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병 (문단 편집) ==== 서유럽 ==== 16세기 초, [[총병]]과 [[스위스 용병]]으로 대표되는 보병의 발전으로 기병은 위기를 맞았다. || [[파일:Batalla de Ceriñola.jpg|width=100%]] || || 스페인군의 [[화기]]에 의해 저지당하는 프랑스 중기병의 돌격. 1503년에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ñola)를 다룬 그림이다. || 예를 들어 1503년 4월 28일에 일어난 체리뇰라(Cerignola) 전투가 있는데 이 전투에서 활약한 에스파냐의 명장인 'Great Captain' 코르도바는 프랑스군이 잘 볼 수 없는 위치에 야전 참호와 토담을 만들고 총병과 쇠뇌병을 다수 배치하여 프랑스군 기병대가 지근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총지휘관인 Nemours 공작 루이도 그 피해자 중 하나로 등록될 정도. 이후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에스파냐군의 야전축성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고, 에스파냐군의 기보 총돌격은 프랑스군을 패주시키며 에스파냐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그래도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는 여전히 기병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기병의 위상약화는 백 년 정도 늦출 수 있었다. 또한 16세기 중엽부터 기병이 [[권총]]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기병은 다시 보병에 대한 우위를 갖게 되었다. || [[이미지:드뢰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jpg|width=100%]] || || 1562년 드뢰 전투에서 위그노 기병에게 포위당한 스위스 용병 || 드뢰 전투는 보병이 기병에 비해 열세가 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로, 화기의 발전으로 도태된 것은 기병이 아니라 총기병들에게 얻어맞은 스위스 밀집방진이었다. 이후 1587년 쿠트라 전투(Battle of Coutras)에서는 프랑스 국왕군의 중기병이 위그노군의 총기병에게 패배했다. 이때부터 기존의 중기병들인 돌격기병들이 확실히 쇠퇴하고, 사격 위주로 싸우는 총기병대가 오와 열마다 번갈아 교차 사격을 하는 [[카라콜]] 전술이 조명받기도 했다. 그러나 보병화기의 화력이 기병화기보다 위력이 높았기 때문에 카라콜의 변형전술인 신교도 카라콜, 스네일(snail), 리마콘(limacon) 등이 주를 이루다가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총을 쏜 뒤 돌격하는 "[[하카펠리타트]]"를 육성함으로써 돌격기병을 부활시켰다. || [[파일:17th-cent-armor1.jpg|width=100%]] || || 17세기 기병 갑옷 || 이에 따라 마갑 역사 줄어들고 기마병이 입는 갑옷도 변화하였는데, 화기가 발달하기전에는 전신 판금갑옷을 입다가, 화기가 발달하고 나서부터는 총알을 막으면서 사람이 입고 다닐만한 무게를 지니기 위해 맞아도 덜 치명적인 부위의 갑옷을 없애는 대신, 중요 부위를 매우 두껍게 하는 갑옷양식이 유행한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며 보병에 대한 기병의 우위는 17세기 중반 들어 보병의 장창병 비율 감소로 인해 더 심화되어, 기병은 이전 세기보다 전투에서 더 중요해졌다.[* Frederic chauvire-The new knights(2021)] >보병전에 참여하지 말고 짐의 기병을 활용하라, 보병전은 손실만 많고 승패를 결정짓지는 못한다. >---- >[[루이 14세]]가 뤽상부르 원수에게 내린 명령 물론 유럽에서는 동아시아처럼 무턱대고 보병에게 기병이 들이박는 경우는 덜했고 보병이 기병을 막아내는 경우도 꽤 있었으나 전투에서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기병이었다. 보병전은 지리멸렬했으나 기병전은 단 5분 만에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30년 전쟁 이후 서유럽에서는 측면전투가 굉장히 중요해졌는데 이때 측면전투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기병이었다.[* David parrott-Strategy and Tactics in the Thirty Years' War: The Military Revolution(1985)] 그러나 17세기 극후반에 소켓식 총검이 개발되고 수발총이 개량되어 대량보급된데다가 포병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18세기가 되면 기병은 보병과 포병을 제대로 뚫어낼 수 없었고 전투에서의 중요도도 이전보다 낮아져 16세기 중후반~ 17세기처럼 전투에서의 승패가 기병으로 결정되는 일은 적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