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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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盧進義
(? ~ 1278)

1. 개요[편집]


고려의 무신.


2. 생애[편집]


원종 11년(1270) 김방경진도에서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려 할 때 종군한다. 그러나 중랑장 노진의는 전투는 치르지 않고 오히려 진도 백성들을 약탈해 재산을 챙겼고, 김방경은 노진의의 장물을 몰수하고 관아에 가둔다. 원종 15년(1274) 일본 원정에 나섰다가 물에 빠진 주장을 구하지 않고 익사하도록 내버려둔 죄로 직(職)을 뺏긴 전 대장군 위득유 역시 김방경을 원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방경을 모함하기로 뜻을 같이해 충렬왕 3년(1277) 흔도에게 그를 참소한다. 찬성사 도원수 김방경이 그 아들, 사위 등과 400명을 이끌고 충렬왕, 공주(제국대장공주),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진도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충렬왕은 찬성사 유경, 원부 등과 흔도, 다루가치 석말천구를 모두 불러 한자리에서 김방경을 심문한다.

조사 과정에서 무고였음이 드러나는데, 무기를 숨기는 등 일부 혐의를 논의한 끝에 장형을 일부 가한 후 모두 석방된다. 김방경의 부장 김천록이 노진의 등의 무고를 직감하고 비난했으며, 둘의 무고가 드러난다. 그런데 홍다구의 요청으로 둘은 처벌을 피했을 뿐 아니라 노진의는 장군으로, 위득유는 상장군으로 임명된다. 충렬왕 4년(1278) 3월, 노진의 등은 이번에는 "나라에서 베푼 담선(談禪)법회는 상국(원)을 저주하려는 것입니다."[1]라며 홍다구에게 고변한다. 안그래도 고려에 불만이 많았던 홍다구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원 중서성에 이를 알려 충렬왕을 소환한다. 이미 호종하는 신하들과 길을 떠나던 충렬왕에게 원세조는 김방경 부자와 노진의 위득유를 대동할 것을 명령했고, 홍다구와 내통이 의심되는 이분희·이습 형제가 왕을 겁박한 끝에 김방경을 소환해 동행하도록 한다.

노진의는 원으로 향하는 길에 일이 너무 커졌음을 직감했던 모양이다. 장물을 가져간 김방경 개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흔도와 석말천구 선에서 끝날 줄 알았지만 무고가 들통났고, 홍다구를 끌어들이려다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기에 이르렀다. 요가채(姚家寨)에서 노진의는 혀가 썩어들어가(爛) 죽음을 맞이하는데,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유언을 남기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2]

라고 했다. 노진의가 책임을 모두 자신한테 지우고 죽어버린 탓에 위득유는 먹고 자는것도 잊고 매일같이 탄식했다고 한다.


3. 가족관계[편집]


딸 노씨가 임정기의 두 번째 처[3]가 됐다. 임정기는 노진의의 무고죄에 연좌돼 파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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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國家設談禪法會, 所以咀上國也.[2] 吾以得儒至此.[3] 貳妻, 재혼 또는 첩이 된 것으로 보인다.