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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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鼎
(? ~ 1063)
고려의 인물. 본관은 경주 김씨다.
덕종 3년(1034) 김경화, 박정고와 함께 감찰어사에 올랐고, 정종 때 우사낭중에 임명됐다. 정종 10년(1044) 여진족과의 경계인 장주, 정주, 원흥진 일대에서 주둔하다 적과 맞아 싸웠다. 당시 동북로병마사 참지정사 김영기, 예빈경 왕총지 등이 적(賊, 여진족)들의 땅인 장주 등에서 성을 쌓고 있었는데, 적들이 소요를 일으키며 공사를 방해할 것을 우려해 병마사는 휘하 병사들을 축성지 근처 요충지에 주둔하도록 했다. 실제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김원정은 이 때 공을 세워 포상을 받은 문무 관료 20인에 포함됐다.
문종 때 예빈경 동지중추원사(1049), 어사대부(1052), 동지중추원사(1052), 서북면병마사(1054),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1055)를 역임했다. 문종 10년(1056) 왕자 왕증의 국원후 책봉례가 끝난 뒤 시중 이자연, 상서좌복야 지맹 등과 함께 왕에게 불려가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참지정사로 있을 때인 문종 11년(1057) 5월, 동서 양계에 파병될 군민들에게 물품을 하사할 것을 제안했다. 양계의 군사들은 봉책사의 영접과 환송, 흥왕사 공사 동원 등으로 지치고 식량도 바닥난 상태였다. 김원정은 장병에게 봉책군의 예에 따라 포상할 것을 제안했고, 문종은 이를 수용해 시어사 진중(秦仲)에게 김원정이 아뢴 바대로 실행하게 했다.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승진했다.
한편 이즈음 유중경(庾仲卿)을 선발하는 문제에 있어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유중경은 공부상서 유규와 그 처 이씨의 아들인데, 유중경의 모 이씨는 본래 숙부와 생질간에 간통해 생긴 자식이었다. 문종은 유중경의 복잡한 가정사를 감안해 강등해 음직(蔭職)으로 등용하려 했는데, 식목도감사 문하시중 이자연은 유중경을 조정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원정 등 4명은 이씨들의 가정사는 유중경 부자와 관련이 없는 일이고, 유중경이 배향공신 유금필의 후예이기 때문에 등용을 막을 수는 없다고 변호했다. 태조 배향공신의 후손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서용해야 한다[1] 는 제서가 내려진 바 있었기에 김원정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문종 14년(1060) 수사도가 더해지고 문종 15년(1061)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 겸 태자태보에 올랐다. 문하시중까지는 이제 한 단계 남은 상황이었지만 서경의 일을 개경에서 맡아 처리하다 문종의 뜻을 거슬러 문종 16년(1062) 서경유수사로 좌천됐다. 서경에서 1년 조금 더 있다 문종 17년(1063) 개경으로 불려가 수태위 문하시중(종1품 재상)에 임명됐지만 곧 죽었다. 김원정 사후 한동안 왕의 부의 또는 관작 추증이 없었는데, 문종 20년(1066) 삼사에서 이를 언급한 뒤에야 부의와 추증이 이뤄졌고 별도로 곡식 130석이 내려졌다.
김원정의 딸은 서희의 손자 서정에게 시집가 서균을 낳았다.
金元鼎
(? ~ 1063)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본관은 경주 김씨다.
2. 생애[편집]
덕종 3년(1034) 김경화, 박정고와 함께 감찰어사에 올랐고, 정종 때 우사낭중에 임명됐다. 정종 10년(1044) 여진족과의 경계인 장주, 정주, 원흥진 일대에서 주둔하다 적과 맞아 싸웠다. 당시 동북로병마사 참지정사 김영기, 예빈경 왕총지 등이 적(賊, 여진족)들의 땅인 장주 등에서 성을 쌓고 있었는데, 적들이 소요를 일으키며 공사를 방해할 것을 우려해 병마사는 휘하 병사들을 축성지 근처 요충지에 주둔하도록 했다. 실제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김원정은 이 때 공을 세워 포상을 받은 문무 관료 20인에 포함됐다.
문종 때 예빈경 동지중추원사(1049), 어사대부(1052), 동지중추원사(1052), 서북면병마사(1054),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1055)를 역임했다. 문종 10년(1056) 왕자 왕증의 국원후 책봉례가 끝난 뒤 시중 이자연, 상서좌복야 지맹 등과 함께 왕에게 불려가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참지정사로 있을 때인 문종 11년(1057) 5월, 동서 양계에 파병될 군민들에게 물품을 하사할 것을 제안했다. 양계의 군사들은 봉책사의 영접과 환송, 흥왕사 공사 동원 등으로 지치고 식량도 바닥난 상태였다. 김원정은 장병에게 봉책군의 예에 따라 포상할 것을 제안했고, 문종은 이를 수용해 시어사 진중(秦仲)에게 김원정이 아뢴 바대로 실행하게 했다.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승진했다.
한편 이즈음 유중경(庾仲卿)을 선발하는 문제에 있어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유중경은 공부상서 유규와 그 처 이씨의 아들인데, 유중경의 모 이씨는 본래 숙부와 생질간에 간통해 생긴 자식이었다. 문종은 유중경의 복잡한 가정사를 감안해 강등해 음직(蔭職)으로 등용하려 했는데, 식목도감사 문하시중 이자연은 유중경을 조정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원정 등 4명은 이씨들의 가정사는 유중경 부자와 관련이 없는 일이고, 유중경이 배향공신 유금필의 후예이기 때문에 등용을 막을 수는 없다고 변호했다. 태조 배향공신의 후손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서용해야 한다[1] 는 제서가 내려진 바 있었기에 김원정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문종 14년(1060) 수사도가 더해지고 문종 15년(1061)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 겸 태자태보에 올랐다. 문하시중까지는 이제 한 단계 남은 상황이었지만 서경의 일을 개경에서 맡아 처리하다 문종의 뜻을 거슬러 문종 16년(1062) 서경유수사로 좌천됐다. 서경에서 1년 조금 더 있다 문종 17년(1063) 개경으로 불려가 수태위 문하시중(종1품 재상)에 임명됐지만 곧 죽었다. 김원정 사후 한동안 왕의 부의 또는 관작 추증이 없었는데, 문종 20년(1066) 삼사에서 이를 언급한 뒤에야 부의와 추증이 이뤄졌고 별도로 곡식 130석이 내려졌다.
3. 가족관계[편집]
김원정의 딸은 서희의 손자 서정에게 시집가 서균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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