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제도

최근 편집일시 :




파일:external/www.gwageo.com/c5a9b1e2baafc8af_12b0fab0c5bdc3c7e8.jpg

제18회 과거시험 재현행사

1. 개요
2. 역사
2.1. 고려 이전
2.4. 시험 과정
2.5. 개방성과 폐쇄성의 양면
2.6. 종류
2.6.1. 문과
2.6.1.1. 소과
2.6.1.2. 대과
2.6.1.2.1. 초시
2.6.1.2.2. 복시
2.6.1.2.3. 전시
2.6.2. 무과
2.6.2.1. 초시
2.6.2.2. 복시
2.6.2.3. 전시
2.6.3. 잡과
2.6.3.1. 이과, 이문과
2.6.3.2. 역과
2.6.3.3. 의과
2.6.3.4. 음양과
2.6.3.5. 율과
2.6.3.6. 부정기과
2.7. 조선시대 성씨별 과거 합격자 수
3. 부정 행위
4. 평가
4.1. 장점
4.2. 단점
5. 세계의 과거 제도
5.1. 중국
5.2. 일본
5.3. 베트남
5.4. 근대 서구 및 현대 제도에 미친 영향
6. 관련된 표현
7. 관련 문서
7.1. 문과
7.2. 무과
7.3. 잡과




1. 개요[편집]


옛날의 학자는 벼슬을 구한 것이 아니고 학문이 이루어지면 윗사람이 천거하여 등용되었으며, 대개 벼슬을 한 사람은 남을 위했고 자신를 위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가 않고 과거로 사람을 뽑으니, 비록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는 학문이 있고 남보다 썩 뛰어난 행실이 있다 할지라도 과거가 아니면 도를 행할 자리로 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그 아들을 가르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는 것이 과거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 선비가 벼슬을 탐내는 풍습은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지금 선비된 사람들은 많이들 부모의 희망과 문중의 계책을 위하여 과거 공부에 힘쓰는 일을 벗어날 수 없으나, 또한 마땅히 그 재능을 갈고 닦아서 그 때를 기다리고 성공과 실패를 천명에 맡길 일이지, 벼슬을 탐내어 조급하고 열중하여 이것으로써 그 뜻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이이, 《격몽요결》 <처세장> 맨 앞 부분. '처세장' 자체가 과거 제도하에서 선비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술이다.


지금 국가에서는 시속의 글솜씨로 인재를 뽑고 있다. 각종 이권과 녹봉이 이것에 달렸고, 성공과 명예가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 길이 아니면 더불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박제가, <과거 제도에 대하여>에서


과거 제도( )는 중국 수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제도로 세습 귀족이 아닌 사족(士族) 지식인의 등용을 위해 실시된 제도이다. 중국 왕조에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최초로 시행되었다. 베트남에선 리 왕조응우옌 왕조시기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일시적, 제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자세한 정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서 얻을 수 있다.


2. 역사[편집]



2.1. 고려 이전[편집]


과거제도 이전 고대 한국에서 인재를 뽑을 때는 귀족 등 신분을 대대로 세습하거나, 잘 아는 사람을 추천하고 추천자가 일종의 보증을 서는 천거 방식을 이용했다. 신라화랑제도 역시 보통 청소년 수련 단체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랑의 매력으로 인재를 모으고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의 공동생활로 결속력을 다지고 교육해 그 중에서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문무관직에 부임시키는 역할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교 지식에 대한 시험을 치러 관리를 등용한 제도는 신라의 독서삼품과이다. 이때의 시험은 전적으로 시험 결과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 등용에 성적을 단지 참고하는 형식이었기에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를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식 과거제도는 고려 4대 왕 광종 때 들어왔다.

신라에서 골품제의 벽에 막힌 6두품 이하는 독서삼품과를 통해도 출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외국인 전형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나라 유학생과 거기에 딸린 인력은 일종의 코리아타운신라방의 구성원이었다. 당나라에서 공부했거나 빈공과에 급제한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귀국해서도 적어도 태수 자리는 보장되었다.

발해의 과거제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당나라의 빈공과에는 발해 지식인들도 많이 응시했고, 당연히 신라 학생들과는 상당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빈공과 수석은 주로 신라 학생들이 차지하다가 한 번 발해의 오소도(烏炤度)가 신라의 이동(李同)을 누르고 수석을 차지한 적이 있었는데, 신라 유학생들의 대선배였던 최치원이 '국가적인 굴욕이다'이라고 깠을 정도였다.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나중에 당나라 빈공과에 응시했는데, 이번엔 신라의 최언위가 오광찬보다 등수가 높았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가 오광찬의 등수를 최언위보다 높여줄 것을 당나라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하기도 했다.


2.2. 고려[편집]


고려의 과거 제도
문과
제술과

관료
명경과
음서

잡과

기술자
승과
교종선

승관
선종선
광종이 영입한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에 따라 958년(광종 9년)에 처음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중국 귀화인들이 주로 지공거를 맡았다. 쌍기도 첫 지공거(시험 감독)를 역임했다.

고려시대에는 제술과, 명경과, 잡과가 있었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글짓기, 현대의 논술)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이었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이었다. 제술과는 정책과 관련된 시무책보다는 문학적 재능을 더 중시했고 암기보다는 지식을 이용한 창작을 중요시했기에, 제술과에서 뽑는 인원이 명경과보다 훨씬 많았고 대우도 제술과가 명경과보다 더 좋았다. 쉽게 말해 제술과에서는 '(어떤 정책이나 사상에 대해) 논어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오며 주자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내 생각은 이렇고 이런 정책이다.' 라면 명경과에서는 '~한 경전에서는 이렇다.'라는 것이 시험 내용이었다.

물론 양인들도 과거로 등용될 수 있었지만 자급자족하기엔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현대에도 공무원 시험 치른다고 몇 년간 부모님들이 뒷바라지해주는(특히 돈) 사례가 많다. 물론 또다른 비교 대상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말할 것도 없다. 옛날에는 멀쩡한 청년 한 명이 농사일을 하지 않고 골방에서 책과 씨름하게 되면 기회비용이 매우 컸기에 어지간한 각오와 재력이 없는 이상 과거에 도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노동력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 성인 남성 하나가 농사일을 안하고 앉아서 언제 합격할지도 모르는 공부만 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손해다. 따라서 응시자의 대부분은 중류층의 향리나 귀족이었고, 이들은 대개 진짜 과거라고 볼 수 있는 문과에 응시했다. 양인들은 대부분 그나마 만만한 기술 쪽 잡과로 몰렸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다음과 같이 총 3가지 단계로 구성된 삼장제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문과의 2단계 소과, 3단계 대과에 영향을 주었다.

  • 향시(계수관시) - 1차시험. 개경이면 상공, 지방이면 향공, 외국인이 대상이면 빈공[1]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향공의 숫자를 제한하게 하는 시험관이 주요 지역의 지방 수령들인 계수관이었기 때문에 계수관시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문과의 경우 향공진사에 대해서 신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상층향리인 2등급 부호장 이상의 손자 혹은 5품인 부호정 이상의 아들 가운데 1명에게만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해석이 복잡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혹은 중국의 그것과 같다는 보장이 없다.

  • 국자감시(사마시) - 2차시험. 상공과 향공 합격자, 3년 동안 300일 이상 근무한 현직관리와 12공도생만이 응시가능한 시험이다. 고려시대 학교 국자감을 수료 완료하고 졸업했을 시 일종의 장학생 특전으로 바로 2단계인 국자감시를 볼 수 있게 해줬다. 일명 사마진사과로, 여기에 합격하면 진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쪽도 다른 해석이 있다. 즉, 국자감시는 2차 시험이 아니라 국자감 입학자격 시험이고, 국자감을 졸업해야 진짜 과거시험인 예부시 자격이 주어졌다는 학설이다.

  • 예부시(동당시) - 3차시험. 일명 동당감시라고 부르며, 여기서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된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자제들이 바로 시험을 보러 오기도 했지만, 덕종 시기에 국자감시가 생기면서 이런 직행코스는 사라지게 된다. 예부시에서는 3장 연권법이라고 해서 경서를 시험보는 초장을 통과해서 중장에, 시와 부를 시험보는 중장을 통과해야 종장의 시험 자격이 주어지고, 마지막으로 일종의 현실문제에 대한 대답인 대책을 시험보는 종장까지 합격하여야 예부시에 합격하게 된다. 이 3장 연권법은 조선시대 대과의 초시,복시, 전시에 그대로 전해진다.

  • 복시 - 특별시험. 다른 국가의 과거제도에 있는 전시에 해당한다. 예부시에 합격한 이들을 대상으로 국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복시는 단순히 급제생들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기에 떨어진다고 해서 관직에 못 오르는 건 아니었고, 상설된 것도 아니었다.

국자감시에 사학인 12공도생들의 응시가 가능한 점이나, 후술할 지공거 제도가 유지되는 점,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인 전시가 비상설이었으며 결국 의종 이후에는 거의 시행되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 그 발전상이 당나라의 제도와 송나라의 제도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고려의 왕권이 후대 조선에 비해 확립되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로 인해 붕당의 원조격인 당여가 형성되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향시-회시-전시의 과거삼층제를 도입했지만, 지공거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결국 실패하였다. 공민왕의 과거제 개혁을 나중에 조선이 계승하게 된다.

예부시의 시험 감독은 지공거라고 했다. 지공거는 단순한 시험 감독이 아니었다. 채점도 했고, 심지어 수험생이 맘에 들면 붙이고 맘에 안 들면 떨어뜨리는 일도 잦았다. 나중에 급제하거나 높은 관직에 오를 때에도 지공거의 힘이 필요했다. 사료에 의하면 많은 문생들은 지공거를 좌주라고 불렀고 등용문에 오르려면 이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필수였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과거제도의 폐해와 유사한데 전시 제도로 보완한 중국 송나라와 명청시대에 조차 시험감독관을 일평생 스승님으로 모시며 동문끼리 붕당으로 뭉치는 폐단이 있었다. 진사 중국 항목 참조

고려도 당연히 지공거가 사학의 폐단 중 하나로 떠오르며 과거제가 황폐해졌다. 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사형제 관계가 지공거와 수험자가 될 경우, 선배가 후배를 관직에 꽂아주는 식의 비리가 일어났다. 게다가 새로 뽑은 사람이 이후 지공거가 되고, 먼저 지공거였던 자는 낙향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제자들이 새로운 지공거에게 시험을 보는 등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이클이 완성되어버려 폐단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문벌귀족까지 가세했다. 지공거의 힘을 줄이기 위해서 시행된 것이 앞서 언급한 전시다.

고려시대의 유명한 지공거로는 최충이 있다. 이 사람은 정년퇴직하자 곧바로 사립학교인 사학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서 다른 지공거들이 사학을 덩달아 열어 사학 12도를 이루었다. 사학들은 명문 사립학교로,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해 인기가 높았다. 그 바람에 관학이 망하기 직전까지 가는 막장스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예종은 일종의 전문학교인 국학 7재[2]장학금인 양현고를 마련하여 학생들을 끌어모았고, 인종은 지방에 향학을 보급했다.

관학과 사학은 고려의 유학을 발달시켰지만, 결과적으로 과거 합격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시대엔 관직의 수가 적었기에 과거에 올라도 관직을 맡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음서로 올라간 사람들은 조금만 구르다가 곧바로 승진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공거가 전공을 세웠거나 인품이 훌륭한 경우에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가령 3원수 중 하나인 김득배정몽주를 발굴했고 최씨무신정권을 붕괴시킨 류경도 안향 같은 걸출한 문신들을 등용했다. 목은 이색과 사돈이자 대학자였던 유숙도 정도전, 이숭인을 발굴했다. 고려말에는 홍언박, 이색, 유숙, 김득배, 이제현, 이인복 등 쟁쟁한 지공거들이 많았다.

지공거는 조선 초기까지 존재했는데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한 과거 급제자인 태종 이방원은 직접 지공거를 맡으려고 했으나 이내 지공거를 폐지해버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방원은 엄연히 문인 계열이며, 이성계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 집안인데 태종이 과거에 동일 기수 중 최연소로 합격하자 기뻐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무과는 고려가 존속한 기간 동안 극히 짧은 시기에만 있었던 탓에 사실상 없었던 제도로 취급한다. 고려에서 무과가 실시되었던 시기는 1109년(예종 4)부터 1133년(인종 11)까지 24년과 멸망 직전인 1390년(공양왕 2)부터 1392년까지 2년, 도합 26년에 불과하다. 북방개척을 위해서 시행한것으로 예종 때 무과를 강화하기 위한 국왕의 노력으로 관학을 7재로 정비하며 무학재(군사학과)를 설치하고 무과도 시행했으나 금나라와 고려간의 외교관계가 안정기에 들고 문벌귀족들의 반발로 곧 폐지됐다. 이후 고려 중기 무신정권 시대에도 잠깐 존재했다가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곧 폐지됐다. 이후 공양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도화되어서 부활했지만, 이때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이라 큰 의미가 없다. 고려에서 무과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강예재 같이 국자감 7재에 속한 국가공인 교육기관을 통해 무신들을 길러내고 있었고 부사관 이상의 군인들은 전반적으로 군반씨족이라는 전문 집단에게서 공급받고 있었으며 호족들이 군권에 깊게 관여하고 있던 시대인 만큼 호족들이 군대로 진출하거나 호족들이 군대 보낼 만한 장정들을 군대에 넣어주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이의민이 고향에서 사고치던 걸 호족들이 눈여겨 보고 군대에 집어넣은 사례이다. 고려 중기에는 문벌귀족들이 무과의 도입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광종 때부터 승과라 하여 승려들만의 과거 시험도 있었다. 이 제도는 조선 초기까지도 유지되었으나 결국 숭유억불 정책의 강화로 중종 대에 폐지되었다.


2.3. 조선[편집]


조선에 이르러 과거 제도는 고려의 문제점과 유교적 사회이념에 맞춰 기존 제도를 대폭 개선하였다. 특히 전시(殿試)제도는 고려에서 과거를 받아 들인 이후 북송 시대에 정착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제도이다.

조선시대 과거의 어려움은 난이도, 과정, 경쟁률 어느 면에서도 만만한 게 없어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로 인천지역에서의 연구 결과 확인된 소과 합격자 288명 중 단 18명만 대과의 관문을 뚫었고 최고령 합격자 기록은 85세로 고종 시기의 정순교이며, 반대로 최연소는 14세로 고종 시기의 이건창이다. 이쯤 되면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공부하는 수준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유학' 이라는 직역에 속했는데(조선은 백성들에게 여러 세습직업인 역을 부여했는데, 칠반천역 등이 그 일부다), 이는 유학자를 뜻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대학생은 학생예비군으로 빼주듯,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국가통치 예비군으로 간주, 공부 자체가 국가에 이롭다는 논리로 여러 혜택을 받았다. 즉 군역과 부역 등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으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83세에 급제한 박문규라는 사람은 하던 공부를 때려치우고 장사에 나서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흥청망청하게 돈을 쓰다가 결국 사업이 망해버렸다. 40세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10,000편이나 되는 시를 외우기에 이르러 청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이름을 날렸다. 박문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고종 24년(1887년), 83세의 나이에 대과에 도전해 급제했다. 병과로 합격해 정9품을 제수받아야했지만 고종은 그를 당상관에 해당하는 정3품 병조참지(대한민국의 국방부 차관보와 비슷한 직위)에 앉혔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김자점, 심기원, 이시백, 이시방 등은 공신임에도 종6품부터 시작해야 했다. 등급이 좀 낮은 공신이긴 해도(2등공신) 고령의 병과 합격자가 공신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은 갑신정변 이후이고, 어차피 얼마 후 가실 양반이니 예우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 종2품에 해당하는 가선대부 품급도 수여 받았는데 그해에 죽었다. 사실 고종 때는 관료 체제가 엉망에다가 품급이나 벼슬도 마구 퍼줘 공명첩이 당상관은 물론 정승직까지 거래되었다.

기본적으로 양반의 요건인 문과 과거 응시자격을 인정받으려면 4대 내에 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품계라도 있어야 한다고 알려졌지만 실질적으로 대과에 급제 하지 않더라도 조상대에 청금록(靑衿錄)이라는 지방 유생, 진사, 생원 명부에 오르면 자손들은 경제력으로 몰락하여 잔반이 되더라도 대대로 양반 대접을 받으며 그 고을에서는 뼈대있는 가문 행세를 했다. 즉 지방 향교나 서원의 유생명부에 이름을 올려 놓으면 사실상 역이 면제가 되어 양반 신분을 유지했다. 무슨 말이냐면 급제를 하지 못한 양반들이라도 대대로 양반행세를 하고, 일반 양인들은 공명첩으로 벼슬을 사거나 해도 청금록이라는 고을 양반 명부에 오르지 못하면 당대에만 역을 면제받고 신분은 물려 줄 수 없었다는 것. 조선 후기 족보위조 양반들이 향리에게 돈을 상납해서 청금록에 들어가려 하고 잔반들은 결사반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내내 문관직 수가 500여 명에 불과한데 아무리 현재보다 인구가 적었던 조선이지만 조선 초기엔 인구가 550여만, 조선후기에는 1,800만이나 되는데 모든 양반이 4대안에 문과 급제 + 관직임용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4대안에 관원이 없으면 양반 신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맞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상술한 대로 과거는 법률상 양인이면 다 볼 수 있지만, 교육 기회가 없는 농민은 불가능하고, 정승 집안 이라도 서얼은 법적으로 자격이 없으며, 향리 같은 중간 계층도 지방 수령의 허가를 받고도 별도의 시험과 보단자라는 진입장벽에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문과 응시생이라는 자격 자체가 신분이 되었고, 조선의 양반계층은 과거 응시자(?) 후보생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물림하며 신분을 유지했다.

