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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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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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하시중

조선 판문하부사
청성백(靑城伯) 정안공(定安公)
심덕부
沈德符

출생
1328년(충숙왕 15)
사망
1401년 2월 6일[1] (향년 72 ~ 73세)
(음력 태종 1년 1월 14일)
봉호
청성백(靑城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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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1386년(우왕 12)
청성군 충의백(靑城郡忠義伯)1389년(공양왕 1)
청성백(靑城伯)1393년(태조 2)

시호
정안(定安)
본관
청송 심씨

득지(得之)

노당(蘆堂), 허당(虛堂)
공훈
충근양절익찬좌명공신(忠勤亮節翊贊佐命功臣)
안사공신(安社功臣)
부모
부친 - 심용(沈龍)
모친 - 김씨(金氏)
부인
초취 -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청주 송씨
재취 - 인천 문씨(仁川門氏) 문필대(門必大)의 딸
자녀
장남 - 심인봉(沈仁鳳) 송씨 소생
차남 - 심의귀(沈義龜) 송씨 소생
3남 - 심계년(沈繼年) 송씨 소생
4남 - 심징(沈澄, ? ~ 1432) 문씨 소생
5남 - 청천부원군 심온[2] 문씨 소생
6남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 ? ~ 1418)[3] 문씨 소생
7남 - 심정(沈泟, ? ~ 1418) 문씨 소생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관료로 고려재상, 조선정승이다.


2. 생애[편집]


유력 가문인 덕에 음서로 관직 경력을 시작하고 고려 말 문하시랑찬성사, 문하시중, 판문하부사 등을 역임한 재신(宰臣)이다. 진포해전위화도 회군에 참여했으며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한 흥국사 9공신 중 한 명이다. 조선 건국 후 회군공신 1등에 봉해졌다. 한양 천도를 결정한 뒤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 직에 올라서 궁궐(경복궁)과 종묘의 건립을 지휘했다. 이후에 판문하부사, 영삼사사를 역임하고 정종좌정승을 역임한다.

사극에서 비중이 없어 대중에게 심온의 아버지 정도로나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여말선초에 손꼽히는 거물이었다. 위화도 회군조민수, 이성계 바로 뒤의 3인자였으며 고려 군부에서 최영과 이성계 다음가는 존재감을 지녔다. 흥국사 9공신으로서의 작위에서도 이성계와 더불어 둘뿐인 백작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이었다. 여기에 동생 심원부가 이제현의 제자로 신흥 유신쪽에도 인맥이 풍부했기에 고려말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 그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 전후로 공양왕과 이성계 사이에서 간 보는 행적을 보임에도 급진파 세력은 변안열처럼 심덕부를 제거하지 못하고 윤이·이초의 옥사에 엮어 겨우 3개월 유배를 보내는 데 그쳤다. 공양왕 측에서도 그를 문하시중에 임명하며 끌어들이려 애썼고, 세자 왕석의 명나라 입조에 동행시킬 만큼 신뢰했다. 이성계조차 그런 그를 못 건드려서 조선 개국 후 자신의 둘째 딸 경선공주와 심덕부의 6남 심종을 혼인시켜 심덕부를 회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째 아들 심인봉이 군부 1인자인 의흥삼군부 도총제 직을 역임했고, 4남 심징이 경창부윤, 6남 심종이 이성계의 사위, 7남 심정이 공양왕의 동생 정양군 왕우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심종이 귀양간 회안대군과 은밀한 모의를 해도 조선에서는 심종을 죽이지 못하고 귀양 보내는 선에서 심종의 모든 죄상을 덮어줬고, 심정이 양녕대군에게 매를 바치는 등 그의 비행을 부추겼음에도 심정이 군부 중심으로 다진 막강한 입지를 무시할 수가 없어 심정을 동지총제까지 올렸다. 화룡점정은 다섯째 아들인 심온으로, 소헌왕후의 아버지, 즉 세종의 장인이 되었다.

이처럼 심덕부 대에 청송 심씨 가문은 강력한 권세와 거대한 군맥을 형성했으나, 이들의 세력은 외척에 대한 태종의 경계심을 키우는 요인이 되어 후일 심온 등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숙청되고 만다.


3.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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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월 28일.[2] 세종의 국구(國舅)로 소헌왕후의 아버지.[3] 태조의 3녀 경선공주의 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