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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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저(李之氐)
(1092 ~ 1145)
고려 중기의 인물. 본관은 인천 이씨로 자는 자고(子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동명이인이 고려 후기에 있다. 예안 이씨에서 시조로 여기는 승안군 이지저(李之氐, ?~1317)인데 두 이지저는 서로 한자까지 같다.
예종 15년(1120) 한안인, 김부일이 감독한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직한림원이 됐다. 인종 초 우정언에 임명됐는데 재상들의 뜻을 거슬러 전중내급사를 거쳐 서해도안찰사로 관직이 바뀌었다. 이지저의 먼 친척 이자겸이 국정 전반을 장악했는데 이지저는 부친 이공수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자겸과 연줄을 만들어보려고 뇌물을 바치려는 이들을 엄격히 단속하다 이자겸의 눈밖에 나서 평주사(平州使)로 좌천됐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뒤 개경으로 돌아와 기거주에 임명됐다.
인종 6년(1128), 이지저가 승선을 지내고 있을 때 묘청, 백수한,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인종에게 서경 주변을 둘러볼 것을 제안했고 왕이 직접 서경에 행차했다. 묘청 등이 서경 천도 서명 운동을 벌이고 일부 근신들과 대신 문공인, 임경청 등이 호응했는데, 이지저는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와 함께 서명을 거부했다.
인종 10년(1132) 묘청과 정지상이 서경으로 천도해 금나라를 눌러야 한다고 주장하니 인종이 이지저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이지저는,
국자사업에 임명된 뒤 인종 10년(1132) 왕명에 따라 국학생들을 타일렀다. 이 해의 과거를 감독한 최자성이 시험 출제에 있어 큰 오류를 범했다. 중서문하성과 어사대에서 최자성을 비난하고 재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류가 있는 시험에서 급제한 이들의 친척들이 왕과 환관들을 설득해 재시험을 치르지 말도록 설득했다. 이들의 설득이 받아들여져 재시험은 없었고, 이번에는 국학에서 학생 50명이 상서해 재시험을 볼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지저가 전달한 왕명에 따라 이들 국학생들에게는 특별히 사면이 이뤄졌고 다음번 과거를 기다리며 정진하라는 답변이 내려졌다.
인종 11년(1133) 한유충과 함께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전하기 위해 북송에 사신으로 파견됐는데, 홍주(洪州)에서 풍랑을 만나 돌아와야 했다.
이지저가 중서사인에 임명된 인종 13년(1135) 결국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발생했다. 이지저는 좌상시 이중과 함께 묘청에게 동조했던 이들을 처단할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서경의 반란이 종식된 이후에는 인종 16년(1138) 8월 추밀원부사를 거쳐 12월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로 승진했다. 이듬해에는 지추밀원사로 승진했으며, 예부상서(1140), 정당문학 판한림원사(1141), 수사공 좌복야 판예부사(1142),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1143) 등을 역임했다. 상서우승을 지내던 인종 16년(1138) 지공거 평장사 최유와 함께 이대유 등 29명을 급제시켰고, 지추밀원사를 지내던 인종 18년(1140) 동지공거 국자좨주 임광과 함께 팽희밀 등 26명을 급제시켰다.
인종 23년(1145)에 죽었다. 인종이 사람을 보내 조문한 뒤 제사를 지내도록 했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추증했으며 시호를 더했다.
이지저(李之氐)
(1092 ~ 1145)
1. 개요[편집]
고려 중기의 인물. 본관은 인천 이씨로 자는 자고(子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동명이인이 고려 후기에 있다. 예안 이씨에서 시조로 여기는 승안군 이지저(李之氐, ?~1317)인데 두 이지저는 서로 한자까지 같다.
2. 생애[편집]
예종 15년(1120) 한안인, 김부일이 감독한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직한림원이 됐다. 인종 초 우정언에 임명됐는데 재상들의 뜻을 거슬러 전중내급사를 거쳐 서해도안찰사로 관직이 바뀌었다. 이지저의 먼 친척 이자겸이 국정 전반을 장악했는데 이지저는 부친 이공수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자겸과 연줄을 만들어보려고 뇌물을 바치려는 이들을 엄격히 단속하다 이자겸의 눈밖에 나서 평주사(平州使)로 좌천됐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뒤 개경으로 돌아와 기거주에 임명됐다.