파일:52512339.1.jpg

하지만 정치가 난맥상을 보이던 세도정치 시기조차 과거가 명문가 양반들만의 잔치판은 아니었다. 의외로 대대로 세습해온 명문가 출신이 아닌 급제자도 많았다.# 서울대 연구에 따르면 순조 시기의 과거합격자 중에 신규 유입은 54%였다. 헌종조에는 50.9%, 철종조에는 48.1%에 달했다. 고종 시기에는 60%가 평민이었다. 오히려 평민 비율이 제일 낮았던 시기는 연산군과 숙종 시절로 30% 정도가 기존 양반 사대부 가문이 아닌 신규 유입자였다. 다만 여기서 합격한 평민은 시골서 농사짓던 양민이 아니라 최소 중인이나 향리급의 신분이다. 해당 기사와 연구에서도 낮은 신분의 정의를 어디까지 내려야 할지 제시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왕대가 바뀌면서 평민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중인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우 스스로를 양반이라고 자처 라며 분류가 매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반석평의 예를 들어서 천민, 면천된 양인도 응시할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국가의 역을 지지않고, 사유물에 불과한 천민은 물론 당대에 면천된 양인은 응시가 금지되었다. 특히나 1392년부터 1600년까지 200년간 고작 12건의 양인급제자의 사례가 발견된 셈인데 이것을 가지고 모든 양인이 아무런 제약없이 문과, 생원·진사시에 급제할 수 있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우리역사넷(국사편찬 위원회)

이론상 지방서 농사짓던 일자무식 농부도 과거에 응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양반 사대부가문에서 제외되어 중간신분으로 떨어진 향리는 지방 수령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역을 대체할 자가 없으면 응시가 불허 되었고, 응시가 허락 되더라도 향교나 서원의 양반 유생들과 차별로 별도의 소양 시험을 거쳐 통과해야 초시에 응시 할 수 있도록 했고, 양반 사대부들의 견제로 양반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2대에 걸쳐 향리직을 얻어 종사하면 중인 신분으로 강등됨을 경국대전에 명시 했으며, 명문 양반 사대부가라도 서얼과 그 후손들의 응시를 금지했으므로 사실상 응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반 양인에 대해 제한 규정이 없음을 들어 과거 제도가 아무나 응시가 가능했다고 주장하는건 상당히 무리한 주장.

과거 제도는 1894년 제 1차 갑오개혁 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한 달 전인 1894년 5월 15일에 마지막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 당시 병과 시험의 주제는 《대학(大學)》의 한 구절인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법(止於至善)'을 논하는 것이었으며, 급제자 중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병과 2등이었다. 당시 이상설이 제출한 답안지도 남아있다. 1894년 7월 12일 '선거조례'와 '전고국관제'를 제정해 시험과목으로 국문, 한문, 사자(寫字. 글씨를 똑같이 베껴쓰는 것), 산술, 내국정략, 외국사정 등 정치 행정과 실무, 국제정치 등을 시험해 관리를 선발했다. 그 외에 '향공법'(鄕貢法)이라고 하여 각 지방에서 일정 인원을 추천받아 인재를 선발하는 천거 방식의 임용제도도 함께 시행되었다.

여담으로 조선 마지막 과거시험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응시했었다.


2.4. 시험 과정[편집]




생원진사시는 소과 또는 사마시라고도 하는데, 유교 지식인으로서 소양을 시험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다. 초시에서 한성부 및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복시에서 최종 합격자를 가렸다. 3년에 한번 전국에서 생원 100명, 진사 100명으로 도합 200명만 선발하는 시험으로 대과만큼 쉽지 않았다.

이렇게 소과를 통과한 사람들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의 학사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루 출석에 원점 1점씩, 연 300점 이상을 채워야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대과 초시인 관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시험도 많았다. 매 10일마다, 그리고 매달 시험을 치렀다. 한 단원이 끝날 때에도 시험이 있었다. 월 평균 10회의 모의고사를 치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정 횟수 이상 최하점을 받으면 낙제. 등급이 대통-통-약통-조통 순이었는데 조통은 사실상 지금의 D나 F와 마찬가지였기에 이걸 받으면 망신을 뛰어넘는 개망신을 받아야 했다.

출석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성균관 내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 전 일종의 출석부인 도기에 하루 두 번 이름을 쓰면 그날은 출석한 것으로 쳤다. 따라서 어디 놀러 안 가고, 밥 때 되어 밥먹으면 출석 끝. 물론 나라에서 주는 밥인 만큼 맛이 없어 잘 안 먹었다고 한다. 그나마 복날 음식은 평이 좋은 편이었다고 하는데 초복에 참외 2개 중복에 개고기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한 번이었다가 아침만 먹고 나가노는 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으로 변경했다. 오늘날의 교수들이 강의 끝날 때 출석 한번 더 부르는 이유와 같다 권당에 참여한 날짜들만큼 출석일수가 부족해지면 식년문과 시험 초시에서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성균관 입학생 중 출석점수가 되는 유생에게만 대과 초시 합격자 240명 중 50명이 배정된 관시에 응시할 수있는 자격을 주었으므로 출석은 꼬박꼬박 해야 했다. 반대로 이 점으로 인해 성균관 학생들의 동맹휴학인 권당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이 있다 싶다면 그걸 이유로 학생들이 권당을 하기도 했다. 권당을 한다는 것은 국가의 인재들이 단체로 관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같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과라고 하는 문과는 문관 관료 임용시험으로, 법제상 양인이라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며, 소과에 반드시 합격하지 않아도 응시가 가능했다. 앞서 언급하였듯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경우 1차 시험인 초시 합격에 메리트가 있었으며, 그밖에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임용 시험 같은 별도의 혜택이 주어질 뿐, 소과와 대과는 별개의 시험으로 운영되었다.

문과(대과)는 1차 초시에서 240명, 2차 복시에서 33명을 끊는다. 마지막으로 이 33인의 순위를 가리는 3차 시험이 하나 더 있는데 이를 전시라 한다. 전시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 임관되는 품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시험이다. 장원 급제자는 종6품, 나머지 갑과에 해당하는 2명은 정7품, 을과 7명은 정8품, 병과 23명은 정9품부터 시작한다. 공신이나 당상관 이상의 자제들은 음직으로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관직을 얻을 수 있었으나 비급제자로서 승진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도전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보면 시험에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것 같지만, 학습능력이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기 때문에 보통은 30대 중반 정도이 주류였고 40이 넘으면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아니면 포기하거나 . 젊은 나이에 합격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최연소 장원급제자는 17세에 급제한 박호(朴箎)[3]이다. 최연소 합격자는 고종 때 13세로 합격한 이건창(李建昌)이다. 고종 때 지나치게 많이 뽑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최연소 합격자 기록은 15세다.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는 만 18세로 되어 있는데 이 당시 고등고시 사법과는 한 해에 40명 뽑던 시절이다.

드물게 왕의 권한으로 특별히 과거를 열어 시험 쳐서 합격시켜주는 일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이를 직부전시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잡다한 절차를 다 건너 뛰고 전시를 보는 것이어서 시험을 한 번도 안 치고 관직을 주는 경우는 없었다. 직부전시는 초시 전체 장원이나 성균관에서 특별한 시험을 칠 때 1등에게 내리는 비정기적인 조치였다. 직부전시도 세도정치 시기 악용되었다. 흥인군의 아들도 13세의 나이로 직부전시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되어 흥인군이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종친들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종친 대상으로 직부전시를 시행했는데 흥인군과 사이가 나빴던 흥선대원군이 흥인군의 아들을 제외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종친들은 이후 흥선대원군의 파벌이 되었고, 여기서 제외된 흥인군 계열만 고종 파벌에 들어갔다.


2.5. 개방성과 폐쇄성의 양면[편집]


양인 모두에게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고려도 과거 응시를 보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 시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 지배층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이 이유이다. 조선의 세습 관료가 아닌 일반 양인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에 달했다.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 4권 말미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그러나 실제로 양인 대부분은 과거를 볼 응시 자격을 갖추기 어려웠다. 과거 준비를 위해서는 당시 농사를 짓지 않고 공부에 전념해야 하며 노동없이 부양가족을 먹여 살릴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했고, 실제로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만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래서 3대가 함께 과거공부를 하는 집안의 사례도 있었다. 연원을 본다면 과거 시험지에 기재하는 4대조 내에 양반이 없는 경우 양반이거나 재력만은 양반을 칭할 만큼의 재력가들이 거의 전부였다. 그마저 재력가라도 아무나 응시 하지 못하는데 과거에 응시하려면 응시서류로서 호적과 신원 보증서에 해당하는 보단자(保單子)를 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나 추천을 해줄수 있는게 아니라 지방이면 경재소(京在所)의 3인, 서울의 경우 각 부서의 현직관원 3명 이상의 추천서인 보단자를 받아야만 응시가 허락 되었다. 과거(科擧) 제도는 실력만으로 뽑는게 아니라 자가 들어있는것 처럼 천거도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서얼들은 태종이 만든 서얼금고법 때문에 정조 이전까지 문과 응시가 막혀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범죄자, 횡령죄나 뇌물을 받은 관리의 아들, 재가한 부녀의 아들, 손자 그리고 서얼은 문과 생원, 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문과 합격자 비율로 따지면 위와 같다는거지 임용이나 얼마나 고위직으로 진출했느냐를 따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합격자가 관료 숫자보다 많아서 임용이 늦어졌다. 대과에서 1~3등으로 합격한 사람을 제외하면 품계와 관직을 받을 자격이 주어질 뿐 관직, 정확하게는 녹봉이 나오고 역할이 주어지는 관직인 '실직'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었고, 결국 못 받았다면 녹봉도 없고 직위도 없는 산직이나 받을 수 있다. 당해 합격자들끼리만 경쟁해서 임용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송대 이후 중국의 경우, 조선의 대과 합격자가 상위 3명을 제외하면 직접 임용이 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최종합격자인 진사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합격과 동시에 모두 고위 관료 임용이 보장 된 엘리트 신분이었다.

게다가 과거 시험은 공직 자리가 있든 없든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별시라고 해서 원손 탄생, 세자 책봉, 국혼, 국상 탈상 등 국가에 축하할 일이 있다거나(증광시) 성균관에 행차하거나 문묘제례 시(알성시), 어느 지역 민심을 잡고 싶다거나 하면 과거를 열었다. 왕이 다른 지역에 행차를 해도 과거를 열 수 있는 등, 추가 시험을 통해 얼마든지 더 뽑았다. 정기 시험은 3년씩 기다려야 하지만 별시는 그것보다 더 빨리, 더 자주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주상 전하께서 성균관에 행차했다가 날씨 좋으니 과거나 치르자며 그 자리에서 시험을 열면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열폭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 응시자들은 별시도 노려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와 한양에 쐐기박고 사는 경우도 있었고, 그리하여 한양 집값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한양에 집 갖고 있는 것이 최고의 기득권이어서, 벼슬살이를 하다 사화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하더라도 남은 가족들은 세를 줄지언정 집의 소유권은 어떻게든 지키려 했다. 실학자의 이미지가 강한 정약용조차도 망한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면 어떻게든 지금부터 돈을 모아 한양에 집 한 채 마련해야 한다고 강진에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누누이 당부할 정도였다.[4] 과거 시험 응시자가 한양에서 멀리 살면 멀리 살수록 드는 돈과 시간도 많이 들었기에 서울 출신이 당연히 더 유리했다. 선비가 시험을 치러 한양으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나귀와 하인의 인건비, 밥값, 숙박비등이 모두 가문에서 들이는 비용이었고, 갑자기 대왕대비나 임금이나 원자 아기씨가 돌아가시는 국상이라도 나면 이 또한 지방 수험생에게는 오가는 비용이 모두 매몰비용으로 돌아가는 또다른 비극이었다.

또한 과거 합격자에 비해 관에서의 일자리는 의외로 적기 때문에 인사적체가 극심해서 이렇게 한양에서 정기 시험으로든 특별 시험으로든 아등바등 합격을 해봤자 실제 관에서의 일자리를 받는다는 기약은 없었다. 이 때문에 을과나 병과의 경우 합격하고도 평생 임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이 임용 순서도 대단히 불공평했다. 우선 집안을 가렸다. 과거 시험지에 대놓고 4대조의 이름과 관직을 쓰게 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과거를 볼 자격이 있는지 알기 위한 것. 4대조 내에 반역자가 있거나, 천민이거나, 재가녀 자손이거나 하면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써놓은 가문을 볼 때 공식적으로 4대조 안에 정규 관료인 현관이 있으면 그 자손을 먼저 임명했다. 이를 현관서용(顯官敍用)이라 부른다. 그러나 반대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4대조내 관료 출신이 없다면 과거 응시 자체도 지방이면 현직관원 3명 이상의 추천서인 보단자를 받아야 응시를 할 수 있었고, 어렵게 합격하더라도 임용이 잘 되지 않았다, 이것을 한품서용(限品敍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후대로 갈수록 인사가 적체되면 대기발령으로 늙어 죽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며, 한미한 가문이면 임용을 포기하고 과거 급제의 명예에 만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문반과 무반 모두 급제자가 임용이 된다면, 배치되는 초임기관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때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이후의 승진 여부가 결정되었다. 문과 합격자는 이조에서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고 임명될 수 있었다. 무과 급제자중 임용되는 경우는 병조를 통해서 선전관, 부장, 수문장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았는데, 승진 한계와 승진 속도가 정확하게 이 순서에 비례했다. 그리고 사실상 문관 합격자의 10% 미만만 직접 임용이 되고, 나며자 30여명은 대기발령 상태로 임관대기를 하게되며, 이 상태에서 전직 관료(보통 삼년상 등으로 사직하거나 임기가 만료되었거나 파직), 문음(음서, 공신 자제와 2품이상 관료 자제), 3년에 한 번씩 공식이지만 알성시와 기타 특별 시험까지 합치면 96% 이상의 합격자가 임용 대기 중인 수많은 누적된 과거시험 급제자와 경쟁하여 임용을 받아야 했다. 4등부터 33등 합격자는 정8품 이하 품급을 받긴 하지만 이들 실무 경험이 있는 전직관료 집단과 중앙정계 인맥이 풍부한 명문가문의 자제와 같은 품급이라하더라도 임용될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2품이상 관리의 아들이나 손자는 그에 비례하여 정7품에서 종9품 품급이 나왔다. 이들 뿐만 아니라 급제자들 사이에서도 조차 2품이나 당상관급 직계자식- 일반 관료 가문- 그 이하 듣보잡...식으로 공식적인 서열이 있었다. 따라서 과거 시험지에 기재하는 4대조 내에 당상관이 없는 급제자는 아예 관직을 받지 못하거나 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았다. 다만 급제가 한대에만 그치는게 아니라 자손 대대로이 계속해서 급제를 하고 혼맥을 쌓고 나가면 대를 이어 조금 더 잘 나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대대로 합격을 하면 그 집안은 지방에서 명문가라고 볼리는데 당연히 중앙정계에서 이렇게 되기는 힘들다. 결국 조선의 과거제도는 관료 임용 시험이라기보다는 관료 임용 자격 시험에 더 가깝다. 특히나 조선 후기로 갈 수록 기호지방 명문가들이 그마저도 한양 명문가가 점점 실직을 독점 하는 추세가 강해지면서 지방 유림 출신 급제자들은 거의 임용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여기서 후보자가 아닌 자격시험이라고 한 이유는 특정 관직 후보로 오르려면 직급(품계)에 맞춰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 관직 추천 명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니 당연히 급제만 하고 서울에서 구직활동을 안하거나, 지방으로 낙향하면 학문으로 명성을 떨치거나 전국구 효자로 품행이 알려진 경우가 아니면 죽었다 깨나도 관직 후보군에 오를수도 없고, 관직수가 급제자에 비해 매우 적기 때문에 사극에서 나온대로 명문가에 인사하러 다니며 뇌물 (그 당시엔 당연한 인사)을 바쳐야 했다. 그러고 나서도 신규임용이나 5품이하 관료는 대간들에 의해 일종의 신원조회인 서경(署經)을 통해 과거조상과 자신의 범죄경력이 없음을 검증해야 임명 되는것이 절차였다.

