정해서 끌어모아서 세졌다는 의미이다. 어느 지역의 적 부대가 intense하면 강병이 배치되어 있다는 거고, intensive하면 적이 병력을 집중시켰다는 의미가 되어서 전시 기준으로는 의미가 천양지차이다. 군 정보국장이 이런 식으로 단어 섞어쓰면 까이는 게 당연하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발라클라바 전투가 있겠다.

  •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기에 처칠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오래 살았고 집도 부유한 편이라서 여러 마리를 키웠는데 넬슨,[71] (이 고양인 이름을 안 지어줘서 그냥 캣으로 부름), 벤저민, 스튜어트 같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모두 아꼈다. 늘그막에도 조크라는 고양이를 아꼈는데 죽기 얼마 전 찍은 사진에 같이 나온 고양이가 바로 조크이다. 조크는 처칠이 죽은 뒤에 처칠 유족들이 키우면서 1974년까지 살았는데, 지금도 조크의 후손들이 조크 2, 3, 4세로 불리면서 계속 처칠의 집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다고 한다.

  • 윈스턴 처칠 총리가 전용차를 타고 영국 국회의사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교통은 막히고 회의시간은 임박했다. 처칠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운전사를 재촉했다. "여보게, 회의에 늦겠는데, 좀 더 빨리 달릴 수 없겠나?" "예. 저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요." 운전사도 마음이 급해졌다. 순간 교통경찰이 처칠이 탄 차를 정지시켰다. 다급한 나머지 운전사가 신호를 위반하고 달렸기 때문이다. 교통경찰이 딱지를 떼려 하자 운전사가 "지금 이 차에는 총리 각하가 타고 계시다네. 회의시간이 임박해서 그러니, 어서 보내주게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통경찰은 "총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총리와 비슷하지는 않군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의 법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의 차가 교통신호를 어겼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총리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다니, 당신에게는 위증죄까지 추가해야겠군요. 그리고 아무리 총리가 타고 있는 차라고 해도, 교통신호를 위반했다면 당연히 딱지를 떼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서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 당장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그렇게 운전사는 교통신호 위반딱지를 떼였으나, 처칠은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저런 꿋꿋한 경찰관이 영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처칠은 런던 경시청장에게 유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경시청장인가? 나 처칠인데, 오늘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으니, 그 모범적인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 주게나!" 수화기를 통해 전해들은 런던 경시청장의 대답은 "죄송합니다, 총리 각하. 런던 경시청의 내규에는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에게 딱지를 뗀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 주라'는 조항은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그날 런던의 경찰들에게 2번 당했지만, 자신이 영국 총리임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이내용은 처칠 말고 다른 사람으로 나오는 버젼도 많다.

  • 당시 있는 집 사람들은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자식들은 친부모보다 유모를 더 가깝게 느끼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처칠 역시 물리적인 거리가 매우 멀었던 친어머니보다는 20대 시절까지 곁에 지내면서 자신을 보필해준 유모 엘리자베스 에버레스트(Elizabeth Everest)를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따랐다. 그래서 친어머니의 죽음보다 유모의 죽음에 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오랫동안 사비를 털어 유모의 무덤을 관리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스는 처칠의 남동생 잭도 돌봤다.

  • 전후 "2차대전 승리의 원인에 어떤 것이 있냐"는 질문에 앨런 튜링을 지목하기도 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도 나오는 일화지만, 당시 암호병학교에서 이니그마 해독방식의 견해가 달라 동료들과 융합되지 못하던 앨런 튜링에게 편지를 받은 뒤, 그를 팀장으로 지목해 해독연구를 지원해주었다. 근데 네이버 캐스트에 의하면 자서전엔 튜링에 대해서 언급도 안 했다고 한다. 말년 불우했던 앨런 튜링의 행적 때문인 듯하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고.

  •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처칠은 상륙부대와 함께 작전에 참가하려 했다. 주위 사람들이 "일국의 총리가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만류하려 했지만, 처칠은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결국 처칠의 고집을 꺾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국왕인 조지 6세였다. 그런데 고집을 꺾은 방법이란 게 기상천외하다. "처칠 총리가 상륙전에 참가하겠다는데, 대신 짐이 국왕으로서 상륙하겠소. 공격 당일 가장 먼저 상륙하는 부대의 장병들과 짐이 함께할 것이오."라고 말해버렸다. 처칠이 말도 안 된다며 만류하자 "짐이 전사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처칠 총리는 그렇지 못하오."라고 말한다. 결국 처칠은 상륙전 참가를 없던 일로 했다는 이야기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만들어진 파웰과 프레스버거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라는 영화를 싫어했다. 원래 이 영화는 처칠 세대의 군인들을 희화화하고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어서 처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데[72], 영화판 내용도 단순한 선전 영화가 아니여서 '자랑스러운 영국군을 희화화하고 독일군을 미화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처칠은 부하를 시켜서 영화 제작을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73] 개봉 연기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훗날 영화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영국 영화로 꼽힌다.

