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베시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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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이스트리아 공작,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프랑스어: Jean-Baptiste Bessières, 1er duc d'Istrie

파일:attachment/장 밥티스트 베시에르/베시에르.jpg

이름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프랑스어: Jean-Baptiste Bessières
생몰년도
1770년 12월 31일 ~ 1813년 12월 31일 (43세)
신체
182cm
출생지
프랑스 왕국 케르시 프레사크
사망지
작센 왕국 바이센펠스
국적
프랑스 왕국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 제1제국
군복무 기간
1791년 ~ 1813년
계급
제국 원수(프랑스 제1제국)
지휘군단위
연대(기병대장)
참전
프랑스 혁명전쟁
로베르트 전투
리볼리 전투
나폴레옹 전쟁
마렝고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일라우 전투
메디나 델 세코 전투
부르고스 전투
란츠후트 전투
노이마르크트 장트 바이트 전투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바그람 전투
러시아 원정
고론탈로 전투
서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에두알 개선문 동쪽 13열
가족
베르트랑 베시에르(남동생)
쥘리앵 베시에르(사촌)
마리잔 라페이리에르(부인)
장 루이 라페이리에르(처남)
오귀스탱 라페이리에르(처남)[1]
나폴레옹 베시에르(장남)[2]
마틸드 루이즈 라그랑주(며느리)
조제프 라그랑주(며느리의 아버지)

1. 개요
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2.2. 최후
3. 평가
4. 이야기거리



1. 개요[편집]


"장 란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와 함께 살아있었다면 워털루 전투의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아쉬움을 주게 하는 당대의 명장.

조아킴 뮈라와 함께 나폴레옹 군 최고의 기병대장으로 그 시대 최강의 기병 사령관. 뮈라에겐 없는 지성도 갖추고 있어 참모 역할도 잘 수행했다.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초대 이스트리아 공작.[3]


2. 생애[편집]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편집]


베시에르는 프랑스 남부 아키텐 공국의 케르시(현재의 로트주)의 프레사크(현재의 카오르 근처)에서 이발사, 외과의사의 장남(동생은 베르트랑 베시에르)으로 태어났다. 1786년에 루이 16세 시절 프랑스군에 입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한다. 그는 1791년에 국왕이 소집한 "Constitutional Guard"에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그는 대혁명기 때 혁명군에 남았고, 혁명 전쟁 기간 동안 피레네 동부 방면군과 모젤 강 유역 방면군에 복무하면서 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경력을 쌓아 1796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였다. 바로 이 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 모젤 군의 지휘를 맡아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로베르토 전투에서 그는 나폴레옹의 눈길을 끌었고, 나폴레옹의 대승리로 끝난 리볼리 전투에서 베시에르가 이끈 중대의 활약으로 인해 베시에르는 소령으로 승진했다. 리볼리 전투가 끝난 뒤 그는 프랑스군이 노획한 적의 깃발들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돌아와서 나폴레옹의 스티리아 침공에 참가했고, 거기서 정찰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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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22세 시절 베시에르.

그 후 여단장으로 진급, 베시에르의 군사적 재능을 눈여겨 본 나폴레옹은 이후 이어진 전역들과 전투들에서 모두 베시에르를 부관으로 대동하고 갔다.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 당시에는 아크레 전투와 아부키르 전투[4]에서 군의 선두에 서서 1799년 5월 21일 아크레를 점령하는 공을 세워 이로 인해 준장이 된다. 하지만 아부키르 항에 정박되어 있던 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깨지면서 나폴레옹과 함께 발이 묶이게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비밀 탈출 당시 그를 수행했고 유럽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 1800년의 마렝고 전투에서 통령 근위대[5]를 지휘했으며 전투 후반에 기병 1개 연대를 이끌고 돌격하는 용맹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계속되는 그의 성과는 1802년에 그를 중장이자 사단장의 직위에 올려놓았으며, 나폴레옹이 1804년에 황제의 관을 썼을 때 임명한 원수들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1805년의 오스트리아 전쟁에서부터 1807년에 독일.폴란드 원정이 끝나기까지 그는 프랑스 제국군 소속의 근위 기병대 전체의 지휘를 맡았다. 180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809년에는 이스트리아 공작의 자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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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에르의 기마상.

