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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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奇轍
(?~1356)
고려 후기의 권신이자 간신이다. 몽골식 이름은 기바얀부카(奇伯顔不花).[1] 본관은 행주(幸州) 기씨로 중시조인 기순우의 내손(6대손)이다.[2]
당대 패권 국가였던 원나라에 붙어먹은 부원배이다. 누이동생은 기황후. 전대의 홍복원과 함께 고려사 최악의 매국노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고려 충혜왕 시기의 무신인 기자오(奇子敖)의 아들이다.[3] 기자오는 5남 3녀를 낳았는데, 막내딸이 원혜종의 황후였던 기황후였다. 원나라의 공녀로 차출된 기황후는 메르키트 바얀의 실각으로 제2황후에 책봉되었고[4] 죽은 아버지 기자오는 영안왕(榮安王)에 추존되었다.[5] 그의 오빠인 기철 또한 원나라 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었으며, 고려로부터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6] 에 봉해졌다. 황후의 권세를 통해 권력을 쥐게 된 기철과 그의 형제들은 날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포악해졌으며[7] 권력 남용에다 토지를 무단으로 강탈하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다.
복위한 충혜왕이 엄청난 폭정과 잔인한 만행들을 일삼자 기철은 원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충혜왕을 폐위하고 정동행성을 다시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충혜왕에 빌붙어 권세를 부리던 이들은 모두 원나라 사신들에 의해 처벌을 받았고, 기철은 홍빈과 함께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에 임명되었다. 충목왕 때 고려를 개혁하려는 정치도감이 활동했는데 이들은 충혜왕의 폐위와 간신들의 퇴출이라는 공동 목표를 이룬 동지였으나, 강탈된 전민을 원래대로 돌리려는 정치도감은 기철의 일족을 압박했다. 정치도감의 조사를 받던 기삼만이 옥에서 죽임을 당하자[8] 기황후의 간섭으로 정치도감은 유명무실해졌다. 충목왕이 죽은 뒤에는 덕녕공주의 명을 받고 전 정치도감판사 왕후와 함께 정동행성의 일을 맡아봤다.
충목왕의 뒤를 이은 충정왕도 재위 3년만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공민왕이 즉위했는데, 원나라가 쇠퇴하자 그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친척과 측근들을 조정 내 요직에 앉혔다. 그러나 공민왕 초에 조일신이라는 정방 출신의 인사가 왕을 호종한 공으로 찬성사, 판삼사사 등 고위직에 올랐었다. 이 정방 출신 인사들은 정치도감을 적대하면서도 기씨 일족과도 반목했고, 급격히 세력을 불려나가던 기철을 견제하며 대놓고 기철의 친족들을 살해했다. 자기 당파를 불리려던 조일신이 난을 일으킨 끝에 최영에 의해 제거된 뒤, 공민왕은 기씨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철과 어머니 이씨 등을 초청해 몽골식 대연회를 열기도 했다. 마침 원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기철을 요양행성 평장으로 임명했으며 이즈음 기철은 고려 왕과도 거의 동등한 위세를 자랑했다. 공민왕이 죄가 있는 감찰규장에게 장을 치려고 하는데 기철이 말려 처벌을 멈추게 한 일이 있으며 요양에서 고려에 와 공민왕에게 시를 올리는데 기철은 스스로를 신(臣)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기철의 아버지는 경왕(敬王)으로 다시 추봉되었고, 3대 조상이 모두 왕으로 추봉되었다. 기철 자신은 원나라에서 대사도(大司徒) 관직에 임명되었다.
1356년 3월, 누군가가 공민왕에게 기철이 쌍성총관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참소했다. 쌍성총관부의 다루가치 이자춘이 마침 고려 조정에 입조한 상태였는데, 공민왕은 쌍성총관부의 백성을 잘 돌보고 만일의 사태에는 자신의 명령을 따라줄 것을 이자춘에게 부탁했다. 기철은 각 도에서 병장기를 모으고 소문을 꾸며내며 반란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1356년 4월 당시 공민왕에게 초청되어 궁궐에서 연회를 열던 도중 결국 공민왕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의 습격으로 권겸(權謙), 노책(盧頙) 등과 함께 철퇴에 맞아 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시신은 공민왕에 의해 저잣거리에 버려진 채 그대로 방치되었고, 흥분한 백성들이 그의 시신에 달려들어 칼로 난도질해 시신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 때 공민왕은 기철은 물론 형제, 아내, 자식, 사위들까지 한꺼번에 죽였으며[9] 기철과 결탁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던 측근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철저한 반원 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에게 기철은 그야말로 눈엣가시이자 자신의 정책에 있어서는 걸림돌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다만 기철 일가가 모두 몰살당한 건 아니었고 당시 고려에 없었던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살아남아 요동성의 군벌이 되었으나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 때 고려군에게 패하여 몽골로 패주했으며 기철의 어머니 이씨 또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 있던 기황후는 기사인테무르와 어머니를 통해 공민왕이 오라버니 일가를 몰살시켰다는 사실을 듣고 분노해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 왕혜(王譓)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던 최유에게 10,000명의 군사를 주고 자신의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10] 를 세자로 삼아 고려를 치게 했다. 하지만 최유의 몽골군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개발살나며 패주하고 말았으며 이후 1368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의 북벌로 대도가 함락되자 내몽골의 응창부로 튀면서 결국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 부: 경장헌왕 기자오
- 모: 경장헌왕비 이씨
아들 기유걸은 찬성사를 지냈다. 병신정변 때 화를 피해 도망쳤다가 사촌 기올제이부카와 마찬가지로 잡혔고, 참수당했다. 처 김씨와 어린 아들 기사인은 병신정변 이후 각각 비구니가 되어 흥왕사에 들어가 숨었지만 발각되었다. 김씨는 옥에 갇혔고, 사위는 죽임을 당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2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배우 김윤형이 연기했다. 시작부터 변발을 하고 원나라 만만 태자를 맞으면서 원나라에 기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도 행패를 부리다가 병신정변 때 처참히 살해당한다.