인종 6년(1128), 이지저가 승선을 지내고 있을 때 묘청, 백수한,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인종에게 서경 주변을 둘러볼 것을 제안했고 왕이 직접 서경에 행차했다. 묘청 등이 서경 천도 서명 운동을 벌이고 일부 근신들과 대신 문공인, 임경청 등이 호응했는데, 이지저는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와 함께 서명을 거부했다.
이 무리는 반드시 나라를 그르치리라.
此輩必誤國
『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이지저가 홀로 묘청 등을 배척하며 했다는 말.
인종 10년(1132) 묘청과 정지상이 서경으로 천도해 금나라를 눌러야 한다고 주장하니 인종이 이지저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이지저는,
라고 말했고 인종은 이지저의 조언을 따랐다.금나라는 강적이니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양부의 대신들이 상도(개경)에 머물러 지키고 있는데, 한두명의 말만 듣고 믿으면 대의를 그르칠 것입니다.
金國强敵, 不可輕也. 兩府大臣留守上都, 不可偏聽一兩人之言以決大議.
『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0년 3월.
국자사업에 임명된 뒤 인종 10년(1132) 왕명에 따라 국학생들을 타일렀다. 이 해의 과거를 감독한 최자성이 시험 출제에 있어 큰 오류를 범했다. 중서문하성과 어사대에서 최자성을 비난하고 재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류가 있는 시험에서 급제한 이들의 친척들이 왕과 환관들을 설득해 재시험을 치르지 말도록 설득했다. 이들의 설득이 받아들여져 재시험은 없었고, 이번에는 국학에서 학생 50명이 상서해 재시험을 볼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지저가 전달한 왕명에 따라 이들 국학생들에게는 특별히 사면이 이뤄졌고 다음번 과거를 기다리며 정진하라는 답변이 내려졌다.
인종 11년(1133) 한유충과 함께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전하기 위해 북송에 사신으로 파견됐는데, 홍주(洪州)에서 풍랑을 만나 돌아와야 했다.
이지저가 중서사인에 임명된 인종 13년(1135) 결국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발생했다. 이지저는 좌상시 이중과 함께 묘청에게 동조했던 이들을 처단할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호랑이와 코뿔소가 우리에서 나오고 거북 등딱지와 옥이 궤짝 속에서 훼손됐으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옵니까? 서경의 반적이 모의한 지 오래되었으나, 한두 대신이 이를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그 역모를 믿고 성하게 했으니, 오늘날의 환난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밝은 결단을 내리시어 그 당여를 주살하십시오.
虎兕出於柙, 龜玉毁於櫝, 是誰之過? 西賊之謀久矣, 一二大臣非獨不防閑, 反信其謀而張之, 致今日之患. 請賜明斷, 誅其黨與.]
『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서경의 반란이 종식된 이후에는 인종 16년(1138) 8월 추밀원부사를 거쳐 12월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로 승진했다. 이듬해에는 지추밀원사로 승진했으며, 예부상서(1140), 정당문학 판한림원사(1141), 수사공 좌복야 판예부사(1142),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1143) 등을 역임했다. 상서우승을 지내던 인종 16년(1138) 지공거 평장사 최유와 함께 이대유 등 29명을 급제시켰고, 지추밀원사를 지내던 인종 18년(1140) 동지공거 국자좨주 임광과 함께 팽희밀 등 26명을 급제시켰다.
인종 23년(1145)에 죽었다. 인종이 사람을 보내 조문한 뒤 제사를 지내도록 했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추증했으며 시호를 더했다.
3. 평가[편집]
이지저는 풍채가 아름다웠고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후했다. 문장과 업적은 한 때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인색하여 부친(이공수) 사후 동생과 누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지 않았고, (이지저의) 가노들은 방자해 혹 도둑질하고 겁탈함에 이르러 단속하고 금하지 않았으니, 당시에 이것을 비난했다.
之氐, 風標英雅, 秉心寬厚. 文章事業, 爲一時傑. 但吝嗇, 父沒, 不分弟妹財産, 其家奴肆橫, 或至盜劫, 不檢制, 爲時所譏.]
『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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