  • 미국에 갔을 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도로를 건너야 되어서 습관대로 오른쪽에서 차가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건넜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은 우측통행 국가였다. 크게 다친 처칠은 미국에서 몇 개월 입원해야 됐는데 당시 미국은 금주법을 시행하던 시절이라 그의 필수품인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주법조차도 애주가인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던지라,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위스키를 처방받는 편법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대체역사물 설정집 what if에 첨부된 설정 중 이 교통사고로 처칠이 죽는 바람에 후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패한다는 설정이 있다.

  • 처칠의 자서전 '폭풍의 한가운데'에도 나오는 일화다.
1911년.시내 한복판에서 시드니가 총격사건이 벌어졌다. 당시는 아직 1차 세계대전도 일어나기 전이라 이런 총격사건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사건 자체도 군 병력이 대포를 가지고 출동하기도 하는등 상당히 규모가 컸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처칠도 일행과 함께 사건 구경을 했는데, 당시 출동 인력들에게 지시를 하는 등 직접 참견도 했다. 이때 경찰들 무리 사이에서 구경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다. 이로 인해 사건 이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책에도 적혀있지만, 가장 인상깊게 남은 비난은 '사진기자가 거기 있는 건 알겠는데, 거기에 내무대신은 왜 있냐?'는 것이었다.

  • 윗 문단에 적혀있다시피 영국의 전시지도자로서 불후의 명언들을 다수 남긴 바 있지만, 정작 그 명언들을 말할 때의 발음은 많이 좋지 못했고 상당히 굴려서 말하는 편이었다. 2021년 하반기 들어서는 윗 문단의 “그거이패하에정부으겨리.(IwbnfouevcmsiehwvudbqvGovernment.) ”[해석]같은 주옥같은 명언들이 발굴되어 밈으로 유행할 정도.

  • 자신의 경호원인 톰슨 경위와 다우닝가 10번지로 걸어가는데 앞에서 가던 신문팔이 소년이 휘파람을 불자 평소 휘파람에 대해 굉장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던 처칠은[74] 소년과 가까워지자 대뜸 "휘파람 불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소년이 왜냐고 묻자 "내가 싫어하니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이에 쫄지 않은 소년이 "그럼 귀를 막으면 되잖아요?"라고 받아친 후 사라지자 처칠의 얼굴은 금새 분노로 빨개졌지만 곧 소년이 한 말을 따라하며 크게 웃어제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에 몸이 굉장히 허약했으며 그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한데다 시가 없이는 못 견디는 굉장한 애연가였음에도 90대까지 살았다. 21세기에도 남자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을까말까인 판에 그 당시로써는 굉장히 오래 산 것으로, 관리만 잘 했으면 그 옛날에 100세 가까이 살았을지도 모를 굉장한 장수인이다. 그 때문에 담배회사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힘이 되었다고 한다.





9. 대중매체의 처칠[편집]



9.1. 영화[편집]


  • 1982년작 야인 시절(The Wilderness Years)에서는 로버트 하디(Robert Hardy)가 처칠로 분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HBO에서 BBC와 공동제작하여 2002년에 Gathering Storm을, 2009년에는 속편격인 Into the Storm: Churchill at War(2009)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처칠의 2차대전 회고록의 1권 제목이기도 한 Gathering Storm에서는 본 얼티메이텀, 007 스카이폴 등에 출연한 알버트 피니와 인권운동가로도 유명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라는 두 명배우가 각각 처칠과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 처칠 역을 맡았다. 두 사람은 1974년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에 같이 출연한 경험이 있기도하다. 이 작품은 톰 윌킨슨, 짐 브로드벤트 등 영국 출신의 대배우들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 여러모로 수작으로 꼽힌다. 피니의 연기가 싱크로가 상당히 잘 맞아서 감상을 권한다. KBS에서 2010년 6월 19일 성우 더빙을 통해 《윈스턴 처칠의 폭풍전야》라는 제목으로 방영했었다. 처칠은 유강진, 클레멘타인 처칠은 이선영 성우가 맡았다. 특히 유강진 성우는 알버트 피니의 목소리 역을 자주하는 편. 그 외 박상일, 이규화, 강희선, 탁원제, 이장원, 원호섭 등 영화만큼이나 성우진 캐스팅도 엄청나다. 2009년에 나온 후속편인 Into the Storm에서는 시기의 차이등을 고려하여 배역도 전면 교체되었다. 브렌던 글리슨이 처칠 역을 맡았다. 2002년작이 윈스턴 처칠이 하원의원에서 해군장관으로 복귀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면, 2009년작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윈스턴 처칠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 처칠의 전반생을 다룬 《젊은 날의 처칠》이 리처드 애튼버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주인공 보정이 심하지만 대영제국 말기의 영국이 참가한 전쟁에 대한 고증은 잘 되어있다. 사이먼 워드(Simon Ward)가 처칠로 분했다.


