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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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무신 집권자
이름
김인준(金仁俊) → 김준(金俊)
생몰연도
? ~ 1269년 1월 24일[1]
작위
익양군 개국백(翼陽郡 開國伯)
해양후(海陽侯)[2][3][4]
아내
안심(安心)
아들
김용재 → 김주, 김대재, 김석재, 김애, 김기, 김정
형제
김충(金忠)[5]
사망지
고려 강도 정궁 편전 정당(政堂)

1. 개요
2. 생애
2.1. 최씨 정권의 측근 심복
2.2. 무신정권의 집권자
3. 평가
4. 기타
5. 대중매체
5.1. 드라마 <무신>



1. 개요[편집]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제9대 집권자.

초명은 김인준(金仁俊)으로 그의 동생으로는 김승준[6]이 있었다. 무신정권 제4대 집권자였던 이의민과 함께 천민 출신으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최씨 정권의 측근 심복[편집]




그의 아버지인 김윤성(金允成)은 본래 가노였으나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에게 의탁했다. 김윤성의 아들인 그가 벼슬을 받아서 김씨 성을 사용하고, '김인준'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뒤에 '김준'으로 개명하게 된다. 박송비, 송길유 등이 최우에게 칭찬하여 그의 신임을 받아 전전승지(殿前承旨) 벼슬을 받았다고 하나 최우의 첩인 안심과 간통하여 곤장 50대를 맞고 유배되었다. 수 년만에 돌아와 최우가 최항을 후계자로 삼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최항이 정권을 이어받을 때 그는 직책이 정7품 별장이었다. 최항이 죽고 뒤를 이은 그의 서자 최의가 홀로 최양백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을 멀리하게 되자 마음 속으로 불평하면서 최의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1258년 1월 김준을 천거했던 대장군 송길유를 부정부패 혐의로 최의가 유배를 보내면서 김준을 꾸짖자 최의와 서로 미워하여 만나보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김준은 풍골(豊骨)이 늠름했으며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아랫사람에게 공손하였다. 또 궁술과 무예에 능했으며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해서 여러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고 날마다 호협(豪俠)스러운 청년 자제들과 교류하고 모여서 술을 마시었으므로 제 집에는 재산이라곤 없었다. 하루는 어떤 술수(術數)를 하는 중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뒷날에 반드시 국권(國權)을 틀어 쥘 것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김준 열전>


1258년 3월 신의군 도령 낭장 박희실, 지유 낭장 이연소가 비밀리에 김준, 류경, 김충, 이공주, 박송비, 도령 낭장 임연, 대정 박천식, 별장 동정 차송우, 낭장 김홍취, 김대재, 김용재, 김식재 등과 논의하여 4월 8일 최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김대재가 장인인 최양백에게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이 계획을 얘기하는 바람에 계획이 누설되었으며, 김대재의 처 최씨가 아버지 최양백이 최의에게 얘기한 사실을 듣고, 남편인 김대재에게 얘기하여 김준이 이를 김대재에게 듣게 되면서 다시 박희실, 이연소 등에게 일이 누설되어 일을 지체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이에 지난번에 모의한 자들과 별장 백영정, 대정 서정과 이제, 지유 조문주와 오수산 등을 소집하여 최의를 따르는 자를 공격했다. 지유 서균한 등을 불러 모아서 삼별초를 사청에 모으고, 사람을 시켜

'영공(최의)이 죽었다.'

고 길에서 부르짖게 하자 듣는 자들이 모두 모였고, 류경, 박송비 등이 오자 대신으로 위세와 명망이 있는 자들을 추대하여 군중을 통솔하라고 얘기했다. 추밀원사 최온을 부르면서 박성재를 맞이하여 이들과 의논했으며 최양백을 부르면서 별초병을 통해 최양백의 입을 횃불로 지지면서 이를 베었다. 최의의 문졸을 시켜서 밤의 시간을 알리는 기구인 '경주'를 알리지 못하게 하면서 대오를 광장에서 나누었고, 관솔을 태워서 낮과 같이 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안개가 끼었기 때문에 최의의 가병은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야별초들이 최의의 집으로 쳐들어가 집 벽을 무너뜨렸고, 외숙부 거성원발의 구출을 받아 도망가려던 최의를 찾아내서 죽이면서 실권을 잡게 되었다(무오정변).
무신 정권 기구
정치 기구
사병 기구
친위 겸 정규군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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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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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승 ~ 임연
최우 ~ 임유무
중방(重房)
교정도감(敎定都監)
교정도감 & 정방(政房) & 서방(書房)
도방(都房)
삼별초(三別抄)