거기에다가 문과는 명문가들이 모이는데다가 뽑는 사람이 적어 합격하기도, 벼슬에 임용되기도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지방 양반이나 몰락 양반 뿐만아니라 어지간한 집안도 문과보다 무과에 합격하여 양반 지위를 노리는 형태가 나타났다. 조선에서 문반직은 겨우 500여 명이지만 무관은 3,000여 명 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과에서는 28명만 뽑지만 지방에서 향리 출신이 자비로 출정해서 내갑사가 되어 나중에 하급 무관 품계를 받기에 무과가 유일한 통로는 아니다. 역시 음서로도 임용이 된다. 그러나 무과에도 유교 경전, 병법, 말타기 활쏘기[5]을 연습을 해야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일반 양민이 응시하기에는 역시 진입 장벽이 있었다. 일단 군사용 전마는 말 중에서도 엄선되어 키워야하고 관리하기 위해선 전문적인 마부가 있어야 했다. 일반인 양반들이 타는 조랑말만해도 노비 두세 명 값에 유지비는 사람보다 몇 배는 먹여야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무과로 뽑는 인원이 대폭 늘어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졌고, 군복무로 경력을 쌓은 사람이면 몇년 빡세게 공부와 체력단련을 하면 합격을 노릴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실제 10,000명 넘게 합격하는 사례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이미 임진왜란 이후 공명첩 당상관 품계 가격이 쌀 몇십 섬에 불과해서 일반 양인과 천민은 공명첩으로 역을 면했다. 물론 고위급 인사로 출세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어쨌든 양반자리를 확보했으니 지방에서 떵떵거릴 정도는 되었다. 다만 신분제가 허물어져 가던 조선 중후기에도 천민들이 과거치는 것은 조선 조정에서 매우 꺼렸는데 '지금 시각에선 급제<벼슬이지만 당시 신분제 사회에선 천민들이 공을 세우거나 공명첩으로 면천되어 공을 세우더라도 역을 면해주거나 그 다음에 '벼슬을 퍼줄 망정 과거 응시는 잘 허락해주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천민출신 서흔남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업어주고, 성 안팍에서 스파이와 전령 활동을 하여 정2품 당상관인 훈련주부(訓鍊主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받았지만 벼슬을 줄지언정 과거 응시는 허락하지 않았다. 엊그제 까지 천인들은 공은 인정해주어 대우는 해주지만, 명문가문의 전유물인 관료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는 의미. 특히 청요직(주로 조정의 공론을 형성하는 언관직)은 무조건 대과를 거쳐야 했고 명예직이 아닌 실제로 재상이 되려면 무조건 청요직을 거쳐야 했다. 명예는 잔뜩 올려주되 실제로 중요한 관직에의 참여는 배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명첩보다 과거 합격증인 공명홍패의 인기나 가격이 더 높았다. 조선 중후기가 되면 당상관 품계 가격이 쌀 몇 섬으로 폭락해도 안 살 정도지만 과거 합격증인 홍패의 위력은 여전했다. 왜냐하면 과거 응시 자격은 곧 양반의 자격을 인정하는 셈으로 후손에게 신분도 물려 줄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명첩이나 일회성 벼슬으론 당대에만 역을 면제 받을 뿐 이기 때문이다.

정충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워 면천되고 그후에도 공을 세워 벼슬을 받은 후에 다시 공을 많이 세우면 특별히 과거 응시를 허락해주긴 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임진왜란 시기는 매우 예외적인데 전시의 급박함으로 인해 천인이 왜인의 목을 베면 면천, 양인이 왜적의 목을 베면 무과 초시 (初試) 급제로 치고 2명의 목을 베면 무과 도시 (都試) 응시 자격을 주는 양반으로 대우하게 해줄 정도였기에 왜적 목 3개면 천민에서 무관으로 신분 급상승이 가능했고, 쌀 몇십 섬으로 당상관 직위까지 팔아치웠다. 임용한 박사 공저 <뇌물의 역사>에서 관청 역졸 마부 관노들이 죄다 신분 급상승해서 당상관직을 얻어 고을 수령 품계가 제일 낮아져 버린 아이러니가 나올정도였다.


2.6. 종류[편집]


사실 과거제도는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바로 '정과(科)'와 '잡과(雜科)'이다. 정과는 오직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만을 의미하므로 문과와 무과가 아닌 다른 것들은 전부 잡과이다.

참고로, 하기된 내용에는 현대의 공무원 시험과 각종 직책에 빗댄 표현이 많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의 공공조직과 공무원은 국민과 국가를 위한 업무에 종사하지만, 전근대의 왕조 국가에선 공공조직은 왕실을 유지하고 공무원은 군주의 충복이었기 때문이다. 즉, 과거 제도에서 뽑고자 하는 관원은 순수히 조선 왕조의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조와 왕실의 유지를 위해 선발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유능한 인재를 왕의 곁에 두고자 하는 데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2.6.1. 문과[편집]


말 그대로 문관을 뽑는 시험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유교 지식인으로서 능력을 시험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생원시와 진사시, 즉 소과는 문과에 해당되지 않는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과는 문관 관료 선발 시험인 대과만을 지칭하였기 때문, 하지만 대체로 문과를 치르는 사람이 소과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여기에서 함께 묶어서 설명한다.

문과 대과에는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인 식년시와, 비정기시인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 순으로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를 고려하여 240명(성균관 50명, 한성시 40명, 향시 150명)을 1차로 선발하고, 복시에서 그 중 33인을 선발하였고, 전시에선 등수를 결정해서 관직의 품계를 결정하였다.

이론적으론 양인 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하였으나, 양인은 대체로 농사를 지었기에 과거에 열중할 자금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대체로 부유한 양인 혹은 양반이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서책이 매우 귀중한 자산인데다 매우 비쌌다. 관에서 편찬해서 민간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던데다, 현대처럼 자동화된 시설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을 구하려면 관에 인맥이 있거나, 아니면 민간에서 비싸게 주고 사거나, 필사를 해야 했는데 어느 쪽이든 돈이나 시간 등이 많이 소모되었기에 부유한 양인 혹은 양반이 아니고서는 응시할 만한 조건을 갖추기 어려웠다.

조선의 과거 제도
소과
초시
복시

소과 복시 합격자 200명은 성균관 입학 자격 부여
대과
초시
복시
전시
대과 초시: 성균관 유생으로 300일이상 출석한 자는 관시 응시 자격 부여(초시 합격 정원 240명 중 50명 배정), 소과 비합격자나 자격 미달 유생 등은 한성부시향시에 응시(나머지 190명 한성부 및 각 도별 할당)
대과 복시: 합격자 33관직 등용가능
대과 전시: 대과 복시 합격자 33명의 등수 결정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과 문서의 r656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과 문서의 r656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2.6.1.1. 소과[편집]

소과에서 진사를 뽑는 시험 진사시와 생원을 뽑는 시험 생원시가 따로 있었는데, 고려시대의 제술과의 후신이 진사시, 명경과의 후신이 생원시라고 보면 된다. 현재로 치자면 공직적격성평가에 해당된다.[6]

생원과사서오경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고, 진사과는 나 부로 문예창작 능력을 시험하며, 각각 통과하면 생원이나 진사라는 칭호를 받는다. 쉽게 말해 각각 경전 이해력 시험과 문장력 시험인 셈이다. 생원과는 고려시대의 명경과, 진사과는 제술과를 계승한 셈.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전에 대한 암기보다 문장능력이 더욱 중시되었고, 이 때문에 생원보다 진사가 존경받게 되었다.

진사와 생원별로 1차시험인 초시는 한성시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에서 500명을 뽑아 각각 700명을 선발했으며 각 지방별로 인구비율에 따라 합격자 수를 분배했다. 현대의 지역인재전형으로 볼 수도 있다. 초시 합격자를 모아 2차시험인 복시를 통해 다시 각각 100명을 선발해 그 진사와 생원 합 200명을 소과 합격자라 불렀다. 2차 복시 합격은 당연히 지역 안배 없이 실력으로 200명을 선발했다.

합격자들은 길일을 택하여 생원은 동쪽에, 진사는 서쪽에 서서 국왕에게 절을 올린 뒤에 합격증서로서 백패와 주과(酒果)를 받았다.

초시에 합격하면 종9품을 받고 하급 관리가 될 기회가 주어지거나 성균관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하급 관리로 시작하면 디메리트가 엄청 컸기에[7] 대부분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래야 서울에서만 치뤄지는 비정기 과거 시험이나 성균관 유생들만을 위한 특별시험에 응시가 가능해서 쉽게 정계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

다만 현재로 치자면 고위공무원단에 해당되는 당상관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 당상관은 대부(大夫) 반열에 들었기 때문에 사족(士族) 지식인을 위한 시험을 칠 이유가 없다는게 공식적인 명분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별도의 직급체계를 가져 품계가 상당히 높게 잡히는 종친·외척·부마 등을 겨냥한 것이다. 사실 현재도 고위공무원단이 굳이 응시하지 않는 것처럼, 굳이 당상관이 과거 제도에 응시할 명분이 없기도 한다.


2.6.1.2. 대과[편집]


대과의 시험 과정
초시
관시
(50명)

(240명)
복시

(33명)
전시

갑과
(1위 장원, 2위 아원, 3위 탐화랑)

장원: 종6품[8]
2등, 3등: 정7품
한성시
(40명)
을과(차순위 7명, 4~10위)

정8품
향시
(150명)
병과(하위 23명, 11~33위)

정9품

유교경전 실력, 문예창작 능력, 대책 같은 논술 능력을 시험하였다. 원래는 정도전, 조준 등이 성균관에서 공부한 사람(관시 합격자)만 대과 복시를 칠 수 있었지만, 세조 시기엔 한성시나 향시 합격생도 응시가 가능해졌다.


2.6.1.2.1. 초시[편집]

1차시험인 초시는 총 240명을 선발했으며 관시, 한성시, 향시로 나뉘어졌다. 관시는 성균관 유생 중 우수한 사람만이 응시하여 50명을 선발했으며, 한성시는 서울에서 40명, 향시는 지방에서 150명을 선발하였다. 참고로 향시는 지역배당이 있었는데 각각 경기도 20명, 강원도 15명, 황해도 10명, 충청도 25명, 경상도 30명, 전라도 25명, 평안도 15명, 함경도 10명이었다.


2.6.1.2.2. 복시[편집]

2차 시험인 복시는 여기서 최종합격자 33명을 선발했으며, 이 명단에 들어가면 사실상 문과 합격 확정이었다. 3차 시험인 전시에선 그 33명 사이에 등수를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6.1.2.3. 전시[편집]

왕이 직접 나와서 문제를 내는 전시에서는 대과 복시 합격자들이 대책에 대해 써 올렸는데, 그것은 현실의 정책이나 문제되는 사안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책문이라고 한다. 왕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면 장원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7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서의 3차 시험(면접)에 해당된다.


물론 진지한 문제만이 나왔던 것은 아니다.

  • 광해군 -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1616년 광해군 8년 증광 회시 책문)
  • 정조 - 온갖 식물 가운데 이롭게 쓰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으로 남령초보다 나은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모든 백성이 남령초를 피우게 할 것인지 대책을 말해 보라.(1796년 규장각 초계문신 남령초 책문)

다만 조선 시대에서는 시, 글짓기 같은 문학적 소양 역시 관리의 능력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영 이상한 질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서 격이 높은 문학이란 단순히 가사가 아름답고 운율이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과거의 다양한 고사에 담긴 내용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의 교양과 지식 수준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정조의 뜬금없어 보이는 담배 찬양도, 실제로는 당시엔 상품 작물로서 수익이 매우 큰 담배 농사의 증가 때문에 정작 등 식용 작물의 비중이 줄어들자 이에 대한 찬반이 매우 거세지는 상황이라 이 담배 농사를 지지하면서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조 본인이 애연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이명한의 <백주집>(白洲集) 중 '잡저'에 따르면, 광해군의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에 대해선 당대의 문인인 이명한이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然則人能傷歲 歲不傷人)라는 답안을 제출했다. 이명한의 이 답안은 비록 장원은 못했지만 아원(亞元, 과거 급제자 중 차석)이라는 고득점을 받았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 이치에 관련된 대책도 출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명종 13년(1558년)에 출제된 대책으로, "해와 달이 떴다 지는데 어떤 때는 낮이 길고 어떤 땐 밤이 긴데 왜 그런가? 일식과 월식은 왜 생기나? 밤하늘의 보통 별과 행성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별이나 혜성은 어떤 때에 보이는가?" 라는 무슨 과학 퀴즈 같은(...) 문제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이이의 그 유명한 '천도책'이 나왔다. 당시 천도책을 본 시험관들은 '여러 날 밤을 새워 가며 문제를 만든 우리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쓰지는 못한다.'라고 평했으며, 시험 답안지를 뛰어넘어 대학 교수의 연구 논문까지 초월하고 나아가 조선의 성리학계를 뒤흔들어 버린 수준에 유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물론 저 멀리 명나라에도 전해져서 조선으로 온 명나라 사신들도 이이를 찾았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성리학 연구의 정수로 전해질 정도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천도책은 세 시간 만에 작성되었으며 당시 이이의 나이는 만 21세로 지금으로 치면 대학생 혹은 군인 정도였다.

이렇게 3차 시험인 전시는 합격자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왕이 직접 주관했으며 성적순으로 갑과에 3명, 을과에 7명, 병과에 23명을 배정했다.

  • <갑과>: 1~3위
1위: 장원(壯元) - 종6품 수여, 이를 '출륙'이라고 한다.
2위: 아원(亞元) - 또는 방안(榜眼)이라고도 부른다. 정7품 수여
3위: 탐화랑(探花郞) - 을과와 병과 급제자들의 어사화는 이 사람이 왕으로부터 전달받아 꽂아준다. 정7품 수여

  • <을과>: 4~10위: 정8품 수여
  • <병과>: 11~33위 - 병과 23명은 정9품 수여

다만 장원이 얻는 종6품과 병과가 얻는 정9품 사이엔 5계단 정도였고(정9-종8-정8-종7-정7-종6), 이 사이의 시간 간격이 7년 정도로 꽤 컸다. 지금으로 치자면 5/7급 공무원 시험을 같이 쳐서, 갑과에겐 5급(사무관)을, 을과에겐 6급(주사), 병과에겐 7급(주사보)을 줬다고 보면 된다.[10] 특히 조선 초기는 몰라도 중기엔 과거 합격자가 과잉공급 되어서 적체되었는 바람에, 갑과만 임용이 확정되고, 을,병과는 이조의 관직 임용을 받을 기회만 주어졌다.이 때는 갑과와 조상 4대조 중 관리가 있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임용되었기에, 만약 권율처럼 명문가 태생이라면 병과라도 임용이 확정되었지만, 한미한 가문이라면 늙을 때까지 관직에 못 올라가는 경우도 꽤 있었다. 괜히 장원을 원하는 게 아닌 것.

이이의 경우 과거시험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과거시험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9번은 정말 과거시험 자체를 9번 본 게 아니라 2번 치러지는 과거시험의 여러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아울러 9회 장원을 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능력인 건 맞다.

당연히 과거 합격자가 많은 가문은 명문가로 칭송받았다. 전주 이씨가 가장 많은 문과 합격자(870명)를 냈고, 그 다음으로 안동 권씨(368명), 파평 윤씨(346명), 남양 홍씨(당홍계)(292명), 청주 한씨(292명) 순서다.# 덕수 이씨인 이순신의 후손들은 단 한 명만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과에서는 26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순신 항목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정확히는 직계인 '충무공파'에 국한된 얘기.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어서 문과 쪽인 문성공파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야샤에서는 왕이 암행을 나갔다가 어떤 유생한테 좋은 이미지를 얻어서 돌아온 다음 갑자기 별과를 실시해 그 유생의 맞춤형 문제를 줘서 급제시켰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숙종에 관한 야사 중 암행 나갔을 때 어떤 곤궁한 집에서 머리를 가린 며느리과 아들이 시어머니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시어머니는 그들을 보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들에게 까닭을 물어보자 아들이 집이 가난해서 며느리가 머리카락을 잘라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렸는데 그걸 알게 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한 안쓰러움에 생신상을 받고도 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나중에 과거시험에서 "한 노파는 울고, 젊은 여중은 춤을 추고, 사내는 장구치며 노래한다"라는 주제를 내놓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답을 쓰지 못했으나 아들은 정확한 답을 적어 급제했다는 이야기다.


2.6.2. 무과[편집]



무반이 되려는 시험이다.

다만 현재는 직업군인과 행정공무원과 급수만 비슷하면 대우나 봉급등이 비슷했지만 문을 더 중시했던 조선이니만큼 문반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았다. 무관의 최상급 관직인 도총관(都摠管)은 정2품으로 정1품까지도 관직이 존재하는 문관보다 낮은데다가 그런 자리조차 대부분 문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순수하게 무과에 급제한 무관의 경우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이 한계였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삼도수군통제사조차 종2품에 불과했다.[11] 다만 그렇다고 이들을 무시한 건 아니었는데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한 번 무시했다가 난리난 일이 있었던데다,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도 신흥 무인 세력이었기에 무반을 무시하는 건 사실상 태조를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과가 사실상 없고 무관을 수시채용 형태로만 뽑은 고려시대에 비해 정기적으로 실시한 무과가 존재한다는 점은 꽤 발전된 모습이었다. 다만 실무 중심이던 군사분야를 유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무과'를 통해 유학자들이 몸쓰는 일까지 집어먹었다는 평도 있다. 또한 잡과보단 위상이 높은지라 꽤 많은 양반 자제들이 무과에 응시했었다. 다만 문과에 비해선 명문가 비율은 적었고 양인들의 비율이 높았다.