  • 게리 올드만이 처칠 역을 맡고 조 라이트가 감독을 맡은 다키스트 아워(The Darkest Hour)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총리가 되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성공하기 까지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분장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영화 다키스트 아워가 나온 같은 해 브라이언 콕스를 처칠로 한 TV 영화 처칠이 나왔다. 싱크로율 면에서 게리 올드만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다. 다른 출연진들로는 미란다 리처드슨, 존 슬래터리, 엘라 퍼넬, 제임스 퓨어포이 등이 있다.




9.2. 드라마[편집]



  • 드라마에 등장한 것은 11대 닥터뉴 시즌 5부터다. KBS 더빙판 성우는 노민. 고집 센 강골인 처칠이 제대로 표현됐다. 1940~1941년 사이의 겨울, 처칠은 닥터에게 전화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 달라고 요청한다. 닥터는 1달씩이나 늦게 도착했고, 닥터는 '타디스를 아직 덜 길들였다'고 사과한다. 영국은 히틀러의 침략을 받고 있었고, 처칠은 닥터에게 에드윈 브레이스웰 교수가 만들어낸, 영국을 구원할 신무기 '아이언사이드(철기병)'가 독일군 전투기를 레이저로 격추하는 것을 보여준다.

  • 닥터는 그것이 사악한 외계인달렉이라며 처칠을 설득하려 하지만, 처칠은 '히틀러를 몰아낼 수 있다면 악마라도 부르겠다'고 그의 말을 무시한다. 결국 교수가 달렉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라는 것과 달렉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연기하던 것이란 게 밝혀지자, 닥터가 타디스로 달렉의 우주선으로 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달렉이 우주선으로 밤중에 온 런던의 불을 켜자, 공습을 막기 위해 닥터의 동행인 에이미 폰드의 아이디어로 절망에 빠진 교수를 설득하여, 교수의 기술로 반중력 버블과 레이저를 장착한 스핏파이어를 우주로 보내 우주선의 에너지 파장을 보내는 부분을 파괴한다. 그리고 교수가 폭발할 위험에 빠졌다가 구해진 것을 지켜본다. 영국은 위험에서 구해졌고, 닥터는 역사에 안 어울리는 교수의 기술을 폐기한 뒤 처칠에게 잘 해내리라는 충고를 한 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정치인의 입장에서 닥터의 타디스에 유독 많은 관심을 보였다.

  • 이후 뉴 시즌 6 파이널 에피소드에서 2011년 4월 22일 오후 5시 2분에 11대 닥터가 죽지 않게 되자 시간이 멈추면서 역사가 이 시점을 중심으로 꼬이게 되는데, 이때 그는 신성 로마 제국황제로 영국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나마 '시간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인물. 예언자를 부르라고 한 뒤, 예언자에게 '시간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라며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사실 그 예언자는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다시 6대 닥터와 만난다.

  • 엘리자베스 2세의 일생을 그린 전기드라마인 더 크라운에서는 존 리스고가 분했다. 시즌1에서 2차 집권기와 은퇴까지 다뤄진다. 시즌1에서의 처칠은 총리로서 신출내기 여왕의 조언자이면서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한 엘리자베스 2세에게 정치의 기본을 알려주는 인물로 나온다. 또한 흔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2차 세계대전 시기 주요 지도자로서의 단호한 모습보다는 처칠의 여러가지 면이 입체적으로 나온다. 특히 처칠 자신이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여지기를 바라던 강인한 전시총리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늙고 지친 노인으로 묘사된 초상화를 전해받고 격분하여 화가와 언쟁을 벌인 뒤 초상화를 태워버리는 장면은 대영제국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피할 수 없는 쇠퇴의 서글픔, 그리고 이를 부인하려는 시도의 무상함 같은 여러 감상이 들 수밖에 없는 명장면. 시즌 2에서는 과거 회상에 잠시 나오고, 시즌 3에서도 첫 회에 처칠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엘리자베스 2세가 문병가고, 이후 서거하여 국장이 치러지는 장면으로 퇴장한다. 워낙 명성 높은 인물이다보니 퇴장 이후에도 가끔 언급되는데, 엘리자베스 2세가 알츠하이머 발병으로 사임하는 해럴드 윌슨 총리에게 여왕 본인의 다우닝 가 방문 만찬을 제의하자 총리가 감격하고 당황하여 "하지만 그건 처칠 전 총리에게만 주어졌던 영광인데요"라고 되묻거나, 1970년대의 쇠락한 영국을 보고 여왕이 "이게 무슨 윈스턴이 말하던 제2의 엘리자베스 1세 치세냐"고 한탄하는 등의 장면이 대표적.


