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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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金敦中
1119년 ~ 1170년
고려 중기의 문신. 그의 아버지는 삼국사기로 유명한 김부식이다.
의종, 한뢰와 함께 무신정변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인물이다.[1]
2. 생애[편집]
1144년, 섣달그믐 밤, 나례[2] 가 벌어지던 도중 내시[3] 였던 김돈중이 견룡대정 정중부에게 촛불을 들이대 오랜 시간 공들여 관리한 그의 수염을 장난 삼아 태워버렸다. 당시 문신들이 무신들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정중부는 바로 노발대발하며 김돈중에게 욕설을 퍼붓고 때렸는데,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 김부식은 아들을 혼내거나 정중부에게 사과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가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불같이 화내며 정중부를 처벌하라고 인종에게 대놓고 요구했다.[4] 정중부를 아꼈던 인종이 몰래 그가 도망칠 수 있도록 배려해서 흐지부지 되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정중부는 김부식 일가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된다.
1167년에, 고려판 오발사건이 일어나면서 김돈중은 아예 무신 전체의 증오 대상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놀고 먹기를 매우 좋아하던 의종 임금은 신하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노는 걸 좋아했는데, 이런 외유 중에 김돈중의 실수로 무신 한 사람의 말과 그의 말이 부딪히면서 그 무신의 화살통에 있던 화살이 튕겨나갔는데, 하필 의종 앞에 꽂히는 일이 벌어진다. 의종은 저격수의 암살미수인 걸로 오해한 채 사색이 되어 범인을 찾았고, 일이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걸 안 김돈중이 자기 산답시고 무신 여럿을 희생양으로 삼아 결국 무신 몇몇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무신들과 김돈중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5]
하지만 한편으론 “아침부터 밤까지 호종하는 군사들이 모두 굶주리고 피곤해 하는데 주상께서는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밤 또한 어두운데 무슨 구경할 것이 있어 여기에 오래 머무르십니까?”라는 직언을 올리는 나름 신하다운 모습도 보였다.
이즈음 김돈중은 지공거를 여러 번 맡으며 인재를 선발했다. 고려사에서는 1167년 민식(閔湜)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승장묘지명에 따르면 김돈중의 문생 이승장이 다음해인 1168년 진사시에 급제했다.
이후 1170년 8월 수염 방화사건의 피해자인 정중부는 사건이 발생하고 26년 만에 다른 무신들과 합심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6] 이것이 바로 무신정변으로 보현원에 있는 문신들이 학살당하는 과정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고 이 때문에 정변 소식이 개경에 알려져 태자가 진압군을 편성해 쳐들어올거라 여긴 정변주동자들이 자살이나 망명까지 생각할 정도로 긴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 김돈중에겐 진압 병력도 없었고, 그에게 협력해줄 지휘관도 없었다. 사실 응양군과 용호군의 2군이 정변의 주축이었고, 또 다른 중앙군 조직인 6위의 지휘관들은 적극적으로 반란에 동참하진 않았지만 진압에 나서지도 않은채 관망하는 형세를 취했다. 게다가 병부 1인자인 병부상서 조위총은 서경유수까지 겸한채 서경에 있었고 병부 2인자인 병부시랑 조동희는 서해도(황해도)에 출장가 있었다.
이러니 6위의 협력을 받을 수 없고, 병부 1,2인자가 모두 부재한 상황에서 김돈중에게 전세를 뒤집을 카드를 쥐고도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합당한지 의문이다. 오히려 보현원 사건이 고려사의 묘사처럼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조위총과 조동희의 부재와 6위 지휘관들의 비협조를 노린 철저히 계획된 반란이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김돈중은 일시에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니는 신세로 전락했고, 감악산에서 농성[7] 하기도 했으나 결국 상금을 노린 종자의 밀고로 인해 붙잡혔다. 직후 동생 김돈시와 함께 처형되어 죽었고[8] , 이미 죽은 김부식 역시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래도 김돈중은 뒤늦게나마 반성을 하긴 했는지 "다만 화살 때문에 일어난 소동 당시 재앙이 죄 없는 사람에게 미쳤으니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된 것도 마땅한 일이다.”라며 죽음을 맞았다.
그가 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가장 지지받는 건, 무신 따위에게 그런 수염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태웠다는 설. 엣날에는 수염이 남성미의 기준이었는데, 김돈중은 수염이 고르지 못해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추천으로 뽑힌 사람에 대한 반감이 큰 탓이란 설도 있다.[9] 비록 과거시험에서 순위조작을 했긴하나 그래도 차석으로 합격했고, 더욱이 본인 스스로 음서나 추천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추천으로 뽑힌 정중부를 김돈중이 내심 못마땅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무과는 커녕 무학재조차 없애게 한 것이 당시 문신들이었고, 본시 징발되었다가 운 좋게 추천받아서 그 자리에 오른 정중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승자박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사에선 열전에 실렸는데 군주에게 직언을 했다는 점이나 죽기 전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을 했다는 것도 있지만, 사실 그를 살해한 장본인들인 이의방과 정중부가 워낙에 막장에, 살인을 비롯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보니, 김돈중을 폐행 또는 간신 열전에 올리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에 이 모든 것의 최종 책임은 의종에게 있기도 하다.