특히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이 있던 이후 조선후기에 무과로 뽑는 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이 때문에 시험의 난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몰락 양반이나 서자들 뿐만아니라 기존 양반 사대부들도 양반신분을 유지하는데 수월한 무과에 몰리고, 또한 전란시에는 광취무과라고 해서 면천된 천민에게도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웠던 정충신이다.

또한 나중에 와서는 면천이 안된 천민들도 불법적으로 응시하는 경우도 성행하며 무과 위상도 많이 떨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양인들의 등용문이 된 격. 다만 무과도 문과보다는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것이지 연습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했고 무과 과목 가운데서도 마상육기는 고도의 몸놀림과 순발력이 필요한데다가 아차하면 낙마 사고의 위험성도 있었기에 마냥 보기 쉬운 시험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선군 자체가 명목상 징병제로 돌아갔기 때문에 시험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았음에도 군 경력자들이 신분상승 및 명예를 위해서 응시하는 경우가 차고 넘쳐났던것이기는 했다.

무과는 문과와 달리 소과가 없다는 점, 대과의 초시와 복시 선발인원이 50, 5명씩 감소한다는 점, 무과급제자는 종7품의 관직, 을과 출신에게는 종8품의 품계, 병과 출신은 종9품의 품계에 각각 제수하도록 규정되었다는 점, 전시에서 장원을 뽑지 않는다는 점 등이 달랐다. 다만 초시, 복시, 전시 3단계의 대과, 대과 합격자에게 홍패를 준다는 점은 문과와 같았다.

원래는 초시에서는 원시(훈련원시) 70명, 향시 120명 등 190명을 뽑았고, 복시에서 28명을 선발하였지만 전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몇 백 명은 기본에 만명 이상을 뽑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명종때는 을묘왜변의 여파로 200명을 추가 선발하였고, 정묘호란이 일어난 인조 15년 별시(1637)때는 수천 명을 뽑았으며, 1676년에는 18,251인을 뽑았다. 이 때문에 만과라는 별명까지 붙었고, 조선후기에 무과의 위상이 쇠퇴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 초중기에는 합격하면 주로 종사관이나 변방의 만호 또는 부장 정도의 보직을 바로 받았으며 포교를 받는 일은 없었다. 종사관, 만호, 부장 등의 관직에서 어느 정도 복무한 후 능력에 따라 첨사나 부사 등으로 진급시켰다. 문제는 위에도 적은 것처럼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인사적체로 발령이 날 지 모른다는 것. 수천명이나 만 명을 뽑았는데, 그 사람들이 전원 만호나 부장으로 발령날 리가 없다. 또한 문과하고 마찬가지로 관직에 오르더라도 임용적체로 인해 대다수가 말단직이나 떠돌다가 은퇴하기 일쑤였고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은 전란이 아닌 이상 손에 꼽는 수준이니 출세를 바라기에는 부적합한 시험이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과의 위상이 쇠퇴하여 고위 관료가 되기는 힘들어도, 어쨌든 신분상승은 되는것이기에 홍패(합격증)을 받는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무과 응시자가 늘었다.


2.6.2.1. 초시[편집]

목전(나무로 만든 화살로 240보 거리에서 3발 채점)·철전(육량전, 아량전, 장전등을 쏘기)·편전·기사(말타며 활쏘기)·기창(말타며 창 다루기)·격구(말을 타거나 직접 뛰면서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가 시험과목이었다. 말을 타고 하는 기마 격구는 전투적인 성향이 강하고 경기를 하면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나중에 마상 무예를 배우는데 유용하여 시험과목에 포함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부 직렬의 공무원[12] 시험에 존재하는 체력검정에 해당된다.

속대전 편찬 이후에는 목전·철전·편전·기사·유엽전(버드나무 모양 화살촉을 단 실전용 화살)·조총·편곤으로 시험과목이 바뀌었다.


2.6.2.2. 복시[편집]

병법서, 유교 경전, 무예가 시험과목이다. 무과 복시는 초장(주로 궁술), 중장(기사, 기창, 격구. 후기에는 격구가 빠지고 조총, 편추가 추가), 종장(병법, 유교경전), 세 시험점수를 합산하여 28인을 선발하였다. 식년 무과 기준이다. 별시는 상황여하에 따라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한다. 무예와 관련성이 적은 유교 경전이 들어간 이유는 원래 무신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들어간 것이며, 당연히 문과에 비해 난도가 크게 낮았다. 하지만 무과에 급제해도 어찌되었든 합격을 한 셈이니 양반자리가 유지된다는 점을 알아챈 양반들이 너무 무과로 몰리는 폐단이 발생해서 유교 경전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고려 중후반기까지 무신들 중 상장군, 대장군 같은 고위직들조차 대다수가 자기 이름 석자나 겨우 쓰면 다행일 일자무식들이었음을 생각하면 꽤 진보한 부분이긴 하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무원 시험의 지력시험에 해당된다.

병법에선 손자, 오자, 육도삼략, 삼십육계 등 무경칠서 중 1권, 유교 경전에선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 오경 중 1권, 통감 ,역대병요, 장감박의, 소학 무경 중 1권을 선택해 주관식으로 시행되었다고 하며 경국대전도 시험과목이었다. 사실 현재도 장교나 부사관이 되기 위해선 어느정도 문무겸비가 되어야 하고, 경찰공무원이나 소방공무원 등 일부 특정직 행정공무원이나 교정직 공무원 등 공안직 공무원도 행정학을 본다는 걸 감안하면 이게 현대로도 계승이 된 셈.

윤승운 화백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 공부를 싫어하는 맹꽁이 서당 학동들이 우리는 돌머리이니 차라리 무과를 택하겠다하여 칼싸움하고 이러는데 무과는 공부 안해도 무술을 잘하면 급제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작중에서는 천자문도 다 안뗀 주제에 과거시험을 보러가기도 했던 아해들이기는 했다만. 요즘 무과와 비슷한 사관학교 입학시험이나 장교시험도 기본 교양이나 군사학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입시 시험도 빡세다. 그리고 맹꽁이 서당 학동들이 글을 게을리 하는데 만약 저렇게 글공부를 게을리하여 최소한 진사시에 붙지 않으면 양반 계급이 날아가고 글공부보다 더 힘든 군역이나 부역을 짊어지는데 다치거나 죽을 위험이 있다.

비교적 설명이 적은 무예 역시 현대인 기준으로는 괴악한데, 기마술이 얼마나 아크로바틱한지는 마상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마장마술과 비슷하지만 아예 말과 혼연일체되어 안장에서 덤블링(!)을 넘는 수준이다. 말을 그렇게 타면서 활을 쏘아서 명중을 내고(기사) 장병기를 다루거나(기창) 구기종목을 한 것(격구)이다. 활쏘기 역시 현대에 전래된 국궁과는 파운드 수가 달랐으며, 조선에선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검법에도 칼을 하늘 높이 던졌다 받는 것이 있는 등(...) 전근대 직업군인들에게 요구된 무예 소양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2.6.2.3. 전시[편집]

기격구와 보격구, 즉 마상 격구랑 보행 격구가 시험과목이다.

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복시에 합격한 이들을 따로 모아 치르며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은 아니였고 1등부터 마지막 등수까지 순서를 정해 인사를 배치하는 시스템이었다. 전시에서 상위권 성적을 받으면 보통 금군이나 장용영 등 국왕 직속부대로 배치가 되었고 그다음으로는 오위&오군영 - 지방 - 국경 or 수군으로 배치가 되었다고 한다. 금군이나 장용영 등 국왕 직속부대는 당연히 국왕과 가깝고 서울에 주둔했기에 진급이 빠르고 급여도 높은 편이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제1경비단 같은 대통령경호처 지원부대들은 군 내에서 상당히 요직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한 때 사령관이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재끼고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었던 국군기무사령부의 경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관으로 꼽을 정도였다.


2.6.3. 잡과[편집]


잡과(雜科)는 궁중과 6조, 지방관청에 속한 아문과 속사(屬司)의 관리를 선발하는 분야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통번역사, 외교관, 연구원, 의사, 약사 같은 전문직 시험이나 조리, 시설관리 등 기술직렬 공무원을 뽑는 시험에 해당된다.

지금이야 기술직렬이나 전문직렬이 동일한 급수의 행정직렬과 같은 대우를 받지만 그 당시는 성리학 기반의 국가인 조선시대이기에 문과보다 낮게 봤다. 그리고 무과보다도 턱이 낮았는데, 바로 중인들도 시험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얼이나 지방 향리의 자손들이 가장 많이 노리던 시험이었다.

잡과에는 고정적으로 시험이 실시되는 분과와 그렇지 않은 분과(일명 부정기과)가 있었는데, 일단 고정적으로 실시되는 분과는 1392년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서 처음 규정되었다. 이 당시에는 이과(吏科),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가 고정적으로 실시되었다. 이후 제정된 경국대전에서 이과 대신 율과(律科)가 들어가며,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가 고정적으로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분과만으로는 수십개의 아문과 속사에서 필요한 전문 기술 관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때문에 관원이 필요한 속사에서는 잡과가 실시될 때 꼽사리끼는 방식으로 관원을 선발, 확보하였다.

다만, 여기서 고정적으로 실시된다는 것은 일정한 시기마다 실시된다는 것이 아니라, 4개 분과 시험의 제도와 실시가 법제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4개 분과 역시 주무 관청의 필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실시되었고, 잡과는 문과의 소과처럼 거르는 수단이 없었고 문과나 무과를 치지못하는 중인들도 응시가 가능했기에 무과보다도 더 경쟁률이 높았다.

참고로 문과와 무과와 다른 잡과만의 특이한 체계가 있었는데, 바로 부분점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아래에 나온 모든 시험엔 통(通)·약(略)·조(粗) 등 등급이 있었으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잘했냐에 따라 배점 4점 만점에 4점,2점,1점,0점으로 나눠서 매겼다고 보면 된다. 최종 성적에 따라 1등은 종8품계, 2등은 정9품계, 3등은 종9품계를 주어 임시 관직인 권지(權知)로 임명하였다.

잡과는 당연히 문과와 무과와는 차별을 받았으며, 시험 제도와 관직 제수에서 그 차이를 보인다. 문과와 무과는 예비시험을 거치고, 대과에서도 전시를 거쳐 왕이 직접 순위를 정해주는 형식을 취했으나, 잡과는 예비시험이 없고, 본시험도 초시와 복시로만 이뤄져 있었다. 부정기과는 초시와 복시로 나누지 않고 단 한 번의 시험만으로 합격자를 뽑기도 했다. 또한, 합격 증서인 백패(白牌)에도 문과와 무과에는 어보(御寶)를 찍어줬으나, 잡과에는 예조인(禮曹印)만 찍어주었다. [13]

잡과 내에서도 어느 정도 서열이 있었다. 역과가 으뜸이었고, 음양과, 율과, 잡과가 그 다음, 부정기과가 말단이었다. 이는 성적에 의한 품계 서평에서 드러난다. 역과의 1등은 사역원의 종7품을, 2등은 종8품을, 3등은 종9품을 받았다. 다른 잡과의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을 받았다. 부정기과는 정9품 혹은 종 9품을 받았다. 애초에 부정기과는 최종 선발 인원이 1~2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최말단의 품계를 받았다.

한편, 취재라는 기술 실무자를 선발하는 시험도 있었으나, 취재 출신자는 녹봉은 받을지라도 문·무반의 품계를 받을 수 없었다.[14] 잡과 출신자는 문과와 무과에 비해 차별은 받았을지라도 과거라는 정규 시험의 합격자이기 때문에 취재 출신자와는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잡과 출신자는 자신의 임용 성적과 근무 여하에 따라 당상관의 지위를 얻어 반상의 지위에 들 기회[15]를 얻어볼 수라도 있었지만, 취재 출신자는 과거 전시에 합격하지 않는 이상 꿈도 꿀 수 없었다.[16]

조선 중기 이후 잡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바로 잡과에 응시하기보다는, 취재에 들어 녹봉도 받고 기술 실무를 쌓으며 공부해 잡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조선 후기의 잡과에선 세습의 경향이 짙어지는데, 마땅한 기술 교육기관이 전무하던 당시엔 선대의 기술 전수가 유용한 잡과 준비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2.6.3.1. 이과, 이문과[편집]

중앙관청의 행정 실무 관원인 경아전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이에 합격하면 중앙의 하급 관리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행정직렬이라고 보면 된다. 이후에는 이문과(吏文科)라는 경아전 조직의 상단에 속하는 녹사(錄事)를 선발하는 분과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이과와 이문과는 조선 건국 초기 관청 조직이 확대 정비되면서 각 관청의 폭발하는 아전 수요를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분과였다. 하지만 이후 문과 합격생 중에서도 지방 관리로 유입되는 경우도 많았고, 아전이 세습직이 되면서 인사 적체가 일어나면서 변란 등으로 관리가 많이 필요할 때 치뤄지는 시험이 되었다.


2.6.3.2. 역과[편집]

역과는 통역사외교관역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사역원(司譯院)에서 주관하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통번역사 시험 +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에 가까웠다.

한학, 왜학, 몽학, 여진학이 있었는데, 한학은 초시에서 45명(한성시: 23명, 해주시: 7명, 평양시: 15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 13명을 선발했다. 왜학, 몽학, 여진학은 각각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을 선발했다. 즉 왕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가 없었던 것.

참고로 사역원에 입사하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는데, 현직 역관의 추천이 있어야 되며 심사위원에 해당되는 사역원 관리 15명 중 13명의 동의를 받아야 입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세종 시절엔 한학부가 사실상 중국어마을(...)이 된 적 있었다. 무려 한학부에서 중국어를 안 쓰고 한국어를 쓰다기 걸리면 군역으로 보내버린다는... (...)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있었던 기록이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주변 외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통번역 수요가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역관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또한, 통번역 업무를 수행하면서 비공식적인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실제로, 초시 합격 자격만으로도 품계는 받을 수 없지만 변경 지역의 관청에서 통번역 품을 팔거나 개시(開市)와 후시(後市)에서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말기엔 특정 역관 가문이 차지하는 세습직이 되었다.


2.6.3.3. 의과[편집]

의과는 의원(의사)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내의원이 아닌 전의감에서 주관하였다. 초시에서 18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 9명을 선발했다.

드라마에서는 의과에 합격하면 내의원에서 바로 근무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웠다. 내의원 정원 자체가 20명이 채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순수 잡직은 10명 내외였기 때문에, 대부분 혜민서나 활인서에서 근무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지방 감영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으로 치자면 국립 보건소에 근무하는 의료직 공무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2.6.3.4. 음양과[편집]

음양과는 관상감에서 주관했는데,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命課學)으로 나뉜다. 천문학은 초시에서 10명을, 복시에서 5명을 선발했고, 지리학과 명과학은 각각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을 선발했다. 음양과에 합격하면 지관(止觀)으로 일했다.[17] 지금으로 치자면 기상직 공무원이나 지적직 공무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2.6.3.5. 율과[편집]

율과는 형조에서 실시했고, 초시에서 18명을, 복시에서 9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복시에서 선발된 인재는 법원 실무를 담당하는 율관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법원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법원공무원과 같다고 보면 된다.[18]

시험 과목은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경국대전, 당률소의,무원록,율학해이,율학변의 등 법학 관련 과목들이었으며. 영조 이후엔 대명률, 무원록, 경국대전으로 축소되었다. 참고로 율관은 상한선이 있었는데, 바로 종6품이었다. 즉 아무리 잘해도 참하관이 끝이었던 것.


2.6.3.6. 부정기과[편집]

이 밖에도 요리, 미술, 음악, 수학, 도서 관리 등 여러가지 기술 관련으로 전문직 관리를 선출한 기록도 있었다. 즉 현대의 연구직공무원이나 타 직렬의 기술직 공무원을 선출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2.6.4. 음서[편집]


고려시대까지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문벌귀족의 초필살기 음서를 통해 바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면 그 빽으로 관리가 되는 것. 그야말로 합법적 혈연 낙하산인데, 오히려 뭐하러 힘들게 과거 봐서 관직에 오르냐는 말이 돌 정도로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음서 출신이 과거를 합격해 실력으로 들어온 관리들을 제치고 재상 반열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딱히 과거 급제를 안 해도 명시적인 진급 상한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급제자 출신에 대한 명예와 예우는 분명히 있었다. 후대인 조선시대보다는 못하다곤 해도 고려시대에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떳떳치 못하게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고, 권세 있는 문벌귀족, 권문세족 가문에서도 능력만 되면 자식들이 과거로 입신하길 원했고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음서로 일단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과거 공부를 계속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과거 급제를 했다는 것은 충분히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어서인지 과거 제도 시행 이후 최고위 관직 재임자 상당수가 음서 출신인 과거 급제자였다. 단순히 가문이 좋다고 올라온 게 아니라 개중에서 실력이 확실히 있으니까 올라온 것이다. 또한 시험 감독관인 지공거 같은 일부 관직은 과거 급제자만 맡을 수 있기도 했으므로 과거 급제는 명백히 내세울만한 것이다.

