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병 (문단 편집) ==== 다른 지역들 ==== >신 등이 진영에 임하여 눈으로 그의 용병(用兵)하는 것을 보니, '''그 병기가 심히 예리하여 나아감은 있으나 물러남은 없으므로 화살은 미처 잇달아 쏘지를 못하고, 총은 미처 다시 재지를 못할 정도이니, 이 오랑캐와는 같이 들에서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은 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개원(開原)·무순(撫順) 양진(兩鎭) 및 이 동쪽 길은 한번 가자마자 뒤집히고 함락되어 심지어는 우리 나라 군사 만여 명이 해가 바뀌도록 비바람을 무릅쓰고 다녔으나 결국은 패배를 당하였으니 이는 신등이 못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강홍립 >---- >―속잡록 || [[파일:fbe88953e6a9e86f00a4dfc41cc3f32d.jpg|width=100%]] || || 청나라 기병대 ||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병대의 전술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명나라 군대는 마갑을 폐지하고 핸드 캐논 등을 활용하는 기병대를 같이 운용하기도 하였고, 청나라 군대는 별도의 편성없이 기병대가 기병무기 전반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도 부분적으로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을 잔존시켜 운영하기도 하였고,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군을 상대로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창기병들은 경기병의 장비를 갖추어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경우 일찍이 창기병이 사장되었으며, 왜란 이후 조총수 중심으로 편제가 뒤바뀜에 따라 서양 국가들처럼 다른 기병-특히 궁기병-들의 입지도 매우 좁아진다. 또한 인구 증가로 인해 초지가 농지로 개간되며 말을 키울만 한 지역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점차적으로 유럽의 [[용기병]]이나 [[후사르]]를 결합한 듯한 운용법을 보이게 된다. 거점 방어 시에는 하마하여 가지고 있던 총이나 활로 보병들과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수색대로 활동하거나 포병과 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러다 화력에 짓눌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돌진하여 [[편곤]]이나 기병용 [[환도(무기)|환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추격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역할이었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kumi17cs1013&logNo=221082132656&referrerCode=0&searchKeyword=조선 기병|링크]] 일본의 경우 보병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국시대와 평화로운 에도 막부를 거치면서 전투용 마술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센다이 번과 토사 번을 중심으로 의전용 마술이 근근히 이어져내려왔다. 특히 토사 번(현재 [[고치 현]])은 마술 문화가 매우 발달해 말을 키우기에는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2위에 달하는 약 3만 5천마리의 말을 생산했을 정도였다. 토사의 번교에서는 무사들에게 마술 교육을 매우 장려했으며, 심지어 [[조선 통신사]]가 보여준 조선군 기병대의 진법인 [[마상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까지 카와고에 번(현재 [[사이타마 현]])에서 배워와서 번의 주요 마술로써 가르치기도 했다.[[http://m.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c3918db3943cf5feffe0bdc3ef48d419#redirect|논문]] 서유럽의 [[카라콜]] 등장처럼, 총기가 등장하고부터는 활을 이용하는 궁기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용기병|머스킷이나 권총을 이용하는 기병]]의 수가 증가하였다. || [[파일:132W6320Q9120-63R9.jpg|width=100%]] || || [[준가르]]군과 청군의 교전 || 특히 [[준가르]]와 [[청나라]]의 전쟁에서 기병대의 화기사용이 더욱 두드러졌다. 준가르군은 뛰어난 소구경 화포와 기동력을 이용하여 화력전을 펼쳤고, 적이 다가오면 지리적인 엄폐물을 활용하거나 수송용으로 쓰인 낙타등을 엄폐물로 삼아 말에서 내려 총격전을 펼쳤는데, 청나라 군대도 이에 하마사격과 화력전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군의 기병대가 마상궁술과 하마총격술, 화포사격술 등 다양한 사격전술을 펼치며 기술적 변화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아프리카 서부와 북부의 여러 나라들도 강력한 기병들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 오늘날 [[수단 공화국]]은 군대의 주력 부대는 기병들이 맡았는데, 슈크리(Shukuri)라고 불린 중무장 기병들은 타고 다니는 말한테 두꺼운 퀼트나 구리로 만들어진 머리 보호대와 가슴 받이 등으로 구성된 갑옷을 입혔다. 다만 수단의 기병들은 대부분 사회 상류층인 귀족들이라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여 총이나 대포 같은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정책에 반대했다. 그래서 1770년대 초에 수단 북부의 푼즈 술탄국을[*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문장에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그려졌는데, 원래 수단은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기 11세기 이후로 [[이슬람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십자가]]를 그려넣는 식으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었다.] 방문했던 유럽인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는 푼즈 술탄국의 군대 전체에 [[머스킷]] 소총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했다.[[https://blog.daum.net/naymbi/118|#]] 또한 오늘날 북아프리카 내륙의 [[차드 공화국]]에 있었던 카넴 보르누 제국도 군대의 주력은 기병 부대였다. 카넴 보르누 제국의 기병들은 이웃나라인 푼즈 술탄국의 기병들처럼 두꺼운 퀼트로 만든 전투복을 말한테 입혔으며, 기병들이 가진 창은 날의 길이가 굉장히 길어서 거의 창 전체 길이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전성기인 11세기 말과 12세기 초 무렵, 카넴 보르누 제국은 무려 10만 명의 기병들을 거느렸으며[* 근대 이전에 10만 명의 기병이면 굉장히 막강한 전력이다.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칭기즈칸]]의 [[몽골군]]도 처음엔 그 수가 9만 5천 명 가량이었다.]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이 아프리카 북부를 잠식해오자 오스만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오스만 군대 방식으로 훈련을 받은 [[머스킷]] 소총병을 말에 태운 기마 총병 부대를 편성하였다.[[https://blog.daum.net/naymbi/6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