9.3. 소설[편집]


  •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 모즐리와 같이 영국파시즘 국가로 만드는 극우정치가로 나온다. 심지어 스페인 내전에 자국 의용병을 보낼 정도.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쪽 대체역사 세계에서는 1차 대전에서 영국이 패배한 후 막장 파쇼국가로 치달으며 2차 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망한다. 처칠은 핵을 맞는다.

  •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영국이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고 처칠 본인은 수뇌부와 왕족 몇 명과 함께 캐나다로 도주해서 망명 정부를 구상하지만 별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그는 이젠 그저 늙은이"라는 말도 나온다.


9.4.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부인(妻)이 일곱(七)이라서 처칠이란다. 별명이 갱스터였다는 점을 컨셉삼는데 서양 마피아 스타일이 아니라 서남 방언 쓰는 한국 조폭 스타일이다(...). 첫등장은 정계에서 물러나 옥스포드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2차대전이 격화되자 부하들이 찾아와 윈저궁 큰행임도 행임 밖에 없다 안캅니꺼라며 복귀를 재촉하자 고기썰던 칼을 내리치며 내사 마 그 바닥 뜬지 좀 됐다카지만서두...... 히틀러 글마가 그래 미쳐날뛰면 안되는기라.라며 정계 복귀하는 모습이 의사당에 조폭 풀어서 체임벌린 일파를 쓸어버리고 처칠이 니 이래도 되는기가?!라며 부들거리는 체임벌린에게 행님은 집에 가서 템버린이나 치쇼마'라며 쿨하게 보내버린다.

  • 헬싱에선 직접 등장은 하지 않지만 그가 쓰던 전시 내각실(캐비넷 워 룸즈)를 언급한다. 소좌가 런던을 박살내는 지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여러 랜드마크들을 언급하는데, 2차대전 때 자신들과 가장 연관이 깊은 건물이라 그런지 기분 나쁘니 파편도 남기지 말고 부숴버리라는 말을 한다.

  •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쇼에선 무려 아기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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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게임[편집]



  • 바이오쇼크 2: DLC인 미네르바의 동굴 최후반부 잠수정으로 가는 통로의 벽에 걸린 게시판에 처칠이 주인공의 부인이 런던 공습 때 죽은것에 대한 조문 편지를 보낸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 2차대전을 다룬 Hearts of Iron 시리즈 에서는 당연하게도 단골로 등장한다. 주로 국가 원수 조지 6세 휘하의 내각 수반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최신작인 Hearts of Iron IV에서는 조지 6세는 모디파이어로 대체되고 국가 지도자로 등장한다. 네빌 체임벌린 내각에서 노르웨이와 프랑스가 항복하면 집권하는데 프랑스는 잘 항복하지만 멍청한 AI의 특성상 독일이 노르웨이에 상륙하지 않아 유저 개입없이는 잘 집권하지 못한다. 집권하게 되면 연설 디시전이 활성화되어 상황에 맞는 연설들을 통해 국민들의 전쟁지지도를 올릴 수 있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취급이 영 좋지 않다. 1차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갈리폴리 전투를 주장했던 처칠은 패배의 원흉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고, 1925년에는 내무부 장관으로 웨일스의 광부들의 파업에 강경대응했다가 사상자가 발생하며 시위를 전국적으로 격화시켰다. 이 상황에서 로마노프 왕조 꼴나는 걸 막으려고 왕족들과 주요 인사들을 캐나다로 대피시켰다가 영국 정부가 아예 뒤집히면서 생디칼리슴 국가인 브리튼 연방이 세워지고 해외 영토들이 찣겨나가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다. 이 화려한 전적 덕분에 게임이 시작되는 1936년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끝장나서 한직을 전전하고 있다. 다만 글빨은 살아있어서 '우리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이라는 대체역사물 시리즈를 내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소설의 내용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극우 정치인 아담 드레슬러가 독일의 총통으로 집권해 건재한 대영제국과 공산화된 러시아와 다시 한 번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으로 평론가들에게는 현실성이 없다고 혹평을 받는다.