2.2. 무신정권의 집권자[편집]


4월에 최의가 백성을 구휼치 아니했다고 하여 곡식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하고 인망으로 위로하여 고종(제23대)에게 청언하자 대장군이 되어 '위사공신'호(衛社功臣號)를 하사받았으며 우부승선이 되었다. 최의가 죽자 불만을 품은 권시, 권수균, 문황, 문광단, 문영단, 대정 최주, 녹사 유종식, 녹사 이수지, 교위 현군수 등이 7월에 김준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그들의 설득을 받던 김인문을 통해 사실을 전해받은 지유 백영정의 밀고로 알게되자 유종식을 체포했으나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또다시 문황 등이 김준을 죽이려고 일을 꾸미다가 유종식이 체포되어 국문된 사실을 알아챈 현군수가 이를 고하여 알게 되자 문황, 최주, 문광단, 문영단, 이수지를 죽이면서 권수균 부자와 유종식을 유배시켰으며, 문황, 이수균의 가산을 김인문과 현군수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들에게 점을 쳐 준 맹승 백량을 바다에 던져 죽이고 집을 몰살시켰다. 아내의 삼촌이 되는 환자 김인선이 고종의 총애를 받자 그를 참직에 임명할 것을 힘써 청하여 고종이 이를 제수하고자 했으나 후환이 될까 두려워하며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준이 정권을 잡은지 1개월만에 몽골 제국군자랄타이를 총사령관으로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대한 항전은 이전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1260년 고려의 제24대 국왕으로 원종이 정식으로 즉위하자 '추밀원 부사 어사대부 주국 태자빈객 익양군 개국백 식읍 1,000호, 식실봉 100호'를 받았으나, 몽골 제국의 명령을 거절하는 등 대몽 항쟁의 뜻을 보였는데 강화도를 떠나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을 파견해 조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삼별초의 난보다 10년 앞선 일이었다. 1261년 몽골이 원종을 불러 입조하게 하자 왕을 위하여 백고좌를 대관전에 열어 《인왕경》을 강론하니 왕이 그에게 '종자'의 작위를 하사하고, 교정별감[7]이 되어 국가의 비위를 규찰하게 했다. 1263년 '수태위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태자소사'가 되었으며, 이 해에 원종이 몽골에 행차하자 이를 감국하면서 왕이 머무는 집을 호위하고, 왕이 환국하자 후(侯)로 봉해지고 부(府)가 세워졌다.

