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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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昕巖
(? ~ 918년)
1. 개요[편집]
태봉의 장군[1] 이자 고려 초기에 의문의 사건으로 숙청된 인물. 그리고 참고로 위의 이름 한자를 보듯 李씨가 아니다.
2. 생애[편집]
궁술, 기마술을 일삼았을 뿐 재주와 식견은 없었고 이득만 챙기는 기회주의자였다고 하며[2] 처음에는 궁예를 섬기다가 기회를 보아 계책을 내어 벼슬을 얻었다. 궁예가 쫓겨나기 전에는 웅주를 습격해 점령하면서 그 곳을 수비했다. 웅주의 호족 홍기가 궁예에게 투항한게 904년이었고 투항 과정에서 이흔암의 역할이 지대한 것으로 보이며 이 때부터 이흔암이 14년간 웅주를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흔암이 웅주와 운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후백제는 완산주가 노출된 형세를 맞이한 데다 나주의 왕건에게 앞뒤로 견제당해 후백제는 태봉이 존속하던 시점에는 적극적으로 동쪽으로 뻗어나가지를 못했다.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을 참수하여 저자에 내다 버렸다[棄市]. 이흔암은 궁술(弓術)과 기마술(騎馬術)이 전문이었는데[業], 이득이 되는 일을 보면 재빨리 취하였다. 궁예(弓裔)를 섬겨 술책으로써 임용되었다. 궁예 말년에 이르러서는 웅주(熊州)를 습격하여 빼앗은 후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남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이르니, 사졸(士卒)들이 많이들 도망가 버려서 웅주는 다시 백제의 소유가 되었다.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萇)이 이흔암과 이웃에 살고 있다가 그 음모를 알고는 상세히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흔암은 지키던 곳을 버리고 스스로 찾아옴으로써 변방의 영역을 상실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주군을 섬기면서 평소에 정분이 있었으므로 차마 목을 벨 수가 없다. 또한 그 반역의 움직임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으니, 그도 필시 할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염장이 밀령(密令)을 내려 그를 감시할 것을 청하자 왕이 나인(內人)을 보내어 염장의 집에 가서 장막 속에서 몰래 엿보게 하였다. 이흔암의 부인 환씨(桓氏)가 뒷간에 와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오줌을 눈 후에 길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우리 남편의 일이 만약 잘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겠구나.”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들어갔다. 나인이 보고를 아뢰자 마침내 이흔암을 옥에 가두니, 모두 자복하였다. 백관들에게 그의 죄를 논의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직접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평소에 흉악한 마음을 길러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법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사사로운 감정으로 어지럽힐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흔암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참수하고 그 집안을 적몰(籍沒)하였으나, 그의 당여(黨與)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 권1 (태조신성대왕 태조1년 6월 미상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시대 사료
왕건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웅주를 떠나 철원으로 갔는데[3] 한찬이자 수의형대령인 염상이 그가 흑심이 있다고 여겨 왕건에게 알렸지만 모반의 증거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았다. 염상이 이흔암을 감시할 것을 건의하자 사람을 보내 몰래 엿보게 했는데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며 남편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겠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결국 전말을 보고받은 왕건의 명으로 하옥되었다가 역모를 자백하게 되었으며 거리에서 참수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그런데 모반의 증거가 이흔암의 처 환씨가 "남편 일이 잘 되어야 할텐데."라고 혼잣말한 것 뿐인데 감옥에 가두고 자백을 받았기 때문에 이흔암의 역모는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거기다 왕건은 마지막으로 이흔암과 면대하여 구체적인 역모 이야기보다는 "니가 평상시 하던 꼬라지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지"라는 식으로 꾸짖기도 하였다. 이흔암이 구체적으로 역모를 꾸몄다기보다는 궁예나 환선길과 가까웠던 처지라 정치적으로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최전방 요충지인 웅주의 수비를 아무한테나 맡길 일이 없으니 궁예의 신임이 두터웠고 무력도 뛰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 이흔암 열전에는 이흔암이 웅주를 떠나는 바람에 사졸들이 달아나 웅주가 후백제로 넘어갔다고 나오지만 세가에는 이흔암이 처형된게 6월이고 웅주, 운주 등 10여 개 주현이 후백제에 넘어간게 8월이다. 때문에 고려가 웅주와 운주를 상실한 원인은 이곳을 다스리던 이흔암을 증거도 없이 처형하는 바람에 웅주와 운주를 다스리던 책임자가 하루 아침에 사라짐과 동시에 호족들이 이런 처사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흔암이 14년간 웅주를 다스린만큼 웅주에서의 영향력과 지지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이기에 이흔암의 죽음으로 인한 파장은 클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뒤이은 매곡성주 공직의 후백제 투항과 더불어 고려 태조가 섣불리 정적들을 숙청하면서 생긴 부작용으로 후백제와의 접경 최전방인 웅주, 운주, 매곡을 상실하는 바람에 고려가 후백제에 밀리는 원인이 된다.[4]
3.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흔암(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