  • 위 게임의 또다른 대체역사 모드 레드 플러드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 이자 식민주의자로서의 행보가 강화되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패배와 아랍지역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것 때문에 인도 자치령의 한직으로 쫒겨났고 이곳에서도 질서 유지를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다.이후 대전쟁의 혼란때문에 인도가 실질적으로 독립하면서[75] 자신이 부임한 러크나우지역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 처칠 때문에 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편지, 처칠에게 파직 명령과 러크나우 부임을 제안하는 공식서한, 처칠이 술이나 마시며 자신의 실패와 마주하길 거부하는 우울증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폐인으로 살며 자신을 걱정하는 하녀에게 폭력이나 저지르며 살다가 각성 이후 민주정을 인도에 도입할 것인지, 아니면 영국과 다시 연락을 취하는것만 집중할 것 인지 아니면 철권통치를 할것인지를 선택한다. 민주정을 선택하면 자유당,사회민주당은 당선자가 연설하다 총맞아 죽고 처칠은 연설도 못하고 머리에 총맞아 죽는다.[76] 반대로 철권통치를 강화하면 인도인들을 억압하고 인종차별하는 나라를 만드는데.[77] 이걸 본 영국정부가 기겁해서[78] 오히려 처칠을 쫒아내려고 하자 분노하고 영국에게 독립을 선포한다.[79]그리고 영국은 처칠을 광인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한다.[80] 그리고 마침내 영국에 승리하면 자기만의 제국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대사인 인도를 야만과 폭정과 공멸의 전쟁에서 구해내고, 느리지만 쉼없이 문명을 향해 나아가게 했음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장식됐다.는 처칠의 말로 마무리.


  • 상단 항목에 있는 미국에서의 교통 사고 사건을 활용한 대체 역사물 게임인 터닝 포인트 : 폴 오브 리버티에선 택시 사고로 1935년에 사망하고 만다. 결국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1940년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10. 관련 링크[편집]


