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전지
덤프버전 :
朴全之
(1250 ~ 1325)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시호는 문광(文匡).
2. 생애[편집]
미처 20세가 되기도 전에 과거에 급제했고 사한(史翰)직에 올랐다. 충렬왕 5년(1276) 원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고 정동행성도사에 임명됐다. 고려에 귀국한 뒤에는 충렬왕으로부터 이부, 병부의 시랑직을 제안받았으나 높은 벼슬을 맡기에는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사양했다. 안동에 수령으로 나갔다가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충렬왕이 소환해 전중윤 지제교에 임명됐고 충렬왕 6년(1277) 세자 충선왕의 시강(侍講)을 맡아 세자를 보도(輔導, 올바른 길로 인도)했다. 세자가 인질로 원에 보내졌을 때도 곁에서 따르며 궂은 일을 도맡아 했으니, 박전지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은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1298년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물러나자 임금을 곁에서 모신 박전지는 최참, 오한경, 이진 등과 학사에 임명돼 인사 전반을 처리했다. 다른 학사들과 즉위 교서를 짓고 비단 등 여러 옷감과 말을 받았으며, 오한경, 이진[1] , 권부와 함께 홍정(紅鞓)을 받기도 했다. 충선왕은 학사들이 있는 사림원에 날마다 행차해 직접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정치를 논의했다. 한밤중까지 함께하다 헤어지게 되면 궁궐에서 쓰는 촛불을 하사해 안전하게 집에 돌아가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박전지는 7월에 삼사좌사 사림학사승지, 8월에 밀직부사 중경유수에 임명됐다.
충선왕이 폐위되자 충선왕의 인물인 박전지 역시 참소를 당해 파직됐다. 충렬왕 33년(1307) 3월 충선왕이 판비서서사 권수밀직부사에 임명했고, 충선왕이 복위한 뒤에는 다시 내전에 출입할 정도로 가까운 신하가 됐다. 하루는 충선왕이 내전으로 박전지를 불러 장남 광평군과 차남 강릉군 두 왕자 중 누가 더 왕위에 적합한지를 물었다. 박전지는 대답을 사양하다 결국 차남 강릉군이 더 왕위에 적합하다고 말했는데, 세자가 됐던 장남은 불과 몇 개월 뒤 충선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차남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박전지의 예견은 현실로 이뤄졌다.
1316년 연흥군에 봉해졌고, 충숙왕 8년(1321) 수첨의찬성사로 은퇴했다. 충숙왕 때 심왕 왕고와 고려 내 심왕 파벌들이 왕을 압박한 일이 있었다. 심왕파는 충숙왕에게 죄가 있다고 무고하는 글을 원 중서성에 보내려고 했고 박전지에게도 서명하라고 압박했다. 박전지는
라고 분연히 말하고는 아들 박원을 원에 있는 충숙왕에게 보내 소식을 전했다. 귀국한 충숙왕은 박전지에게 고마워하며 벼슬을 제안했는데, 박전지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했다. 따라서 대신 정승에 임명한 뒤 은퇴하도록 한 것이며,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호를 내리고 은퇴 전과 같은 녹봉을 받게 했다. 충숙왕 12년(1325), 76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시호를 받았다.개놈들이 감히 나를 더럽히려고 하느냐?[2]
3. 평가[편집]
(박전지는) 사람을 대할 때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나, 일을 당하면 강직함이나 과감함이 없었다.[3]
『고려사』 권109, 박전지 열전.
4. 가족관계[편집]
박전지는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박휘(朴輝)와 문하시중 이장용의 딸 이씨[4]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 이장용은 딸 이씨 부부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집안을 잘 다스릴 것이니, 잘 기르도록 하거라."[5] 라고 말할 정도로 박전지를 아꼈다. 박전지가 면학(勉學)하는 바람직한 청년으로 자란 뒤에는, 인천 이씨 가문에서 내려오는 귀중한 서적들을 전해주기도 했다.
조정대부 위위경 동궁시독학사 지제고(朝靖大夫 衛尉卿 東宮侍讀學士 知制誥) 최염(崔恬)의 딸 최씨와 혼인해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생전 칭호는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으로 박전지보다 먼저 사망해 이후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부: 박휘(朴輝)
- 모: 경원군대부인(慶源郡大夫人) 이씨(이장용의 딸)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0:29:18에 나무위키 박전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