하지만 김준은 정권을 잡고 나서 임금인 원종을 대놓고 무시하며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1265년 시중이 되고 해양후가 되었는데 충청도 안찰사인 변보에게 활 쏘는 사람을 모집할 것을 부탁했으나 그가 듣지 않자 왕께 아뢰어 그를 유배시키고 야별초 지유, 김혁정 등이 대신하게 했다. 4품 이상의 은을 차등있게 내게 하여 국고에 채우고, 부유한 백성의 금은을 사게 하면서 법이 가혹하여 백성들이 근심하고 이를 원망하였다. 불교 팔관회의 풍악을 아뢰는 날에는 잔치를 벌이기도 했는데 백성의 괴로움이 심한지라 이를 정지했다. 자신의 가신인 고이와 별감 문성주가 의탁하면서 백성을 박탈하여 어떤 이가 익명서를 어사대에 붙여 이를 호소했지만 그만두고 묻지 않았다. 1268년 3월 몽골의 황제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사신을 보내어 김준과 그의 아들, 동생을 오게 하자 장군 차송우의 말을 듣고 사신을 죽이자고 원종에게 아뢰었으나 원종이 반대하며 이를 듣지 않았다. 이런 행태에 온건적인 노선을 취하는 원종은 그를 매우 싫어했으며 김준은 몽골이 입조하지 않은 것을 책망할까 두려워하여 부처님께 공양했는데 11월에 용산 별감 이석이 선물을 두 배로 싣고 강에 정박하자 이를 빼앗아 야별초에게 나눠주자 원종이 이를 알게 되면서 원종은 그를 더욱 미워했다. 게다가 김준은 12월에 국자 학유인 홍유서가 몽골의 사신으로 동반하여 입조하자 김유와 함께 자신이 몰래 하는 일에 대해 고한 것을 신백천이라는 자에게 듣자 홍유서를 죽였다. 특히 김준은 가신들에게 전라도충청도를 관할하게 하여 취렴(醉斂)했으며 김준의 여러 아들이 이를 본받아 세도를 믿고 횡포를 부리니 원성이 매우 많았다. 또한 김준은 몽골 사신이 올 때마다 만약 힐난하면 죽일 것이라고 협박하며 말했다. 나중에 가면 김준은 원종과 계속 대립하고 갈등하게 되자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원종을 미워하며 그를 폐위할 생각을 가져 부하인 장군 차송우 및 동생 김충과 이를 의논했으나 그들이 무리라고 반대하면서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 양아들 임연이 김준의 아들과 토지 문제로 싸운 것과 임연의 처가 노비를 죽인 것을 알고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말하자 임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원종은 김준의 횡포를 더는 참을 수가 없어 그가 총애하는 낭장 강윤소와 이를 상의했는데 강윤소는 왕이 김준을 증오하는 것과 임연이 김준과 사이가 나쁜 것을 알고는 원종에게 임연과 합세하여 김준을 제거하자고 건의했고, 원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강윤소는 임연을 찾아가 이를 말했고 임연도 합세하면서 거사하여 김준은 이들에게 참수되었다(무진정변). 이때 김준의 암살 과정은 드라마틱한데 임연이 대정[8]을 만들어 선물로 속여 거사하기로 했으나 김준이 관아에 나오지 않자 거사를 미루었다. 다음날에도 김준이 등청하지 않자 원종이 명령하여 강제로 나오게 만들었다. 왕명으로 관아에 나온 김준이 조당에 나갔는데 편전 앞에 머무르고 있던 김준을 본 원종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태연하게 정당 안으로 끌어들였고, 사전에 매복하고 있었던 김상이 임연이 만들어 놓은 몽둥이로 급습하여 김준을 때리자 김준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그 다음엔 검을 빼들어 찔러 죽이며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때 죽은 연도가 집권 10년차인 1268년이었다. 사후 김준의 가족들과 가문 전체가 원종이 보낸 임연과 군사들에게 몰살되었고, 부하들도 전부 체포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3. 평가[편집]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던 60여 년 최씨 정권이 허무하게 붕괴된 후 의외로 10년씩이나 장기 집권을 해냈다. 무신들의 집권 기간만 따지자면 1위 최우 30년, 2위 최충헌 23년, 3위 이의민 13년에 이어 4위에 해당되는 긴 기간이다. 하지만 김준의 권력은 선대 무신 집권자들에 비해 약화되어 있었는데 이유는 그의 정권이 최의 살해 쿠데타(무오정변)에 동조한 소수의 공신[9] 세력에 의해 지탱되었기 때문이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왕정 복고와 개경 환도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최의를 제거한 후 바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에 동참한 김준 일가의 가병(家兵) 지휘관들, 신의군 출신 무관들,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출신 무관들, 응양군 상장군 박성재(朴成梓)의 양해를 얻은 후에야 간신히 무신 집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무오정변의 실질적인 주동자가 김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신 출신인 류경(柳璥)은 군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8개월간 틀어쥐었다.[10] 이후 류경 정권이 대몽 강화와 대몽 전쟁 지휘에 모두 실패한데다가 류경이 정방을 장악하여 인사권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여러 방법으로 재산을 크게 모아 거부(巨富)로서 처신하자 그제서야 김준, 김승준(金承俊), 임연(林衍) 등 김준 세력들이 류경을 탄핵하였고, 이들의 탄핵안을 심사숙고하던 고종이 최종적으로 수용한 결과 류경 정권이 1258년 11월 실각하고 비로소 김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준 정권은 앞선 최씨 세습정권과는 달리 무오정변을 통해 60여 년의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공신들의 집단지도체제의 성향이 짙었고, 김준은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에 가까운 형태였을 것이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11]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권력 강화를 목표로 동생 김충(金冲)을 비롯해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줄을 이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김준 정권을 지탱하고 있었던 소수의 공신들과 격렬한 충돌을 야기하여 무신정권이 공중분해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12] 임연임유무 부자의 집권 기간을 합쳐봐야 채 3년(1268~1270)이 안 된다는걸 감안하자면 실질적인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라는 점과 무신정권의 붕괴라는 시각에서 김준 정권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4. 기타[편집]