처칠과 관련된 문서는 너무 많으므로, 나무위키의 여백이 부족해서 기재할 수가 없다. 20세기 초중반의 역사는 처칠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요르단의 국경이 이상하게 삐뚤어진 게 처칠이 국경선을 긋다가 딸꾹질을 해버리는 통에 구부러진 거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저 국경선에 붙은 별명이 '윈스턴의 딸꾹질(Winston's hiccup)'.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김영삼과 유사한 점들이 매우 많다. 우선 자연인으로서의 프로필만 보더라도, 두 사람 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키가 168cm에, 체중 또한 62kg이랑 63kg으로 거의 비슷하다. 둘다 각각 보어 전쟁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며, 결혼했을 당시 아내의 나이도 23살, 22살로 거의 비슷하며, 아내와 총 5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도 동일하다. 성격적으로 보더라도 둘 다 배포와 통이 크고, 한량아적 인배와 유머 감각, 다혈질이라는 점도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으로서 볼 경우,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 정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주의 정당으로 옮겨가서 활동했다가, 다시 보수주의 성향의 여당으로 돌아와서 정부수반의 자리에 오른다. 정부수반의 자리에 오른 나이도 만 66세로 동일하다. 자유주의 정당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보수정당 내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성향이라는 것도 유사하다. 또 소속 정당 내 소수파로서, 각각 당 내 다수파인 화독파, 민정계와 대립했다. 심지어 처칠과 김영삼이 대립했던 당 내 다수파인 화독파와 민정계 또한 각각 국가주의, 군국주의성향을 띠는 정치세력집권한 나라에 유화적인 정치세력, 그리고 본인들부터가 국가주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정치세력이라는 점에서 연계되는 부분이 있다. 또 극우의 입김이 강한 이웃 나라에 대해 매우 강경했다는 것도 유사하다. 정부수반으로서의 첫[81] 임기가 5년 정도였다는 것도 동일하고, 심지어 정부수반으로 취임하고 5년 후에 치러진 정부수반 선출 선거에서 승리한 제1야당이 처음으로 집권에 성공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또 사후에는 자국 경제를 살린 강경보수 성향의 지도자와 함께 자국 보수 우파 진영의 양대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점도 동일하다.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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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팽창된 자존심 또는 심하게 과장된 자신감, 주의 산만,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등.[3] 어려서 병으로 요절한 삼녀 메리골드를 제외한 나머지 4남매 중에 천수를 누린 건 막내 딸인 메리(항년 91세)밖에 없다.[4] 속세와 연을 끊고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5] 편의상 《제2차 세계대전사》로 칭해진다. 한국에서는 1970년 5월 25일 '처어칠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8권 전집을 박문사에서 발간하였다.[6] 한국을 포함해 해외에서도 '짖는 개를 볼때마다 멈추면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한다'고 알려진 명언이나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명백히 잘못된 표현이다. 처칠은 분명히 앞에 "누군가 그러더군요(As someone said)"라는 말을 덧붙였다. 즉 영국에선 관용구처럼 쓰이는 말일 확률이 높다.[7] 출처 : Richard M. Langworth, <Churchill by Himself: In His Own Words>, RosettaBook, 2013, p.579[8]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은 이튼과 함께 영국의 2대 명문 고등학교이자 자신의 모교인 해로우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어 연설문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 전시인 상황이다 보니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 금방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연설할 시간이 없다는 보좌관들의 전언이 오자, 처칠은 연단에 올라 이 말만을 남기고 떠났다. 이는 후일 사람들에게 처칠 자신이 2차 세계 대전의 승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비춰지기도 한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처칠의 뜻을 이해한 청중들의 박수갈채와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처칠이 떠난 뒤에도 그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인생에 꼭 필요한 교훈이 반드시 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절대적인 명언.[9] 대한민국 육군 제7보병사단이 한때 당시 사단장이 이 구호에 심취하여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자!"는 슬로건을 두르고 다닌 시기가 있다.[10] 처칠을 도안 인물로 삼은 5파운드 지폐에도 적혀 있는 글귀다.[11] 연설문 사이트에는 "그것은 승리입니다(It is victory)"라고 적혀있지만 실제 녹음된 연설에서는 단 한 마디, "승리(Victory)."라고만 말한다.[12] 연설 원문전문 번역현재 비공개 처리됨[13] 전장의 무대를 프랑스, 바다, 하늘, 해변, 상륙지점, 들판과 거리, 언덕으로 옮겨가며 설령 영국이 계속 패배해서 독일군이 영국본토에 상륙하더라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생략되었으나, 뒤에 자신은 그럴 가능성은 믿지 않으나, 만에 하나 영국본토가 점령되더라도,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함대와 함께 계속해서 항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비장미로 인해서 굉장히 많이 회자되는 연설이다.[14] 처칠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가 특히 유명하며 보통 이 부분으로 연설 전체를 지칭한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섬나라라는 영국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이어서 서양의 각종 매체나 방송 등에서 엄청나게 많이 패러디되었다. 예를 들어 그룹 아이언 메이든의 곡 'Aces High'의 앞부분에도 나오며 영화 《로빈 후드》의 해변전투 장면은 대놓고 이 연설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야사에 따르면 이 연설 뒤에 처칠이 "그리고 우리들은 맥주병으로 그놈들의 대가리를 후려 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그것밖에 없으니까"라고 덧붙였으나 방송에는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처칠의 성깔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16] 영화 덩케르크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주인공이 해당 연설을 신문에서 읽는다.