-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배우 이대연이 연기했다. 악랄하지만 뭔가 심하게 모자란 간신배 연기를 맛깔나게 해냈다. 제1화부터 제29화까지 등장했으며 공민왕(정보석 분)의 지시를 받은 정세운(김명국 분)과 김용(윤철형 분)의 칼날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12]
- 2013년 MBC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기철이 등장하지 않고 간단하게 언급만 된다. 주인공이자 시대의 악녀인 기황후를 매우 영웅적인 인간으로 왜곡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여동생 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는 권신 기철의 존재는 기황후를 영웅적으로 왜곡하는 과정에 있어 심히 거치적거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제외시킨 듯하다.
- 대체역사소설 천룡전기에서 주인공 타사보르와 신하들의 대화에서 약간 언급된다. 권신일지언정 원나라로부터 고려의 국체만큼은 지키려한[13] 애국자로 권신으로서 저지른 잘못은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일족들이 저지른 패악질에 산 원한에 휘말려 죽은 거라며 정작 기철과 그 일족이 죽는데 큰 원인이 된 기사인티무르(기씨 일족 중에서도 특히 패악질이 심했다고 언급됨)는 멀쩡히 살아남으면서 기씨 일족을 숙청한 결과 공민왕은 원나라의 압박을 막아주던 방패를 스스로 내다버린 바보짓을 했다며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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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어로 '고귀한 소'라는 뜻이다. 《용비어천가》식 몽골어 음차를 참고하면 '바얀부개'나 '바얀보개'로 옮길 수 있다. 중세 국어에서 ㅐ는 '아이'에 가깝게 발음되었다.[2] 시조 기자로 치면 119대손. 중시조 기우성으로 치면 71대손이다. 물론 이는 족보상의 기록이라 고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사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3] 정확히는 둘째 아들로 장남은 기식이나 일찍 죽어서 기철이 실질적인 장남. 그 외에 기원(셋째)과 기주(넷째), 기윤(막내)이 있다.[4] 원래 메르키트 바얀은 철저한 몽골 지상주의자였다. 몽골인이 아닌 기황후를 황후로 삼을 수 없다며 데려온 인물이 몽골의 명문가 옹기라트씨 출신의 바얀후투그 황후였다. 그러나 바얀후투그가 1365년에 숨을 거둠으로써 기황후가 제1황후에 책봉되었다. 드라마 기황후에서도 묘사가 되어 있는데 드라마와는 전혀 달리 원 혜종을 압박해 책봉된 것이다.[5] 뒤에 경왕(敬王)으로 격상.[6] 봉호는 본관인 행주의 이칭인 덕양(현 고양시 덕양구)에서 따왔다.[7] 원나라 공주인 덕녕공주조차 기황후보다 권위가 약했기에 기철을 막아내기가 어려웠다.[8] 동생으로 기선재(奇善財)가 있었고 기삼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던 도감관(都監官) 서호(徐浩)에게 항의하였는데 기선재의 주장으로는 서호의 아내가 기삼만과 간통했기에 서호가 원한을 품고 기삼만을 죽인 것이라 하였고 서호는 이에 대해 기선재의 어머니의 신분이 낮다는 점을 이용해 간통은 비첩따위나 하는 거겠지!란 패드립을 날렸다. 이후 서호는 원에서 보낸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에게 곤장을 맞는다.[9] 동생 기원은 앞서 조일신의 난 때 살해되었다.[10] 기철의 아들인지는 불명이다.[11] 왕후의 아들.[12] 김용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 줄은 예상도 못했다는 듯이 김용에게 "지금까지 자네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 주지 않았느냐"라고 하다가 거꾸로 김용의 칼에 베여 쓰러진다.[13] 작중 충혜왕의 패륜막장짓에 경악한 황제 토곤티무르가 충혜왕을 폐한 후 고려를 영토로 편입하는 걸 고려하자 기철이 설득해 막았다고 언급된다.실제로는 그 반대로 기철은 충혜왕을 폐하고 4차 입성책동을 시도해 고려를 원나라에 흡수시키려 시도했으나 토곤티무르는 충혜왕은 폐해도 고려의 입성책동은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