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관(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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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冠
(1042 ~ 1112)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정선현 출신으로 자는 민장(民章)이고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2. 생애[편집]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다. 정변진 부장으로 보임돼 초제(草堤) 전투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다. 변방 지역에 백성들이 굶주리자 공적·사적으로 비축된 식량으로 진휼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 숙종은 즉위한 뒤 문관을 예부원외랑으로 임명한다. 숙종 4년(1099) 요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다. 기거주, 병부시랑을 역임하고 숙종 9년(1104) 3월 우간의대부에 임명된다. 이 해 10월 다시 요나라에 가서 태자(예종)를 삼한국공으로 책봉해준 것에 사례한다. 귀국한 뒤 숙종 10년(1105) 윤2월 소부감 지어사대사 겸 태자좌서자로 임명된다.
예종 원년(1106) 우산기상시에 임명된다. 윤관의 여진 정벌 때는 좌군병마사로 종군한다. 문관은 예종 2년(1107) 휘하 병력 33,900명을 지휘해 정주 흥화문에서 출진해 여진 경내로 진군한다. 문관은 석성(石城)의 여진족을 내쫓고 복주성을 쌓았으며, 그 공으로 이부상서에 오른다. 예종 3년(1108) 오연총을 따라 웅주성 전투에 참전해 여진족을 또 크게 이긴다. 그러나 갈라수 전투에서 오연총이 패한 뒤로 여러 성들이 다시 여진족에게 점거됐고, 여진은 고려측에 강화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예종 4년(1109) 7월 병마사 이부상서 문관은 행영병마별감 승선 최홍정과 함께 여진족 추장 거위이(居熨伊) 등을 만난다. 문관 등은 여진에 9성을 반환하는 대가로, 약속대로 하늘에 맹세할 것을 요구한다. 거위이는 제단에 올라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조공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하늘에 맹세한다. 이어 여진족의 도움을 받아 동북 9성의 군민을 다시 고려로 옮긴다.
예종은 문관의 성품과 동북면에서의 공적을 높이 사 재상으로 발탁하려는 뜻이 있음을 문관에게 전한다. 그렇게 예종 5년(1110) 수사공 참지정사에 임명됐으나 문관은 바로 다음해에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한다. 그리고 예종 7년(1112) 71세의 나이로 죽는다.
3. 평가[편집]
문관은 성품이 청렴 정직하고 너그러우며 후했다. 재산을 늘릴 만한 일을 하지 않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어지럽지 굴복함이 없었다.
冠性淸直寬厚. 不事産業, 當官執節不撓.
『고려사』 권97, 문관 열전.
문관이 서북면병마사로 있을 때, 요나라에 외교 사절로 가던 한충을 선주에서 만나 둘이 인사를 나눈다. 병마사들은 일반적으로 외교 사절들보다 관품은 높았지만, 왕명을 받은 이들 사절 앞에서는 왕의 귀에 한 마디라도 더 들어갈 수 있도록 용모 단정히 하고 굽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문관이 칼을 찬 상태로 서서 한충에게 절만 받고, 이후 한 마디도 나누지 않으니 한충이 문관의 강직함을 칭찬한 것이다."문관은 진실로 원수(元帥)로서의 기량이 있으니, 정말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冠眞有元帥氣量, 固非庸庸者.
『고려사』 권97, 문관 열전, 한충(韓冲)의 칭찬.
4. 가족관계[편집]
- 부: 문임간
- 본인: 문관
- 아들: 문자린
- 아들: 문자봉
- 아들: 문자구
- 아들: 문자룡
- 본인: 문관
부친 문임간은 태자소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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