[17] 연설 전문[18] 연설 전문 Demobilisation[19] 연설문 출처[20] 영국 본토 항공전을 다룬 게임의 제목 their finest hour, 콜 오브 듀티 1기반의 콘솔 스핀오프 콜 오브 듀티: 파이네스트 아워, Hearts of Iron III의 DLC인 their finest hour가 여기서 유래한다. 또한 문명 5의 평등 계열 사회 제도에서 도시의 방어력을 올려주는 사회 제도와 엑스컴: 롱 워의 공중전에 보너스를 주는 영국 스타팅 보너스가 여기서 이름을 땄다.[21] 그를 다룬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마지막 스크롤에도 인용됐다.[22] 연설문 출처[23] 참고로 이 연설을 들은 조종사들의 반응은 "드디어 우리 월급이 올라가는구나! 올려주실 셈이군"였다고 한다. [24] "좋았어! 이 전쟁은 이겼다!"라고 말했다는 야사도 있다.[25] 이전엔 인터뷰에서 냉전을 예고하듯이 한 발언이라 쓰여져있는데, 이 발언은 스탈린에게 양보했다는 비난을 받자 1945년 2월 23일에 각료들 앞에서 한 말이 원본이다.[26] 연설문 출처[27] 현재는 모든 분야에서 관용구처럼 쓰이는 'ㅇㅇ의 장막'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처칠이 이 표현을 대중화 시킨 셈이다. 역시 영문법과 전치사의 마술사[28] 연설문 출처[29] 출처 : Winston Curchill, <The Second World War, Volume I : The Gathering Storm>[30]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준으로 평소 복지국가 수립을 강하게 주장하던 처칠의 생각을 함축시킨 연설로 유명하다. 이는 후일 영국의 복지에 척도가 되기도 하는데, 마가렛 대처 수상이 영국의 무상 우유 배식을 폐지하려하자 '우유도둑'이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 그래서 마가렛 대처도 "우유 배식 중단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라면서 후회했다고 한다.[31] 말 자체는 이전부터 많은 명사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것.[32] 출처 : Harold Begbie와의 대화에서, Master Workers, Begbie, Methuen & Co. (1906), p. 177[33]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처칠을 만났을 때 "하느님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지.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야."라고 말한 바 있다.[34] Andrew Nagorski in The Greatest Battle (2007), Simon & Schuster[35] 처칠은 젊은 시절 인도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적군이 처칠 한 명을 노리고 집중사격을 했지만 한 발도 안 맞고 빠져나온 적이 있다.[36] 영국의 엡섬 더비는 전세계 경마계의 대상경주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이며, 각 경주마 한마리당 평생 단 한번의 기회만 주어지기 때문에 다시 참가하려면 새로운 말을 육성해야 해서 웬만한 귀족이나 왕족조차도 자신의 말로 우승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2022년 9월 8일에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조차도 반세기동안 자신의 소유마로 더비에 도전했지만 우승하지 못했다.[37] 1947년 11월 11일 하원 연설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처칠이 했다는 기록도 없을 뿐더러 그나마 가장 근접한 발언조차 인용문이다. 즉, 처칠도 다른 곳에서 본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그 문장이 처칠의 말로 잘못 알려진것이다.[38] 현재 남아있는 가장 유사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민주주의는 기존에 시도되었던 다른 모든 정치 체제들을 제외한 나머지 중 가장 최악의 정치체제이다." "Many forms of Government have been tried, and will be tried in this world of sin and woe. No one pretends that democracy is perfect or all-wise. 'Indeed it has been said' that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 민주주의도 훌륭한 정치체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이전의 정치체제보다는 나으니까 채용한다는 의미.[39] 출처 : Richard M. Langworth, <Churchill by Himself: In His Own Words>, RosettaBook, 2013, p.574[40] 처칠은 1908년 우연한 기회에 폴 로저 샴페인을 마신 후 샴페인 신봉자가 되었고,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메오 이 훌리에타 시가와 폴 로저 샴페인은 처칠의 곁을 함께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41] 실제로 처칠은 동물을 무척 좋아해 개, 고양이, 돼지, 거위, 말들을 모두 키웠다.[42] 처칠이 말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고 사위가 1981년 4월 28일에 열린 귀족 사교 모임인 <The Reform Club>에서 처칠을 회고하며 인용했던 말이다.[43] Martin Gilbert, <Winston S. Churchil l: Never Despair, 1945–1965>, 1988, p.304[44] 문명 6/과학 기술 중 목축업 업그레이드 완료 인용문으로 나오기도 한다.[45] # 번역 : At any rate, that is what we are going to try to do.(어쨌든, 그것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46] 이것이 모티브가 된 게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그레이브즈의 스킨인 마피아 그레이브즈이다.[47] 사실 영국인들은 저런 식의 패러디를 상당히 즐긴다. 처칠의 얼굴을 불독에 합성한 전시 포스터까지 정부의 지하벙커에 붙여 놓을 정도였으니... 심지어 영국 시민들은 불독처럼 매우 듬직하다는 이유로 그 포스터를 엄청 좋아했다는 말까지 있다. 불독까지도 합성한 판에 마피아 보스가 대수였겠는가?[48] 사실 동시대 사람들 중 진짜로 일부러 이미지 형성과 관리를 실천한 사람은 처칠보다는 차라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연합군 사령관더글러스 맥아더다. 본래 맥아더도 명문가 출신이어서 고급 파이프를 주로 썼는데, 어느 날 예비로 쓰던 옥수수 파이프를 피는 사진이 유명해지자 기자들 앞에서는 반드시 옥수수 파이프만 썼다.[49] 당시에 저격수는 얍삽하게 뒤에서 치는 비겁자란 인식이 있었다. 되레 영국 국민들은 저 사진을 보고 했던 말이 '간지난다'였다는....[50] 처칠과 사진을 찍을 당시에 처칠은 "자네는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 소질이 있군. 그럼 욕 먹고 오래 못 살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쉬는 보다시피 (한 세대 차이는 있지만) 향년 94세로 처칠보다 더 오래 살았다. 