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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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문종의 왕자.
휘는 비(㶨). 작위는 금관후(金官侯)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봉지인 금관(金官)은 금관국을 가리킨다.
2. 생애[편집]
문종과 인예왕후의 일곱번째 아들이다. 금관후는 학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문종 31년인 1077년 조선후와 계림후가 공작으로 관작이 오를 때 처음으로 '특진 검교사공 상주국 금관후(特進 檢校司空 上柱國 金官侯)'의 작위와 식읍 1천호를 하사 받았다.
선종 3년인 1086년 2월 왕인 선종의 결정으로 동복누이 적경궁주(積慶宮主)가 이복형제 부여공과 결혼하게 되는데, 금관후는 변한후 왕음,[1] 진한공 왕유[2] 와 함께 이를 반대한다. 금관후 등은 형인 선종에게 같은 성씨에게 장가들 수는 없다고 간언하지만 선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달 선종이 형제들의 관작을 올리니 '검교상서령 수사도(檢校尙書令 守司徒)'의 작위와 식읍 2천호를 하사 받았다.
선종 5년인 1088년 선종이 원자에게 '욱(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모후인 인예왕후를 모시고 수춘궁에서 잔치를 여는데, 이 때 참석한 선종의 형제 삼공(三公: 조선공, 계림공, 상안공)과 이후(二候: 부여후, 금관후) 중 한 사람이다.
선종 9년인 1092년 4월 14일에 사망하자 '수태위 겸 중서령(守太尉 兼中書令)'에 추증되고 식읍 3천호, 식실봉 5백호를 하사 받았다. 후사없이 사망하자, 마찬가지로 후사없이 사망한 장순후(章順侯)[3] 의 예를 따라 불교방식으로 화장된다. 선종은 동생인 금관후를 '길지(吉地)에 장사지내고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라' 했으나 장례를 맡은 관청에서 불가하다 아뢰어 행해지지 않았다.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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