거기다 과거 급제자는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의 합격자처럼 일정 품계 이상 관직부터 출발한 반면 음서는 과거급제자보다 훨씬 낮은 말단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당연히 과거 급제자가 승진이 빨랐다. 단 음서는 일반적인 과거 급제자의 급제 시 연령보다 더 빨리 받을 수 있어 음서로 말단이나마 관료 경력과 경험을 쌓고 보는 것은 확실히 이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음서를 받았다는 것은 본인이 잘하고 말고 이전에 음서도 받을 정도로 위세가 좋은 가문이라는 말이기도 하므로 나중에 과거 급제를 해서 충분히 능력을 보이면 딱히 타 급제자에 비해 꿀릴 것도 없는데다 가문의 후광까지 받을 수도 있다.

조선 초 명정승으로 유명한 황희도 원래 고려말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처음 받은 것은 품계도 없는 말단 하급직이었다. 이후 관직 생활 도중 과거에 급제하여 개경의 중앙 공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름을 날린 인물 중에서는 이렇게 음서로 관직을 시작했다가 이후 과거에 급제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권문세족 가문 출신인 이인복, 이인임 형제를 보면 이 집안은 상당한 권문세족 가문이었지만 이들 형제 역시 음서가 아닌 과거로 공직에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이인복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이인임은 실패하여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당연히 과거급제자 출신인 이인복의 출세가 초기에 훨씬 빨랐다. 이인임은 나중에 출세했지만, 초기에 그의 승진은 더뎠고 이후 공민왕기를 거치며 정치9단 이인임 특유의 처세술로 성공하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관료제가 보다 세련되게 발전했고, 과거 제도 또한 체계적으로 발전하면서 음서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당장 음서 출신 관료들을 문음이라고 칭하며 명칭도 바뀌었을 뿐더러,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 관료의 아들만 음서가 가능했으며, 거기에 음서를 통해 관직을 얻으려고 해도 문음취재란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와 마찬가지로 음서로 처음에 받을 수 있는 품계도 제한적이었다. 처음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가 이론상 과거 급제자와 마찬가지로 6품 밑이긴 한데 일반적으로는 급여조차 없는 말단직밖에 못 받았다. 과거 급제자에 비하면 승진이 상당히 어려웠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청요직은 완전 봉쇄에 정3품 당상관 이상 진출하지 못한다는 진급 상한선까지 생겼으며, 더군다나 고려시대와 달리 과거로 들어온 사람보다 낮게 대우하는걸 거의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다. 따라서 문음으로 관직에 들어오더라도 다시 공부해서 과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제약이 훨씬 널널한 고려시대조차 음서로 관리가 된 사람이 과거 급제를 하는 사례가 꽤 있었고 음서 출신 고위 관료도 대부분 나중에 과거를 다시 쳐서 합격한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심지어 금수저 오브 금수저라 할 만한 어지간히도 권세를 누리는 사람마저 이걸 피해갈 수가 없었고 과거 급제를 해야 제대로 대접받았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한명회는 할아버지가 조선 국호를 받아온 한상질이며 작은 할아버지는 개국 3등공신인 명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서로 등용되자 개성에서 경덕궁직이라는 말단관직을 전전했고 같은 관료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한양 출신으로 개성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이 '송도계(松都契)'라는 친목계를 만들었는데, 한명회도 한양 출신이라 가입하려고 했지만 경덕궁직도 벼슬 축에 드냐며 끼워주지 않았다.

예외적인 사례가 바로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다. 8대 옥당이라 하여 8대가 내리 홍문관 관원을 지냈던 후덜덜한 문벌의 덕을 받아 음서로 관직에 올랐는데, 영조가 과거에 다시 응시하여 고관으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권유했지만 '이미 은혜를 입어 음서로 출사했는데 높은 관직을 구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끝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과거 급제도 안 했는데 정3품인 광주목사까지 역임했으니 상당한 고위직까지 진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외로 영조시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 있는데, 이 쪽은 음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해서 과거급제 없이 종2품까지 오르게 된다. 조선시대엔 왕의 스승이 꽤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정선이 왕의 스승이였기에 이 상황인 경우는 일리있는 사례라 보면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고려 시대부터 음서 출신은 외교문서 작성 업무, 대간직, 지공거 등 높은 학문이 필요한 분야에는 임명을 받을 수 없는 제한이 있었는데, 음서 출신은 과거 출신 만큼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제한이 한층 강화되어 청요직에 나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막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통과하지 않으면 고위직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음서의 가치가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통과한 이들만이 당당하게 관료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면 다시 분위기가 역행하여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 음서로 관직에 나가려는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조차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과거였으며, 바로 이것이 조선 말엽에 과거제의 폐단이 대두되며 과거 시험이 막장이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과거가 중시되지 않는다면 음서 카르텔이 과거를 무시하며 자기네들끼리 관직을 물려주면 되는데, 그걸 못 했다는 이야기다.) 그 김좌근조차 순조 때 김조순의 회갑 선물로 6품직에 제수되었으나 이후로 별다른 관직생활을 못하다가 헌종 때 과거 급제를 하고 나서야 폭풍승진을 거듭했다.


2.7. 조선시대 성씨별 과거 합격자 수[편집]


아래 합격자 통계는 참고용으로, 정확하지 않은 자료이다. 2023년 현재 조선시대의 모든 공적 기록이 파악, 번역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정확한 성씨별 과거 합격자수는 현재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대강의 합격자 수나 성씨별 순위를 파악하는 정도로만 쓰는 것이 바람직하며, 제2의 자료를 검증하는 데 활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

순위
성씨
문과
무과
상신[19]
문형[20]
왕비
1
전주 이씨
876명
2,719명
22명
7명
-[21]
2
안동 권씨
359명
909명
8명
3명
1명
3
파평 윤씨
331명
934명
11명
2명
4명
4
청주 한씨
287명
768명
12명
1명
5명
5
광산 김씨
265명
689명
5명
7명
1명
6
밀양 박씨
261명
755명
1명
1명
-
7
연안 이씨
255명
614명
9명
7명
-
8
여흥 민씨
233명
459명
12명
3명
4명
9
청송 심씨
224명
567명
13명
2명
3명
10
진주 강씨
219명
510명
5명
1명
-
11
반남 박씨
215명
282명
7명
2명
2명
12
남양 홍씨 당홍계
206명
833명[22]
8명
2명
1명
13
경주 김씨
202명
535명
6명
-
3명
14
동래 정씨
198명
484명
17명
2명
-
15
한산 이씨
195명
519명
4명
2명
-
16
광주 이씨
188명
376명
5명
2명
-
17
풍양 조씨
182명
391명
7명
4명
2명
18
경주 이씨
178명
517명
8명
3명
-
19
평산 신씨
172명
561명
7명
2명
-
20
전의 이씨
165명
431명
4명
1명
-
21
연안 김씨
163명
271명
6명
2명
1명
22
구 안동 김씨
162명
224명
4명
2명
-
23
신 안동 김씨
153명
13명
15명
6명
3명
24
풍천 임씨
144명
303명
1명
-
-
25
대구 서씨
140명
393명
9명
6명
1명
26
의령 남씨
138명
376명
6명
6명
-
27
창녕 성씨
134명
317명
5명
2명
-
28
진주 류씨
132명
283명
2명
1명
-
29
풍산 홍씨
129명
298명
8명
1명
-
30
문화 류씨
126명
387명
8명
1명
-
31
김해 김씨
123명
469명
1명
-
-
32
남양 홍씨 토홍계
123명
833명[23]
1명
1명
-
33
연일 정씨
119명
277명
5명
3명
-
34
순흥 안씨
116명
325명
2명
-
-
35
창녕 조씨
113명
202명
1명
-
-
36
청풍 김씨
110명
240명
8명
3명
2명
37
해평 윤씨
110명
271명
6명
3명
1명
38
전주 최씨
109명
348명
3명
2명
-
39
성주 이씨
107명
349명
1명
-
-
40
여주 이씨
107명
240명
-
-
-
41
여산 송씨
107명
226명
2명
-
1명
41
덕수 이씨
105명
275명
7명
5명
-
42
의성 김씨
96명
256명
1명
-
-
43
강릉 김씨
96명
207명
1명
-
-
44
양천 허씨
93명
231명
5명
-
-
45
전주 류씨
93명
243명
-
-
-
46
양주 조씨
90명
247명
8명
3명
1명
47
해주 오씨
89명
302명
2명
3명
-
48
한양 조씨
89명
286명
2명
2명
-
49
기계 유씨
85명
284명
3명
-
-
50
고령 신씨
83명
189명
3명
3명
-


3. 부정 행위[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2011112919458223731_4.png
중국의 부정행위 속옷 협대. 부정행위를 막아보겠다고, 청대에는 모든 과거 응시생을 독방에 집어넣고 가둬서 시험을 쳤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속옷을 커닝페이퍼로 활용한 협대며 현대 중국에서도 부활한 적이 있다. 현대로 따지자면 흰 러닝셔츠나 하얀 팬티, 내복 등을 커닝페이퍼로 쓴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험이다보니 각종 부정행위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 말기같은 상황이 되면 난장판 유래으로 표현할 수준이었다. 이 난장판이란 말도 과거 제도 자체가 부패하고 몰락해, 조선 시대 과거를 보던 난장(亂場)에서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여 떠들어 대거나 엉망진창인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것이 현대에까지 살아남아 여전히 쓰는 것.

이런 난장판을 잘 묘사한 것이 네이버 웹툰 가운데 호랭총각 중 과거편과 조선왕조실톡, 글로는 엽기조선왕조실록 중에서 과거에 대해서 다룬 항목이다. 해당 웹툰의 대부분의 내용은 백범일지에 그대로 나온다. 호랭총각이 백범일지에서 참조한거 같다. 실제로 이런 부정행위는 조선후기 신분제가 동요하는 과정에서 더욱 문제가 되었고 심각해졌는데, 해당 글이 모두 그 시대의 과거풍경을 다루고 있다.

사실 부정행위 정도가 아니라 과거제 자체가 막장이 되어버렸다. 일단 조선 후기~말기쯤 되면 이야기에서 흔히 보듯 '혼자 공부해서 한양 올라가 단번에 장원급제해 임금님 밑에서 벼슬 시작'은 말 그대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기본적으로 과거에 1차라도 붙고 싶다면 선접군, 사수, 거벽 등 몇 명이서 서로 역할을 나눠 단체전으로 움직여야 했다. 특히 선접꾼은 조선시대 과거 환경상 매우 필수적이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현장은 다섯 자리수나 되는 응시자들이 300개 안팎의 답안을 선착순으로 내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매우 혹독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선접꾼이 하는 자리선점과 답안지 빨리 넣는 것은 과거의 성패를 가르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못 제출하면 사수와 거벽이 아무리 답지를 잘써도 의미가 없으니까. 특히 이 일은 선접꾼 자신이 일을 진행하다가 그 주변의 인파 탓에 압사당할 위험까지 있었다.

호랭총각 과거편에서 이게 아주 잘 묘사된다. 괜히 문과 보는 사람들부터 달리기를 시켜대질 않나 하나 싶었더니 실전에서 정말로 달리기에 몸싸움까지 장난 아닌 모습을 보여주고 포지션 분담까지 하는 것도 나온다. 그리고 문과가 이러는 와중에 옆동네 무과 보는 사람들은 세기말 초인열전 찍는 모습을.. 호랭총각 팀은 어디까지고 자기 실력으로 보려는 사람들만 있었기에 과거시험 때 팀원들이 선접꾼 + 과거 직접 보는 역할만 했다. 선접꾼같은 경우엔 워낙 과거시험장 자리잡기나 시험지 내기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할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호랭총각의 스승과 라이벌인 사람이 낀 팀은 대놓고 '접' 4인조를 구성해 표준적인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걸 보여준다. 이 셋과 과거 시험보는 거자 넷을 한 조로 묶어 '접'이라고 칭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1%B0%EC%84%A0%ED%9B%84%EA%B8%B0_%EA%B3%BC%EA%B1%B0_%EC%8B%9C%ED%97%98%EC%9E%A5.jpg
당시 과거장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아주 파라솔까지 펴놓고 느긋하게 모여앉아 다과회라도 나누는 듯한 풍경이다.

파일:external/cfs12.blog.daum.net/488eb2b570fa9&filename=%EA%B3%BC%EA%B1%B0%EC%8B%9C%ED%97%98%EC%9E%A5%EB%AA%A8%EC%8A%B5.jpg
원래는 이렇게 오와 열을 맞춰서 봐야 한다.

게다가 아래도 나오듯이 부정행위는 기본이고 심지어는 과장 내에 막걸리 장사들이 판을 펴기까지 했으며, 세도가들의 경우에는 아예 답이 주어져 있었고, 답안을 제출하는 방식도 집에 가서 답안지를 가져온다든지, 아예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포졸들이 완성된 답안지를 가져다 주든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게다가 어떤 양반은 이걸 노리고 계속 노비 바꿈질을 해서 머리가 좋은 노비를 사와서는 공부를 시킨 뒤 대리시험을 치르게까지 했다.

사실 법상으로는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하게 규정되어있어서 응시생이 과거시험 보다가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서 쓸 경우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막노동을 강제당했고, 미리 책을 들고 올경우에도 과거응시자격이 3년간 박탈당하도록 규정이 되어있었다. 또한 응시생들뿐만 아니라 시험관이나 중간 브로커들도 영구히 관직에 임용될수없도록 규정되어있었으며, 고종대에도 수십명의 사람들이 과거제도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보냈고, 명청시기에는 부정행위 적발 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말기나 청나라 말기에 부정행위가 만연해있었던것을 보면 뒤로는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적당히 무마하는 경우가 많았던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가면 명문가 자손이 낙방을 하면, 그게 덕성이 높은 증거라고 찬양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부정행위를 안 했다는 말이니까.

근래 경외 유생들이 대소 과장에서 대개 구차한 일을 면치 못하여 간혹 의심스럽다는 시비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김수증만은 상국 청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흥과 김수항 두 사람의 형인데 그 글을 읽은 것이나 착실한 공부가 범상한 선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과거를 보러 가서는 시험관의 취하고 버리는 데만 맡기고 한 번도 시속(時俗)의 구구한 짓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붉은 종이 위에 이름 쓰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한가하게 살면서 오직 문집과 사기를 읽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혼자 세월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 청백하고 지조가 높은 것을 탄복하였다.

정재륜, 『공사견문록』


김수증은 김상헌의 손자로 동생들이 정승 자리에 오른 반면에 그 자신은 과거를 계속 봤는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이런 부정행위 중에서 숙종시기 언급된 대표적인 과거의 폐단인 과거 팔폐(科擧八弊)를 강조해서 작성했으며 실제로는 더 막장인 경우도 많았다. 참고로 조선시대 구한말 때는 이런 행위를 감인고(堪忍苦)라고 했으며 이런 폐단은 KBS 스펀지 79회 방송분에서 소개되었다.그리고 현대에도 시험 칠 때 쓰이고 있다

  • 고반(顧盼): 고개를 돌려서 옆의 답안지 베끼기. 부정행위의 기본중의 기본.

  • 낙지(落地):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서 다른 사람을 보게 하는 것. 응시자 사이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매수된 시험관이 행하기도 한다.

  • 설화(說話): 옆사람과 의견을 나누어서 답을 작성하는 것.

  • 수종협책(隨從挾冊): 커닝 페이퍼. 커닝의 기본인 커닝 페이퍼는 과거의 역사와 함께 했다. 수종협책은 책 자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콧구멍 속에 숨기는 의영고(義盈庫), 붓 속에 숨기는 협서(狹書) 등 다양하게 존재했다. 상술했듯 각각 방안에 집어넣어서 시험을 쳤던 청나라 시대에는 커닝페이퍼 속옷까지 등장했다.

  • 암표(暗標): 응시자가 시험관과 미리 정해놓은 표시를 시험지에 해서 자신을 알리는 방법. 답안지에 적힌 응시자의 이름은 합격여부가 밝혀진 뒤에나 시험관들이 볼 수 있었기에 만들어진 방식이다. 시험관을 매수했다면 반드시 나오는 방법 중 하나다. 이 암표와 필적을 통한 부정 행위를 막기 위해서 서리들이 모든 시험지를 다시 작성해서 시험관이 검사하게 하는 과장역서법(科場易書法)이 고려말부터 시행되었다. 물론 촉박한 시간에 대량의 문서를 수필로 다시 작성해야 하며, 서리를 매수하는 등의 문제점이 있는 등 과정역서법 자체는 폐단이 많아서 폐지가 검토되었지만 결국 과거가 없어지는 고종시기까지 꾸준히 행해졌으므로 암표는 그리 흔하게 행하지는 않았다.
전하는 얘기에는 홍국영이 이 수법으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한 대갓집 하인을 매수해 그 집안의 편지를 모조리 손에 넣어 샅샅이 살펴본다. 찾고보니 그 집 사위가 곧 과거를 보는데 장인이 사위를 위해 시험관과 짜고 답안지에 사위가 이름을 쓸때 옆에 작게 동그라미를 그리면 그 사람이 자기 사위니 합격시켜달라는 얘기였다. 홍국영은 이 수법대로 자기도 똑같이 따라해 합격한다.