  • 2011년에 충청남도 태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대난파선 마도 3호선에서 김준에게 보내는 진상품과 이를 확인하는 죽간이 발견되어 생전 그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5. 대중매체[편집]



5.1. 드라마 <무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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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MBC 드라마이자 이환경 작가의 복귀작 <무신>에서는 배우 김주혁[13]이 연기했다. 사실 교육 과정에서 무신정권기를 공부할 때에도 크게 다뤄지는 인물은 아니라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인 인물이지만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아버지 김윤성이 만적의 난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설정되어 최씨 가문으로부터 도망친 도망 노비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는데, 갓난아기 때 아버지 김윤성이 그를 안고 양주목의 어느 절(축령사)로 피신했다가 김윤성은 얼마 안 되어 죽고 그 절의 주지승인 수법이 갓난아기였던 그를 거두어 승려로 키운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14] 그러다가 개경의 승병 반란[15]에 연관되어 끌려오면서 상국 합하 최충헌의 노예 신분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그러나 최우의 딸인 최송이의 눈에 들게 되고 그녀의 기지 덕에 사형(자자형)만은 면하고 공역장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다가 격구 대회에 참전해서 최우와 그 가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결국 격구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면서 우승하였고 고종이 하사한 어검(御劍)을 받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최우의 말에 여종 월아를 원래 있던 흥왕사의 수법스님께로 보내달라는 소원을 말했다. 그러나 월아는 무상스님 김준과 같이 안가면 떠나지 않겠다고 울면서 거절. 격구에서 우승하여 최씨 정권의 가병(소군장)이 되면서 최우의 부하가 되어 무인의 길을 가게 되었으며 그리고 격구 대회 때 자신을 지원해 준 최양백과도 같은 계급이 되면서 동무처럼 지내게 되었다.

이후 월아가 모종의 일[16]로 죽게 되고 송이와의 일에 연관되면서 최우의 조치로 미움을 사 변방으로 밀려나 10년 후 몽골군과 맞서던 상황에서 월아를 연상하게 하는 안심[17]을 만나게 되고 강도로 올라오면서 최우의 총애를 받는데 송이가 자신과 관련해 김약선과 관계 악화 일로로 가게 되면서 당사자들이 불행하게 희생되자 자책하게 되고 최우의 명으로 최항을 선택해 강화도로 데리고 오지만 최우 사후 최항이 멋대로 자기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불러 고문하거나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것과 아버지 최우가 거두고 정을 통했던 기녀들을 긍간하고 겁탈하는 등 사회에 곪먹는 정책을 취하자 그를 죽게 만들고 의견차가 심하게 된 최양백, 최항의 아들 최의를 척결하고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만 원종, 대신들과의 반목을 자초해 결국 이장용에게 설득된 자신의 양아들 임연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끝까지 살아남고 우승해서 황제폐하로부터 받은 그 어검으로 살해당한다.

김준에 대한 미화가 너무 심하다는 비판과 지적이 많은데 퓨전 사극이라는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김준이라는 인물의 왜곡 때문이었으며 여몽전쟁 당시 김준이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건 작중의 창작 설정일 뿐이고[18] 강화도 천도나 《팔만대장경》 제조 같은 일에 관여되었다는 부분 또한 그 어떠한 기록도 없다. 오직 최우에게 총애를 받았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강화천도의 경우 이 케이스는 전적으로 최우가 선택하고 결정하여 추진한 것으로 누구의 의견을 묻거나 수렴한 것도 아니다. 극 전개 과정상 김준을 주인공으로 움직이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였을 것이나 너무 무리한 설정이었다는 지적이 나왔던 상황.