아들로는 김군수가 있는데 그는 김돈중 사후에도 살아남아 나중에 장원급제하고 예부시랑이 되어 대요수국의 난때 전공을 세워 재기에 성공한다. 그러나 김군수는 의주 별장인 한순과 다지의 반란때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으나 상관인 병마사 김취려를 무시하는 월권행위를 저질러서 이로 인해 탄핵을 받아 귀양가게 된다.
3. 기타[편집]
- 일부 어린이용 역사 학습만화 같은 책에서는 김부식의 '아들'이라는 말 때문에 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김돈중을 어린아이로 그린 경우도 있었는데 이 일은 엄연히 군주 아래서 신하로 일할만큼 이미 다 큰 어른이 저지른 짓이었다.[10]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 수염 방화 사건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아무리 봐도 다 큰 성인이 할 짓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얘기도 된다. 다만 <고려사>에 보면 당시 김돈중을 연소기예(年少氣銳: 나이가 어리고 기운이 팔팔함.)하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젊은 나이에 벼슬에 나왔거나 해서 한창 혈기왕성한 때이기는 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니, 대략 20대 초중반 정도의 젊은 나이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이러면 철없는 명문가 도련님 출신 청년이 치기 어린 장난을 저지른 것도 이해가 갈만한 나이이니 말이다.
- 2019년 한강 몸통시신 사건의 피의자 장대호가 본인의 복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자들 앞에서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장난삼아 태워 원한을 산 계기로 무신정변이 일어난 것을 언급했다. 관련 기사.
4.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돈중(무인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대체역사소설 <왕조의 아침>에서는 중반까지의 주인공과의 동맹이었다가 주인공이 군주의 부마로 오르게 된 밤정 이후부터는 적대 관계가 시작. 주인공의 지역으로 진격하여 몰살시키려다 실제 역사의 곽재우가 활약한 지역에서 신립이 전사한 상황과 유사하게 주인공이 키운 군대에 몰살당하고 잡혀져 교수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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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부식도 무신정변이 일어나는데 큰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있다. 다만 무신정변이 일어난 1170년에는 이미 사망해서 그의 책임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2]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의 일종.[3]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게, 고려시대에서 내시는 생식능력을 상실한 환관이 아니라 군주의 최측근 관료로서 정상적인 생식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4] 물론 정중부가 김돈중을 패면서 욕설을 날린 것은 과잉대응으로 볼 여지가 있고, 자식이 맞고 왔는데 가만히 있는 게 부모의 도리는 아니다. 하지만 김부식의 김돈중 처벌 요구가 문제시되는 이유는 김부식이 김돈중의 잘못이 아니라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린 것만을 부각해 처벌하라고 요구했기 때문.[5] 여담으로 이때 누명을 씌운 군대가 군주의 호위군인 순검군과 견룡군이었는데, 이들이 나중에 무신정변의 시초가 되는 보현원 사건의 핵심이었다.[6] 트리거는 수박 대결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패하자 한뢰가 그를 비웃으며 뺨을 친 것. 물론 이전에 무신들은 이미 쿠데타를 준비했지만 이녀석의 헛짓거리가 도화선이 된 것은 틀림없다.[7] 감악산은 고려의 수도권을 유지하는 두 개의 젖줄인 예성강 수계와 임진강 수계 중 임진강 수계의 중앙에 자리한 요충지로, 삼국시대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이곳을 두고 격전이 벌어졌다. 고려는 성종 14년 수도권을 확대, 개편하면서 개성부를 설치하고 개경에 인접한 적현 지역과 외곽의 기현 지역으로 개편했는데 이때 감악산은 기현 지역에 편입되어 고려 수도권 동남쪽의 요충지가 되었다. 이곳은 남경과 개경의 중간지점으로 송악산, 북한산, 소요산 일대까지 전부 감제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는 절과 병영을 두어 방비를 했다. 즉, 김돈중은 무작정 달아난 게 아니라 진압부대가 없는 상황에서 수도권 외곽의 병영으로 향했다고 보는 게 옳다.[8] 목과 사지가 잘려서 끔찍하게 죽었고 무신들은 김돈중의 목과 사지를 아예 저자 거리에다가 전시해놓았다.[9] 오늘날에도 회사에서 정식 입사한 사람들이 특채로 직장에 채용된 사람을 못마땅하게 보거나 입시 때 정시로 들어온 학생들이 수시로 들어온 학생들이나 편입으로 들어온 학생을 공공연히 차별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오늘날의 이런 건 무임승차 혐오의 논리도 많이 작용하지만.[10] 김돈중의 아버지인 김부식의 나이가 정중부보다 한참 연상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