  • 외장서입(外場書入): 시험지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 말 그대로 외부와 짜고 모범 답안지가 과거장 안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는데 이를 대술(代述)이라고 하며, 이를 위해서 대나무 관을 사전에 매설한 방법을 시도했다가 들통난 경우가 숙종실록에 실려있다. 응시자가 밖에 나가서 답안지를 작성한 후 다시 들어와서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정도 되면 말그대로 명문가문으로 시험관 등의 전체 매수는 기본이다.

  • 음아(吟哦): 서로 짠 옆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웅얼거려서 말해주는 방법. 앞서 언급된 설화와 다른 점은 설화가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대화라면, 이쪽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독백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설화는 A↔B, 음아는 A→B 형식이다. 때문에 옆 사람에게 답을 알려주는 용도부터 시작해서, 라이벌 방해목적까지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 이석(移席): 자리 옮기기. 시험치는 도중에 차를 마시러 가거나 화장실을 가는 등의 이유로 한 번 자리를 뜰 수 있었는데 그걸 이용한 방법이다. 작게는 매수한 사람 근처로 옮기는 것부터, 크게는 다른 사람과 자리 바꿔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시험장을 경비하는 이졸을 미리 매수한 사람으로 교체해서 하는 부정행위.

  • 입문유린(入門蹂躪): 과거 시험장에 응시자가 아닌 사람이 출입하는 것. 잡상인 등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한 명을 위한 태스크 포스 팀을 가리킨다. 명문대가 정도 되면 일개 중대에서 대대규모가 움직였다. 다른 부정행위의 기본이 되는 부정행위.

  •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시험지에 장난을 친 다음, 그 답안지를 이리 저리 손봐서 합격하는 행위. 부정행위라기 보다는 이미 과거제도를 엿먹이는 문제점 그 자체다.
나쁜 예로는 잔존 소론의 박멸을 불러일으킨 심정연의 시험지 역모 사건이 있다. 한편 장난괴수로 유명한 이문원은 시험지에 딱 세글자, 臣不文(신은 글을 모릅니다)를 냈는데, 마침 그때 영조가 친람한 과거였다. 영조가 보기에 답안지에 몇자 휙쓰고 가버리니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괘씸해 답안지를 가져와 보니 저 세글자만 달랑 써있어 대노했다. 당연히 시험장은 발칵 뒤집혔다. 어명으로 신원을 밝히기 위해 비봉을 떼는 바람에(당시 시험 답안지에는 자기 이름과 4대조 이름을 기입해야했고 지금의 포스트잇처럼 이 부분은 비봉이라 하여 살짝 붙여놓고 응시자가 과거 합격했을 때만 떼어내야했다.) 이문원은 과거합격자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더욱이 이문원의 부친(실제로는 양부) 이천보가 생전에 영조가 아끼던 신하였고, 본인이 사도세자 보호에 힘쓰다가 사망해 영조가 그에 대한 부채감이 컸던 탓에 영조의 분노가 녹아 버려, 되려 이문원은 칭찬을 받고 과거에 합격했다. 물론 이 얘기는 그냥 야담이고, 실제로는 음서로 진출했다가 다시 과거를 봐 병과에 합격에 관직을 시작했다.

  • 절과(竊科): 합격자의 답안지에서 이름 부분만 미리 정해진 사람과 바꿔붙인다. 이 경우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은 합격자 하나가 확실하게 떨어진다. 기본적으로 시간차 부정행위이기 때문에 일정시기까지는 답안지 자체를 제출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허락을 받고 제출하게 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기술하는 선착순의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꾸준히 문제시 되었다.

  • 정권분답(呈券分遝): 시험지 바꿔치기. 옆사람과 바꾸면 환권(換券)이라고 한다.

  • 차술차작(借述借作): 다른 사람의 글을 빌려 쓰는 것. 넓게는 대리시험까지 포함하지만, 좁게는 여러 사람을 미리 데리고 들어간 다음에 각각 답안지를 작성하게 하고 그중에서 잘 된 것을 답안지로 제출한다.

  • 혁제(赫蹄): 시험관 매수. 부정행위 가운데에는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하는 것도 많았다.

  • 혁제공행(赫蹄公行): 과거 제목을 미리 아는 것. 시험관 매수인 혁제를 배경으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부정행위가 이뤄지는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중간단계의 부정행위.

  • 시험지 빨리 내기: 역시 조선 후기에 성행한 방법으로, 응시자수의 증가로 채점할 시간이 부족해지자 채점을 대충대충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방법이다. 날이 갈수록 응시자수가 폭증해서 첫 줄만 읽고 대충 채점하거나 아예 선착순으로 하는 일이 생겨났다. 게다가 선착순의 숫자도 대충 300명 선에서 끊어졌는데, 응시자 숫자는 많으면 만 명 단위였다. 이건 과거 합격자가 당일에 발표되었는데, 시험관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즉일방방(卽日放榜)이라 해서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는 단어다. 따라서 시험지를 빨리 내지 못하면 아예 채점도 받지 못하므로 필사적으로 시험지를 빨리 제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리잡기, 제출과정의 몸싸움으로 인한 선접군이라는 전문 싸움꾼의 등장 등 폐단이 많았다.

  • 답안지 훔치기: 나중에는 아예 시험장을 습격(해서 시험관을 구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조선 말기, 과거제가 완전히 난장판이 되면서 장내에 막걸리를 팔러온 상인들이 자리잡기도 했다. 난장판의 난장이란 표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다른 유래는 행상인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서 벌이는 시장인 난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과거시험에 관한 조선시대 그림들 중에 시험장에서 술마시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 진짜로 있다. 이렇게 단체전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접'이라고 한다. 대개 접은 사수, 거벽, 선접군으로 나뉜다.

  • 접: 조선 후기 과거제도 자체가 부패하자 나온 부정행위 단체전 조원들. 아래 나오는 선접군, 사수, 거벽, 거자를 묶어서 '접' 이라고 칭한다.
    • 선접군: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 과거제는 시험문제를 나눠 주는게 아니라 써 붙여둔 걸 수험자들이 와서 보고 답을 작성하기때문에 자리가 나쁘면 문제를 굉장히 늦게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선접군들의 자리다툼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목숨도 걸린 일이다. 아침에 선접군들의 자리쟁탈전에서 밀려나 쓰러진 사람은 그대로 세상 하직, 뒤에 몰려올 일만에 가까운 인파에 그대로 깔려버리기 때문이다. 더불어 선접군은 답안지 제출시에도 용맹을 발휘하여 어떻게든 자기 접의 시험지를 300장 안쪽으로 밀어넣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는 엽기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에 나오기도 했다.
    • 사수: 글을 베끼는 사람. 답안의 내용만 보는 게 아니라 얼마나 서체가 바르고 곧은가도 점수가 되기 때문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거벽이 만들어낸 답을 간지나게 써내기만 하면 된다.
    • 거벽: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 적당히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맡으며 접의 다른 사람들의 답안까지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수종협책(커닝) 기술이 있으니 박터지게 공부하는 놈은 거의 없었다. 엽기조선왕조실록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파트를 읽어보면 확 와닿는다. 주로 머리가 엄청 좋은 노비를 구해다가 시킨 뒤 급제하면 면천 + 종가 친척 어르신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호적세탁을 상으로 내렸다. 그러니까 과거 급제만 시켜주면 노비에서 친척 동생으로 위치가 바뀌는 것이라 대신 문제를 풀어주는 노비의 입장에서도 상당한 이득이었다. 그래서 거벽 일을 하는 사람은 노비,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신분이나 집안이 미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이런 사람들은 급제해서 말단관리부터 시작하느니, 부정행위에 참여해도 돈 버는 게 더 이득이라고 봤던 것.[ 당시에는 글은 꽤 읽었으나 집안이 가난하거나 여러 사정으로 과거에 응시 못하는 선비들이 부잣집에 문객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개인과외 알바를 뛰기도 했고, 그 집 자제 대신 이렇게 과거에 참여해 대신 답안을 작성해 주기도 했다. 요재지이로 유명한 포송령도 나이 60 되도록 밥 먹고 살던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 거자: 과거시험지에 최종적으로 이름을 쓰는 사람. '접' 의 구성원들 중에서 선접군, 사수, 거벽이 다 해놓은 밑작업의 수혜를 보는 사람이다. 즉, 선접군, 사수, 거벽으로 구성된 TF 팀이 만들어 놓은 답안지가 급제할 경우 관직에 오르는 장본인이다. 당연하게도 거자는 선접군, 사수, 거벽의 고용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거자는 보통 이들을 고용할 만한 재력이 있는 집안일 확률이 높았다.

4. 평가[편집]



4.1. 장점[편집]


능력을 지닌 사람을 비교적 공정성 있게 뽑을 수 있다는 점은 다른 방식에 비해 확실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 골품제의 결함인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4두품이면 나마 위로 못 올라가고 그 대신 무능한 진골이 이찬까지 올라가서 수뇌부가 무능화하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장점 중에 부각되는 부분이다.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은 수뇌부의 능력을 탄탄히 하기 때문이다.

과거 제도의 시초는 한시적이긴 하지만 신라시대 관리등용방법으로 설치된 독서삼품과가 788년에, 고려시대에는 958년에 중국인 쌍기의 건의로 받아들여진다. 이 당시 유럽은 봉건제 사회로 영주와 기사들은 자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했으니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칼로 점령하고 그들 위에 서야하는 시대에서 과거 제도는 고대/중세인 그 당시의 개념으로 보자면 공정성과 합리성 측면에서 대단히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시스템이다.

일단 전 세계적으로 따져봐도 관직을 임명하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는데, 딱히 그 전의 시스템이 과거 제도보다 특별히 더 공정하거나 유능한 인재를 임명하는데 합리적으로 작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이른바 전근대 시대에 과거제와 비슷한 제도로는 오스만 제국에서 시행했던 예니체리 및 관료 선발제도인 데브시르메 정도가 있을 것이다. 원래 기독교 피지배층에게서 세금 대신 능력 있는 남자아이를 갹출하다시피 징집한 제도로, 원래 황제의 근위대인 예니체리를 뽑기 위한 것이었으나 15세기 전반기부터 관료도 뽑기 시작하고 15세기 중엽쯤 되면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쪽은 크게 보면 '시험→교육→시험→재능에 따라 배치' 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도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이들만 응시할 수 있었고 관료나 장교의 아들은 시험을 볼 자격이 없었다. 애초에 제도의 목적 자체가 대를 이어 관직이나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기 때문.

그 외에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 관리를 뽑는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1. 추첨제
고대 그리스폴리스 등에서 나타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기회를 가진다는 '공평함'은 확보되지만 능력상 합당한 인재가 선출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 고대 그리스에서도 당연히 제비뽑기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알고 있었기에 선출직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 등 유명 정치가들은 전부 그러한 선출직 출신이었다. 한편으로는 시민들도 언제 제비뽑기로 관리가 될 지 모르니 평소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배심제 등 일부 제도에서는 사용된다. 주로 사법이나 감사 관련인 경우가 많다.
  1. 선거
공화제 국가에서 나타난 방법. 선거는 많은 사람에게 관직을 인정받았다는 '정당성'은 확보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번거롭다는 문제가 있다. 사실 고대에 선거가 어려운 것은 교통/통신 수단의 한계 탓도 크다.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라면 모를까 조선 정도만 해도 걸어서 며칠은 걸린다. 게다가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전의 선거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후보자 자격, 투표권, 개표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적절하고 불평등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또는 그랬다는 마타도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당성도 확보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공화제가 주류 정치체제가 된 오늘날에는 선출직 공무원이 폭넓게 나타나며, 특히 기술관료보다 고위직에 적용된다.
  1. 상속세습
관직의 세습은 중세까지는 세계적으로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정도 중세적인 관료제가 나타난 나라에서도 아버지의 관직을 자식이 세습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흔히 있는 직업의 세습 관념이 관직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공무의 위탁·수행이 명예와 위신, 부에 대한 대가로 여겨졌다. 다만, 조선시대의 아전이나 신량역천, 일본의 부라쿠민, 유럽의 사형집행인 등 실제 맡은 일이 고되고 권위가 없는 경우 직역(職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요역(徭役)에 가까운 취급이 되고는 하였다.
해당 사례로는 서유럽의 봉건제가 잘 알려져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천거제나 과거제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널리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가 정착한 후에도 부분적으로 남았다. 대표적인 게 바로 동양의 음서. 다만 음서의 경우 곧이곧대로 부친의 직책을 물려받는 건 아니기에 차이는 좀 있다.[24] 오늘날에도 북미의 몇몇 시골 보안관 직책은 여전히 세습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직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1. 천거, 발탁
관료나 호족, 명사 등 유력자의 천거나 발탁. 천거 제도는 처음으로 족벌주의에서 탈피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고, 대개 추천자의 평판과 위신에도 영향을 주었으므로 최소한 능력이 있는 자를 선별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잘 작동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유력자의 발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인재는 한계가 있었으며, 유능한 인재가 유력자에게 기대게 되어 파벌과 문벌이 강화되는 부작용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발탁 과정의 공정성 역시 담보할 수 없다보니, 나중에는 사실상의 세습제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25] 예외적으로 무인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등 출신에 관계없이 실력으로 출세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맡는 직위들은 상대적으로 요직이나 고위직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유럽에서는 매관제나 엽관제, 실적제 등과 복합적으로 결합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근세 영국 해군에서는 제독은 물론이고 함장은커녕 일개 장교조차 돈으로 바로 얻을 수가 없고 후보생도 경험을 해야 했으나, 일단 장교가 된 다음에는 부족한 함장과 제독 TO를 놓고서 경쟁자를 누르고 빠르게 진급하려거든 상급자들인 함장이나 제독, 해군대신 등의 인사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는 민간에서도 마차가지였는데, 가령 빅토리아 시대의 각종 사용인(가정교사, 집사, 메이드 등)들은 계약기간이 끝나거든 기존 고용주에게서 소개장이나 추천서를 받으면 다른 곳에서도 수월하게 재취직할 수 있었고, 아예 새 고용처를 직접 연결해주기도 하였다.[26]
서구권, 특히 영미권에서는 아직도 천거 제도의 영향이 남아 있어 전 직장의 상사나, 신입이라면 담당 교수의 추천서(reference)가 있다면 구직 시에 큰 우대 조건이 된다. 사람을 쓰는 데에 직접 겪어본 사람의 추천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인데, 추천해주는 사람도 본인의 지위를 내걸고 '이 사람은 유능하다.'라고 보증해주는 것이니 아무나 추천서를 써주지도 않는다. 만약 한국에서 공채 우대조건에 교수 추천서가 들어간다면 인맥 채용이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실제로 추천서가 먹히려면 써주는 사람이 누구나 인정하는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고, 막 취업시장에 나온 젊은이가 그런 사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부모의 인맥.
  1. 매관제
공직이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지만, 동시에 권력을 행사할 기회이기도 했으므로, 수여자와 피수여자 간 상호 이익을 위해 매매되기도 하였다. 특히 유럽에서 지방 말단 관료는 공식적으로 돈 주고 자리를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근세로 가면 민간 관료뿐만 아니라 장교단도 매관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27]
매관제도 나름의 장점은 있었는데, 돈 주고 관직을 구할 만한 사람은 대개 부유한 상류층이었고, 사실상 이들이 공무를 대행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인사 채용은 물론 공무 과정에서의 비용도 많은 경우 매직으로 해결하고 세금과 국고를 아낄 수 있었다. 고급교육의 기회도 애초에 잘 사는 집안일수록 누리기 쉬웠기에, 생각보다는 잘 굴러간 편이었다. 군주권이 강한 경우 아예 그러한 직위를 강제로 맡아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한 사람이 돈으로 관직을 꿰어차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공정성 확보가 어려워서 차츰 사장되었다. 다른 제도와 달리 민주주의나 공화주의하고도 맞지 않으므로, 현대에는 공직은커녕 사기업에서도 비리로 간주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1. 엽관제
정당에 대한 충성도와 기여도에 따라 공직자를 임명하는 인사제도. 선거제와 유사하게 엘리트주의를 견제하고 민주주의 실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나, 직무에의 전문성이 결여되고 천거제나 매관제에서처럼 부정부패로 흐르기 쉽다.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지닌 행정부가 국회의원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대표적인 엽관주의적 사례이며, 비례대표제도 일종의 엽관주의와 실적주의의 절충으로 여겨진다.

과거 제도가 비용이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다른 방식은 과거 제도 이상으로 '문벌'이나 '재산'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공정성'을 확보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전체의 모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능력을 살리는 시험을 보게 하고, 이로서 유능한 인재지속적으로 공급받는 방법을 제도화하자는 것은 사실 굉장히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이와 같이 철저한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오늘날 현대 사회의 기틀을 이루고 있으며, 현대인의 관점에서나 당연해 보일 뿐이지 그 시대 사회의 기준에서는 당연한 게 아니었다. 과거 제도에서 나타난 폐단들은 결국에 신분에 의한 채용이나 매관매직 등인데, 과거 제도 이외의 제도들은 그런 폐단을 처음부터 감수하는 국가 공식 임용 제도와 다름이 없었다.