그리고 그가 최씨 정권의 하수인이던 시절은 상당히 길게 다루면서, 정작 최씨 정권을 끝내고 직접 최고 통치자에 오른 후의 10년간의 집권 기간이 극중에서 너무 짧게 다뤄진 것도 비판인데 단순히 연도 수로 계산한다면 그의 집권 기간은 3위 이의민의 13년 바로 다음인 10년으로서 최항의 8년 집권보다 오히려 더 길다.

김준 다음의 임연, 임유무 부자의 집권 기간을 합쳐도 채 3년이 안된다는 걸 감안하자면 실질적인 무신 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이고 60년 최씨 정권이 붕괴된 후 선대의 무신 집정자들에 비해 김준 정권은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소수의 공신들에 의해 운영되어 무신 정권의 힘이 서서히 빠져 나가는 10년 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꽤나 아쉬운 일이다.[19]

특히 김준의 뻘짓이 본격적으로 다루어 지는 것 또한 이 10년의 기간인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김준은 단순히 몽골과의 전쟁만을 주장하다가 왕당파 및 임연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김준 자신의 권력전횡과 타락, 친인척의 부정부패와 임연의 부정부패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여져 임연에게 상황을 매의 눈으로 보고 있던 원종이 왕명으로 김준을 살해하라고 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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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268년 12월 21일.[2] 근본이 노비였으므로 본관이 없었지만, 집권 후 해양군 작위를 받았으므로 본인이 '해양 김씨'를 창본했다고 봐도 좋다는 의견이 있다.[3] 김준 일가가 광* 김씨라는 설이 있다.[4] 김준의 사촌, 당질 등은 어머니 성(姓)으로 바꿔 종적을 감췄다.[5] 형이 개명할 때 같이 개명했다. 원래 이름은 김승준(金承俊)이었다.[6] 金承俊, 후에 김충으로 개명.[7] 국가의 정책과 국정을 아울러서 통치하는 무신정권 최고 기구인 교정도감 수장.[8] 大梃: 큰 몽둥이.[9] 류경(柳璥), 박송비(朴松庇), 송길유(宋吉儒), 임연(林衍) 등.[10] 하지만 그는 문신이기 때문에 무신 집권자에 포함시키지는 않고, 대체로 김준 집권기의 권력자로 포함된다.[11] 김준이 권력을 차지한 이후에는 선대 무신 집권자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왕의 입조 또한 함부로 막지 못했는데 김준이 대몽 항전 노선을 걸으면서도 원종의 입조를 막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얼마나 축소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12] 결국 이러한 혼란상 속에 김준의 양자를 자처하고 있던 임연이 김준의 아들과 재물을 놓고 문제가 생겼는데 김준이 아들의 입장만을 옹호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임연은 마침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원종이 왕명이라며 김준을 처단하라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자 지체없이 양아버지 김준을 배신하고 처참하게 목숨을 빼앗아버렸다. 이 때 동생 김충도 살해되었고 김준의 아들 김주(金柱)가 저항했으나 삼별초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3] 일본어 더빙판 성우는 탄자와 테루유키.[14] 이 드라마 설정대로라면 만적의 난이 1198년의 일이었으니 김준은 1198년 내지 1199년생으로 추정된다.[15]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1217년에 있었다.[16] 최우의 서장자 만종의 겁탈로 월아가 정절을 잃자 비상이라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일[17] 실제로 월아와 안심을 같은 배우(홍아름)가 맡았다.[18] 오히려 임연이 몽골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19] 원종의 몽고 입조 장면의 경우, 바로 이것을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이다. 김준은 몽고와의 전쟁이 곧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종의 원나라 입조를 막지 못했는데 선대 무신 집정자들에 미루어 보면 그의 권력이 얼마나 축소 되어있었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며 그럼에도 이 부분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