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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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말기의 인물로 자는 자정(子靜), 호는 초려(草廬), 초옥자(草屋子)[1] 이며 동두(童頭)[2] 라는 자호(自號)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의 문신으로 권근, 이숭인과 친해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에는 동두설과 초옥가가, 이숭인의 문집인 도은집에는 후술하는 초옥자전으로 그를 소개하는 글이 남았을 뿐 다른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정몽주의 당여로서 사대부였으며 문벌 출신은 아니었다. 이인임이나 임견미같은 귄부와 인연이 없었던 덕에 아직 이성계, 정도전이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개혁하던 시절에는 행정 실무를 맡아 고려 조정에서 활약했다. 정몽주가 이성계, 정도전 등과 결별하자 그 역시 정몽주와 같은 길을 걸었다.
2. 생애[편집]
계림부 사람으로 성품이 곧고 의리가 강했다고 하며 어려서 고아가 됐으나, 공민왕 때인 1373년 6월에 응거시에 급제해 예문검열이 됐다. 10년도 안돼 중요 관직을 거쳤고 서해도안렴 등 외직을 거쳐 문하사인이 됐지만 고려의 폐단인 소위 문벌(門閥)의 뒷받침이 없어 고관대작에는 오르지 못했다.
공양왕 때인 1390년 4월 9일에는 좌사의에 임명됐다. 윤이·이초의 옥사 때 대역죄인으로 몰린 고려의 대신들이 무고를 당한 거라 말했다가 6월 29일에 파직됐으며, 11월 6일에 다시 등용되어 우산기상시가 되었다가 좌상시로 옮겼다. 민심의 이반을 염려한 이성계가 관련자들의 죄를 덮어줬기 때문이었다.
1392년 이성계의 낙마 사고를 틈타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때 선봉에 선다.
김진양은 조준, 정도전. 남은, 남재, 윤소종, 조박 등을 앞장서 탄핵하고,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에게 가서 이성계 일파를 모두 원지 유배하거나 처형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복귀하고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된 직후 정변 가담자들이 거꾸로 죄다 투옥돼 가혹한 고문을 당한다. 그도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죄를 자백하고 원지에 부처됐다가 곤장맞고 사망했다.
이숭인은 그를 위해 '초옥자전'을 짓고 추모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숭인 역시 장살당한다.
3. 대중 매체[편집]
정몽주의 선봉장이었지만 세간의 관심이 없었다가[3] KBS의 사극인 태종 이방원에서야 처음으로 대중 매체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담당 배우는 강봉성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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