과거 시험의 난도를 보면 현재 시행되는 어떤 시험보다도 높다. 현대 한국 기준으로 가장 어려운 입직시험이라면 입법부(국회사무처) 5급 공무원을 채용하는 입법고등고시, 행정부(인사혁신처) 5급 공무원을 채용하는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 과거에 외무고시로 불렸던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 사법부(법원행정처) 5급 공무원을 채용하는 법원행정고등고시 지금은 폐지되고 법학전문대학원변호사시험으로 대체된 사법시험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과거 시험은 이 시험들보다도 수준이 높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기본적으로 사서삼경은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역대 역사의 내용도 전거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자치통감 수준의 역사서의 내용도 알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 답안을 작성하는 언어도 한국어가 아닌 한문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한문은 구어체인 백화문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 정도가 기본으로 장착해야 하는 능력이다. 최종적으로 전시에서 나오는 문제를 답하고 자신의 논리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에 종합 논술의 성격도 가진다. 그리고 과거의 답안은 절대로 길면 안 됐다. 종합 논술의 답안을 단 한 문장으로 담아내는 능력까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시험을 통과한 조선시대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한문구사 능력과 유학적 소양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능력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을 경우에 잘 드러난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지만 한문으로 필담을 나눌 수 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얻은 역사 지식과 경전의 이해는 물론 한시를 주고받는 광경은 조선시대 기행문을 보면 매우 흔하게 관찰된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를 파견할 때 에도 막부는 전문적으로 한시와 한문을 작성할 수 있는 제술관(製述官)을 요청했고, 당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파견된 통신사 일행을 만나기 위해 천금도 아끼지 않고 문집의 발문과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고 자신이 지은 한시와 문장을 비평해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자기 능력을 검증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과거시험이 실무능력보다는 '쓸모없는' 유학 고전이나 암기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러한 비판은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던 시대의 환경을 무시한 것이다. 전근대의 유학은 국가 경영의 기본 뼈대가 되는 학문으로, 그 시대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실용적이었다. 또한 과거제도의 시험 출제내용도 기초 시험만 경전을 따져봤을 뿐, 본시에 이르러서는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변경지역이 위태로운데 이를 혁파할 방안을 논하라."등 실무에 필요한 내용을 시험에 출제하였다.

실제로 북송 이전에는 문벌귀족 가문이 왕조보다도 훨씬 더 길게 존재했다.[28] 이에 반해 북송 이후의 문벌 가문은 그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과거 제도가 존재한다면 문벌은 스승과 제자가 여러 대에 걸쳐서 과거에 합격해야 형성이 되는데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자가 100% 과거에 합격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시험관 - 합격자가 문벌을 형성한다고 해도 동아시아권에서 정쟁이 벌어지면 관료들이 죽거나 좌천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문벌이 형성되기는 매우 어렵다.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 때 문벌귀족과 권문세족이 판쳤지만, 조선시대로 가면 과거제 합격유무에 따라 양인의 신분이 좌지우지되면서 양인노비의 제도가 자리잡히게 된다. 양반 집안이 3대를 넘어가도 과거를 통과하지 못하면 상민으로 신분이 추락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상민이 양반으로 출세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지만 있기는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충신. 이쪽은 아예 노비 출신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워 양인이 되고, 그 후 과거에 합격해서 양반이 되었다.

또 과거 제도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장원 급제의 꿈을 안겨주었다. 경쟁률이 매우 낮기는 해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조금이나마 기회가 있는 것은 사회 분위기에 매우 큰 차이를 준다. 이것이 근대로 오면서 신분제가 무너진 사회에서 누구나 공부만 열심히 하면 신분상승으로 사회에 지도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고, 일제강점기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는 힘들게 살아도 자식만은 나아지길 바라며 교육에 온갖 정성을 쏟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과적으론 근대화에 발판이 되고 높은 과학기술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래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루듯 현대에 이르러서도 전 세계에서 공무원은 물론 대기업에서 직장인을 뽑는 방식은 과거 제도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관료제처럼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금까지도 과거 제도와 비슷한 시험 제도가 존속해 올 수 있던 것은, 현재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방식 중에서 그나마 가장 공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과거 제도의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사실 그 대부분은 국가가 크게 부패하여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요식행위로 전락했을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4.2. 단점[편집]


네가 곡산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간 뒤 내가 과거공부를 하라고 한 적이 있었지. 당시 주위에서 너를 아끼던 문인이나 시를 짓던 선비들은 본격적인 학문을 시킬 일이지 과거 따위나 시키고 있느냐고 모두 나를 욕심쟁이라고 나무랐고 나도 마음이 허전했었다.

--

정약용, 1802년 12월 22일 강진에서 귀양 살면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단점으로 제일 먼저 지적되는 문제가 사회가 경직된다는 점이다. 먼저 과목이 국가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으로 결정되기에 기득권층이 원하는 사상을 사회전반에 강요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외의 새로운 사상이나 발견을 허용하지 못하여 오히려 탄압하게 되어 사회가 퇴보한다. 조선과 중국은 사회가 유학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면 갈수록 유학적 사고를 더 강요하여 결국 국가가 퇴보해, 19세기쯤 가면 조선과 중국은 서구권에 비해 전방위적으로 밀리게 된다. 다만 이는 과거제 때문에 그렇게 됐다기보단 특정 사상을 강요할 수 있는 기득권의 막강한 권력이 이미 존재했고 그것이 과거 제도로 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29]

유교 철학이 더 이상 시험 필수과목이 아닌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과거 시험의 필수과목이던 유교 경전을 달달 외우는 걸 잘 하는 인재가 정말로 효율적이고 유능한 인재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점도 있다.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이 필수과목이라 해외에서는 오히려 과거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또한 아무리 실무 지식으로 시험 주제를 구성하여도 막상 실무에 들어가면 반드시 괴리가 생기기 때문에 실제 시험 성적과 실무 실력의 차이가 반드시 드러난다. 대체로 실무실력이 나중에 시험 성적을 따라가기에 잘 부각되지 않는 맹점일 뿐 분명 시험만능주의의 폐단 중 하나이다. 실무지식만으로도 이런데 유학만을 다루는 과거제는 더 심했으며 단순한 학문의 경직을 넘어 정책의 경직까지 퍼졌다. 도입 초기인 세종 때까진 문제 없이 잘 굴러갔으나 결국에는 유학에만 빠삭한 인재가 관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 특징상 이후의 국왕대에서 점차적으로 정통 성리학파인 사림파가 대두되면서 조선은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사림파의 비판 참조.

게다가 시험에 의한 인재 선발의 전체적인 문제로 바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별하지는 못한다. 시험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점이 최악의 문제점이다. 이점은 현대의 공무원 선발 시험들도 마찬가지긴 하다. 사람의 됨됨이가 인재 선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나오는 최악의 경우가 현대에도 있는데 일반 공무원들도 그렇지만 특히 권력을 주름잡는 정치검사/판사들이며, 그들의 권력을 위해 뒤를 봐주는 집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 직책을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 맡을 때의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인성 부분에 한해선 차라리 과거제도 발달 이전 고대 동양에서 천거하던 시절에는 이런저런 대비책이 있었다. 추천해서 등용된 자가 사고를 치면 추천한 사람도 같이 털렸기 때문에 추천권을 가진 사람이 평소 행실을 체크해서 신중히 추천했기 때문에, 아는 건 많지만 인성이 개차반인 사람을 거를 수 있었다. 실제로 조광조는 성적으로 뽑는 과거시험이 행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현량과를 제안했고[30] 그 외에 몇몇 실학자들처럼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천거제도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천거제의 단점이 과거제의 단점보다 많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과거제의 단점을 인식하여 대안으로 제시할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성리학적 유교 사상에 의한 정치체제를 더욱 공고화됨에 따라 과거시험의 비중은 더욱 커졌고, 사회적으로도 사람이 출세하려면 사실상 과거 시험을 합격하여 양반이 되는 것 외에 별다른 게 없다보니 소위 ‘과거만능주의’ 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일단 과거 자체가 워낙에 준비기간이 긴데다가 난이도까지 어렵다보니 수험기간만 수십년이 넘은 수많은 장수생을 양산했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서얼이나 평민들까지 과거시험을 준비할 정도로 응시생만 10여만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합격률은 더욱이 낮아졌다. 합격도 이러한 상황에서 임용은 더욱 끔찍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 기득권이 보수화 되어가면서 최고위층 유력 가문만 임용이 되는 상황이 펼쳐지다보니 과거 합격을 통한 관직 임용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최소한 양반 지위라도 유지하기 위해[31] 생업을 내팽개치고 일생을 과거시험에만 매달리는 폐단을 낳았고, 고시낭인이 됨은 물론 집안까지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 사람들을 현대의 시각으로 단순한 잉여인간이자 등골브레이커 정도로만 폄하할 수는 없다. 당시의 과거 준비생들은 합격 자체가 자신의 입신뿐만 아니라 가문 자체의 생존과도 직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렵고 긴 시간동안 준비해서 과거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자들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한문 실력이 없는 사람에 대해 강한 차별의식을 가졌고, 그 대상이 국왕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조선 영조는 즉위 전에 경전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상소문이나 신하들의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때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영조를 무시했다. 이는 영조의 컴플렉스가 되어 사도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하거나 따라가지 못할 때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다그치게 되며 나중에는 아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영조 본인도 경전 공부에 노력을 했는지 나중엔 신하들이 쩔쩔 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험 제도는 그나마 다른 방식에 비해 공정하기는 해도 관리 감독이 잘 이루어져야 이러한 장점을 유지할 수 있다. 시험 잘 봐봤자 담당관이 멋대로 조작해버리면 합격하지 못하며 시험을 개차반으로 봐도 담당관이 뒤를 보면 합격할 수도 있다. 현대에는 여러가지 부정행위 방지 대책을 만들어놨지만 조선시대엔 이런 부분이 훨씬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조선 말기의 과거제가 이러한 폐단이 심했다. 예를 들어 그 사림파도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면서 '산림직'이라는 특권을 얻는데, 과거시험 없이 다이렉트로 벼슬을 받는 제도였다.

일본의 "일중 비교 교육사"에서는 중국에서 서양 학문의 도입이 지연된 이유 중 하나로 중국의 학문 교육이 경직화 되었고, 에도시대의 일본 학문과는 유연성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근대화가 늦은 이유의 하나로 '과거 제도의 영향'을 꼽기도 한다. 중국은 과거에 급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관직을 얻어 권력을 쥘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권의 중추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교육의 중심은 과거가 되었고 사회 전체의 지식 강화보다는 개인의 입신양명에 필요한 유학 이외의 학문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이렇다보니 사회는 관료제의 특성상 경직되고 유학 이외의 과학, 의학 같은 실용적이지만 과거 급제에는 한톨의 도움도 안되는 학문이 천대받는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유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문의 발전이 매우 지체되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중국의 학습자는 지위와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되었으며, 권위와 권력에 밀접하여 논쟁적, 창조적인 학문이 배제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제도를 시행한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논리이며 실제로 조선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5. 세계의 과거 제도[편집]



5.1. 중국[편집]




중국은 과거제의 본적지로서 과거 제도의 기원은 지방 추천자를 대상으로 적합성을 시험하는 제도로 이미 한나라 때 있던 찰거 제도이다. 수나라 이전 중국에서도 한국사와 마찬가지로 천거로 인재를 발탁했고,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관록 2천 석 이상의 관리가 3년간 근무하면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1명 추천하여 낭관으로 올릴 수 있는 제도인 임자제(任子制), 향거리선제, 구품관인법 등 이런저런 발상을 시도했지만 각자 실제 시행 과정에서 단점이 부각되었다.

중국의 과거 제도는 중국 수나라의 선거제에서 유래하였다. 수나라 문제가 선거제를 최초로 시행했다. 수나라 과거 제도는 24사 수서에도 기록이 과거 시행은 물론 합격자 기록도 없다고 한다. 수문제는 한나라 때의 찰거 제도를 선거라는 제도로 시행하여, 지역에서 추천한 인재들 중에서 지방관이 추천한 인재를 바로 등용하는게 아니라 적합한 인재인지를 다시 판별하는 제도였다.

수나라 멸망 이후 당나라 초대 황제 당고조 무덕 4년 (621)년 조령을 내려 각 현에서 추천한 인원을 주로 모여 시험을 보고 주에서 검증한 후 중앙으로 올려 보내라고 하면서 시험을 보는 형태가 나타난다. 다만 수-당시대 과거는 당나라가 망하고 고려시대에 쌍기가 들여온 과거의 형태와 매우 다르다. 과거 왕조의 구품중정제와 북송시기에 정착된 일반적인 과거시험의 과도기의 제도였다. 왜냐하면 첫째 정기적이지 않으며, 둘째 시험 관직임용이 성적만으로 결정되는것이 아니며[32], 셋째 후대 명경과와 진사과처럼 명확한 기준이 아닌 시류에 맞춘 즉흥적인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으나 과거 과도기적 성격이 강하고, 급제자가 한번에 십수명에 불과한데다가 등용도 잘 되지 않았다. 중당시기 백거이의 진사시험 동기는 16명이었다. 성당시기 천보 연간엔 응시자 모두 탈락시킬 사례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으로 자리잡지 못 했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빈공과라는 외국인 전형도 운영했다. 전시 제도는 송나라 때 생기지만 황제 앞에서 최종 순위 결정전을 치르는 전시의 원형은 당현종 때 생겨난다. 그러나 당나라 때 순위 결정전인 전시는 제한적으로만 실시했다. 전시 횟수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번 안 된다.

과거 제도는 북송을 거치면서 정착되었다. 송대부터 황제의 앞에 나서서 시험을 치르는 전시(殿試)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초시 - 복시 - 전시 3시 상설 시스템이 확립됐다. 기본적으로 과거의 경우는 합격자와 시험관 사이에 스승과 제자 관계가 성립되는데, 전시의 존재로 황제의 권위에 큰 플러스 요인이 되게 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체제 자체는 측천무후 시대에 이미 완성되었지만 이후 사라졌다가 송대부터 완전히 자리잡았다. 중국 과거 시험제도와 폐해는 진사 3.1 항목을 참조. 이랬던 중국의 과거 제도는 한국보다도 더 늦은 1898년에 변법자강운동의 일환으로 개혁되고, 서태후 주도로 이뤄졌던 광서신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마지막 과거 합격자들 중 중국공산당의 시조로 알려진 천두슈가 있는데 그는 1896년 향시, 그 다음해인 1897년 성에서 치르는 성시에 급제했다. 이 때 이미 조선에서는 과거가 폐지된 지 2, 3년 후였다.

당나라가 존속하던 시기에 신라, 발해에는 과거 제도가 없었지만 당나라는 비교적 개방적인 왕조였기 때문에 많은 신라, 발해인들이 중국으로 가 외국인 전용 빈공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 3최로 일컬어진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모두 당나라 빈공과 급제자 출신이다. 과거 제도가 도입된 고려시대 때에도 원나라 시절까지는 중국에서 과거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은 명나라 대에 중단되어 조선시대부터는 중국 유학보다는 국내 과거 위주로 가게 된다.

중국은 조선이나 베트남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던 관계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도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 합격자는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고 하여 귀신조차 함부로 해칠 수 없다는 내용의 전설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또한 과거 시험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좌절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과거 수험생들을 지켜주고 그들한테 과거 합격의 축복을 베풀어준다는 종규라는 신도 생겨났다. 다만 과거에 불합격했다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황소홍수전 같은 불행한 경우도 나타나는 부작용이 있었다...

5.2. 일본[편집]


헤이안 시대에 도입되어 시행되었고 일부 하류층이 고위층까지 출세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문벌 성향이 강해지고 공경 귀족이 형성되면서 하류관료나 중류관료층을 배출하는 시험으로 고착했다. 그나마도 관학인 대학료가 무력해지고 사학이 창궐하면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등으로 유명한 스가와라(菅原), 오에(大江), 키요하라(清原), 나카하라(中原) 같은 특정 성씨가 과거 합격자를 장악하기 시작하고, 기껏해야 후지와라의 방계 가문이 과거 시험을 치는 정도였다. 과거 합격자는 아무런 배경이 없는 경우 8위에서 6위 사이의 하급 관료와 지방수령에 머물고, 사학 출신이면 5위, 특정 가문이라면 4위 정도의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 권력의 핵심인 텐죠비토라 불리는 종3위 이상 올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율령제가 붕괴되면서 과거시험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미 과거 제도인 중추인 관학이 기능하고 있지 않았으며, 1177년에 국학인 대학료가 화재로 전소된 이후에는 재건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세습이 기본인 사무라이 계층의 대두와 함께 이들이 사회 주도 계층이 되면서 실무 관료도 이들이 담당하였으므로 과거시험은 재도입되지 않았다. 다만 유교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에도 막부 말기 일부 번들에선 과거 제도 비슷하게 시험으로 번 내 관직을 뽑는 제도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5.3. 베트남[편집]


유교베트남에 들어온 이후 천 년 가까이 베트남의 관리 임용 제도로 사용되었으며 1075년에 처음으로 과거 시험을 실시했다. 시기는 한중일보단 좀 늦었던 편. 그래도 잠깐 하다 만 일본과 달리 한국, 중국처럼 꾸준히 이어지기는 했다.