욕 먹어서 오래 산거다[51] 대표적인 예가 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재학 시절 사진인데 딱 봐도 상당히 미남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탈모가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얼마 안 되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미남이었던 때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52] 처칠과 비슷하게 입에 시가를 달고 다닌 동시대 유명인으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프로이트는 하루에 20개 이상의 시가를 피웠고, 그로 인한 구강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아랑곳않고 피워댔다. 결국 30차례가 넘는 수술을 받았으나 더 이상의 치료가 의미가 없다고 여겨 주치의인 슈어 박사에게 안락사를 부탁했다. 슈어 박사는 그것에 동의해 프로이트에게 다량의 아편을 주사했고, 프로이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다만 프로이트도 처칠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가를 피우고도 83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충분히 오래 산 편이다. [53] HMS 애진코트, HMS 에린[54] 맥심 기관총이 맹위를 떨쳐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회자되는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처칠은 21창기병 연대 소속 중위이자 종군기자(요즘으로 치면 특파원)로 참전했다. 21창기병 연대는 언덕 위에 있는 소규모 부대를 발견하고 공격했다가 그 뒤에서 대기하던 부대에 포위당해 연대원 약 400명 가운데 20여 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말은 100필이 넘게 손실되었다고 한다.[55] 1926년 영국 총파업일 확률이 높다.[56] 미국의 유명한 부호 가문인 애스터 가문의 후손으로 타이타닉에 탑승했다가 사망한 존 제이콥 애스터와는 사촌지간이다.[57] 출처: 세계사 산책.[58] 하지만 부정적인 면모도 많았는데 나치에 동조하는 발언을 여럿 남겼고 인종차별주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치 독일과 적으로 맞붙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 장병들을 공분에 빠트린 D-Day 기피자 발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59] 굳이 따지자면 여왕 앞에서 취한 처칠이나, 하원의원으로서 총리를 그냥 이름으로 '윈스턴'이라고 부른 브래드록이나 둘 다 무례하게 행동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파티 잘 하고 있었는데 총리랑 하원의원이 서로 예의를 상실한 채 굴고 있어서 당황스러웠을 법한 엘리자베스 2세였을지도.[60] 이 일화에 언급되는 사위가 처칠의 둘째딸 사라 처칠의 첫번째 남편인 빅 올리버다. 배우에 서커스 단원이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왜곡된 내용으로, 빅 올리버는 오스트리아 귀족(남작)의 아들로 원래 의학을 공부하다 클래식 음악가가 된 상류층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에 코미디언이기도 했는데, 국내에는 흔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연주 중간중간에 농담이나 장난을 쳐 사람들을 웃기는 유형으로, BBC 라디오 등에도 자주 출연했던 유명인이었다. 다만 집안이 유대인 혈통이라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접수하자 바로 해외로 망명했다. 그는 나치의 블랙북에 올려져 있을 정도로 나름 거물 인사였는데, 영국에 와서는 브렌트포드 FC의 열렬한 서포터가 되었고, 나중에 이 팀의 회장까지 된다.[61] 상술한 첫 번째 남편이라는 이야기처럼 빅 올리버는 사라 처칠과 1945년에 이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혼할 때는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었는지 처칠이 꽤 슬퍼했다고.[62] 무솔리니의 사위인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무솔리니가 실각할 때 가담했다가, 나치의 지원으로 복귀한 무솔리니에게 총살당했다.[63] 참고로 틀니를 맞추려면 약 값 까지 약 400만원 정도 생각해야한다. 요즘엔 그나마 의료보험이 돼서 120만원 정도.[64] 일찍 그림을 배운 것이 아니라 늦은 마흔살에 시작해 정계활동 중에도 틈틈히 그림을 계속 그렸다고 한다.[65] 미드 더 크라운 시즌1에서도 이 대사는 언급이 된다.[66] Neat. 얼음 없이 술의 향을 느끼며 마시는 경우[67] 이 일화를 이야기할때는 보통 본문 내용처럼 일일히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제 연극에 초대합니다. 친구분과 함께 오시지요. 만약 있다면요." 라는 비아냥에 "첫 날 공연은 바쁜 사정으로 어려우니 다음날 공연에 가지요. 만약 있다면요." 라고 응수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68] 미군이 사실상 혼자 싸웠던 문제도 있지만, 급한 상황에서 항모 좀 빌려달랬더니 영국이 거부했던 전적도 한 몫 했다. 결국 어떻게든 빌려주기는 하는데, 이미 한 숨 돌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그냥 돌려주게 된다. 물론 당시 영국도 쉬운 상황은 아니었고, 전쟁 초장부터 말레이 해전 등에서 처참하게 깨지면서 인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있었다는 변명은 있다.[69] 학창 시절의 영향도 무시 못했는데, 성적이 좋은 당시 상류층 동급생들은 영어는 적당히 배우고 그리스어라틴어를 배웠지만, 처칠은 늘 영어만 배웠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문법규칙에 숙달됐다.[70] 일례로 Where are you from?을 From where are you?로 바꾼다든지.[71] 이 고양이는 처칠 1차 집권기의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이기도 했다.[7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olonel_Blimp_cartoon.png 딱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하는 꼰대 군인들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73] 덕분에 영화 촬영이 꽤 힘겨웠다고 한다.[해석] 그것은 폐하의 정부(영국정부)의 결의이다(That is a resolve of his majesty's government).[74] 히틀러와 자신의 공통점이 휘파람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햇을 정도.[75] 본토와의 연락도 두절된 상태다.[76] 이미 가스질을 해댔던지라 비하르 외교관에게 처칠이 자신이 변하고 있다 말하지만 비하르 외교관이 죽은 사람이 되살아오지 않는다고 조소하는 것을 보면 이제와서 자비를 배풀어봐야 소용없다는걸 대놓고 알려주고 있다.[77] 원래는 인도인들을 영국이 하던대로 분열,종교갈등을 일으키료고 했지만 들켜서(...)시위가 일어난다. 이걸 보고 처칠인도인들은 미개인종이라는 확신을 가진다.[78] 원역사의 아파르트헤이트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는데 처칠은 그것보다 더했다.[79] 여기서 영국본토가 우릴 배신했고 이제 유일한 잉글랜드인인 우리가 영국령 인도라도 지켜야한다고 말한다.[80] 광기가 주제인 레드 플러드답게 처칠의 대사에 묻어나는 광기가 일품이다.[81] 김영삼은 단임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만큼 당연히 첫 임기밖에 없지만, 처칠은 두번째 임기도 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