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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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貞杞
(? ~ 1288)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고려사 폐행 열전에 이름이 올랐다.
2. 생애[편집]
원종 때 과거에 급제한 임정기는 장흥부사에 임명됐는데 재임중 부친 임윤유(林允蕤)의 대상(大祥, 사후 2년째에 지내는 제사)을 지낼 때가 왔다. 개경으로 돌아가 상을 지내려면 관직을 포기해야 할텐데, 이를 걱정한 임정기는 내료(內僚)들에게 부탁해 임지 장흥에서 제사를 대신 지냈다. 한편 임정기는 장군 노진의의 딸을 두 번째 처로 들였다. 충렬왕 때 장군 노진의는 김방경을 무고했다가 원나라까지 다녀오는 등 일을 키웠고, 임정기는 장인의 죄에 연좌돼 파직됐다. 원거리 제사라는 파격 행보까지 보이며 관직을 지키려고 한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충렬왕 초에 파직된 뒤 바로 정랑으로 복직했는데, 감찰시사 김홍미와 좌사간 임행검이 임정기의 임명장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임정기와 마찬가지로 봉의랑 임명장이 전달되지 않은 고밀(高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내가 빚은 술을 권세가에 돌리며 청탁을 일삼는 인간이었다. 임정기 역시 이즈음부터 폐행을 벌이던 것으로 보인다. 임정기와 고밀은 응방을 통해 (둘을 임명하라는) 왕명을 받아와 서명을 독촉했으나 김홍미 등은 끝내 거부했고, 왕에게 직접 하소연한 끝에 충렬왕 5년(1279) 5월 섬으로 유배됐다.
임정기는 응방에서 전라도 왕지사용별감에 임명돼 전라도 곳곳에서 사냥에 쓸 매를 잡으러 다녔다. 임정기는 백성들을 착취하면서도 권세가에 몫을 떼어다 바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비난이 그치게 하기 위해 전라도에서 산출된 권세가의 전조(田租), 내고미(內庫米)를 신도구당사 한윤의를 시켜 80척 배를 동원해 예성강 하구까지 실어날랐다. 임정기의 봉사에 조정에서 그를 칭찬하는 말이 매일같이 이어졌으며, 충렬왕 또한 임정기를 깊이 총애했다. 경상도안렴사를 지내며 왕에게 아첨을 일삼은 민훤(閔萱)과 함께 붉은 띠를 하사받았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지금 원님이 찬 붉은 인끈은 다만 백성들의 고혈로 물들여 만든 것이로다."[1] 라고 했다. 곧이어 전라도안렴사에 임명됐으니, 당시 파견된 5도의 안렴사와 동계 안집사 여섯이 모두 허물이 뚜렷했다.[2]
한번은 귤나무 두 그루를 진상하기 위해 개경의 궁궐까지 소 12마리에게 끌게 하고[3] 여러 날에 거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귤나무는 당연히 말라죽어있었는데, 임정기는 나무가 고사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에게 아첨하려고 죽은 나무를 바쳤다.
관리에게 뇌물을 주려다 퇴짜를 맞은 일화도 있다. 승지 최수황에게 임정기는 배 한 척 분량의 백미를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최수황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평소에도 식사를 소박하게 했으니, "나는 왕의 하사품일지라도 받지 않았는데, 하물며 백성의 고혈은 어떻겠는가?"[4] 라는 말을 듣는다. 임정기는 부끄러웠지만 화도 났기에 그 쌀을 그대로 권세가에 바치고는 충렬왕 13년(1287) 2월 최수황 대신 승지 자리를 꿰찼다. 이를 본 당대 사람들도 비루하다고 여겼다.
같은 해 5월에는 국자감시의 지공거가 됐는데, 잘못된 시제를 여러 번 고쳐 망신을 샀다. 율부(律賦)의 시제로 "태종이 요순의 도를 좋아해 물고기가 물에 의지하듯 했으며 잠깐이라도 떨어질 수 없었다."[5] 에서 가져온 구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응시자들이 여섯 글자가 측음(則音, 仄音)이라고 했기에 부끄러워하며 시제를 고쳤다.好堯舜道 不可暫無
호요순도 불가잠무
이번에는 평음(平音)이 다섯 글자가 됐고, 응시자들의 지적에 또 다시 부끄러워하며 시제를 고쳤다.堯舜之道 如魚依水
요순지도 여어의수
시험관이 된 임정기는 품정(品呈)의 관례를 따라서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진기한 반찬과 화려한 과일로 사치를 부렸으며 취한 채 직접 춤을 춰 왕이 크게 기뻐했다. 12월 임정기는 부지밀직사사에 올랐고, 이듬해 충렬왕 14년(1288) 감찰대부가 더해진 뒤 10월 4일에 죽었다.好堯舜道 如魚依水
호요순도 여어의수
3. 평가[편집]
학문에는 어두웠지만 관리로서의 행정 능력은 있었다.[6]
『고려사』 권123, 폐행 열전.
아래의 혹평은 임정기의 죽음을 슬퍼하던 제국대장공주에게 비구니 홍씨가 곁에서 전한 말이다. 재상 홍휴의 딸로 과부가 됐다가 비구니로 출가한 홍씨는 남 험담하기를 즐겼는데, 제국대장공주는 궁궐 밖의 일을 전해듣기 위해 홍씨를 곁에 뒀다. 제국대장공주는 홍씨의 말에 낯빛이 바뀔 정도로 화를 냈다고 하니, 임정기가 권력자들 앞에서 보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임정기의 죽음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피로서 이룬 몸이니, 그 죽음은 마땅히 일어난 것입니다.[7]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 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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