과거의 급제자들은 그 순서에 따라 장원(狀元 - trạng nguyên), 방안(榜眼 - bảng nhãn), 탐화(探花 - thám hoa), 진사(進士 - tiến sĩ)라고 불렀다. 하노이에 있는 문묘(文廟 - Văn Miếu)가 과거 시험장으로 유명했는데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 수십 개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이 비석들은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응우옌 왕조가 사실상 프랑스 식민제국의 식민지화됐음에도 한국, 중국과 달리 일단 왕조 간판은 계속 달고 있었기 때문인지 한국과 중국에서 과거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참 동안 계속 시행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식민 통치자들이 남긴 과거시험 사진도 많이 남아 있으며, 프랑스 총독 폴 두메르도 과거시험을 참관해 기념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1919년 카이딘 황제가 프랑스의 입김에 의해 과거제 혁파령을 내려 베트남의 과거제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만화로 묘사된 베트남의 과거 제도

5.4. 근대 서구 및 현대 제도에 미친 영향[편집]


마테오 리치를 비롯하여 중국과 교류하던 유럽선교사외교관들에 의해 서양에 알려진 과거 제도는 서양의 정치 이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전까지 서양의 공무원 채용 시스템은 과거 이전 고대 동아시아와 비슷하게 신분제에 의한 세습이나 인맥(추천장)에 의한 채용(추천·천거), 제비뽑기, 그리고 제도적으로 인정되는 관직 구입이었기 때문. 이 전통은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 학생 선발과 회사의 직원 선발에 남아있다. #

봉건제가 유지되었던 중세 서양의 관료 채용 제도는 위와 같이 능력이 중시되는 시스템이 아니었으며,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때 중국의 존재가 알려졌는데 처음 알려졌을때만 해도 동방의 열강으로서 서구국가가 벤치마킹할 대상으로 여겨졌었다. 볼테르는 과거제도의 아이디어를 듣고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발제도로서 수천년간 번성하는 제국의 힘으로 지목하기도 했고 프랑스의 관료임명제도에 반영하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귀족계층은 기득권을 놓고 싶어하지 않았고 후일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그랑제콜로 현실화되고 오늘날로 이어진다.

유럽진보층에게 널리 퍼졌던 이 아이디어는 귀족들의 강건한 반대로 도입되지 않았는데, 군이나 행정부와 달리 귀족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덜한 식민지의 회사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영국은 노스코트-트레벨리안 레포트에 따라서 영국령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English East India Company)의 직원 채용 제도를 개혁하는 데 착수하였다. 그렇게 실행한 영국령 인도에서의 공개 경쟁 채용 시험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영국 정부1855년 영국 공무원 채용에도 시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정책 성공의 영향을 받아서 19세기에서 독일프랑스 등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차례차례 시험 제도의 도입에 착수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도 논의가 활발했는데, 로드아일랜드 주의 Thomas A. Jenckes(당시 하원)가 1868년 의회에서 최초로 공무원제도 개혁을 제안할 때, 그의 보고서는 한 챕터에 걸쳐 중국의 과거제에 대한 내용을 포함했다. 같은 해, 중국에 관심이 많은 상원의원 Emerson Etheridge은 보스턴에 온 중국 외교사절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과거제에 찬사를 표하며 Jenckes의 제안을 시행할 것을 강변했다. 실제로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이른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과거제를 비롯하여 중국의 문화를 열렬히 찬양하는 사람들이었고, 신생국인 미국이 중국의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유럽 같은 세습 왕족이나 귀족 계급이 생겨나지 않은 이유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습제도가 아니라 공정한 시험을 거쳐서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로 대표되는 중국의 문화를 본받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엽관제를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의견에 격렬히 반대했다. 일부는 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채용한다는 방식에 대해, 중국적이고, 이국적이고, 따라서 '미국적이지 않다'며 항의했다. 그리고 엽관제는 장점, 특히 관료제 내에서의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최대의 장점이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를 내건 미국의 현실상 공무원 시험은 좀 무리가 있었다. 특히나 이 당시엔 의무교육 같은 것도 없어서 결국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배우려면 돈들여서 학교에서 배우든 아니면 어떻게든 독학하든가 해야했다.

결국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제도는 1883년 미국에서도 도입했다.[33]

"동방에서 가장 계몽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의 정부(즉, 중국)는 능력주의에 입각해서 공무원을 선발하기 위해 시험제도를 선택했는데, 그게 장점이 된다면 우리 대륙이 황야 상태였던 지난 수세기 동안 중국인들이 공자의 정치윤리를 배우며, 을 읽고 나침반화약, 구구단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누려온 것을 우리가 따라 누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미국인이 공무원시험의 장점을 취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34]

"
- 미 연방정부 인사위원회(Civil Service Commission, 1883)


미국의 공무원 채용 시험을 도입한 법은 펜들턴법이라고 하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는 펜들턴법에 서명하기 직전에 여당 최대 파벌이자 가장 부패했던 파벌 콩클링파의 찰스 기토한테 암살당한다. 그리고 가필드의 부통령으로 가필드가 암살당하자 대통령이 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콩클링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1883년 펜들턴법에 서명하여 미국 행정고시가 발효, 1884년부터 시험 제도가 시행됐다. 이로써 과거 제도를 서양에서 재해석, 수용하여 나타난 근대적인 시험 제도는 점차 전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근대화된 시험 평가 제도는 시험 점수라는 공정하고 균일한 기준에 따라서 임용을 함으로서, 국가를 운영하는 공무원 관료 집단을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국가가 급여 주고 채용함으로서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귀족이든 평민이든 누구라도 정부 관료가 될 수 있었고, 이는 전반적으로 행정력의 상승을 가져왔다. 현대국가가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의 행정력을 보유한 이유는 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재 덕분이다.

어찌보면 문과, 무과, 잡과는 비록 갑오개혁 때 사라졌지만, 대한민국 이후 공무원 시험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문과는 행정직렬 공채로, 무과는 학사사관, 학군사관, 사관학교 등 장교 모집 과정이나 부사관,군무원 선발 시험으로, 잡과는 연구직 공무원, 외무공무원이나 기술직렬 공채로 돌아왔다고 봐도 사실상 맞아들어간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이 성리학이 기반이고, 조선의 정치가 대체로 성리학과 연관된 것을 감안하면, 어찌보면 성리학도 행정학, 헌법 등 행정직렬 필수 과목과 대비가 가능하니 행정직렬 공채로 봐도 이상하지 않고, 약무직이나 의료직 등도 크게 보자면 기술직군에 해당된다.

게다가 상술된 그대로 현대 근대 국가의 공무원 선발제도 자체가 서양에서 뿅하고 생긴게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그 과거제도를 보고 감명받은 영국인들이 동인도회사 직원들을 시작으로 근대화된 형태로 재발명한 것이다. 즉 오늘날 한국/중국 청년들은 조선/명청대와 같은 전근대 시대에서 의식주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다 달라졌지만 시험으로 고생하는 것만큼은 조상과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험제도도 문제가 있는데, 역시 위 단점에서 언급됐다시피 사회적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시험 보기전에 학습을 하지만 이러한 학습은 대부분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석사 이상)을 요하지 않는다. 또 시험보던 기간의 학습과 지식에 매몰되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험제도의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예를 들어 PSAT의 도입이 대표적이다. 단순히 지식을 판단하는 것뿐 아니라 논리를 판단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PSAT또한 시험이고 정해진 답을 찾아간다 하는 점은 변함이 없다. 결국 이 또한 정해진 사고를 벗어나게 하는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시험의 굴레만 더 탄탄해지게 하는 셈이다. 시험의 폐해를 시험으로 푼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에 시험이란 제도가 들어오기 이전과 이후의 장.단점이 각각 뚜렷하다. 그래서 이 두 사이의 장점만을 찾아 결합해 좋은 제도를 만들어 가는게 인류의 과제가 될 것이다.


6. 관련된 표현[편집]


  • 난장판 - 조선 후기의 뒤집어지던 과거시험장을 의미한다.
  • 압권 - 가장 뛰어난 답안지를 맨 위에 올려 임금에게 올렸던 것에서 유래한다.
  • 시험에 붙었다 - 과거의 합격자들은 바로 그날로 방을 통해서 벽에 붙었다. 이것이 앞에서 꾸준히 언급된 즉일방방이다.


7. 관련 문서[편집]




7.1. 문과[편집]



7.2. 무과[편집]




7.3. 잡과[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3 15:02:22에 나무위키 과거 제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봤다는 그 빈공과다. 참고로 고려의 경우에도 실제로 빈공으로 급제해서 조정에 출사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고려에 귀부한 탐라왕 자견의 손자 '고유'라는 인물이다. 고유가 고려의 과거를 볼 때 자격이 빈공이었다. 아직 탐라를 외국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남아있던 것이다.[2] 앞서 9재 학당과 비슷한 구분인 것으로 추정. 9재 학당은 악성재, 대중재 등 총 9개의 학당으로 나뉘어 있었다.[3] 임진왜란 당시 상주전투에 종사관으로 참전했다가 2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죽기 전에 “나는 18세에 장원급제하여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전세가 이처럼 불리하니 내가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왕을 뵐 수 있겠는가.”라는 유언을 남겼다.[4] 하지만 정약용의 집안은 끝끝내 정약용 살아생전엔 한양 복귀에 실패하여 말년에는 고향이기도 한 오늘날의 남양주시에 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는 다산신도시 등의 택지개발 덕에 수도권에서 제법 알아주는 곳이지만, 당대에는 한양으로 가려면 못해도 한나절 이상은 걸릴 거리였다. [5] 후술되겠지만 단순히 남녀노소 즐기는 국궁 연습이 아니라, 무과에서 보는 각궁을 다루며 기마술을 겸하는 연습이다.[6] 실제로 공직적격성평가는 사고력과 언어 능력을 본다.[7] 일단 병과로 합격한다고 해도 정9품이 주어지는데, 이 두 계급의 차이는 2년이나 되었기에 경쟁에 불리했다. 게다가 중앙인 경우는 과거로 선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채용했기에 이 루트로 시작한 사람은 지방의 말단에서만 계속 왔다갔다하다가 은퇴하는 결말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으로 치자면 도청이나 시청, 혹은 중앙행정기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행정복지센터 등지만 전전하면서 7~8급으로 은퇴하는 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던 셈.[8] 문관 외관직 종6품 현감(縣監)이 이에 해당한다. 사또 항목 참고[9] 당연히 이 시점에서 말하는 것은 관학이다. 사학만 판을 쳐서 관학을 진흥시킬 방법은 과거 제도가 존재했던 모든 동아시아권 국가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관심사였지만, 단 한 곳도 제대로 성공한 곳이 없다.[10] 실제로 7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려면 15-21년 정도 걸린다.[11] 그렇다고 해서 군인을 정승·판서에 임명할 수도 없는일 아닌가? 대한민국도 군인은 총리, 장관까지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국가'라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12 때 전두환이 현역 군인 신분으로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때는 정상적인 국가 꼴이 아니라 막나가는 상태여서 생긴 예외였다. 그렇지만서도 조선시대 무인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행정공무원의 면모도 있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12]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직업군인 등 체력을 요하는 특정직 행정공무원 혹은 교정직 공무원 등 공안직군[13] 현재도 전문직 자격·면허증은 그 시험을 주관하는 주무부처 장관의 직인만 찍히는 것과 같다.[14] 사실 이들도 품계를 줬다. 잡직계라 하여 문·무반의 품계와는 명칭부터 달랐고 종9품에서 정6품을 끝으로 더이상 올라갈 수 없었으며 이들이 문·문반의 정직을 제수받으면 1품을 강등하는 차별이 있었다. 잡직계의 품계별 명칭은 산계 문서에서 다루고 있으니 참조바람.[15] 잡과 출신이어도 종5품 이상의 품계를 받는 경우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으며 그마저도 양반 가문 출신으로 잡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적어도 양반 가문에서 서자는 돼야 기대를 해볼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허준이다.[16] 이 점에 대해서는 동반 잡직보다 서반 잡직의 형편이 더 나았다. 서반 잡직은 실력이 좋으면 무과 전시의 기회를 줬지만 동반 잡직은 국왕의 눈에 들지 않는 이상 꿈도 꿀수 없었다.[17] 고려시대에는 일관이라고 불렀다.[18] 당시 판검사 역할을 하던 형조(대법원,고등법원) 관리나 아전(지방법원)는 문과, 이과 시험으로 뽑았다.[19]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20]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성균관 대사성을 겸임[21] 동성 동본이기 때문에 제외, 본관이 다른 이씨도 왕비 간택에서 원칙적으로 제외한다.[22] 무과 급제자의 수는 당홍계와 토홍계를 합한 것임.[23] 무과 급제자의 수는 당홍계와 토홍계를 합한 것임.[24] 선대가 역임한 그 자리를 그대로 바로 세습하는 것은 아니라 품계가 낮고 녹봉과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 산직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대체로 어릴 때 일찍 받는 경향이 있어서 빠르게 공직 경험을 쌓았고, 고관의 자식은 아래의 추천이나 발탁으로 요직에 가기 쉬웠다. 그래도 결국 능력이 있어야 제대로 진급을 하였고, 유능하다면 기왕에 과거까지 응시하여 명백히 보여주려는 하였으므로, 실제 고관대작들은 음서 출신이어도 이후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5] 향거리선제구품관인법가 대표적이다. 천거, 발탁도 대상이 주로 유력자의 자식들이나 친인척 등 권문세족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줄이 없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발탁되기 어려웠다. 심지어 현량과의 사례에서 보듯 지배층 내에서도 특정 파벌에 유리하도록 악용되기도 하였다.[26] 영화 기생충에서 주인공 일가가 취직하는 과정이 딱 이 방식에 해당한다.[27] 예컨대 중세 프랑스 왕국에서는 치안판사나 지사 등을 돈 받고 임명하였고, 잉글랜드 왕국 역시 기사준남작 등에게 그러한 직무와 경비 부담을 떠맡겼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공식적 매관매직 제도는 근세 유럽의 군 조직, 특히 육군 전투병과의 임관 및 진급 제도로, 임관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근속 년수를 채운 뒤 돈으로 계급을 샀다. 그중에서도 영국 육군의 사례가 유명한데, 왜냐하면 사관학교를 도입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크림전쟁 때까지도 이 시스템을 유지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많은 삽질을 하였기 때문이다.[28] 그런데 이들은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아예 씨가 말라 버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실 주전충이 문벌귀족들의 씨를 마리기 위해 죽인 사람의 수는 비교적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이들 문벌귀족들이 하도 폐쇄적이라서 자기네들끼리만 통혼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29]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는 유교사상이 뿌리박혀있었고 유교사상은 왕이 폭정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왕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였기에 결과적으로 왕이 원하는 사상을 사회에 강요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울 일이 아니었지만 유럽은 봉건제가 뿌리깊게 남아있었기에 왕이 사회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고 봉건귀족 외에도 부르주아, 성직자, 길드, 대학, 도시, 장원 등 다양한 계급, 이익집단, 공동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절대왕정이라고 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이는 3세기 남짓한 기간에 불과했고 이것도 중국과 한반도에 비하면 별것 아닌 수준이었다. 당장에 절대왕정이라고 하는 시기에조차 유럽의 왕들은 저런 조직들을 복종시키진 못했다. 즉 애초에 유럽은 사회 전반에 기득권만을 위한 사상을 강요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에 지배층조차도 서로간에 이권을 다투기 일쑤였다. 만약에 왕을 향한 절대충성을 강요하려면 왕은 같은 지배층인 귀족, 성직자 등부터 복종시켜야 했지만 이들은 당연히 그럴리가 없었다. 만약 유럽에서 기득권의 이념을 반영한 과거 제도 같은 시험을 도입해봤자 사회 조직들은 신경도 안 썼을 가능성이 높다.[30] 정작 그렇게 해서 만든 현량과는 '우연히도' 조광조와 가까운 사람들만 선발되어 과거제만도 못한 결과를 낳았다. 단적으로 조광조와 가까웠던 안당은 자식 셋이 합격했다.[31] 양반이 되는 방법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방법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돈으로 족보를 조작하거나 직첩(벼슬 임명장)을 사서 신분세탁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과거, 최소한 소과라도 합격하여 유학호 지위를 얻는 것이다. 돈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로 눈을 돌릴수밖에 없다.[32] 당나라 시대에는 이미 명사들이 자신의 문집을 여러 고관들에게 바쳐서 인정을 받으면 과거를 응시하고 응시에서 대구로 아무 내용이나 써제껴도 유명하면 합격이었으며 신언서판으로 표현하는 문벌귀족들의 심사로 등용을 정했다.[33] Kaplan, Robert M.; Dennis P., Saccuzzo (2005). Psychological testing: Principles, applications, and issues (6th ed.). NY: Thomson Learning. p. 12. ISBN 0-534-63306-4[34] We could not see why the fact that the most enlightened and enduring government of the Eastern world had acquired an examination as to the merits of candidates for office, should any more deprive the American people of that advantage, if it might be an advantage, than the facts that Confucius had taught political morality, and the people of China had read books, used the compass, gunpowder, and the multiplication table, during centuries when this continent was a wilderness, should deprive our people of those conveni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