반도전쟁이 일어나자 스페인 전역에서도 다른 장군들과 함께 스페인 원정에 파견된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단독 지휘를 했고, 1808년 메디나 델 리오 세코 전투에서 숫적으로 그의 1만 4천 프랑스군을 압도하는 2만 천 명의 스페인 정규군을 갈아버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소모시에라 전투나 코루나 전투 등에서도 스페인군과 영국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다가 1808년에 발리엥에서 듀퐁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처절하게 발려버리자 나폴레옹은 친정을 결심, 그는 참모로 종군하여 나폴레옹을 충실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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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에는 다뉴브 강 유역의 대육군을 이끌고 다시한번 오스트리아군과 맞붙게 되었다. 하지만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기병를 몰아 몇 번이고 끊임없이 오스트리아군 본대에 끊임없이 돌격을 감행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총 공세를 막아내었고, 바그람 전투에 참가하여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그가 타고 있던 이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죽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굴욕을[6] 설욕하라는 하늘의 뜻인지, 왈헤렌 섬에서 베르나도트 원수를 대신해서 군대를 지휘했고, 영국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냈다.

바그람 전투 직후, 베시에르는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1811년, 베시에르는 다시 복귀하여 스페인의 마세나 원수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를 오랫동안 먼 곳에 보내기를 싫어했으며 베시에르가 옆에서 자신을 보좌해주는 것을 선호했다.[7] 그래서 베시에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 1812년의 러시아 원정에서도 나폴레옹을 따라갔다. 근위 기병대를 지휘하여 보로디노 전투에서 그는 기병 돌격을 감행하며 러시아군 전열을 무너뜨렸고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본대가 공격 받지 않도록 기병대로 신중히 엄호했다.

하지만 얼마 뒤 나폴레옹 대신 원정군을 이끌었던 뮈라가 나폴리로 조기 귀국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원정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베시에르의 부대 역시 적의 추격과 추위, 굶주림 등으로 시달렸고,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만이 국내에 복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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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1813년에 대불 동맹군을 상대로 한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베시에르를 프랑스 전 기병대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2.2.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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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베시에르는 이 직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1813년 12월 31일, 베시에르는 뤼벡 인근 지방에서 전선을 43세에 시찰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에 의해 베시에르는 흉부 전체가 짓뭉개진 채 즉사해버렸다. 나폴레옹은 그의 죽음을 전해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훌륭한 지휘관을 잃었다며 낙담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그의 외아들을 돌봐 주었고, 그의 아들은 루이 18세의 시대에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3. 평가[편집]


베시에르는 오랜 세월 나폴레옹을 보좌하였고, 나폴레옹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병대 지휘에 특출난 지휘관이였고, 용맹함과 냉정한 판단력을 갖춘 장군으로써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원수였다. 또한, 그는 휘하 병사들을 자상히 대했으며 포로들의 처우도 대단히 인도적이었던 장군이었다. 특히 스페인 전역 때 그의 지휘는 스페인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 최소화와 포로가 된 스페인군에 대한 관대함으로 환호받았다.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스 군대에 깊은 반감을 품었지만, 베시에르에 대해선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가 전사했을 때 스페인[8]의 성당들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미사를 집전했을 정도였다.

몇몇 역사가들은 만약에 그가 죽지 않고 라이프치히 전투에 참가했더라면, 나폴레옹이 그렇게 허망하게 패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4. 이야기거리[편집]


뱀발로 그의 헤어스타일은 주르당과 상당히 비슷하다

같은 기병대장 조아킴 뮈라와 절친한 사이었지만 장 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2차 오스트리아 전쟁 중에 베시에르가 란에게 결투를 신청해 결투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의 동생 베르트랑 베시에르는 그의 뒤를 따라 사단장이 되었고, 사촌인 제라드 피에르 앙리 줄리앙은 외교관이자 제국 장교로 나폴레옹 1세를 섬겼다.

[1] 당시의 수집가, 예술, 금융으로 재산이 당시 1140만프랑을 보유했다고 추정한다. [2] 슬하무남무녀 [3] 정식명칭은 1st Duc de Istrie.[4] 아부키르 해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아부키르 전투는 육지에서의 전투를 의미하며, 보통 아부키르 해전이라 불리는 전투는 나일 강 전투로 분류된다.[5] 이후 나폴레옹의 '친위대'로 변경[6] 사실 기사도 정신 등이 남아있던 이 시대에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아서 낙마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최전선에서 앞장서 싸웠다는 말이므로.[7] 사실, 나폴레옹은 이즈음 들어 옛날의 기개를 잃어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뒤, 나폴레옹은 아내 곁에서 오랫동안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스페인 전역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데도, 그는 다시 직접 출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유능한 장수를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베시에르를 붙잡아둔 것도 나폴레옹이 많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8] 고야의 유명한 그림이 말해주듯, 프랑스인이라면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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